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다정한 그림책 - 나에게 친절하고 싶은 당신에게
이상희 외 지음, 김경태 사진 / 새의노래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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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다정한 그림책』 (사진:김경태, 새의노래, 2023, 288쪽 분량)은 이상희, 최현미, 한미화, 김지은, 네 명의 저자가 공저한 그림책 에세이다. 다정함에 초점을 맞춘 그림책 서평 모둠, 즉 소개이자 추천의 책이기도 하다. 독자는 한 권의 책을 소개받을 때마다 미묘한 마음의 변화를 알아차리게 된다. 때로는 큰 폭으로 울렁이고, 때로는 잔잔하고 끝없이 일렁이는 경험을. 발견하는 기쁨은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옅어지지 않는다. 저자들을 지금은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어른의 그림책 읽기'판을 다진 사람들이라고 칭하기도 한다.(출판사 소개) 시인이자 그림책 작가, 번역가 이상희, 기자이자 작가인 최현미(너무 좋아하는 책<아이스크림 여행>번역자라니 갑자기 만면미소가 피어난다), 어린이책 평론가이자 출판평론가 한미화, 아동문학평론가이자 대학 교수로 저술과 함께 좋은 책을 찾아내 독자에게 안내하고 있는 김지은까지 그림책 현장을 지켜온 분들이다. 그림책의 아름다움을 전했던 『이토록 어여쁜 그림책(2016)』의 다음 이야기는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으로 알차게 묶였다.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은 다정함을 주제로 한 그림책 서른 권을 네 명의 저자가 번갈아 소개한다. 글마다 그림책 앞 표지 사진에 한 면을 할애한다. 펼친 본문 두 면을 뽑아 책 안의 책처럼 삽입해서 직접 대상도서를 읽고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1장,“나에겐 소중한 기억이 있어”에서는 기억과 추억을 불러낸다. 글은 책의 물성, 형식도 다루지만 등장 인물들의 서사에 깊이 이입하며 책 속 시공간 여행에 온전히 빠져든다. <할머니의 식탁>에서 이상희는 오무 할머니는 스튜 냄새 뿐만 아니라 “주체할 수 없는 모성이 무수한 ‘다정’의 입자를 발신”(p.30)했을거라고 전한다. 심리학자 베티나 파우제의 책으로부터 코는 평화의 대변인임을 실감하고 팬데믹이 퍼트렸던 후각, 미각의 기능장애마저 나을 것 같다고 한계를 확장한다.

김지은은 조던 스콧의 <할머니의 뜰에서>를 찬찬히 보여준다. 보살피던 이가 보살핌을 받게 되는 역할 전환의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고 예외란 없다. 고요하고 따듯한 서사를 따라갈 때 깊은 숨이 쉬어진다. “여러분은 할머니의 다정함을 무엇으로 기억하고 있나요. 할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어떤 시간보다 빨리 사라져버립니다. 할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지금 어서 전화를 드려보세요. 더 많이 웃고 손잡고 자주 안아드리세요. 할머니에게는 그런 웃음과 포옹이 가장 큰 선물일 거예요.”(p.39) 이 부분을 사진 찍어서 딸들에게 보냈다. 할머니에게 전화 드리자, 얘들아.

2장,“내 곁에 다정함이 살고 있어요”에서는 우리 마음에 안부를 묻는다. 근심으로 시무룩해 있는지,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귀찮은지, 다시는 날아오를 수 없다고 느끼는지 물으며 마음을 살핀다. 버나드 와버의 여운 깊은 글과 이수지의 찬란한 그림이 함께한 <아빠, 나한테 물어봐>가 반갑다.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책꽂이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도서관까지 함께 간다. 3장, “나를 믿고 뭐든 해봐요.”편에서는 나도 한 번 해볼까, 라는 마음이 들 것이다. <물 속에서>는 물과 한 몸되는 기쁨이 생생하고 <에페의 심부름 가는 길>은 에페의 심부름에서 ‘오디세이아’같은 서사시(p.151)와 같은 씨앗을 발견하게 된다. 미션완수의 과정과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4장 “다정함을 만나러 가요”에서는 본격적으로 다정함을 감각한다. <오토의 털 스웨터>는 그림으로, 스웨터의 무늬로 오로라를 만난다. 오로라는 하늘에 떠있는 장관일 때 보다 아껴주는 마음, 진실한 관계를 증명하는 매순간 빛난다. <여행의 시간>, 몰랐으면 어떡할 뻔 했나! 마지막 5장 <너에게 다정하고 싶어.>에서 여섯 작품을 나누며 다정한 세상으로 쑤욱 나아간다.

