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죄 - 국가의 죄와 과거 청산에 관한 8개의 이야기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권상희 옮김 / 시공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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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는 ‘책 읽어주는 남자’의 작가로 유명한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본디 독일에서 저명한 법학자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는 훔볼트 대학과 뉴욕 에시바 대학의 법학전문대학원의 객원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저는 떠로 ‘책 읽어주는 남자’를 접해본 적은 없지만 특히 과거사 문제의 해법과 화해와 용서에 대해 나름 의미를 갖고 글을 써왔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전자의 소설과 지금 소개하는 이 책 또한 그런 의미적 관련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약간의 철학적 담론으로까지 느껴지는 이 글은 크게 ‘독일 제3제국에 의한 역사 문제와 과거 청산 및 마찬가지로 독일 헌법에서도 금지하고 있는 소급효금지 문제의 개정에 대한 문제, 동독과 서독의 통일 이후 동독 국가안보국의 과거 범죄에 대한 판단 등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 자신도 과거 이스라엘에 방문했을 때, 자신의 조국에 의한 범죄에 피해를 본 유대인들을 생각하노라면 수치감이 들었다고 하는데요. 오늘날 통일된 독일이 번영을 누리는 가운데, 과연 과거 히틀러의 제3제국이 자행한 유대인 학살 문제와 그와 관련된 제반 사항에 대해 소급효금지에 대한 개정과 그런 3제국에 부역했던 부모와 가족을 둔 후손들이 느끼는 여러 상황 문제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1945년 베를린이 항복함으로써 전범재판과 더불어 연합국에 의한 과거 청산 작업이 있긴 했습니다. “일상적 죄개념을 근거로 한다면,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범죄를 저질렀거나 범죄에 포함했던 사람들 이외에도 저항하고 반대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도 죄를 지은 사람과 동일시된다”고 언급하며, 이러한 죄개념은 기독교 원죄설이 관철된 것이 아니라 로마법의 수용과 계몽주의 시대의 성장과 번성을 통해 발달된 것이라 저자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기원인 게르만 민족들이 그들의 여러 관습법을 통해 사회를 유지와 안정에 기여했듯이 어쩌면 오늘날 독일 사회가 합리적 이성을 토대로 두길 원한다면 이러한 과거 청산이 필요하다고 보면서도 그러한 수단에는 개인의 인권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과거에 행한 죄에 대한 단절’을 포함한 헌법의 ‘소급효금지’를 어떤식으로 개정해 과거 역사 문제를 단죄하기 위해 적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토론이 필요하다는 점과 ‘법에 의한 과거 청산’ 이 일정 부분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받아들이고 있는데요. 지금도 일부 신나치주의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부모와 조상들이 저지른 유대인들에 의한 전쟁 범죄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과거 청산을 위해 독일 내에서 이러한 헌법 개정 논의와 같은 의견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이웃나라와 비교하면 천지 차이의 양상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뿐만 아니라, 통일이 저자가 언급한 대로 ‘동독 엘리트들이 차지한 권력을 서독 엘리트들의 평화로운 교체’ 라고 단적으로 설명한 바대로 동독 시절의 여러 관련 법 증거들과 자료들에 대해 소각하거나 봉인하지 않고 유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과거 동독 정권에 부역한 동독 국가보안국 관련자들과 철의 장막을 뚫고 자유진영으로 탈탈하는 수많은 동독인들에 총격을 가한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한 문제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과거 독일 3제국에 의한 범죄와 과거 동독의 주요 권력층에 있던 인물들에 의한 감금과 고문, 인권 유린에 대한 단죄에 대해서 저자는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과거 청산이란 없다. 과거에서 자유로워지는 현재의 질문과 감정을 가지고 의식 있게 사는 삶은 있다.”고 단언하며 단순히 과거의 문제과 법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차원의 부분도 함께 있다고 여기는 듯 합니다. 그러한 과거의 어두운 편린들까지 후세의 세대가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점과 더불어 그것을 통해 독일인들이 한발자국 나아가는 것이 자신들에게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과거와 현재를 통해 합리적이고 희망적인 미래로 나아가려는 진실된 태도라 볼 수 있겠죠.

