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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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장소, 없는 장소인 유토피아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 이상향을 뜻한다. 최선, 완전, 이상이라는 단어는 늘상 우리가 선망하고 추구하는 목표지점에 배치되고, 무엇과 결합해도 만족스러운 덕목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이상 사회는 질병 없고 위험이 없으며 눈물도 없으리라는 환상을 주고, 환상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는 마땅해보인다. 그 많은 감시카메라는 더 이상 사각지대를 허락하지 않고 철두철미 지킴이 역할을 한다. 안심은 때로 두려움 일부를 동반한다.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 장소라는 아이러니를 내포하듯, 유토피아의 반쪽 얼굴이 디스토피아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조지 오웰의 1984(정희성 옮김, 민음사. 2003, 1949, 444면 분량)는 디스토피아 문학의 대표격으로 <우리들(1922)>, <멋진 신세계(1932)와 함께 3대 디스토피아 소설 중 하나다. 책이 나온 1948년에 설정한 미래 시점이 아주 먼 미래로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변화는 급진적일 수 있고 회복 불가의 낙인이 절대적일 수 있다는 경고를 소설은 잘 보여준다. 조지 오웰은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히며 계급의식을 풍자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데 탁월하였다. 소설가이자 언론인, 비평가로 십 칠년간의 본격적인 작가 생활 중 마지막 작품인 1984는 그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된다.

 

소설 속 무대인 오세아니아는 작가가 구축한 디스토피아다. 오세아니아는 무엇보다 선명한 계급사회로 인구의 2퍼센트도 안되는 지배 계층인 내부당, 18퍼센트를 차지하는 지식인층인 외부당, 나머지 85퍼센트는 프롤이라 불리는 노동자 또는 최하층 무산계급으로 구성된다. 과거와 철저히 결별 할 뿐 아니라 해체하고 무화시키는 곳, 희망을 차단당하고 욕구를 무력화하는 전체주의 감시 사회는 다양한 요소들의 공조로 흔들림 없이 지탱된다. 포스터 속 눈동자는 감시카메라 기능을 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라는 글로 재차 강조한다. 영원히 끌 수 없는 텔레스크린은 영원한 세뇌를 장담한다. 슬로건과 신어는 시스템의 근간이다. 그 장치들이 어떻게 발명 되었는가 이의를 제기하고 여정을 추적하고 답변을 요구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잃었다. 시스템의 하위구조, 쳇바퀴의 부속품인 인간은 전적인 수용과 참여로 유일하게 허용된 삶의 방식을 따른다.

 

다만 윈스턴 스미스는 다른 선택을 한다. 그가 시작하려는 일은 일기를 쓰는 것”(p.16)이다. 일기쓰기는 유익은 찾기 어렵고 위험은 분명한 행위다. 그에게는 마침 구입해둔 노트가 있었고, “이 분 증오를 기억하기 위해서 쓰기를 선택했는데 무의식중에 페이지를 채운 글은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로 이는 사상죄에 해당한다. 사상범들은 밤중에 사라지고 등록부에서 이름이 지워지고 그에 관한 모든 기록도 삭제되어 결국 증발”(p.33)한다. 조작과 증발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진리부 내의 기록국에서 일하는 윈스턴은 누구보다 잘 안다. 인간이 소외되는 기록국의 광경은 카프카의 <>에 나오는 업무공간을 연상케 한다. 그의 일터는 오세아니아의 시민들, 무산계급인 노동자들에게 그에 알맞은 수준으로 낮춰서 되풀이”(p.63) 제공되는 거의 모든 분야의 정보를 생산한다.

 