한때 힐링이라는 말이 대표 꾸밈말로 쓰였던 것처럼 이제는 다정함이구나 싶었다. 새삼 브라이언 헤어와 바네사 우즈의 선한 영향력에 놀랍기도 했다. 하지만 다정함에의 갈망은 언제나 생존본능처럼 우리 곁에 존재했던 것 같다. 이미 알았을 테지만 각성하고 끌어낼 수 있는 동력을 제공했던 계기가 두 저자인 셈이다. 다행이다. 기타 그림책 안내서와 이 책의 가장 눈에 띠는 차별점은 접근하는 방식에 있다. 관점인데, 그들이 “육아를 학습을 치유를 어떻게 얼마만큼 도울 수 있다”는 시선이 도구로서의 그림책, 목표 지향적 읽기를 내포하고 있다면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은 다른 결을 보여준다. 즉 그림책의 본질, “원형질”(p.9)인 “다정”에 집중한다. 그림책 세계에 고스란히 빠져들었을 때 자연스럽게 발화하는 감동을 나누겠다는 방향대로 책은 안온한 파도 속으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구입할 책 장바구니가 찰랑찰랑 차오를 차례다. 이미 알았지만 재발견함으로 손 가까운데 끌어둘 작품과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인 명작이 한 곳에 모였다. 저자들의 그림책 사랑과 연결하고 발견해온 열정, 기록하고 나누어준 정성 덕분이다. 그 정성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양장 표지(겉싸게를 분리하면 표지가 무척 아름답다)와 넉넉한 판형 등 장정에서, 작가 김경태의 사진에서, 활자의 크기와 여백까지도 독자를 배려했다. 처음에는 그림책 입문자를 위한, 필요할 때 찾아볼 ‘참고서’격이겠다고 펼쳤다. 그런데 마치 교과서처럼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때로 낭독하며, 때로 멈추며, 때로 수첩 모퉁이에라도 옮겨 적으며! 폭력과 슬픔이 만연한 세상일지라도 이 다정한 씨앗이 단단한 동아줄처럼 우리 삶에 드리워지기를.

책 속에서>

맛있는 복숭아를 만나거든 린 할머니를 떠올리기로 해요. 저온에 약하고 쉽게 무르는 복숭아는 보관이 어렵습니다. 냉장고에 두어봤자 단맛이 덜어지기만 합니다. 물론 병조림을 할 수도 있지만 잘 익은 복숭아와는 맛이 다르지요. 복숭아는 잘 익었을 때 남김없이 먹어야 합니다. 복숭아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린 할머니처럼 말이지요.(린 할머니의 복숭아나무/한미화/p,123)

여름은 길고 무더위는 견디기 어려우니 우리에게는 서늘하고 우아한 유령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윌리엄 볼컴이 1970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모하면서 작곡한 음악 <우아한 유령Graceful Ghost>과 함께 이 그림책을 감상하시기를 권합니다. 여러 연주가 있지만 제가 추천하는 것은 양인모와 홍사헌의 연주입니다.(우리 집에 유령이 살고 있어요!/김지은/p.267)

 



(신간 서평단_출판사 도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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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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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버킷 리스트가 자주 회자되었다. 백 개의 목록을 작성하기도, 체크리스트 형식으로 달성 날짜를 기록하며 지워나가기도 했다. 버킷 리스트를 작성할 때면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귀찮다는 생각, 헛짓이니 이럴 시간에 지금 할 일을 해라 등 내면의 소리가 울렸지만 두근거림, 말하자면 근거 없는 떨림도 무시 못했다. 버킷 리스트 칸이 백 개라면, 아니 천 개라도 단 하나만 거듭 적었을 사람이 있다. 바로 제이 개츠비로 이름을 바꾼 제임스 개츠다. 그는 리스트를 데이지라는 이름 하나로 빼곡히 채운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요술램프의 지니 역할을 시작한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김영하 옮김,문학동네, 2009, The Great Gatsby, 1925년, 252쪽 분량)』는 시간을 되돌려 스스로를 구원하려다 추락하고 마는 이야기가 마치 포물선처럼 그려진다. 곡선의 끝은 ‘없음’으로 수렴하기에 이전 모든 점이 간직한 치열함은 독자의 속을 쓰리게 한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미국문학의 ‘잃어버린 세대’ 작가로 1차 대전 이후 방황하던 지식인 그룹을 속한다. 여기에는 헤밍웨이, 포크너 등도 이름을 올리며 뉴욕을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소설 <맨해튼 트랜스퍼>의 존 더스패서스도 같은 시기의 작가다. 그는 재즈 시대로 불리는 1920년대, 눈부신 경제 성장과 도덕적 타락이라는 빛과 그림자가 혼재하던 시기를 통과했고 『위대한 개츠비』는 특정 시기, 떠오르는 신생 강대국의 초상을 가감 없이 포착한다. 작가는 딘빌리어스를 인용한 제사 앞에 “다시 젤다에게”라는 헌사를 더한다. 개츠비와 데이지에게서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젤다의 투영을 찾아볼 수 있다. 역자인 김영하는 삼 년간 매달렸던 『위대한 개츠비』의 실패가 젊은 작가 피츠제럴드의 기를 결정적으로 꺾었다고 해석한다. 1920년 『낭만적 에고이스트』를 개작한 첫 장편소설 『낙원의 이쪽』을 발표한 뒤 세 편의 장편을 더 쓰고, 생계를 위해 수많은 단편을 발표했는데 작가의 이른 죽음 이후 대표작은 단연 『위대한 개츠비』가 된다.

