<?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mazinga님의 서재 (mazinga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340125</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기록을 위하여https://blog.naver.com/4497699</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hu, 15 Oct 2026 22:26:49 +0900</lastBuildDate><image><title>mazinga</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633401254090131.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63340125</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mazinga</description></image><item><author>mazinga</author><category>서평</category><title>비통함과 무(無)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비통함을 선택하겠어   - [야생 종려나무 - 예루살렘이여,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340125/17546607</link><pubDate>Wed, 30 Sep 2026 20: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340125/1754660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4950&TPaperId=1754660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70/8/coveroff/893746495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4950&TPaperId=1754660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야생 종려나무 - 예루살렘이여,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a><br/>윌리엄 포크너 지음, 권지은 옮김 / 민음사 / 2026년 04월<br/></td></tr></table><br/>『야생 종려나무』(권지은 옮김, 민음사, 2026, 1939, 436쪽 분량)는 윌리엄 포크너의 열 한 번째 소설로『소리와 분노』와 10년의 간극이 있다. 미시시피에서 주로 작품 활동을 하던 작가가 할리우드에서 간헐적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시기를 거쳐 집필한 작품이다. 총 10개 장으로 구성된『야생 종려나무』는 &lt;야생 종려나무&gt;와 &lt;노인&gt;을 교차 진행하는 독특한 구조다. 출간 시 출판사의 강요로 제목이 정해졌지만 포크너가 선택했던 제목은 시편 137편 5절에서 인용한 부제 &lt;예루살렘이여,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gt;이었다. 포크너가 두 작품을 각각 완결 후 재배치하지 않고 교대로 집필하였다는 점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지 작가의 의도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nbsp;  홀수 장에 묶이는 &lt;야생 종려나무&gt;는 첫 장과 마지막 장이 조응하며 수미상관의 구조로 만난다. 미시시피 남부 해변의 별장을 세놓고 있는 중년 의사의 관점에서 거주중인 샬럿과 윌본을 보여준다. 그의 눈에 비치는 두 사람은 정체도 관계도 모호해서 자신을 순수의 울타리에 갇힌 자로 여기고 진실을 가리는 베일을 상정한다. 마음의 평화 수호와 베일을 걷어낸 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관찰자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을 이들을 호기심과 적대감으로 주시한다. 가운데 3, 5, 7장은 두 사람의 여정을 보여주는데 인턴으로 근무 중인 해리 윌본이 스물일곱 생일날 들르게 된 파티에서 리튼마이어의 아내 샬럿을 만난다. 