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란 무엇인가 (반양장) - 벌린, 아렌트, 푸코의 자유 개념을 넘어
사이토 준이치 지음, 이혜진.김수영.송미정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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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사이토 준이치는 와세다 대학원의 박사과정을 거쳐 현재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술원 교수로 재직중인 일본의 정치학자입니다. 더불어 사이토 준이치 교수는 일본 내 리버럴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국내에는 그의 대표적인 논저 ‘민주적 공공성’이 이미 번역되어 있는데요. 이 민주적 공공성이 처음 국내에 소개되었을 때 큰 관심을 받은바가 있습니다. 이 책의 일본어 원전 지난 2005년 이와나미 쇼텐에서 출판되었고, 국내에는 약간 늦은 2011년에 소개되었습니다.

기본적인 의미로 자유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오늘날 지유시장과 관련된 ‘신자자유주의’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관념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또한 18세기 공화주의의 태동에 있어 ‘주권 개념’과 함께 ‘개인의 자유’는 이른바 도약을 하게 되었는데요. 과거 유럽에서 상업과 중간계층의 대두로 기존의 전통적 권력에서 소수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계몽적 자각이 다수의 인간이 지배계급에 매몰되어 있던 시기를 극복하는데 초석이 되지 않았나 개인적으로 그런 평가를 해보게 됩니다. 애덤 스미스가 미래의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시장에 의해 제약을 받게되리라는 것을 스스로 예견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영국 사상에서도 ‘시장’을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는 저자의 단언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이 책의 서두에서 사이토 준이치 교수는 “평등한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쓰인 것이며, 극심한 자유의 불평등한 분배 상황이 그 자체로 ‘자유’라는 이름하에 정당화되는 사태를 어떻게 비판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주제로 써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자유는 이사야 벌린의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구분으로 정치학의 화두로 등장합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알게된 벌린의 자유 개념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은 바로 “실제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하더라도 자유 그 자체가 부정되지는 않는다”는 그의 주장입니다. 일반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들 가운데는 특히 개인들이 폭력에 노출되는 최소한의 안전 보장이 안되는 사항이나, 오늘날 시장의 권력이 비대해짐에 따라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경제적인 것’의 시녀가 되어,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고, 마찬가지로 시민의 개인적 관심사 내지는 삶의 목적성이 지극히 개인주의적으로 시선이 좁아짐에 따라 전혀 공공적인 것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상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통해 ‘자유’ 자체가 정치 본연의 모습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2장에서 저자는 벌린의 ‘소극적 자유’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것으로 자유의 전반적인 재정의를 시도합니다. 단순히 ‘간섭의 부재’ 상태 만으로 인식되는 이 소극적 자유가 어떻게 보면 국가의 정상 기능에 대한 침해와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잠정적인 분리를 가져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한나 아렌트는 ‘타자와의 교섭’을 통한 자유의 확충을 중요한 관점으로 여겨왔고, 이를 통해 권력관계와 지배상태를 논하며, 특히 지배상태에 놓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자유를 보존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여긴바가 있습니다. 이와는 상대적으로 ‘왜 다시 자유인가’의 패팃은 ‘공화적 자유’로서 법률에 기초한 국가의 간섭을 긍정합니다. 즉, 여기의 공화적 자유는 ‘법에 의한 자유’를 뜻하며, 국가 스스로가 자유를 온전히 향유하지 못하는 많은 ‘경계인들’의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근래의 신자유주의를 비롯한 ‘배타적 자유 옹호론자들’의 국가 저항주의를 반증하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공화적 자유’가 밝히는 최소한의 선에 저역시 긍정하는 편입니다. 어쩌면 그보다 법에 의한 보장으로서의 자유에 관심이 가는 거겠죠. 여기에 “많은 공화주의자들이 국가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재차 강조”한 것은 이러한 맥락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4장에 집약되어 있는 “모든 자유는 자기 규율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주제는 자유와 자기 통제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입니다. 우리는 사실상 자신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역시 동일하게 보장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벌린의 ‘소극적 자유’는 그 자체의 의미를 환원하더라도 (타인에 의한) 간섭과 자신의 자유는 대칭적이고, 마찬가지로 (타인에 대한 자신의) 간섭 또한 타인의 자유에 침해가 되는 것이죠. 