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퇴근해 바로 지하철에 몸을 실었습니다. 서울의 극서라고 볼 수 있는 신월동이 목적지였는데요. 지하철 5호선 신정역 인근에 위치한 헌책방이었습니다.






헌책방 입구 근처에 도착해서 찍은 사진입니다. 책 구매와 판매를 무게로 한다는 문구가 인상적 입니다.





모두 합쳐 9600원에 구매를 했는데요. 일반적인 중고 서점에 비하면 너무나 저렴한 가격에 구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1kg당 3000원으로 책정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움직이는 책의 1999년 초판 맨스필드 파크였습니다. 눈에 보이자 마자 바로 챙겼습니다.





이미 열린책들에서 꽤 많이 판매한 E, M, 포스터의 전망 좋은 방입니다. 이번에 발견한 판본은 동문사 판인데, 알라딘 서점에서 정확한 서지 정보가 나오지 않더군요. 1992년 판입니다.




저명한 스릴러 문학의 대가 마이클 크라이튼, 시드니 셀던과 비견된다는 딘 R. 쿤츠의 섀도파이어도 발견했는데요. 밤에 시간 때우기 목적으로 한번 읽어볼까 싶어 구입했습니다. 1994년 호암출판사 판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책방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꼼꼼한 사장님의 손길 때문인지 각 서가에는 꽤 분류가 되어 책들이 꽂혀 있었는데요. 나중에 한 번 더 시간을 내어 방문을 해보려고 합니다. 책값이 너무나 저렴해 개인적으로 정말 마음에 들었던 헌책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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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1-12 05: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익한 정보네요.

베터라이프 2024-01-12 15: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미미 2024-01-12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무게로 책을 판매한다니 고급정보군요! 베터님 즐거우셨겠어요^^ 절판되어 구하지 못했던 책이 있는지 전화해봐야겠습니다.

<전망좋은 방>좋아하는 소설입니다. 영화까지 찾아봤었어요. 저도 새책보다는 중고책을, 중고책보단 도서관을 이용하는 한해를 보내고싶어요.

베터라이프 2024-01-12 19:02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미미님 ^^ 책방에 찾아가기 좀 난해했지만 가보니까 꽤 좋은 책들이 많았습니다 ^^ 이만하면 책값도 저렴하고 집이 가까웠으면 매일 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요즘 케인스 평전을 읽다보니 블룸스버리 그룹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네요. E. M 포스터도 버지니아 울프 만큼은 아니지만 그 그룹에 관여되어 있더라구요. 우연히 그의 책을 구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 미미님도 부디 천운으로 득템하시길 바랍니다 ㅋㅋ
 
엎드리는 개 안온북스 사강 컬렉션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유진 옮김 / 안온북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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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옥시타니 레지옹의 카자르크에서 태어난 프랑수아즈 사강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큰 명성을 얻은,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였습니다. 부유한 부르주아 부모 밑에서 자라난 그녀는 친증조모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러시아인이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익히 알다시피 필명이기도 한, '사강'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한 인물에게서 따온 것이기도 합니다. 사강은 평생에 걸쳐, 두 번의 결혼 생활을 했는데요. 첫번째 남편은 20살 연상의 아셰트 지의 편집자였고, 두번째 남편은 밥 웨스트호프로 젊은 미국인이었습니다. 이에 사강은 평생 동안 수십 편의 작품을 써냈고, 그녀의 삶이 관통한, 1950년대에 실험적인 누로 로망의 시대에 고유한 작품만으로 큰 명성을 쌓기에 이릅니다. 이와는 별개로 2000년대에 이르러 갑자기 그녀의 건강이 악화되었는데요. 그동안 쌓아 온 자신의 명성을 심각하게 추락시키는 소위 정치적 스캔들을 몸소 겪다, 2004년 9월 24일, 옹플뢰르에서 그녀는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녀의 이 책은 원제, "Le Chien Couchant"으로 지난 1980년에 초도 출간되었고, 본격적인 번역은 1984년에 이뤄집니다. 국내 번역은 2011년 번역판을 기본으로, 2023년 11월에 정식 출판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삶이 무미건조하고 무질서한 행렬에 불과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로제 게레는 어느 공장의 회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굴곡이 없는 그저 '평범한 삶'이 주어진,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무료한 지옥이 될 수도 있다는 금언이 문득 생각날 정도로 게레는 수동적이고 폐쇄적인 인물입니다. 사강이 유독 집중했던 주제이기도 한, 일상적인 남자에게 있어, 어느날 다가온 사랑과 열정에 대한 태도와 그로 인한 극적인 영향이 어떠한가와 더불어,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남성성이 제거된 반대의 극도로 불안한 인격이 예기치 않은 일들의 중첩으로 어떻게 파멸에 이를 수 있는지를 이 작품은 크게 두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그려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남성다움'이라는 단어에 대해 남들과 비슷한 보편적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성을 가진 한 인간을 그저 남성다움이라는 본래적 관념을 주입해, 그 사람의 인생 전반을 좌지우지 하게 만드는 일련의 사고들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는 충분히 공감하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기 주인공인 게레는 스스로 자초한 어리석음과 또한 주변의 오해와 그를 향한 굴절된 인식으로 스스로 망가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기도 한 데요. 그에게 유일하게 찾아온 '따뜻한 유대'는 어떤 식으로 귀결될지는 충분히 짐작이 되기까지 했습니다.