소설의 화자 닉 캐러웨이는 도시의 불켜진 노란 창을 올려다보며 궁금해하는 자, “놀랍도록 다양한 인간사에 매혹당하는 한편으로 진절머리를 내면서”(p.50)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밖에 있는자라고 스스로를 인식한다. 화자는 아버지의 충고대로 감정을 개입하지 않으며 이해하는 태도로 그들을 본다. 그 기록이 이 소설이라는 설정이다.이웃인 제이 개츠비, 먼 친척 조카뻘인 데이지, 그녀의 남편이자 폴로선수로 소개받는 톰 뷰캐넌, 톰의 불륜상대 멀턴과 멀턴의 남편, 조던 베이커와의 시간은 뜨거운 여름을 통과해 가을의 초입에 이를 때 많은 것은 달라진다. 동시에 그 무엇도 달라지지 않은 채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도 있다.

제이 개츠비의 파티는 모두에게 허용되어 있다. 밤을 밝히는 파티는 무료개장 놀이공원처럼 반짝임으로 소란스럽다. 개츠비는 모두를 환영하지만 단 한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가 처음으로 만났던 ‘상류층’여자 데이지다. 데이지라는 존재 때문에 그녀의 집은 세상에서 가장 신비롭고 유쾌해 보였고 도시는 우수어린 매혹으로 가득 찼었다. 게츠비는 무일푼이라는 정체를 감추고 자신을 믿고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영영 놓쳤고, “그녀를 뒤에 남겨두고 간 듯”(p.188)한 느낌은 여전히 아물지 않는다. 잃어버린 보석, 유일무이한 존재 되찾기는 생의 사명이 되고 과도하게 뚜렷한 목표는 비현실적인 계획에 엔진을 달아준다. 초록색 불빛은 북극성만큼이나 재고의 여지 없는 진리가 된다. 개츠비는 플라자 호텔 스위트 룸에서 자신과 데이지의 사랑이 세상에 선포되기 원했다. 그의 맹목은 브레이크가 없다.

개츠비를 하나의 이미지로 치환한다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한 장면으로 각인시켰듯이, 바로 ‘미소’일 것이다. 닉이 개츠비를 처음으로 인식하는 순간을 압도했던 미소다. 그 미소는 “사려 깊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긴 미소”이며 “변치 않을 안도감을 주는, 일생에 네 다섯 번쯤 밖에 마주치지 못할 드문 성질의 것”(p.64)이다. 제이 개츠비가 톰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입고난 후 닉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찬사를 전했을 때 게츠비는 모든 걸 이해한다는 “찬란한 미소”(p.190)를 짓는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희소하고 찬란한 만큼 찰나적이다.

한편, 데이지라는 캐릭터는 목소리가 인물 자체다. 작가는 인물의 기분과 상태, 분위기와 의도, 열망과 진실, 거짓이나 번복을 목소리로 그려낸다. “그녀의 음성은 뭐랄까, 귀가 따라가며 알아서 맞춰 들어야 될 것 같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흘러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다시는 연주되지 않을 음정들의 배열 같았다.”(p.21) 개츠비가 정확히 보았듯 “돈으로 충만한 목소리”이기에 매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데이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범주 안에서, 그 영역이 빛나는 것들로만 꾸려진 덕에 힘들이지 않고 부(富)에서 부(富)로, 편안함에서 편안함으로 아쉬울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갈 뿐이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경솔함이라고? 의식 자체가 없다.

소설은 꿈을 현실로 믿어버린, 믿기로 작정하고 자기만의 성 쌓기에 스스로 갇힌 희망의 극점을 보여준다. 희망은 거의 절망적인 기운을 띤다. 또한 어리석어 보일만큼 순수와 맞닿아 있어 독자는 개츠비에게 연민을 갖게 된다. 꿈을 향한 그의 헌신은 현실감각을 잃을 만큼 처연하다.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닉을 제외하고 그의 곁을 스쳤던 것은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파티가 열리던 여름, “이 모든 사람이 그 여름 개츠비의 저택에 찾아왔었다.”(p.81)라고 적은 닉의 다이어리는 책의 두 면 이상을 할애해 방문자들을 열거한다. 작가는 왜 이토록 또박또박 별로 중요할 것 없어 보이는 이름과 행적을 기록했을까. 개츠비의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의 삶의 끝에 받아야 마땅한 일말의 강렬한 개인적 관심”(p.202)은 그들 중 단 한 명만 표했다. 무참한 노릇이다. 재즈 시대, 흔들리는 운율처럼 명멸하는 익명의 군상들이다.