2부의 기록은 사상경찰이라고 오해했던 줄리아와의 조심스런 밀회로 방향을 전환한다. 당의 강령에 관심이 없는 그녀에게 중요한 일은 오로지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그들이지만 함께하기 원하기에 둘만의 사생활을 누리고 싶다. “그것은 일부러 무덤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과 같았”(p.198)으나 게의치 않는다. “그런데 단순히 살아남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사는 게 목적이라면, 궁극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단 말인가? 사람들이 그들을 자신들과 똑같이 개조시킬 수 없듯 그들 또한 사람들의 감정을 변화시킬 수 없다.”(p.236)는게 윈스턴의 확신이다. 그는 자신과 동일한 입장이리라고 여겨왔던 오브라이언으로부터 형제단에 초대받는다. 비밀리에 넘겨받은 그 책은 조작된 세계를 설명하는 치밀한 지침서로 슬로건과 사회 구조, 빅 브라더 밑으로 내부당과 외부당, 프롤이 어떤 역학관계로 존재하는지 설명한다. 윈스턴은 새로운 가능성에 거의 근접했다고 여겼다. 적시에 필요한 소통이 이루어졌음을 의심치 않았다. 희망은 무산계급인 노동자들에게 있다고 다시금 확신하는 그때 새로운 대결, 막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카뮈식 인간조건을 윈스턴도 따르고 있었다. 그는 기록하는 자, 즉 깨어있는 자였고, 사랑하기 원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지켜냄으로 체제에 저항하고자 했다. 그는 조작된 인간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 이중사고에 속지 않는 인간이기를,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도 독자도 비참 끝에 납득할 만한 결실을 기대했으나 작가는 다른 결말을 준비한다. 분량상으로 간결하고 내용상으로도 단순한 3부는 과도할 정도의 구체적인 묘사로 윈스턴이 전 생애애 걸쳐 지켜내고자 했던 희망을 부순다. 작가가 형상화한 1984년에서 다시 40년이 지난 현재, 소설 속 많은 부분이 현실로 평행 이동하였음을, 그를 넘어 합동임을 부인할 수 없다. 작가가 구축한 세계관은 바늘 하나 떨어질 틈 없이 치밀하기에 경고는 더욱 섬뜩하다.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이 오히려 윈스턴의 상황과 심정을 가늠케 만든다.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는 허구가 아닌 지금도 진행중인 상황을 전달받는 듯하다. 희망은 무산계급에만 있다던 그의 믿음은 좌절되었다. 책은 여전히 묻고 있다. 왜 그들은 양은냄비와 같은 사소한 시비에만 사로잡히는지를. ”그런데 왜 그들은 좀 더 중대한 일에 대해서는 그 같은 함성을 지르지 않는 걸까?“(p.100) 그리고 의식이 없다면 반란 또한 기대할 수 없다고 답한다. 어디서부터가 감시 내 상태였을지, 처음부터였다고는 믿고 싶지 않고 소설이야, 라고 덮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안다. 작가는 마지막 작품, 마지막 부분에 부록으로 <신어의 원리>를 실었다. 사람을 규정하는 건 그가 쓰는 언어다. 그가 쓰는 말이 곧 그 사람이기에 생각을 규정하고 말을 왜곡하고 기록을 금지하고 검열하는 일은 가장 두려운 디스토피아일 것이다. 미래인에게 남기는 공개된 밀서와 같은 작품의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그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실들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그들은 큰 것은 못 보고 작은 것만 볼 줄 아는 개미와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점점 기억은 상실되고 기록은 날조되어 가는데도 인민들의 생활이 개선되었다는 당의 주장이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런 주장을 반박하거나 검증할 기준이 없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상황이었다.(p.131)


그건 단지 소극적인 것보다는 적극적인 것을 택했으면 하는 심리가 작용한 탓이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금 벌이고 있는 게임에서 승리할 수 없어. 하지만 같은 패배여도 더 나은 패배가 있는 법이야.”(p.192)

 

어떤 면에서 당의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얼마나 끔삑한 일인지도 납득하지 못할뿐더러 현재 일어나고 있는 공적인 사건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가장 악랄한 현실 파괴도 서슴지 않고 받아들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무지로 인해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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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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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김희정·조현주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23, 360쪽 분량)』는 한 사람을 그리는 개인적인 기록으로 시작하여 오늘을 살고 있는 모든 이에게 닿는 자전적 예술 에세이다. 미술에 관한 모든 건 부모님에게서 배웠다고 고백했듯이 저자는 어린시절부터 아름다움을 접하고 반응하는 일에 민감했다. 성장하면서 학문적 도구와 최신 용어로 “예술을 제대로 분석하는 법”32을 익히기 원했다. 그러나 자랑스럽던 형의 투병과 이른 죽음에 그는 추구하던 삶의 방향을 바꾼다. <뉴요커>의 책상으로 돌아가는 대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되어 “내가 할 유일한 일은 고개를 들고 있는 것”(p.33)으로 한정한다. 책은 시간을 벗어난 형을 기억하는 애도의 장과 시간을 초월하여 영속하는 예술의 찬란을 교차 서술한다. 독자는 이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게 된다.