다만, 그의 하숙집 부인이기도 한 비롱 부인, 즉 마리아와의 육체적 관계는 다소 비뚤어진 게레의 의도로 말미암아 시작됩니다. 저는 이 서사의 초반이 조금 작위적으로 느껴졌는데요. 게레와 마리아가 나이 차를 극복하고 서로 대화와 공감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지만 극 초반에 게레가 비롱 부인을 다소 껄끄럽게 여겼던 부분을 고려해 본다면, '젊은 남자'와 '나이든 여자'의 연애 구도가 막 극적으로 다가오지는 못했습니다. 더욱이 게레에게 결여된, '남성적인 단호함'과 '결단력'으로 인한 스스로에 대한 경멸은 마리아와의 사랑으로 일정 부분 해소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이든 여자'를 정부로 두고 있다는 주변의 간접적인 경멸에 대해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태도를 지우지 못하는데요. 저자의 입을 통해, 다소 조심스럽게 회자되는 젊은 남자가 '나이든 여자'와 연애를 하는 모습은 소설에서 거의 터부시 취급 되고 있는데요. 이 점은 현재의 사회적 공감대와도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바에서 보여지는 게레와 마리아의 '늙은 여자', '이모'등을 통해 벌이는 한 차례의 촌극은 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데요. 이와 유사하게 나이든 남자가 젊은 여자를 연애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보통의 사람들은 그 나이든 남자가 젊은 여자를 돈으로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고 흔히 생각할 겁니다. 또한 영화 '귀여운 여인'도 그렇거니와, 이러한 소재의 작품들은 의외로 자주 보이기도 하는데요. 반대로 젊은 남자가 나이든 여자를 만나는 상황은 전자와는 상당히 다른 어감을 갖고 있습니다. 혹자들이 말하길, 이는 부자연스럽고 심하게 말하면 역겨울 정도로 인식하기까지 하는데요. 이러한 인습적 배경은 혹여 일반적일 수 있는 관계에 대해 세인들의 '이성적 판단'을 다소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게레와 마리아 사이에는 이런 전자의 인습적 틀 말고도 마리아에 대한 누구나 짐작할 만한 반전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극 초반에 게레가 마리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혹은 느낌은 바로 이러한 반전과 연결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요. 여기에 게레가 릴에 위치한 고급 바에서 벌인 난투극과 자신과 마리아 사이의 연결 고리를 갖고 있는 '개'를 둘러싼 페레올의 협박 사건은 극의 반전을 주도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게레가 스스로 능동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것은 그가 강조하는 '따뜻한 연대'에 이른 애정으로, 오직 그가 원하는 사람이 '마리아'임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는 점은 자신에게 있어 삶 자체를 변혁시키는, '넥스트 레벨'그 자체가 아니었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물론 초반에 그가 마리아와 같은 늙은 여자에 대해 갖는 사회적 통념을 완전히 극복하기는 어려웠지만 말입니다. 이는 그가 냉혈한 범죄자 마냥 사람을 17차례나 칼로 찌르지 않았음에도, 누군가를 '17차례나 찌를 수 있는' 결단력의 증거가 거짓이 나마 절실히 필요했던 굴절된 인물로서, 마침내 그러한 왜곡된 인식 하에, 진정으로 스스로 원하는 사랑을 갈구했다는 점은 그의 인생 자체에서 필연적으로 비극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몇 번의 어리석은 결정과 선택을 통해, 진실로 그 같은 일들을 후회하다 결국 비극적 사랑으로 구원 받는다는 이런 이야기의 모체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그래서 거의 명확하다고 생각됩니다.




- 늙은 여자와 소심하고 남성성이 결여된 젊은 남자의 연애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어쩌면 사강이 다루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너무나 작위적인 설정이 몇 차례나 극에 등장해, 그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소 부족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기도 한 데요. 그럼에도 내면의 문제와 사회적 통념, 이 두 가지 특이점을 소설에 녹인 것은 어느 정도 신선하기는 했습니다.   

그 눈빛이 탐욕스럽고 위협적으로 느껴진 게레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무서웠다이 여자를 무서워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는 자신을 무자비한 범죄자로 바라보던, 그래서 온종일 진정한 남자로 살게 했던 그녀의 사자같이 형형한 시선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두려웠다.

"모두가 이 진창에서 벗어나려면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걸 보유주기만 할 뿐이지 방법 같은 건 없어. 각자 알아서 하는 거지."

"남자들은 항상 어딘가에서 남성성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지. 사무실에서든 여자들에게서든 늙은 말한테서든, 하다못해 축구장에서든 말이야. 남자들은 항상 그걸 증명해 보이려고 해. 하지만 당신의 상대는 여자가 아니잖아."