“나는 뉴욕이라는 도시, 밤이면 역동적이고 모험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남자와 여자, 자동차들이 쉴새없이 몰려들며 눈을 어지럽히는 이 도시를 사랑하기 시작했다.”(p.74)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뉴욕의 다채로운 묘사다. 감각적인 그림이 눈앞에 그려지고 그 안에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화려한 도시는 작고 더러운 강이 흐르는 잿더미 계곡과 대조적이다. 데이지와 톰이 거처하는 이스트에그와 개츠비의 저택이 있는 웨스트에그의 대조는 전통적 부유층과 신흥 부자들의 대치를 보여준다. 동부로 향했지만 개츠비와 일련의 사건을 겪고 다시 중서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화자 닉 캐러웨이의 회귀도 주요 테마다.

소설은 활자로만 읽히지 않고 1920년대, 전쟁 후 미국의 도취를 불러일으킨다. 두 번 영화화 되어 어떤 페이지에서는 자동으로 영사기가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데이지의 목소리가 일으키는 끌림에 침몰하는 개츠비의 미소 외에도 많은 발견을 하게 될 것이다. 김영하 작가의 번역이 더욱 입체적인 간접 경험을 가능케 한 면도 있다. 평론가 신형철은 매년 한 번씩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다고 한다. 이미지, 상념, 현상, 어른거리는 심상을 명료하게, 게다가 간결하게 활자화시킨 문장의 향연이다. 세 번째 읽는 개츠비가 마치 초독인 듯 새로워서 일 년에 한 번은 아니어도 다시 돌아와 펼칠 것 같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존 더스패서스의 <맨해튼 트랜스퍼>를 함께 읽는 것도 추천한다. 그곳엔 지미 허프와 앨런이 있다.

책 속에서>

나는 더 이상 타인의 내면을 우월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요란하게 이러쿵저러쿵하고 싶지 않았다. 오직 개츠비, 이 책에 자신의 이름을 제공한, 내가 진심으로 경멸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 개츠비, 그만이 예외였다. 인간의 개성이라는 게 결국 일련의 성공적인 제스처라고 한다면, 그에겐 정말 대단한 것이 있었다. 1만 마일 밖의 흔들림까지 기록하는 지진계처럼 그는 인생에서 희망을 감지하는 고도로 발달된 촉수를 갖고 있었다. 그러한 민감성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미명하에 흔히 미화되곤 하는 진부한 감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희망, 그 낭만적 인생관이야말로 그가 가진 탁월한 천부적 재능이었으며, 지금껏 그 누구도 갖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성질의 것이었다.(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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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트랜스퍼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8
존 더스패서스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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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대의 항구도시 뉴욕, 뉴욕의 중심지인 맨해튼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환승역 맨해튼 트랜스퍼는 존 더스패더스의 작품 속에서 묵직한 존재를 견고하게 드러낸다. 더스패더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와 동시대를 통과하며 교류했던 잃어버린 세대로서 로스트 제너레이션은 1차 세계대전 후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허무적ㆍ쾌락적 경향에 빠졌던 미국의 지식인들과 계급 청년들로 사전은 정의내리고 있다. 세계대전 이후의 시대적 암울함을 금주법, 이민증가와 배척감정, 물질주의와 허황한 꿈, 대공황시대의 불안, 도덕 등 기존 가치관 상실의 날들을 배경으로 수 많은 등장인물이 네온사인처럼 명멸하는 작품이다.

인물이 많기에 따라가며 읽기 위해 등장순서대로 매번 기록해 보니 A4용지 4장이다. 인물별 분량도 등장 시점도 제각각으로 예측할 수 없고, 한 인물이 어떻게 자기의 삶을 살아낼지 관찰자의 입장에서 볼 때 안쓰럽거나 안타깝다. 복잡한 인물의 미로를 뒤쫓아 정리된 감정을 느낄 새가 부족할 듯 함에도 불구하고 애처로움은 반복해서 읽기를 멈추게 만든다. 그럼에도 도입부 에서부터 가장 주목하게 한 인물은 지미 허프였다. 이미지만 남긴 채 서둘러 사라진 그의 어머니 릴리 허프의 여운을 간직한 채 어린 지미 허프가 혼자 남아 청년이 되고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은 작품 전체를 통해 연결된다.

