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 신자유주의적 인격의 탄생
파울 페르하에허 지음, 장혜경 옮김 / 반비 / 2015년 11월
평점 :
파울 페르하에허는 벨기에에서 임상 심리학과 정신 분석학을 연구하고 있는 학자입니다. 그는 1978년에 벨기에 공립 연구 대학인 겐트 대학에서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5년에는 임상 심리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습니다. 다만, 벨기에만의 특별한 자격 요건 때문인지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또 심리학 교수이기도 하지만 현재 심리학자 자격증은 없다고 위키에서 소개되고 있는데요. 스스로도 심리학자라는 직함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첨언하고 있었습니다. 여느 심리학 분야를 전공하는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페르하에허도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자크 라캉을 오랫동안 연구해왔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던 점도 특이할 만한 이력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강고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그의 이 책도 마찬가지로 앞선 부분과 같이 동일한 맥락으로 논증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은 원제, "Identiteit"로 지난 2012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의 이 책을 간단히 요약해 본다면,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에 대한 일관된 비판을 담은 글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1부에서 논증되고 있듯이 인간의 사회가 오랜 계몽주의적 전통과 그러한 토대가 자본주의적 인간관의 주입으로 사실상 파괴되어 왔고 이러한 인식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일목요연하게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공동체적 인간'과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상의 대립법을 통해 논지를 전개하고 있는데요.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시장 자유' 혹은 '사실상 제한된 자유'가 사회에 어떠한 식으로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한 '사회적 서사'와 더불어 꽤 진지한 비판적 분석을 함께 담은 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일각에선 지난 40 여 년 간의 신자유주의에 의해 자행된 광범위한 정치 경제적 사회개조에 대해 그저 음모론을 펼치는 자들이 많은 것이 실정입니다. 이들이 단순히 지난 역사에 대해 무지한 점을 떠나 신자유주의가 초기에 큰 기대와 각광을 받았던 점을 고려해 본다면, 2008년의 그 무자비한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맹목적 지지를 철회하지 않은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글의 2부에서도 논증으로 명백히 드러나지만 신자유주의가 국가와 정치 전반을 시장에 귀속시키려 했고, 제러미 벤담이 역설한 '자연 상태의 인간'이라는 의미가 신자유주의 시대를 여실히 요약하는 짧은 문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1부 중간에, 신자유주의적 기법 전반이 '제2의 사회진화론'이라고 규명했던 점은 모두에게 전혀 지나치지 않은 해석이라 여겨집니다.
찰스 다윈의 개념과는 달리 완전히 다른 개념인 '적자생존'을 창안한 허버트 스펜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번식을 하지 못하도록 사회 복지 제도를 없애라고 한 토머스 멜서스와 함께 사회진화론의 악명을 이끈 인물입니다. 저자의 우려대로 이 사회진화론을 고스란히 끌어다 재정립시킨 신자유주의가 원인이 되어 오늘날 사회진화론에 대한 토론이 다소 잠잠한 것에는 이러한 맥락이 기반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좀 전에도 언급했듯이,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혹은 신자유주의 능력주의가 허버트 스펜서의 적자생존의 개념을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용시키기에 이릅니다. 마찬가지로 경제학이 이런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을 고려해 본다면 신자유주의자들의 진정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그래서 5장에서 저자는 "사회진화론과 신자유주의는 제일 잘 태어난 인간에게 살짝 더 이익을 얹어주는 듯한 분위기를 조장한다"고 이를 비판적으로 잘 분석하고 있기까지 한데요. 저로서는 저자의 진술이 다소 순화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공정한 경쟁을 통해 각자의 자리를 찾게 되는 능력주의가 부모가 가진 돈에 따라 엘리트 게층의 고착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점과 제러미 벤담 또한 인지한 "신자유주의 '자유'시장은 공장과 글로벌 정치 결정의 타협이 있어야만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전제도 우리가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 자체가 그저 반쪽 짜리의 산물임을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많은 자본주의자들이 강조하고 있듯이, 인간의 자아 실현이라는 관념은 멋진 아이디어라는 점과 동시에 자본주의의 강력한 순기능이라고 주장 되어왔습니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과거 사회의 진보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계몽주의의 몰락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과도한 합리주의의 주입으로 사회적 관념이 전반적으로 변화를 맞게 되고 산업혁명과 더불어 '경제적 인간'이라는 새로운 가치가 큰 주목을 받게 됩니다. 반대로 과거의 역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필두로 "개인의 이익만 생각하는 윤리나 정체성 발달은 말 그대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진술은 작금에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닫게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아이디어는 정치를 주도하는 권력층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것이기도 했는데요. 단순히 돈이 많거나 주변의 권력을 아우른 자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사회와 정치를 이끌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오늘날은 "돈이 많은 자와 권력을 쥔 자에게 윤리와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까지 조언을 받으려고 한다"는 점은 과거와는 여실히 변화된 사회상을 보여줍니다. 이는 "돈이 많은 사람은 다 노력과 성격 덕분이므로 인성도 훌륭하다"는 부유층에 대한 평범한 사람들의 인식을 함께 보여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4장에서 밝혀지는 계몽주의 시대는 "적응력은 물론 다양성의 원천 역시 전형적인 인간의 능력, 즉 의식적 결정과 의도적 변화를 이끄는 이성에 있다"고 본 것인데요. 자본주의적 인간의 합리성과 계몽주의에서의 이성이 얼핏 보면 유사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명백하게 다른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이죠. 저자가 뒤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황당한 변종으로 여겼던 것에는 바로 이러한 선례가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한 몸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겠지만 좀 더 구분해 본다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명백히 상반된 다른 개체입니다. 기본적으로 저자 역시 앞선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완벽하게 다른 물건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전자는 국가와 사회의 엄격한 분리를 추구하지만 후자는 국가를 소위 자유시장에 복종시키려 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에드먼드 버크가 지금 살아있다면 실로 그가 통탄할 내용들이 바로 후자에 있는 것이죠. 결국 신자유주의자들이 국가에 대한 시장의 우위를 좀 더 하이브리드적인 관념을 탈바꿈시킨 것이 아마도 '대마불사'일겁니다. 시장이 초래하여 막대한 피해를 사회와 국가에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시장을 위기에서 무조건적으로 구해내야만 한다는 철면피와 같은 당위가 저들의 사고에 더해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회와 시민을 인질로 삼고서라도 말이죠.
