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모든 색 인생그림책 14
리사 아이사토 지음, 김지은 옮김 / 길벗어린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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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는 일정한 속도로 넘어가지 않는다. 어떤 장면에서는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위로 머릿속 필름이 한 장씩 내려꽂히고 쌓인다. 그런 페이지는 낱장임에도 꽤 두꺼워져 버릴지 모른다. 『삶의 모든 색』은 잊었던, 가려졌던, 감췄던, 무시했던, 아꼈던, 사랑했던, 웃음과 눈물로 덧칠했던 그때 그 순간을 소환한다. 영사기가 먼지를 내며 회전할 때 낡은 스크린 위로 지나가는 이야기가 아직도 이토록 반짝이다니. 경이로운 수레바퀴가 작동한다. 생의 수레바퀴다.

리사 아이사토의 『삶의 모든 색(김지은 옮김, 길벗어린이, 2021, 2019)』은 모두의 생에 바치는 찬가이다. 작가는 고운 장면만 추리기 위해서 임의로 배제하지 않았으며 서두르는 서투름과도 멀다. 95컷 그림을 담은 총 200쪽 분량의 책은 압축과 상징, 여백과 여운으로 인생 파노라마를 펼쳐낸다. 무엇 하나 놓치는 법이 없는 작가의 통찰은 놀랍다. 리사 아이사토는 노르웨이에서 최고의 그림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며 독특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일러스트 작업을 한 <책을 살리고 싶은 소녀>로 수상을 했으며 <삶의 모든 색>은 2019 노르웨이 북셀러 상 수상작이다.

『삶의 모든 색』은 아이의 삶, 소년의 삶, 자기의 삶, 부모의 삶, 어른의 삶, 기나긴 삶으로 인생의 여정을 보여준다. “자기의 삶”을 분리하고 “부모의 삶” 이후에 “어른의 삶”이 위치하는 점, 마지막을 “기나긴 삶”으로 명명하는 시선이 독특하게 다가온다. 책은 앞에서 뒤로 순차적으로 읽어나가도 되겠지만, 현재 자신의 상황, 또는 우려되거나 미심쩍은, 어쩌면 복기하고 싶은 시기부터 펼쳐도 좋다. <아이의 삶>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는지”가 환상적으로 다가온다. 펼친 책에서 금색 불빛이 퍼져 나오고 어두운 주변을 밝힌다. 아이의 머리칼 한 올까지도 영감으로 물들어 춤추고 표정은 신대륙 발견에 맞먹는다. 이 장면은 작가가 일러스트를 담당한 <책을 살리고 싶은 소녀>의 표지로 사용되었다. 그 때를 돌아본다. 나의 그 때는 셜록 홈즈와 괴도 뤼팡에 빠져 커서 탐정이 되어야 하나, 괴도가 되어야 하나 고민 끝에 추리소설 작가가 되자고 야심찬 맹세를 하던 시기다.


<소년의 삶>에서 “어른들은 우리를 걱정하기 시작했어요.”라고 한다. 아이가 아닌 어른의 입장에서 볼 때, 빨간색 주의 표시를 아이들에게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내가 보인다. 문제는 붙이면서도 다 소용없는 거 아닐까 라는 불안감이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 언제까지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외치겠는가. “어느 날, 한 어른이 물었어요. ‘너도 커피 한잔하겠니?‘“ 이때부터다. 내 피의 8할이 커피가 된 것은. 공식 어른이 되어 앞에 두었던 커피 한 잔은 기념할 만했다. <자기의 삶>에 이르면 동반자 찾기가 생의 과업으로 대두된다. 동반의 개념은 평생 투신할 가치나 소망으로 대체할 수도 있겠다.