책을 펼치면 ‘세계 3대 미술관’이라 불리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순간 이동하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관람객의 시선과 경비원 즉 내부 직원의 두 가지 입장을 활자를 읽어나가는 만큼씩 간접 체험한다. 아메리카 전시관의 고급 마호가니 가구 목재는 노예무역 초창기의 착취를, “특정 버전의 미국 이야기”(p.177)를 간직한다. 자물쇠 달린 금고가 아닌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p.132) 미술관이기에 일어났던 예술품 도난사도 등장한다. 미술관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의 세 가지 유형을 보면서 나는 어디에 가까운가 헤아려본다. 점차 지정된 자리를 지키기 바랬던 저자는 동료들과 애정을 담아 눈을 맞추는 관계가 되고, 경비원이라면 누구라도 어두운 푸른색 근무복 아래 숨겨둔 “비밀스러운 자아 하나쯤”은 있음을 알아차린다. 소통이 간직한 “격려의 리듬”(p.191)은 그를 비탄의 자리에서 끌어내기 시작한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한 지점이 아니라 연거푸 등장하기에 “가장”이라고 꼽을 수 없다. 예술 작품과 저자가 긴밀하게, 비밀리에, 충만하게 때론 고독하게,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결코 방해 받을 수 없는 차원에서 나누는 감정이 백미다. 예술작품에 닿기를 원했던 저자가 작품 앞에 서서 응시하고 귀 기울이고 단 둘만의 서사를 쌓아올리는 순간들은 무척 아름답다. 제대로 분석하고자 전략을 세웠던 저자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나만의 방식”을 갖추게 된 변화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는 일, 사조와 지식적 배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판단하지 않고 시간을 허용하는 일은 내가 지난 2년간 배운 예술 향유와도 맞닿아있다. 저자는 티치아노의 <남자의 초상>에서 “그 자체로 완전하고, 밝고,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고, 퇴색하지 않는 그 무엇”, “인간의 영혼이 그랬으면 하는 바로 그 상태”(p.46)를 발견하고 미술관을 떠날 때도 형의 초상화 삼아 마음에 품는다.


12장은 저자가 쌓아온 예술관을 정리하고 13장은 다시 세상 속으로 출발하는 희망으로 맺는다. 12장의 화두는 “조르나타”이다. 미켈란젤로와 그의 조수들이 매일 아침 새로 바른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날 완성해야 할 부분에 대한 밑작업”을 하였고 이를 이탈리아어로 “하루의 일”이라는 뜻의 “조르나타”(p.280)라고 한다. <지스 밴드 퀼트 작품전>에 전시된 퀼트 작품들도 블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저자는 이를 루시 T. 버전의 조르나타라고 본다.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의 의미를 조르나타에서 찾을 때 독자는 나의 조르나타는 무엇인가, 결국은 유일한 작품으로 완성할 오늘치의 조르나타는, 하고 묻게 된다. 마지막 장에서 그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전체를 견인할 한 작품을 결정한다. “확실히 메트 바깥으로 품고 나갈 수 있는”(p.320) 한 점이다. 역시 질문은 독자에게 돌아온다. 당신에게 그 한 작품은 무엇인가요.


서평은 위에서 마무리되었다. 지금부터는 안 쓰느니 못한 사족이 분명하다. 이 책은 읽기에 너무 황홀했고, 이 서평은 쓰기에 너무 괴로웠다. 어떤 면에서 유용한 서평은 거리두기에서 시작된다는 입장인데 거리두기에 실패한 서평이었고, 이입이 너무 많이 되어 속절없는 내적 수다에, 슬프고 신나는 환호에 우왕좌왕했다. 세계의 유명 미술관을 많이 방문해 봤다면 책을 읽기에 더 두근거릴 수도 있겠지만 심장 떨려서 방해될 수도 있을 테다. 그런 의미에서 워싱턴 D.C.에 있는 몇몇 미술관을 잠시, 스텐포드 대학 칸토 미술관은 여러 번 방문했던 나는 얼음 땡 하고 멈추었던 순간, 빨리 더 많이 봐야해 라며 속보로 내달리던 순간, 지금 이 행동을 하면 과연 저 경비원은 내게 다가올 것인가를 가늠하던 순간들을 소환했다.


특히 지난 2월 산호세 이집트 박물관에 방문했을 때의 예상 밖 광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엄중하고 침묵 가득한 고대의 시간으로 들어가리라 기대했으나 웬걸, 박물관 앞부터 노란 스쿨버스의 장사진이었다. 여행기를 정리하다가 게으름 때문에 멈춘 상태였는데 덕분에 이집트 박물관 관람기는 남길 수 있었다. 이 책은 독자의 여러 갈래 욕구를 채워줄 만 하다. 다양한 정보를 주는 실용서의 역할도 하지만 무엇보다 예술 향유의 본질을 감동적으로 포착한다. 포착한 지점을 전달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인데 그 또한 탁월하다. 관습적이고 식상한 문장, 불필요하거나 과장된 비유 없이 처음 보는 듯 신선해서 저자의 감정에 상당히 근접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그의 치열한 글쓰기가 책을, 책보다 삶을, 다가올 미래를 빛나게 하고 독자도 함께 기뻐하게 만든다. 줄이고 줄여서 여섯 개의 논제를 만들었는데 시립도서관 성인 독서토론에서 다시 한 번 잊지 못할 장면들을 소환하게 될 것이다.