독일 사법부가 두 과거사 청산을 위한 노력에서 때로 소극적인 면을, 때로 적극적인 면을 보이기는 했으나, 원칙적으로 과거 범죄에 대한 책임, 반성, 청산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거의 피해자들만이 용서를 할 수 있다는 점은 정말 명백한 것입니다. 어쩌면 미래의 통일된 한반도 또한 독일이 시행착오를 통해 겪은 과거의 경험과 유사한 것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국가에 의한 범죄를 어떤 식으로 처리할 지에 대한 독일의 전체적인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번 이러한 글들을 보면서 느끼는 점입니다만, 과거를 제대로 직시하고 과오를 반성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화해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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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주의란 무엇인가
브라이언 타마나하 지음 / 박영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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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 대학 로스쿨 교수로 재직 하고 있는 브라이언 타마나하의 ‘법치주의란 무엇인가’를 접했습니다. 원제는 On The Rule of Law로서 직역하자면 법의 지배(론) 정도가 되겠습니다. 국내에는 박영사가 2014년 번역 출간했는데요. 번역은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이헌환 교수가 맡았습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러한 ‘법치주의’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아주 기본적이고 태생적인 이론일텐데요. 이 책의 저자인 타마나하 교수는 이런 법치주의에 대해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취지로 “내 아버지 정도의 지적인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수준의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는데요. 책을 완독하고 드는 생각은 저자의 부친의 지적 수준이 보통 일반인의 수준은 아닐 거란 판단이 들더군요. 저자가 친절하게 독자들의 배경지식을 위해 친절한 설명을 해놨지만, 기본적으로 여기에 논의되는 사상가들의 기초적인 이론과 배경지식은 갖고 있어야 좀 더 수월하게 읽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인류가 고안한 법률의 기원은 꽤 오래되었고 고전적인데요. 그리스 시기에 각각의 시민이 추첨을 통해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마찬가지로 그것의 토대인 법이 나타났습니다. 로마시대를 거쳐 중세의 주권이 각 왕정에 있다는 절대왕정의 시기까지 역사적 흐름으로 법의 발전을 그려내고 있는데요. 이후 14세기 르네상스와 16세기 종교 개혁, 18세기 계몽주의 운동을 거치면서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법과 법의 사상에 근접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면서 시작된 거대한 자유주의의 시기에 이들을 중심으로 법치에 대한 이론이 적립되고 고도화되면서 이후 프랑스 혁명의 시민 계급의 등장까지 법의 의한 지배가 명문화되고 실현되는 시기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자유주의 시대의 계몽주의적 사상가들을 인용하며 그 시기에 널리 기초로 인식된 법의 주의을 설명 하고 있습니다. 로크와 몽테스키외로 대표되는 법의 계몽주의에 대해 논하고 이후 미국 독립 혁명에 이르러 확립된 법의 의한 지배에 폭넓은 해설을 덧붙이고 있는데요. 이처럼 이들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적 법의 지배에 관하여 특히 몽테스키외는 “그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수단으로, 재판관 (및 배심원)이 일정한 임기 동안 재임하도록 인민으로부터 선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동시에 법적 자유보다도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고, 동시대의 영국의 경우에는 ‘일종의 관습(법)이 법관에 의한 이성의 적용을 통해 법적 원칙을 도출해내는 것”으로 자유주의적 계몽주의가 확립된 시기의 법에 의한 지배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의 목적이 컸다고 저는 이 글을 통해 이해했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이 적당한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동시에 성장한 의식과 이성의 면밀한 이해가 법이 개인들의 자유 증진을 위한 목적으로 인식되었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 하기 위한 많은 사상가들의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이후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대립하던 냉전의 시기에 하이에크는 “분배적 정의가 본질적으로 법의 지배와 양립할 수 없다”는 의식을 강조했고 법에 있어서 자유의 본질과 약간의 반대되는 개념인 정치적 평등과 기회적 균등에 이념적 대립이 더해져 그 시기의 유럽은 많은 논의들이 있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측면에서 ‘사회복지적 국가론’에 대한 토대가 지속되었고, 미국에서조차 이러한 사회 복지에 대한 기본 개념이 결국에는 미흡하게 나마 불씨를 이어왔는데 이러한 시대 변화에 법이 어느 정도 한계를 보인 것이고 모두를 수렴하고 이해시키기에는 원칙상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이예크는 이런 법의 변화속에 “보통법은 개별 사건을 다루는 법관의 판결 축적”에 구축되고 그가 애도했던 사회복지국가가 어김없이 입법부의 주도로 만들어졌다고 평가하는데요. 