간결한 문장은 그림을 설명하고 보완하면서 상승효과를 일으킨다. 그림은 보이는 것 이면에 상징과 은유를 배치하여 독자에게 말을 건다. 동시에 지극히 구체적인 현실 장면을 포착함으로 공감하고 이입하도록 이끈다. <부모의 삶> 장면들이 그렇다. 특히 “낮에도”의 엉망인 육아현장은 서랍장에서 시작해서 거실 전체 내벽을 두르는 빨간 매직 낙서에서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작가는 “지금처럼 사랑으로 가득했던 적은 없”다는 낙관을 잊지 않는다. 곧 아이들이 떠나가면서 부부는 “사는게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고 여기는 <어른의 삶>을 맞는다. 서로를 새로운 눈으로 대하는 시기이고 돌봄의 대상은 아이에게서 부모에게로 이행한다. <기나긴 삶> 또한 인간의 마지막 시기를 가감 없이 담는다. 감사하고 외롭고 두렵고 안타까운 순간들은 형편과 처지, 지역과 공간을 넘어 인류 보편의 감정으로 독자에게 닿고 어느 면에서는 안심시킨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아이의 삶>의 크리스마스 장면과 책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내 형제들에게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는 은총과 구원에 더해 부모님의 사랑이 찐 별처럼 박혀 있다. “삶의 모든 순간, 당신이 사랑받았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라는 마지막 문장을 보니 엄마가 늘 하시는 말씀인 “있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이 떠오른다. 그 모든 순간에 감사하겠다는 이야기는 염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품 넓은 수용이자 기꺼운 포옹이고 적극적 의지다. 좀먹고 바랜 앨범 안 낡은 사진 한 장까지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지나온 길은 박재된 시간이 아니라 박동하는 심장으로 뛴다.


『삶의 모든 색』은 평범하고 특별했던 시간을 불러내는 훌륭한 마중물이다. 다비드 칼리의 『나는 기다립니다』가 삶의 한 줄 요약이라면 『삶의 모든 색』은 꽤 친절하다. 인물의 생생한 표정이 제일 먼저 시선이 끌지만 배경과 세부, 계절의 변화와 소품, 물감의 번짐과 흘러내리고 사라지는 표현기법 등은 읽고 다시 읽게 되는 문장만큼 밀도 높다. 제법 큰 판형, 하드 커버, 묵직한 중량감이 전해지는 책의 만듦새는 독자에게 동반자가 되리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우리는 울림 강한 페이지를 펼칠 때 한동안은 어느 방향으로도 벗어나가지 못하고 글과 그림 안으로 침잠하게 되고, 한 번 두 번 이와 같은 경험을 축적하게 될 때 이 책은 벗으로 독자의 곁을 지킬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 시절에 사랑받았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삶의 모든 순간, 당신이 사랑받았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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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덕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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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계절이 무슨 상관이겠느냐만 본격적으로 날이 추워지고 겨울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고질병이 있다. “도스토옙스키 읽을까?”라고 자문하는 습관에 다시 읽으리 도스토옙스키증이라고 이름 붙였다. 수년 전에 도스토옙스키 5대 소설 읽기에서 몇 작품은 3회독이었지만, 재독도 있었고 <미성년><백치>는 초회독이었다. 물론 거듭해서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며, 지금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처음 페이지를 넘기던 과거의 나를 열렬히 부러워한다. 동시에 여전히 읽히기를 기다리는 책은 있으니 조주관의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에서 언급한 작품들 중 <죽음의 집의 기록>이 그렇다.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라, 수정처럼 단단하고 반짝이는 마법을 그 겨울에 불러일으킬 것을 확신한다. 마성의 문장은 시작되었다.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의 죽음의 집의 기록(이덕형 옮김, 열린책들, 2010, 1862, 528쪽 분량)은 러시아 최초로 감옥과 유형 생활을 묘사하는 작품으로 작가의 자전적 체험과 관찰에 문학적 생기를 더했다. 작가는 생의 끝으로 내몰려 열악하고 제한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관계, 구성원들의 역동을 살핀다. 드러난 면과 숨은 이면을 통찰하고 사유를 덧입히고 밀도 있게 집대성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공병학교를 졸업하고 공병 부대에서 근무하다 1844년 문학에 생을 바치기로 하고 퇴역한다. 1849423일 페트라솁스키 금요모임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는데 사형집행 직전 황제의 사면으로 죽음을 면하고 시베리아에서 강제 노역한다. 이 사건은 그의 몇 몇 작품에서 언급되는데 <백치>에서 꽤 구체적으로 작심 피력한다. 강제노역과 시베리아 병사 복무, 거주기간을 채우고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기까지는 거의 10년이 걸린다.

