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은 쉽고 민주주의는 어렵다 - 민주주의를 오염시키는 선동의 수사학
패트리샤 로버츠-밀러 지음, 김선 옮김 / 힐데와소피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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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패트리샤 로버츠-밀러는 버클리 대학에서 수사학을 전공하여 이후, 모교에서 석사와 박사까지 마치게 됩니다. 그녀는 한나 아렌트, 아리스토텔레스, 케네스 버크 등을 연구하고, 수사학이 정치적으로 복잡한 문제에 있어서 공동체에 함께 결정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이를 어떻게 민주주의에 응용할 수 있을지 평생에 걸쳐 노력을 해왔는데요. 더불어 수사학의 기본 목표가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는 시민들의 교양 교육 전반에도 관여할 수 있기에 그녀와 같은 연구자들의 활동은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정치가 극단주의적 위협에 노출되어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이 책을 통해, 수사학의 가치가 극우 포퓰리즘과 선동 정치의 병리를 치료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다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Demagoguery and Democracy"로 지난 210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3월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로버츠-밀러의 이 글은 오늘날 나날이 세를 확대하고 있는 극단주의와 이를 추종하는 세력이 선동을 이용하여 어떻게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합니다. 또한 선동은 우리에게 중요한 민주적 숙의의 원칙을 무력화 시키고, 시민 대다수를 그릇된 근거에 따른 일방적인 주장들로 세뇌시킨다는 점에서 충분히 위협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저자의 논증이 진행되는 가운데, 다소 놀랍게 느꼈던 부분은 선동에 휩쓸리는 시민들 대다수가 스스로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고, 똑똑하지 않다는 점 이외에도 똑똑한 사람들조차 마찬가지로 선동의 영향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분석이었습니다. 결국 선동이 나와 적을 가르는 일종의 슈미트식의 폭력적 분리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앞으로의 우리 정치는 대다수 시민들이 이 선동을 어떻게 하면 확실히 구별해 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버츠-밀러가 이러한 글을 내놓은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잖아도 이 책에 대해 구글링을 해보니, 현지의 의미 있는 여러 서평들이 적잖게 검색되고 있었습니다.

과거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내에서 벌어진 '조선인 사냥'은 저자가 말하는 내집단과 외집단의 폭력적 구별 뿐만 아니라, 정치 집단이 자신들을 향한 내부의 불만을 전혀 상관 없는 집단에게 돌려 사실상 비참한 결말을 초래한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시의 일본인들 전부를 어리석은 군중으로 몰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같은 선동은 예상했던 것보다 그 파급이 치명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선동 자체는 대체로 민주주의적 숙의와 확연히 구별되는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선동가의 무분별한 선동과는 달리 우리가 알고 있는 정상적인 정치 지도자들은 스스로가 언급한 발언에 책임을 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더욱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만능이 아니라 한계가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포용의 원칙에서 다른 사람의 발언을 존중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선동은 이와는 반대로, 우리와 적이라는 구분으로 정치 전반을 양극화 하고, 더 나아가 세계는 우리 편과 상대 편으로 마땅히 환원될 수 있으며, 현재의 내집단 상황이 대체로 좋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벌이는 어떠한 행동도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이들은 사실과 증거에 근거하지 않은 그릇된 주장을 일삼으며, 여기에는 각종 논리적 오류는 물론이고 객관적 진실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그것의 해악은 자체로 심각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를테면 "우리편 정치인이 진실되지 못한 것을 말한다면 실수지만, 상대편 정치인이 그런다면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는 주장들이 이러한 범주에 속할 겁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 저자의 논증에 있어 한 가지 부족한 진술은 이들 선동이 궁극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사실상의 격멸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선동의 끝에 파시즘이 있다"는 종래의 경고를 어정쩡하게 넘어간 점이라 볼 수 있는데요. 저는 이 뿐만 아니라, 선동에 빠져 그릇된 사고와 행동을 벌이고 있는 집단의 행태를 과연 어떤 식으로 정상화 시킬 수 있는지 논하고, 이에 대한 진지한 해결책이 좀 더 제시되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현재 프랑스와 독일은 물론 이탈리아까지 과거 파시즘에 대한 찬양과 인종적 혐오를 조장하는 행위를 사실상 처벌하는 법령을 갖고 있습니다. 앞서 제가 카를 슈미트를 언급했지만 선동의 근원에 대한 역사적 맥락이 대부분 파시즘과 연결되어 있고, 이에 슈미트적 피아 논리는 이처럼 극단적인 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극우 포퓰리즘의 속성일지도 모르겠지만 선동 자체를 민주주의적인 것으로 만드는 기법들 혹은 주장들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대한 회의를 끌어냅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자체가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현실에서 포퓰리즘이 터무니 없게 매번 민주주의 타령을 해대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은 마치 저 아프리카의 독재자가 자신은 밤낮으로 오로지 민주주의 생각만 한다는 소리와 하등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요. 사실상 우리 정치에서도 '민주적 숙의'를 통한 서로 간의 정치적 토론이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은 언제나 옳고, 설사 그릇된 주장을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비판을 하지 않고, 오히려 편을 들게 되는 행태가 만연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자의 결론대로 오늘날 선동이 왜곡한 정치는 그만큼 건정성을 답보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저자가 매번 강조하는 민주적 숙의는 어떻게 보면 서로에 대한 정치적 양보라고 여겨집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따라서 주장 전반이 부족하면 때에 따라 그것을 보완하여 알리고, 쟁점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하는 것은 행위자들에게 적잖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선동이 주가 된 정치 자체는 건설적인 토론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것이 끝내 인신 공격에 이른다는 점에서 매우 유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선동가들을 정치 무대에서 축출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선동을 구별하고, 그 가운데에서 민주주의에 유독한 측면을 효과적으로 찾아내는데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시민들이 논리적으로 무장하여 이들 선동 정치의 포로가 되지 않는 점일 텐데요. 개인적으로는 시민들 모두가 포퓰리즘과 극단주의가 유혹하는 '내집단'이라는 의미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인 외집단을 배격하면서 느끼는 왜곡된 카타르시스는 그만큼 중독적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인터넷 상에서의 너무나 무분별한 혐오 발언과 그것을 추종하는 집단들의 무분별한 언행들이 선동에 대한 근절을 더욱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정치의 미래가 그다지 밝지 만은 않은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여타 다른 인용보다 히틀러 이전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자행된 언론들의 혐오주의적 발언에 대한 인용이 결국 파시즘을 일으킨 토양이 되었다는 점은 꽤 의미심장한데요. 현재 미국 언론 지형이 극단화 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이 가까운 미래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부분도 꽤 중요한 통찰이라 여겨졌습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경계할 부분이라 생각되는데요. 전반적인 선동 정치에 대한 비판 뿐만 아니라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비판이 우리 언론에게 있어 거의 전무하다는 점도 현재 미국의 사례와 비슷하게 견주어 볼 수 있는 내용이라 여겨집니다. 주류 정치를 수렁에 빠뜨리고 있는 선동 정치와 이것을 거의 비판하지 않는 언론의 조합이 과연 민주주의에 어떠한 악영향으로 나타날지 더욱 두려운 마음이 드는군요.



