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성주의 - 우리의 자화상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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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부터 발간중인 월간 <인물과 사상>의 주필로도 잘 알려져 있는 강준만 교수는 날카롭고 간혹 통찰력 있는 글쓰기로 유명한 비판적 지식인입니다. 그는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도미하여 위스콘신대에서 신문방송학 박사 학위를 받는데요. 이후 전북대 사회과학대학 언론심리학부(신문방송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글쓰기와 관련하여 두 가지 정도의 흥미로운 점이 존재합니다. 1995년에 출간한 그의 논저 "김대중 죽이기"로 비판의 성역이라고 볼 수 있는 민주화 운동의 대부격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다각도로 분석했고, 이후 인물과 사상을 통해 대상의 실명을 거론하며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등의 방법은 큰 학계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는데요. 더욱이 강교수는 자신의 이러한 글쓰기를 위해 엄청난 양의 독서를 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단순의 어떤 주장의 근거를 위해서 일 뿐만 아니라, 이렇게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그 스스로가 자신의 글쓰기에 얼마나 진정성 있는 태도로 임하고 있는지 대략 짐작할 만하다 생각합니다. 따라서 최근 윤 대통령의 발언으로도 유명한 '반지성주의'를 다룬 그의 이 책은 2022년 11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반지성주의를 기본적으로 논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기존의 지식 엘리트들이나 전문가들의 정치에 반대하고 더 나아가 이러한 시스템을 배격하는데 이르는 일반 대중들의 소위 탈지식주의적 이행을 다소 온건하게 해석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에 저자가 따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이 반지성주의가 극우 포퓰리즘과 깊은 연관성이 맺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1장에서 잠깐 언급되기는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사례가 이 양자 간의 인식적 맥락을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선 호프스태터가 분석한 미국 사회 내에서의 반지성주의와 최근 윤대통령이 언급했던 반지성주의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이 한국적 반지성주의는 아무래도 기본적인 인식과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연유로 저자는 가용성 편향, 확증 편향, 부정성 편향, 이야기 편향 등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여러 사례들을 제시하며 '한국적 상황'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이런 인지적 편향에 쉽게 사로잡힐 수 있는 인간의 기본 맥락이 소위 말하는 합리성과 합리주의와는 어울리지 않는 분석에도 어느 정도 수긍이 될 정도였습니다. 더욱이 진영 논리는 자신이 인정하고 긍정하는 정치적 세력의 입장에서 현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편향에서 단순히 소위 '우리 편에' 대한 건전한 비판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지금의 환경 상 저 역시 회의적으로 보고 있으며, 특히 양 진영 뿐만 아니라 다수 시민들과의 소통이라는 근본 가치에 있어서도 부정적인 현실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을 텐데요. 이러한 가운데 정치를 얼마 해보지도 않은 대통령의 입에서 반지성주의가 나올 정도면 우리의 상황이 실로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합니다.

개인적으로 반지성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식의 추락', 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요즘의 MZ세대가 다수의 책을 통해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불명확하고 편향적이면서 사실로 입증되지 않은 악의적인 프로파간다와 다름 없는 것들에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에 결탁한 것도 그렇고 소위 적지 않은 전문직이라는 자들이 비공개 익명 게시판 등을 통해 자신의 이익과 그것을 바라보는 일반 시민들을 경멸하는 것을 봤을 때, 이러한 한국 사회의 반지성주의의 흐름이 원인과 결과가 눈에 그려지는 일반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인 강교수가 분석하고 있는 이런 반지성주의적 경향에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분별한 물신주의화가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자가 꼭 집어 신자유주의를 언급한 것은 저에게는 큰 설득력을 갖고 있었는데요. 민주주의 자체에서 건전한 지식에 대한 반지성주의를 통한 배격은 무엇보다 자본주의의 극단적 이행, 그러니까 미국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과도하게 물질주의에 경도 된 사회의 왜곡된 현실에 그 책임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또한 1장 후반부에서 논의되고 있는 일반적인 '팩트' 현실에 대한 저자의 분석도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었습니다. 단순 명료한 팩트로 사회의 복잡한 현실과 갈등 상황을 온전히 해석하기 어렵기에 역사와 그 구조를 입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 되었습니다. 다만 팩트와 그에 따르는 최소한의 진실성을 거부한다면 지금보다 더 가짜 뉴스가 넘치는 탈진실의 시대를 목도할 수밖에 없을 텐데요. 탈진실은 오늘날 더 심각해지고 있는 극단주의와 맞물려, 끝내 민주주의를 종말로 이끌게 되는 병적인 징후이기도 합니다. 리 매킨타이어의 '포스트 트루스'에서도 드러나듯 자극적이고 규명되지 않은 거짓과 다름없는 이야기들이 무분별한 상업성과 만나서 언론을 비롯한 넷미디어 상에서의 돈을 위해 확산될 수밖에 없는 이런 풍조가 더욱 강화되고 있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호프스태터가 교육의 변화를 추구한 존 듀이를 비판한 것은 너무나 짧은 생각이라고 여겨지는데요. 포퓰리즘이 어느 정도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인들의 보다 큰 관심을 추동한다 하더라도 포퓰리즘 정치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반지성주의로 인한 얼마간의 긍정적인 기대 혹은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더라도 조악한 이익 만을 위해 이들 양자를 사회적으로 용인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2장부터 4장은 최근 우리의 현실 정치를 비판한 내용으로 문재인 정부 시절의 탁현민 전 의전 비서관이 수행한 '홍보 정치','검경 수사권 분리'와 관련된 민형배 의원의 탈당 문제 그리고 현재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지금 대통령의 영부인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탁현민 전 의전 비서관과 관련하여, 과거 문재인 정부 시절의 일련의 홍보 작업들이 다소 적절치 못한, 더 나아가 위선에 가까운 것들을 저자가 논하고 있었는데요. 사실 문재인 정부의 여러 문제들은 저 역시도 심히 공감하고 있고 더욱이 촛불로 탄생한 정부가 확실히 정치적 원동력은 다른 정부들에 비해 대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정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점은 상당히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검수완박과 관련된 민형배 의원의 위장 탈당과 관련해서도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일종의 배신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다만 검경 수사권 분리는 확실히 필요한 부분으로 과거 5공 시절 이후 탈권력화에 이른 국가 정보원을 고려한다면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검찰의 개혁은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여러가지 제도적 개선과 법적 적용이 필요해 보이긴 합니다만 실질적으로 많은 토론이 전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개혁은 분명 시급해 보입니다. 마지막 윤 대통령과 근래 영부인에 대한 여러 논란에 대해 저자는 윤 대통령에게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었는데요. 최근 대통령 부처에 대해 저자가 보이는 허탈함은 분명 이해가 되었습니다.        