책 속에서> 


미켈란젤로를 미켈란젤로로 만드는 건 그다음에 그가 한 일이다. 습작을 해본 다음 그는 일어나서 그 스케치를 현실화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는 죽기 며칠 전까지도 말을 잘 듣지 않는 대리석을 망치와 끌로 두드리고 있었다.(p.292)

 

이제 더 이상 전성기 르네상스와 같은 개념을 빌어 생각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새로 만든 회반죽을 바르고, 거기에 그림을 그리고, 회반죽을 조금 더 바르고, 거기에 그림을 조금 더 그리는 한 사람을 생각할 것이다.(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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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세계사 - 생명의 탄생부터 세계대전까지, 인류가 걸어온 모든 역사
허버트 조지 웰스 지음, 육혜원 옮김 / 이화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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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펜은 이 순간에도 세계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번 장의 소제목을 파국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우려의 정도는 별 다섯, 극심으로 기울 것이다. 이번에도 다음 장, 다음 페이지로 무사히 바통을 넘길 수 있기를 바라며 역사로부터 배우기 위해 잠시 뒤돌아본다. 인류의 세계사(육혜원 옮김, 이화북스, 2024, 392쪽 분량)는 하버트 조지 웰스가 집필한 역사서로 아인슈타인의 추천을 받은 저작이다. 하버트 조지 웰스는 올더스 헉슬리의 조부인 생물학자 토마스 헉슬리를 만나며 과학에 관심을 가진 이후 정치, 문학 등으로 초점을 넓혀간 소설가이자 사회학자, 문명비평가이다. 또한 SF 문학의 창시자로 불리며 베르나르 베르베르, 조지 오웰 등의 작가들 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독자를 일깨운다. 작품으로 타임머신, 투명인간, 우주전쟁등 유명 작품을 비롯해 맨해튼 계획”(p.6)의 아이디어를 발견케 한 해방된 세계가 있다. 역사학자가 아닌 문학가가 쓴 인류의 세계사는 망각의 강을 거슬러 제대로 보는 눈을 지니자고 권한다.

 

인류의 세계사(A short history of the world)"대중을 상대로 한 최초의 한 권짜리 역사 책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웰스의 통찰력으로 초판 출간 당시 나치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한다.(p.7) 많은 세계사 책의 첫 장을 문명의 탄생이 차지하는 것과 달리 저자는 생명의 탄생부터 열어간다. 뒤를 잇는 인류의 기원에서는 원시인들의 사고방식이 어떠했을지 추론하며 체계적 사고는 비교적 늦게 발달한 능력이며 지금도 진정으로 자기 생각을 통제하고 정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전히 삶의 대부분을 이끄는 것은 상상과 열정“(p.48)이라고 밝힌다. 이 상상과 열정이 지혜와 철학을 꽃피울 때 인류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사상의 역사“(p.83)라는 시각처럼 사상과 삶이 밀착함으로 발전해가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상상과 열정은 나의 지경을 공격적으로 넓혀가는 창과 칼의 싸움을 본격화하고, 승패의 자리바꿈은 끝을 알 수 없게 된다.

 

마지막 10,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에서 저자는 1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 회담인 베르사유 조약을 언급하면서 진정한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약 20년 뒤에 더 큰 규모의 전쟁이 일어나리라 예측하는데 불행히도 실현되고 만다. 또한 자원 개발을 위해 지구 차원의 종합적인 통제 체계가 필요하고 전염성 질환과 인구 증가 및 이동 역시 전 세계 차원에서 다루어야”(p.369)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 모두의 진정한 국적은 인류’”(p.370)라고 강조한다. 예언자와도 같은 저자에게 현재였던 그 시간이 먼 과거가 되어버린 지금, 돌이키면 좋을 순간들이 이후로 켜켜이 쌓였다. 극단적 이기심은 첨예한 갈등을 불렀고 자연 파괴와 재발하는 전쟁이 공멸의 위기로 밀어붙이고 있다.