후에 샬럿은 윌본을 두 번째로 만났을 때, ‘책에서 읽었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았던 것’을 비로소 깨우치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샬럿은 “사랑과 고통은 같은 것이고 사랑의 가치는 그걸 위해 희생한 것들의 총합이라서, 사랑을 싼 값에 얻는 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나 마찬가지”(p.62)라 주장하며 둘만의 사랑을 완벽한 현재, 시간과 사회 규범에서 벗어난 상태로 만들어가려 한다.  &nbsp;  윌본은 샬럿의 충실한 추종자이자 동조자이며 연인이 된다. 사랑은 죽지 않고 죽는 건 연인들 뿐이라는 샬럿이 사고와 행동을 주도한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윌본의 성찰은 깊어지고 시카고에서의 안정으로부터 근본적인 질문을 끌어내는데, 샬럿이 주장한 미덕에 동의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사랑이 존재할 만한 장소는 없다, 인간이 사랑을 제거해 버렸다는 서술에 이어지는 부분은 기시감도 느껴지는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 에피소드가 연상된다. 포크너의 인장과도 같은 시간과 존재의 관계 탐구는 흥미롭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시간의 전류는 기억을 통해 흐른다는 발견은 후에 윌본의 지향이 된다. 10년 전 작품『소리와 분노』의 퀜틴 장에서 만났던 파편적 시간의 변주와도 연결된다. 결국 방향을 바꾸는 결단도 윌본이 내리고, 두 사람은 유타주 탄광촌의 경험해보지 못한 추위 속으로 들어간다.  &nbsp;  소설은 짝수 장에서 다섯 번 &lt;노인&gt;이야기를 펼친다. 미시시피주 교도소 농장에 수감되어 있는 스물다섯 살 정도의 키 큰 죄수는 기차 강도 미수 혐의로 십오 년 형을 받았다. 소설에 몰입한 나머지 내용을 직접 실행하다가 범죄는 시작도 하기 전에 붙잡혀 구속된 그는 이게 다 내가 읽은 책 때문이라며 작가들을 저주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정 무렵, 미시시피 주 마을 제방이 무너졌다는 소리를 들으며 강제 기상한다. 1927년 5월 미시시피 대홍수가 배경으로 &lt;노인(Old man)&gt;은 “미시시피 강”을 부르는 별칭인 &lt;Old Man River&gt;에서 가져온 제목이다. 간수는 두 죄수에게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여자와 지붕에 앉아 있는 남자를 구조해 오라고 명령한다. 배가 뒤집히며 익사했다고 보고된 그는 사망자 처리가 되었으나 살아 있었고, 작가가 신화적으로 묘사하는 압도적인 홍수와 싸우며 ‘나뭇가지에 매달린 여자 구하기’라는 임무에 몸을 던진다.   &nbsp;  3인칭 서술 중에 ‘이것이 칠 주 후(...)들려준 이야기의 내용이었다.’ 등 회고의 틀을 삽입하여, 현재의 사건과 훗날 전달된 이야기 사이의 시간적 거리가 드러나며 독자는 시야가 확대된다. 이야기는 더 입체적이고 생생해진다. 포크너가 중심으로 삼은 &lt;야생 종려나무&gt;와의 균형과 대조를 위해 집필한 &lt;노인&gt;은 분위기를 환기하고 독자를 새롭게 집중시킨다. 죄수는 홍수라는 자연재해를 당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경험을 쌓고 보이는 것 너머의 이면에 접근하는데, 특수한 현상과 일반적인 상태를 올바로 보지 못하고 착각해왔음을 느낀다. 인간은 얼마나 편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가 생각하며 자연에 대한 인식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는 구출한 여자를 맡기고 교도소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죄수의 복장만 보고 발포하는 사람들. 소통은 연거푸 실패한다. 우연한 만남이 더할수록 배움을 늘어 가는데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즐거움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왜 탈출하지 않고 계속 되돌아가려 할까. 자유로운 세계의 예측 불가능한 위험 보다는, 교도소에서 책임감, 명예심, 자부심 등의 미덕과 가치를 경험했다 여기고 받은 것을 돌려주기 원하는 죄수는 원칙과 약속을 가치로 선택한다. 