그런 의미로서 개인의 방종은 필히 제어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 이러한 전술 조건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자유만을 강조하는 것은 어찌보면 폭력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인종 차별이나 성차별 등 증오 표현을 행하는 사람이 그로인해 상처를 받는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사례에 극히 공감하게 되는 것은 ‘소수 발언의 자유’를 무조건 옹호하기 힘든 이유기도 합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법에 의한 ‘개인의 의견 피력에 대한 자유’를 부정할 의도는 없지만, 발언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고 이로인해 그 폭력의 대상자 내지는 그룹이 사실상 자유를 제한당하는 지경에 이른다는 확장된 결론을 일시적으로 부정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이 책의 5장과 6장은 자유가 성공적으로 자리하기 위한 기반이 되는 안전과 필요한 공공성의 개념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저자가 피력한 이 글의 목적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민주주의하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 시스템에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마땅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은 그 이해와 분석의 중대한 결여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아마티아 센이 일찍이 주장했던 것처럼 “빈곤에는 단순한 물질적 곤궁 뿐만 아니라 기본적 자유의 박탈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은 위의 관점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여러기지의 능력 차등과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의 차이로 인해 대부분의 시민들이 자신의 자유를 영위하고 행하는데 차별과 차이를 갖게 만듭니다. 그럼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나 국가의 개입 내지는 조정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애초에 ‘공화주의적 자유’가 법에 의해 보장된 모든 이들의 자유의 보존이라면 우리에게는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더욱 강화된 사회내에서 ‘민주주의 이념의 강화’로 이어지는 것이 최선의 방안일 것입니다. 민주주의 체제가 계급 갈등과 노골적인 계급 지배적 이념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면 본래의 가치를 보호하고 혹은 회귀에 나서 다수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할 것입니다.

저와는 달리 저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소수의 자유를 옹호하는 일에 관심과 책임을 갖는 것이 바로 나의 책임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나’라고 지칭한 것은 저자 자신 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겠죠. 타인의 자유에 대한 책임을 나 자신이 인식하고 한나 아렌트가 강조한 바대로 끊임없이 타자와의 교류와 교섭 및 서로간의 이해를 지속해 자유 자체가 안고 있는 본질적 위험을 해소시키는 것으로 점차 나아가야 하겠죠.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의 자유를 위해 타인과 사회, 국가, 제도와 법을 통한 아주 다각적이고 다양한 원리들로 무장해 사실상 정치와 사회를 제거시킨 시장의 위협과 이를 옹호하는 소수들로부터 지켜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결국 정치와 자유는 서로 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상호보완적이라는 말을 이제야 이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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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를 열다 - 분단된 세계 속에서 사고의 프런티어 5
강상중 외 지음, 이예안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 푸른역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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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분단된 세계속에서’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일본 이와나미쇼텐 출판사의 ‘사고의 프런티어’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이곳에 참여한 학자로는 강상중, 사이토 준이치, 스키타 아쓰시, 다카하시 데쓰야로 흔히 일본내에 대표적 리버럴 지식인이라 여겨지고 있습니다. 특히 국내에는 강상중 전 도쿄대 명예교수와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가 알려져 있는데요. 그만큼 적잖은 기대를 하고 책을 손에 잡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출판된 원전은 지난 2009년에 소개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의 기획하에 푸른역사에서 번역 출간 되었습니다.

이 책은 크게 네 명의 집필진이 참여한 대담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요. 주제는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번째는 문명과 야만으로 대비되는 이해속에서 근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카를 슈미트의 예외상태 및 후쿠자와 유키치의 왜곡된 탈아주의를 바탕으로 해석하고 두번째는 전 지구적인 글로벌리즘에 의해 국민국가의 해체가 이뤄지고 있는 현시점에서 분할과 경계라는 주제로 난민 문제를 비롯한 심각한 빈부격차, 복지국가의 패퇴, 민주주의 하에서 발생하고 있는 계급 고착화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양자 다 얼마를 논하더라도 중요한 문제들이라 책의 지면이 이 모두를 포함할 수 있을지 약간 우려가 들기도 했습니다만 전부 일독하고 나서는 충분히 문제 제기에 이어 적지 않은 방안도 제시하고 있다 판단되었습니다.