 

인류의 세계사(A short history of the world)는 원제와 같이 역사의 주요 장면을 간략히 다루지만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 주제별로 기술한 역사서가 아니라 시간순 구성이고 객관적 사실과 저자의 견해가 균형을 이루어 독자의 관점도 세워갈 수 있다. 또한 사실 나열 위주가 아닌 스토리텔링식 서술이어서 흥미롭고, 가독성 있는 개론서이자 입문서로 추천할 만하다. 장점을 덧붙이자면 지도와 도판자료, 사진 등이 풍부해서 각주를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 이해를 돕는 덧붙인 글도 부가자료로 정보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때론 진지하게 때론 위트 있게 인간의 속내를 포착하는 문장이 인상 깊다. 저자는 인류가 이제 겨우 청소년기에 도달했다고 보았다. 인류의 역사는 마음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 목적도 의미도 업는 싸움을 종식시켜줄 평화를 행해 가고 있으며 이 훌륭한 과업이 반드시 완수될 것이라는 믿음을 드러낸다. 믿음이라기보다는 간곡한 부탁이자 기원에 가까운 말에 우리는 응답할 수 있을까. 현자가 보내는 과거의 편지 같은 책으로 청소년과 성인에게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새로운 발견과 발명은 늘어갔지만, 지적인 성찰은 더뎠다. 인류의 정신은 결국 20세기 초에 일어난 거대한 참사들이 벌어진 뒤에야 각성하였다. 16세기 이후 지난 4세기 동안의 인류 역사는 위험과 기회에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의 역사라기보다는 감옥에 갇혀 잠들어있는 역사에 가깝다. 잠든 인류를 가두어두는 동시에 보호해주기도 했던 감옥에 불이 났지만, 인류는 어색하고 불편한 듯 뒤척이기만 할 뿐이었다. 불의 열기와 바삭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말이다.(p.270)

 

하지만 우리 모두의 진정한 국적은 인류이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세대가 전쟁과 폐허, 불안과 곤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또 언제쯤 그러한 불행에서 벗어나 위대한 평화의 새벽에 이르게 될지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분명히 바로 그러한 평화, 곧 마음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 목적도 의미도 없는 싸움을 종식시켜줄 평화를 향해 가고 있다. 그리고 이 훌륭한 과업은 반드시 완수될 것이다.(p.370)

 

(서평단_출판사 도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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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댐로쉬의 세계문학 읽기
데이비드 댐로쉬 지음, 김재욱 옮김 / 앨피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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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책장에 꽂혀 있던 세계명작전집은 꿈과 사랑, 모험과 희망으로 동심을 이끌었다. 온세상이 책꽂이 안으로 사이좋게 모여있는 형국이었고 그 세계는 무한할 것 같았다. 성장하면서 지금까지 보았던 건 빙산의 일각이었음을 깨닫고 축약과 편역을 아닌 완역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출발점 회귀현상이 벌어졌다. 선택해야 할 항목도 늘어났다. 이 작품은 누구의 번역으로 읽어야 할지, 어느 출판사가 나을지 정보를 모으고 판단을 내린다. 동시에 늘 아쉽다. 원어로 읽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마냥 부러워하며 현재 상태 최선과 타협한다. 지금까지 읽고 써온 내 서평의 많은 부분을 세계문학이 차지하므로 스스로를 총망라 서평러, 다나와 서평러가 아니라 편애 서평러라 칭했다. 그렇기에 댐로쉬의 세계문학 읽기는 반드시 읽어야 할 저작으로 대기 도서 리스트 상위에 자리 잡았다.

 

데이비드 댐로쉬의 세계문학 읽기(김재욱 옮김, 앨피, 2022, 2018, 430쪽 분량)는 세계문학 독자를 위한 안내서이자 입문서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입문서라기에는 일반 독자에게 난도가 있지만 저자는 복잡해보이고 때로 굴곡진 길을 기꺼이 따르려는 열정 있는 자들을 불러 모은다. 하버드대학교 비교문학 학과장이자 세계문학연구소 소장이기도 한 데이비드 댐로쉬는 전 세계 50여개국에서 세계문학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한 두 세기, 한 두 지역만의 전문가가 아닌 무려 4000년 지구문학의 종사자임을 자처”(p.15)하며 시공을 넘나든다. 역자는 세계문학 읽기에 전력해온 댐로쉬 작업의 정화가 바로 세계문학 읽기라고 전한다.

 

역자는 서두에 오늘날 세계 문학의 풍경을 조망한다. 그는 세계문학이 일으킨 변화 중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텍스트 산출량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두가지 이론을 대비한다. 프랑코 모렐리의 멀리서 읽기개념은 꼼꼼히 읽기와 대별되고 대략적인 얼개 파악하는 법’, ‘불필요한 부분 넘겨 읽는 법을 비롯한 읽지 않기의 방법론”(p.14)과 닿는다. 이와 같은 경향에 동의하지 않는 댐로쉬는 다양한 작품을 최대한 많이, 미련할 정도로 진득하게 읽어 나가는 경험론적 꼼꼼히 읽기야말로 작품에 대한 더 고차원적인 통찰을 추동하는 최선의 방략”(p.15)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은 공감하겠지만 과연 가능한 일인가는 별개의 문제로 남는다.