후견인이 된 제프 이모부가 남자들의 세계에서 성공해보겠다는 열의가 느껴지지 않는다(172)’고 우려했던 지미. 그는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대할 때 순수함, 자존심을 지키려는 열망과 될대로 되라는 식의 태도는 이중적이면서도 솔직하다. 타임스 기자로서의 글을 쓰며 느끼는 감정, 사랑을 이룸으로써 영원할 것 같은 행복도 한 순간처럼 흩어져 버리고 로스트제너레이션을 가장 많은 부분 대변하고 있다.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디까지 가는데요? 라는 물음에 글쌔······ 꽤 멀리요.(564)’라 답하며 알지 못하는 현재, 부유하는 실존을 수용한다.

두 번째 인물 축은 에드 대처의 딸 엘런일 것이다. 재능과 미모를 비롯해 남들이 부러워 할 만한 많은 것을 부여받은 그녀는 꿈을 추구하고 원하는 것을 얻는데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다. 사람들은 그녀를 꿈의 실현처럼 곁에 두고 싶어한다. 그들만의 다른 이유로 그녀는 사랑스럽다. 그래서인지 엘런은 일레인, 엘리, 헬레나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첫 남편 존 오글소프(조조) 이후에도 스탠우드 에머리, 지미 허프, 해리 골드와이저, 조지 볼드윈 등의 열렬한 대상이 되며 이와 별개로 개인적 성취도 이루어낸다.

작품이 끝나갈 무렵 그녀는 ‘일곱시 반, 어디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는데 어디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녀 안에 지칠 대로 지친 공백이 있었다.(558쪽)’,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으면 살아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무엇에 신경을 쓰는가, 무엇을 위해. 사람들의 시선, 돈, 성공, 호텔 로비, 건강, 우산, 유니다 비스킷, 내 머릿속에서는 늘 고장 난 태엽인형처럼 띵 소리가 울린다.(558쪽)’고 자각한다. ‘불쑥 뭔가 잊었다는 생각에 그녀는 화들짝 놀란다. (중략) 택시 안에다 뭘 두고 내렸나? 그러나 그녀는 이미 생글거리며 걷고 있다.(559쪽)’ 지친 공백과 마주쳤음에도 그녀가 살아가는 패턴은 앞으로도 매끄럽게 지속될 듯 보인다.

그 밖에 재즈시대 거대 톱니바퀴에서 버티지 못하고 스러져간 사람들은 그 등장이 비록 짧더라도 때론 주요할 것 같았으나 허무하게 사라졌더라도 잊혀지지는 않는다. 엘런의 어머니 수지 대처나 지미의 어머니 릴리 허프, ‘어디도 갈 곳이 없다며 브루클린 다리에서 추락사하며 1부의 마지막을 담당했던 25세의 버드, 알콜과 허무의 수렁에 빠져 결국 죽어간 스텐 말이다.

등장 순서에 따라 인물 맵을 그리며 읽어나가는 것도 재미있지만 작품의 가장 중요한 공간적 배경이자 주인공이기도 한 맨해튼 트랜스퍼, 도시 자체의 매력을 그려낸 묘사 또한 눈여겨 보게 된다. ‘아연처럼 하얀 강물 저편에는 다운타운의 빌딩들이 자작나무 숲처럼 빽빽하다. 뿔나팔 소리가 초콜릿색 아지랑이 사이로 퍼지듯 그 높다란 담벼락 위로 분홍빛 아침노을이 번져간다.(355쪽)’, ‘그들은 툴툴거리며 리무진의 뒷좌석에 앉아 업타운의 포티스로 질주한다. 진처럼 희고, 위스키처럼 노랗고, 사과주처럼 거품이 나는 휘황한 번화가로.(432쪽)’, ‘레몬 그린색 레이스를 두른 듯 움트는 나무들 저편에는 허드슨 강이 저녁놀을 받아 은빛으로 흐르고 어퍼 맨해튼의 아파트들이 흰 암벽처럼 빛난다.(531쪽)’ 이처럼 다채로운 색을 사용해 거대도시 뉴욕과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려보게 한다. 연약함에 부질없어 보이는 또는 획득한 힘을 더욱 공고히 하려 고군분투하는 인간군상과 대조적으로 도시가 보여주는 빛과 색은 매혹적이다.

더스패서스는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때론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바뀌었음을 예고하기 위한 최소한의 줄바꿈조차 없이 진행되기에 나중에는 으레 그러려니 받아들이게 된다. 예측은 빗나가고 해피엔딩도 없다. 삶에 당면한 채 나이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허무맹랑하지 않고 얼마든지 있을 법하고 오히려 현재의 면면이 시공간적 거리를 훌쩍 뛰어넘어 겹쳐보이기도 한다, 시간을 빠르게 돌려 인물들의 후대 이야기로 이어나가도 읽고 싶어질 것 같은데 지금의 뉴욕은 또 예기치 못한 감염병으로 완전히 다른 색을, 가슴아픈 색을 띄고 있다.