끝으로 소위 잡지식을 표방한다는 <인물과 사상>의 전체적인 논조를 고려해 본다면 강교수의 이 책은 그야말로 일관성 없는 글 모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장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꽤 상세한 분석을 인정하더라도 이후 2장부터 이어지는 엄선된 주제들은 아무래도 1장과는 사뭇 거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크게 만족스럽지 않았는데요. 그리고 저자가 보이는 문재인 대통령과 소위 문빠들에 대한 비판과 586 운동권에 대한 상당한 실망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그렇다고 진모 교수와 같은 사람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는 것은 사뭇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앞으로 윤 대통령과 지금의 정권에 대한 글들이 쏟아져 나올 테지만 현재 보여지는 우리 정부의 모습이 과연 모두의 동의를 받을 정도로 국정의 난맥을 잘 조절하여 진정한 정치를 위해 나아가고 있는지는 굳이 대통령을 반대하는 59%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심히 우려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물론 저자의 의도와 더불어 스스로의 정당한 의견을 무조건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컸기 때문에 여러 정책적 패착에 대한 일부 시민들의 분노가 윤 정권을 낳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윤 정부 초기에 보였던 전 정권에 대한 '대결주의'를 우려스럽게 봤던 사람으로써 아직도 이 정부가 나아가고자 하는 길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직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지금 정부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호프스태터가 "반지성주의는 미국의 민주적 제도나 평등주의적 정서에 바탕을 둔다"고 했듯이, 미국은 반지성주의에 매우 우호적인 건국 발전 과정을 거친 나라다.

나는 그런 두 가지 전제와 더불어 반지성주의를 "이성적 합리적 소통을 수용하지 않는 정신 상태나 태도"로 정의하면서 그 3대 요소로 신앙적 확신, 성찰 불능, 적대적 표현을 제시하고자 한다.

물론 평등주의, 물질주의, 지성의 자기소외는 반지성주의와 사회적 배경 중 일부일 뿐이다.

반지성주의는 사회 전반의 소통의 질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로서 그 의미를 갖는다. 반지성주의는 사회 전반에 대한 불신과 무관하지 않으며, 특히 지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지식인과 전문가 집단에 대한 불신을 온상으로 삼아 번성한다.