 

1부의 서론에서 작가는 책 속의 책이라는 액자형식으로 저작의 구조를 특정한다. 서론의 1인칭 화자는 본문의 1인칭 서술자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본격적으로 세부묘사를 시작한다. 서론의 화자이자 전달자는 도스토옙스키 자신을 대변하는 시베리아 이주민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 고랸치꼬프를 만나고 그의 특이점에 주목한다. 다시 그를 찾았을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후였고, 남아 있는 것은 10년 동안의 유형 생활을 적어 놓은 두툼한 공책 뿐이다. 곧 작가의 유형 경험은 남겨진 노트인 <죽음의 집의 기록>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감방의 바깥 울타리부터 울타리 안쪽으로 줌 인해 들어가면 세상과 분리된 공간이 서술자의 펜 끝에서 형체를 드러낸다. 시선은 유형수들을 향하고 그들의 공통점과 차이, 태생적 자질과 환경에 적응하며 덧입은 기질 등을 비춘다. “유형살이를 해야 할 10년 동안 결코 한 번도, 결코 1분도 나 혼자 있을 수 없다는 가공스럽고 고통스러운 사실을 조금도 상상할 수가 없었”(p.24)다는 고백은 작가 자신이 형에게 보낸 편지의 호소이기도 하다. 또한 이 책이 돈은 주조된 자유”(p.36)라는 명언의 출처였다. 비단 시베리아 감옥에서뿐 아니라 21세기 첨단 사회에 꼭 들어맞는다. 극한의 폐쇄사회에서 화자는 돈, 욕설, 신분의 차이와 은연중의 대립, 술과 얽힌 이야기를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동일한 범죄에 대한 형벌의 불공평성”(p.87)에 관한 의문, 두 가지 종류의 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한 형벌이 주어져야 하는지를 여러 예를 들며 묻는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파고들기와 철학적 고찰의 일면이다. 작가가 그려내는 인물은 너무도 생생해서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부분을 자꾸 소환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교집합이라고는 없는 캐릭터임에도 어떤 면모는 꽤나 보편성을 띤다. 이를 알아차릴 때 우리는 놀라곤 한다. 또한 스스로도 어찌하지 못한 채 무참하게 억눌린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3첫인상까지, 분량으로는 114페이지까지가 감옥에 들어온 첫 날의 단상이다. <백치>198페이지까지도 주인공 미쉬낀 공작이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돌아온 첫 날이었다. 무엇도 놓치는 법 없는 정교한 펜, 도스토옙스키 읽는 즐거움은 견줄 데가 없다.

 

서술자 고랸치꼬프는 공동의 작업에서 사람들로부터 노골적으로 배척당하는 일이 곤혹스웠는데 예견되는 충돌 앞에서 입장을 정하고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의 앞에 다가올 수많은 동일한 나날들이 슬픔으로 와 닿을 때 감옥의 개 샤리끄는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다. 샤리끄를 비롯한 동물들과의 교류는 후반에 감옥의 동물들이라는 장에 개별 삽화처럼 들어간다. 제일 먼저 서술자를 찾아온 죄수였던 뻬뜨로프를 그리는 장에서도 빼어난 캐릭터 묘사를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시선을 설명하는데 이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관조를 떠올릴 수 있다. 작가는 관조한 것을 내부로 축적하는 자를 많은 러시아 민중, 그리고 스메르쟈코프라고 지적했었다. 작가는 의식 저 아래, 감추어진 방까지 내려가 돋보기를 갖다 댄 듯 차근차근 분석해서 활자화한다. 프로이트 이전에 내면세계를 탐구했던 작가의 면모를 생각하게 만드는데, 영화의 한 장면을 숨죽이고 보는 듯한 긴장감, 역시 도스토옙스키다.