1980년대에 영국에서 복지 국가라는 관념이 모조리 몰락한 이후로, 우리에게 복지 국가라는 개념은 책에서나 등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에 있어서 만큼은 강력한 자유를 주장하는 미국에서나 다른 자유주의 진영의 국가들에게서 복지는 신자유주의에 의해 배격되는 관점이었습니다. 앞선 '신자유주의 능력주의'를 필두로 개인의 삶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개인에게 있다는 주장이 배타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어쩌면 우리가 직면한 출생률의 심각한 문제는 토마스 멜서스가 강조한 가난한 자들이 번식을 못하도록 하는 과거의 사회진화론의 담론이 아주 명확하게 맞물린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결혼할 권리와 아이를 낳을 권리는 오로지 보유한 재산과 지속적인 수입에 달려있다는 그런 현실적인 요건들 말입니다. 어쩌면 그런 연유로 오늘날의 사회진화론의 비인간적인 관념이 앞선 부분과 유사하게 변형되어 시민들에게 주입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데요. 또한 과거 서유럽에서 강력하게 추동된 '백인우월주의'와 '남성우월사상'이 초래한 사회의 분단과 파편화가 우리의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계몽주의적 관점에서 공동체와 도덕적 윤리관을 강조하는 데에는 엄청난 고통이 따를 수 있다는 점은 모두가 인식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저자는 이런 공통된 인식하에 데이비드 흄이 오로지 이익만을 강조한 사회가 맞을 최후를 예를 들며 우리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전세기를 통틀어 가장 교육 받은 세대를 보유한 우리가 스스로의 인간다운 삶과 자기 결정을 위해, 한낱 가벼운 노력조차 할 수 없다는 점은 거의 어불성설 일 겁니다. 그래서 토크빌과 존 듀이의 경고는 보통 시민들에게 일종의 사회적 전환을 불러 일으킬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헛된 희망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희망이라도 있어야 지금의 신자유주의가 주도하는 사회의 비인간화를 저지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로 이 책의 마지막 장인 8장은 우리에게 중요한 책무를 일깨워 주기도 하는데요. 이 장은 전반적으로 우리 민주주의에 대한 건실한 요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앞의 5장과 더불어 중요하게 읽혀져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저자를 단순히 심리학자로 받아들이기에는 그의 사회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심도있는 지식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는데요. 그의 이 글은 리차드 세넷을 거의 능가한다고 봐도 될 정도로 신자유주의와 그에 따른 사회적 맥락에 따른 깊은 이해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일독해 보셨으면 합니다.
-글 2장에서 토마스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엿볼 수가 있었는데요. 이 글의 여러 훌륭한 논증과 더불어 꽤 중요한 부분으로 읽혀졌습니다.
이데올로기와 정체성을 둘러싼 모든 논란의 당사자들은 각자의 전형적 공격성과 공포를 포함하는 동일성과 차이의 필수적 균형을 고려해야 한다
정확히 말해 규범과 가치는 자신의 신체 및 타인의 신체를 대하는 방식이다
자아실현을 중시하는 사회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하며 따라서 자아실현이 멋진 아이디어라고 여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개인의 이익만 생각하는 윤리나 정체성 발달은 말 그대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난과 실패는 불운과 우연 탓이 아니라 종교적, 도덕적 결함의 증거이다. 반대로 성공과 부는 개인의 노력에 대한 신의 은총이다. 종교와 경제의 결합은 근면과 성실을 채근했다. 이것이야말로 황금시대의 비법이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영향으로 인간이 나쁘다는 확신이 널리 퍼져나갔다. 남자는 나쁘고 여자는 아 더 나쁠 것이다. 여자 때문에 악이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세속화된 종교들 역시 빠른 속도로 교체되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그리고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이라 선언했던 최후의 변종 자유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지금보다 더 나은 새로운 세상을 약속했다
사회진화론의 최신 버전인 신자유주의는 자연 대신 ‘시장‘을 보존하려 한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적응력은 물론 다양성의 원천 역시 전형적인 인간의 능력, 즉 의식적 결정과 의도적 변화를 이끄는 이성에 있다고 보았다
사회진화론은 생존 투쟁을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생명의 본성이라 보며, 따라서 일체의 협력에 눈을 감는다
조건은 계약(사회계약)의 형태를 띠며, 계약에 동의한 사회질서가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개인이 명확히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이 논리의 약점이 있다. 사회진화론과 신자유주의는 제일 잘 태어난 인간에게 살짝 더 이익을 얹어주는 듯한 분위기를 조장한다
인문학은 쓸데없고, 사회학자들은 다윈을 읽어야 하며, 신자유주의는 비난할 것이 전혀 없다고 말이다
제러미 벤담도 이미 알고 있었든 신자유주의 ‘자유‘시장은 공장과 글로벌 정치 결정의 타협이 있어야만 제 기능을 발휘한다
굳이 사회학의 연구 결과까지 동원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사는 지금의 사회경제 조직이 개인주의와 분리의 해석 모델만을 채근한다는 사실은 쉽게 확인 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