우리에겐 사회 구성원으로서 원할한 소통을 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반지성주의에 대한 논의가 그런 당위를 환기시키고 실천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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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1 0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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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2 09: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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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9 00: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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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9 23: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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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커뮤니케이션 이해총서
이정기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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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동명대 광고PR학과의 학과장으로 있는 이정기 교수는 2007년 같은 학교를 졸업하고 석사와 박사를 한양대에서 마치고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강의교수와 교수학습지원센터 책임연구원(연구교수)을 거치기도 했습니다. 저자와 관련하여 구글에서 잠시 검색해보니 120편의 논문과 21권의 학술 저서를 발표한 학자이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광고홍보학 학계에서는 이 교수의 그간 업적에 대해 꽤 인정하고 있는 분위기였는데요. 특히 그의 '표현의 자유 3부작'은 여러 언론을 통해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근래 많은 연구 실적을 쌓은 학자로서의 그의 이력은 충분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교수의 소위 '팟캐스트 개론서'라고 불리는 이 책은 2019년 1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이미 이 글 1장에서 소개되고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팟캐스트 podcast는 애플 apple의 mp3 플레이어인 아이팟 ipod과 방송 broadcast가 결합한 단어입니다. 팟캐스트가 서비스된 초기만 해도 이렇게 일반명사화 된 사회 현상이 되리라고는 거의 생각지 못했는데요. 이미 유튜브의 수많은 정치 및 사회 관련 유튜브가 큰 인기와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소위 '대안 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욕구는 이전부터 대단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팟캐스트 역시 이러한 기존 언론의 대체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확장되었습니다. 팟캐스트를 듣는 이들의 폭넓은 장르 저변화도 물론이고 정치사회 팟캐스트 역시 '편향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어떤 채널은 수익까지 낼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이슈 몰이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팟캐스트의 사회적 진행은 앞선 유튜브의 확장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요. 저자는 팟캐스트가 라디오와 비슷한 형태로서 소위 '음성 서비스'만을 기준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팟빵의 '정영진 최욱의 매불쇼'와 같은 경우는 현재 여기에 출연하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영상까지 시청할 수 있는 유튜브 서비스도 함께 진행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기존의 주류 언론의 일방향적인 컨텐츠 제공은 넷미디어 시대에 이르러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볼 수 있을 텐데요. 6장에서 이미 언급되고 있듯이, 현재까지도 많은 시민들이 기존의 정치권과 엘리트 정치에 자체에 대한 지극한 소외감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에서 팟캐스트의 저변 확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즉, 지금도 주류 언론들 가운데 소위 '빅3'의 과도한 영향력이 기득권 정치와 이를 지지하는 세력들의 정치적 베드가 되면서 진보적인 가치 자체에 대해 인정하고 또한 진보와 보수라는 양자 간의 실질적인 대화 논의가 여러 면에서 막혀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상대편에 대한 일정 부분의 '희화화'와 '풍자'는 이것을 대하는 사람에 따라 여러 의견이 나왔던 것도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소위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우리가 일반 정치 자체를 평가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정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정영진 최욱의 매불쇼' 가운데 한 코너인 '수요난장판'은 회차에 따라 100만뷰를 넘기도 하는 인기 프로그램인데요. 매불쇼 자체는 팟빵의 간판 프로인 동시에 유튜브에도 자신들의 영상을 올리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는 정치 관련 팟캐스트의 사회적 영향력이 그만큼 지대해졌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시민들과 학자들이 이들 팟캐스트에 대한 소위 언론 지위 부여에 대해 아직도 많은 이견이 있는 부분은 TBS에서 운영하는 '김어준의 뉴스공장'과 동일 진행자가 운영하고 있는 '다스 뵈이다'의 실질적인 규제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봤을 때, 팟캐스트를 기존 언론과 똑같이 규제하고 싶어하는 정치인들이 많다고 여겨지는데요. 일상적인 시민의 정치적 자유 발언이 어떠한 이유에서든 간에 규제를 받는 건 다소 문제가 있듯 팟캐스트의 여러 정치 프로들을 언론 규제와 마찬가지로 조율과 통제하는 것은 아무래도 현실에서 가능하지는 않을 듯 싶습니다. 더군다나 기존 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어느 정도 불신을 고려한다면 대안으로서 여러 형식의 컨텐츠들이 발전해, 민주 사회에서 시민들의 발언이 좀 더 확대될 수 있게 하는 것이 헌법에도 부합하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이미 저자는 글 초입에서 이들 팟캐스트들의 역기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기능 또한 상당하다고 강조하고 있는데요. 이와 관련하여 저는 요즘과 같이 시민들이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서 '책을 같이 읽어주는' 팟캐스트 프로그램들이 시민의 지식 함양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7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바와 같이 팟캐스트의 교육 효과 역시 상당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의 기본적인 교양 증대는 정치 전반에 큰 이점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선기능을 팟캐스트가 현재 폭넓게 확대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사회적 인간으로서 자신이 느끼는 고립감을 이겨내는 데 있어 같은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과의 이 같은 '랜선 연대'는 개인의 삶 자체에 있어서도 충분히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기대됩니다.


따라서 특정 미디어의 이용 동기를 파악하는 것은 미디어 이용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효과(의도적 효과, 비의도적 효과)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관점 동기는 ‘나는 내가 다운로드한 팟캐스트에 대해 다른 팬들과 대화한다‘,‘나는 내가 다운로드한 팟캐스트에 대해 친구들과 대화한다‘와 같이 팟캐스트를 둘러싼 사회적 대화 욕구가 반영된 동기다.

보수적 개인은 정치 팟캐스트를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감시용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수적 개인은 팟캐스트에서 얻은 정보와 또 다른 형태의 정보를 얻기 위해 신문 같은 기성 미디어를 이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의 이용 동기 일곱 가지 중 문화 정치적 소통 동기와 정치적 소외감 극복 동기가 높을수록 오프라인 정치 참여 정도가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존재한다.

이상의 사례들은 팟캐스트가 대학 학습자들의 관심을 재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실제로 다양한 영역의 전공과 전공 교과목에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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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12-20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 정부가 언론을 대하는 방식이 우려스럽습니다. 거기에 주류 언론들이 제 기능을 못하고 광고주들 눈치보느라 견재기능을 상실하고 있으니...그런 와중에 매체 다양화는 교육적,정치 참여 측면에서도 긍정적으로 보이네요^^