 

이처럼 영화 같은 장면은 가장 낮고 열악한 수용소에도 찾아온 성탄절 풍경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설렘은 곧 다른 분위기로 대체되고 죄수들 중 바를라모프와 불낀은 희극적이면서 다분히 도스토옙스키적 충돌을 일으킨다. 시베리아 유형수들이 가게 되는 목욕탕 장면은 지옥도가 따로 없는 압권이다. 대단히 사실적인 묘사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이런 일이 가능한가 싶어진다. 24장 아꿀까의 남편 이야기이자 아꿀까 이야기는 한 편의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단독 에피소드로도 읽힌다. 이해 불가한 사건 앞에서 이런 삶은 어떻게 해야 하나 망연자실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은 이와 같은 예를 들어 알료샤에게 신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유다 라는 논리를 편다. 아꿀까의 고난은 죄없는 어린아이가 이유 없이 학대받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항의>가 무엇을 뜻하는가, 항의하는 집단에 속하지 못하고 배제되는 서술자는 비로소 자신의 위치가 결코 동료일 수 없고, 별개의 길을 가는 타자일 뿐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게 된다. 수감 내내 숙고해온 문제다. 마지막 장인 <출옥>에 이르러 그는 10년의 유형 죄수생활을 마치고 죽음의 집을 나가기 전 옥사의 벽을 보면서 누구의 죄란 말인가”(p.455)라고 묻는다. 이는 힘없는 민중이 당했을 억울한 폭압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드디어 족쇄가 끊어진다.

 

작가는 죄수를 바라보던 시선을 인간으로 확대하고 러시아 민중을 향하는 노래를 인류에게로 치환한다. 일상적으로 조우할 수 없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무의식의 심연을 건드려 접근 가능한 언어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도스토옙스키 문장의 매력은 방만함과 치밀함처럼 대립하는 요소를 동시에 구현해내는데 있다. 의식의 흐름은 머뭇거림이라고는 없이 거침없이 뻗어나가는데 디테일, 세부 역시 촘촘하다. 거의 집착적 세부사항 묘사는 소설에서 더 분명히 만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만의 만연체와 장광설, 게다가 나는 지금 이야기의 주제에서 벗어나 있다.”(p.67), “그러나 나는 또다시 본론에서 벗어나고 말았다.”(p.469)는 식의 개입은 분지로 새어나갔다가 회귀하는 물길처럼 몇 번이고 계속된다. 또한 도스토옙스키가 주는 웃음은 매우 특별하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할지 도무지 모르겠는 난처함에 독자를 빠뜨린다. 그가 펼쳐놓은 인물 각각에게 이입하고, 다시 이입함으로 단시간에 그들의 삶을 살아버리게 만든다. 문학의 위대한 한계초월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도스토옙스키를 꼽는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동의하게 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서평을 쓰고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의 십분의 일도 못했을 뿐더러 왜 이 말을 안하고 위의 말을 했을까 다시 시작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일상을 살아야 할 범인으로서 계속 붙드는 일이 탁월함을 보장하지 못하는 바에 매듭을 지어야 한다. 다음이 언제일지 모르나 그때는 제대로 써보자고 위안 삼는다. 마지막으로 도스토옙스키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죽음의 집의 기록보다는 소설을 추천한다. 데뷔작부터 출간 순서대로 읽는다면 작가의 세계가 변화하는 과정이 조금 더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한 두 소설로 걸어 들어가 작가의 진면목에 슬쩍 다리를 적시고 나오면 그의 세계에 기꺼이 온몸을 던지고 싶어질 것이다.

 

 

 책 속에서>


우리의 소령 같은 사람은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을 억누르려 하고 무엇인가를 빼앗으려 하며, 누군가의 권리를 박탈하려 드는 사람, 한마디로 말해서, 어디서고 규칙만을 따지는 사람인 것이다.(p.236)

이러한 법규의 무능한 집행자는 법률의 정신과 의미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채, 문자 그대로 법률을 집행한다는 것이 오히려 일을 무질서로 끌어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결과는 결코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도 이해할 능력도 없다. <법에 그렇게 씌어 있는데, 더 이상 어쩌란 말이냐?> 이렇게 말하는 그들은 법률 이외에 건전한 사고, 냉정한 판단이 자신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사실 때문에 적지 않게 놀라게 된다. 특히 냉정한 판단은 그들 대부분에게 아무런 쓸모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선동적인 사치물이자 장애물이며,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비쳐지는 것 같다.(p.237)

 

실제로 내게는 감옥 생활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거의 1년이란 기간이 필요했으며, 1년은 내 삶에서 가장 힘든 한 해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1년은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내가 느끼기에, 나는 이 1년의 매시간을 순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p.387)

 