다만 그의 선택은 충분히 존중받지 못한 채, 결국 ‘운이 없었던 일’로 치부된다.  &nbsp;  매 순간이 사랑만으로 완벽한 삶을 살고자 했던 샬럿, 깨끗하고 질 좋은 돌이나 청동을 오랜 시간 잘라서 뒷면을 볼 수 있고 직접 안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원했던 그녀는 여성이나 모성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자신의 본질로 받아들이기보다, 그와 무관하게 극히 개인적 선택과 실존을 밀어붙이고자 한다. 샬럿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명제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리튼마이어를 완전히 잘라냄으로, 즉 온전하게 상실함으로 다시 온전해졌다고 여겼듯이 임신이라는 현실도 같은 방식으로 되돌리고자 한다. 반면 &lt;노인&gt;에서 죄수는 헬레네나 살아 있는 가르보가 아닌 만삭의 익명 여성을 구조해 어떤 의학적 도움도 없이 출산을 돕고 아이를 보며 자신이 겪은 고난의 이유를 깨닫는다. 배와 여자를 끝내 돌려주지만 추가로 형까지 받는다. 아이러니한 결말을 넘어 타자의 인정과 무관하게 주어진 일을 끝까지 해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nbsp;  스물일곱의 윌본도 열여덟의 키 큰 죄수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으로 진입하였다. 윌본의 날들 역시 죄수가 예측 불허의 물살이 간직한 파괴적인 힘에 휩쓸렸듯이 다른 형태의 파도와 맞서야했다. 결코 배경이랄 수 없는 종려나무 잎은 마치 의식을 가지고 움직일 때를 정하듯이 샬럿과 윌본 곁에서 야생의 소리를 지르곤 했다. 윌본은 조용히 생각하는 잠깐의 정지상태를 수차례 반복하며 자신의 위치를 가늠했다. 성찰은 나침반처럼 다음 목적지를 가리켰고 그들은 호숫가에서 시카고로, 시카고에서 유타주 탄광촌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샬럿을 떠나보내고 눈앞에 놓인 몇 가지 가능성 가운데 윌본은 스스로를 가두는 길로 들어선다.  &nbsp;  의식을 닫지 않고 깨어있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무가 아닌 비통함을 택할지라도 기억하는 일은 잃어버릴 수 없는 대상을, 시간과 길과 소리를 어떤 의미에서는 조각해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샬럿의 작업과도 다르지 않다. 샬럿이 추구하던 예술을 윌본은 글쓰기로 치환함으로 생동감 넘치던 영원과 같았던 찰나들을 수집한다. 둘만의 추억도, 그 끝에 닥친 원하지 않았던 결과도 흘러가버렸다. 무엇보다 흘러내리던 육신과 먼지와 재로 무화하는 놀라운 속도 앞에서 무력했던 윌본은 직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차곡차곡 글이라는 용기에 담는다. 더 이상 흘러내리는 일이 없도록.  &nbsp;  포크너의 글에는 빈틈이 없다. 독자는 &lt;야생 종려나무&gt;를 읽으며 고조된 긴장이 &lt;노인&gt;에서 조금씩 풀어지면 바람이나 파도를 타듯 완급 있는 읽기를 경험한다. 숨을 돌린다. 감옥의 침대 끝에 걸터앉은 윌본이 온 세상 모든 비극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서술, 그럼에도 ‘작은 조각’에 집중하는 태도는 영웅적이다. 남은 자가 남겨진 삶을 견뎌낼 수 있는 하나의 힌트가 아닐까. 윌본에 못지않은 비극적 인물 리튼마이어에게 포크너는 비로소 지면을 할애한다. 그의 태도, 그의 고통, 그럼에도 지켜낸 약속이 울림을 남긴다. 그럼에도 특별한 감동은 윌본의 차지다. 포크너는 윌본의 성찰, 각성, 의지, 결심, 실천을 섬세하게 조명한다. 내내 치밀했던 작품은 결말에서 한 단계 도약하면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성실하고 미숙했던 청년이 단 세 줄로 요약되어있는 1년의 여정을 거치며 깨달은 것을 전할 차례다. 그는 종언을 고하는 기억을 멈춰 세운다. 이제는 마주할 용기가 있다. 기억을-이해하고-언어화할 수 있게 되었고-따라서 이제 다 괜찮았다는 진심어린 선언은 모든 쓰는 사람들의 푯대일 것이다.   &nbsp;  반면 &lt;노인&gt;의 죄수에게 포크너는 느낌은 간직하지만 ‘언어화할 능력이 없’다는 한계를 설정함으로 ‘없음’으로의 회귀를 막고 통찰을 간직하게 하는 언어화의 중요한 차이를 드러낸다. 