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 간혹 대중 영합주의적 독재가 발생할 수 있다는 면에서 애초에 하이예크와 같은 사상가들은 어느 정도 엘리트 들에 의한 통치를 제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미국의 사법제도가 저자의 말대로 ‘엘리트, 백인, 50~60대 남성 등으로 사회경제적 배경과 같은 요소의 배제를 완전히 기대할 수 없다” 평가한 것처럼, 현대 시기에 법의 통치, 법에 의한 지배가 법조인 들 특히 법관, 변호사 등의 독립성이 그들 개인의 경제적 이익에 따라 편입됨으로써 발생하는 정당성의 훼손이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3권 분립에서, 입법과 사법, 행정이 각각 독립적으로 어느 기관의 오판을 성공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노력해야하는데 현실적으로 행정과 입법은 대체로 원칙적이라 할지라도 선출된 권력이 되어가고 있지만 많은 국가에서 사법부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도의 개선이나 여론의 수렴으로 명백하게 바꿔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법부도 특정 대학 출신, 남성 위주, 그리고 많은 법조인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초기 신념에서 스스로가 이미 사회적 약자와는 거리가 먼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즉 법조인 자체가 사회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내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게 되는데요. 이것의 여파는 아주 명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변화된 사회 구조적 조건에서 초기 법이 전통적인 개인의 자유 보장을 위해 존재했다면, 오늘날은 하이예크가 자유에 반한다는 이유로 다소 부정적으로 여겼던 ‘여러 평등’과 관련된 부분의 노력이 요청되고 있는데요. 이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의 요구도 분명 있으며, 저자가 법의 합법성과 법의 지배를 명백히 지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대상으로 인한 사회의 변화와 그것을 바라는 시민의 요구에도 응당 응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치가 이론적 구호에만 그치지 않으려면 현실적 상황을 면밀히 고찰하는 것도 필요하며 결국에는 이러한 법의 역할이 개개인들의 삶의 향상성을 위한 역할이 분명 있음을 모두가 깨달아야 하겠죠. 저자의 말대로 (강화된) 법의 지배가 권위주의적 통치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고 현재 그것을 증명하는 국가들이 여럿 있습니다. 오로지 법은 합법성을 갖고 법의 통치가 소수의 엘리트 계층에 의한 지배로 오도되지 않도록 많은 시민들과 여론이 합리적이고 민주주의적인 방법을 통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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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의 사상공간
오사와 마사치 지음, 서동주.권희주.홍윤표 옮김 / 어문학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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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오사이 마사치 교수는 교토대학교 대학원 인문, 환경학연구과 교수로서, 본디 사회학을 전공한 사회학자인데요. 이 ‘전후 일본의 사상공간’ 이라는 글을 읽고 나서 문득 드는 생각은 오사이 마사치 교수는 각각의 개념으로서 내셔널리즘과 자본주의 뿐만 아니라 두 가치의 연계성에도 큰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사회학자라기 보다는 인문학자와 같은 접근 방법 등을 취하고 있기도 한데요. 예를들면 시대별 문학 작품 등을 통해 사상의 분석을 하고 있다던지, 철학과 역사 등을 또 같이 아우르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일본의 ‘전후’를 오직 하나의 시선으로만 분석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전후라는 개념은 그만큼 중요하고, 시간이 흘렀기에 가치의 망각이 진행되기도 하였으나 아직까지도 여러 측면에서 ‘전후’의 개념은 아직도 많은 이야깃거리들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글의 처음에서 마사치 교수는 오늘날 많은 일본인들은 역사 교과서를 다시 쓰고, 종군 위안부 기술을 사제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일본인이라는 공동성으로 다시 동일시 하는 것이며, 그래서 타국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는 종군 위안부의 능욕 사실 자체를 말소하고 싶은 일종의 욕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역사에서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성공적인 개항을 통해 열강의 반열에 올랐던 과거의 국가, 즉 ‘천황의 국가’ 가 그러한 파렴치한 짓을 했다는 것을 전면 부정함으로서 그것을 통해 일본인 본연의 동일성을 회복하겠다는 뜻으로 보였는데요. 