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千洞好世, 얕은 책수레 (베터라이프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과연 책을 끊을 수 있을까요</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Fri, 09 Oct 2026 01:29:12 +0900</lastBuildDate><image><title>베터라이프</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631671592278059.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베터라이프</description></image><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웨이워드 - [웨이워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554122</link><pubDate>Sun, 04 Oct 2026 18: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55412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32433335&TPaperId=1755412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344/92/coveroff/k71243432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32433335&TPaperId=1755412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웨이워드</a><br/>블레이크 크라우치 지음, 변용란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5년 07월<br/></td></tr></table><br/>윌리엄 블레이크 크라우치는 1978년 10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스테이츠빌 인근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그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올린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인 노스 아이레델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같은 주, 채플힐에 소재한 공립 연구 대학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채플힐 캠퍼스에서 영어학과 문예 창작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현재는 콜로라도에 살면서 창작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크라우치는 2004년과 2005년에 각각 첫 소설들인 『사막의 장소』와&nbsp; 『잠긴 문』을 출판했습니다. 2011년에는 자비로 소설『런』을 출간합니다. 뒤이어 2016년에는 SF 스릴러인 『다크 매터』를 출간했는데요. 2019년에는 『리커전』이라는 제목의 또 다른 SF 소설을 출간합니다. 그에게 비로소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인 웨이워드 파인즈 3부작은 2012년에 처음 출간되어 2014년에 마무리 되는데요. 이 작품은 유명한 영화 감독인 M. 나이트 샤말란에 의해 TV 시리즈화가 되어, 2015년 5월 14일 폭스 TV를 통해 첫 방영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작품인『굿 비헤이비어』역시, 2016년 11월, 텔레비전 시리즈로 초연되었습니다. 그의 수상 경력은 파인즈가 2013년 국제 스릴러 작가상 "최고의 오리지널 페이퍼백 소설" 부문 후보에 올랐고, 더 라스트 타운은 2014년 굿리즈 초이스 어워즈의 "호러" 부문 후보작에 올랐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작품은 원제, "Wayward"로 지난 201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이 작품은 출판사의 사정으로 인해 절판된 상황입니다.<br><br>웨이워드파인즈 시리즈의 첫 작품인 파인즈를 일독하고 나서, 다음 작품들은 과연 언제쯤 구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기도 했는데요. 운이 좋게도 알라딘 중고 서점을 통해, 두 번째 작품인 『웨이워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일전에 『파인즈』의 서평을 작성하면서 이미 제가 'TV 드라마 웨이워드 파인즈'를 먼저 접했음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당시 드라마의 서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일부 장면에서 사건에 따른 개연성이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느꼈는데요. 원작을 읽고 나서야 그 맥락이 맞춰지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 중 한 사람인 케이트 휴즈, (다른 이름으로는 케이트 벨린저)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사건의 진행과 지난 행적에 대한 의구심이 풀리기도 했습니다. 드라마에서 케이트의 행동이 배경 설명과 근거 없이, 너무 극으로 치닫는 느낌을 받았는데 케이트의 1차 융합 과정에 대한 서사를 보고 나니 그녀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nbsp;또한 에단 버크의 아내인 테레사 버크에 대한 다소 미진한 과거 행적에 대한 서사 때문에 극이 진행됨에 따라 에단과 그녀의 관계 자체가 한쪽으로 비틀린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 정확한 연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왜 이 중요한 문제를 삭제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또한 누군가의&nbsp;'융합 과정' 그 사람의 신경정신학적 적응에 따라, 시차를 두고 몇 번이나 발생할 수 있다는 설정 자체는 꽤나 참혹한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2000년이 훌쩍 지나고 나서, 'DNA의 진화 이탈'로 발생한 이탈종 즉, 작품의 현생 인류인 '애비'와 이들이 과거 인류를 답습하는 것처럼, 단순히 동물적 무리가 아니라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는 마치,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를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br>극의 주인공인 에단 버크와 분명하게 대척점에 놓여 있는 데이비드 필처는 '오도된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수단이 목적을 오판하게 만드는 아주 전형적인 권력 지향의 인물인데요. 여기에 더해 종교적 메시아론의 논란 그 한가운데 서있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nbsp;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과 연계된 가치관의 전부를 맹신하고 있고, 소위 '인류의 생존'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근거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인간의 가치들을 조직적으로 제거하며, 더 나아가 '공포'로 질서를 유지하는 매우 전형적인 캐릭터였습니다. 저는 이 필처의 인물 조형에서 작가 자신이 카를 슈미트를 일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비상한 시기의 메시아적 결단'이라는 상징 만으로도 숨이 막힐 정도였습니다.&nbsp;물론 그가 인류에게 있어 분명하게 위협으로 작용할 문제를 과학자로서의 선견지명으로 감지하지만 그의 말대로, "지금은 민주주의가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라는 냉소로 권력을 강화해 나갑니다.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3000명 이상의 사람을 반강제적으로 납치했고, 인류라는 종의 보호라는 미명하에, 구축한 '냉동인간 시스템'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시스템 자체에 기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자신이 우월한 지적 능력과 통찰을 갖고 있는 어떤 과학자가 그저 인류의 구원이라는 마치 종교적 신념과도 같은 맹목적 사고에 몰입 되어, 막대한 돈과 권력으로 자신이 믿는 바를 행할 때, 만약 주변에 어떠한 비판과 견제가 전무할 경우, 종래에 그것이 추구한 결과는 다수에게 이롭지 못하는 쪽으로 귀결되는 서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구원자의 입장에서 평범한 사람들을 재인식 하는 것과 그저 자신의 삶에 대한 온존과 평범한 일상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의 인식 자체는 양자 간의 심각한 괴리를 갖고 있으며, 이것을 떠나 인간 자체에 대한 편의주의적이고 오만한 인식은 독재자들의 공통된 습관이기도 했습니다.<br>전반적인 서사의 측면에서 이 웨이워드는 전작인 파인즈의 훌륭한 확장적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에단 버크가 데이비드 필처에게 상당히 개연성 없이, 협력하게 되는 설정이나, 그의 아내인 테레사가 첫번째 융합에서의 진실을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드러내지 않는 과정 자체는 초반 전개에서 아쉬운 부분으로 이어졌습니다. 다만, 케이트 벨린저와 관련된 서사는 TV 드라마와는 달리, 충분히 제공되었는데요. 사실 케이트와 같은 인물이 우리 모두를 쉽게 대변할 수 있는 인물 설정으로 느껴졌습니다. 대단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신의 삶에 대한 사소한 흐름과 흔적 모두가 자기 자신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생각할 여지가 많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전혀 일면식이 없는 극중 웨이워드파인즈의 환경은 평범한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예상할 수 있는 불확실성 때문에 외부의 위협적인 요소를 데이비드 필처를 비롯한 체제 유지 세력들에게 그 정보를 제한하게 되는 연유 자체는 이해할 수 있으나, 웨이워드파인즈의 주민들이 정보 미공개로 인한, 현재 자신들을 '관리'하고 있는 '통치 세력'에 대한 불확정성 자체는 역설적으로 체제 유지에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것을 똑똑한 과학자인 데이비드 필처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물론 무시로 일관하지만) 극의 개연성 측면에서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br><br>저는 여기에 더해, 데이비드 필처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그 이상의 무언가를 획책하고 상상했던 패멀라, 즉 '팸'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언급하고 싶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필처가 57세가 되던 해에, 우연히 만난 '길거리 소녀'였던 팸은 필처가 그녀를 향해, 무언가를 느끼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손을 내민 선의에 있어, "저는 오랄은 하지 않아요" 맞받아친, 세상의 무관심과 냉대를 온몸으로 받고 있던 소녀였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자기본위적인 생각과 판단은 그럴 수밖에 없는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말처럼 어린 아이들의 평범한 사회화 과정에서 이 아이들의 가정 환경, 그리고 사회적 배경이 몹시 중요한 문제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물론 제가 그저 편협한 사람이라서 이렇게 '사회로부터 버려진 아이'가 나중에 억눌린 감정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인해 매번 몰인간적인 '사이코패스'로 변질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여기 팸은 필처의 '숭고한 이상'과 맞물려, 전형적이게도 인간을 그저 체제에 필요한 도구 중 하나로 처분합니다. 이 팸이라는 캐릭터의 서사는 마찬가지로 테드 업쇼라는 관리자 그룹의 한 인물과도 적절히 매치됩니다. 테드 역시, 과거에 마약에 빠져 인생을 낭비하다 필처의 선택을 받게 되는데요. 여기에서 작가가 간접적으로 말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스스로 인생의 목적성을 상실한 낙오된 인간이 월등한 지능과 우월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 구원을 받는 서사의 구조적인 설정은 지금 이 사회에서도 드물게 볼 수 있는 스토리이기도 합니다. 극에서도 그렇게 구성된 조직이 필처라는 인물의 손짓 하나에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종교적으로 재탄생한 어떤 권력자를 떠올리게 만듭니다.&nbsp;이렇게 (메시아적) 필처는 불쌍한 처지의 한 소녀를 어떤 끌림에 이끌려 손을 내밀고, 자신의 이상과 계획을 이 아이에게 주입하여, 이 아이는 스스로 감화되었으며, 결국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서사 그 자체는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오히려 그녀가 살인을 즐기는 듯한 모습까지 드러나게 되니 설정 자체는 그만큼 극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nbsp;이어지는 극후반부의 서사에서 필처 역시, 팸과 다름없는 사이코패스로 드러나고, 그 추악한 면모가 다시금 펼쳐지면서, 필처와 그의 유산을 이어 받은 팸이라는 두 인물의 극적인 몰락은 작가의 탁월한 '꿰맞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br>극중 에단은 전의 세계에서 케이트와의 불륜을 인정하고 자신이 아내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는 점을 알고 있으며, 웨이워드파인즈에서의 두 번째 삶에서 아내에게 충실하기를 다짐합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마음가짐을 결코 변질시키지 않았는데요. 다만, 아내인 테레사의 첫 번째 융합 과정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은 꽤나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버틀란드 러셀이 "나에게 진실을 말해 달라고 요구하는 자들이 오히려 진실을 감추는 행동을 은연중 벌이기 마련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는데요. 아무리 웨이워드파인즈가 지난 과거의 일들을 꺼내지 않는 그 묵인과 폐쇄가 질서의 원초적 조건이라 할지라도, 나중에 CCTV의 사각지대에서 에단과 테레사가 서로를 향한 달콤한 애정 표현과 함께, 자신들이 일부로 나마 억압된 체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면 '진실의 언어'를 보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테레사는 결코 자신의 진실을 내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웨이워드파인즈에서와 같은 세계에서, 가히 진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으로 구축된 세계 자체는 허위에 불과하다는 작가 자신의 목소리를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br><br>끝으로 이 작품이 관통하는 주제는 본연의 인간성을 억제 혹은 제거하고 그것을 축으로 삼아, 체제에 안전과 종의 지속성을 삼은 사회가 '그 알량한 시기의 삶'이 과연 인간의 삶을 원천적으로 보장 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담고 있습니다. 고귀한 선의 이상을 흔들리지 않는 목적으로 삼아, 삶의 방향을 왜곡된 선쪽으로 몰아가는 일련의 과정들이 인간의 본성과 자유, 그리고 평범한 삶에 대한 기억들과 반대로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마땅히 여기에 저항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몫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여기 웨이워드파인즈에 입과 생각을 막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침묵하는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 함께 싸우는 것이, 위선을 넘어서는 분명한 원칙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게 침묵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사연을 일견 무시하기 마련이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거의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웨이워드파인즈가 사람들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분류하고 재정립하는 것처럼, 그러한 시도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 최소한의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연유에서 에단 버크의 결단은 그만큼 외롭고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br><br>- 데이비드 필처라는 캐릭터의 진정한 면모는 극의 말미에서, 자신의 딸인 알리사와 아내인 엘리자베스를 어떻게 처분했는지로 드러납니다. 