베터라이프 2022-12-20 22:41   좋아요 1 | URL
사실 저번 비속어 사태에서 각 언론들이 몸을 사린 것은 분명합니다. 주류 언론들이 기필코 유지하려는 것이 자신들의 영향력과 금전적인 부분에서의 이해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헌법과 시민 그리고 언론 제도 간에 인식적 괴리가 상당했던 것이죠. 또한 언론이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아름답고 고명한 것이 아니기에 이런 측면에서 지독한 현실 상황과는 매우 상이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소외감도 어느 정도 감쇄해주고 여러 의견들의 제안이라는 점에서 팟캐스트와 유튜브가 분명 순기능이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 미미님의 의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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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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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문단에서 흔들리지 않는 문학적 지위를 갖고 있는 스티븐 킹은 마찬가지로 많은 독자들에게 초자연 소설, 서스펜스, 범죄, SF, 판타지 등에서의 대가로 읽히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책은 총 3억 5천만 부가 판매되었는데 많은 작품이 TV 드라마와 영화 등으로 판권 매매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믿을 수 없는 성과는 2015년에 미국 국립예술기금으로부터 예술 훈장을 받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의 스티븐 킹을 있게 한 여러 작품들 가운데 1973년에 나온 그의 소설 '캐리'는 독보적인 작품으로 1976년 영화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에 의해 영화화 되기도 했는데요. 이런 이력과는 달리 그는 정치적 식견과 행동주의와 관련해서는 민주당 후보를 강력하게 지지한다거나 미국의 부유층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만 한다는 주장을 거의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몇몇 공화당 인사들에 대한 비판적 의견 개진과 현 정치 상황에 대해 자신의 비평을 가감 없이 밝히는 점은 소설가로서의 큰 인기를 감안한다면 공화당을 지지하는 계층에게 있어 어느 정도 거부감을 초래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사회학자나 철학자가 아닌 대중 소설가가 이러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출하는 점이 다른 지식인 계층과 비교해 봐도 특히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다른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다만 문학적 구조와 고정된 주제에 몰입하여 그 입장의 한계를 인정하는 여느 작가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서 해야만 하는 말들을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점은 어쩌면 미국의 민주주의가 우리와 확연히 차이나는 부분일 수도 있겠습니다. 따라서 지금 소개해 이 책은, 원제 "Cell"로 지난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동일한 해인 2006년 11월에 번역 출판 되기에 이릅니다. 다만, 현재 이 책은 국내에서 절판된 상황입니다.

개인적으로 킹의 이 소설을 읽게 된 중요한 이유는 지난 2016년에 영화화 되어 나온 존 쿠삭과 새뮤얼 L. 잭슨이 주연한 "셀 : 인류 최후의 날" 때문이었습니다. 영화가 썩 뇌리에 남을 만큼 인상 깊지는 않았지만 원작이 스티븐 킹의 작품인 걸 알게 되어 연말 기념으로 문득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는데요. 2006년에 나온 번역본은 현재 절판된 상황이었지만 아주 빠르게 '헌책방'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주문을 넣고 며칠 뒤에 배송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쯤에서 아주 강한 스포일러 일수도 있겠지만 킹의 이 작품은 소위 '폰 사이코'로 불리 우는 '전파 좀비'가 주된 소재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 외 세 사람의 인상 깊은 모험극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주인공들 가운데 한 사람인 클레이와 톰이 초반에 서로를 인식하게 되고 이후 엘리스가 존재감을 드러내며 이들의 무리에 합류하게 됨으로써 기본적인 모험 서사의 틀이 잡히게 됩니다. 

우선 킹의 이 소설은 그동안 좀비와 관련된 여러 작품들을 숱하게 인용하면서 그가 창조해 낸 좀비와 그 외의 다른 좀비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전반적인 서사에서 이를 드러내고 있는데요. 물론 앞선 설정은 어떻게 보면 하루 아침에 미국 보스턴을 쑥대밭으로 만든 흐름의 한 구성으로서, 특히 좀비와 관련된 작가의 고유한 해석을 답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의 해석을 통해, 좀비 자체로서의 어떤 문학적 구조보다도 일전에 일독했던 가브리엘 타르드의 '군중'과 칼 구스타프 융의 '무의식에 지배된 군중'에 인식적으로 유사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권 후반부의 게이튼 아카데미에서의 다소 익숙해 보이는 좀비들의 꽤 심각한 반전은 전파의 전달과 더 나아가 그들끼리의 '텔레파시'라는 불명확한 시도 자체가 앞선 군중들을 불확실한 실체로 이끄는 '무의식의 전염성'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교장과 앨리스 또래의 조든이 발견한 '인간의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이성의 사고가 완전히 축출된 상황에서 좀비들의 '질서정연함'은 정말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여겨지는데요. 어떻게 보면 인간의 개성이라는 것이 아주 쉽게 말살될 수 있다는 점과 더불어 그것을 초래하는 요건 역시 아주 단순하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 이를테면 인간 사회의 폭력의 지배나 반지성주의의 팽배 같은 - 이 소설이 시사하는 바는 아주 명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도한 스포일러가 될 듯 싶어 내용을 전부 밝힐 수 없는 후반부의 복선도 이러한 해석을 좀 더 강화시킨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어떻게 보면 '실제에서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은 좀비'가 이처럼 붕괴된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괴로운 맥락을 갖고 있다는 점은 킹의 이 작품을 단순히 좀비 소설로 국한할 수 없는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제 의식에도 불구하고 소설이나 영화를 비롯한 여러 '좀비극'에서 보이던 케케묵은 설정들이 나타나기도 했는데요. 극중 미스터 리카르디가 보인 스스로의 안타까운 행동과 세상의 종말과 다름 없는 상황에서 '신이 내린 저주'를 읊으면서 극단적 회의주의에 몸을 맡기는 일부 종교인들의 모습은 이미 우리가 봐왔던 설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원전 자체에서 작가가 상당한 비속어를 문장에 넣었으리라는 추측과 함께 '어느 기독교인에 대한 지독한 경멸'은 과거 품위를 갖춘 버틀란드 러셀의 고백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역설적인 감정을 독자들에게 강요하게 하는데요. 아마도 종교의 타락을 우리가 실질적으로 가늠케 하는 것은 이러한 위기와 종말의 시대에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파국을 초래하는지, 이성으로 대략 추론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몇 년 간 큰 인기를 끌었던 워킹 데드의 주인공인 릭과 이 작품에서 좀 더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클레이는 앞서 언급한 복선으로 말미암아 다음 권에서 후반부 극의 변화를 독자로서 원치 않는 결말로 귀결될 것 같아 그 점이 우려스러운데요. 또한 과학 만능주의에 대한 극의 주제 의식이 어떤 식으로 문제를 만들어 낼지, 다음 권에서 여실히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스티븐 킹의 유독 자주 보이는 스토리의 '용두사미'가 이 작품에는 들어맞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 유독 이 소설의 원전을 살펴보고 싶은 욕구가 들게 만든 문장이 있었는데요.
  "기운을 내라. 앨리스, 오늘 공사가 다망한 날이었잖니."
  "공사가 다 망해요?"
  바로 클레이와 앨리스의 짦은 대화였습니다. 