과거의 역사는 적극적으로 망각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것과 동시에 부정을 통해 일본의 본질을 찾겠다는 것은 저로서는 너무나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역사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현실과 수많은 극우적 국가주의자들이 일본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이러한 매커니즘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역사적 합리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민주주의적 가치 토대에 비슷하게 어우러져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일견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런 일본의 욕구를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보면, ‘영속패전론’의 시라이 사토시,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의 다카하시 데쓰야와 같은 학자들이 줄기차게 역사를 있는 그대로, 전후를 ‘근대의 초극’과 같은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 시키는 모든 개념들로부터 일본이 과거에 벌인 전쟁 범죄와 2천만에 이르는 아시아인들의 희생을 제대로 직시하기 위한 노력들이 얼마나 일본 내에서 미미한지 깨닫게 해주는 배경 내지는 조건 상황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사와 마사치 교수의 이 책은 이러한 비상식적인 분위기가 근저에 자리한 그 조건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요. 이를테면, 전후 미군이 일본의 행정을 주도하고 일왕제를 존속시킴으로서 일본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 종국에는 미국에게 선의를 바라고 미국 자체를 옳다고 믿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었고, 이를 통해 외형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이뤘지만 내면에는 수많은 결여가 존재해 사상적인 측면에서 거대하게 불완전한 일본이 되었다고 마사치 교수는 여기고 있습니다. 사실 일본의 ‘전후’는 역사의 사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해 일종의 허위로 자신들의 국체를 보호하는 셈인데요. 그 국체는 ‘천황제’와 일본 그 자체일겁니다.

일본의 ‘천황’은 마루야마 마사오가 지적한 대로, 일본의 천황제 국가와는 달리 서양의 국가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순수하고 중립적이고 그 입장에서 구체적인 제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천황제’는 그 존재감 만으로 일본의 국체라 여겨지고 있으며, 또한 종교적인 의미로도 해석되고 있어서 우리가 정치학에서 배우는 ‘입헌군주제’와는 아주 상이한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죠. ‘천황’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들을 적극적으로 배제하고 감추려고 함으로써 더 나아가 일본의 정체성에 경제적 성공으로 바탕으로 한 오늘날의 국가적 위치만을 수렴해 자신들이 과거 일본 제국이 벌인 최악의 행적들을 지우고 잘못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 기저에 바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내면의 결핍 등으로 인한 옴 진리교 사건이라든지 일본의 1970년대를 ‘결여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문제들이 국민들이 과거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고 그것의 실체가 드러날때 마다 허위로 가리는 것이 오늘날의 일본이 ‘결여된’ 채로 있게 한 근본적이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책을 완독하고 나서 뒷부분의 역자 후기를 보며 일본이 그들의 전후를 대하는 태도와 접근이 왜 이 지경이 되었냐는 배경으로서의 조건으로 나쓰메 소세키라든지, 다자이 오사무, 무라카미 하루키 등의 시대 문학과 여러 사상의 배경 등을 나열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이 책은 일종의 지성학적이고 문학적인 측면의 일본 전후 세계에 대한 분석 글이지만 이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는 냉정하게 볼 때 긍정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또한 전체적인 글에서 ‘허위’와 ‘결여’라는 단어가 정말 많이 등장하는데요. 그래서 ‘근대의 초극’ 같은 개념으로 일본이 정상국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어불성설인 것 같습니다. 저자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분명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뭔가 아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침략전쟁에 관한 과거의 치욕이자 부정적인 자기상인 종군 위안부 문제를 일본 국가 자체의 성적인 투영으로 바라보고 있는 점이나, 종전후 미국이 일본에 들어오면서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하였으나 그 자체는 비민주주의적이었고, 자본주의의 이행과 결과도 뭔가 일본의 전통적인 가치와 사상을 얼마간 배제했다는 식으로 여기고 있더군요. 