윌본의 글쓰기,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글쓰기 아니었을까. 숨도 쉬어지지 않고 눈도 제대로 깜빡일 수 없는 중에 글쓰기만이 그에게 호흡이었을 테다. 읽혀서 돈으로 치환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글을 써온 윌본은 비로소 진짜 이야기를 쓴다. 기꺼이 비통함으로 걸어 들어간다. 포크너의 목소리가 겹치는 장면들이다. 포크너가 자신의 이별 경험에서 가져온 말인 “비통함과 무(無)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비통함을 선택하겠어.”를 &lt;야생 종려나무&gt; 파트의 마지막 문장으로 삼았기에 그에게는 더욱 의미 있는 작업이었을 것 같다.   &nbsp;  윌본의 선택은 어쩔수 없이『소리와 분노』에서 퀜틴 콤슨의 퇴장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존재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었다, 라는 말을 남겼던 퀜틴은 자발적으로 존재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10년 후 &lt;야생 종려나무&gt;의 윌본은 존재하기를 선택하고 존재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언어화함으로써 기억하고, 기억할 수 있기에 고통을 마다않고 ‘다 괜찮았다’라며 수용하는 입장이다. 퀜틴은 실현되지 못한 욕망과 시간의 굴레에 갇혀 자신의 혼란을 끝내 언어로 바꿔내지 못했고, 그래서 평화롭게 물속에 누워 뼈를 달그락거리고 싶다는 염원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퀜틴은 단독자이기 이전에 남부의 장자라는 상징을 짊어지고 있었고, 남부 몰락의 예표이자 종결이기에 다른 선택이 불가능 했을 테고, 동일선상의 비교가 부적절할지 모르나 안타까움은 여전히 남는다.   &nbsp;  『야생 종려나무』는 대표적인 장편들을 출간한 후, 후기 소설로 옮겨가는 전환축 역할을 하는 작품이라고 연구자들은 설명한다. 이 작품 역시 비선형적 서사, 의식의 흐름, 감각을 일깨우는 상징과 메타포(물 묘사 경연대회가 있었다면...), 흡인력 있는 만연체 문장을 만날 수 있고, 이에 더해 음악의 대위법 형식을 문학에 접목하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시도를 해낸다. 소리와 색채와 이미지가 풍부하고 극한의 온도까지도 글로 감각하게 만든다. 그 중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가 샬럿과 리튼마이어의 재회장면으로, 오듀본 공원 벤치에서 기다리는 윌본의 적극적인 상상으로 진행된다. 마치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 재구성하는 형식이 기억과 상상, 추측의 경계를 지우고 결합시킨다. 자유의지와 사랑, 실존을 향한 투신, 평판과 무관한 가치 실현 등 읽는 일 자체가 맞서고 격돌하는 인물들과 동행하는 경험으로 남는다. 무엇보다 읽기는 어떻게 사람을 나아가게 하는지, 결국 쓰기는 어떻게 구원이 되는지 숙고할 수 있는 작품이며 독자 역시 내 삶의 방향성을 살피기 위해 잠시 멈추어 설 것이다.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게 하라.”(시편 137:5)는 구약의 시구처럼 이제 윌본의 오른손은 칼이 아닌 펜을 들고 둘의 영원한 예루살렘을 기억하려 한다. 이제 우리 각자의 예루살렘을 불러낼 차례다.   &nbsp;    &nbsp;<br><br><br><br><br><br><br>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70/8/cover150/893746495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700890</link></image></item><item><author>mazinga</author><category>서평</category><title>비로소 온전히 읽는 &amp;lt;곰&amp;gt; - [내려가라, 모세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340125/17497178</link><pubDate>Sun, 06 Sep 