그는 누구에게나 그걸 털어놔야 하는지 몰랐지만, 관념의 법정이 어디에선가 그가 호소하러 오길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신경질적이고 고달픈 부모, 쪼들림, 중간쯤 되는 성적, 졸업, 좌절된 야망, 부모의 죽음, 군대, 창녀, 첫사랑, 회계학과, 상송에서의 인턴 생활 등등. 게레는 자신의 삶이 무미건조하고 무질서한 행렬에 불과하다는 것을, 특히 사랑과 모험의 왈츠와도 같은 그녀의 과거와 비교하자면 어떤 매력도 없는 잡동사니에 불과하다는 것을 진작에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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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12-26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강의 소설을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어떨지 오래 고민했습니다.
가장 최근에 읽었던 작품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었거든요. 그런데 베터님 리뷰를
보니 궁금하네요. 읽어봐야겠어요!ㅋㅋㅋㅋ 소설도 매섭게 읽으시는 베터님^^

베터라이프 2023-12-26 22:40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미미님 ^^ 제 개인적인 평가이긴 하지만 사강의 다른 작품에 비해 약간 사건의 연계도 그렇고 작위적인 느낌이 있어요 ㅠㅠ 물론 이 작품에 한해서 말입니다. 그래도 사회적 통념에 대한 약간의 우화로 이해하면 꽤나 생각할 거리가 있습니다 ^^; 제가 스포일러를 최대한 자제하며 썼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 감안하시고 즐겁게 접하시길 빌어요 ^^ 그나저나 무덤에 있는 사강 여사께서 혹여 저를 원망하시지는 않겠죠? ^^;;;;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 지성사로 보는 민주주의 혐오의 역사
김민철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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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 교수는 서울대 서양사학과에서 학부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의 역사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이화여자 대학의 사학과 강사를 거치면서 현재는 성균관대 사학과 조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고 볼테르와 콩도르세와 같은 당시 정치와 사회에 진보적 발자취를 남긴 사상가들과 그들이 관여했던 지성사에 전반에 대해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그는 공화주의를 비롯, 민주주의와 근대에서의 인민이 처한 문제, 엘리트가 기반이 된 대의 민주제 등 소위 계몽주의가 '접착제'가 된 당시의 급격한 변화와 혁명의 과정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는데요. 바로 여기의 이 글 역시 이러한 맥락 가운데서 도출된 논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글은 2023년 5월, 저명한 출판사이기도 한 창비에서 출판되기에 이릅니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비롯된 소위 민주제는 저자의 분석대로 '민치제'와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직접 민주주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연결된다고 여겨지는데요. 일전에 읽은 한스 포어랜드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이 글의 저자와 비슷한 입장이었습니다. 다만, 고대 그리스 이후, 광범위하게 인용되고 있는 '민주제', 혹은 '민주주의'는 엄밀히 말하자면 민치제와 상당히 다른 개념임을 먼저 인지하고 나서, 저자의 이 논저를 일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저자는 글 서두에서 이와 같은 오해의 부분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연유로 근대 이전까지 유럽의 수많은 사상가들이 왜 '민주주의'를 극적으로 혐오했는지 이를 이해할 수 있기도 한 데요.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폭넓게 이해하고 있는 정치체로서의 민주주의는 인민의 주권이 제도적으로 위임된 형태의 소위 '대의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 정치사상가들이 기본적으로 인지하는 이 대의 민주주의는 다수를 통치하기 위한 엘리트 계층의 간접적인 체제로서, 이를 아주 간단히 설명해 보자면 '우리의 주권'을 이들 엘리트 계층에게 위임하여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형태로 볼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이 책에 대해 놀라웠던 부분은 우리가 알고 있는 루소의 전반적인 이해가 상당히 왜곡되었다는 사실이었는데요. 이는 마찬가지로 견고한 도덕철학자이기도 했던 애덤 스미스를 그저 자유 시장의 화신으로 강요하는 수많은 경제학자들의 그릇된 인식과도 유사하다 볼 수 있습니다. 3장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되는 공화주의와 그것을 옹호했던 장 자크 루소를 결부지어 분석해 본다면, 루소가 왜 현실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거의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이유를 작게 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이 시대의 공화주의를 너무나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었는데요. 어느 정도는 14세기 르네상스 이전의 '군주의 권리' 혹은 다수를 통치하는 '지배 계층의 권리'까지 포함된, 공화주의적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 문제가 있습니다. 나아가 공화주의를 그저 다수의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정치적 맥락으로만 제한적으로 받아들여 전반적으로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를 쉽게 동일시 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는데요. 이는 일전에 제가 몇 번 이나 읽은 '귀스타브 르 봉'에 대한 오역까지도 포함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또한 공화주의는 전반적인 사회 계층 가운데 여성을 전부 배제하고 어느 정도 재산을 보유하고 사회적 계급을 보유한 남성들이 주도해서 체제를 견인하는 일종의 정치 인식이라 평가할 수도 있는데요. 물론 공화(共和)에 대한 이미지는 지금도 누구에게나 강력한 것이어서, 다음 4장에서 언급되는 자연법의 기초에도 이 공화주의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저자에 의해 다시금 인정되는 루소의 '일반 의지'는 그 자체가 민주주의적 기본 관념으로 오독하는 것보다, 이 일반 의지가 '견고한 이성이 슬기롭게 통치할 수 있는' 기본 배경으로 이해하는 것이 좀 더 중요하다고 판단됩니다. 물론 공화주의의 이상이 철두철미하게 현실로 이식될 수는 없었지만 일제의 불법적인 조선 강점 이후,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요인들이 기본적으로 공화주의를 표명했던 점은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의미심장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본격적으로 루소의 사상을 점검하고 있는 5장,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저자의 분석대로 본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다는 역설을 거듭 강조한 논저라고 이해할 수 있겠는데요.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계약론'의 위상은 이보다 시대를 초월하는 혁명적인 평가로 우선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5장 서두에 등장하는 "인간은 민주정을 감당할 수 없다"는 그의 평가는 상당히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그가 도출한 '인민 주권'과 이를 통한 정부의 '유토피아적 관념'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결국 루소는 "공화주의적 인식에 바탕을 둔 혼합정체를 추구했다"고 보는 관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계약론 자체가 이해하기 너무나 난해한 논저임을 감안하더라도 여기에서 도출된 여러 사회학적 개념들은 마찬가지로 뒤에 이어지는 '보통 사람들이 주도하는 정치체'에 대한 기반이 되었던 점도 분명 사실 일 겁니다. 어느 정도는 엘리트 지배 계급이 연루된, '혼합 정체' 자체가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산물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18세기 이후, 전세계 민주주의의 사상적 근간이 되기도 했던 계몽주의는 이 시기의 애덤 스미스조차 노동자 계급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인정하고 그 필요성을 인정한 것과 같았습니다. 이는 9장 이후 등장하는 '인민의 습속' 문제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혁명 이전의 프랑스에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콩도르세처럼, 인민이 정치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강구한 사상가는 당시에도 매우 보기 드문 케이스이기도 한 데요. 특히 인민의 처우 뿐만 아니라, 여성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 그는 실로 상식적인 진보주의자고 불려도 거의 지나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이어 콩도르세의 바통을 이어 받은 자들로 사뭇 이해되는 프랑스 혁명 당시의 '민주파'들은 특히나 우리가 여전히 경원시하고 있는 '평등'에 집중합니다. 이전의 콩도르세가 마치 존 듀이처럼 인민의 교육에 집중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인민의 습속을 개선하고, 평등의 요구를 본격적으로 사회에 피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경제적 측면에서 이들 민주파들이 '중도적 평등'을 도출하게 됩니다.