자신을 향한 맹신과 그것으로 구성된 신념 그 자체는 자신의 가족마저 파괴 시키기에 이른다는 뼈아픈 교훈을 안겨주고 있었습니다.&nbsp;&nbsp;<br><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344/92/cover150/k71243432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3449252</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히틀러의 복지국가 - [히틀러의 복지국가 - 약탈, 인종 학살, 공범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534795</link><pubDate>Thu, 24 Sep 2026 14: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53479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12131363&TPaperId=1753479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37/59/coveroff/k11213136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12131363&TPaperId=1753479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히틀러의 복지국가 - 약탈, 인종 학살, 공범들</a><br/>괴츠 알리 지음, 최준영 옮김 / 생각의힘 / 2026년 09월<br/></td></tr></table><br/>1947년 5월, 독일 바덴뷔르템 주, 하이델베르크에서 태어난 괴츠 알리는 1600년대 프로이센 궁정의 시종장이었던 개종 터키인의 부계 후손이기도 합니다. 그는 독일 언론 학교를 졸업한 후,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역사와 정치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까지, 그는 독일 좌파 학생 운동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데요. 그의 개인적 회고를 통해, 이때 참여한 세대들이 "1933년 세대"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알리의 주요 관심사는 홀로코스트 역사와 나치의 인종적인 정책 수립에 관여한 인물들의 비판적 연구입니다. 특히 그는 유대인들에 대한 "최종 해결책"에 관한, 초기 정책과 행정적 차원의 실행까지, 그 전반을 연구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연구는 여러 학자들로부터 인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중 일부의 학자는 비판적이기도 한데요. 특히 영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J. 에반스는 무엇보다 면밀한 분석이 요구되는 그의 경제적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2차 대전 당시의 나치 정권의 판에 박힌 인종주의적 성격보다 이들이 경제적 이유로 유대인들을 최종 처분한 것이 중요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Hitlers Volksstaat : Raub, Ressenkrieg und nationaler Sozialismus"로 지난 200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6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br><br>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이미 저자인 괴츠 알리가 수차례 언급하고 있지만 유대인들과 관련된 '최종 해결'과 그들의 재산 몰수와 관련된 통치 자료가 조직적인 문서 소각에 의해 거의 사라졌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 싶습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과거 연합군에 항복한 일본 제국이 경성, 그러니까 총독부의 보관된 통치 자료들을 한반도를 떠나기 전에, 철저히 소각했다는 점과 그 맥락이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역사 연구와 관련된 입증할 수 있는 자료들이 앞선 사례들처럼 철저하게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시대의 기억들은 여전히 남기 마련입니다. 이는 국내에 있는 일부 친일에 가까운 학자들이, "아무리 일본 제국을 거악巨惡으로 취급하더라도 당시 제국을 이루던 관리들과 통치자들이 상식을 벗어난 일을 했을리가 없다"는 등의 발언을 하는 것을 봤을 때, 이들이 기대고 있는 것은 분명 조선 총독부에 있던 통치 자료들의 소각으로 인한, 사료 부족일 겁니다. 이처럼 증거를 대라는 말은 경우에 따라, 그것을 위선적으로 입에 담는 자들에게는 그만큼 달콤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br><br>수많은 영상 매체와 각종 영화 및 드라마 등을 통해, 아돌프 히틀러와 그가 만든 나치 정권에 대한 일정의 인식 등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개인의 차이가 있겠지만 말입니다.&nbsp;특히 600만이 넘는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살해한 역사적 진실은 그만큼 나치에 대한 인종적 인식을 강하게 갖게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독일의 패전 후,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영양 실조로 깡마른 유대인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데요. 그만큼 유대인 학살과 관련된 인상은 비참할 정도로 전형적입니다. 하지만 이 논저의 저자인 괴츠 알리는 당시 나치 정권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그림자를 드리운 소위 '아리안화'의 인종적 이미지 뿐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정권과 특히 독일 제국 내의 중간 계급 이하의 국민들이 유럽 내의 유대인 말살을 통한, 경제적 및 재산의 이익을 누렸다고 분명하게 분석합니다. 글 1장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지만 1933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했을 때, 요제프 괴벨스가 35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28세, 알베르트 슈페어는 27세, 아돌프 아이히만이 26세, 요제프 멩겔레는 21세, 하인리히 힘러와 한스 프랑크는 32세, 헤르만 괴링 역시, 이제 40세가 되었을 뿐인데, 이들이 다른 나이 많은 세대들과 달랐던 것처럼, 당시 독일인들은 젊은 제국에서, 재빠르게 도덕적 양심이 끼치는 제약을 벗어 던졌다는 서사 자체는 꽤나 의미심장합니다. 이 글의 도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제3제국을 이끌었던 나치들과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도 이들의 역겹고 혐오스런 정책에 동조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이는 단순히 정권에 대한 지지를 넘어, 당시 독일인들이 그야말로 극악한 범죄 행위에 눈을 감고, 자신들의 정권에 중요한 권력을 부여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br>독일은 1930년대 초반의 짧은 경제적 호황기를 거쳐, 1918년의 트라우마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해가 될, 1938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때 독일은 재무장과 다름 없는 군비 증강 계획을 교묘하게 실행하고 있었는데, 이는 어음을 통한 우회 자금 조달로 당시 제국은행 총재였던 샤흐트가 고안했던 발상이었습니다. 동시에 군은 1939년에 110억 마르크에 달하는 금액을 요구했는데 당시 제3제국은 경상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국채를 시의적절하게 발행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편법이 항상 유용할 수는 없어서 1938년 4월 26일, 당국은 칙령을 발표하는데요. "유대인들은 5000 마르크를 초과하는 모든 개인 자산을 세무 당국에게 신고"하도록 의무화하기에 이르는 독일 내 유대인들이 보유한 재산에 대한 초법적 접근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인 알리는 바로 이때 '유대인들의 소득 신고'가 1937년에 히틀러가 초안을 잡은 '독일 내의 아리안 민족 이외의 다른 인종을 분류'하려는 시도와 어느 정도 맞물려 있는 정책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아니더라도 독일 국민을 통한 징세는 정권의 아킬레스 건이라 여겼던 히틀러와 괴링에게, 독일 내에서 생산 활동을 하고 있던 유대인들의 존재는 이들의 인종적 편견 만큼이나 이익을 가져다 줄 유의미한 자산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1937년 말까지 독일 유대인들의 재산이 체계적으로 몰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첨언하고 있습니다.<br>우리가 당시 제3제국의 경제 정책을 보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유럽 국가들도 공통된 이해를 갖고 있었던 '인플레이션에 따른 통화 발행'을 매우 경계했다는 부분을 우선 전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독일이 재무장 시기에 국채 발행을 통한 간접적 소요 충당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이기도 했지만 이 메커니즘은 일종의 '빚의 돌려막기'로 봐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특히 2장에서 나치 정권의 정치적 이해이기도 했던, "세수원으로 활용하고 싶은 저소득 계층에 대해서는 어떠한 강력한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맥락의 고민 역시 다시 한번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쟁 시기의 나치는 소련의 공산주의 혁명에 유럽 국가들이 대항해야 한다는 명목을 걸기도 했지만 원천적으로 저소득 계층과 하위 계급에게 세금을 더 거둬들여 종래에는 국내 내부에서 이들의 분노가 '혁명의 원인'이 되는 것을 크게 경계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 지점에도 아리안 민족은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그 역겨운 이데올로기가 함께 맞물려 있기도 했습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허를 찔러,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점령한 나치는 현지에서 군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게 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주둔 비용'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독일군이 소요하는 비용 전반을 제국의 재무부가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 대 마르크'와 같이, 고정된 환율을 근거로, 직접적 현지 화폐로 조달하는 방식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 인용되고 있는 당시 경제학자 게오르크 홀츠아우어는 '점령군 재정 운영의 표준적 관행'이 될 방안인, 현금을 포함한 현지 조달과 그에 따른 체계적인 징발과 수탈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나치 정권의 교묘한 군대 운영 방식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즉, 군대에 소요되는 비용은 독일 국민과 제국 재무부가 전부 대는 것이 아니라, 제국군이 국외에 주둔하게 될 경우, 현지 주둔 비용을 점령 지역의 국가가 철저히 부담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서 언급되는 벨기에의 경우, 독일군의 주둔 비용을 대기 위해, 국가 차원의 예산 확보가 필요했습니다. 때문에 벨기에를 관할하는 독일 관료가 본국에 '벨기에의 악화된 재정'을 보고하기도 했습니다.&nbsp;<br>지금도 독일인들에 대한 여러 이미지들 가운데, '철저한 계산성'은 꼭 언급될 정도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당시의 나치 정권 역시, 돈과 재정에 관련된 문제 만큼은 매우 철저했는데요. 유럽 내에서 자신들의 평판과 합리적인 외양 유지를 위해, 자신들의 통화인 마르크화 뿐만 아니라, 현지 통화로도 비용을 받는 식의 복잡한 계산을 거쳤습니다. 이는 여기에 소개된 벨기에, 네덜란드, 비시 프랑스 정부 역시, 이러한 쳬계에 놓여 있게 됩니다. 특히, 이 시기에 개발된 '새로운 지불 수단'인 제국신용금고 증서 (RKK) 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RKK 증서는 마치 지폐처럼 생겼는데 50페니히부터 50마르크까지 다양한 액면가로 발행"되었습니다. 일종의 어음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는 제3제국 재무부가 보증하는 어음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특히 독일에 점령된 프랑스 은행들은 이 RKK 증서를 프랑 화(貨)로 교환하도록 하는 '강제 법령'이 시행되었습니다. 이는 점령국을 아주 철저하게 수탈하겠다는 나치 독일의 계산이 기저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1939년 9월 3일, 당시 독일 병사였던 하인리히 뵐은 "25 마르크라는 엄청난 급여"를 어떻게 써야 될지 모르겠다고 쓰기도 했는데요. 전쟁 초기에 독일 병사들은 한 달에 최대 50마르크까지 송금 받을 수 있었는데 가족이 육군 우편서비스를 통해 돈을 보내면 병사들은 주둔한 국가의 통화로 지급 받게 됩니다. 또한, 주둔 비용이라는 명목으로 병사들에게 들어가는 급여와 계속 늘어나는 가족들의 송금액은 현지 쇼핑 매대를 동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나치 역시, 독일 병사의 사기 유지를 위해, 이러한 쇼핑을 묵인했고 이렇게 보내진 유럽 각지의 상품은 가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동시에, 독일 내에서 '암시장'이 열릴 정도로, 전쟁 특수를 누리게 됩니다. 헤르만 괴링은 이러한 병사들의 복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암시장의 존재까지도 묵인할 정도였습니다.<br>이러한 가운데, 1941년 12월, 나치당의 이데올로그 알프레드 로벤베르크는 파리와 그 밖의 "서유럽의 모든 점령지"에서 "도주했거나 도주 중인 유대인들의 가재도구를 몰수"하자고 제안합니다. 이는 곧 히틀러에게 승인되어, 유대인들에 대한 '최종 해결'에서 군에게 국한된 책임을 반박하는 사례이기도 했습니다. 독일 적십자사 총재였던 쿠르트 폰 베어는 "침구, 식탁보, 리넨, 도자기, 식기, 은 식기, 가전제품 등 희소한 생활용품의 배분"을 총괄합니다. 이들 물품은 배분의 첫 작전에서, 연합군의 폭격으로 피해를 입은, "오베르하우젠, 보트로프, 레클링하우젠, 뮌스터, 뒤셀도르프, 퀼른, 오스나브뤼크, 함부르크, 뤼베크, 카를스루에 등지"로 보내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생활 용품을 강제 징발하여, 독일인들에게 배분한다"는 아이디어는 실로 끔찍할 정도입니다. 가스실에서 최종 처분을 당한 수많은 유대인들의 재산을 괴링이 강조한 '순수한 아리안들'에게 전리품처럼 배분된다는 독특한 행정 체계는 당시에 수혜를 입었던 독일인들이나 그들의 후손들이 히틀러와 그 일당들이 벌인 '유대인들의 절멸'에 어떠한 감정을 가지게 될지 짐작하게 만드는데요. 이때의 혜택을 전해 들었거나, 자신의 친족이 그 해당인 일 경우, 결코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들의 말살'을 대하는 독일인들의 양심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대단할 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역사의 실체적 진실은 그 이면을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매번 맨 얼굴을 드러내는 것만 같습니다. 잔인할 정도로 말입니다.<br>1940년 5월, 벨기에를 신속히 점령했던 독일 군부는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 원수 명의로 "유대인을 경제 영역에서 신속히 배제하고, 유대인 기업의 재고 물품은 군이나 제국을 위해 처분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또한 나치는 점령지 국가였던 벨기에와 네덜란드 등을 공범으로 끌어들이는 형태로 "네덜란드 금융 관료들을 공범으로 끌어들이고, 다소 억지 논법이긴 하지만 네덜란드의 유대인 재산을 직접 몰수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독일군이 튀니지에 상륙하자마자 튀니지의 여러 유력 유대인 인사들을 체포했습니다. 이들 튀니지 유대인들은 공군 기지 건설에 투입한 노동자들을 유지하는 비용으로 3,100만 프랑이 넘는 돈까지 부담해야 했습니다. 