-이 글, 4장에서 인용된 "시장이 비합리적으로 굴러가는 사례들은 해맑게 무시하면서 시장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자유 시장으로 전환하려는 결정은 잘 작동할 것이 틀림없다"는 주장과 돈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나을 수 있다는 주장 등이 비논리적으로 꾸며진, 합리적 인간의 근거로 쓰인다는 부분은 여전히 강고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향후 드러난 바와 같이 대량살상무기 관련 주장, 9.11과 이라크 사이의 연관성, 계획의 실행 가능성에 관해서는 당시에 침공을 반대하고 의심했던 사람들이 옳았다.

선동은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선동은 복잡한 정책 이슈가 우리(좋음) 대 그들(나쁨)의 이분법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도 틀릴 수 있고 지식의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며, 주장의 증거와 출처, 전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여지를 가지고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성체를 훼손하고, 우물에 독약을 풀고, 세계적인 음모에 가담했을 것이라는 이유로 유대인을 학살하던 과거를 돌아보며 끔찍해 한다.

우리는 똑똑하고 좋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좋아했다거나, 히틀러가 잘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책임지는 자리에 있다 보면 점차 성숙해지고 사실 정말 그런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믿었다거나, 자유 민주주의는 끝났으니 파시즘이 최선의 선택이고, 히틀러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모든 특징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질문을 우리 대 상대편의 구도로 환원하는 것이다.

그 오류가 우리 같은 사람들(내집단 구성원)은 본질적으로 믿을 만하고, 그들 같은 사람들(외집단 구성원)은 그렇지 않다는, 자주 틀리곤 하는 직감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우리편 정치인이 진실되지 못한 것을 말한다면 실수지만, 상대편 정치인이 그런다면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매개도 없이 세계를 정확히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며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완벽하게 진심일 수 있고, 진정성 있게 부정확한 것을 말할 수 있다.

나는 이와 비슷한 논쟁을 시장이 비합리적으로 굴러가는 사례들은 해맑게 무시하면서 시장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자유 시장으로 전환하려는 결정은 잘 작동할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사람과도 했던 적이 있다.

히틀러의 건축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나너였던 게르디 트루스트는 히틀러가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게 친절하고, 강아지를 아끼고,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예술품 앞에 서서 감동에 가득 차 생각에 잠기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살인자일 수 있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생산적인 민주적 숙의가 되려면 전제를 포함한 자신의 주장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있다고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공적 담론의 요점은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누르고 이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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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밍 사회 - 캔슬 컬처에서 해시태그 운동까지 그들은 왜 불타오르는가
이토 마사아키 지음, 유태선 옮김 / 북바이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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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이토 마사아키(伊藤昌亮) 교수는 일본의 사회학자로 도쿄 외국어 대학의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일반 IT 기업에 근무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2001년 2008년까지 도쿄대 학제정보학부에서 석·박사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후 현재는 도쿄도 무사시노시에 소재한 세이케이 대학의 현대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사아키 교수는 일본 내의 넷우익에 대한 연구를 비롯 최근에 일본 사회에서 불고 있는 반자유주의적 현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중도 성향에 가까운 마이니치 신문에 인터뷰와 기사로 꾸준히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치적으로는 리버럴적인 성향을 갖고 지식인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炎上社会を考える"로 지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미 이 글의 원제에서도 드러나고 있지만 염상炎上 이라는 단어는 넷상에서 익명으로 벌어지는 일부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비방이 빠르게 올라오며 이슈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요. 마찬가지로 원제에 염상사회 炎上社会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현재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위 극단적인 혐오 정서에 대해 저자는 사회학적인 분석을 시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이와 같은 일본 사회 내에서의 '사회적 병리 현상'은 2000년대에 본격적으로 진행된 신자유주의와 현재 일본 정치에서 거의 주류가 된 신보수주의 즉, 극우 정치가 만나 초래한 극단적인 사회 문화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이와 관련된 문제를 일본 내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증오와 더불어 '혐한'을 지목하고 이러한 배경에는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적 원리인 사회 내에서의 지위를 향한 경쟁과 사회 구성원들끼리 경제적 이득을 놓고 벌이는 각축이 비정상적인 '인정 욕구'와 맞물려,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해 보입니다.