 

세계문학용어는 괴테가 비서인 요한 페터 에커만에게 남긴 말 중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저자는 이 책이 세계문학을 이해하고 즐기면서 읽기 위해 개발하고 다듬어야 할 일련의 기술을 중심으로 구성했다고 밝힌다. 1<문학이란 무엇인가>는 문학 개념 자체, 문학의 범주를 살펴보고 독서의 방식편에서 두보의 시와 윌리엄 워즈워스의 소네트를 비교 분석한다. 소설의 사례는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작품이 쓰여진 서기 1000년경의 시대상, 작품의 내용과 의미, 지금 발생하는 질문과 접근법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읽고 또 읽으면 각 작가가 이룩한 작업의 특수성을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p.83)라고 쓰는 한편 더 많은”(독서)보다 가장 중요한힌트를 건넨다. “(전략)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초기의 평평한 그림이 3차원으로 펼쳐지는 발판을 해당 전통에서 확보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거울을 통과해 새로운 문학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p.84).

 

2<시간을 가로질러 읽기>에서는 그 매력을 전임 작가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응답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세기를 가로지르는 상황, 인물, 주제, 이미지의 전개 과정을 추적할 기회를 얻게 된다는 점”(p.89)으로 본다.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오디세이아>를 글로 썼을까, 다양한 길이의 보관 문구와 고리 구성 등을 활용한 구술기법으로 전해지지 않았을까 추측하며 문자로 쓰인 최초의 시와 <길가메시 서사시>를 추적한다. 또한 시적 서사시가 방대한 산문소설로 대체되는 지점에서 저자는 <율리시스>의 예를 든다. “가장 많이 쓰인현대소설 중 하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조이스는 베르길리우스조차 넌더리를 낼 만한 열의로 여러 편의 원고를 작업했다.”(p.102) 이 책을 읽으면서 필독도서 목록이 늘어가는 속도를 적절히 조절하는 건 쉽지 않다.

 

3<문화를 가로질러 읽기>에서는 외국 작품을 읽을 때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한계와 난관을 짚어보고 어떻게 헤치고 나아갈지를 숙고한다. 저자는 희곡과 단편소설의 사례를 드는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인도 시인 칼리다사의 <샤쿤탈라>가 희곡의 예로, 루쉰의 <광인일기>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가족의 유대>를 단편소설의 예로 든다. 저자는 <광인일기>의 서문을 재독하며 화자가 만나고 있는 대상의 실체를 단정하지 않는다면 모든 가능성을 열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전한다. 또한 더 많은 작품의 예를 들어 그 설명이 지나치게 모호하거나 신뢰할 수 없어 내러티브의 결을 거슬러 읽어 그것을 변별해야 한다”(p.184)고 밝힌다. 역시 독자는 열심을 내야만 한다. 4<번역으로 읽기>에서는 문자주의의 극한인 직역, 자유로운 번역인 모방 번역, 직역과 모방의 중도로서 의역을 살펴본다.

 

5<멋진 신세계>는 낯선 곳으로 던져진 이들, 요셉과 요제프 K(소송)부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이븐 바투타의 <여행>, 그리고 <신곡>, <돈키호테>, <서유기>로 독서 여행을 이끈다. 특히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각 장이 하나의 상징적인 도시를 그려 내는 보석 같은 산문시라고 근사하게 소개한다. 6<제국을 쓰기>에서는 식민지, 탈식민지 작가 앞에 놓인 언어 선택 문제로 토착어로 작품을 쓸지, 제국어로 쓸지 판단하고 실행에 옮긴이들을 살핀다. 7<세계적 글쓰기>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빛을 보지 못한 지역에서 태어났던 카프카, 보르헤스, 베케트가 사실주의 규범을 벗어나 신비롭고 상징적인 장소를 작품 배경으로 삼은 점을 지적한다. 국제적 성향의 지역 작가가 선택한 탈지역화된 방식의 글쓰기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세계문학 독자의 로망을 자극한다. “작가가 살았던 곳에서 주의 깊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도스토옙스키의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무라사키 시키부의 교토를, 비록 그 이후에 숱한 변화가 일어났더라도 더 잘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p.405)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문학기행이 기약 없기에 관련 도서로 대리 만족하지만 아쉬움은 커질 뿐이다. 또한 무엇을 읽을지를 선택하는 방식도 제안하는데 내가 사랑하는 작가가 사랑하는 작품”(p.397)을 찾아 나서거나 의미 있는 흐름이나 문학 운동 등을 주제 삼아 읽기도 권한다. 두 가지 모두 끝이 없는 전진이고 애석하게도 인간에게는 한정된 시간만이 허락되었다. 책을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자괴감, 읽어도 완전무결하게 읽었다고 자신할 수 없는 불안, 불안을 줄이겠다고 기록으로 남기는 자신과의 약속도 완벽은 보장할 수 없고 읽는 시간만 빼앗기는 건 아닐까 이중으로 고심을 부른다. 그래도 읽는 수밖에 없고 읽을 수 있어 감사하다. 그러니 이 책은 얼마나 특별하겠나.