결국 나치 정권은 유대인들을 절멸로 이끌기 전에, 이들 모두가 독일 민족과 정부에 '속죄금'을 낼 필요가 있으며, 독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 파리 내의 유대인 재산 몰수를 앞선 속죄금 납부의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저자는 본문에서, 이 속죄금의 의미와 그 명분을 좀 더 깊이 있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당시의 유대인들이 독일이 벌인 전쟁에 무슨 속죄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이미 여러 사회에 동화하여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어떤 사회적 해가 되었는지 그저 궁금할 따름인데요. 설사 이들이 큰 해가 되었다 하더라도 '즉결 처분'과 다름 없는 조직적 살해를 당해야 될 그 근거가 무엇인지도 여전히 의문입니다. 또한 이들에 대한 짐승과 다름 없는 취급과 인간 이하의 학대 및 철저한 축출에 대한 어떠한 정당성도 없는 전쟁 범죄에 대한 판단은 그 죄과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nbsp;프랑스 정부 역시 이러한 속죄금 징수 명분에 따른 이해를 공유할 수 있도록 부추겼는데요.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정부에 대한 속죄금과 관련된 나치의 획책 또한 동일했습니다.&nbsp;다만 독일군이 그리스를 점령했을 당시, 살로니카에 있던 유대인들, 총 4만 6000명을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까지 수송하는 데 소요된 193만 8,488마르크를 누가 부담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재차 느끼는 것이지만 실로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미 글의 지면에서,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로 수송될 때, 이들이 먹을 식량과 식수의 제반 비용까지 쏠쏠하게 챙겼던 것이 저 나치들인데, 앞선 일례로 밝혀진 친위대와 살로니카 군정 사령관의 비용 논쟁은 이들이 얼마나 양심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괴물들이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br>자신의 이 논저를 관통하는 저자의 일관된 주장은 이렇습니다. 과거 제3제국을 통치했던 나치들 및 나치주의자들이 그저 인종주의에 눈이 먼, 미친 자들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된 현실 인식을 갖고 있던 자들이라는 규명된 본질이었습니다. 즉, 이들은 독일 전체를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논리 하에 국가를 운영했고, 특히 국내 인플레이션 관리에 철저한 계산을 기울였으며, 국가 재정에 소요될 수 있는 대체 수단이 있다면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독일인들을 마치 프리드리히 니체가 묘사한 것처럼, 아리안 민족이라는 우위의 인종적 이데올로기 자체에 몰입한 역겨운 국가적 정책을 도출시켰지만, 그보다 그 안의 본심은 철저히 이익적이고 계산적이었다는 면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소위 참혹한 '유대인 최종 해결'은 단순한 인종적 배제 및 강제적 분리에서가 아니라, 유대인 전부를 철저히 이용할 수 있겠다는 합리적 숙고를 통해 실행된 통치 행위 과정 그 자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금니'까지 모조리 축출되고, 가스실로 보내져 그 시신마저 화장되는 유대인들의 비참한 현실에 몇 번이나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이런 서사가 제법 익숙한 저에게도 말입니다.&nbsp;글의 후반부인 11장에서 노골적으로 명시되지만 "독일과 피점령지의 경제 관료들이 유대인 자산을 전시 국채로 전환하여 유대인들을 마치 참전국이나 피점령국의 채권자로 만드는 것" 자체는 그저 눈속임에 불과한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역겨운 짓이지만 이들 모두가 "집단학살의 결과로 직접적 이익을 얻었다는 사실과 그로인한 집단 학살의 성공에 마찬가지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설명은 그만큼 괴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7장을 거쳐, 이내 등장하는 "모두가 이익을 거뒀다"는 문장 자체는 이러한 점을 여실히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nbsp;<br>이런 일관된 저자와는 달리, 역사학자 애덤 투즈는 괴츠 알리의 이해가 때로 과장되었다고 생각한다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언급 역시 저자가 인용하기까지 하는데요.&nbsp;알리는 전시에 나치가 끝내 유대인들의 재산을 통해, 거둬들인 직접적인 세수 증가가 70%에 달한다고 판단했지만, 투즈는 그것이 과장된 수치라고 밝혔습니다. 물론 투즈가 제시하는 수치는 당시 제3제국의 국가 채무를 모두 포함하여, 제국의 국가 재정 비율을 따지게 될 때, 도출될 수 있는 수치이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그저 외형적 숫자가 아니라, 그만큼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의 '사후 재산'에 대한 철저하고 불법적인 수탈에 확정적인 이익을 얻었다는 진실입니다. 많은 공범들을 양산하면서 까지 저들은 매우 기민하게 움직였다는 점일 텐데요. 저는 그런 측면에서 괴츠 알리의 이 논저가 많은 이들에게 읽혀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현지 유럽 사회에 동화된 많은 유대인들을 아무런 죄도 없이, 편의적으로 인종 청소에 나서, 사후 그들의 생활 집기, 옷, 귀금속 등은 물론 채권과 증권 및 현금 자산까지 남김없이 뽑아낸 히틀러와 그의 정권에서 부역한 자들의 죄과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이 책의 자료와 나치 정권의 핵심 관료들의 행적등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현재의 독일 국민들이 어떠한 죄업 위에 국가를 다시 재건하게 되었는지, 이를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대한 사과 뿐만 아니라 명확한 죄를 이들 모두가 재인식할 필요는 충분히 있어 보입니다.&nbsp; &nbsp; &nbsp; &nbsp;<br>끝으로 독일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유대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나치의 복잡하고도 일관된 작업은 현재 우리 역사계에 있어 단순한 인종주의적 망상 또는 극도의 나르시시즘적 실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어떤 역사학자들은 이를 1차 대전 전후로 폭발적인 폐쇄성을 드러냈던 민족주의의 배타적 발현의 한 사례로 제시하고 있기도 한데요. 저는 10장에서 다시금 드러낸 유대인들의 마지막 행로, 즉,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이들의 삶이 강제적으로 끝나게 된 진정한 연유를 밝히는 것이 우리 세대를 포함한 이후 사람들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 역시도 "모든 연구자들이 주목해야 할 문제는 그동안 알려진 대중적인 이데올로기 외에 어떠한 구조적 요인들이 독일군으로 하여금 유럽 대륙에서 유대인을 제거하려 하도록 만들었는가"를 규명하는 일이라고 그 과제를 11장에서 담담히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전유럽에서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게 되는 과정에서 독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지의 당시 경제 관료 및 현지 정책 관련자들의 책임이 적지 않다는 사실 자체는 유대인 절멸과 이들의 불법적인 재산 확보에 대한 공통의 범죄를 드러내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기간에 그리스에서 유대인들에게 몰수된 최종적 금 수십 톤이 증발된 사실은 이처럼 분명한 증거로 남았습니다. 이것을 파헤치기 위해서라도 역사가들의 새로운 의무로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의 명분은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nbsp;<br><br>- 이미 몇 가지 가설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던, 당시 중립국 스위스의 막대한 돈세탁 가능성을 마찬가지로 이 책을 통해 다시 고찰해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NARA)의 자료가 당시 나치가 약탈한 유대인 출처의 금이 전쟁 중 독일 제국 은행에서 스위스 국립은행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이 확인 되기도 했죠. 이 나치 골드에 대한 스위스 당국의 책임 있는 발언이 나오지 않고 있는 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nbsp;&nbsp;<br>&nbsp;&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137/59/cover150/k11213136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1375955</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자유의 길 - [자유의 길 - 경제학은 어떻게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510845</link><pubDate>Sat, 12 Sep 2026 03: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51084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72038649&TPaperId=1751084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324/60/coveroff/k07203864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72038649&TPaperId=1751084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자유의 길 - 경제학은 어떻게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a><br/>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이강국 옮김 / arte(아르테) / 2025년 04월<br/></td></tr></table><br/>조지프 유진 스티글리츠는1943년 2월 9일, 미국 인디애나 주 레이크 카운티의 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나다니엘 데이비드 스티글리츠로 보험 판매원이었으며, 모친인 샬럿 스티글리츠는 퍼듀 대학의 교사였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 애머스트에 위치한 사립 인문 대학인 애머스트 대학을 졸업한 스티글리츠는 이후 MIT에서 석사 과정을 밟게 됩니다. 1965년이 되자 미국 국립과학재단 (NSF) 의 연구 보조금을 받은 일본인 경제학자 히로후미 교수의 지도 아래에서 연구를 하기 위해 시카고 대학으로 옮겼으나, 1966년부터 1967년까지 MIT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고, 그 기간 동안 MIT에서 조교수를 겸임하게 됩니다. 명예로운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구를 시작했고, 그곳에서 그는 케인스와 거시경제 이론에 대한 남다른 이해를 갖게 됩니다. 이후 그는 예일, 스탠퍼드, 옥스퍼드, 프리스턴 등을 거치면서 교수직을 역임하는데요. 2001년부터 스티글리츠는 컬럼비아 대학의 경영대학원, 경제학과, 국제공공정책대학원 (SIPA)에서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이런 그는 전세계 학자들로부터 신케인즈주의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의 경제 이론을 그런 몇 단어로 정의할 수 없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의 긴 이력들 가운데,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세계은행에서 수석 부사장 겸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특히 2001년에는 정보의 비대칭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연구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합니다.&nbsp;2008년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가 발생하자 오바마 대통령에게 경제 자문을 제공했지만 그는 당시 오바마 행정부의 은행 구제 계획과 관련된 실무자와 그의 조직이 당시 월스트리트와 한 배와 다름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이를 서슴없이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 10월에는 유엔 총회 의장의 요청으로 '2008년 금융 위기의 원인과 해결책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위원회의 의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특히 주류 경제학을 신봉하는 여타 경제학자들과는 달리 스티글리츠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이것이 구축한 '세계화'에 대한 분명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고, 특히 만연한 경제적 불평등 문제와 OECD의 선진국 클럽이 (UN 이외의) 세계 경제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개도국들에게 벌이고 있는 초법적 행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Road to Freedom : Economics and the Good Society"로 지난 202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br>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그동안 접했던 경제학자들 가운데 스티글리츠처럼 신자유주의를 직접적으로 비판한 학자가 있었는지, 책을 일독한 후에 잠시 고민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저자인 스티글리츠는 글의 13장 서두에서, "나는 현재가 신자유주의의 실패가 너무도 명백해서 신자유주의가 폐기되는 역사의 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었는데요. 이미 다른 학자들의 입에서 언급되기도 했지만, "이익은 마땅히 사유화하고 부채와 실패는 공공으로 돌린다"는 2008년 이후의 신자유주의자들의 저 두꺼운 얼굴을 드러내는 표현이  저에게는 마치, "신자유주의의 제2막"으로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일전에 마틴 울프도 인정했고 파리드 자카리아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만, 2008년의 대위기 시점으로 월가의 경제 엘리트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 그동안 자신들이 주장했던 '교리'에 완전히 반대되는 7000억달러에 이르는 '공적 자금'을 수용하게 되면서, 사실상 신자유주의는 죽었다고 봐야했습니다. 하지만 스티글리츠의 도출대로 이 신자유주의가 결국에는 포퓰리즘이 성장하는 데 일조하게 되었으니, 그 자체로 쉽게 믿겨지지 않는 역사적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이 그 왜곡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br><br>1970년대 혹은 1960년 후반부터, 미국의 공공지출 증가와 기업들의 영업 이익의 급격한 감소로 말미암아 이것의 타개책이 필요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상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에 대한 완전 일소는 물론, 그동안 미국에서는 노동 조합을 성공적으로 안락사 시킴으로써 부유층과 기업 경영자들의 요구가 정치권에 직접적으로 먹힐, 제반 사항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미 공화당과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당시 자유 시장주의자들의 연계 역시, 백악관의 주인이 바뀌게 되자, 전반적인 체제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이 글에서 스티글리츠의 분석대로 처음에는 시장을 완전히 자유롭게 만들고 (이면에는 독점 자본주의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 파이를 키우게 된다면 사회 역시 혜택을 입을 수 있다는 식의 낙수 효과 이론을 설파하게 됩니다. 물론 이 '낙수 효과'는 명백히 허위임이 밝혀졌지만 당시 그 주장의 반향은 분명했습니다. 당시 밀턴 프리드먼을 직접 대면했던 스티글리츠는 프리드먼에게 그가 왜 그렇게 생각하고 주장하는지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결국 제시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와 프리드먼이 어떤 건전한 토론이 되었을지는 불명확하지만 이미 당시에 '거두'였던 프리드먼과 이제 갓 학계에 나온 스티글리츠의 위상은 명백하게 달랐을 겁니다.<br><br>저자인 스티글리츠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여실히 주장했던 '자유'와 우리의 일반적인 '자유'가 완전히 다른 개체임을 증명합니다. 