이미 이 글에서 볼테르를 통해 비판적으로 분석되기도 합니다만, 재산을 가지지 못한 인민들의 사회적 처우 개선이라는 문제는 민주제를 위한 중요한 해결 과제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것의 심각한 추락과 결여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는데요. 이 프랑스 혁명이 미국의 독립 혁명과는 상이한 차이가 있지만 대다수 인민의 삶을 휘청이게 만드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는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에 빠트리는 것은 물론, 소수를 핍박할 수밖에 없는 다수 인민들의 횡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기울인 그 노력들이 지금의 시점에서는 매우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글 말미에서 저자가 다소 비판적인 어조로 언급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과 '자유경제주의자들'이 바라보는 자유와 마찬가지로 '자유 민주주주의'의 기만성을 짤막하게 나마 폭로하고 있는 배경에는 어떻게 보면 앞서 언급한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인민의 습속'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정당한 보상을 받고 인정받는 사회에서는 굳이 닦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사람이 정직하기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확실한 논점을 거듭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1장에서 비판적으로 인용된 '자유 민주주의'는 보수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노골적으로 오역 되어 왔는데요. 저자는 도식적으로 민주주의의 무늬를 띤 투표제 위에 수립된 자유주의 정부라는 실체를 드러내고 있지만, 저는 이 자유 민주주의가 부유층이 주도한 경제적 이득이라는 관념을 바탕으로, '개인의 이기심'을 더욱 확대하는데 오용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의 공화주의자들과 전통적인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수많은 사상가들은 지배 계급 뿐만 아니라 다수 인민의 덕성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 덕성을 공익의 맥락과 연결시키기도 했습니다. 다만 인민들 혹은 오늘날 시민들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선택에서 쉽게 속고 말고, 소위 막대한 부와 권력을 보유한 소수의 상위 계층과는 달리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즉, 이는 일반적인 자유에 있어서도 분명하게 동일한 맥락이기도 한 데요. 저자의 언급대로 "자유가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 만은 아니라, 자유를 가져야만 사람들이 독서, 토론, 선거를 통해서 진정으로 이성과 도덕에 부합하는 신적 법률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는 중요한 평가는 우리에게 자유는 무엇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금 숙고하게 만드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결국 이는 사회가 시민의 삶을 개선시키고 스스로를 교육한 평범한 이들이 우리의 정치와 나아가서는 민주주의를 건전하게 존속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과거에도 끊임없는 실패를 초래한 엘리트주의적 대의제를 개선시켜 나갈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 이 글 서두에 수차례 등장하는 '혼합 정체'는 지난 시대들을 거쳐, 거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과두제로도 읽히는데요. 더불어, 글 후반부에 자유와 평등을 대체하는 '자유와 정의'라는 인식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저자의 논증 과정이 기존의 논저들보다 창의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류가 이룩한 민주주의적 맥락에 대해, 제가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준 책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인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이론, 나아가 로크나 루소의 유명한 사회계약 이론들은 민주정을 최선의 정부형태로서 처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이론들은 인민주권론이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아니라 민치정), 혼합정과 모두 결합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러나 훗날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로마제국이 모두 몰락한 뒤의 유럽 사상가들은 민주정에서는 법치도 이루어질 수 없고 국가도 존속할 수 없다고 믿게 된다.