페리 제독의 ‘흑선’에 의해 강제 개항을 하게 된 당시 막부의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거쳐 아시아 국가로는 최초로 근대화의 길에 나서게 됩니다. 아마도 그러한 연유로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사상가는 자신들의 나라가 주변의 봉건적인 왕조 국가들보다 더 우월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아시아의 영국’을 기대하면서 더욱 국가 개조에 나서게 됩니다. 저는 사실 이 책을 통해 일본의 개항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하게 되었는데요. 그것은 이제 자신들은 야만의 상태에서 성공적으로 문명국의 지위를 획득했으며, 주변국인 조선이나 지나는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왕조 국가로 자신에 비해 저위개념적 상태로 규정하게 됩니다. 즉, 자신들은 다른 왕조 국가들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우월적 인식론이죠. 여기의 글은 이를 바탕으로 문명을 획득한 세계와 그렇지 않은 야만적 세계의 대결 구도로 해석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오늘날의 세계와도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는데요. 미국이 뉴욕발 9.11 테러를 겪고 나서 마찬가지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획득한 보편적 세계 대 그렇지 않은 원시적 야만 지배 세계, 그러니까 이슬람 세계를 여기에 빗대어 해석하게 됩니다. 적과 아군의 이분법 구조보다도 카를 슈미트가 주창한 ‘예외상태’에 의거 저쪽편과 이쪽편의 끔찍한 예외상태로 왜곡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일전에 새뮤얼 헌팅턴은 주저 ‘문명의 충돌’에서 오리엔탈리즘에 근거해 서구와 다른 지역의 문명을 슈미트의 이론에 가까운 해석 구조를 제시한 바가 있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로 대변되는 일본의 근대는 조선의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전부터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에 주판을 두들겼고, 이미 조선과 지나의 왕정과 이들의 전근대적인 상황을 무조건 혐오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칼잡이들의 정권이 일본 전체를 아우르는 정치 체계였던 국가가 서구의 문명과 동양의 전근대를 대결구도로 삼아 자신들도 역시 문명화 된 국가라고 여긴 점은 실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차피 미국에 의해 전후를 맞이한 일본은 이러한 왜곡된 역사적 가치체계의 해결이 전제되지 않고 또한 전후 책임에 대한 문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됨으로써 이러한 부분들이 오늘날 일본의 전면적인 역사 수정주의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과는 약간의 논외지만, 현재 일본내의 그나마 상식적인 관념을 가진 리벌럴한 지식인들과 이에 호응하는 시민단체가 지리멸렬한 상황이라 더욱 과거 역사 문제에 따른 사과 요구가 이들이 자생하는 토대를 제거하게 될 수 있다고 조언하는 것은 얼마나 기를 차게 하는 노릇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역사 문제 및 일반적인 국가 관념 모두를 포함한 일본의 상황과 반대로 우리와 중국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책에서도 “일본이 역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주변국에게 성의있는 사과를 하게 된다면 정말 일본 사회가 더 열린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실로 실현되기 어려운 희망사항이라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 네트워크’라는 연대를 바라고 있는 이들 리버럴 지식인들이 그만큼 전후 사정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다만, 미국이 정의하는 자유세계와 민주주의 블럭에 우리와 일본이 속해 있다는 점과 동맹 체계에 의한 안보 조약이 공통된 입장이라는 점은 물론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면밀한 주의와 접근이 필요하긴 합니다. 외교에서 그 진정성이라는 것이 중요한 기준이 될 수는 없겠으나, 대일 관계의 진정한 구축은 ‘정치 수준에서는 늘 화해한 것처럼 연출하고 있다’는 점이 한일관계의 진정한 단면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두번째 논제인 전세계적 글로벌화에 따른 ‘배제의 시스템’은 일찍이 헤겔이 예견했던 근대 이후 ‘보편적인 상호 의존 체계’과는 완전 다른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탈락을 통한 주변부의 사람들을 더욱 바깥으로 내몰고 노엄 촘스키의 말대로라면 부자들에게 더 많은 부를 집중시키게 만들어주는 오늘날의 이 시스템이 사실상 베스트팔렌 이후의 국민 국가 개념을 후퇴시키는 것에 일조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주입되고 사회 안전망을 비롯한 복지 국가가 성공적으로 철폐되어 왔던 지난 얼마간의 시간을 뒤돌아 보노라면 다시 국가의 기능과 국가의 역할을 환기시키는 작업이 지금도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공격받고 있는 현실은 큰 딜레마 이기도 합니다. ‘배제의 완성’에 이르는 작업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엄밀한 현실임에도 국가 본연의 기능 회복을 무분별한 국가주의의 확대나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가의 개입 등으로 오판하는 것은 시민 전체에게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경제적 배체와 사회적 정치적 배제가 즉시 연동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진단은 꽤 명확한 부분입니다. 극심한 빈부의 격차로 인한 주변부 빈자들에 대한 외면과 몰이해적 판단은 시민 누구나 그러한 처지에 놓여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더욱이 중동의 안보 불안과 정치적 붕괴로 인한 유럽과 다른 지역의 난민 유입은 전통적인 국민 국가 개념의 틀로서 이들을 과연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모두 당사자성을 갖는다”는 문장이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들 난민 모두를 임의의 장소로 전부 몰아 최소한의 주거 시설과 지원만을 해주고 관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봤을 때, 지금까지 보여왔던 배제와 경계의 논법으로 미해결의 상황으로 치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비생산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차라리 기존 사회에 이득이 될 수 있는 방안으로 오늘날 전면적인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독일과 같은 케이스에 고려해 볼 만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오늘날 난민 문제는 자크 랑시에르가 언급한 대로 단순한 도덕적 원칙 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것이기도 합니다. 난민과 지역민 양자 모두가 이득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그 방안을 모색해 보는 것은 어떤가 싶습니다.