2026 07: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340125/1749717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138336&TPaperId=1749717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31/79/coveroff/k17213833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138336&TPaperId=1749717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내려가라, 모세여</a><br/>윌리엄 포크너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26년 05월<br/></td></tr></table><br/>윌리엄 포크너의 중편소설『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면 아이작 매캐슬린이 다시 찾아온 숲에서 ‘할아버지’를 부르는 부분일 것이다. 주인공 소년의 성장과 선택은 울림을 전하지만 한편으로는 늘 미진함이 남았다.『곰』은 연작 장편 『내려가라 모세여』에 속한 작품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완결되어 있으면서도 전체 구성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드디어『내려가라 모세여』를 통해 온전한 형태의『곰』을 읽는다. 한 사람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4대에 걸친 한 가문의 연대기로, 남부의 실상으로, 나아가 한 나라의 역사로 확대된다. 구약의 출애굽기 내용을 모티브로 하는 유명한 흑인 영가 “내려가라 모세여(Go Down, Moses)”를 제목으로 삼은 이 소설은 총 일곱 개 단편이 묶였으며 표제작을 가장 마지막에 놓았다.  &nbsp;  『내려가라 모세여』(조호근 옮김, 서커스, 2026, 504쪽 분량)는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세 가지 선물을 마련해둔다. 그 자체로 감동적인, 포크너가 자신의 유모 캐롤라인 바에게 보내는 (유일한) 헌사에서 독자는 잠시, 어쩌면 한참을 멈출지 모른다. 다음으로 윌리엄 포크너를 읽으면서 그려보고 찾아보고 궁금해 했을 매캐슬린 가문 가계도와 아이작 매캐슬린 연표다. 가계도도 그렇지만 연표를 읽으며 과연 어디까지 표기하였을지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안도감도 준다. 가계도를 쥐고 힘차게 읽을 일만 남았다.   &nbsp;  『내려가라 모세여』는 3대 걸작으로 꼽히는『소리와 분노』(1929),『팔월의 빛 』(1932), 『압살롬, 압살롬!』(1936) 출간하고 수년이 지난 1942년 작이다. 남북전쟁 이후 남부 귀족 콤슨 가의 몰락을 그렸던 작가는 다시 한 방울의 법칙이 증언하듯 그들만의 기준을 세우고 폭력을 행사하는데 거침없었던 남부의 부조리를 기록했다. 이어 ‘백인의 양심’이라고도 불리는 아이작 매캐슬린을 중심으로 매캐슬린 가문의 불의와 그로 인해 치러온 무고한 희생에 천착한다.   &nbsp;  첫 작품 &lt;옛 일&gt;은 아이작보다 열여섯 살 연상인 사촌 형 매캐슬린 애드먼드가 훗날 전해줄 에피소드다. 벅과 버디 형제는 관찰자인 소년 매캐슬린과 함께 주기적으로 도망치는 흑인 노예 토미네 털을 데려오기 위해 뒤쫓는다. 개와 여우가 뒤섞인 실내 추격 소동을 작품 전 후반에 배치하고, 흑인 노예를 추격하는 상황을 나란히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를 추측케 한다. 한 편의 소동극처럼 유쾌하게 전개하면서도 인권의 개념이라고는 없는 노예제 시대에 카드 시합으로 사람을 취하는 비정한 실상을 비판한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관계는 또 다른 단편을 보탤 때 전체 퍼즐이 모양을 갖춰간다.  &nbsp;  &lt;불씨와 화덕&gt;은 예순 일곱 살 루카스 비첨(루카스 보챔프)이 중심 인물이다. 그는 &lt;옛일&gt;의 토미네 털과 카드 게임에 이겨서 데려올 수 있었던 테니의 아들로 몰리 비첨과 결혼하여 경작지를 일구는 한 편, 금주법 시대에 밀주를 만들며 눈속임을 하고 있다. 에드먼즈 농장에서 소작농으로 지내면서도 매캐슬린의 후손이며 아이작 노인과 동류라고 여긴다. 