자연적 사회성의 존재를 인정하는 관점은 인간이 사회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사회를 이루고 살도록 서로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다고 주장한다.

자연적 사회성을 거부한 루소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사회가 더 나은 상태를 향해 진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극히 희박하게만 품었고, 집단으로서 인류의 미래가 절망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랬기 때문에 루소는 민주주의가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당시 유럽의 주요 국가들에 민주정을 수립하는 행위는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무슨 말을 했을까? 오늘날 학자들은 그 책에서 루소가 근대사회의 부패를 일소하고 민주주의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핵심 내용은 그가 제시한 인민주권 이론에 있다고 해석한다.

루소는 이어서 물었다. "그렇다면 입법 대상이 되기에 적합한 인민은 누구인가?" 즉 자유국가를 수립하고 유지할 능력과 자격을 갖춘 인민이란 어떤 조건을 갖춘 인민인가?

오히려 그들이 주로 걱정했던 것은 엘리트 과두제가 쉽게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투표권을 주면 그들이 모든 재산을 몰수, 재분배하는 볍률을 만들 것이라는 공포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부터 19세기 유럽에까지 횡행했던 것이다.

고대 민주정의 역사와 근대 계몽사상이 18세기 말 혁명의 현실과 버무러져 현대 민주주의 이론의 핵심이 되는 초석이 놓인 것이다.

자유가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를 가져야만 사람들이 독서, 사색, 토론, 선거를 통해서 진정으로 이성과 도덕에 부합하느 신적 볍률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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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19 2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입니다.

베터라이프 2023-12-20 00:03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시우행 2023-12-20 00: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행복하셔요~~

베터라이프 2023-12-20 00:42   좋아요 1 | URL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호시우행님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

미미 2023-12-20 0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터님 오랜만에 별 4개나 주셨군요. 제가 작년에 읽으려고 사두었던 얀 베르너 뮐러의 <민주주의 공부>가 떠올랐어요. 검색해보니 베터님은 벌써 읽으셨네요! 이 책은 조금 어려워보이니 저는 그 책을 읽어보겠습니다. 24년에요ㅎㅎ
연말 감기조심하시고 평화롭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베터라이프 2023-12-20 00:4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미미님 ^^
근래 서평을 쓴 것 중에 이 책이 저의 별 4개를 받았습니다 ^^;; 지금도 이 책의 여운을 느끼고 있습니다. 후반부가 꽤 인상적이었는데요.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손에 잡아 보세요 ^^ 아.. 언급하신 민주주의 공부도 자주 생각나는 논저입니다. 역자분이 훌륭하게 번역하셔서 그 부분도 기억이 납니다. 미미님도 연말 잘 마무리 하시고 독감 항상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그래도 미미님 서재에 종종 들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

추풍오장원 2023-12-20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주주의라는 말만큼 귀에걸면 귀걸이 코에걸면 코걸이 식으로 사용되는 말도 드문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텅빈 깡통처럼 들리기도 합니다(어쩌면 그게 민주주의의 본질아닌 본질일 수도 있겠습니다). 민주주의를 현실에 없는 이상향처럼 만들어놓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모조리 반민주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은 듯 하구요. 민주주의는 통치체제의 문제이고 권력의 문제라는 점을 인지하는것도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가치를 내포한 개념으로 민주주의를 포장하고, 모든 조직이나 집단에 민주주의 원칙을 금과옥조처럼 적용시키려는 사람들은 아주 위험하지요....

베터라이프 2023-12-20 14:41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오장원님 ^^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의 정치가 과두제와 유사한 형태로 변질되는 건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이 대의제 민주주의가 현재로선 최선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부에서 벌어지는 개인의 능력과 지위, 사회적 자원 그리고 더 노골적으로 돈의 차이에 따라, 민주주의가 제한적으로 유지되고 있닥고 생각하는데요. 어쩌면 이 부분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명확한 한계로 읽힐 수도 있을 겁니다. 오장원님이 쓰신 내용중에 ‘권력의 문제‘가 사실 현실 정치의 명확한 한계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다만 저는 현재의 시대가 민주주의 과잉의 시대라는 논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러 세대에 걸쳐 변질되었고 거기에는 신자유주의가 이바지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자원과 권력이 상대적으로 결핍된 시민들에게는 실질적으로 민주 정치 만을 바라볼 수 받게 없는 이 사회 구조 자체도 어떻게 보면 큰 문제라고 판단됩니다. 아주 간단히 말씀드리면 민주주의 자체를 포함한 정치 전반이 신자유주의에 의해 구조적으로 부서졌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 사실 다수의 정치가 실질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많은 분들이 더욱 좌절하고 계신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쓰신 내용에 공감합니다..