어쩌면 일본 사회의 역사적 특이성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저자는 의미심장하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당국이 자신들의 국민들에게 벌인 통제와 감시 활동에서 이런 끔찍한 현상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었는데요. 물론 이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일본 뿐만 아니라 전셰계적으로 기성 정치 무대에 등장한 '우파 포퓰리즘'과 관련해, 이들이 채용한 카를 슈미트의 '적과 아'의 정치론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이러한 맥락이 슈미트 특유의 '나약한 자유주의 정치'에 대한 반감으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기본적으로 자신들을 비판하는 상대방에 대해 광범위한 거짓 뉴스와 선동을 사용하여, 거의 가차 없는 공격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건전성을 심각히 훼손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일본도 현 상황에서 정치적 주류가 오랫동안 극우에 기울어지면서 비교적 짧게 막을 내린 트럼프의 미국 정치보다도 병폐적 사회 문제는 더 심각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더욱이 저자의 분석대로 자유 시장의 경쟁 체제의 관념이 극단적인 여타 신자유주의적 국가들과 유사하면서도 여기에 더해 폐쇄적인 민족주의가 일본 사회를 이끌게 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따른 문제점이 책의 제목과 다름없는 일본 사회의 무분별한 혐오 문화를 초래했다는 저자의 분석이 옳다면, 사실상 신자유주의가 공동체 이익과 공동선에 대한 가치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진술은 큰 설득력을 얻게 됩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1980년대에 마가렛 대처가 이 시점부터 '사회는 없다'는 주장이 과연 무엇을 의미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전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사회 부조가 철폐되면서, 한정된 사회적 자원(지위를 포함해)을 놓고 사회 구성원들이 벌이는 경쟁이 결국은 아름답지 않은 결말로 귀결된 점도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설사 이 부분이 일본 사회에 한정된 현상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터넷 기업들의 노골적인 기업 이익 추구와 넷 상에서 벌어지는 시민들 간의 익명 대결은 제대로 넷 규범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우파 포퓰리즘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특히 앞선 카를 슈미트의 주장을 떠올려 본다면 인터넷에서의 무분별한 증오 양태와 혐오 발언 자체가 어떻게 사회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지 깨닫게 되는지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이를테면 넷 상에서 평범한 한 사람의 인격 살인을 초래하는 소위 '좌표 찍기'와 부풀려지는 낙인 찍기는 유독 일본만의 상황은 아니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미국 역시 혐오 발언과 다름 없는 트롤링으로 정치적 중도를 모조리 넷 상에서 쫓아내 버린 점도 위와 비슷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일관된 논증 가운데, 3장에서 해시태그와 관련된 '집단 극화' 현상과 같은 넷 상에서의 분위기가 '시회 운동인지 아니면 군중 운동'인지에 관한 의문을 더욱 강화 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민주적 발언을 위한 어느 정도의 익명성은 필요할 수 있지만, 앞선 집단 극화 현상과 같이 평범한 주제의 의견도 쉽게 과격해지고 폭력적이 되는 점은 우려할 만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시장 가치'를 높이고자 특히 그 '의식의 높이'를 두고 서로 경쟁한다"는 진술은 이처럼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해 '깨어있다는 의식 자체'를 SNS 상에서 이용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이는 일본 뿐만 아니라 선진 민주 국가로 불리는 많은 사회에서 좌파와 우파라는 이념적 대치 뿐만 아니라, 각각의 발언들이 상대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향해 인신적 공격까지 서슴치 않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묵시적으로 익명성을 강조하는 넷 상에서 이들 '유저'들에게 일일이 도덕적 관용을 강조하기란 철지난 계몽주의적 논법으로 취급 되었고, "좌파는 이렇다. 우파는 답답하다"라는 식의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만을 모두가 소모적으로 소비하게 이르렀는데요. 물론 여기에만 그쳤다면 별 반 문제가 없겠으나, 1장과 2장에서 보여지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사회적 약자'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과해졌고, 이것이 흔한 군중에서 볼 수 있는 언어적 폭력성과 더불어, 사회적 인격 살인까지 빈번히 발생하기에 이릅니다. 그런 연유로 넷 상에서 중도의 퇴출은 물론 반대로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극단에 있는 자들의 콜로세움이 열린 현실이 결국에는 저자의 말하고자 하는 일관된 논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뒤이어 5장에서는 인터넷 악성 발언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공감 지상주의'에 대해서도 논증하고 있습니다만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려하는 것으로 시작된 공감에 대한 인식이 누군가에 대한 비상식적인 공격과 함께, 한 개인의 사회적 매장에 대한 소위 공감 강요로 이어지고 있는 점이 과연 자유주의적 토대의 관용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저자는 되묻기에 이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민주주의 정치를 따로 거론하지 않더라도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시민이 어떻게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멈추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되는데요. 이성이 결여된 시민이 초래하는 전반적인 우려에 대해 버틀란드 러셀은 이미 통렬하게 분석한 바가 있습니다. 정치적 건전성을 위해, 또한 시민들 간의 자유롭고 모두의 이익이 되는 제언들은 시민 각자의 명료한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저 말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는 이보다 더한 것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일 텐데요. 이것은 우파 포퓰리즘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증명되지도 않은 가짜 뉴스를 남발하면서 이성을 잃은 다수의 시민들을 입맛에 맞게 포획한 최근의 상황과도 맞물려 있습니다. 이는 이성의 실종과 더불어 우리가 그토록 수호하고자 했던 자유주의적 관용이 과연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대해 시민 모두가 성찰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마사아키 교수가 거의 일관되게 오늘날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수에 대한 혐오 발언과 더불어 집단 린치에 이르는 사회적 병리 현상 전반을 꽤 설득적으로 분석해 내고 있습니다. 일본 사회가 오래전부터 강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흡사 고착된 관습으로 여겼던 점을 감안해 본다면, 2차 대전 패전 이후 미군에 의해 반강제로 이식된 자유 민주주의가 대다수의 일본인들에게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매우 궁금해집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특정 국가의 지독한 혐오를 책으로 찍어내어, 버젓이 대도시의 대형 서점에 '혐한 섹션'이라는 이름으로 팔고 있는 현상 자체에 일본 사회에 과연 자유주의적 관용과 이웃 국가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기반이 되어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할 따름인데요. 저자 특유의 교묘한 논법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자신이 해석하고 있는 일본 사회에서 여러모로 쉽게 불타오르게 되는 요인들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과거사 문제가 언급되지 않은 점은 꽤 아쉬운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더욱이 재특회와 5CH와 같은 우익들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도 미흡해 보였고, 전반적인 현상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적 자유 경쟁과 시장 경제에 대한 원리 원칙이 사회적 문제의 큰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과연 설명으로 충분한지에 대해서도 큰 의문이 듭니다. 예를 들어, 일전에 읽은 케이트 만의 글처럼 '여성 혐오'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해 분석하는 식의 좀 더 설득적인 맥락과 이에 기반한 상세한 분석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터무니 없는 여성 혐오에 대한 사회적 맥락의 이해와 마찬가지로 현재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사회적 병폐는 정말 사례와 그 분석이 충분히 상당할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외적으로 건전gk고 견고한 민주주의 국가이면서 경제적으로 선진국이라 자부하는 일본이 사실상 극우 정치와 이들을 견제할 만한 효과적인 수단이 전무하고, 이러한 가운데 사회가 점차 관용을 잃고 극단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무엇보다 글에서 역자의 '일왕'이라는 표기는 꽤 의외이기도 했습니다. 여지없이 일본 국왕에 대한 저의 이해는 '일왕'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37년 10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시작되었고, 1938년 4월에는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되었다. 게다가 1940년 10월에는 대정익찬회가 결성되어 중앙에서 말단 조직인 도나리구미(2차 세계 대전 당시에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에 이르는 광대한 국민 통제 체제가 갖추어져간다.

그들은 신자유주의하에서 각자가 자유 경쟁을 벌이면서 자기 책임으로 위험에 대처해나갈 것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었다.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는 일찍이 정치적 행위의 본질이란 ‘친구‘와 ‘적‘을 구별하는 데 있다면서 특히 ‘예외 상황‘을 만났을 때 그러한 결단을 내리는 모습에서 정치가의 책무를 보려고 했다. 게다가 그것은 대중의 갈채에 힘입어 이루어진다면서 그런 태도를 ‘결단주의‘가고 불렀다.

강자가 되려고 모두가 각축을 벌이는 신자유주의 풍조속에서 자신이 약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진 상황은 기묘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통해 사회의 재분배 기능이 무너지고 분배의 기초 자금이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 제한된 이익을 둘러싸고 ‘약자‘포지션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격화되어왔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 인식에 하나의 틀(프레임)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상황의 정의를 공유하고, 게다가 특정 가치관, 문제 의식, 변혁 지향 등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사회 운동론에서는 ‘프레이밍‘이라고 부른다.