미국을 향한 9.11 테러 이후 냉전이 끝나고 더 많은 자유 민주주의의 시대를 기대했던 우리들에게 연이어 발생한 중동의 전황과 테러리즘의 확대는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에 이득을 얻는 자들을 양산했고, 이러한 정세에서 중동의 일부 권위주의적인 이슬람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과 더 잘 어울리게 되는 현상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전세계 민주주의의 큰형이라 불리우는 미국이 권위주의 정부를 용인하는 것을 넘어 지속적인 제휴를 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아랍의 봄도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가까운 이해당사자에 의해 그렇게 덧없이 허물어졌고, 여기에서 말하는 ‘내버리기의 폭력’도 바로 이러한 현실을 꼬집어 말하는 것이겠죠. 모두가 입으로는 정의를 말하지만 내심은 그러한 정의를 바라지 않는 현실, 카뮈가 살아있다면 그는 일견 ‘거대한 부조리’라고 외쳤을테죠. 정말 우리 모두가 손을 맞잡고 무덤에 들어가게 될지는 지켜볼 일이지만, 중동의 문제들로 비롯된 난민들과 이러한 문명과 야만, 혹은 내편과 저쪽편의 첨예한 예외주의는 얼마나 민주주의적 통제를 벗어나게 될지 이 점 또한 지켜볼 문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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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19-06-13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다 읽고 나서 피에르 로장발롱의 글이 번역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싱커블 에이지 - 끊임없이 진화하고 복잡해지는 예측 불가능한 불확실성의 시대
조슈아 쿠퍼 라모 지음, 조성숙 옮김 / 알마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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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조슈아 쿠퍼 레이모 (혹은 라모)는 시카고 대학을 거쳐 뉴욕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은 뒤 ‘타임’지 역사상 최연소 부편집장을 거친 인물입니다. 현재는 헨리 키신저가 설립한 키신저 어소시에이츠 (Kissinger Associates)의 부위원장이며, 특히 과거 칭화대 겸임교수이자 골드만삭스 고문으로 활동하던 중 자유진영의 ‘워싱턴 컨센서스’와 구별되는 중국식 국가발전 모델인 ‘베이징 컨센서스’를 학문적으로 처음 제안한 바가 있습니다. 이 베이징 컨센서스와 관련해 인식해야 될 점은 민주화가 없는 권위주의 정부의 경제 발전 모델이 아프리카를 비롯한 권위주의 정부들의 경제 발전 모델로 널리 연구되기 시작하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유 진영이 민주주의화가 없는 중국의 경제 발전은 위협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제가 레이모에게 한가지 의문인 점은 이러한 결과를 먼저 인지하고 베이징 모델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한 것인지 아니면 당시 나날이 발전하고 있던 중국 경제 모델에 대한 단순한 해부였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이 책에서 약간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는데요. “중국의 경제 발전이 종래에는 민주화로 진행될 것이고, 이 민주주의 국가 중국은 친미 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던 학자들의 이와 같은 인용은 레이모가 어떠한 해석을 하고 있었는지 대략 알게 해줍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레이모의 이 책은 지난 2009년 ‘The Age Of The Unthinkable’ 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10년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총 11장의 분량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주요한 골자는 “서구의 엘리트들은 민주주의가 전체의 안정을 증진시켜 줄 것이라고 예측하고 기대했다”면서 국내문제와 국제관계를 아우르는 이 민주주의의 확대가 크게는 세계 안보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으나, 레이모가 에둘러 비판하는 대로 조지프 나이의 ‘소프트 파워’와 일부 국제정치학자들에게 신념으로 여겨져 온 ‘민주평화론’이 이렇다할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세계적 인식론에는 대해서는 크게 반박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1차 걸프전의 