추풍오장원 2023-12-21 08:18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민주주의가 구성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신자유주의의 부산물들이 진보적 레토릭의 가면을 쓰고 충실히 신자유주의에 봉사하는 시대가 온 것 같아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무서운 점이지요.

베터라이프 2023-12-21 18:12   좋아요 1 | URL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위해 민주주의가 이를 사회 체제로서 보태는 조력자의 입장이 되었죠. 일전에 후쿠야마가 언급한 대로 자유를 외치는 보수주의자들의 염원이 바로 정부 지출을 줄이기 위한 일환으로 시민들에 대한 사회 보장을 정비하는 것이었죠. 그것의 결과로 미국의 사회 복지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는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동안 많은 정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일관되게 주장했듯이, 시민들의 삶이 더 이상 자본주의 하에서 건전하게 영위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는 모두가 알다시피 과두제 밖에 있지 않지요.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극우 포퓰리즘이 적나라하게 분탕질을 치고 나서 과두제가 오던가요...
 
풍요의 시대, 무엇이 가난인가 - 숫자가 말해 주지 않는 가난의 정의
루스 리스터 지음, 장상미 옮김 / 갈라파고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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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노동당의 정치인이면서, 사회 보장과 여성 시민권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인 루스 리스터는 동시에 러프버러 대학의 사회정책학 명예 교수입니다. 그녀는 에섹스 대학에서 사회학 학사를 마치고, 서섹스 대학에서 다인종 연구에 관한 석사 학위를 취득하는데요. 또한 1992년부터 94년까지 영국 사회 정의 위원회에서 활동했고,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영국 국가 평등 위원회의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이런 활동들은 시민권과 빈곤, 독점적 지위 사회 등에 관한 논저 등을 발표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는데요. 특히나 현재 그녀는 사회 정책과 관련된 이론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지난 2021년에 원제, "Poverty"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22년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리스터의 기념비적인 저작이라고 볼 수 있는 이 글은, 빈곤 poverty 이 주로 제3세계와 남반구에 국한된 문제로 오랫동안 치부되어 왔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단순한 개념화를 넘는 중요한 의미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조금 이른 결론 일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논저를 통해, 저자인 그녀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빈곤에 처한 일반 시민' 혹은 일부 국가에서 '하층민'으로 취급되는 심각한 저소득에 처한 사람들이 국가와 사회에 있어 스스로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는 현실 그 자체였습니다. 이는 1장에서도 드러나듯, 빈곤을 어떻게 하면 객관적으로 수치화 할 수 있겠는가라는 현실적인 질문과 함께, 서두에서 "물질적 자원인가 아니면 역량인가"라는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비교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빈곤에 대한 실질적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는 부분도 이 글의 미덕으로 읽히는데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빈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마르티아 센과 마사 C. 누스바움의 역량 접근법을 통한, 행복과 삶의 질 개념이 거의 무력화 된다는 점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아마르티아 센은 거의 원초적인 측면에서, 시민들의 삶을 좌지우지 하는 기본적인 생계의 측면에서, 이런 기본적인 자원들에 집중하기도 했는데요. 이는 그를 유명하게 만든 '역량'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전세계 빈곤 국가들의 근본적인 실패를 규정하는 소위 사회 경제학적 지표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1장의 면밀한 논증 가운데서, 빈곤의 관점이 절대적인가 아니면 상대적인가에 대한 질문에 우리가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이라 여겨졌는데요. 이처럼 불평등의 근본적인 결과물은 빈곤을 규정하는 절대적인 수치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간의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의 상대적인 차이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이는 인종주의와 인종차별의 만연 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까지 포함하고 있는데요. 뒤이어 나오겠지만 각 사회의 부유층들이 자신들만의 거주지를 구축하고 빈곤 계층과 온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경제적 조건이 열악한 다른 시민들과 구조적 평행선을 유지하며, 이들 다수가 이러한 사회 현실에서 유리 되어 있다는 2장과 3장의 분석은 그야말로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글에서는 다소 설명이 부족하지만, 충분히 사회적 자원을 누리고 있는 소위 특별한 계층은 이처럼 '빈곤의 문제'가 오로지 개인의 책임이라는 것으로 전제하고, 삶을 통제하지 못하는 다수의 시민들을 경멸의 눈으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인데요. 이 부분은 명백히 찰스 테일러와 리처드 세넷과 같은 학자들이 일찍이 분석한 바대로, 신자유주의와 첨예한 개인주의, 그리고 노골적인 금융 자본주의가 이러한 상황을 악화시켜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굳이 이러한 파국을 '세계화의 암울한 측면'으로 그 의미를 반쯤 축소시키고 싶지는 않은데요. 그렇지만 지난 30년 이상의 세계화가 남반구를 비롯, 소위 잘사는 북반구에도 그러한 '사회적 분절'을 초래했다는 점은 거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겁니다.