‘공감‘은 본래 과거 애덤 스미스가 논했듯이 ‘타인의 입장에서 타인이 어떻게 느끼는지 상상하는 것‘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타인에 대한 상상력에 근거해 타인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이해한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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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자본주의의 폭력 - 부채위기를 넘어 공통으로 아우또노미아총서 41
크리스티안 마라찌 지음, 심성보 옮김 / 갈무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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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마라찌는 스위스 루가노 출신으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학계에선 진보적 경제학자이자 열정적인 사회 활동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파도바 대학을 졸업하고 런던 정경대를 거쳐, 런던시티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특히 마라찌는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고 그에 따른 여러 운동에도 직접 참여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가 나가야 할 길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요. 그래서 그가 상아탑에 국한된 경제 이론가에 그치지 않고 유럽의 경제 환경과 시스템 자체에 대한 비판을 해오고 있는 점은 학자로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 여기는 듯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마라찌에 대해 크게 긍정한 부분은 작금의 전세계적 금융 자본주의가 현실에서 많은 시민들에게 거의 이익이 되지 않았다는 점과 1985년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따른 복지 축소와 사회 보장에 대한 쥐어짜기식 정책이 마찬가지로 유럽을 결국 위기에 몰아넣었다는 인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The Violence of Financial Capitalism"으로 지난 200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3년 4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마라찌의 이 글은 지난 수십 년 간의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주의 이행에 따른 파급이 어떻게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로 이어졌는지를 고찰해보고, 앞으로 자본주의의 건전성과 금융 자본주의의 병리를 어떻게 치료할 수 있겠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명확히 드러나지만 채권을 손쉽게 팔아 치울 수 있었던 증권화 securitization는 대표적인 금융 자본주의 체제에서 소위 '유독성 자산'을 만들어 낸 원인이기도 한데요. 물론 2008년의 대위기를 분석한 글들은 충분히 소개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2008년의 위기 때 경제 엘리트들의 심각한 도덕적 해이는 물론 시스템의 붕괴까지 여러모로 자유 시장이라는 대마불사에 큰 타격이 되었죠. 여기에 저자가 거듭 인용하고 있는 마틴 울프를 포함, 파리드 자카리아, 맷 타이비, 심지어 히로세 다카시마저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를 직접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이 금융 엘리트들이 주도한 근본 금융 자본주의 자체를 흡사 '카지노'로 비유했던 한스 베르너 진의 분석 또한 매우 유명한데요. 사실상 현재의 금융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고전 경제학자들을 제외한다면 현재의 금융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는 학자들이 제법 많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연유로 경제학이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이 지점에서 깊은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세계 경제는 더할 나위 없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미국의 경제 동향이 매우 중요합니다. 미국의 시장이 세계 경제의 소위 '베드' 역할을 하고 있는 소위 선진 적자국이라고 불리는 영국과 미국의 대규모 적자는 이처럼 세계 경제 체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맥락이기도 합니다. 다시 돌아와, 2008년의 위기는 소위 채무를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고안된 증권화에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저자의 분석대로 증권화를 통한 자본의 축적은 그 파급이 충격적이었다는 점에서 금융 시스템 전반이 과연 건전성을 답보할 수 있는가가 이 글의 주요한 논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저자의 현재 금융 자본주의에 대한 몇 가지 문제점과 이런 체제가 다시금 초래할 수 있는 위기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논하고 있는 부분만으로도 우리가 이 글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1980년 이전의 시장에 대한 케인스주의적 접근의 불만족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장 전반을 새롭게 재해석한 신자유주의의 실패는 앞서 언급했던 대로 고전 경제학자들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미 누리엘 루비니가 2004년부터 이 금융 시장의 위기를 경고했지만 금융 엘리트들을 비롯해, 심지어 당국마저도 이러한 의견을 사실상 무시해 왔습니다. 그 이전에 하이먼 민스키를 알고 있다면 이러한 우려는 상당히 있어 왔습니다. 어떻게 시장 전체가 거대한 증권화에 담보물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상 시장의 자정 능력은 그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는 이 시점에 신자유주의자들의 뼈아픈 반성이 나왔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2008년의 청산 작업에서 보여준 금융 엘리트들의 추태는 이런 저의 당위에 상반되는 모습을 만천하에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저들이 오로지 자신의 사익에만 몰두하는 인간들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더욱이 조지 W. 부시에 이어 등장한 오바마 행정부가 이들에 대한 기소를 포기하고 면죄부를 이들 손에 안겨준 것은 이 사태의 결론이 익히 짐작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저자인 마라찌가 오바마 정부의 '신 뉴딜'이 가급정 성공해야만 한다고 기대하는 장면에서는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기에 미국의 소비시장을 비롯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브레이크 없이 신용 생활을 지속합니다. 이 점은 달리 말하면 시스템적 도더적 해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의 원인들 가운제 한가지는 미국을 상대로 막대한 흑자를 거두고 있던 중국의 국내 저축 자금이 이런 여파를 불러온 것인데요. 이에 새뮤얼 헌팅턴과 같은 이들은 미국의 위기를 전부 중국의 책임으로 몰아가는 근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자의 평가대로 중국 당국이 미국의 국채 매입이나 미국 시장의 재투자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점은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의 현실적 한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미국이 반쯤 자임해 온 세계 자본주의에서의 소비 시장 역할을 중국에 맡기기에는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이를 지금까지 지탱해 온 체제의 근본과 관련해서도 역시 다른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극히 난감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럽이 설정해 온 '유로화'에 대한 시장에서의 안정화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시장 전반이 개발도상국에게 좀 더 수출 시장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필요한데, 현재 독일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흑자국임을 고려해 봤을 때, 이 같은 기대 역시도 상당히 어려운 실정입니다. 일전의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언급대로 오로지 미국만의 적자를 기반으로 해, 전세계 국가들을 향한 소비 시장 제공이 과연 언제까지 가능할 지는 분명히 우려스러운 부분인데요. 더욱이 이 시점에서 과거보다 경제적으로 영향력을 갖게 된 중국이 세계 결제 통화를 교체하고 싶어하는 내심과 그러한 세계 경제 체제의 주도권을 쥐고 싶어하는 이들의 근본적인 목표도 마찬가지로 세계 경제에 있어서 어두운 그림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IMF 체제가 과거처럼 얼마나 영향력을 견지할 수 있을지도 신자유주의와 세계 경제의 헤게모니에 대한 분명한 과제로 여겨집니다. 

결국 세계가 직면한 이 문제 대한 마라찌의 해법은 사실상 진보적인 것으로, 기존의 대니 로드릭이 회의적으로 파악했던, 정치적 결단 혹은 정치적 해법에 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재 세계 경제 블럭이 선진 그룹과 개발도상국 간의 이원화로 고착화 되어 가는 점을 인식하고, 중국이 자신들의 요구대로 세계 경제 체제의 재구축에 유럽을 비롯한 미국의 경제 당국이 이를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느냐가 현재의 큰 과제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저 역시도 이 과제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미국이 자신들이 쥐고 있는 경제적 헤게모니를 떠오르는 경쟁국에게 양보하리란 어려운 부분이라 볼 수 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브레튼우즈 체제의 양상이 그러했으니까요. 저는 이런 체제의 주도권을 쥐고자 하는 권력 문제에서 조금 벗어나서, 금융 자본주의에 있어 저자가 제안한,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이 1997년의 외환위기를 교훈 삼아 외화 보유고를 늘리고자 하는 딜레마를 워싱턴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앞선 국가들의 위기시 외환 보유고의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우리가 당신들을 고립시키거나 그것을 기화로 당신들의 시장을 붕괴시키지 않겠다는 제스처를 일관되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합니다. 이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IMF 체제를 고려해 본다면 상당히 충격적인 제안이기도 한 데요. 즉, 개발도상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의 과도한 외환 축적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파급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제안은 충분히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런 제안과 더불어, 4장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구조적인 선진 적자국들과 반대의 흑자국들 간의 차이 또한 어떻게 좁혀 나갈 수 있느냐도 중요한 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시장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작금의 고정된 경제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고, 여기에는 서로 간의 대화와 협의라는 (민주주의 방식의) 정치적 해법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3장의 결말에서 저자는 우리가 몸소 목도하고 있는 금융화는 고도로 고안된 기법으로 채워,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변화되는 시점에서 '도착적인 축적 양식'자체라고 진단합니다. 이는 실물 경제가 금융 기법의 하위 요소로 추락하고, 이를 통해 돈이 더욱 배타적으로 축적되는 결과를 초래했는데요. 결국 더 많은 자본을 소유한 자들을 위한 신자유주의적 기법과 그런 이행 전반이 자본주의를 더욱 비인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에티엔 발리바르를 포함한 많은 사회학자들이 경제와 시장이 민주주의를 비롯한 시민이 기본이 되는 정치를 떠받쳐야 했지만, 이는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무력화 된 바가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비합리적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물론, 경제 상황에서 자본의 축적을 좀 더 효율적이고 손쉽게 만든다면 그만큼 사회가 진보하고, 이러한 이행에 따른 이익이 모든 시민들에게 고르게 주어질 수 있다고 항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극명한 모순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금융 시장에 대한 불안전성 자체를 그저 자연스런 문제라고 치부하고, 이익은 마땅히 자신들의 손에, 손해는 오로지 정부의 몫으로 남긴 2008년의 파국적인 결과는 시장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야 하는지에 대한 시민들의 거듭된 의문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마라찌의 이 글은 2008년의 위기로부터 우리가 과연 배운 것이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체제의 모순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술에서 의문이 드는 점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적 기법에 의해 시장에 대한 제한적인 접근만이 가능한 분위기에서 과연 체계적으로 이에 대응할 수 있겠느냐 입니다. 따라서 금융 시장에 대한 각 국의 정치적인 접근이 이렇게 큰 모순을 안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폴 크루거먼에 따르면, (2010년 1월 11일 상하 양원에서 7천 895억 달러로 감축되긴 했지만) 오바마 정부가 제안한 8천 250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 부양책은, 위기시기에 나타난 잠재 성장(률)의 "산출 격차"를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애널리스트들에 따르면, 시장은 가격 왜곡을 암시하는 경제적 버블의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 정부가 차입을 시도함에 따라 실질 금리가 상승하는 교란이 일어나고 있다."

