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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사회학 -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가
하인츠 부데 지음, 이미옥 옮김 / 동녘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독일 보윈켈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하인츠 부데는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사회학, 철학 그리고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1986년에 동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이후 독일 함부르크 사회연구소의 연구 조교로 일하고,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로파 대학 비아드리나에서 석좌 교수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1996년에는 코넬 대학의 방문 학자를 거쳐 현재는 카셀 대학에서 거시 사회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일의 대표적인 사회학자로 세대 연구와 기업가 논리 등을 연구하면서 독일 사회가 미래에 나아갈 길을 학자로서 제시하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원제. "Gesellschaft de Angst"로 201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1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부데의 이 책은 자본주의화가 진행된 오늘날의 사회에서 인간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정신적인 문제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분에까지 과거 안정적으로 우리의 삶을 책임졌던 '복지 국가 담론'이 신자유주의에 철회되면서 그 와중에 분화된 엘리트 계급과 중산층 그리고 사회적 지위가 약한 사람들의 각각의 불안을 많은 인용과 그를 뒷받침 하는 주장 등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독일 특유의 직설적인 분위기 답게 부데가 쓴 이 글의 어조는 합리적이라는 말을 넘어 곳곳에 냉정한 판단이 들어가 있었는데요. 특히, 포괄적으로 3장부터 6장까지 등장하는 '능력주의'와 불안과의 관계를 으레 짐작되는 단순한 인과의 문제로 서술하지 않고, 불가피한 능력주의가 주도하는 사회 자체의 현실을 진술하는 데 좀 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저자 특유의 냉소적인 표현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요. 예를들어 우리의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8장에서는 소위 제어되지 않는 금융 시장 이데올로기를 빗대면서, "의심스러우면서 많은 돈으로 구제해줘야만 하는 체제를 위해 중요한 은행들과 정부가 시민들에게 따르길 강요하는 시장과 동일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우리의 폐부를 사정없이 찌르고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개인의 원초적인 불안을 다루고 있는 1장과 2장에서는 남녀간에 존재하는 '애정'에 대해 부데는 극히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마치 "연인과 섹스를 막 끝낸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고 방금 전의 격정적인 몸의 대화'를 쉽게 잊기 마련이라고 강조합니다. 남녀가 사랑으로 연결된 연인 사이의 관계 조차도 근원적인 불안을 야기시키며, 반대로 오로지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간에 관계에서만 이런 불안을 회피할 수 있다고 저자는 보는 듯 했습니다. 아무리 다양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심리적인 불안은 제거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여자가 연인으로서 만나려 하는 남성들 가운데, "자신보다 교육을 덜 받은 남성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 현실"은 그런 명확한 개인의 선택은 일견 불안에 빠질 가능성을 회피하는 목적이 있다고 여기는 듯 했는데요. 물론 부데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물건을 고르는 것과는 다르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설사 합리적이고 마땅한 선택으로 누군가를 만난다 하더라도 본인 스스로가 통제력을 잃게 되어 나타나는 불안을 잠정적으로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이토록 고도화 된 개인주의적 사회에서 원칙적으로 개인들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여기에 나날이 강요되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체화시킨 능력주의의 사회에서 계급 전반이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요약되는 것이 이 글의 주된 관점이기도 합니다. 이에 저자는 이 글 5장에서 "엄연히 30년간의 신자유주의 시기에 부가가치의 우선 순위의 변화로 각국들이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고 언급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해 현실적인 가치를 나름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글 전반에 논의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하에서의 '능력주의'는 성공이 있으면 반드시 실패가 있고, 양지가 있으면 무조건 그늘이 있는 것과 같은 상반된 인식으로 여겨지고 있는데요. 20세기의 전체주의가 미연에 발생할 수 있는 첨예한 계급 갈등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는 저자의 요상한 해석을 조금 틀어보자면, 복지 국가의 담론도 역시 마찬가지로 계급 갈등의 문제를 (의도했던 안했던 간에) 방지하는 것에 기여했던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자도 토마스 프랭크를 인용하면서 사회 최상급 그룹에 부여하는 상여금과 관련해 이러한 시스템을 마냥 긍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오늘날의 '승자독식' 세계에 살면서 느끼는 감정에 대해 사람들이 잘 언급하지 않는다고 회의적으로 표명하고 있는데요. 