특히 이 빈곤의 거침없는 낙인은 인종적으로 동일한 백인들에게서도 경제적 차이에 따라, 혹은 일부 시민들을 처참하게 인간 이하의 무언가로 규정 짓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백인 쓰레기'와 같은 모멸적 관용어구는 아무리 인종적 기득권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빈곤의 상황에서는 거의 여지를 주지 않는 흡사 그런 폭력적 현실이 저의 이목을 끌었는데요. 4장에서 '20세기 후반과 21세기의 꼬리표 붙이기'로 설명되는 일련의 논증들이 빈곤이라는 낙인 자체가 얼마나 무차별적으로 작용하는지 이를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사회에서 빈곤이라는 낙인 자체가 시민들을 사회적으로 배제하는데 이르렀고, 단순히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부터 인정 받고 싶어하는 인정 욕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무능력과 쓸모 없음이라는 그야말로 배제의 결과를 초래하는 이런 사회적 낙인들이 본질적으로 시민이 보장 받아야 할 삶의 영위와 마땅히 보호 받아야 할 인간적인 권리 조차도 사회로부터 분리되는 현실을 더욱 고착화 하기에 이릅니다. 더욱이 미국의 푸드 스탬프와 같은 제도들이 사활적인 조건에서 '복지 수급'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더라도 반대의 경우, 다수의 빈곤 계층에게 더할 나위 없는 모멸감을 안기기도 했는데요. 이를 정확히 말하자면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탁상 행정과 치밀하지 않은 공무원들이 사회에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상당수 빈곤 계층의 마음을 닫아버리게 한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즉, 각각의 시민들을 단순히 경제적인 차이와 상대적인 자원의 접근도를 따져가며 어떤 한 개인을 사회 경제적으로 판단해 보려는 행위 자체는 '경제적 인간'의 화려한 탄생 뒤에 가려진 음울한 현실을 다시금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제가 리스터의 이 논저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었던 부분은, 현재의 시점에서 빈곤의 상황과 하층민이라는 평가를 받고 받고 있는 다수의 시민들이 자신의 삶을 회복하는 것 뿐만 아니라, 스스로 속한 사회에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인정 받고 싶어하는 근본적 욕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는데요. 그래서 4장 이후, 드러나는 '행위 주체성'의 기본적 인식은 이처럼 보다 면밀히 탐구해 볼 이유가 된다고 판단되는데요. 물론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시민들이 죄다 노동에 처해졌다."는 자본주의적 일상을 자조한 바와 같이, 노동을 하면 할 수록 더욱 경제적으로 고통스러워지는 현실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키기 위한, 정치적 차원의 행위 주체성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빈곤의 문제는 그저 개인적 차원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를 아우르는 삶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원인으로, 무엇보다 이를 공론화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연유로 저자 역시, 빈곤에 처한 사람들의 정치적 요구가 결코 폄훼 되어서는 안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이처럼 5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저자는 견뎌내기와 조직화를 통해, 사회에 정당한 요구를 주장할 수 있도록 빈곤층과 사회적 하층민들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당위를 인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끝으로, 빈곤을 통한 타자화와 일부 계층에 대한 분리는 헌법에서 보장된 우리의 인권과 기본권을 위해서라도 지양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위 '불가결한 인권'이라는 구호로 결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배후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우리가 이들의 활동에 대해 지지를 보내야 하는 것은 '시민권의 보장'과도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재의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이행 가운데 경제적으로 분절된 사회에서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점은 빈곤을 받아들이는 방법과 태도에 있어 어느 정도 잘못된 접근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한 데요. 이는 사회 보장과 복지에 대한 담론을 무참히 공격하기에 이르렀던 신자유주의와 시장의 자유를 맹신하도록 시민들을 부추긴 경제학자들을 비롯, 다수 지식인들이 펼친 왜곡된 주장이 한 몫을 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이 시점에서 시민 연대의 문제를 우리가 다시 고심해야 봐야 할 필요성이 있으며, 스스로 수치심에 빠진 우리 주변의 어려운 시민들을 어떻게 하면 정상적인 사회로 이끌 수 있는지를 무엇보다 고심해 봐야 할 때라고 여겨집니다. 노엄 촘스키의 비판적 인식대로 모든 시민이 이런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누구나 쉽게 빈곤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금언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시민 개개인은 스스로 존엄성을 갖는 인간으로서 사회에 기여하고, 많은 시민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보편적 가치를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점에서 빈곤층보다 더 큰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 물질적 및 비물질적 츠면에서 다중적인 불이익의 관계망을 형성하는 것으로 빈곤 상태를 이해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재분배와 인정 recognition을 빈곤과 결합시켜 분배적 평등과 관계적 평등을 통합하는 정치를 뒷받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시민으로서‘, ‘적극적인 자유를 보장받는 차원에서 사회참여의 전제 조건이라고 볼 만한‘,‘자기 몫의 최저 소득을 배부받을 자격이 있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상대적 빈곤과 불평등은 ‘서로가 서로를 강화‘할 뿐 아니라 ‘인간 존엄을 침해하는 면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일 수 있다.