 

본문을 정리해주는 서론, 충실한 각주, 매 장마다 도입과 결론에서 다시 한번 내용을 간추려주는 구성은 만족스러운 부분이다. 다만 학구적이고 때론 현학적인 문체는 심리적 거리를 체감케 해 아쉬웠다. 주요 부분이나마 정리해보겠다고 의욕을 내어 보았지만 가당치 않다. 70여 권에 이르는 책들이 듀엣이나 트리오로 등장할 때 푹 빠져 읽다보면 어느 사이 다른 책들로 자리바꿈하는데 하나같이 명저라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속도를 가까스로 따라갈 때 독자는 읽어내지 못한 작품의 경험하지 못한 저작 환경과 작품의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 상상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세계문학을 향한 저자의 열정과 헌신은 매우 인상 깊다. 댐로쉬의 책은 잠시 행복한 순간의 무수한 연결을 경험케 한다. 그리고 나면 무더기 책 목록과 읽으리라, 하리라, 다시 보리라 등 다양한 의지 표현 종결어미를 되뇌게 될 것이다.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챗 속에서>


제임스 조이스는 아마도 지금껏 쓰인 가장 세졔적인텍스트일 피네건의 경야에서 이상적인 불면증에 시달리는이상적인 독자를 상상한 적이 있다. 그 이상적인 불면증을 꿈꾸는 이상적인 독자가 되길 강요하는 광활한 작품 세계, 이보다 더 정확히 세계문학을 정의하는 말은 없을 것 같다.(p.39)

 

(전략)방금 논의된 가능성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속같은 동시대 세계 여러 곳에서 쓰인 다양한 모더니즘적 내러티브를 환기한다. 이 작품들의 특징은 그 설명이 지나치게 모호하거나 신뢰할 수 없어 내러티브의 결을 거슬러 읽어 그것을 변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가들 중 누구도 언급한 이야기들을 쓸 때 서로의 작품을 알지 못했겠지만, 모두 도스트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같은 원형적 모더니즘에 정초하고 있었다. 문화를 가로질러 읽으면서 우리는 분리된 동시에 연결된 루쉰과 그의 위대한 모더니스트 동료들이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재설정하는 다양한 방식을 사유해 볼 수 있다.(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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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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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지나온 과거는 어쩔 수 없는 고정이고 불변이라는 의미에서 끝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은영의 소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문학동네, 2023, 352쪽 분량)은 끝나도 끝난게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온전한 마침을 위한 복기는 그 시간 함께였던 이들을 향하는 깊은 포옹이고 그 포옹 끝에 안기는 건 자기 자신이다. 과거는 털고 묻어야 할 게 아니라 응시하고 언어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걸 배운다. 고되고 불편한 과정을 작가가 대신해줄 때 어떤 문장에서는 속이 시원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부끄럽고, 때론 독서실인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앉아있다. 한뼘 위로받기도, 다행이야 싶은 지점도 만난다.

 

최은영은 2013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 시작하였고 작품으로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장편소설 밝은 밤등이 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등단 10년이 되는 해에 지면에 발표했던 중단편 7편을 묶어낸 소설집이다. 이중 표제작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2020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말에서 최은영은 자신의 결핍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핍을 적대하지 않고 동행하겠으며 무엇보다 찾아오는 감정을 마다하지 않고 지켜보겠다고 전한다. 이는 살아가는 모두에게 꼭 필요한 태도일 것이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읽기와 쓰기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공부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는 길이 무엇으로 채워지는지, 그 길을 걸어가는 두 여성을 통해 묻는다. 영어 에세이 강사는 희원에게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멘토였고, 잃어버린 멘토가 된다. 희원은 그녀가 남긴 희미한 빛,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내뱉은 흰 숨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그 마음을 짐작하게 된다. <>은 화자 자신(해진)을 이인칭 대명사 당신으로 칭하며 대학의 교지 편집부에서 만났던 정윤, 희영과의 시간을 복기한다. 자신을 당신으로 부르는 거리두기는 화자에게 더욱 엄격하겠다는 의지로 다가오고 독자 역시 긴장하여 세 인물의 선택을 읽는다.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후략)”(p.52) 이런 글은 이미 글이 아닐 것이고 글 안에 증명할 수 있는 실천이 녹아난 행위의 결집이지 않을까. 결국 글처럼 삶은 살아진다. 어떻게 쓸 것인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와 다르지 않다.