먼저 자극 단계에서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주식시장에 도취되어 과잉거래를 일삼는다. 다음으로 공포와 혼란의 단계가 나타나고, 곧이어 합병의 단계로 진입한 다음 마지막에 재조직의 단계로 끝맺는다.

1960~70년대에 발생한 (대략 50퍼센트에 이르는) 이윤 감소가 꼽히고 있다. 이윤 감소는 포드주의의 기술적, 경제적 토대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배의 측면에서 볼 때, (부의 극단적인 양극화를 특징으로 하는) 자본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금리생활자의 소비 증가 때문이고, 또 부분적으로는 부채를 통한 임금 생활자의 소비 때문이다.

전지구적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의심할 바 없이 서브 프라임 모기지 대출을 기초로 창출된 파생증권은 희생양이 되었고 "유독성" 자산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오늘날 금융 산업의 입맛에 맞추어 학문적 역량과 품위를 냉팽개쳤던 아카데미 경제학자들이 양심상 평안하길 바랄 뿐이다(이처럼 현재의 금융위기는 아카데미 경제학의 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무역 흑자국, 가령 독일과 일본 뿐만 아니라 발전도상국들이 수출을 늘릴 수 있는 근본적 원인은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무역 적자]국들이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높은 수요 증가율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신경제에서 자본주의적 가치창출 과정을 혁신하는 최전선은 ‘임금노동을 주변화하고 자유노동을 통해 가치를 증식하는 것‘이다.

금융화는 금융 지대와 소비자 부채를 창출하였고 이 덕분에 전지구적 자본을 성장시킬 수 있었다.

1985년부터 지금까지, 그러니까 시장의 탈규제화를 통해 경제를 신자유주의로 전환한 이후, 평균 2년 반마다 금융 위기와/나 통화위기가 반복해서 일어났다.