그리고 이 벽 속에 얼마나 많은 젊음이 헛되이 매장되었으며, 여기서 얼마나 위대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버렸는가! 이제는 모든 것을 말해야만 한다. 실로 이 사람들은 비범한 인물들이었다.어쩌면 이곳에 세상에서 가장 힘 있고 가장 유능한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력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갔다. 그것도 변칙적이고 불법적이며 되돌릴 수 없이 파멸해 갔다. 하지만 누구의 죄란 말인가? 정말로 누구의 죄인가?(p.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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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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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안미란 옮김, 민음사, 2010, 1879, 148쪽 분량)』은 성숙한 소통, 인격적 대화가 없는 곳은 어디나 인형의 집, 가식의 성임을 말하는 희곡이다. 피상적 대화는 시간을 잠식할 뿐이고 어느 날 상대가 낯선 이라고 깨우칠 때까지 어떤 가치로도 축적되지 못한다. 희곡의 종결 부분에서 부부는 결혼 팔 년 만에 처음으로 “진지한 문제에 관해 진지한 대화”(p.114)를 하게 된다. 노라는 아버지 소유 인형의 집에서 남편 소유 인형의 집으로 평행 이동했음을 자각한다. 일상은 재미있었을지언정 행복에 도달한 적 없었고 가장무도회와 같은 놀이의 연속은 교육에 배치되었다. 그녀는 늦게나마 비로소 자아 찾기의 여정에 오른다.

노르웨이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헨리크 입센은 1850년 필명으로 발표된 <카틸리나>로 데뷔하여 반세기에 걸쳐 1편의 단막극을 포함하여 모두 25편의 희곡을 발표했다. 입센은 근대 시민극 및 현대의 현실주의극을 세우는 데 공헌하면서 "현대극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한다. 자의적 망명으로 고국에 대한 객관적 시선을 확보하고 ‘사회변혁의 옹호자’, ‘삶의 위선에 반대하는 투쟁자’가 될 수 있었다. 현재 영어권에서 꼽는 입센의 4대극은 <인형의 집>과 <유령>(혹은 <들오리>), <헤다 가블레르>, 그리고 <대건축사 솔네즈>다.(이현우)

<인형의 집>은 전 세계 무대에 끊임없이 오르며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다.

외출에서 돌아온 노라는 기분이 좋다. 크리스마스를 위한 트리와 선물을 마련했고 무엇보다 해가 바뀌면 남편 헬메르가 은행 총재로 부임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즐거워하는 아내 노라를 종달새, 다람쥐, 또는 낭비꾼 새, 군것질쟁이라고 부른다. 애정어린 호칭에 답하는 노라의 세계는 주머니 안에 남아있는 마카롱처럼 화사하고 달콤하다. 노라는 오랜만에 방문한 친구 크리스티네의 은행 일자리 부탁을 흔쾌히 허락한다. 그녀가 “고생이라고는 모르는 네가”(p.24) 도와준다니 더 고맙다는 말을 하자 노라는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한다. 건강을 잃은 남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남편 모르게 서명을 위조해 돈을 빌리고는 혼자 어렵게 갚아왔던 것이다.

노라는 자존심 강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남편이 이 일을 안다면 “우리의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질 거야.”(P.28)라고 이유를 댄다. 문제는 노라의 비밀을 알고 있는 변호사 크로그스타드가 크리스티네 때문에 자리를 빼앗기게 되는데 있다. 크로그스타드는 노라의 비밀을 빌미로 업무에서 밀려나지 않겠다는 행동을 취한다. 노라는 남편을 속인 일에 대한 두려움과 그럼에도 자신을 지키리라는 희망 사이에서 고통받고, 희망은 절망으로, 절망은 돌이키지 못하는 각성으로 이어진다.

희곡은 노라가 집을 나가는 결말로 맺는다.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뒷이야기는 수 차례 작품화되기도 했는데 채만식 최초의 장편소설로 ‘노라의 후일담’이라고 불리는 <인형의 집을 나와서>(1933)에서 노라는 주인공 임노라가 된다. 옐리네크의 <노라가 남편을 떠난 후>(1977)는 집을 나간 노라의 홀로서기 분투 및 실패기로 씁쓸함을 준다. 결심만으로 만족스러운 성취를 이루어내기는 어렵다. 변화와 성장으로 인도하는 길은 무수한 장애물이 깔렸을뿐더러 흐릿한 등대는 오히려 혼란을 가져온다.