그의 책에서 수차례나 등장하는 문장인 "한 사람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부자유이다." 혹은 "일부에게는 자유를 주고 일부에게는 자유를 빼앗는다"거나, "나의 자유는 결국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과 같다"는 유사한 맥락의 서사는 경제학자인 그가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미 11장에서 명시되고 있지만 미국은 신자유주의와 관련된 자유 시장과 작은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일방적인 내면화가 강고하여,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분석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미국인들의 독특한 정서, 즉 자유에 대한 과도한 감정 이입을 하는 동시에, 개인주의와 이기적 탐욕, 및 욕망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서사가 이들이 말하는 자유와 맞물려, 아주 잘 들어먹혔다는 점에 있습니다. 일전에 크리스 헤지스와는 '복지'와 관련된 미국인들의 부정적 서사를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요. 마틴 길렌스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요약하자면 "정부의 돈으로 살아간다"는 그 대체할 수 없는 인식적 거부감은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 혹은 좀 더 뒤로 가서 펜데믹 시절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같은 최근의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nbsp;<br><br>물론 신자유주의자들의 '자유'는 정부의 개입 없는 원천적인 시장의 자유를 중시하는 가운데,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자유는 체제를 위해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그런면에서 샹탈 무페가 말한 우파와 신자유주의자들의 결탁은 그것대로 이익화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스티글리츠 역시, 글 후반부에서 "보수 우파의 승자 독식 사회에 대한 지지"는 부와 권력을 독점한 계층에게 있어서 "작금의 체제는 결코 불만일 수 없다"는 것을 외려 더 밝히는 꼴이라고 보여집니다. 미국 사회는 이미 신자유주의의 대한 내면화가 정치 및 사회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고, 미국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무엇보다 "충분한 경제적 소득 위에서만 자유가 주어질 수 있다"는 환경에 놓여 있음에도 그저 시민들이 뜬구름 잡는 '자유 타령'으로 일종의 관념화로 이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스티글리츠가 전체적인 논증에서 신자유주의가 결국에는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하고 말았는데, 미국 사회에서 이 부분에 대한 건전한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식으로 치부되기 일상이었습니다. 더욱이 월스트리트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 미국 재무부의 단면을 통해, 저자인 스티글리츠는 "재무부가 마치 월스트리트의 한 지점으로 여겨질 정도이다"라고 냉소하기까지 했는데요.&nbsp;물론 이러한 사회적 기저 양상은 지금도 분명한 모습인데 신자유주의 자체에서 이 체제가 요구하는 '시장 자유'라든지, 자유 무역, 공정한 경쟁과 관련해서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인물의 출현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예측할 수 없는 다른 양상으로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에 대해 스티글리츠는 기존의 세계 경제에 관한 자유 무역의 기조가 도널드 트럼프로 인해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고 후술 하고 있었습니다.<br>이처럼 2장에서 저자는 "현실에서 신자유주의는 손실이 사회화되고 이익은 사유화 되는 모조 ersatz 자본주의"라고 밝히고 있었는데요. 더 빠른 성장과 경제적 안정은 이미 허위임이 드러났지만 펜데믹이나 기후 변화 혹은 시장의 독점화와 같은 외부효과로 인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이론상에서의 아주 혁력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자본주의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효과에 대한 스티글리츠의 입장은 명백합니다. 경제학이 숫자에 기반한 설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맞다면 외부효과 자체는 통제할 수 없는 변이이기도 합니다. 이는 숫자로 분석하거나 더 나아가 통제선 안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더군다나 4장에서, 보수 우파나 주류 경제학 (즉, 신자유주의)이 인간의 본성을 오도했지만 여기서 드러난 바와 같이, 다수의 시민들이 '계몽된 사익'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공공의 이익에 관심을 갖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저는 그래서 일찍이 밀턴 프리드먼이 정치적 자유 만큼이나 경제적 자유도 중요하다는 인식의 맥락이 그 출발점에서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치적 근본에 대한 분석이 제대로 이뤄지지도 않은 시점에서 시장을 옹호하고자 경제적 자유를 섣부르게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스티글리츠의 말처럼 경제학자들과 보수 우파가 생각하는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작위적인지 이처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애덤 스미스를 이렇게 편파적으로 해석한 것이 시장과 경제를 위에 놓고 그 밑에 인간과 사회를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물론 극우 포퓰리즘이 등장한 이 시점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과연 무엇에 어떤 목적으로 봉사했는지는 어느 정도는 명확하지만 경제학이 인간을 초월한 물리학과 같은 위상을 바란다는 일부 경제학자들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이상하게도 소름끼치는 그림이 하나가 절로 그려지게 됩니다. 시장은 결코 종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nbsp;<br>앞서 간략하게 언급했지만 신자유주의들의 반복되는 주장은 원천적으로 정부의 시장 개입을 차단하고 이에 사회가 경제에 요구하는 것들을 마땅히 시장이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메가폰의 외침'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글의 5장의 비판적 논증, 특히 금융 자본의 과도한 지대 추구, 그리고 이어지는 11장의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주의가 초래한 사회적 위기 등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미 저자인 스티글리츠는 "막대한 소득을 올리고 있는 부유층의 소득 상당 부분이 도덕적 정당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위 계층의 불평등 한 소득 역시, 도덕적 정당성이 없다고 단언하고 있었는데요. 최근에 읽었던 케빈 필립스의 글도 신자유주의가 종래에 없었던 금융의 기술적 시도인 증권화와 더불어, 금융 자본주의의 기술적 맥락 등은 결국 사회의 심각한 양극화를 불러 일으켰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9장에서 도출된, "엘리트들 가운데 일부가 미디어를 장악하여 사회적 메타내러티브를 형성하는 데 불균형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주장을 강조합니다. 즉,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사회 전반을 심각한 양극화와 경제적 불평등 속으로 몰아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주류 산업이 된 미디어 업계가 미국 헌법이 그토록 강조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중요한 비판적 기능을 상실하게 된 원인이 바로 시민들이 체제에 순응하게끔 교묘한 논법을 지속하고 있는 이들 미디어 환경도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부분은 약간의 논외이지만 최근의 읽은 캐서린 스튜어트의 글에서 현재 미국 내 극우주의자들의 자아 정체성이 너무나 비대하여, 소위 "헌법 위에 자신들이 있다"는 식의 기술이 보여주는 실체는 마치 주류 엘리트들과 '그들이 원하는 체제에 대한 해석'이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작금의 미국 내 현실에 대해 스티글리츠는 글의 여러 부분에서. "현재 미국 정치에서 포퓰리즘의 등장은 이 신자유주의가 기여한 바가 크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었습니다.<br>끝으로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이라는 저 아름다운 표현은 결국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그저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이기적이고 물질주의적이며 종종 정직하지 못한 시민을 만들어 냈으며 신뢰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3부 초입의 문제는 결코 과장이 아닐 겁니다. 저자는 이미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주장의 명확한 근거나 객관성 없이 이들이 레토릭에 능한 왜곡된 달변가임을 밝히기도 했었는데요. 글 중간에 '위선이 판치는 사회'에 대한 스티글리츠의 평가는 특히 엘리트 계층이 자신들의 부와 권력에 대한 어떠한 정당성 내지는 필수불가결한 원칙으로 포장하는 등의 위선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는 노엄 촘스키의 말마따나 다수의 시민들의 이익에 봉사하지 않는 지식인들의 존재는 물론, 신자유주의가 개인의 이기심과 욕망을 마치 '좋은 것'으로 부채질 하면서 기본적 절제를 잃어버린 엘리트들의 존재는 1980년 이후로, 시민의 평범한 삶을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습니다. 저자는 글의 서두에서 밝힌, "(신자유주의자들과) 우파의 자유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는 분명한 분석이 바로 이 논저의 제목이 밝히는 바를 명확히 짚어냈다고 보여집니다. 또한, "사회의 일부 사람들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권력에 굶주려 있는 만큼", 신자유주의가 인간의 전반적인 본성을 너무 쉽게 치부했으며, 밀턴 프리드먼이 대중을 향해, 교묘하게 말을 건넨 것처럼 소위 많이 배웠다는 지식인들과 이들의 일부가 스스로 부역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숙고할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또한 저자인 스티글리츠가 자본주의 내에서 과도한 지대 추구의 위험성을 목도한 시점의 경계심과 도덕성의 배제를 이뤄낸 '이기심의 권력 추구'가 신자유주의를 더욱 관념적으로 강화시켜 나간 것은 분명해 보이며, 앞선 미국 내 교육이 이런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그들만의 '자유'와 시민의 삶 전반을 '그 안의 삶'으로 교묘하게 내면화 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를 단순히 경제 기술적 측면에서만 해석하려는 자들에게 마땅히 경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nbsp; &nbsp; &nbsp; &nbsp;&nbsp;<br><br>- 일전에 지그문트 바우만이 경제학이 시민들에게 중요한 학문으로 자리매김한 것이 1세기도 되지 않았는데 많은 이들이 이 '경제학'을 우리가 비판할 수 없는 신성 그 자체로 여기고 있다는 점을 제가 보기에는 이를 안타깝게 바라봤던 것 같습니다. 저는 스티글리츠가 좋은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언급이 이상하게도 앞선 바우만의 시선과 오버랩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자가 비판적으로 분석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반이 좋은 사회 더 나은 삶에 있어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는데요. 그럼에도 이 신자유주의가 도널드 트럼프가 등장하고 나서야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분석된 이해가 뭔가 역사의 아이러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다른 학자들과 달리 저자는 글의 말미에서 여러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었는데요. 그 부분은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nbsp; &nbsp;<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324/60/cover150/k07203864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3246012</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미치광이 전략 - [미치광이 전략 - 트럼프는 어떻게 세계와 맞서는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489897</link><pubDate>Wed, 02 Sep 2026 21: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48989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0849&TPaperId=1748989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54/57/coveroff/k69213084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0849&TPaperId=1748989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미치광이 전략 - 트럼프는 어떻게 세계와 맞서는가</a><br/>짐 슈토 지음, 이종민 옮김 / 21세기북스 / 2026년 08월<br/></td></tr></table><br/>1970년 3월 10일에 태어난 짐 슈토는 이탈리아와 아일랜드의 혈통으로, 부친은 어니스트 슈토이고 모친은 리즈 슈토입니다. 그는 뉴욕 맨해튼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소재한 남학생만의 예수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2년에 중국사학을 전공으로 예일대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켄터키 주 루이빌의 WHS-TV에서 영화 편집자로 일했던 어머니의 뒤를 이어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주간 시사 토크쇼인 PBS의 "The Student Press"의 진행자 겸 프로듀서로 언론계의 경력을 시작합니다. 또한 그는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범 아시아 경제 뉴스 채널인 아시아 비즈니스 뉴스 Asia Business News, ABN의 홍콩 특파원으로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을 취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98년에 ABC에 입사하여 당시 펜타곤을 드나들며 취재에 나섭니다. 2007년에는 미얀마 내부에서의 잠복 취재로 뉴욕의 롱아일랜드 대학에서 매년 수여하는 언론상인, "조지 폴크 텔레비전 보도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외에 그는 공무직으로 오바마 행정부 시절 주중 중국 대사였던 게리 로크의 비서실장 겸 수석고문으로 일했으며, 2008년에는 외교협회의 종신 회원으로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Madman Theory : Trump Takes on the World"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6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br><br>슈토의 이 논저는 일종의 르포르타주 형식의 글로, 지난 트럼프 1기의 외교 정책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당시 정부에 관여한 관료들과 정치인들을 직접 인터뷰하여 그 근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미 책 제목과 관련된 의미심장한 부제로 대략 논증의 흐름을 예상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언론인 특유의 집요한 탐구가 엿보여 개인적으로는 흥미롭게 글을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국내외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1기 행정부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내놓은 글들이 있어왔지만 슈토의 이 글 만큼 도널드 트럼프의 민낯을 공개한 논저는 일찍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더욱이 1기 내각에 참여했던 참모들이 트럼프에 대해 증언하는 내용들은 충분히 사실적이고 그가 벌였던 외교 정책과 군사적 실패에 대한 거의 가감없는 증거와 분석이 수반되어 있어, 지금의 도널드 트럼프 2기를 규명하는데 어느 정도 적잖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br><br>이 책을 일독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제가 자주 언급했던 스티브 배넌 만큼이나 1기 당시, 무역 고문을 지낸 피터 나바로의 영향력이 트럼프에게 비교적 지대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제가 국내에 번역된 『웅크린 호랑이』의 부족한 서평을 쓰기도 했습니다만 나바로가 단순히 반중 인사로 뭉뚱그려 보기에는 아주 명확하게 자신만의 중국을 보는 시각이 있었습니다. 