난해하리라는 예상에 흥미를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생각외로 재미있었다.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인물을 따라가느라 집중하고 몰입해 감정이입하곤 했다. 뉴욕을 잘 아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훨씬 더 생동감이 넘칠 것이고 어빙 벌린을 비롯해 작품 속에 종종 나오는 음악을 찾아 들어본다면 그 시대의 분위기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올 것도 같다. 지금의 우리는 무엇을 좇아 분주하게 시간을 채워가는지, 어긋남 없이 서로에게 소중하게 남을 관계란 무엇인지,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지, 지금 이곳은 어디를 향한 환승역인지 생각은 지속된다.

-2020.4.20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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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4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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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김선형 옮김, 문학동네, 2012, Frankenstein, 1818, 324쪽 분량)』 은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이름만으로 강한 상징성을 띄고 있는 아니코닉한 대상이다. 가장 먼저 연상되는 프랑켄슈타인의 이미지는 30년대 흑백 영화에 등장했던 배우 보리스 칼로프의 얼굴이고 여기에 만화적 캐릭터나 광고로 끊임없이 소환된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을 비롯한 고전 과학소설이나 다양한 영화의 원형도 『프랑켄슈타인』에 있다. 메리 셸리는 영국의 소설가로 정치철학자 윌리엄 고드윈과 철학자이자 여권운동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부부의 딸이다. 작가는 서문을 쓴 시인이자 후에 남편이 되는 퍼시 비시 셸리, 그리고 친구들과 여행 중에 글을 써 들려주기로 한다. 셸리는 이렇게 썼던 글을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로 익명 출간하고 아버지에게 헌정한다. 이후 인류 멸망을 그린 소설 《최후의 인간》(1826), 모험담 《퍼킨 워벡의 행운》(1830) 등의 작품을 발표했고, 1831년에는 《프랑켄슈타인》을 개작해 재출간했다.

소설은 항해 상황을 전하는 월턴의 편지로 시작한다. 북극 탐험이라는 원대한 목적 앞에 당장의 어려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마음을 나눌 벗의 부재가 아쉽던 중 광활한 빙원에서 조난자를 발견한다. 월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가 자신을 거울삼기 바라는 마음으로 전하는 과거의 행적이 소설의 중심으로 드러나는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의 삶이다. 명문가의 아들이었던 그는 사촌 동생 엘리자베트, 벗인 클레르발과 부족함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한 권의 책에서 시작한 자연철학을 향한 열정은 독일의 대학에서 과학을 접하며 더욱 고취된다. 특히 생명이 발생하는 원리를 찾기 위해 귀향도 미루며 “인간 창조”(p.66)에 착수한 끝에 그토록 오래 자신에게 행복한 휴식이었던 꿈들이 “지옥”이 되어버렸음을 깨닫는다.

빅토르는 비통한 소식을 듣고 귀향한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과 아끼던 사람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한다. 괴물에게 복수하겠다고 다짐하는 한편 결과로 볼 때 진정한 살인자는 자신이라고 여긴다. 평온을 되찾기 위하여 남은 가족과 알프스 샤모니 계곡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다. 빅토르는 자신이 “창조한 괴물”을 만난 첫 대면에서 그를 “악마”라고 호명한다. 소설의 화자가 이번에는 괴물로 옮겨간다. 자기의지와 상관없이 생명을 부여받은 괴물은 무방비로 세상의 위협을 감내하고, 본모습을 숨긴 채 학습하고, 생각하고, 애쓰고 소망한다. 절대적인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원하지만 거듭 거절당한다. 정치적 이유로 망명한 가족 중 눈이 보이지 않는 노인과, 세상의 편견에 물들지 않았을 어린아이, 결정적으로는 자신의 창조자로부터. 그의 요구는 한가지다. 동류이기에 자신을 거부하지 않을 반려자의 창조다.

3부로 구성된 소설에는 세 명의 화자가 등장한다. 탐험중인 선장 월턴과 빅토르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이 생명을 부여한 피조물이다. 작가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점층적으로 진행하고 첫 번째 화자 월턴을 마지막에 다시 등장시켜 사건의 시작과 종말을 기록하게 한다. 소설은 기록물이자 증거로서 백 년이 몇 번 지나도록 독자에게 닿고 다채로운 이미지와 서사와 변용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소설의 한 가운데에 살아남기 위해 분투했던 괴물의 이야기를 배치한다. 태어난 괴물은 세상을 혼자 깨우친다. 혼자 배운 것을 되새기고 더 알아야 할 사항을 꼽아본다.