"예, 맞습니다. 우린 가능한 빨리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법정이나 사문위원회에서 내가 그러게 말했다고 증언하셔도 전 그 사실을 부인할 겁니다."

전에 그런 여자들과 강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터득한 사실 하나가 그 나이까지 살아온 아줌마들은 거의 난공불락이라는 것이었다.

아들을 생각하려 할 때마다 클레이는 머릿속에 미친 쥐새끼를 풀어 둔 기분이었다. 그 쥐새끼는 당장이라도 허술한 우리를 부수고 나와 입에 닿는 건 닥치는 대로 갉아먹을 판이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신호 말이야. 과학 소설 같기는 하지만, 불과 15년이나 20년 전만 해도 대다수 사람들에게 휴대폰도 과학 소설 같았을 테니까."

"그래요. 우린 모두 누군가를 잃었어요. 대시련의 시기니까요. 모두 여기 [요한계시록]에 예언되어 있죠."

그들은 자기들만의 무리 속에서 자기들끼리만 속닥거리며 기계적으로 움직였고, 기껏해야 손전등을 휘두르거나 다른 손으로 여행 가방을 바꿔 드는 게 의미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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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12-18 0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사가 다 망하다. 다망하다. 정말 원전 찾아보고 싶어지게 하네요^^

베터라이프 2022-12-18 08:30   좋아요 1 | URL
어떻게 보면 우리식의 전형적인 말장난인데 역자가 왜 이런식으로 번역을 했는지 원서의 문장이 궁금할 정도였어요. ^^
 
포스트 트루스 - 가짜 뉴스와 탈진실의 시대
리 매킨타이어 지음, 김재경 옮김, 정준희 해제 / 두리반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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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매킨타이어는 근래 미국에서 주목 받는 철학자로 웨슬리언 대학에서 사회과학 학사를 그리고 미시건 대학에서 철학 석·박사를 취득합니다. 이후 그는 미국 보스턴 대학의 철학 및 과학사 센터의 연구원이자 일반인들을 위한 평생 교육원의 기능을 하는 하버드 익스텐션 스쿨의 윤리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킨타이어는 스스로를 철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과학을 훼손하려는 시도와 그러한 시도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과학자들에게 제공하고 있기도 한데요. 그런 측면에서 그는 여러 사회 철학 방법론을 담은 에세이들과 더불어 인간 행동 과학과 일반적인 순수 과학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 글도 출간하기에 이릅니다. 최근에 나온 그의 저서, '과학 거부자와 대화하는 방법'은 그의 이러한 관심사를 잘 드낸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ost-Truth"로 지난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매킨다이어의 이 글은 제목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오늘날 정치권을 비롯한 소셜미디어 등에서의 광범위한 탈진실 상황을 분석하고 이러한 사회병리적 현상의 원인을 규명하는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탈진실 즉, 사적일 뿐만 아니라 공적인 무대에서 거짓말을 무분별하게 일삼는 행태는 우리의 민주주의에 있어 커다란 위협임은 분명합니다. 이 같은 거짓말과 날조된 이야기들이 범람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있어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것인지는 많은 토론이 있어야만 할 듯 싶은데요. 다만 글 초입에 저자가 통찰로서 밝히는 '진실이 개인의 정치적 입장에 종속된다'는 문장은 오늘날의 세태를 아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봐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특히 최근에 우리 역시 앞선 탈진실의 상황을 직접 목도하기도 했는데요. 분명한 진실에 대해 정치인들이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세법, 사적 이익, 당파적 이득에 몰두한 점은 과거 트럼프 시대에서 창출한 '대안적 사실 Alternative Facts과 같은 탈진실이 잉태된 시작점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기본적으로 저자는 현재 전세계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탈진실의 원인에 있어 과학부인주의와 인지편향이 자리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뒤의 6장에서 강하게 주지하고 있듯, "과학은 '가치'가 아니라 '사실'에 몰두하는 학문"입니다. 특히 많은 인문학 전공자들에 의해 '과학적 사실'에 대한 비틀기와 왜곡이 과학 자체를 경멸하고 부인하는 흐름을 만들어냈는데요. 앞 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폐암에 있어 흡연의 관련성"과 '지구온난화에 대한 본질" 등은 자신들의 이권이 달려 있는 거대 기업과 그들과 유착된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에 의해 부정 되기에 이릅니다. 위의 두 가지 사례는 더 이상 입증될 필요도 없이 수많은 근거 자료들이 넘쳐 나고 있음에도 소수의 알량한 이익을 위해 진실이 마치 이데올로기적 정치 토론과 같은 접근법으로 오도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드러난 저자의 논증을 조금 확대 시켜 "기업들의 이익을 해치지 않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불사할 수 있다는 반사회적인 관념 체계가 무분별하게 기승을 부린다면 탈진실의 시대에 우리 정치는 파시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생각합니다.