이는 경제적으로 중간 계급 이하의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계 문제로 인해 시스템 자체를 성찰하기 위한 시간이 부족한 것이며, 어느 정도는 이러한 강요된 사회에서 체념하며 지내는 것이 현상황을 해석하는 설득력있는 주장 일겁니다. 따라서, 저자가 단언하는대로 "사람들은 승자독식사회를 무자비하게 최고 엘리트들만 선별하는 자본주의 일면이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난 것이라 받아들 수 있다"고 보면서 "이렇게 사회 전체가 경쟁을 하도록 부추기면 사회적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예상외로 우려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가 아이를 돌보듯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주었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일종의 노스탤지어와 연결되기도 하는데요. 반대로 5장에서, "국가가 세금으로 중산층의 돈을 탈탈털고 있다"는 국가에 대한 다소 냉소적인 평가는 부데가 과연 어떠한 입장을 지지하고 비판하는지에 대해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동시에 이와 같은 인용들이 계급과 사회 내부의 불안에 대한 관점을 좀 더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양가적인 측면을 언급하며 진술하고 있는 것이, 단순히 글의 기법에서 일관된 논지에 포함될 수 있느냐가 쟁점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또한, 자수성가한 소위 엘리트 계층에 대한 3장의 논증은 '승자독식'과 '능력주의'에 기반한 개인들의 노력과 성취라는 부분에 있어 어떤 가치 판단을 하기 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내의 눈들을 신경쓸 수밖에 없는 소수 엘리트들의 불안감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이 엘리트들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좀 더 냉혹하고 교활해져 더 많은 이익을 거두려 하는 욕망"에 빠질 수도 있다고 전제하고, 이 부분에 대한 도덕적 관념의 실종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저자의 태도에 일정 부분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 승자독식과 능력주의를 역으로 해석해보면 이러한 견고한 기조 때문에 사회적 지위와 부의 우위에 있는 자들이 "자본주의가 원래 이런 것이고 개인의 이익 추구는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사회에 대한 철지난 책임감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오로지 저들의 문제일 뿐이다"라고 하는 기형적이고 반사회적인 인식을 아무렇지 않게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저자가 앞선 능력주의를 불가피한 자본주의적 사회화 과정에 비롯된 현실 인식으로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진 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마땅히 도태되어야만 한다는 인식"은 인간이 그동안 쌓아온 인문주의와 역사적 진보를 깡그리 휴지통에 처박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이런 인식에 대해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개인의 이익과 능력주의를 강조하며 마땅한 사회적 부조를 제거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해 왔는데요. 후쿠야마의 언급대로 이들은 어떠한 도덕적 양심이나 갈등으로 자신들의 내면이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은 내심 소름끼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자본주의가 인간성의 부분에서 구조적인 모순을 갖고 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은데요. 그런면에서 우리의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포획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이처럼 복잡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엘리트들의 최소한의 도덕적 책무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언급하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저들이 스스로의 불안감 때문에 차라리 간교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선택지를 손에 쥔 것도 앞선 진술들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물론 이들 엘리트들의 성공에 사회적 자원이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는 저자의 인식대로라면 엘리트들의 불안 문제를 일방적으로 곡해할 필요는 없지만 일대 다수의 대결 논법으로 이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부분은 약간 우려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에 반해 5장에서 중산층의 불안과 다음 6장의 사회적 약자들의 불안과 관련한 논증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가 있었는데요. 사회 안전망이 없기 때문에 개인들이 언제나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평가와 시장 자유주의적 이행으로 인해, "개인의 능력과 공동체적 연대감이라는 정신을 중산층이 공유했던 시대는 사라진 게 분명하다"는 서술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독일은 아마도 이런 중산층 정신을 꽤 중요하게 여겼던 국가로 볼 수 있을텐데요. 