알폰소 뚜어가 언급했듯이, "중국의 선의는 공짜가 아닐뿐더러, 특히 미국에게, 값비싼 대가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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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보수의 역사
로저 스크러턴 지음, 이재학 옮김 / 돌밭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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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 버톤 스크러튼은 영국 링컨셔의 작은 도시인 버슬링소프에서 태어나, 위컴에서 두 자매와 함께 자라났습니다. 그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로열 그래머스쿨에서 수학했고, 이 시기에 응용 수학, 물리학 및 화학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런 결과로 케임브리지에 합격하게 됩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자연 과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도덕 철학을 비롯한 서양 근대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요. 이후 그의 이력은 철학과 사회사상, 정치철학 등으로 채우게 됩니다. 특히 1982년부터 대처리즘에 반대하는 전통적 보수주의를 옹호하는 전문 저널인 솔즈베리 리뷰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게 되는데요. 그의 보수주의적 사상은 이곳 솔즈베리 리뷰를 통해, 핵 군축 캠페인, 평등주의, 페미니즘, 대외 원조, 다문화주의, 모더니즘 등에 매우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게 됩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Conservatism : An Invitation to the Great Tradition"으로 지난 2017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작년인, 2022년 12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먼저 이 책에 대한 간단한 평가를 내리고 싶은데요. 일단은 전통적인 보수주의에 논하는 글들 중 수위를 다툴만한 평이한 글이라 생각됩니다. 더욱이 이렇게 접하기 쉬운 글들은 보수주의나 자유주의에 대해 개념적으로 명확하지 않은 분들께는 분명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실 있을 것 같은데요. 다만,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는 많은 분들이 무엇보다 '건전한 보수'를 원한고 있다는 측면에서, 예전의 '전통주의적인 보수가 과연 오늘날과 같은 현대 사회에 유용할 수 있겠느냐'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회의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외에도 이 글에 대해 안타까운 점은, 보수주의가 프랑스 혁명의 여파 때문인지 아직도 '평등'에 대해 단순히 부정적 입장 만을 피력한 채, 현재 승자 독식의 자본주의가 초래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 사실상 눈을 감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사람들 틈 속에서 평등을 외치는 것은 소위 이념적 일관성에 위배되는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배타적 민족주의에 대해 별반 의견을 내지 않는 자칭 보수주의자가 태반인 걸 감안한다면 극단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구분이 요원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물론 저자기 이 글 5장, '사회주의에서 맞서다'에서 이를 항변하고 있긴 한데요. 이는 거의 자유주의 세력권에 의한 사실상의 사회주의 봉쇄라는 역사적 사실인데, 여기에 굳이 보수주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같은 맥락으로 현재의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어느 정도는 구분이 힘들다는 점에서 스크러튼의 이 글이 그 만큼의 통찰이 될지도 꽤 의문이 들기도 하네요. 특히 스크러튼의 논증을 통해 평등과 관련된 보수주의의 입장을 예측해 본다면 이들 보수주의가 일정 부분 민주주의를 탐탁치 않게 바라보는 전제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더욱이 개인적 자유주의의 시대가 도래된 시점에서 이 자유주의 맥락의 개인주의를 경계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보수주의의 책임이라고 저자는 평가하면서도 후반부에 갑자기 자유주의와의 연대를 강조하는 부분은, 계획된 책의 분량으로 인한 근거의 미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역시도 아쉬운 논증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3장에서 이미 스크러튼이 인용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진정한 자유라는 함의는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자율성이라는 의식은 어느 정도는 계몽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를 다른 말로 풀어보자면 인간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계몽주의 시기에 크게 변화를 맞이하게 되고, 마찬가지로 인간의 합리성이라는 주제도 이 시기에 잉태되었다 볼 수 있겠는데요. 저는 이 부분에서 인간이 과연 합리적일 수 있겠느냐에 대해 큰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장 자크 루소가 견지한 공화주의적 계약론에 대해 일정 부분 인정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상가 마다 루소를 비판할 수도 있지만 루소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여타 사회계약론과 공화주의에 대한 인식적 거부로 이어질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저자 역시 일관되게 극단적인 자유 지상주의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펼치고 있긴 합니다. 마찬가지로 과거 전체주의에 대해서도 강하게 거부하는 논증을 하고 있었는데요. 이 정도의 당연한 발언들이 건전한 보수주의의 기준이라면 기준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데이빗 코츠에 의견대로 신자유주의와 한 몸이 된 보수주의가 과연 '시장 근본주의에 준하는 이런 상황`를 공동체를 위해, 실제적으로 거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상당한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전체주의가 극렬한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로 불타올라, 전세계에 엄청난 파국을 초래했다면, "보수주의는 이 민족주의를 과연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명확한 답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보수주의는 이 민족이라는 관념을 '자유' 이상으로 심도 있게 다뤄야만 한다고 판단됩니다. 민족과 공동체, 전통적인 가족제도, 종교적 경건주의 같은 것이 보수주의가 주장하는 것이라면 이 민족에 대한 관념에 대해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죠. 더욱이 이 글에서 숱하게 언급되는 자유에 대해서는 '개인의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와 스크러튼이 말하는 전통적 보수주의가 서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친절한 설명과는 앞선 민족에 대한 태도가 영 부실한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스크러튼은 서두에서 아마도 보수주의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고려해서인지, 아주 명확하게 보수는 반동과는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강조는 글 말미에서 어느 한 인물(카를 슈미트)을 애매하게 평가하면서부터 그의 진정성은 훼손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을 그저 위선적 논법이라고 단순히 폄하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미 에드먼드 버크가 오래전부터 사회에 내려오는 전통과 관습이 '사회적 지식의 형태들'로서, 이것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입장과 보수주의의 생각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카를 슈미트가 일전에 독일 사회에 보인 일관된 관점을 고려해 본다면 말이죠. 이것과는 별개로 전반적인 논증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공리주의가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보수주의의 중요한 사상적인 틀이 되었던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연유로 보수주의는 공동체를 위한 이익이나 전통적인 토대, 구성원들이 인정하는 사회 규범 등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한낱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무라는 단어가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앞선 맥락을 이해한다면 스크러튼이 왜 1980년대에 맹위를 떨친 '대처리즘'에 반대했는지 어느 정도 수긍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극대화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공동체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수주의적 입장에서 이를 비판하는 것이 어쩌면 사회 건전성을 위해 매우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스크러튼 자신이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사상인 이 보수주의를 여러 논증을 통해, 지금은 퇴색된 전통적 보수주의에 대해 독자들에게 쉽게 알리고자 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목적일 겁니다. 제가 일부 논증에 대해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은 애덤 스미스에 대한 인용이었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다른 중요한 저작인 도덕감정론을 감안한다면 보수주의와 더 나아가 자본주의에 대한 기계적 설득을 위해 너무 남용 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보이지 않는 손'도 그렇고 보수주의가 사실상 용인하고 인식하는 사회적 연대의 그 사상적 기반이 '사유 재산'에 있다는 부분도 그 근거가 너무 빈약한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스크러튼이 생각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집단 문제에 대한 쉬운 해결책'이라고 여겼던 모양인데요. 이 부분에 대한 확장된 근거가 보이지 않는 손 내지는 사유 재산을 통한 인간의 합리적 사고의 긍정적 기대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고인이 된 스크러튼에게 묻고 싶은 것은, 2008년에 전세계를 휩쓴 경제 위기에서, 이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인 것인지, 아니면 금융 자본주의를 자기들 손에 넣고 쥐락펴락한 경제 엘리트들의 부패에서 비롯된 것인지 의견을 듣고 싶은데요. 과연 인간의 탐욕에 대한 문제를 개인의 합리주의로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소수의)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에게 반문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끝으로, 저자는 글 말미에 레오 스트라우스와 카를 슈미트를 언급하며, 마치 현재의 보수주의적 맥락에 사상적 기여를 한 인물들로 그리고 있습니다. 앞서 제가 언급했지만 특히 카를 슈미트를 여기에 우겨 놓은 것은 몹시 실망스러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가치와 보수주의가 이를 긍정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저 역시 충분히 공감하지만, 억지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연대를 논하면서 오늘날 전 세계의 승자 독식 자본주의를 나날이 강화시킨 신자유주의에 대한 애매한 태도는 보수주의 자체가 자신들이 주장하는 정치적 입장에서 객관적일 수 없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요.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시민 공동체의 파편화와 고립을 만들어 내고, 평범한 시민의 삶을 더욱 어려운 지경으로 내몬 것으로도 모자라, "이것은 모두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 아니라 온전히 너희의 몫이다"라고 편의적으로 사회에 강요해 왔습니다. 본문에서 논증 되는 것처럼, 어느 정도 법과 제도는 유한성을 갖고 있는 반면, 보수주의가 추동하는 중요한 가치들은 본질적으로 전세계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는 면에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사실상 결탁했다는 그레이스 블레이클리와 같은 학자들의 주장에 보수주의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더욱더 (전통적) 보수주의가 신자유주의와 분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러한 측면에서 신자유주의 식대로 민주주의를 분석해 보는 행위 자체도 꽤나 편협하고 낡은 생각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비웃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글의 마무리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지만 저 역시 건전한 보수는 사회에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사실상 보수주의는 애초에 기본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만 그들이 기대하는 보수주의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특유의 보수주의자답게 토머스 페인이 과대평가 되었으며, 다소간 재평가를 받아야한다고 논증을 펼치고 있는데요. 물론 저는 이에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글 6장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부분도 인간의 사상의 자유, 생각할 자유, 발언할 자유가 극도의 혐오에 이르고, 끊없이 누군가를 도태시키고 증오하고 혐오하는 권리가 과연 '양도할 수 없는 권리'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지금도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최근 서평을 쓴 에즈라 클라인의 글이 다시 생각날 정도였는데요. 최근 대안 우파와 트럼프주의자들이 앵무새처럼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난과는 조금 다른 건설적인 의견 개진이 가능할 줄 알았지만 이 부분도 상당히 아쉬운 부분입니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보수주의는 계몽운동의 시기에 지나친 자유주의적 새인주의를 견제할 필요성 때문에 등장했다.

우선 전통적 보수주의자들과 자유 시장을 옹호하는 자유지상론자들이 서로 대립했다.

보수주의자들도 인간의 이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공유한다. 정치적 삶의 한 가지 목적은 이성의 행사를 가다듬고, 그 이성의 집단적 행사에 필요한 미덕을 시민들에게 심어주는데 있다는 것 그들도 인정한다.