저자는 인간 행동학의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실과 거짓을 냉정하게 구별 짓기 어려울 수 있는 '인지 편향'과 가치적 확증 편향에 대해 여러 실제 실험 자료를 첨부하여 앞선 논지를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앞선 부분의 핵심 사항인 '의도적 합리화'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는데요. 우리가 믿고 싶은 사실이 진실을 인식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의도적 합리화는 인지부조화와 확증 편향과 함께 작용될 정도로 그것의 사례는 매우 광범위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일전에 리차드 J. 번스타인은 자신이 믿고 있었던 사실이 분석을 통해 거짓임이 밝혀졌을 때 인간은 그것을 마땅히 수정하고 바로잡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그것이 철학이 추구하는 건전한 방법론이면서 진실에 대해 수긍하고 인정하는 인간의 중요한 의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스타인의 마땅한 주장과는 달리 현재의 탈진실의 시대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과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적 당파의 권익을 위해 마땅히 사실을 맹렬히 거부하여 근거가 희박한 거짓말을 그것의 대체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꽤 노골적인 가치 조작이 자의든 타의든 일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개인의 정치적 의견이나 발언 그리고 그러한 의도들이 현대 정치에서 중요한 부분임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세대와 세대를 거쳐 우리 사회가 축적한 지식들이 소수의 정치적 편익과 셈법에 따라 비틀고 망가뜨리고 편의적 수용이라는 현란한 기술이 방조된다면 그것은 사회 계층의 최상위에 있는 힘과 돈을 가진 기득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시민들을 입맛대로 다루고 싶어하는 의도에 부합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도널드 트럼프를 향해 '인종차별과 여성 혐오, 반지성주의와 같은 정치인이라면 결코 겉으로 태연히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을 가급적 내색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취지로 언급한 바가 있는데요. 후쿠야마가 기본적인 정치인의 품위에 대해 말한 것인지는 불명확합니다만 어떤 누군가가 뼛속 깊은 KKK 일원이거나 혹은 민주주의를 극심하게 혐오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자신이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한다는 식의 가식이나 위선이 필요할 때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물론 후쿠야마의 저런 그럴듯한 논법에 제가 긍정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는 별개로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은 정치인들을 비롯한 공적인 무대에 얼굴을 내미는 인사들이 겉으로 나마 '일반적인 상식인의 기준을 견지한다'는 암묵적 룰과 같은 알량한 위선마저도 쓸모없게 만들기에 이릅니다. 사실상 트럼프가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한 '대안적 사실'과 같은 것들은 저자가 비판하는 대로 "진실과 거짓의 중간 지점도 역시 거짓"일 수밖에 없는 확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러한 특정 이데올로기적 주장과 반대편의 정치인들을 터무니 없는 '가짜 뉴스'로 공격하는 행태가 일부 언론들에 의해 '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 기존 언론들의 출처가 불명확한 가짜 뉴스의 보도와 여러 SNS에 범람하는 누군가를 향한 악의적인 왜곡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진 것이죠. 이에 매킨타이어는 언론들이 '진실 만을 보도한다는 일종의 직업적 윤리관'이 사주와 기자들의 사적 이익으로 치환되면서 이러한 흐름이 가속화 되어왔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떠한 지경에 처해있는지는 이미 모두가 목도하고 있다 생각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는 언급하는 대로 우리가 거짓과 가짜 뉴스에 왜 치열하게 저항해야만 하는지 이 글의 전체적인 논증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선 트럼프와 같이 '여성 혐오'와 '인종차별'이 누군가의 정치가 될 수 있다는 극단적 병리가 어쩌면 진실을 거부하는 탈진실과 과학부인주의와 같은 반지성주의에 확실히 근거하고 있다 여겨집니다.


끝으로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극단주의 정치의 새로운 시작은 전 유럽과 미국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느 사회든 상당한 정치 전반에 대한 불신과 먹고 사는 것이 나날이 힘들어지는 계층들이 극단주의와 극우 포퓰리즘을 지지하면서 우리가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여러 문제들의 책임을 이민자들과 여성들, 성소수자 및 더불어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에게 분노를 돌리고 있습니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분노의 정치가 초래하는 그 파멸적인 끝이 어떠했는지 이미 뼈저리게 체험한 바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경고를 인류에게 남기고자 그녀가 어떠한 노력들을 기울였는지 우리도 이미 대략적이나마 인지하고 있는데요. 이처럼 탈진실이 더욱 만연되어 가는 시대 자체가 저자의 경고대로 단순한 민주주의의 위기 뿐만 아니라 끔찍한 전체주의의 재래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를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특정한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는 행위 자체가 파시즘을 부를 수 있다는 점도 우리가 인식해야만 될 것 같습니다. 또한 범람하는 가짜 뉴스에 대해 변별력을 키울 수 있도록 현장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어느 교사의 가짜 뉴스 식별법을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리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1. 저작권을 확인하라
2. 여러 출처를 통해 확인하라
3. 출처의 신뢰성을 평가하라 (예컨대, 충분히 오래 인정받았는지 확인하라)
4. 정보의 게시 일자를 확인하라
5. 주제에 대한 지은이의 전문성을 평가하라
6.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일치하는가를 확인하라
7. 현실성 있는 내용인지 의심하라