이것이 명백한 빈곤 정의에 담긴 도덕적 힘을 약화시켜 정치인들이 그 중요성을 묵살하기 쉽게 만들지 모른다고 경고한 이들이 있었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최상층은 빈곤의 현실로부터 멀어지고, 자신을 최하층에 있는 사람들과 동일시하거나 그들의 지위 향상을 위한 구조적 변화와 보호 목적의 재분배 정책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공감할 가능성이 낮아질 수 있다.

요컨대 열악한 물리적, 사회적 환경은 개인에게 빈곤이 미치는 영향을 증폭하고, "저소득 생황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이미 주장했듯이 빈곤은 물리적 개념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하나의 개념으로서나 생생하게 존재하는 현실로서나, 빈곤은 사회적 관계로 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을 모질게 대하는 것은, 상대를 자기와 아주 근본적으로 다르게 바라볼 떄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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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자 2023-12-01 2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 2023-12-01 23:06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 봐주셔서 너무 감사 드립니다 ㅡㅜ

호시우행 2023-12-02 0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깊이가 느껴집니다.

베터라이프 2023-12-02 10:48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에 너무 후한 평가시네요 ㅜㅜ 하여튼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김성수 감독의 이 영화가 곧 개봉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저는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래서 퇴근 길에 집 인근, 조용한 상영관을 골라 이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각하의 혁명이 꼭 성공할 줄 알았고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극중 전두광의 발언은 마치, 국가를 보위하는 군인으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마땅히 이 땅의 소위 군부 엘리트들이 다른 누구보다 권력을 쥘 자격이 있다는 식으로 저에게는 들렸습니다. 흡사 국가의 위기는 선택 받은 군인들인 오직 자신들이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해석 말입니다.


지금의 시진핑이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중국 인민 해방군을 실제로 통제하고 있듯, 과거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종신 집권의 욕망과 더불어, 권력 유지를 위해 무엇보다 군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확신했을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과거 육군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남과 북으로 분단 되어 있는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는 시기에 적지 않은 국민들이 안보와 평화를 위해 군 엘리트들이 어느 정도 정치 권력을 통제하는 것이 아직 필요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을 텐데요. 어차피 이 시기는 우리 나라가 엄연히 민주주의 국가로 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즉 더 이상 배를 곯지 않고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국가를 위해, 아직은 이 땅에 민주주의는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들이 당시에도 여전했고, 박정희 정권의 실체가 알려진 지금에야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많은 국민들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지만 권력은 사실, 국민과는 별 관련이 없는 어떤 무언가이기도 했습니다.


극에서 그려지고 있는 전두광의 카리스마와 함께 그의 권력욕은 정말 어떻게 보면 역겨울 정도였는데요. 마찬가지로 시사회에서 이 작품을 본 많은 분들이 "너무 극에 몰입이 되어, 여기서 나타나는 군의 요직에 있는 자들에 대해 분노가 치민다"는 후기가 여럿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국가 권력을 '탈취'하기에 이릅니다. 다만 여기에서 입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전두광은 단순히 권력에 미친 인간은 아닌 것이, 자신을 저지하기 위해 이태신 장군이 직접 행동에 나서는 걸 보고, "저 자는 명분을 갖고 행동하고 있다"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고도화 된 훈련과 교육을 받고 군내 사조직까지 결성한 이 정치 군인들이 단순히 권력에 미친 집단이라고 호도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회 조직 내의 숱한 대령들에게 전두광이 일갈하면서, "너희들도 별을 달아야지"라고 그 욕망을 부추기는 화법은 당시 군 조직에 '이태신'과 같은 정상적인 군인들이 희박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반증이라고 해석되는데요.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안정적인 생업을 지키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자들이 결국 사욕을 채우기 위해 불법적으로 군대를 움직였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권력은 면밀히 관리되고 통제되어야만 한다는 금언을 다시금 떠올리게 됩니다.


영화가 끝나고,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이라면 익숙할 수밖에 없는 어느 군가가 새롭게 어레인지 되어 흘러나올 때, 서서히 긴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이때 같은 공간에서 영화를 봤던 많은 분들이 좀체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느 영화의 마지막과는 확연히 다른 오랜 침묵과 무거운 분위기가 극장 전체를 잠식하는 듯 보였습니다. 저 역시 가슴 한구석이 너무나 답답했고 영화에서 읊어지던 전두광의 진정 역겨운 나레이션들이 쉽사리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는데요. 김성수 감독의 연출은 이만큼 나무랄 데가 없었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아주 명확히 이해되었습니다. 그럼 여기서 다시 한 번 되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힘겹게 쟁취한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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