우리가 의무를 계약에 따른 책임이라고 해석한다면, 모든 합리적 존재는 반드시 계약을 수용해야 한다는 견지에서 그 의무를 정당화하게 된다.

칸트는 비록 언제나 권리나 해방보다는 의무와 법을 강조했지만 대체로 당시 부상하던 자유주의적 정론들과 일치하는 일종의 급진적인 정치적 결론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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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 - 편 가르기 시대 휘둘리지 않는 유권자를 위한 정당정치 안내서
에즈라 클라인 지음, 황성연 옮김 / 윌북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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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즈라 클라인은 미국의 언론인이자 정치 분석가로 미국 뉴스 및 오피니언 사이트인 Vox의 공동 창립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캘리포니아 어바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유니버시티 고등학교를 거쳐, 서부의 명문인 UCLA에서 학사 학위를 받습니다. 이후 워싱턴 포스트와 더 아메리칸 프로스펙트를 거쳐 현재 뉴욕 타임즈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앞선 Vox의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자신의 이름을 건 팟캐스트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의 여러 정책과 관련해, 논평한 개인 블로그도 가히 심도 있는 분석으로 많은 네티즌들에게 유명세를 타기도 했는데요. 더욱이 그는 진보적인 언론인으로서 레이첼 매도를 비롯한 다방면의 이론가들과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합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Why We're Polarized"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2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클라인의 이 글을 추천한 여러 유명 인사 중, 프랜시스 후쿠야마와 파리드 자카리아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니 개인적으로 꽤 흥미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우파 정치 사상가로 알려진 후쿠야마가 작금의 극단주의 정치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 그 점이 매우 궁금했는데요. 현재 미국 정치에 있어 우파 포퓰리즘과 양극화 정치 자체가 미국이 힘겹게 쌓아 올린 공화주의에 사실상 악영향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자는 글의 결말 부분인 10장에서 에둘러 이런 양극화 정치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었습니다만 논증의 전개 과정 대부분은 이런 양극화와 극단주의 정치에 우려섞인 내용들을 근거로 두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과제는 미국 정치가 얼마나 건전성을 답보할 수 있겠느냐에 달려 있을 것 같은데요. 저자인 클라인 역시, 현재의 미국 정치 시스템이 상당히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며,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 인식도 바로 이러한 맥락 가운데 있다는 점을 주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거의 많은 정치 이론가들이 인정하듯, 현재 미국 정치에서 만연된 양극화 정치를 가장 실질적으로 이용한 인물은 도널드 트럼프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성기가 큰 것을 자랑하고, 편협한 인종주의에 여성을 그저 성적 대상화한 인물이 공화당의 대선 후보가 된 점은 '우파 포퓰리즘'의 시대를 열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과거 2008년에 조지 W. 부시가 재선 가운데, 백인 기독교인들 가운데 74%의 지지를 받았는데, 이에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비도덕적이고 타락한 간통자였던 트럼프가 마찬가지로 백인 기독교인들의 80%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은 거의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2012년에 실시된 조사에서도 "자신을 민주당원이라고 하는 사람의 43%가 백인이 아니었지만, 자신을 공화당원이라고 하는 사람의 9%만이 백인이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는 결과 역시, 현재의 인종적 정체성 정치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여실히 목도하게 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역사적인 측면에서 저자인 애즈라 클라인의 단연 통찰이라고 볼 수 있는 점은, 미국 정당 정치에서의 민주당과 공화당간의 구분은 사실상 '민권법'과 관련한 부의 재분배와 계층 상승이 흑인에게까지 확대되자 많는 사람들이 민주당에 등을 돌렸다"는 분석입니다. 더불어 전통적인 '백인 정체성'과 이어지는 이 흑인에 대한 인종주의는 이것을 지지하는 백인들이 아직도 지대하다는 점을 사실상 반증하는 것이기도 한데요. 현재까지 미국 정치 무대에서의 이런 '인종주의적 맥락'이 얼마나 강력한지 앞선 진술들을 통해 파악할 수 있습니다.