캐러더스 매캐슬린, 즉 옛 캐스 노인은 아내와 노예, 백인과 흑인에게서 각각 후손을 보았다. 혈연 관계임에도 유지되는 지배 종속 구조를 루카스는 내심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야말로 아이작과 동류라고, 후에 로스 에드먼즈 역시 루카스를 캐러더스 노인의 후계자이자 원형이라고 본다. 루카스의 회고는 아내 몰리가 어머니를 잃은 아기 로스 에드먼즈를 위해 그들만의 “불씨와 화덕”을 떠나있던 시간을 아로새긴다. 몰리의 헌신은 어린 아이에게 불씨가 되어 주었으나, 루카스에게 그 시간이 회복될 수 있을까. 로스 에드먼즈는 자란 후 금화 찾기에 눈이 먼 루카스의 비이성에 제동을 걸지만, 루카스가 스스로 멈추고 돌이킬 때 비로소 문제는 잦아든다.   &nbsp;그가 회심하는 계기는 성경 말씀에 기인한다. 탐욕을 거침없이 행사했던 선조 캐러더스 매캐슬린이 있었고, 한 사람으로 인한 갈등과 고통은 긴 시간을 내려왔다. 모세가 노래하는 시편은 인간 실존의 한계와 덧없음을 겸손하게 수용하는 고백이다. 포크너는 오만한 인간의 역사와 대비되는 현실 인식과 통찰로 &lt;불씨와 화덕&gt;을 맺는다. 몰리 비첨은 작가의 유모를 가장 깊이 반영하고 있는 캐릭터로 인상 깊다.   &nbsp;  &lt;검은 어릿광대&gt;는 제재소 일꾼들의 우두머리인 24살 라이더가 죽음을 맞은 아내 매니를 묻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소설은 라이더의 움직임을 따라가는데 동일한 말을 반복한다. 전 괜찮아요-이제 그가 괜찮기 때문이었다-그러니 이제 다 괜찮았다-그러나 그것도 괜찮았다는 184~193페이지의 반복은 그가 얼마나 괜찮지 못한지를 역설한다. 그는 백인 버드송이 벌이는 주사위 게임 속임수에는 제동을 건다. 2장은 결론을 보여주고 회상하는 역순행 구조로 ‘깜둥이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야’로 시작하는 문장은 편견은 그대로임을 보여준다. 보안관보가 그의 아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앞서 독자가 확인한 라이더의 고통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사람들은 실리와 계산속으로 움직이고 가장 편한 방식으로 결론을 손쉽게 단정한다. 한 인간의 죽음이 식후 영화 감상만도 못한 현실을 포크너는 비판한다.  &nbsp;  &lt;옛 일족&gt;은 열 두 살 소년 아이작 매캐슬린(아이크)이 첫 사냥에 성공하고 일흔 살 샘 파더스로부터 축복 의식을 받던 과거 이야기다. 이 의식을 통해 아이작은 대지에 묻힌 다음에도, 즉 죽음을 초월해서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약속이자 상징을 공유하게 된다. ‘일족들’은 샘 파더스가 자신의 혈족을 설명할 때 부르는 치카소족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그는 소년에게 자신의 선조들과 본인의 출생, 이름에 얽힌 일화를 다섯 가지 항목, 한 페이지 정도 분량으로 요약한다. &lt;포크너 자선 단편집 1&gt;의 3부 “야생”편 소속 단편들에서 구체적으로 만나볼 수 있는 역사에 속한다. 아이작과 샘 파더스가 사슴과 만나는 장면은 샘 파더스 사후 아이작이 숲에서 뱀을 만나는 &lt;곰&gt;의 절정 장면의 예표다. 아이작은 사슴과 마주했던 장엄하고 비현실적인 순간을 사촌 형 매캐슬린에게 전하며 불신을 예상하며 초조해한다. 매캐슬린은 이 대지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 삶과 기쁨, 다시 대지로 돌아가는 순환을 이야기한다. 비탄과 고통도 따를 거라면서 고통과 비탄조차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삶보다 더 끔찍한 유일한 것”(p.233)은 유감스러운 “비존재” 뿐이라고 덧붙인다.   &nbsp;  &lt;곰&gt;은 총 5장으로 1장 첫 단락에서 주요 인물을 소개하며 인상적인 서막을 연다. 같은 피, 미천한 혈통, 더러워지지 않고 타락할 수 없는, 등의 단어가 인간에게만 한정하지 않고 동물에도 적용할 뿐 아니라 점차 확대될 것이다. 아이작은 멘토인 샘으로부터 무서움과 두려움의 차이를 배우고, 포기에 대해서도 판단하고 실천한다. 우선 총을, 이어 시계와 나침반을 포기한 소년은 이후 결정적 포기를 행한다. 소년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어져 온 ‘파괴와 잔해를 헤치며 기관차처럼 달려가는 곰’이라는 서술, 황야와 곰에 대한 사유를 중독성 있는 포크너 특유의 문체로 전한다. 