즉, 과거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중국을 세계 무역 기구의 틀 안에 자리를 마련하고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중국의 경제 발전을 견인한 것이 당시 정치경제 엘리트들의 패착으로 보는 점의 일반적인 극우 포퓰리즘적 시각이 유독 제 눈길을 끌었는데요. 바로 이 지점에서 나바로가 왜 트럼프의 지근거리에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스트들은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를 불신하고 그러면서 여기에 대한 아무런 대안 없이, 그저 이 시스템을 비난하는 것으로 일관하는 '선동'에 나섭니다. 피터 나바로 역시, 신자유주의에 협력했던 리버럴들을 포함한, (물론 이를 본격적으로 추인하고 주입시킨 것은 과거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이지만) 당시 세계화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에 나서면서 오늘날 중국의 부상을 당시 엘리트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수사를 어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사람이 소위 '중국으로 인한 미국 경제의 추락'이라는 세계관에 상당한 의견 일치를 보이는 부분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br><br>책 제목이기도 한, 이 미치광이 전략은 과거 리처드 닉슨이 베트남 전쟁과 관련해, 미국이 마땅히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식의 외교적 강경파 이상의 수사로, 오랫동안 닉슨은 이 '미치광이 전략'을 자신의 전매특허의 수사로 만들었지만 이는 포커판에서의 '블러핑'과 같은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작 자신이 키신저를 통해 드러낸 진심 어린 의도 자체는 베트남에 핵무기를 쏠 이유는 없었을 겁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당시의 닉슨을 얼마나 분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닉슨처럼 혼잡한 국내 정치와 선을 긋고 그것이 무책임한 협박이라도 할 말을 하는 소위 '강한 지도자'의 면모를 동경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가 헝가리의 극우 포퓰리스트 빅토르 오르반을 누구보다 존중했다고 나오는 묘사는 마치 "다른 방식의 강력한 지도자"를 부지불식간에 떠올리게 만듭니다. 특히 글 서두에 저자인 짐 슈토는 자신과 인터뷰를 한 모든 사람에게 "가까이서 겪어본 대통령의 정신 상태를 진심으로 의심해 본 적이 있느냐"라고 묻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는 했습니다. 여기에는 "참모들의 조언과 충고를 의도적으로 그리고 거의 반사적으로 무시하는 태도" 자체로, 정작 중요한 외교 정책을 앞두고 소위 '트럼프식'의 강력한 자기확신적 행위를 비판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근거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글에서는 이미 수차례 이 트럼프의 부정적인 자기 확신적 태도에 기반한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정책 결정 과정이 거의 가감없이 폭로 되기에 이릅니다.<br><br>이런 트럼프를 좌우하고 하고 있는 세계관 가운데 그가 가장 확신에 사로잡혀 있는 생각은 "미국이 그동안 이용당해왔다"는 서사입니다. 마찬가지로 앞선 피터 나바로 역시 같은 나토 동맹인 "독일이 미국의 동맹이 아니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독일과 같은 국가는 우리와 경제적 경쟁자라는 인식을 강조하면서 다소 모호한 태도로 일관합니다. 미국 내 극우들은 현재의 동맹 관계를 논하면서 과거 소련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확고한 동맹이었다는 식으로 그동안 70여년간 이어져 온 미국의 동맹국과 그리고 협력국과의 전반적인 관계를 재구축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이 어떠한 명확한 외교적 대안을 가지고 저런 발언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이 보기에 미국의 외교 정책은 바뀌어야 하지만 냉전 시기를 포함한 과거 외교 담론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주된 행태인데요. 그래서 익명을 요구한 트럼프 1기의 전직 참모는 트럼프를 일컬어, "동맹 관계를 대차대조표 장부처럼 관리하는 꼴"이라고 냉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에야 표면에 드러났지만 이때부터 캐나다를 향한 트럼프 무리들의 불편한 감정은 독일과 같은 나토 조약에 묶인 동맹국들과의 소위 "안보의 무임승차론"을 강화시킨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1950년대부터 미국은 저런 동맹국들에게 이용당해왔다는 서사의 핵심이 트럼프와 그를 따르는 트럼프주의자들의 핵심 인식이었습니다.&nbsp;<br>저자인 짐 슈토는 국가의 대외적으로 중요한 정책인 외교 문제를 대통령의 자리를 사적 지위로 전락시킨 트럼프의 아무런 근거도 없는 소위 자기 확신적 태도는 과거 부동산 사업 이력으로 말미암아 국가간의 관계에서도 이득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식의 가치관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정치에 들어서기 이전에 정치인들로부터 받은 굴욕으로 말미암아 기존 정치 자체에 냉소하게 되고, 그런 연유로 오로지 자신 만을 믿게 되는 일련의 오만하고 경직된 사고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그럼에도 3장에서 분석되는 러시아와 그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푸틴에 대해 보이는 트럼프 자신의 무력감은 잘 설명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지난 대선에 러시아가 개입한 것은 기정사실이었습니다. 심지어 이에 대해 CIA가 인정을 하기도 했는데요. 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선거 개입은 그 나라의 정체를 뒤흔들 정도로 매우 심각한 문제였지만 트럼프는 그런 푸틴에 대해서 만큼은 비굴한 자세로 일관합니다. "푸틴의 비위 맞추기"라는 수사로 드러나듯, 2018년 7월, 푸틴과 러시아에 대한 트럼프의 굴욕적인 자세는 전세계에 알려지게 됩니다. 지난 2016년 대선에서 러시아 선거 개입에 대한 푸틴의 변명을 전격 수용한 트럼프는 공동 기자 회견에서 이런 푸틴의 변명을 일절 수용하게 됩니다. 더욱이 저자는 이런 러시아에 대한 결정에서 트럼프는 "자신이 이끄는 행정부의 공식 대러 정책을 번번이 거스르는 것"으로 이어졌다고 일침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과거 참모들은 "트럼프가 푸틴이 가진 권력을 선망하고 그를 향한 찬사는 진심"이라고 폭로하고 이런 연유에서, "그가 푸틴의 여러 면모에 깊이 매료되어 있다"는 전체적인 평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nbsp;<br>이와는 확연하게 반대로 트럼프가 우크라이나에게 보인 태도는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젤렌스키와 그의 국민들에게는 굴욕적인 태도 그 자체였습니다. 커트 볼커 우크라이나 담당 특사, 피오나 힐 NSC 유럽, 러시아 담당 선임국장, NSC 소속 알렉산더 빈드먼 중령 등 우크라이나 문제를 담당하는 여러 고위 당국자가 우크라이나 측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젤렌스키가 트럼프와의 정상 회담을 간전히 원하는 상황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오로지 바이든 일가를 우크라이나와 엮으려는 열망에 트럼프는 사로잡혀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트럼프가 민주당과 그곳의 정치인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을 보였던 점은 다들 아는 유명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치적으로 대적의 위치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국익과 개인의 이해관계를 구별하지 못하는 점은 상당히 위험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젤렌스키에게 트럼프는 미국 정부가 주도하는 "대 바이든 조사"에 우크라이나 정부가 적극적으로 협력하라는 요구까지 하게 됩니다. 당시 미국의 전폭적 지원이 필요했던 젤렌스키는 이런 백악관의 태도에 백기 항복을 하게 되는데요. 그것은 "조 바이든 전 부통령과 그의 아들 헌터와 그 아들이 몸담았던 우크라이나 가스 회사 부리스마를 겨냥한 수사"에 착수하라는 요구였습니다. 에둘러 말하는 것을 전혀 모르는 미 연방 대통령이 타국의 대통령 면전에서 저런 요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부러워 해야하는지, 아니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자인 짐 슈토의 언급대로 트럼프는 대통령의 지위를 사익 추구의 발판으로 삼았다는 일종의 분석은 충분히 공감이 될 정도였습니다.<br>여기에 러시아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독재 국가에 대한 선택적 분노, 구별되는 적대감으로 이해될 수 있는 미국의 대 중국 정책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앞선 피터 나바로의 대 중국 인식과 마찬가지로 트럼프에게 있어서, 중국은 단순히 세계 무대에서의 정치군사적 대결 구도에서 뿐만 아니라, 주된 대립은 거의 경제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중국을 악마화하면 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저자의 질문은 명확합니다. 과거 1990년대 초반부터, 중국을 개방시켜 그들의 값싼 노동력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얻은 것은 서방 세계의 다국적 기업들이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맥락은 이러한 틀을 답보하고 있고 이런 체제 자체가 바로 세계화의 핵심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데이빗 코츠 심지어 마틴 울프까지 이러한 세계화의 과정을 분석하기도 했지만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중국의 개방에는 일정 부분 미국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신자유주의들의 예견대로 중국에게 경제적 번영이 이어진다면 자연스럽게 독재가 사라지고 자유화가 추동될 것이라는 기대는 완전히 무산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8년 전후까지, 중국은 미국의 기조에 따라 미국 시장에서 벌어들인 달러를 미국 국채에 재투자를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2008년 전까지 미국 국민들이 무분별한 신용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지점에는 FRB의 저금리와 통화 발행 때문이 아니라 막대한 중국계 자금이 미국에 유입되었기 때문입니다. 2001년부터 최근까지의 중국 경제 매커니즘이 무조건적으로 미국에게 해가 되었다고 보는 관점은 미국과 중국 경제가 서로 얽혀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글 5장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2019년 5월의 양국 실무진의 협상에서 당시 중국은 미국의 요구를 거의 들어줄 생각도 갖고 있었지만 막판 시진핑의 뒤집기로 말미암아 이후 협상과 대화 자체는 무산되기에 이릅니다. 이때부터 양국은 서로를 향한 관세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nbsp;<br>특히 이어지는 북한 김정은에 대한 트럼프의 일관되지 못한 태도, 그리고 동맹국인 한국에 희생을 강요하는 전반적인 이 시기 백악관의 행보는 우리 국민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의 비핵화 회담 자체의 무산이 볼턴의 책임으로 끝나게 되었지만, 이때 미국이 김정은을 제한적 타격을 가해 정권을 무너트리겠다는 계획까지 논의되었습니다. '코피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지만 나중에 이 작전으로 말미암아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수십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미 국방부의 분석 자료를 보고선 완전히 백지화가 되지만 만약 트럼프가 (현재 이란에 보이는) 그 즉흥적 태도로 미 공군에 의한 평양 폭격을 이도저도 없이 추진했다면 과연 문재인 정부라도 이를 막을 수 있었을지는 불명확합니다. 여기에다 오랜 동맹국인 한국에 미군 주둔비와 관련된 청구서를 실무자들을 포함한 압력을 행사해 우리 정부를 당혹하게 만든 사건에 대해, 저자와 그가 인용한 정치인들의 평가를 통해, "동맹국 한국에게 가하는 가혹한 처사", "동맹을 그런 식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분명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8장에서는 ISIS 격퇴과정에 놓여 있던 당시 시리아에서 섣부른 철군 논의는 전투에 나서고 있던 쿠르드인들과 거기에 조력을 하고 있는 미군들의 안전에 위협이 되는 동시에, 중동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미국 내부적으로 공화당 인사들까지 트럼프 대통령의 시리아 철군을 반대하기까지 했는데요. 결국 한 번의 번복을 거쳐, 시리아에서의 미군 철수는 완료됩니다. 이것의 내막에 대해서도 저자는 트럼프가 당시 튀르키예 대통령이었던 에르도안의 소위 감언이설에 넘어가, (물론 트럼프 역시도 아무런 고민 없이 철군하고 싶어했지만) 현재 시리아 북부 일부는 사실상 튀르키예의 영향력에 들어가 있는 상황입니다. 저자인 짐 슈토가 에르도안이 트럼프를 잘 구워 삶았다고 내심 그리 생각하고 있는지는 불명확 하지만 이 때의 철군은 과거 오바마의 행정부의 중동의 출구 전략 및 아시아 회귀라는 명목하에 이뤄진 이라크 철군과 동일한 패착으로 규정되기에 이릅니다.&nbsp; &nbsp;<br>끝으로 저는 도널드 트럼프를 통해 무엇보다 극우 포퓰리스트의 진정한 면모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독일의 나치가 평범한 사람들의 내면에서 저열한 측면을 끊임없이 충동시킨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 포퓰리스트들 역시 유사한 매커니즘을 갖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뤄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해 "노동자들과 저학력자들에게 분명한 피해를 끼쳤다"는 인식으로 표를 얻어, 엘리트 지배 체제 자체를 경멸하고 타파해야 하는 무언가로 지목했지만 정작 저들은 아무런 대안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은 그저 상상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입니다. 일전에 샹탈 무페가 말한 것처럼 "그저 권력 의지에 따른 권력 자체를 단순히 쟁취하려는 시도"에 있어, "개인의 욕망과 자신의 이해관계만이 중요하다면 그것의 결과는 사회에 득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경고는 충분히 귀담아 들을만 합니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는 이것을 명확히 설명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다시 한 번 느끼는 것이지만 인간 자체는 선동에 너무 취약한 측면이 있는데 이를 인간 본성이라는 미명하에 방치하게 된다면 자신의 인생 대부분과 그가 속한 사회 전반이 소수의 선동 정치인들에 의해, 시스템이 좌지우지 될 가능성이 현저합니다. 굳이 극우 포퓰리즘이라는 틀로 설명하기 보다는 이미 인류의 역사에서 우리는 그런 사례들을 이미 많이 목격했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nbsp;&nbsp;<br><br>- 이 글 2장에서, 한 전직 고위 참모의 입을 빌어 드러난 "한반도 긴장 상황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트럼프가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 배경 조차 전혀 알지 못해 충격을 받았다"는 내용은 저로서도 쉽게 납득이 되질 않았습니다. 