어느 정도 사회적인 재분배의 해법이 필요하지만 이것을 반대하는 것을 넘어 뭔가 철지난 문제로 치부해 공격하는 사회적 행위들이 그동안 너무나 많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것들을 전부 신자유주의자들의 음모론으로 몰아갈 수는 없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그동안 사회에서 공익과 공공의 의미가 배척당해 온 것은 거의 확실하다 생각됩니다. 다만, 저자가 갖고 있는 국가와 정부가 초래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인식이 다소 일관되지 않은 부분은 독자들이 감안해서 읽어야 하는 부분이라 여겨지는데요. 그리고 8장에서는 금융 자본주의로 인한 불안과 관련해, 아마 다수가 이를 증오하기도 하였으나, 그 부분과는 별개로 2008년의 경제 붕괴가 어느 정도 필요했을 수도 있다는 저자의 판단은 다음 논증을 통해 일정 부분 공감을 할 수 있었는데요. 그런 결과로 막대한 공적 자금이 시장에 투입되었지만 어떻게 보면 최악의 결과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기에 사회 전반에서 나름 의미가 있는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러한 카지노 자본주의에 의한 시장 참여자들의 불안과 사회 구성원들의 불만이 이익 극대화를 위한 구조적 문제로 진정으로 해소될 수 있을지는 지금으로서도 불확실하다고 판단됩니다. 다른 어떠한 불안들 보다도 이 금융 자본주의의 불안이야 말로 다시금 체제 전반의 위험성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텐데요. 물론 명백히 현재의 자본주의가 이를 해결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런 문제를 제기할라치면 왜곡된 자들에 의해 반자본주의자라는 낙인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공교롭게도 극우주의자들이 반대의 세력을 풀조차 남지 않도록 제거하기 위한 실현될 수 없는 욕망과 다름없는 것으로 불안의 문재를 떠나서 건전한 비판도 꺼내들 수 없는 문제를 야기해 종내에는 사회를 병들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개인들의 다원화 된 사회에서 어쩌면 각 개인들이 느끼는 불안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엘리트들과 중간 계급 및 사회적 약자가 처한 입장이 다 다르고 어떤 문제에 대해 동원할 수 있는 자원 또한 각자가 다 상이합니다. 또한, 이러한 분화를 만들게 한 자본주의적인 불안 또한 시민 각각이 느끼는 부분이 분명 다를 것입니다. 다만, 일부 계층에게 주도되어 진행된 세계화와 이를 통한 신자유주의적 담론들이 일정 부분 불안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분명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저자인 부데의 언급대로 신자유주의가 일정 부분 번영을 가져다 준 것은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사회를 시장이 주도하게 만들고 이기심이 만연된 비인간성의 왜곡된 구조를 더욱 고착화 시켰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선언적으로는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적인 동반자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이런 고차원의 자본주의적 매커니즘이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를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토록 현 시점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많은 불안들이 개인의 다원화의 양상으로서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이후 변화된 자본주의적 담론이 사회 전반을 보다 변화시켜 왔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여기에는 자본주의가 현재의 번영을 이끌었다고 보는 관점도 적지 않겠지만 반대로 심각한 부의 불평등 문제를 최소한의 논의조차 막아버리고 있는 자본주의의 무결성 논리도 큰 문제인 것은 마찬가지로 분명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0세기 중후반에 발전했던 복지국가는, 현대 사회를 전례 없이 통합시켰다
결국 알고 보면 우리가 헌신하고 모든 것을 맡기는 타인이 바로 우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에서 중산층이 줄고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그러니까 게걸스러운 국가가 세금을 통해서 중산층의 주머니를 탈탈 털고 있으며, 그래서 중산층은 자신들의 처지가 위태롭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버지가 아이를 돌보듯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주었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게 된다
사람들은 ‘승자독식사회‘를 무자비하게 최고 엘리트들만 선별하는 자본주의의 일면이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난 것이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때는 부르주아와 노동자,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중산층과 하층이 매우 날선 대치를 했고, 그야말로 모두에게 불확실한 시기였다. 그 때문에 20세기의 전체주의는 폭동이나 전쟁과 같은 거시적 폭력과 일상의 폭력으로 미래에 계급 갈등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내쫓고자 했다
노동조합과 정당을 욕하고 국가가 약탈을 일삼는 정치인들의 손에 들어가 있다고 보는, 성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인주의자들은 항상 있었다
무엇보다 사회적 지위를 많이 고려하는데, 사회적 지위는 지식이라는 무형의 가치와 의미라는 상징 자본으로 그 가치를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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