다소 성공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중동에 암약하는 테러 조직에 의해 발생한 9.11 테러가 첨예한 미소 냉전 시기에 핵전쟁에 의한 ‘인류 멸절’ 보다 더 위험한 문제로 대두된 것이 아마도 전자에 대한 비판 인식보다 변화된 국제 안보 환경이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미국인들은 오사마 빈 라덴이 CIA가 초래한 왜곡된 근본주의자의 표본이며, 애초에 그를 일거에 제거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미국의 안보 뿐만 아니라 세계 안보에 불행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레이모는 지난 1971년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의 미중 관계 정상화를 위한 회담에서 우리가 익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이 국제정치학이 간혹 비합리적이라는 말밖에 설명할 수 없는 국가 지도자들에 의해 이와 관련된 문제를 매번 도식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1971년의 닉슨과 마오쩌둥은 일반적인 정치적 환경과 국제 레짐의 대결로 비추어 봤을 때 서로 대화조차도 나눌 수 없는 관계였음에도 예측할 수 없는 두 리더의 결단으로 대화 채널이 열렸던 것을 앞선 사례에 빗대고 있습니다. 전쟁 상황에 이르거나 그에 준하는 위기의 시간에 매우 정합적 이론에 매달리기 보다는 임기응변과 순간의 판단이 때론 중요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레이모의 큰 인식적 틀로 나타납니다. 이 점은 제한적인 국제 관계나 외교에 국한되지 않고, 언어적, 문화적, 기술적, 과학적 측면 등 현재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변화의 순간을 여러 가치가 서로 뒤엉키고 매시업되는 측면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발명된 연사되는 기관총이 앞으로 예정된 전쟁에서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꿀 혁명으로 예측했던 대로 기술의 발전은 끊임없이 확대되어 오늘날 인류를 멸망에 이를 ‘핵무기 균형’ 시대에 이르렀습니다. 레이모는 우리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마냥 평화로운 시기가 될 것이라고 치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금융시장의 위기와 테러 점조직, 마약상들’ 등 이 세가지의 광범위한 문제가 나날이 발전하는 혁명의 시기에 큰 위험이 되고 있으며, 많은 전문가들과 지식인들이 이를 제어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각국의 안보문제와 국내 상황의 여러 문제들에 직면에 후순위에 몰려 있다고 분석하고, 다만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는 그 파급 효과가 이미 증명되었던 것처럼 아마도 정치권이 이념의 문제와 상관없이 이를 다루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일전에 그리스펀이 금융 시장을 비롯한 내재된 미국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데 시장 팽창 등 다른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은 사실상 실패에 이르렀다고 보는 그의 시각도 애초에 전형적인 틀로 사건의 본질을 바라보는 것은 위험하다는 기본적인 견지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일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온갖 종류의 돌발 사태에 대해 항상 준비 태세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관점은 이 책의 중요한 결론입니다. 사실상 기술 진보가 이뤄지는 현 시점을 혁명의 시대로 인식하는 레이모에게 애초 단순한 몇가지의 이론으로 사건을 해석하거나 그 본질을 찾으려는 것은 적정 수준 이상의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세계 게임 업계를 언급하며 닌텐도의 사례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단순한 창의성의 표출 이상의 총칭하는 매시업의 단계라고 그 자신이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에 이르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레이모의 이 책이 무엇이 되었든 진보와 불확실성의 이 시기에 어떤 지표가 될지는 저 개인적으로는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진보의 시대에 핵확산이 멈추지 않고, 핵무기 대응에 의한 아슬아슬한 평화가 과연 아무일 없는 것으로 그치게 될지는 지켜볼 문제일 것입니다. 거대한 국가 권력 시스템하에서 개인이 어떠한 파급 효과를 나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지만 민주주의 자체에 회의를 품기보다는 좀 더 그것의 기반을 확대할 수 있는 교육과 정치발전에 힘쓰는 것이 더 중요하리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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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들끓는다 - 전지구적으로 위협받는 민주주의를 위하여