- 이 글 마지막 부분에는 우리에게 여러 티비 프로그램들을 통해, 익히 알려져 있는 정준희 교수의 해제가 담겨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만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진실을 왜곡하는 정치꾼들은 그저 ‘개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중에 특정한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를 명확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타보 음베키 Thabo Mbeki는 항레트로바이러스제가 서구권 국가들이 꾸며낸 계략에 불과하며 에이즈를 치료하려면 마늘즙과 레몬즙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진실을 부정하는 정치인들이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는 세상이 만들어진 이상, 탈진실은 이미 어느 한 사람을 넘어서는 문제로 발전했다.

하지만 인지부조화의 특성 가운데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주위에 동일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을수록 인간의 ‘비합리적인‘ 경향이 더욱 강화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특정한 주제에 감정적으로 몰두한 경우 올바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영향을 받아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진보주의자나 보수주의자나 위협적이지 않은 거짓 진술에 대해서는 평가에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는 위협적인 거짓 진술을 훨씬 더 높은 확률로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셜미디어가 주목을 받으면서 이러한 정보 대혼란은 더욱 심각해졌다. 인터넷상에서는 사실과 의견이 뒤죽박죽 섞여서 나타나는데 무슨 정보를 믿어야 할 지 누가 알겠는가?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는 "탈진실은 파시즘의 전조 pre-fascism나 다름없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당시 일반적인 사회과학자들은 과학 이론이 실패한다면 그 이유는 과학자들의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념적인 편견이 개입해 충실히 증거에 고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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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2 23: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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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3 00: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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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3 00: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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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3 16: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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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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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여류 작가들과는 달리 크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김인숙 작가는 1963년 서울 은평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1983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많은 관심을 받은 바가 있는데요. 2011년부터는 중앙대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다, 2019년부터 동인문학상의 종신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지금까지 활동중입니다. 그녀는 소설가로서 총 15편의 장편소설과 8편의 소설집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비극에 간 소현세자의 짧은 삶을 소재로 한 역사 소설로 지난 2010년 3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제가 김인숙 작가의 작품을 접하게 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요. 1993년에 출간된 '그래서 너를 안는다'에 이어 두 번째 일독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저는 안태진 감독이 연출한 영화 '올빼미'를 극장에서 보게 되었는데요. 영화에 등장한 소현세자 캐릭터의 불행한 서사에 관심이 생겨 그를 다룬 역사 논저나 소설들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김인숙 작가의 이 작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좀 더 빠르게 읽고 싶어 퇴근 길에 직장 근처 중고 서점에 들러 이 작품을 손에 쥘 수가 있었습니다. '폐모살제'의 죄를 물어 광해군을 폐위시킨 희대의 암군(暗君) 인조는 중종과는 달리 본인이 직접 반정에 가담하게 되는데요. 그런 인조에게 소현세자는 자신의 사가에서 낳은 자식이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에서도 왕이 아니라 능양군 시절의 인조가 자신의 큰아들인 소현세자와 둘째인 봉림대군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따뜻한 부성애가 넘치는 장면이기도 했는데요. 전반적으로 이 작품은 병자호란 이후 청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마찬가지로 종실(宗室)의 여식이기도 한 흔과 심석경 그리고 이들과 사뭇 대비되는 만석의 이야기를 버무려 시대의 아픔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제가 마음 아팠던 부분은 조선의 많은 여자들이 거의 노예로 끌려가 수많은 청나라 병사들에게 겁간을 당하고 걔중에 양반이나 신분이 높은 여식들은 청나라 장군들이나 혹은 청나라 황제의 수청을 들었다는 개연성 높은 서사들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소현세자의 처인 민회빈 강씨가 노예로 잡혀온 조선인들을 구해서 다시 조선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노력한 것이기도 할 텐 데요. 불행하게도 이러한 노력들이 인조의 심기를 건드려 소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의 청군에 대한 항복과 더불어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례'의 치욕을 겪습니다. 소설에서 거듭 '적국'이라 지칭되는 청국의 침입은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무엇보다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해 무지했던 서인들의 정치적 패착과 광해군과는 달리 청국에 대한 경계를 기울이지 않은 인조의 방만한 행위가 이를 초래했다고 봐도 거의 무방해 보입니다. 과거 임진왜란 당시의 명이 군대를 보내 비참한 전란을 끝내는데 도움을 줬다는 소위 '재조지은'의 철지난 감상에 젖어 있던 조선 사대부들은 아무런 비판과 견제를 받지 않았던 '성리학적 명분론'에 몰빵해 나라를 절망에 빠뜨리게 됩니다. 조선의 군왕이었던 인조가 거의 오랑캐라고 취급하던 여진족에게 머리를 조아렸으니 가뜩이나 반정으로 쟁취한 옥좌이기 때문에 왕으로서의 권위와 정치력이 약했던 인조는 청나라에서 그곳 인사들이 갖는 조선에 대한 의구심과 불신을 불식시키기 위해 동분서주 노력하던 그런 자신의 큰아들이 대단히 마뜩잖았을 겁니다. 사실 소현세자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조선이 파견한 외교관으로서, 조선의 이익을 위해 홀로 경주한 것도 어느 정도 가늠이 됩니다. 소현세자는 직접 눈으로 청나라의 강대함을 몸소 봤을 테니, 계속해서 명나라만 부여잡고 실리를 등한시하는 인조 정권을 비롯한 조선의 행태에 위기를 느꼈을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김작가는 그러한 청나라를 같이 지켜본 소현세자와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각기 다른 감상을 소개하고 있기도 한 데요. 스스로도 너무나 경애(敬愛)한 자신의 형이 비참하게 죽고 형수와 조카들이 친부에 의해 도륙되고 나서도 왕이라는 자리를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혈육의 정을 얼마간 배제할 수밖에 없던 그의 고뇌도 어느 정도 짐작이 되기도 했습니다.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와는 달리 소현세자는 글 읽는 것도 좋아하고 여러모로 사려 깊은 인물로 그려지기도 하는데요. 저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세손 시절을 매사 조심하여 행동한 정조의 신중함을 소현세자가 견지했다면 그러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일전에 황현필 선생이 언급한 많은 역사가들이 '소현세자 독살설'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는 의견에 일견 관심이 가기도 합니다. 영화 '올빼미'에서는 인조가 이형익을 사주하는 장면과 이 작품에서 마찬가지로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이형익은 죄가 없다고 말한 부분이 뭔가 오버랩 되기도 했습니다. 이른 나이에 요절한 아들의 무덤에 인조가 한 번도 가지 않았다는 실록의 기록이나 민회빈 강씨에게는 누명을 씌워 사사시키고 손자들에게도 할애비로서는 할 수 없는 짓을 서슴치 않는데요. 종법(宗法)에 의하면 소현세자 사후 봉림대군이 아니라 그의 아들이 세손으로 이어받아야 했음에도 저렇게 무리하게 처리한 것을 보면 뭔가가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많은 역사가들이 추측하는 대로 소현세자가 진정한 '계몽 군주'의 모습을 드러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성리학적 명분론에 빠져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고 조선이 강대국인 청국 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하면 자강을 할 수 있을지 심양과 북경에서 소현세자가 끊임없이 고민했던 점은 그저 상상의 산물이 아님은 확실합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왕을 어찌 왕으로 대접할 수 있겠는가."라는 반문은 이 소설과 앞선 영화에서 그저 상상의 산물일 수도 있지만 그것의 신빙성을 아예 배제할 수 없었기에 소현세자의 그 같은 비참한 최후가 어떠한 역사적 기록도 없이 묻힐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당시 인조에게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를 절단 내고 손자들까지 처리해야 될 아주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어찌 성리학적 정체와 맞닿을 수 있을지 큰 의문이 드는군요. 더군다나 왕과 정치적 동반자라고 봐도 분명한 서인들이 자신들의 세자를 처리해 달라고 왕을 겁박할 일은 거의 만무하다고 봐야겠죠. 모르겠습니다. 전란의 책임과 오랑캐에게 명나라에게 했던 것처럼 사대할 수 없다는 조선 사대부들의 절박한 심정이 끝내 오랑캐와 가까워 보이는 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인지는 아마도 역사만이 알고 있겠죠.