우리나라가 미국에게 있어 저 서사모아나 나우루와 같은 지위의 국가도 아니거니와 특히 70년 동맹관계와 더불어, 우리측 인사들은 어디에서나 미국을 '혈맹'이라고 거의 자랑스럽게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혈맹 국가의 수반이 저 정도의 무지라니 저로서는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54/57/cover150/k69213084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545703</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나쁜 돈 - [나쁜 돈]</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477760</link><pubDate>Fri, 28 Aug 2026 20: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47776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285446&TPaperId=1747776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4/81/coveroff/8993285446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285446&TPaperId=1747776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쁜 돈</a><br/>케빈 필립스 지음, 이건 옮김 / 다산북스 / 2009년 04월<br/></td></tr></table><br/>케빈 프라이스 필립스는 1941년 11월 30일,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습니다. 필립스 가(家)는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및 잉글랜드 혈통으로 일찍이 미국으로 이민으로 온 이민자 집안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공화당에 매료되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대통령으로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런 유년 시절을 거쳐, 뉴욕시의 브롱크스에 소재한, 공립 특수 고등학교인 브롱크스 과학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미국 뉴욕 주의 해밀턴에 위치한 사립 인문대학인 콜게이트 대학에서 정치학 전공으로 졸업했고,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공립 연구 대학인 에든버러 대학에서 유학을 하기도 했습니다. 1964년에는 하버드 대학의 로스쿨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필립스는 초기 경력에서 뉴욕 출신의 변호사이자 자유주의 정치인이었던 폴 앨버트 피노의 보좌관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합니다. 1968년에는 리처드 닉슨의 선거 캠프에서 유권자들의 투표 패턴에 대한 전략가로 일했고, 여기서 미국 정치 내에서 보수주의 정치의 변화를 예측해 미국 정치학 분야의 영향력 있는 논저인, 『떠오르는 공화당 다수』의 초안을 만들게 됩니다. 선거 이후, 그는 닉슨 행정부 시절 법무부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지만 정치와는 선을 긋고, 나중에 작가와 평론가로서 활동을 하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몸담았던 공화당에 환멸을 느낀 필립스는 로널드 레이건 정부 당시, 더욱 확대된 부의 불평등에 대해 비판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특히 그의 여러 평론과 주지된 논점들 가운데 미국 정치가 현재 기독교적 근본주의에 가까운 신정주의적 행태로 변질되고 있으며, 일부 정치 가문들이 대를 이어 의회를 세습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한 바가 있습니다. 이외에 그의 개인적 삶은, 1968년에 마사 헨더슨과 결혼을 했고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뉴욕을 떠나 플로리다 주 네이플에 요양차 내려왔던 필립스는, 2023년 10월 9일, 알츠하이머 합병증으로 인해,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Bad Money"로 지난 200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9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출판사의 사정에 의해 절판된 상황입니다.<br><br>저자인 케빈 필립스의 지난 이력으로 보건대, 공화당 주류 정치에 있던 인물이 노선을 바꿔 정권과 지지 세력을 비판하기란 쉽지 않은 일임은 분명합니다. 그의 이 논저는 바로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글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런 저자가 6장에서, 과거 스페인 제국의 몰락을 언급하며, 당시 마드리드에 있던 귀족들이 부패와 사치에 빠져, 그 신대륙으로부터 축적된 그 많은 금과 은에도 불구하고 세력을 잃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재 미국이 처한 투기적 금융 경제와 정치의 무능으로 결합된 지속 불가능한 체제를 과거 스페인과 영국, 그리고 네덜란드의 사례들에서 분석하고, 2008년 즈음의 미국 경제의 몰락의 요인이 되었던 '주택 시장의 붕괴'를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현격한 사례들에 앞서, 저자는 "경제 엘리트들의 도덕적 해이"라는 개념이 2007년 이전에는 없던 것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었는데요. 즉, 철저한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이뤄진 미국 금융 시장에서 과거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돈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무조건적으로 나쁘다고 볼 수 없으며, (어쩌면) 시장이 합리적으로 탐욕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에둘러 말한 부분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필립스의 분석을 토대로 이 도덕적 해이라는 개념이 그 이전에는 생겨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해 본다면, 2008년의 뉴욕 발 금융 붕괴의 일차적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br><br>일전에 파리드 자카리아나 마틴 울프 등과 같은 이들이 2008년의 '대위기'에 대한 수많은 분석서를 세상에 내놓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언급된 내용 중 우선 미국 정치 역사에서 남북 전쟁 전후로, 북서쪽의 금융 엘리트들을 견제하기 위해 나섰던, 한때 민주당의 정당사가 인상 깊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1장에서, 찰스 긴들버거를 인용하며, "경기 순환과 절정기의 위기에서 발생하는 투기 열풍이 우려되며, 특히 금융 부문이 걱정스럽다. 경기과열이 모두 광기와 공황으로 이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패턴이 매우 자주, 그리고 매우 비슷한 형태로 발생하므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금융 부문의 투기적 성격에 대해 논하기도 했습니다. 일전에 전문가들은 의회 로비로 집중된 '글래스-스티걸 법'의 무력화를 제일 먼저 끄집어 내기도 했는데요. 저자의 관점은 이와는 약간 다르게 당시 FRB의 책임자 앨런 그린스펀이 실리콘 벨리의 IT 거품을 직면하자 금리를 내리며, 시장의 거품을 만들어냈듯이, 이 주택 대출 (서브프라임)의 과도한 투기적 증권화에 있어서도 역시나 전과 마찬가지로 실질적 대책 없이, 그저 거품을 확대하는 방법으로 연연했다고 강조합니다. 그린스펀은 알려진 바대로 강고한 '통화주의자'로서, 거품이 마냥 나쁜 것이 아니다라는 기존의 입장과 만약 시장이 위기에 처한다면 버블을 더 부채질하는 방법의 소위 탈출 전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물론 2008년의 대위기는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으로 당시 미국 시민들이 중국 발 자금으로 너무나 과도한 신용 생활을 영위했고, 더 나아가 은행 대출로 자신의 소득 규모와 맞지 않는 주택 구입에 나섬으로써, (물론 당시 정부가 이를 획책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정치와 경제의 무능과 맞물려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br><br>2장에서도 이미 드러지만 당시 미국 금융 업계의 무분별한 대출 관행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다음 4장에서, 저자는 영국, 아일랜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미국 등 영어권 국가들의 주택 소유 열망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당시 미국에서 다수 시민들의 은퇴 계회과 주택 보유를 위한 소위 '은행의 조력'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부채의 증권화'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이에 저자는 증권화의 핵심인 CDO를 '금융 유독 폐기물'로 냉소하고 있었습니다.&nbsp;특히, "주택 시장이 붕괴하고도 경기 침체가 발생하지 않은 경우는 1951년과 1967년 단 두 번이었다"는 사실과 이 때는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때문에 국방부와 전쟁 호황이 시장과 미국 경제를 구한 것이라고 분석됩니다. 이러한 논리적 배경은 충분히 설득적이고 우리가 2012년 경의 중국의 주택 시장 거품을 우려했던 것처럼 굳이 2008년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시장의 과도한 거품'은 결국 다수에게 파괴적 결과를 초래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미국은 기축통화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로 사실상 미국 경제의 견실한 체제 유지는 세계 경제를 뒷받침하는 최우선 선결 과제이기도 했습니다.<br>과거 런던이 기초를 마련했던 금본위체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수습과 세계 경제 재편이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 영국이 갖고 있던 권력이 점차 뉴욕으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저자는 1949년의 런던의 패착과 파운드화의 몰락을 다루면서 '강대한 산업 국가'였던 미국의 일면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 대전 내내 석유가 새로운 에너지 원으로 부상하고 이 석유의 수급이 국가와 경제를 지탱하는 자원임을 깨달은 미국은 석유 수출국 기구 (OPEC)에 압력을 가해, 거래 통화를 달러로만 할 것을 사실상 강제합니다. 이 때의 중동 산유국들은 석유 거래 화폐가 달러에 연동됨으로써, 환차손에 따른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더욱이 미국 경제의 부침에 따라 달러화가 변동을 띠게 됨에 따라, 이란과 같은 국가는 석유 수출 대금을 달러가 아닌, 엔화나 유로화로 변경합니다. 물론 이란은 이슬람 혁명 이후, 제재를 당한 국가이기 때문에 달러가 아닌 주요국의 통화로 거래하는 것이 분명 이익이었을 겁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5장은, "중국 기업들의 경우, 이란 석유 구입량 세계 1위인 국영기업 주하이젠롱트레이딩을 포함해서 대부분이 이미 유로화 결제로 전환하였다"고 첨언합니다. 이에 대해, 저자인 필립스는 따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동안 이란 경제가 버틸 수 있었던 주요 요인에는 바로 이러한 전환이 배경이 되었을 겁니다. 이는 미국 당국의 허를 찌르는 약삭빠른 대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br><br>다만. 여기서 논의된 5장의 '피크오일' 즉, 2010년을 기점으로 전세계 원유 생산이 감소로 들어설 것이라는 예측은 이후 현실과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셰일 가스의 혁명과 각 산유국들이 생산 설비의 현대화로 지속적인 증산이 이뤄지게 됨으로써, 2006년 이전의 예측들은 더 이상 논의할 가치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저자는 조지 W. 부시의 제2차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개입이 중동의 정치적 위기를 심화시켜, 사우디를 비롯한 국가들의 원성을 미국이 들어야만 했다고 강조합니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딕 체니가 이라크 전쟁에 앞서 에너지 관련 회의를 했던 것처럼, 조지 W. 부시의 후세인 축출은 결국 '이라크의 석유'가 원인이었음이 기정사실이었습니다. 당초 부시의 기대대로 후세인을 제거하여 중동의 정치적 분위기를 완화시킨다는 가정이 일전에 게리 거스틀의 분석대로 실패로 끝난 것이었습니다. 그런 연유에서 저자는 "당시 조지 W, 부시 정부가 과연 무엇을 위해 전쟁에 나선 것인가"를 마찬가지로 꼬집고 있었습니다.   <br><br>이 글을 출판하고 난 뒤에도 포퓰리즘 정치를 목격한 필립스가 앞으로의 미국 정치를 어떻게 예견했을지는 불명확하지만 그는 6장 이후의 논증을 통해, '희망이 없는 미국 정치'를 직시한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는 맨슈어 올슨을 인용하여, "특수 이익집단에 의해 정치 및 경제 동맥이 막혀서, 생명줄에 해당하는 아이디어와 엘리트가 순환하지 않기 때문"에 1945년 이후, 성공을 거듭했던 미국의 정치경제가 쇠락에 들어선 연유를 (정치권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는 종래의 노엄 촘스키와 크리스티안 마라찌가 비판적으로 주장했던 바와 상당히 유사한 논리적 연계이기도 합니다. 앞서 제가 언급하기도 했지만 "남부와 서부는 토머스 제퍼슨, 앤드류 잭슨, 루스벨트, 트루먼의 지도 아래 민주당 진영을 형성하여 북서부 금융 엘리트에 대항했다."는 민주당의 이력은 현재 월가 엘리트들과 적극적으로 야합한 현실과 대비되기도 합니다. 힐러리 클린턴을 넘어서는 정치 자금을 월가로부터 거둬들인 버락 오바마의 사례는 일전에 CDO를 만들어낸 "금융의 현대화" 만큼이나 노골적이고 기술적입니다. 이어지는 6장에서, "미국의 공화정체와 민주주의를 저해하면서 가문을 중시하는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는 저자의 예견은 마치 그 유명한 '코크 형제'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본문에서 '족벌주의'가 딱 한번 언급되기도 하지만 이 단어로 인해, 현재 미국 정치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 여실히 짐작하게 하는데요. 이런 정치에 대한 전반적인 멸시와 거부의 풍조는 민주당과 공화당 이 양당을 모두 거부하는 시민들과 이들을 통해, 세력을 포집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와 극우 포퓰리즘 정치의 급격한 성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br><br><br>결국 2008년 대위기의 원인 제공자인 월가의 금융 엘리트들이 뒤이어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에 의해 그 누구도 기소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새로운 엘리트들의 탐욕과 그리고 도덕적 해이가 어떤 식으로 용납되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데요. 여기서 소개된 것처럼 과거의 민주당이 설사 신자유주의와 협력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런 이행의 결과로 촉발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정치권(리버럴)이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주지된 사실은 뭔가 아이러니하기도 했습니다. 금융 시장의 현대화와 기존의 경제 체제를 뒤바꾸게 만든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의 명암은 분명합니다. 저는 "시장이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확언을 정치권이 반쯤 수용하기 이전에, 자신의 이익을 위한 무능의 반복된 설계와 권력, 그리고 돈이 지금처럼 유지될 수 있는 체제만 보장된다면 그 외 다른 정치와 다수의 삶은 상관없다는 미국 부유층의 소위 '복음'을 제도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움직임이 동반되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민들의 정치적 분별력이 요구되었습니다. 왜냐하면&nbsp;건전한 민주 체제의 우선적인 기반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시민 다수의 삶의 조건'에 달려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차 "금융 공학이 도를 넘어서게 되었다"는 이 책의 경고는 미국 시민들이 유념해야 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nbsp;이 과도한 금융 공학은 저자의 제목대로, 정치를 뒤흔드는 '나쁜 돈'을 양산하고 결국에는 민주주의 기반을 위태롭게 만든다고 판단됩니다. 