특히 이 글의 여러 문장들 중에 ‘전쟁이 전후에 배제된다, 패전이라는 사실을 억압한다’는 표현은 절로 소름끼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저자 자신의 주장으로 삽입된 문구는 아니지만 이것이 제가 오독을 한 것이 아니라면 일본 학계나 일본 학자들에게서 종종 느껴지는 명백한 귀기가 이런 종류가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자신들이 무엇이 문제인지 좀 더 깨닫기 위해서는 정말 역사를 겸허하고 진실되게 바라보는 것이 먼저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나서야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확장해 볼 수 있는게 아닌가 합니다. 끝내는 역시 일본과 일본인들은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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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후사 1945-2005 논형 일본학 5
나카무라 마사노리 지음, 유재연 외 옮김 / 논형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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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나카무라 마사노리는 경제학 관련을 전공한 학자로서 특히 메이지 유신 이후의 경제와 역사, 2차대전 이후 전후사 등의 일본에서의 주요한 역사적 이슈를 주제로 글을 써왔습니다. 경제학을 전공한 학자가 현재에는 역사 분석을 하고 있는 것은 나름 특이점이라 할만 하겠군요. 그리고 이 책을 국내에 출간한 출판사 ‘논형’은 국내의 서울대를 비롯해 일본의 여러 지식인들의 글을 꾸준하게 소개해왔습니다. 각 출판사들 마다 중점적으로 다루는 분야들이 있는데요. 여기 논형은 일본학과 관련된 부분에서 수위를 다투는 출판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자가 어쩌면 철지난 주제라고 여길 수 있는 전후를 다뤄야겠다고 느끼게 된 책의 말미, “1990년대 초 한국의 종군 위안부가 증언 도중 실신하여 들것에 실려 나가는 장면을 보았을 때, 나는 끝난 줄로 생각하고 있던 ‘전후’가 실제로는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고 소회하며 이러한 입장에서 1945년부터 2005년까지의 일본 역사를 ‘관전사’적 입장에서 상세히 분석하고 있는데요. 2005년은 일본 내에서 출판된 해를 고려하여 정해진 시기라 추측됩니다. 여기서 ‘관전사’란 미국과 일본 학계에서 전후, 전시, 전전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인데, 특히 이 책에서는 1차대전 이후 2차 대전시기와 종전 이후의 큰 전쟁사적 흐름에서 단절과 연속이 교차하는 구조를 특히 ‘연속성’적인 측면에서 이 시기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시기의 특성을 구분짓는 각각의 사건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성의 흐름안에 놓여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죠. 썩 설득력이 있다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요근래 미일 학계에서 자주 등장하는 모양입니다.

2차 대전 종전은 전체 세계사적 공간에서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데요. 아마도 파시즘적 질서를 붕괴시키고 본연의 세계질서로 회귀한 것이라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미국은 당시 2차대전은 정의로운 전쟁이고, 원폭 투하는 오히려 전쟁의 조기 종결을 가져왔다고 정당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반대로 일본과 일본인들, 특히 다수의 일본인들은 이와는 다르다고 보고 있는데요. 아마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 도쿄 대공습으로 인한 30만명 이상의 희생을 2차대전 당시 미국에게 패전했지만, 더 나아가 중국 내전에서는 지지 않았으며, 대동아공영이라는 틀 안에 전 아시아를 서구 제국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식의 해석을 아직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의 글에서도 그러한 현상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인식에 약간 새로운 접근을 발견했는데요. “일본 민중 쪽에서도 천황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게 되면 자신들에게 화살이 되돌아 올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졌다”는 언급이 본래의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지 않았나 싶고요. 당시 미국 맥아더 군정이 일본의 일왕체계를 일본 통치에 있어서 협조의 대상으로 여김에 따라 일왕제도가 약간 예상과는 달리 존속하게 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베를린과는 달리 졸속으로 치뤄진 도쿄 재판이 일왕과 일본 민중들을 살리기 위해 소수의 전범들로 마무리 지었다고 여기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미국의 안보 울타리 안에 일본을 집어 넣음으로서, 이러한 과정이 결정된 것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매우 불행한 일이 되었습니다.