 

<일 년>은 이야기가 주제다. 이야기 수위 지침이라는게 있으면 어떨까. 적정선을 넘어 실례의 영역으로 무단 침입하는 상황을 그려볼 때 말하는 이에게 더 실례일까, 듣는 이에게 더 실례일까. 가끔 생각해온 이 문제가 여전히 어렵다. 그녀와 다희가 카풀을 하면서 일 년간 보낸 시간, 나눈 이야기를 그리는 <일 년>은 이야기의 대척점에 기계를 놓는다. 감정이 없고 단단한 속성은 오히려 안도감을 준다. 이 작품에서 희미한 빛은 이야기다.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췄다.”(p.123) 사라지는 것 없이 살아있는, 그 자체로 온점이 찍히는 결말도 담백하고 거리를 두는 시점도 이를 돕는다. 세 번째에 <답신>이 실렸다. 책 말미 해설에서 평론가 양경언은 <답신>언니의 개인사를 넘어서는 사회가 구조적 취약성의 문제를 방기할 때 벌어질 수 있는 비극”(p.335)이라고 본다. 괴로운 이야기인데 현실 밀착형 사건이라 더 괴롭고 무력하게 읽고 있다는게 또 괴롭다. 그러나 간절한 소망을 담아 “‘그래도남기는 이야기로”(p.336) 라는 데에서 중요한 자리를 잡는다.

 

<파종>은 희미할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회복한다. <이모에게>에서 희진은 방화문을 닫듯이 마음을 닫아버리면 나는 언제나 내 마음의 불길로부터 안전했다.”(p.258) 하지만 닫히지 않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고백한다. 소설은 마음의 안전장치를 사수하는 열 가지, 스무 가지, 백 한 가지 방법 찾기가 인생인가 자문하게 한다. 하지만 결국은 사랑하는 이가 안심하기를, 그의 손을 이끌고 조종실에서 봤던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모아”(p.264) 이모에게 보여주기 원한다. 이 빛은 희미하지 않다. “저 너머의 눈빛”(p.265)은 꺼지는 법이 없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은 기남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부끄러워도 돼요.”(p.319)라고 말한다. 소년의 천진한 목소리는 단번에 어떠어떠했던 것이, 하지 못했던 것이 부끄러워 오래 자신을 옥죄었던 결박을 푼다.

 

작가는 스며드는 문장으로 말을 걸어 놓치고 온 것을 살피게 해준다. 외면하고 온 것을 다독이게 만든다. 무시로 겪는 감정을 친절하게 언어화해서 구체적으로 알려줄 때 이것만으로도 힘을 얻는다. <일년>에서 서운함, <답신>에서 수치심을 다시 들여다본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 기만의 이유, 기만이 쓴 가면, 작동과 결과를 본다. 이번에는 밝은 밤이 아니다. 희미하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시공간을 밝힐 수 있을까? 우리 안에 흩어져 있는 어떤 때, 어떤 곳까지 파고들어 정확히 조명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럴 수 있다면 어둠에 익숙해진 시각이 통로를 발견하고 탈출의 가능성은 보장받는다. 희미하지만 사그라들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뿌리 내리는 이야기들은 뿌리에서 잔뿌리로, 다시 솜털로 뻗은 끝에 조용히 단물을 빨아올린다. 버석거리던 갈증은 가라앉는다. 오아시스 곁에 마음 내려놓고 쉴 수 있다면 빛은 희미해도 고맙다. 이 고마운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닿기를.

 

 

책 속에서>

그녀가 공부하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순간에 대해 쓴 글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퇴근해 책상 앞에 앉아 책에 밑줄을 긋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순간에 투명 망토를 두른 것 같았다고 그녀는 썼다. 세상에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고. 그녀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세상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보다도 언제나 더 가깝게 느껴졌다고 썼다. 그럴 때면 벌어진 상처로 빛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고, 그 빛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더 가보고 싶었다.’ 그녀는 그렇게 썼다. 나는 그녀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그녀의 언어가 나의 마음을 설명해주는 경험을 했다.(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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