과거 "월스트리트가 '오염된' 주택저당증권 및 파생상품 판매로 오명을 뒤집어썼고, 결국 이익과 명성에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고 반복하는 내용은, 여전히 금융 시장에 대한 민주주의적 통제가 필요함을 깨닫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와 미국은 2008년 이전으론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은 거의 명백해 보입니다.<br><br>- 6장에서 저자는 "일본, 한국, 타이완 등 미국으로부터 군사력 보호를 받는 나라들은 미국 국채와 정부기관 부채를 외환보유고로 대량 보유함으로써 비용을 간접적으로 분담하면서 달러 가치를 떠받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었는데요. 미국의 동맹국인 우리 나라가 그저 안보와 군사적 수혜국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진실은 이처럼 우리와 미국이 직간접적으로 서로의 이익을 위해 맞물려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nbsp; &nbsp;&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4/81/cover150/8993285446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48189</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파인즈 - [파인즈]</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463626</link><pubDate>Fri, 21 Aug 2026 14: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46362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195145446&TPaperId=1746362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679/2/coveroff/1195145446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195145446&TPaperId=1746362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파인즈</a><br/>블레이크 크라우치 지음, 변용란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4년 09월<br/></td></tr></table><br/>윌리엄 블레이크 크라우치는 1978년생으로 2015년에 TV 드라마화 된 작품인, 『웨이워드파인즈』시리즈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그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스테이츠빌 인근에서 태어나, 같은 주의 올린에 소재한 공립 고등학교인 노스 아이레델 고등학교와 채플힐에 위치한 공립 연구 대학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이런 그의 재능은 중학생 시절부터 발휘되어 이 당시에 단편 소설 및 글쓰기 준비를 하게 됩니다. 크라우치는 2004년과 2005년에 각각 첫 소설인 『사막의 장소』와 『잠긴 문』을 출간합니다. 그리고 2011년에는 『런』을 자비로 디지털 출판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최근작인 『30일의 밤 Dark Matter』역시, TV 드라마화가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이외에 그의 개인사로는 1998년 6월, 레베카 그린과 결혼했으나 두 사람은 2017년에 이혼했고, 2019년 당시에는 재클린 벤-제크리와 교제중이었습니다. 또한 팬들을 위해 자신의 개인 사이트를 운영중이고 이곳에서 글과 방송에 대한 소통에 나서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ines"로 지난 201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4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출판사의 사정으로 절판된 상황입니다.<br><br>개인적으로는 2015년 당시 이 작품이 TV 드라마화가 되었을 당시, 시즌 2까지 접한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고 해서 기대를 하고 찾아보게 되었는데요. 에단 버크 역을 맡은 맷 딜런의 다소 부족한 연기와 극의 진행에 따라 일부에서 보이는 개연성 실종에 어느 정도 실망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당시로서도 서사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류의 완전히 다른 끔찍한 진화"는 꽤나 보기 드문 주제이기도 했는데요. 이 소설의 맨 끝에 인용되어 있는 마이클 크라이튼의 종래의 태도와는 별개로, 작가인 크라우치는 "인간이 지구에 저지른 짓거리"에 따라 인간 게놈이 변형되었고 더 나아가 오염되는 과정에 놓여 있다는 경고를 이 작품을 통해, 밝히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과학적 연계의 설득적 근거는 차치하더라도 말입니다.<br><br>주인공인 에단 버크는 2012년, 미국 재무부 비밀 요원으로 (통칭 시크릿 서비스) 이 극의 흑막인 젠킨스가 이때 벌이고 있던 일을 수사하던 중, 실종됩니다. 결국 모종의 연유로 그는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그곳은 바로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아이다호의 외진 지역인 웨이워드파인즈였습니다. TV 드라마에서는 에단 버크와 관련된 과거 행적 가운데, 제2차 이라크 전쟁에서 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알카에다에 의해 포로가 된 사항을 삭제했습니다. 아예 나오지가 않는데요. 원작을 읽어보니 영상에서 보았던 '에단 버크'의 정신적 문제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습니다. 보통 전쟁 포로를 경험한 끔찍한 기억은 삶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심각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공화당 대선 후보이기도 했던 존 매케인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5년 6개월 동안 전쟁 포로로 억류된 경험이 있기도 합니다. 그는 그동안 많은 언론을 통해, 그때의 경험들을 진심으로 토로하며, 미국 시민들에게 나누기도 했습니다. 극의 에단 버크 역시, 회상하는 장면을 통해, 그가 전쟁 포로로 어떠한 참혹한 경험을 겪게 되었는지 접할 수 있었는데요. 이러한 기억은 그의 행동 전반에 미치고 있었습니다. 특히 부정적인 측면에서 말이죠. <br><br>물론 그 전쟁 포로의 기억이 아니더라도 그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난 웨이워드파인즈라는 작은 마을이 본능에 있어서도 가히  정상이 아닌 곳임을 직감합니다. 마을에 실제로 통용되는 지폐가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쓰이던 달러화였고 서술되는 마을 사람들의 일견 모습들이 억눌려 있거나 부자연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를 내부의 사람들이 무슨 괴물 보는 듯한 시선은 차치하더라도 작가인 크라우치는 이 사람들을 어쩌면 "자유에 대한 기본적 욕구"가 거세된 어떤 군중상, 혹은 집단성을 그려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극 후반부의 에단과 젠킨스와의 대화에서, 에단은 젠킨스에게 "당신은 이 마을을 거의 폭력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일침하고 그것을 비판하고 있지만, 이에 화답하는 젠킨스는 "자유란 그저 21세기에 나온 관념" 정도로 일축합니다. 지금은 자유가 아니라 시급한 대책이 필요한 시기라고 언급하면서 말이죠.<br><br>적지 않은 작가들은 예를들어, 핵전쟁 이후의 아포칼립스적 시대상을 그려내면서, 자유주의적 질서를 잃어버린 인간 군중의 폭력적 상황을 서사의 주제로 삼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작품 역시, "거부할 수 없는 폭력적 질서에 일방적으로 노출되고, 심지어 무비판적으로 순응한 인간들"에 대해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었는데요. 후반부에 젠킨스가 말하는 아주 중대한 시기의 인간종의 보호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이러한 계획의 전반은 그가 무고한 사람들을 납치했듯이, 최소한 '계획의 대상자'들에게 앞으로의 문제를 위해, 많은 토론과 대화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시간 낭비일지라도 말입니다. 자신의 삶이 통째로 날아가고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그 이전의 삶에 대한 대부분을 재조정해야만 하는 시점에서, 9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살을 감행하거나 탈출을 해서 목숨을 잃었다면, 기존의 체제를 넘어서는 일부 혹은 전반적인 대안이 필요했습니다. 그저 생물학적인 인간종을 유지시키기 위한 아주 본능적인 수준의 대처, 그리고 인간성 말살에 가까운 억압과 폭력, 그리고 프로파간다가 주가 된다면 그것은 수단이 목적을 배반하고 말살시키는 행위에 가까울 것입니다. 극중 어린 아이들이 아무런 도덕적 제재 없이 폭력에 물들어 있는 장면은 역겨운 부분이기도 했지만 그런 식으로 매몰된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경종을 울리기 위한 작가의 주제 의식이 어느 정도는 엿보여서, 답답한 주인공의 행보를 어느 정도 인내심을 갖고 지켜 보게 되었습니다.<br><br>아직 드라마를 못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시즌2와 시즌3으로 이어지는 미성숙의 어린 소년들의 인간성 말살의 전체주의적 개조화도 충격이지만 주인공의 비참한 몰락 역시 보는 내내 음울하고 이후에는 한동안 불쾌한 상념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만, 저는 이번에 원작에 있던 요소를 드라마가 제대로 연출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걸 알았기에 이후 절판된 시리즈의 나머지 작품들을 구해서 읽고 싶지만 그것이 쉽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인간에게 있어, 자유 의지와 선택의 문제에 대한 스스로의 결정이 아닌 외부의 개입 같은 것이 얼마나 인간 사회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는데요. 이 작품은 그런 의미에서 외부 세계가 처참히 무너지는 소위 아포칼립스 상황이 인류의 직접적 위협이 된다기보다 그런 '비상 상황'을 이유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기본적 가치와 권리를 무참히 압살하는 어떤 권력이라든지 맹목적 믿음과 같은 일련의 폭력적 과정들이 더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심히 경고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679/2/cover150/1195145446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6790276</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아르망스 - [아르망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456002</link><pubDate>Mon, 17 Aug 2026 17: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45600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791479&TPaperId=1745600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5851/29/coveroff/895279147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791479&TPaperId=1745600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아르망스</a><br/>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시공사 / 2018년 07월<br/></td></tr></table><br/>격동기의 프랑스를 살다 간, 스탕달은 1783년 1월 23일,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태어났습니다. 원래 본명은 마리-앙리 벨 (Marie-Henri Belye)로 부친은 고등법원 변호사였던 세뤼벵 벨이었고 모친은 앙리에트 가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스탕달은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매사 강압적이고 몰이해적인 부친과의 생활은 그로 하여금 "억압적인 유년 시절"이라는 혹독한 기억을 새기게 했습니다. 이는 모친과의 관계가 끔찍했던 이렌 네미롭스키를 떠올리게 하는데요. 스탕달 역시,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자신의 아버지를 경멸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혼란스런 프랑스 혁명기에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자, 보수왕당파인 부친이 반혁명혐의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됩니다. 그 유명한 로비에스피에르의 공포 정치기에 그는 몇 차례의 투옥과 석방을 반복하게 됩니다. 이런 혼란한 가정사를 뒤로하고 스탕달이 16세가 되던 해에 나폴레옹 군에 입대하게 되었으나, 1814년 나폴레옹이 권력을 잃게 되자, 군대를 떠나게 됩니다.그는 이 시기에 정렬적인 이탈리아의 문화와 국가 자체를 사랑하게 되는데요. 자신과 같이 어떤 구속도 없이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그러한 가운데 애정을 포함한 감정을 따라가는 인물에 대한 본인의 굳건한 지향을 수립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적과 흑』과 『파르마의 수도원』의 주제 의식이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821년 6월, 그전까지 지내던 이탈리아를 떠나 파리로 돌아온 그는 1827년에 그의 첫 장편인 『아르망스 Armance』를 출간했으나, 그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1830년 무렵에 다시 이탈리아로 떠난 스탕달은 이듬해인 1831년 파리로부터 교황령 치비타베키아 주재 영사로 임명되어, 4월에 부임하게 됩니다. 그는 이때에 영사직을 수행하면 로마와 밀라노 등지를 여행하면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1939년 후반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나폴레옹에 관한 전기 등을 쓰기 시작하며 소일을 하다, 뇌병변이 발생해 1940년 1월 1일에 갑자기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병의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던 그는 결국 1942년 3월, 뇌출혈로 사망하기에 이릅니다. 일생의 대부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던 연유로 그의 묘비에는 다른 수식어보다 "밀라노인"이라는 단어가 함께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Armance"로 지난 182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현재는 출판사에 사정의 따라 절판된 상황입니다.<br>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빈 체제에 의해 프랑스에 다시 왕정복고가 이뤄지는 시점으로 이야기는 진행됩니다. 여기에 혁명기를 온몸으로 경험한 스탕달이 구체제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는 그의 다른 작품으로 충분히 짐작할 만합니다. 과거 루이 16세 시절에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는 드 말리베르 후작가의 유일한 아들인 옥타브가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이제 갓 20세를 넘긴, 홍안의 청년으로 고결하고 분별력을 갖고 있으며, 후반부 부친인 드 말리베르 후작의 평가대로 "그저 평범을 넘은 비범한 청년"이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이 말리베르 가문은 과거 루이 7세가 십자군 원정을 떠나던 시점에 왕과 함께 종군했던 조상을 유산으로 갖고 있습니다. 이는 가문의 역사에 대한 충분한 자긍심을 갖게 만들었을 겁니다. 다만,&nbsp;이 시점에서 말리베르 가는 매우 중대한 고비를 앞두고 있었는데요. 프랑스 대혁명 기간에 망명했던 귀족들의 재산 피해를 보상해주기 위한 일종의 '배상법'이 의회 통과를 앞두고 있던 즈음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남다른 감수성을 갖고 있던 옥타브는 차라리 이 법이 부결되기를 온 몸으로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법이 정당하지 않고 그로인해 발생한 재산의 일부 복귀가 자신을 결혼에 내몰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반부에 별일 아닌 듯 드러나지만, 옥타브는 그가 아직 "소년일 적에 했던 그 무모한 맹세"가 자신의 삶을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이대로는) 어떤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는 자신에 대한 맹세였습니다.