현재 일본의 역사학계의 ‘수정주의적 입장의 범람’으로 봤을 때, 저자와 이 글의 논조는 대체로 이성적이고 상식적이라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일본 내부의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며 그 시기의 일본 정치의 적나라한 면을 분석하고 있는데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 있지만, 박정희가 주도한 한일협정 시도와 관련되서는 한국측의 입장과 일본의 망언을 소개하고 있고, 한국 전쟁이 일본 내수와 경제 발전의 큰 도움이 되었다고 확실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전범이라 봐도 무방한 기시 노부스케를 인용하고 있는 것은 오도하고 있는 반대편의 입장을 소개하기 위한 성격이라고 해도 이 책의 전체 맥락의 정당성을 고려했을 때, 뭔가 아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전쟁과 식민지배’의 피해자였던 아시아 여러 나라들 (특히 한국과 중국) 이 역사문제를 자기 생존이 걸려 있는 중심 문제라고 말한 것은 저자의 역사 인식이 어떠하고, 글 전체의 논점이 어떤 방향인지 잘 드러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도표와 사진, 여러 신문 기사들의 배치가 약간 교과서적인 분위기를 풍겨서 중요한 문단을 강조하기 위해 도입된 소제목들 또한 그러해서 약간의 거부감을 느끼실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들을 잘 균형잡혀 있고, 일본의 굵지한 국내 사건들에 대한 소개도 매우 잘 되어 있어 저로서는 꽤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일본인들에게는 이 ‘전후체제’에 대한 불안감과 불신이 있을 겁니다. 특히 일부 정치인들과 이에 동조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보통 국가가 되는 것이야 말로 전후 체제를 극복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바로 아베 총리가 여기에 속한다고 봐야겠죠. 이러한 말도 안되는 인식말고, 진정한 ‘전후 체제’의 극복은 ‘위안부 사건과 난징 대학살 등’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본토 말고 ‘오키나와’에 미군 부대를 다 몰아넣고 집단 안보 운운하는 행위보다는 더욱더 상식적이고 올바른 ‘전후 인식 및 전후 극복’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내에 불고 있는 ‘수정주의적 입장’과 역사 왜곡에 대해 관심있는 분들께 이 책을 추천 드리고 싶군요. 얼마간의 인내심과 집중력을 발휘하시면 꽤 즐거운 독서가 되실 수 있다고 단언하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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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의 운명
한용섭 지음 / 박영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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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국방대학교 한용섭 교수는 행정고시 출신으로 다른 전문가들과는 달리 상이한 관료 경험을 한 학자로 볼 수 있겠는데요. 근래에는 자주 미디어에 출연하여 대중적으로도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또한 북핵 문제에 직무적으로도 참여한 경험이 있기에 약간 흥미를 갖고 읽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판문점에서 있었던 남북 정상간의 순조로운 평화회담으로 한반도의 비핵화와 정전 협정을 맺고 이후 평화 협정까지 이어지는 기대감까지 모두가 품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출간된 이삼성 교수의 글을 읽고 다소 느낀 점을 밝혔습니다만, 우리가 원하는 그런 행복한 결말이 이뤄지길 저 역시 바라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한용섭 교수는 여기에서 지금까지 이어온 북한의 핵개발 역사가 진보와 보수, 미국 어느 누구의 책임이 아니며 사실로서 밝혀져 온 북한의 핵개발 역사는 1952년 이후로 구소련의 원자력 연구소에 꾸준히 인력을 파견하고 우수한 원자력 관련 인재를 꾸준히 교육시켜 왔다는 점에서 증명되어집니다.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약소국이 자국의 안보를 이유로 핵개발에 나선 것은 북한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 이스라엘 등이 그러했고 그중에서도 북한은 종래의 NPT체제 안에 있던 국가가 국제 협약을 무시하고 핵개발에 나선 최초의 사례로 남게 되었습니다.