부연에 부연을 거듭하면서도 초점을 놓치지 않는 문장을 만난다. 곰의 메타포는 쌓이고 쌓인 끝에 멸망한 트로이의 마지막 왕인 프리아모스에게까지 닿는다. 3장에서 이름까지 얻은 전설적인 곰이 죽음을 맞고, ‘분과 마찬가지로’ 라는 수식을 받았던 라이언이, 그리고 원인을 알 수 없이 쓰러진 샘 파더스도 삶을 마친다.   &nbsp;  포크너는『곰』을 다른 단편집에 독자적으로 수록할 때는 4장을 삭제하도록 권고했다고 한다. 4장의 공간적 배경은 야생에서 경작지, 그 중에서도 배급소로 바뀌고 스물한 살 아이작과 사촌 형 매캐슬린 에드먼즈가 마주하고 있다. 아이작은 자신의 권리, 상속권을 포기하고 양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며 이유를 하나하나 밝힌다. 1865년의 일, 즉 남북전쟁 종전과 노예제 폐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 ‘일 따위는 개의치 않고’ 차별과 압박의 구조는 계속되는 현재, 둘의 논쟁은 치열하다.   &nbsp;  4장의 핵심이랄 수 있는 장부 읽기는 희미한 형체와 불완전한 철자법으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필체이지만 참담한 증거를 기록한다. 앞서 읽었던 단편의 등장인물들이 다시 찾아오는 느낌이 든다. 소폰시바의 불행 역시 아이작은 해결하지 못한다. 다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책임을 지고, 선의를 다할 뿐이다. 노예의 이름을 기록한 장부는 그 사람들이 육신을 입고 나타나는듯 생생한데, 포크너는 호명하고 기록함으로 진실과 그들의 흔적을 기억하고, 기억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nbsp;  아이작 매캐슬린은 가문의 장부 기록 위에 성경을 겹쳐 해석하고, 노예제와 남북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덧댄다. 피로 밑줄을 쳐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구나, 라는 창조주의 음성을 가정하면서 장부에 새겨진 이름 뿐 아니라 행간과 여백까지 읽어내려 애쓴다. 결국 그의 상속 포기는 애초에 누구의 것도 아니었기에 그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다는 확인이며 자명한 논리로 수렴한다. 그의 멘토이자 실질적 부성을 상징하는 샘 파더스로부터 배운 덕목이기도 하다. 권리 포기는 다음 세대만큼은 자유롭게 하리라는 소망에 가능성을 열어준다. 가능성이 실현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nbsp;  &lt;옛 일족&gt;에서 인간보다 훨씬 큰 키로 우뚝 선 채 샘을 바라보았던 수사슴 장면을 아이작은 기억해낸다. 6년 전이다. 아이작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뱀을 향해 “추장님.” 그리고 “할아버지.”(p.418)라고 부른다. 포크너는 이토록 섬세한 작품의 결말을 분 호건백으로 맺는다. 이성을 잃은 듯한 분의 행동은 사유하지 않는 탐욕과 집착을 보여주는게 아닐까.   &nbsp;  &lt;삼각주의 가을&gt;은 너무 궁금했던 노년의 아이작 매캐슬린 이야기이다. 칠십이 넘은 아이작 매캐슬린은 예순 번이 넘도록 11월이면 여전히 야생의 자연으로 돌아온다.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변화하고 대체되었음에도 자기 소유의 총을 가지고 삼각주 모양의 구역으로 축소된 숲으로 향하는 일은 계속된다. 무엇보다 야영지를 향하는 차를 운전했던 로스 에드먼즈가 길에서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던 이유가 드러난다. 역자가 도표화한 로스 매캐슬린 가문 가계도에서 제일 밑에 제임스 비첨의 손녀로 ‘딸’이, 그리고 오른쪽 끝에 로스 에드먼즈가 연결된다. 로스의 선택은 캐러더스 매캐슬린 노인의 행동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독자의 기대도 급격히 식는다. 선의는 열매를 맺는지, 역사는 반복하지만 발전하는지, 과거로부터 배우기는 가능한지 경종을 울린다.  &nbsp;  포크너는 표제작 &lt;내려가라 모세여&gt;를 마지막에 놓으며 마무리한다. &lt;“우리 벤저민을 팔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이집트에 팔았어요.” (...) “로스 에드먼즈가 우리 벤저민을 팔았어요.” (...) “파라오에게 팔아서 이제 그 아이는 죽었어요.”&gt;(p.477) 유사한 문장이 반복되는데 애통하는 마음이고 애도의 서와 다름없다. 성경에서 이집트(에굽)에 팔린 야곱의 아들은 요셉인데 몰리는 벤저민을 팔았다 되뇐다. 요셉의 동생이고 야곱의 사랑하는 막내아들 벤저민이어서 상징적으로 표현했을지도 모르겠다. 게빈 스티븐스의 통찰은 공감과 이해, 존중이 선행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아이작 매케슬린이 백인의 양심을 대변한다면 공동체의 아픔을 존중하는 게빈 스티븐스는 새로운 남부인의 희망을 뜻한다는 평가도 공감하게 된다.   &nbsp;  작가는 매캐슬린의 목소리를 빌어 고통과 비탄조차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다. 사과하는 스티븐스에게 워셤 양은 괜찮다며 “비탄은 우리의 몫이기 마련이니.”(p.478)라고 답한다. 작가의 또 다른 소설 &lt;야생 종려나무&gt;는 “비통함과 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비통함을 선택하겠어.”(p.391)라는 해리 윌본의 생각으로 맺는다. 비통함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으니 기억하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이작 매캐슬린은 과거 매캐슬린 가의 시조인 옛 캐스 노인의 악행이 촉발할 비탄의 시간을 속죄하는 의미로 권리를 포기하였으나 아이작의 노년에 회귀하는 죄성을 목격한다.   &nbsp;  역자의 말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포크너의 유모 캐롤라인 바 관련 자료다. &lt;소리와 분노&gt;에서 그 복잡한 콤슨 가의 상흔을 네 번째 딜지 섹션에서 그녀의 목소리로 아울렀듯이 몰리 비첨에게서, 또 어린 로스 에드먼즈의 일화에 자전적인 서사와 감정을 입힌다. 이 책은 캐롤라인 바에게 보내는 헌사로 시작해서 비문의 글로 맺는다. 작가가 “한 편의 온전한 장편 소설”로 간주하였던 &lt;내려가라 모세여&gt;는 중·단편 일곱 작품을 오가며 묵직한 주제를 반복하고 변주한다. 주제를 담아내는 형식은 포크너 소설 독자라면 익숙할 것이다. 의식의 흐름이나 감각적 심상의 증폭, 다양한 메타포, 처연할 정도로 짙은 서정성, 행갈이나 최소한의 힌트도 없이 시간을 왕래하며 장면 전환하는 반복, 그리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 자신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느낌이나 기분, 수치심이나 불편함까지 언어화하는 정밀함 등 읽고 또 읽게 하는 문장들이다. 윌리엄 포크너 애독자라면 비로소 읽게 되었다고, 보물 같다고 아낄 책이다. 포크너라는 불씨는 빛도 열기도 스러지지 않을 것이다.   &nbsp;    &nbsp;    &nbsp;<br>  <br><br>  &nbsp;    &nbsp;책 속에서&gt;<br>(...)그러다 문득 그는 자신이 왜 땅을 조금도 원한 적이 없는지를, 많은 사람이 진보라고 부르는 것을 왜 수용하지 않는지를, 자신의 수명을 이 땅의 궁극적인 결말에 맞춰 가늠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지금 가진 정도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두 존재를 -자신과 야생의 자연을- 같은 나이로 여기고, 자신의 삶을 사냥꾼이자 숲사람의 그것으로 간주하며, 자신이 태어나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위 세대로부터 전해져 온 것이라고 기쁘고 겸손하고 환희와 자긍심을 담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p.445)  &nbsp;    &nbsp;  <br><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31/79/cover150/k17213833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3317951</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