놈 촘스키 지음, 천지현 옮김, 데이비드 버사미언 인터뷰 / 창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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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현존하는 지식인들 중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실천적 지식인이자, 언어철학자, 정치운동가 및 사회비평가로서 큰 명성을 쌓은 노엄 촘스키와 아르메니아계 미국 언론인인 데이비드 바사미언의 최근 출간된 대담집인 ‘세계는 들끓는다’를 일독했습니다. 소개할 이 책은 촘스키와 바사미언의 문답집으로 주로 바사미언이 정치, 사회, 외교 등의 질문과 일종의 화두를 던지면 촘스키가 이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난 2017년에 출간된 원제는 ‘Global Discontents : Conversations on the Rising Threat to Democracy’로, 국내에는 최근 번역 출간 되었습니다. 원서와 관련하여 약간 흥미로운 점은 국내 번역된 책의 표지는 촘스키를 전면에 두고 있으나, 2017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책은 데이비드 바사미언의 저작으로 촘스키와의 대담이 실린것으로 나타나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촘스키와 바사미언의 이런 작업은 전작인 ‘권력체제’에 이어 두번째로 이뤄진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우선 촘스키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일화 한가지는 그가 오랫동안 CIA의 감시를 받아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일일텐데요. 세계 최고라 자부하는 정보기관의 감시와 사찰을 받은 촘스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신을 전혀 굽히지 않았다는 것은 대단할 정도입니다. 쥘리앙 방다가 비판한 지식인들의 행태를 사뭇 유추해 본다면 촘스키라는 사례는 참으로 대단하다고 여겨집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책은 총 12장의 큰 틀로서의 주제로 여러 맥락을 통해 최근까지 일어났던 주요한 사건들과 그것들의 큰 틀과 해석상의 배경이 되는 연관된 문제들까지 두루 살펴보는 장이 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만나서 대담을 나눈 시간적 순서는 2013년부터 최근인 2017년까지입니다.

여기에 중요하게 서술되는 문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이 조장한 것으로 여겨지는 ISIS를 비롯한 시리아, 이집트, 레바논, 사우디 아라비아 등의 중동 문제와 같이 포함되는 이란, 이스라엘, 터키 등의 서아시아의 국제 갈등과 유럽의 난민 문제와 오늘날 대두하고 있는 극우 세력의 문제, 반대로 미국 국내 정치에서 변질된 공화당과 거대한 포퓰리스트 대통령 트럼프, 민주주의, 보편적 투표권리 등을 거의 가감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글의 맨 처음에는 에드워드 스노든이 촉발한 국가 감시 문제로 전면적인 기술 발달로 인한 국가 권력의 다층적인 감시 체계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 고찰해보고, 이러한 상황에서는 시민의 연대와 대화만이 기존의 권력체계가 자신들을 위해 공고화하려는 체제와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정치는 소위 ‘금권정치’로 더 격하게 말하자면 ‘도둑정치’와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1980년대의 ‘신자유주의의 맹공’은 복지국가의 해체를 불러일으켰고, 유럽의 경우에는 진보와 좌파 세력이 사회복지 축소와 시민의 안전 보장 철회에 경제 발전 문제를 결부시켜 종래의 정책을 후퇴함으로써, 오늘날 난민의 극도의 혐오 이슈를 불러일으키는 ‘극우 세력’의 정치 무대 등장을 불러일으켰다고 판단합니다. 촘스키의 입을 빌리자면, “유럽이 겪어온 야만적 경제 프로그램은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손상해 버렸다”고 평가하고 이것은 그동안 성공적인 민주주의의 이행을 지속해 왔다는 기존의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유럽 전체를 민주주의 블럭으로 놓고 봤을 때, 경제 자유화를 비롯한 신자유주의의 이념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 일으켰는지는 매우 명백합니다.