1990년 대 초반 미국 CIA가 북한의 핵개발 움직임을 파악하고 나선 이래 1994년의 제네바 합의 1998년 이후부터 6자 회담등이 북한의 핵개발을 막기 위한 시도로 이어졌지만 각각의 합의와 회담은 뚜렷한 한계점을 남기고 최근인 2017년 북한 6차 핵실험이 국제 사회에 어떠한 파급을 초래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의 김씨 왕조가 김일성 이래로 김정일 부자대에 겉으로는 비핵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속으로는 실질적인 핵무기 보유에 나서 그 1990년대 이후부터 사실살 실질적으로 핵개발을 멈춘 시기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여기 한교수의 주장입니다. 일견 주장이랄것도 없이 대부분 사실로 밝혀진 것이죠. 북한 핵개발에 적잖은 도움을 준 파키스탄의 핵물리학자 압둘 카디드 칸의 실질적인 원조 행위가 어느선 까지였는가가 조금 의혹이 될 수 있겠습니다만 어찌됐든 명백한건 파키스탄이 핵기술을 제공하고 북한이 이란과 파키스탄에 미사일 기술을 제공한 것은 여러 매체와 글들에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일단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핵무장을 해야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1992년 한반도 비핵화 합의 이후에 한국만 철저하게 이것을 지켜왔고, 이 선언적 합의를 무시하듯 북한은 그 와중에도 핵개발을 지속해 왔습니다. 한교수는 남한과 북한이 양자 핵보유가 된다면 재래식 충돌로 국한되겠지만, 한쪽의 일방적인 핵보유 상태라면 양상은 전혀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현실이 남한내의 진보와 보수 어느 한쪽의 책임도 아니고, 미국의 대화 단절로 인한 책임도 아니라고 하는 것은 북한은 물밑으로 핵개발 노선을 멈춘적이 없기 때문일겁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억제할 수단이 전무했다고 봐야겠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북한의 전통적인 기만 전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체제 유지와 안전을 위한 정당성으로 여기는 오래된 사고의 한 방편이라 생각됩니다.

2016년 이전까지 북한의 핵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중국 당국과 그로 인한 6자회담의 실패, 끈임없이 미국과 국제사회에 기만전술로 북한이 보유한 원자로들이 전력 가동을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해왔지만 한번도 그 원자로들에게서 전력을 송출한 적도 없고 오로지 재처리와 무기화의 결과로 원자탄을 만든 이런 결과물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은 뭔가 두렵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연유로 한교수는 ‘비핵화’라는 표현보다 ‘핵폐기’라는 단어를 글 전체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 폐기 (CVID)를 위해 앞으로 남은 북미 회담과 남북미 회담에서 경주해야 할 것이며, 만약 이러한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다른 수단들을 다시금 고려해야할 것입니다. 회담 무산을 핑계로 북한 정권에게 외과 수술적 처방을 벌이려는 미 트럼프 대통령을 적극 말려야 하겠고, 한미간의 동맹 강화와 미국의 확장 억제를 적극적으로 요청해야겠죠. 일방적으로 무산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봅니다만 좋지 않은 결과가 도출될 경우에도 마땅한 대응 방안이 준비되어야 하겠죠.

정보 부족이 명백한 리뷰일지도 모르겠는데요. 얇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개발 및 미사일 발사에 대한 정보와 그동안에 있었던 북한과의 대화와 합의의 도출 한계, 앞으로 북한의 핵문제를 어떻게 억제할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을 이 책은 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화해 무드에 다시 이런 주제의 책을 읽는 것을 떨떠름하게 여기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한반도 해빙 분위기와 관련된 다른 이해 정보가 없는 분들은 한번 시간내서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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