그럼에도 노라를 응원하는 이유는 “인형의 집”이 깨어야 할 알이기 때문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라는 데미안의 지침은 언제나 유효하다. 노라의 집이 “인형의” 집이 아니었다면 그 알, 그 세계에서 유의미한 변화와 성장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함을 각성한 노라의 다음 행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문 밖 찬바람 같은 타인의 시선은 소설이 출간된 당시에 비해 꽤 부드러워졌을지 모르겠다. 140년 전 소설은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향하는지를 여전히 묻고 있다. 성장의 계단을 오르고 있나, 자족하면서 매너리즘에 갇힌 건 아닌가, 어쩌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쳇바퀴 위인가를 답해야 할 차례다.


책 속에서>

노라: 아니요.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행복한 줄 알았죠. 하지만 한 번도 행복한 적은 없었어 요.

헬메르: 아니라고! 행복하지 않았다고!

노라: 그래요. 재미있었을 뿐이죠.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내게 친절했어요. 하지만 우리 집은 그저 놀이방에 지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친정에 서 아버지의 인형 아기였던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그 리고 아이들은 다시 내 인형들이었죠. 나는 당신이 나를 데리고 노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면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 이나 마찬가지로요. 토르발, 그게 우리의 결혼이었어요.(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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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를 위한 논어 - 두 번째 인생을 준비하는 지혜의 말 100가지
사이토 다카시 지음, 김윤경 옮김 / 타인의사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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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읽어야겠다는 결심은 없었다. 도서관 하반기 인문학 강연으로 ‘논어와 친구하기’라는 함께 읽기 프로그램이 열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게다가 이권우 교수님께서 매주 일산에서 이 먼 곳까지 와주시는데 코앞에 있으면서 듣지 않는다는 게 사람 된 도리가 아니라는 건 자명했다. 주섬주섬 찾아본 책은 아이가 5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학급생 모두에게 선물한 홍익출판사의 오세진 번역본이었다. 일단 먼지를 털어냈다. 논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무척이나 아름다운 경구, 노래처럼 암송하는 문장이 떠오른다.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로 시작하는 학이편 첫 문장은 공부 의지를 상승시킨다. 공자가 직접 말씀한 가장 중요한 문장이기도 하다.

사이토 다카시의 『60대를 위한 논어(김윤경 옮김, 타인의사유, 2023, 240쪽 분량)』는 예상 독자층을 분명히 하고 그에 최적화된 문장을 선별한다. 저자는 예순 살 고개를 넘을 무렵이 되자 다른 풍경이 보이는데 “올라가야 할 길이 돌연 없어진 듯”(p.5) 하다고 차이를 전한다. 선뜻 이해되기보다는 과연 그럴까 싶으면서 온전히 믿기지는 않는다. 올라가야 할 길이 완만해질 뿐 아니라 끊어진 길이 없나 살펴야 하는 시기에 <논어>의 어떤 가르침은 깊이 있게 다가올 것이다. 사이토 다카시는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교수로 교육학을 전공했다. 지식과 실용이 결합된 글쓰기로 발표하는 책의 대부분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저서로 『혼자 있는 시간의 힘』, 『교양의 힘』, 『50부터는 인생관을 바꿔야 산다』, 『어른의 말공부』 등이 있으며 『논어』를 번역했다.

『60대를 위한 논어』는 전체 다섯 개 장으로 구성하여 장마다 열 편의 문장을 소개한다. 한자 원문과 의미 해석, 두, 세 편의 부연 설명을 곁들여 이해를 돕는다. 이해는 저자의 실제 적용사례나 다양한 예시를 살펴봄으로 독자 스스로 실천 방향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아침에 참된 이치를 깨달으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p.26)는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는 이인편 8장에 나온다. 저자는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무언가를 추구해 나가는 기쁨을 욕망 충족에서 오는 행복과 비교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2장 위령공편 23장에서 공자는 실천해야 할 평생의 과제를 “서(恕)”라고 꼽는다. 자신이 원하지 않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남의 고통을 짐작하고 덜어준다는 도덕적 상상력이 필요한 개념이다.