그에게 의미심장한 발견은 말로 이루어지는 소통이었는데 “진정 신과 같은 과학이었기에 나도 터득하고 싶다는 열망”(p.148)을 부추긴다. 글을 읽게 되자 “경이로움과 기쁨의 벌판”을 보게 될 뿐 아니라 사회와 종교에 대한 통찰과 자기 자신을 향한 성찰에 이른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 손을 내밀고 싶었던 괴물의 소원이 차례로 실패하자 분노는 복수의 열망으로, 거절당하지 않을 대상을 향한 갈구로 이어졌다. 이마저도 좌절하자 관계를 역전시켜 자신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에게 “노예여”라고 부른다. “네놈은 내 창조주지만, 나는 네 주인이다. 순종하라!”(p.227) 계속되는 대결은 더 많은 희생을 부른다.

소설은 입체적인 구조와 치밀한 심리묘사, 빠른 극적 전개로 시종일관 독자를 몰입시킨다. 특히 2권 2장에서 프랑켄슈타인이 피조물과 처음 대면하는 장면은 빼어나다. “당신은 나를 죽이려 하겠지. 감히 당신이 이렇게 생명을 갖고 놀았단 말인가? 나에 대한 당신의 의무를 다하라. 그러면 나도 당신과 나머지 인간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겠다.”(p.132) 괴물의 논리는 정연하다. 나아가 간곡하다. “내 말을 들어달라.”(p.134)는 호소는 몇 번이고 반복되어 적의로 가득 찬 빅토르의 생각을 바꾸었듯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낭만주의의 한가운데를 살았던 작가가 구축한 세계는 슬프고 안타깝다. 월터가 미지의 땅을 향해 항해를 계속했듯이 빅토르는 과학의 정점에서 열릴 신세계를 꿈꿨다. 피조물인 괴물은 언어라는 도구, 이야기의 힘으로 생태적으로 다르다는 극도의 취약함을 극복할 수 있기를 꿈꿨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도래하지 않았고 그들의 손에 들렸던 도구는 우리 손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발전은 고속으로 이루어지고 감정은 충분히 전달되지 않으며 소통은 일관되지 못하다. 그래서 현재적이다. 소설은 섬세한 묘사로 인간의 심리뿐 아니라 풍광도 부각시킨다. 망망대해, 극지방 유빙의 포위나 장엄한 몽블랑, 라인강의 절경 등이 고통받고 갈등하는 인간과 무심한 대비를 이룬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으로 잘못 여겨져 왔으나 그를 만든 과학자다. 괴물은 ‘악마’ 또는 ‘그 존재’로 불리기도 하지만 결국 이름을 가지지 못했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어야 할 건 이름, 즉 실존이 아닐까. 철저히 내던져진 존재의 실존 가능성 또는 연대의지를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물을 때 독자는 방관하지 못한다. 절규와 다름없는 질문은 물론, 행간에 스민 침묵까지 사유의 장으로 이끄는 고전을 추천한다.

책속에서>

어떻게 해야 당신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 아무리 애원해도 자기가 만든 피조물에 호의를 보일 수 없단 말인가? 이렇게 당신의 선의와 연민을 갈구하는데도? 내 말을 믿어라, 프랑켄슈타인. 나는 선했고, 내 영혼은 사랑과 박애로 빛났다. 하지만 나는 외롭지 않은가? 참담하게 고독하지 않은가? 내 조물주인 당신이 나를 증오하는데 하물며 내게 아무것도 빚진 바 없는 당신의 동포들은 어떻겠는가? 나를 상대도 하지 않고 증오할 뿐이다.(p.133)

이런 말들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동포 인간들에게 가장 높이 평가받는 자산은 부와 결합한 귀하고 순수한 혈통이라는 것도 배웠다. 이들 중 하나만 갖고 있어도 존경받고 살 수 있지만, 둘 다 없으면 아주 희귀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선택된 소수를 위해 자기 힘을 무의미하게 소모해야 하는 방랑자나 노예로 간주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이었던가? 내 탄생과 창조주에 대해 나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흉악하게 일그러진 추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람과 같은 본성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중략) 그렇다면 나는 지상의 한 점 얼룩 같은 괴물일까? 모든 사람들이 도망치고, 모든 사람들이 내치는?(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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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지도 - 2023 청주공예비엔날레
강재영 외 지음 / 샘터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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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공예비엔날레는 글로벌 공예문화의 중심인 청주시에서 2년마다 열리는 문화예술축제다. 1999년부터 시작해 올해 열세 번째로 개최중인 전시의 주제는 <사물의 지도_공예, 세상을 잇고, 만들고, 사랑하라>다. 즐거운 예감의 예술교육 심화과정 첫 시간부터 임지영 대표님의 추천이 있었고 “재밌는 예술 사용법” 특강도 직접 진행하시기에 더욱 가을의 청주가 마음을 끈다. 그런 중에 주요 작품과 작가들의 이야기를 먼저 책으로 만날 수 있어 반가왔다. 『사물의 지도(샘터, 2023, 348쪽 분량)』는 올해 전시의 예술 감독인 강재영을 비롯해 아홉 명의 공동 저자가 영감 가득한 작가들의 행적과 결과물을 소개한다. 먼저 예술의 갈래로 볼 때 문학이나 회화와 비교해 선명하게 인식되지 않는 “공예”의 개념과 특징을 살펴본다. “인류의 가장 근원적이고 오래된 지적 설계”, 가상의 세계를 감각할 수 있는 문명의 신체성으로 돌려놓기에 공예는 “인류 문명의 뿌리이자 무의식”(p.10)임을 이해할 수 있다.