2장에서 상세히 분석되고 있지만 이 정체성 정치 자체는 상대적으로 권력에 소외된 사람들의 사회적인 측면에서 필요한 논리였습니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나 사회적으로 여전히 억압 받는 저소득층의 여성들과 같이, 기존의 기득권 정치에 자신들의 입장을 어필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한데요. 여기서 문제는 맞지 않게도 다수의 백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다른 인종들에 비해 차별 받고 있다고 믿는 부분입니다. 더욱이 오버마 대통령의 당선으로 현재 미국에는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이 없다고 믿는 백인들이 너무나도 많은 실정인데요. 이런 연유로 도널드 트럼프의 반(反)이민 정책이나, "멕시코가 미국 국경에 좋은 사람들만 보내는 것이 아니다"라는 거의 인종적 혐오 발언과 다름 없는 언설들이 미국 내부에서 영향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 같습니다. 이것은 다음 3장에서 '증오를 통해 행복을 찾는다'는 주제와 맞닿아 있기도 한데요. 시민들이 누군가를 증오할 권리가 있다고 전제한다면, 끊임없이 증오의 대상이 되는 어떤 누군가는 그것 자체로 현실 정치의 왜곡이라고 항변할 수 있을 텐데요.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증오할 권리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인지는 지금도 강하게 의문이 듭니다. 물론 저자는 이러한 '양극화'에 대해 단순히 '분류'라는 정치적 용어를 들이대며, 현재의 미국 정치에서의 양극화가 과연 심각한 상황인가에 대해 다소 의문을 표하기도 한데요. 자신이 속한 그룹의 상당한 내적 편향과 이것에 속하지 않는 다른 그룹에 대한 증오가 이미 상당한 수준임에도 단순히 이를 미국 정치의 개방성이나 시민들의 마땅한 사상의 자유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마찬가지로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결국 극심한 사회 분열을 분석하고 있는 5장에서, 저자는 "포퓰리즘 우파의 부상은 미국만의 현상은 아니며, 2016년에 시작된 것도 아니다. 서방세계의 여러 나라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고 사실상 일관된 논증 가운데서 선을 긋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도널드 트럼프 뿐만 아니라 공화당 전체가 거부한 '오바마 케어'와 의료보럼 의무 가입은 이러한 정체성 정치의 극명한 사례라고 여겨지는데요. 이 책에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과거 로널드 레이건이 사회 복지 제도에 대한 완벽한 거부는 아직도 지원이 필요한 흑인 계층에 대다수에 대한 혐오를 거의 가감없이 드러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는 국가의 사회 보장에 대한 반감과 인종주의는 꽤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맥락은 일전에 마틴 길렌스도 언급한 바가 있는데요. 유독 많은 백인들이 사회 보장에 대해 큰 반감을 보이는 것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더욱이 미국의 현실적인 '인종주의적 벽'을 감안하지도 않고 많은 흑인들이 스스로의 삶에서 성공하는 데 사회적으로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진보주의자들의 판단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부실하다고 느껴지는데요. 이것은 서로를 혐오하는 양당의 지지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그렇게 매번 강조하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 거의 전무하며, 오로지 정치적 셈법을 위해 서로를 대결의 상대로만 보는 사실상의 양극화 정치 자체는 저자의 말마따나 일종의 시스템의 우려스러운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두에서 이미 저자는 엘리트 기반의 정치가들이 서로를 향해 극단주의적 논법을 강화시켜 나갈 때 비록 시간 차이는 있겠지만 일반 시민들도 이러한 흐름에 휩쓸리 수밖에 없다고 진단합니다. 여기에는 6장의 좌파와 우파를 뛰어넘은 미디어의 분열에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요. 폭스 그룹에 의한 보수적 언론의 영향력을 보더라도 언론 대부분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따라 '가치 중립'을 위배되는 기사 보도가 매우 빈번한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비슷한 분위기일 텐데요. 다만 미국의 언론 지형이 우파쪽으로 상당히 기울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매번 미국 언론계가 '좌파적'이라고 매번 비난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반지성주의와 그에 따른 '대안적 사실'이라는 말장난을 고려해, 이미 시민들 대다수가 정치적 분별력이 전무한 것과 일맥상통해 보이는데요. 이와 같이 정치적 진술 자체가 사실에 근접하지 않더라도 '내집단 편향'에 근거하여, 많은 시민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프로파간다에 대해 최소한의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그저 이를 수용하고 있는 실정인데요. 이러한 분위기는 언론 비즈니스 측면에서 돈과 권력을 가진 언론들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는 반대로 거짓 뉴스에 대한 시민들 대다수의 정확한 '거부'와 '도태'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 자체가 위험에 놓인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권력에 상당히 소외된 계층의 정체성 정치가 아닌 오도된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지성주의의 공격은 이런 현실 자체에 있어 민주주의적 다원성의 후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자의 미국 정치에 대한 분석은 다름 아닌 우리가 알고 있던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실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크리스 베일의 우려대로 SNS를 비롯한 인터넷 정치를 포함한 극단주의에 따른 중도와 온건주의의 퇴출은 앞으로 미국 정치가 건전성을 답보할 수 없는 주된 이유일 겁니다. 다만, 서두에서 저자가 밝히는 이 양극화에 따라 소위 중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그저 온건한 중도가 아니라 이들 다수는 아직도 정확히 정치적으로 분류되지 않은 상황도 존재한다고 인용을 통해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도 꽤 설득력이 있어 보였는데요. 본인을 중도 온건이라고 여기는 시민들도 미디어나 주변에서 극단주의적 주장들에 노출된다면 그 자체로 정치적 불신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극단주의에 경도될 수 있다는 부분은 마찬가지로 우려스러운 측면입니다. 이 지점에서 확실한 것은 금권 정치에 따른 미국의 시스템적 왜곡과 더불어, 이러한 양극화 정치가 사실상 엘리트 정치인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미래에 있어 충분히 두려운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글 서두에 '부정적인 당파성'에 대해 짧게 언급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지지하는 당에 대한 긍정적 감정이 아니라 반대하는 당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에서 기인하는 당파적 행동을 뜻하는데요. 우리도 지난 대선에 이를 뼈저리게 경험했고, 지금도 자신들의 정책이나 건전한 주장들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정당에 반하는 상대에 대한 근거 없는 증오와 냉소주의에 기반해 사실상 기존 정치를 추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실로 정치 전반에 있어 매우 불행한 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글을 통해, 현재 미국 정치가 인종과 종교에 따라 극명하게 분열되어 있다는 논점은 지극히 수긍할 만한 부분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백인 유권자들은 트럼프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고, 주요 주州들에서 그들이 과잉 대표되며 트럼프를 당선시켰다.

만약 당신이 흑인이고 경찰의 잔혹성을 걱정한다면, 그것은 정체성 정치다. 만약 당신이 여성이고 남성과 여성의 임금격차에 대해 걱정한다면, 그것도 정체성 정치다.

기관과 정치인들이 점점 양극화 함에 따라, 대중은 더욱 양극화하는 방식으로 순환이 이루어진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선거 때마다 건강보험에 대한 의견 차이를 강조하는 광고에 수십억 달러를 지출하는데, 이 논쟁이 지지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대중이 상대방에게 등을 돌리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반면 오바마케어는 매사추세츠주에서 밋 롬니가 실시했던 개혁을 본떠서 만들어진 것이었고, 공화주의적 아이디어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또한 완벽하게 말이 된다. 만약 당신이 정부가 사회 프로그램에 너무 많은 돈을 쓰고, 불법 이민자들에게 너무 관대하고, 급진적인 환경론자들에게 너무 휘둘린다고 믿는 공화당원이라면, 실제로 민주당은 당신에게 더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1946년 재선을 위해 선거운동을 하던 민주당 상원의원 시어도어 빌보는 소름돋을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나 나나 깜둥이가 투표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선거 전날 밤에 투표를 하는 거죠. 그 이상은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습니다. 혈기 왕성한 사람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겁니다."

여기서 질문할 것은 미국의 나머지 지역이, 다시 말해 불완전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운영되는 나라의 나머지 지역이 왜 남부가 미국의 정치적 가치를 그런 식으로 조롱하도록 내버려두었는가 하는 것이다.

2008년 오바마가 당선되었을 때, 미국은 더 이상 인종에 얽매이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백인의 57%가 "백인에 대한 차별은 오늘날 흑인과 다른 소수자에 대한 차별만큼 큰 문제"라는 점에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르디나는 백인 인구의 약 30~40%가 강한 인종적 연대감을 느끼지만, 대부분은 인종적 적대감 없이 연대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당 엘리트들의 지지 속에서 트럼프가 공화당 성향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공화당원이든, 크루즈를 지지하는 공화당원이든, 라이언을 지지하는 공화당원이든,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든, 선택은 분명했다. 트럼프에게 투표하는 것이다.

정치적 갈등은 정책에 관한 것만이 아니며, 권력에 관한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집단 지위에 관한 것이다.

전적으로 보수적인 뉴스 출처들을 중심으로 구축된, 공화당의 신뢰를 받는 정보 생태계는 이와 유사한 다양성이 없으며, 심지어 이들 중 다수는 선전,홍보 역할을 수행한다.

현재 미국의 양극화는 시민권 시대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인종 간 평등을 수용한 민주당, 백인들의 반발을 수습하고자 한 공화당에 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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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3-01 2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치적 양극화가 전세계적인 현상이어서 더 걱정이 됩니다.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미국에서는 특히 자본주의와 인종주의가 혼합되어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느낍니다. 끊임없는 총기관련 사건들과 총기규제를 제대로 할 수 없는 현실적인 모순은 거기 기름을 붓고 있는 것 같아요.

베터라이프 2023-03-01 22:53   좋아요 1 | URL
신자유주의가 강화되면서 사실 정치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게 사실입니다. 그런 연유로 정치 불신이 심화되었는데, 여기에 경제적 불황에 따라 양극화는 또 심각한 수준이 되었죠. 그리고 미국 헌법에 보장된 권리가 전반적인 민주주의 체제보다 더 우선시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하는데요. 이게 약간 궤변일수도 있지만 총기 소유에 대한 권리가 시민 자유라는 맥락에서 사회적 안전에 대한 요구를 더 무력화 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우리 뿐만 전세계 민주주의의 바로미터라 정말 우려스러운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미국의 인종주의가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