3장은 ‘존경받는 어른이 되기 위한 가르침’에서 인간관계의 필수조건을 최소한의 예의에서 찾는다. 육포를 가장 싫어하는 음식으로 꼽았던 공자는 거칠고 저렴한 음식인 육포라도 사오는 제자의 열정을 확인하고 싶어 했으며, 최소한의 예를 보이면 누구에게나 개방된 곳이 공자학교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4장, ‘세대를 넘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가르침’은 학이편 15장 자공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시작한다. 가난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예의를 좋아하는 사람을 이야기할 때 저자는 물질적 풍요에 좌우되지 않는 항상심을 노년을 앞둔 이들에게 주요한 덕목으로 세운다. 5장, 행복한 군자가 되기 위해 알아야 할 가르침에서는 머리로만 알지 말고 매일 실천할 것을 강조한다.

『60대를 위한 논어』는 60대에 들어선 저자가 우선은 같은 세대를 위해, 다음으로 모든 세대를 향해 추리고 엮은 논어 명문장이다. 논어 번역도 했던 저자이기에 공자의 말씀을 음미하며 새로 문장을 고르는 진심이 전달된다. 『60대를 위한 논어』는 한 번에 읽고 완독 체크할 책은 아니다. 책을 덮은 후에 더욱 마음을 울리는 글이 있고, 사례를 적용하고 싶은 곳도 있으며, 낭독하거나 필사하고 암송하고 싶어질 수도 있겠다. 독자층을 정하고 집필한 만큼 만듦새도 적절하다. 활자 크기나 여백, 피로도를 줄이는 배치도 배려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50개 구절은 해설과 함께, 부록으로 실은 50개는 일종의 처방처럼 상황별로 제시하고 있다. 논어가 2500년이라는 긴 시간과 한학이라는 벽까지 이중으로 접근을 차단하는 난공불락의 고전이지만 지금 각각의 형편에 맞는 한 문장이라도 새길 수 있다면 귀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그런 쓰임에 적합한 개략적 입문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것이다.


(출판사 도서제공-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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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청소년판)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다즐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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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다즐링, 2023, 308쪽 분량)』는 사랑받았지만 느끼지 못하는 아이와 간절히 원하지만 사랑받지 못한 아이를 그린다. 둘의 결핍 지점은 엇갈리고 이는 갈등의 원인이 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는 투명한 창처럼 사람들을, 관계를, 현상을 있는 그대로 통과시킨다. 안전장치는 개인이 해결할 문제다. 편 가르는 선, 비난의 시선, 날아오는 무기를 자기 능력껏 막아내고 살아남아야 하는 사회는 안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미션은 클리어해야 하는 법이다. 작가 손원평의 등단작이자 제 10회 창비 청소년 문학 수상작인 『아몬드』가 새로운 옷을 입고 재출간되었다. 뒷모습을 담은 성인판과 소년의 옆모습인 청소년판, 두 개의 선택지 중에서 아련해 보이는 청소년판을 선택했다.

손원평은 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서른의 반격』 『프리즘』 『튜브』등 장편소설과 소설집 발표 외에 영화 각본 집필과 연출을 했다. 『아몬드』는 아시아권 최초로 일본 서점대상 1위에 오른 책이기도 하다. 절판 후 재출간된 다즐링 판본의 최대 강점은 추가된 단편 외전 <상자 속의 상자>다. 윤재가 참담한 비극을 유리창 안에서 바라보고 있을 때 밖에 있던 목격자 중 한 사람의 이야기다. “단속한다.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주먹을 들면 안 되는 것처럼 누군가를 돕기 위한 손길도 내밀어서는 안 된다.”(p.277)라고 마음을 다잡던 남자를 통해 묻고, 동조하고, 결국 정화되는 체험을 선사한다. 바닥에 떨어진 금속조각들의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 금으로 변하는 눈부심 같다고나 할까.