다시 중동 문제로 시선을 돌려보면, 과거 남아공이 극렬한 인종차별정책은 ‘아파르헤이트’로 인해 국제 무대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을 때, 당시 남아공 외교가는 다른 국가들의 지지는 사실상 필요 없으나, 다만 미국의 공고한 지지는 중요하다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문제는 과거 남아공과 미국과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국제 무대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미국의 행태와 과거 남아공에 대한 지지는 유사합니다. 여기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두고 미국이 벌이는 외교 정책과 우호 관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라크와 이란, 터키의 쿠르드족 문제와 관련해 과거 이들에 이란의 공격과 이라크의 화생방 테러, 지금의 터키 당국이 쿠르드 족에 벌이는 노골적인 견제도 특히 교훈으로 삼을 만합니다. 국제 정치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특히 이 책에서 나온 헨리 키신저의 언급대로 ‘군사 작전과 자선 사업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은 자위력이 없는 민족에게 국제 사회가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지 과거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사실상 오사마 빈 라덴을 미국이 만들어냈던 것처럼, 쿠르드족도 장기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오늘날 미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닌 트럼프를 비롯한 ‘포퓰리즘’의 대두에서 촘스키는 현재의 미국 대통령을 뭔가 이데올로기의 현상으로 보는 것은 위험하다고 밝힙니다. 즉, “트럼프에게 무슨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는 그의 판단은 트럼프 내면의 강고한 이념이 존재하고 이것이 과거 히틀러와 같은 전체주의로 갈 가능성을 두고 그를 해석하는 것은 현실을 호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듯 합니다. 즉, 트럼프가 대선 전에 월스트리트에 존재하는 수많은 경제인들에게 ‘금융권력’에 대한 광범위한 경고를 내건 것으로 추측된 것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월스트리트 출신의 금융인들을 자신의 백악관에 들임으로써, 그가 어떠한 사고 체계를 갖고 있는지 판단하게 합니다. 다만, 그는 현시점의 미국 정치에서 문제는 미국에는 계급 정치를 할 만한 정당이 없다는 것이며, 공화당의 정치는 20년전보다는 더 우경화 내지는 금권정치화가 되어 소위 티파티 멤버들에게 ‘이스라엘을 방어하는 것이 신의 자손들이 마땅히 맡아야 되는 책무와 같다’는 종교적이고 교조적인 형태의 정치 변질로 나아가는 현상이 더 위험하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아마도 그로서도 포퓰리즘 자체가 전체주의로 발전하는 가능성은 현실에서 희박하다고 보는 거겠죠. 다만, 포퓰리즘 자체가 이런 추세로 간다면 민주주의를 파괴할 가능성이 높고, 그런 측면에서 도널드 트럼프라는 개인보다 미국의 극우 포퓰리즘인 티파티의 구호가 더욱 위험한 것입니다. 티파티는 그동안 진보정치와 좌파를 격멸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처럼 극우 포퓰리즘이 어떠한 문제를 야기할 것인가는 단순한 위험 정도가 아니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촘스키의 건강에 찬사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기도 했습니다. 부부와의 관계가 좋다는 그의 고백도 듣기에 좋았고, 무엇보다 별다른 운동도 하지 않는데 그렇게 잔병치레 없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에 놀랍기도 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을 떠나 보낸 지금 시점에서 노엄 촘스키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고 싶습니다. 2010년에 그와 비슷한 양심을 가진 하워드 진이 타계했다고 들었을 때, 꽤 낙심한 바가 있었는데요. 우리에게는 아직도 돌아온 발걸음 뒤를 살펴봐 줄 사심없는 현인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리를 빌어 그의 건강을 빌어봅니다.