책은 여섯 개의 주제로 공예의 과거와 현재, 역사의 반영과 미래의 방향성을 탐색한다. 각 장의 주제와 연결되는 작가들의 간략 소개, 작업 과정, 작가관, 작품 설명 등을 담는다. 분량은 4~10면 정도인데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여러 느낌, 다양한 여운이 쌓여간다. 첫 번째 작가는 “눈빛의 관점”, 다카시마 히데오다. 빈 항아리 형상을 한 얼굴이라니, 제목도 <텅 빔으로 채워지다>여서 역설의 공명, 의미와 무의미, 이질감과 자유로움에 한동안 사로잡힌다. 2장에서 문화적 기억과 맥락에 주목한다. 서도식의 어린 시절 할머니의 사랑은 하나쯤 곁에 두고 싶은, 시들지 않는 감<감·甘·感>으로 되살아나 시선을 붙잡는다. 제목까지 웅변하지 않는가.

주오밍순은 “사람과 기물 사이의 상호작용”(p.92)을 창작에서 가장 소중히 여긴다. 새로운 형태의 공생체가 “인간과 물체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만들고 유기물과 무기물 간의 격차를 넘어선다”(p.94) 찻주전자 작품은 무한 상상, 한편으로는 아이들의 놀이와 같은 자유로움 이야말로 경계를 넘어 세계를 확장하겠다는 공감을 부른다. 안소니 아모아코-아타는 고향 가나를 향한 그리움을 가방으로 표현한다. 작가의 “가방 론”을 읽으며 읊조렸다. “말이 된다”라고. 3D 도자의 세계에 머문 후, 금속공예가 이상협의 <달>에서 은덩어리가 달항아리로 치환되는 마술을 혼자 상상한다. 디지털 크래프트 작업으로 완성한 류종대의 <달항아리>는 탄성이 나온다. 김환기가 이름지어준 달항아리가 앞으로 또 어떻게 변신을 거듭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4부, 기록문화와 공예 편에서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한 <직지심체요절>을 이야기한다. 인류가 최초로 금속활자로 만든, 인류 문명의 중대한 분수령이 되었으니 자부심이 넘친다. “공예는 문명을 만들고 문명은 사람을 만든다”(p.216)라며 <직지>의 진정한 주인공들 한지장과 필장, 먹장, 벼루장을 정성껏 이름 부른다. 『사물의 지도』는 다소곳이 정보를 간직할 수 있는 도록의 역할에서 나아간다. 와, 라는 감탄이 계속되면서 현장에서 직접 관람해야 하는 전시임을 확인시킨다. 얼마나 더 놀랍겠는가. 그곳에 사유하고 질문하고 성찰하고 실험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계 없는 상상을 하고 구체적으로 실현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겪어낸 시간에 길이 나고 형태가 생긴다. 이미 시간을 탈출해 영속할 채비를 한다. 그들의 노고에 존경을 표하고 그 길을 따라갈 병아리 우리 아이에게도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책을 읽었는데 삶이 기대된다. 삶의 모든 지문을 가치로 메운다. 그 증거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책속에서>

한편 덴마크에서는 종교적 전통과 일찍이 분리된 종이공예의 전통이 오랫동안 계승되어 왔다. 동화 작가로 유명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종이공예가이기도 했는데, 1867년 친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르는 것은 시의 시작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안데르센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직접 쓴 동화를 읽어 주면서 즉흥적으로 가위를 움직여 생동감이 넘치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안데르센은 덴마크 종이공예 전통의 확산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p.119)

<직지>의 제작과정 전체를 상상하고 복원하기 위해 기획한 이번 전시를 통해 인류문명이 자연과 인간 사이의 상호존중과 협업의 결과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이 전시는 <직지심체요절>을 탄생시킨 이 땅의 수많은 장인들에게 보내는 헌사와 오마주이다.(p.225)

덧> 새내기 아이의 첫 도예작품을 처음으로 다정히 만져보고 커피를 내린다.



<출판사 도서 제공_신간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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