세자가 적의 땅에서 무엇을 하느냐. 그가 누구를 만나느냐.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일일이 말로 되어 나오지 않는 임금의 불안이 오히려 대신들을 두렵게 만든다고 했다.

조선은 그들의 적의 축에도 끼지 못했으나, 성가신 후방임에는 틀림없었다. 뒤를 걱정하면서 앞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조선의 것으로 태어나 청의 역관이 된 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조선의 피는 깡그리 잊고, 청의 세도만 살아남은 자와 같은 자들이 관소에 와서는 더욱 그 세도를 뽐내었다.

"내가 적의 땅에 오래 있으면서 매일같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허면, 대감은 아시오? 숭정의 연호를 지우고, 또 지우고, 또 지우고, 그리고 간교한 자들처럼 입술에 침을 적셔 말하오. 숭덕의 세상에 숭정은 없사옵니다. 조선이 그것을 모르지 않사옵니다. 아니구려......이제는 순치구려. 숭덕의 세상에도 없던 숭정이 순치의 세상에 있을 수 있소?"

그들은 전쟁 중의 위급한 상황에서도 남송의 어린 왕에게 <대학>을 강연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재상 육수부의 예를 들기도 했는데, 세자가 매일같이 글을 읽으면 대신들은 남송의 육수부가 그랬던 것처럼, 적을 맞아 자신을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을 것인가.

명에는 황제에게 아첨하고 간교한 말을 올리는 자들만이 살아남은 게 아니라 황제보다 더 높이 있는 환관들에게 줄을 대는 자들만이 살아남았다고 했다.

상은 오래 아프셨다. 보위에 오른 후 반란과 전쟁이 끊이지를 않아 심화가 병의 근원이 되었을 것이다. 노여움은 불안이 되고, 불안은 몸속 깊은 곳의 농증이 되었다.

그러나 세자가 원손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그 작은 나라의 비루함이 아니었다. 비루함의 너머에 있는 것, 혹은 그 중심에 있는 것......그것이 바로 언젠가는 이루어져야만 할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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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2 01: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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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2 14: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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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2 23: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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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3 0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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