소설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윤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프롤로그 첫 문장에서 서술자는 이 소설이 “괴물인 내가 또 다른 괴물을 만나는 이야기”(p.9)라고 요약한다.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칭한 이유는 모두에게 있는 ‘아몬드’가 자신에게는 정상 범주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현대 의학은 아몬드, 즉 편도체의 이상이라는 선천적 결함을 충분한 근거로 확정했고, 가족은 아이가 다르지만 달라 보이지 않는 법을 익혀 눈에 띄지 않고 사회에 수용되기를 최대 목표로 삼는다. 할멈은 윤재의 인생에 갑자기 등장해서 엄마가 잡고 있는 반대편 손을 잡아준다. 굳건한 지지는 외부의 가공할 충격으로 끊어지고 마는데, 이별은 찾아올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다. 혼자 남은 윤재를 돕는 심 박사, 또 다른 괴물이라 부른 곤이, 곤이와 정반대 지점에 있는 도라가 등장한다. 엄마와 할멈은 윤재의 안전 마지노선이었는데 울타리는 깨어져 버렸고, 다른 의미로 괴물인 곤이는 손 잡아주는 엄마를 애초에 잃었다. 대신 평생 “남에게 피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p.127)는 신조를 지켜온 아버지 윤 교수가 “왜”라는 의문을 품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이 시선의 의미를 곤이는 안다.

윤재의 성장은 습기를 흡수하지 못하는 습자지가 조금씩 물을 머금게 되는 과정에 견줄 수 있겠다. 물론 급격한 변화의 계기도 마련된다. 반면, 곤이의 상처받은 여린 마음은 거친 행동으로 표면화된다. 일종의 방어기제일 텐데 이를 알아보는 사람은 마음을 읽지 못한다는 윤재다. “나는 알고 있다. 곤이가 착한 아이라는 걸. 하지만 구체적으로 곤이에 대해 말하라면 그 애가 나를 때리고 아프게 했다는 것, 나비를 찢어 놓았다는 것, 선생에게 패악질을 부리고 아이들에게 물건을 집어 던졌다는 것밖에 말할 게 없다. 언어라는 건 그랬다. 이수와 곤이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거다.“(p.234) 이처럼 소설은 언어의 한계뿐 아니라 ‘역설’의 의미를 직접 설명하고(p.22) 이에 부합하는 역설적 상황을 곳곳에서 제시한다.

소설은 윤재의 성장담에 그치지 않고 곤이를 비롯한 등장인물 각각의 서사를 고루 조명한다. 빵을 구우면서 자신만의 애도를 실천하는 심 박사,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고 싶다며 눈물을 보이는 윤 교수, 여름 바람 같은 친구 도라를 이야기한다. 성장이 생리적 성장기에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꽤 늦은 시기에 알을, 세계를 깨겠다고 각성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안전의 욕구, 욕구 단계이론의 거의 기반인 2단계, 그러므로 본능에 가까운 욕구를 위해 행동하지 않고, 공감한다고 하지만 쉽게 잊고 마는 사람들도 기록한다.

『아몬드』는 윤재가 과거를 회상하는 구조로 순행과 역행을 반복하며 서사를 쌓는다. 그 안에 다채로운 사유와 질문이 녹아있어 멈추게 만드는데, 정상과 비정상, 평범과 그 안에 담긴 도달하기 쉽지 않은 지점인 평탄함, 다가오는 현실에 눈 감는 자와 눈 감지 않는 자, 비극과 희극 등이다. 무엇보다 주요 공간적 배경인 헌책방을 중심으로 글자, 책, 책과 영화의 비교, 작가 등을 서술하는 대목은 가장 아끼며 찾아보게 만든다. 흥미롭고 가독성 있는 전개, 조바심과 안도를 넘나들 때의 속도감, 세심한 심리 묘사와 빼어난 비유, 위트까지, 장점이 많은 작품이다. 깨야 할 것들을 생각한다. 알, 틀, 프레임, 고정관념, 불치 진단, 상자가 어느 날 깬다기보다 녹을 수 있다. 윤재의 눈물처럼 온도를 잴 수 없는 뜨거움으로 말이다. 초등 고학년 이상, 연령과 상관없이 권할 만하다. 이 책의 행간과 여백에서도 오래 머물게 될 것이다.

책 속에서>

불을 끄고 책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내겐 풍경처럼 익숙한 냄새였다. 그런데 거기 무언가 다른 게 실려 있었다. 갑자기 마음속에 탁, 하고 작은 불씨가 켜졌다. 행간을 알고 싶었다. 작가들이 써 놓은 글의 의미를 정말 알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더 많은 사람을 알고 깊은 얘기를 나누고 인간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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