“경제 권력이 집중되면 그 자연스러운 결과로 제대로 기능하는 민주주의는 침식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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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19-06-07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주셨던 분이 계셨는데, 죄송합니다 ㅠㅠ 오류가 나서 다시 업로드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루퍼트 머독 - 미디어로 세계를 선동한 권력욕의 화신
데이비드 맥나이트 지음, 안성용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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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국영 ABC TV의 기자 출신인 데이비드 맥나이트는 정치, 역사, 환경 등의 주제로 다양한 글을 출판한 저술가이기도 합니다. 특히 냉전 역사에 관한 두 가지 주요한 논저로 세계 출판계에 관심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 책은 호주 지식인의 눈으로 본 호주 출신의 언론 재벌인 ‘루퍼트 머독’의 실체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춘 글이기도 한데요. 지난 2012년 ‘Ruoert Murdoch : An Investigation of Political Power’의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번역 출간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언론 그룹인 뉴스코퍼레이션의 총수 루퍼트 머독은 CNN 의 테드 터너 등과 더불어 꽤 유명한 언론기업인이라 불리우고 있습니다. 맥나이트의 이 책에서는 이런 표면적인 평가 말고 루퍼트 머독이 과연 어떤 사회정치적 관점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그의 발언이 인용된 기사와 연설, 그가 사주로 있는 여러 언론사의 편집장들과 같은 이들의 발언 등을 소개하며, 그가 어떠한 정치적 행로를 걸어왔는지 비교적 상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머독 개인의 정치적 관심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어 왔는지 여기에는 많은 자료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머독 특유의 독특한 관점 세 가지를 먼저 정리하고 싶은데요. 첫째는 세계적인 기후 변화를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히스테리적 불안조정자 및 재앙예언자로 치부하는 것과 둘째로 소위 정치적으로 올바른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보수주의자들을 억압한다는 해괴한 견해와 셋째로 머독이 견지하고 있는 정치사회적 견해가 사실상 ‘우익 포퓰리즘적’ 대변하고 이를 평생에 걸쳐 정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추구해 왔다는 점입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진 머독의 사업 기반은 기본적으로 부친의 유산 승계와 관련이 깊습니다. 그의 아버지 역시 호주의 언론사를 운영했고, 그러한 기반하에서 머독이 성장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후 호주를 거쳐 미국에 사업을 위해 미국인이 된 상황에서도 미국과 영국 정치권에 지지와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익히 다른 기사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로널드 레이건과 마가렛 대처와의 친분은 꽤 유별난 것이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레이건의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루퍼트 머독이 크게 기여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만 대처 정부가 집권 초기 사회 복지 정책을 철회하는데 있어서 머독이 지지를 보인 점은 앞선 두 사람과의 정치적 공감대가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겠죠. 다만, 대처의 회고록 출간과 관련해 머독이 운영하는 출판사가 그 판권을 사들여 출판이 되었을때, 대처의 집권 당시 머독과 긴밀했던 그녀가 회고록에는 머독의 이름이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은 것은 꽤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또한 머독이 조지 H. W.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절대적으로 지지한 것과 대처 정부가 남아메리카에 있는 포클랜드 전쟁을 벌이는 것에도 마찬가지의 입장을 보인 점은 과거 레이건 행정부의 그레나다 침공에 대한 환영과 유사합니다. 맥나이트는 머독이 레이건 행정부 이후 급격히 우경화되었다고 언급하는데요. 이는 레이건 행정부 당시 소련에 대한 공격적 대응에 그가 영향을 받은것과 비슷한 결과로 이어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레이건 정부가 임기를 마치고 그것의 심리적 공허함을 그가 가졌는지, 아니면 레이건 정부가 떠난 그 자리가 앞으로 소련과의 대결에서 허약한 미국을 두려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소수집단 우대 정책에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등 일반 우익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그것이 본인의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간에 그 추동에 공감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여기에 머독은 선택과 경쟁이라는 자유시장 가치를 신념으로 받아들였고, 후에 이 점은 마거렛 대처와 연결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저는 머독이 레이건과 대처의 배후라고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세사람이 서로 정치적 공감대가 있었으며, 정치와 언론매체라는 결합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거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견해에 대한 능동적 수렴이라는 측면과 경제적 이익이라는 부수적 이익이 분명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닌가 추정해봅니다. 이 글에서도 ‘뉴욕 포스트’와 관련된 재인수와 그가 거느리고 있는 언론기업들의 경제적 이익 또한 분명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수 우익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경제적 이득과 이권에 대단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과 특히 자유 시장과 관련된 주제에 있어서 매우 배타적인 의견을 보인다는 점은 이들과 머독간의 공통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글을 다 읽고 나서 문득 들었던 생각은 이렇게 정치적인 인물이 왜 미국의 선거판에는 뛰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원초적인 의문점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도널드 트럼프와 유사한 행적과 가치관이 있어 보였는데요. 유력 정치인들과의 관계 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건지, 아니면 정치 무대에 직접 뛰어드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맞지 않다고 여기는건지는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 약간 의구심이 드는 부분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라크 전쟁과 관련된 8장과 기후 변화를 일종의 샤머니즘으로 모는 9장은 특별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머독이 이끄는 뉴스코퍼레이션은 ‘뉴욕 포스트’, ‘월스트리트 저널’, ‘폭스 뉴스’, 영국의 ‘선’, ‘타임스’, 호주의 ‘오스트레일리안’. 아시아의 ‘스타 TV’ 및 글로벌 출판 그룹 ‘하퍼콜린스’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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