<br>이런 와중에 옥타브에게는 러시아 계 혈통을 갖고 있는 사촌 누이인 아르망스 드 조일로프와의 만남과 그녀와의 우정이 한 가닥의 위안이 됩니다. 옥타브는 모친의 명예로운 사촌인 드 보니베 후작 부인을 비롯, 배경이 되는 앙디이의 사교계의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에게 경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한때 몰락한 귀족들이 다시 왕정이 돌아오자 이제는 기댈 것이 '돈에 대한 욕망'밖에 없이 그저 하릴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어쩌면 과도한 감수성의 발현일 수도 있겠습니다. 바로 이런 자신을 겉으로나마 이해해주고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바로 아르망스였습니다. 작가인 스탕달이 옥타브의 그 가치관을 언급하면서, 그가 인간에 대한 혐오와 지극한 염증을 갖고 있으면서도 아르망스에 대한 우정을 깊이 생각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진행되는 서사 도중에 언급하는 부분은 어쩌면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극중에서 옥타브가 자신에 대한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르망스가 옥타브를 향한, 진지한 눈빛과 진정한 태도는 누구보다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옥타브에게는 자신의 충동과 폭력성을 자기도 모르게 제어하게 되는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이처럼 작가인 스탕달이 이 작품을 왜&nbsp;'아르망스'로 정하게 되었는지는 해석에 대한 극명한 부분이 있겠습니다. 옥타브와 아르망스 이 두 사람이 겪게 되는 감정의 소용돌이와 뜻하지 않게 주변인들이 불러들이는 파국들로 인해 이들이 어떠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지를 짐작하게 만듭니다. 스탕달이 옥타브의 입을 통해 브루투스의 비극을 언급했던 것처럼, 앞으로 이어질 옥타브의 뜻하지 않은 불행은 이를 예견하는 것으로도 읽혔습니다.&nbsp; &nbsp;&nbsp;<br>이 때의 아르망스는 부모와 그 친지가 거의 남지 않은 상황으로, 그녀 자신이 스스로를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처럼, 이제는 거의 '평민 계급'이나 다름없는 처지였습니다. 이런 그녀는 자신이 현재 아무런 배경이나 귀족가의 여식에게 으레 있어야만 하는 선의의 조력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항상 내면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그때 그때 만나게 되는 인물들과 상황을 조심스럽게 분석할 수밖에 없던 그 나름의 치열한 삶을 살고 있던 소녀였습니다. 즉, 이 둘은 가치관의 동일 선상에서 옥타브가 돈을 쫓는 소위 몰락한 귀족들을 경멸하는 것처럼, 아르망스 역시, 자신이 남자의 돈으로 안락한 결혼생활을 '따내려는' 주변의 시선을 일견 증오합니다. 그래서 스탕달은 서사에서 아르망스가 어떠한 '교태'도 몸에 익지 않았고 그것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는데요. 아르망스와 달리, 남편이 있던 아니면 그저 부인으로 불리는 소위 귀부인들이 옥타브와 같은 전도유망한 청년에게 어떠한 교태와 눈웃음을 흘리는지 장면 장면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옥타브가 반쯤 자신의 치기 어린 결정으로 만남을 지속하게 되는 도말 백작 부인의 인물 조성 자체가 아르망스와는 완벽하게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도말 백작 부인의 처음 등장에서, 중후반부 이후의 전개에서 극을 갈등으로 이끄는 어떤 원인이 될 인물로 짐작하기도 했는데요. 그만큼 자기애적인 인물의 표상이자, 더 나아가 주변의 시선을 온몸에 받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아는 캐릭터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그녀에게서 의심의 냄새가 풍겼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br>이런 예민한 감수성이 충만한 옥타브를 매개로 작가인 스탕달은 극중에서 구 귀족들의 행태와 여전히 놓여 있는 프랑스 사회의 폐해와 논란 등을 여실히 잘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특히, 옥타브의 부친과 모친을 통해 드러내는 18세기 계몽주의에 대한 이들 계급의 거부감, 그리고 후반부 서술에서 은연중 나타나는 귀족 계급의 "자유주의에 대한 뜻 모를 배격"은 혁명 시기의 자코뱅의 행적을 몸에 새긴 그들이 알아채는 거부감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작가인 스탕달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코뱅과 같은 공화주의자들을 완벽한 극단주의자들로 묘사하고 있는 몇몇의 설정들은 그 시대가 남긴 흔적들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즉, 이런 측면에서 옥타브가 느끼는 시대가 불러일으키는 아픔은 단순히 구 귀족 계급이 여전히 답습하는 하등 쓸모없는 인간 관계 내의 '부질없는 거래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이 귀족들이 지난 과거의 유산을 더 역겨운 것으로 대체하려는 몰염치한 의도 때문일 것입니다. 아르망스 역시, 자신의 몸과 젊음을 어떤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두려워하는데요. 저는 당시의 왕정이 돌아온 의회의 철지난 귀족 정치와 그 속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계급 내부의 정치 투쟁 같은 것이, 일말의 자유주의가 스쳐간 프랑스 사회의 흔적들을 사람들의 마음에서 지워내는 동시에, 명예와 상관없는 아주 완벽히 다른 돈과 이익의 추구라는 모습으로 변질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귀족 여성들이 보이는 계몽주의 철학에 대한 혐오도 그렇거니와, '철학을 하거나 배우는 사람들'에 대한 일관된 의구심도 그런 일련의 모습 속에 당시 프랑스 사회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관념의 혼란'과 계급의 몰락 속에서도 이들이 기득권적 이익을 지키고자 하는 몸부림을 이 소설을 통해,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br>귀족 계급의 철지난 유산이라는 명예의 불필요한 존재 때문에, 옥타브가 반쯤 자초하고 반쯤 받아들이게 되는 드 크레브로슈 후작 과의 희극적이면서 동시에 치명적인 사건은 그와 아르망스 사이를 좀 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옥타브는 비로소 어리석은 자신의 감정을 반성하고 진심으로 아르망스와의 사랑을 받아이들이게 됩니다. 아르망스 역시, 다시금 옥타브가 없는 삶이 자신에게 지옥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게 되는데요. 이런&nbsp; 두 사람을 향한 옥타브 모친의 조력과 점차 이들의 사랑을 인정하게 되는 어쩌면 순진한 과정이 앞선 '과거의 명예를 그저 수단으로 삼고 오로지 개인의 이익'에 혈안이 된 모친의 오빠이자, 외삼촌인, 드 수비란 기사단령원장은 결국 이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고 맙니다. 통과된 귀족 재산 배상법을 바탕으로 이 기사단령원장은 스스로 느끼기에도 하찮은 이익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것은 옥타브를 구슬려서 자신이 원하는 증권에 돈을 투자하게 만드는 것으로 노년의 안락을 쟁취하려고 하는 무책임한 시도였습니다. 물론 이런 노망난 늙은이를 그럼에도 존중했던 아르망스의 노력을 비웃을 필요는 없겠지만, "다른 이들의 교활함을 확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르망스의 순진무구함을 확인한다"는 감정이입된 스탕달의 언급과 함께, "어떤 계층이든 간에 어리석은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라는 절로 피부를 따갑게 만드는 잔인한 교훈 때문에 이어지는 결말을 곱씹게 만들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이 알량한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아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분명한 경고이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르망스는 몇 번이나 옥타브를 향해, 자신의 주저하는 마음을 돌려보고자 재차 그에게 확인 받고 싶어했고, 그 역시 이런 아르망스를 사랑한다고 확신했으나 이들의 결말은 해피 엔딩이 아니었습니다.&nbsp;어떻게 보면 순진함과 분별을 동시에 지닌 저들 연인에게처럼 그 미세한 틈조차 칼로 찌를 수 있는, 무분별하고 양식이 없는 자들의 그야말로 충동적인 행동이 어떠한 파국을 이끌 수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는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등장했던 인물들 중에, 지극히 오만하면서도 아무런 양식이 없고 그러면서도 의도대로 주변을 조종하고 더 나아가 극명한 파국의 사건을 나름대로 조롱해 마지 않던 도말 부인의 캐릭터 성에 큰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이 인물은 한편으론 교활한 인물의 전형이면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캐릭터로, 그동안 스탕달이 추구했던 리얼리즘 (물론 후세의 평가이지만) 이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nbsp; &nbsp; &nbsp; &nbsp; &nbsp; &nbsp;<br>-극중에서 스탕달이 옥타브와 아르망스를 가리켜, '우리의 두 사람'이라고 난입해(?) 일컫는 부분은 웃음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특히 서사 가운데, '독자들'을 운운하며,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일말의 애정을 드러내기까지 합니다. 그런 면에서 스탕달의 이 작품은 여러모로 인상적인 소설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nbsp; &nbsp;<br><br>&nbsp;&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5851/29/cover150/895279147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58512985</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30일의 밤 - [30일의 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450917</link><pubDate>Fri, 14 Aug 2026 18:1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45091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12839888&TPaperId=1745091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105/91/coveroff/k512839888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12839888&TPaperId=1745091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30일의 밤</a><br/>블레이크 크라우치 지음, 이은주 옮김 / 푸른숲 / 2022년 09월<br/></td></tr></table><br/>1978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스테이츠빌 인근에서 태어난 블레이크 크라우치는 같은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올린에 있던 노스 아이레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채플힐에 소재한 공립 연구 대학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채플힐 캠퍼스)에서 영어학을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마칩니다. 그는 어린 나이인 중학교 시절부터 여러 단편 소설을 창작하기도 했는데요. 이런 그에게 명성을 안긴 작품은『웨이워드 파인즈 3부작』시리즈로 이 연작물은 영화 감독인 나이트 샤말란에 의해 TV 드라마화가 됩니다. 그리고 2004년과 2005년에는 두 소설인 『사막의 장소』와 『잠긴 문』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소설 역시, Sony Pictures의 텔레비전 시리즈로 각색 하기 위한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고, 이 시리즈는 2024년 5월 8일, Apple TV+에서 공개되기에 이릅니다. 그의 개인적 삶으로는 1998년 6월 20일, 레베카 그린과 결혼을 했으나, 슬하에 세 자녀를 두고 2017년 두 사람은 이혼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Dark Matter"로 지난 201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2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br><br>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크라우치의 이 작품이 정식으로 TV 드라마화 되자마자, 다시 표지만을 바꿔 내놓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지금 알라딘 메인에서 팔리고 있는 판본에는 드라마의 두 주인공인 배우 조엘 에저튼과 제니퍼 코넬리의 얼굴이 들어가 있습니다. 다만, 제가 구입한 판본은 표지 갈이(?)를 하기 전의 번역본으로 추정됩니다. TV 드라마화 관련한 제 개인적 감상은 소설의 분량이 드라마를 제작할 정도의 긴 내용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영상화에 나섰으니 원작을 좀 수정하고 보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되었습니다. <br><br>작가인 크라우치는 이 작품의 서사를 위해, 양자역학과 다중 우주, 그리고 뇌과학의 일부 작용 등을 사건의 주요 핵심 요소로 삼고 있습니다. 특히 양자역학과 다중 우주를 이런 식으로 다룬 소설이 있을까 싶었는데요. 보통은 광속 여행을 위한 우주선의 엔진을 설명할 때 쓰이거나 워프와 같은 소재에 부분적으로 인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크라우치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인간이 뇌의 의도적 제한으로 인해, 이차원 이상의 세계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주요 설정으로 삼고, 이를 혁신적으로 뒤집은 이른바 '차원 여행 혹은 다중 세계 여행'을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또한, 작가는 이러한 백셩에서 인간의 삶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선택의 시간을 다중 우주 원리에 차용하여, 도저히 믿기 힘든 서사를 펼쳐내는데요. 물론 부정할 수 없는 SF적 외피와 그 속에 작용하는 물리학의 이론들은 일종의 'SF적 스릴러'로 이 작품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간은 수많은 삶의 선택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사소한 선택들이 그의 삶 전반을 알 수 없는 인생의 행로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소중한 가족과 매일의 작은 행복에 대한 조언 등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인 제이슨이 선택의 기로와 그로 인한 삶의 분절을 대표적으로 표징하는 인물로 볼 수 있겠습니다.<br><br>주인공인 제이슨 데슨은 대학의 학부에서 기초 물리학 등을 가르치고 있는 평범한 교수입니다. 그에게는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는데요. 29살의 나이에 그의 여자친구인 다니엘라가 임신을 하게 되자, 앞으로 쟁취할 수도 있는 빛나는 미래를 뒤로 하고, 안온한 일상의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어느 날 이런 그에게 낯선 이로부터 불시의 습격을 맞게 됩니다. '게이샤 가면'을 쓴 사내는 그를 오래된 발전소 건물로 납치해, 알 수 없는 약을 몸에 주입하고 모종의 장치를 통해, 어디론가 보내 버립니다. 그곳은 그 게이샤 가면의 사내가 살고 있던 다른 세계로, 바로 이 지점부터 작가인 크라우치가 차용한 다중 세계의 일면이 드러나게 됩니다. 즉, 가면의 사내는 그가 했던 29살의 선택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한 인물로, 당시에 매달렸던 중요한 물리학적 실험을 성공하고, 30억 달러의 막대한 지원금을 얻어 초유의 연구소를 설립하기에 이릅니다. 흔히 알고 있듯, 다중 세계의 간단한 이론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말고, 또 다른 동일한 (혹은 약간 상이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가설입니다. 양자 역학과 관련된 다중 세계 이론을 연구했던 것이 제이슨이 이었고, 여기의 오리지널 제이슨과 저쪽 세계의 제이슨2는 서로가 다른 선택을 했던 같은 인물 혹은 다른 삶에 도달한 도플갱어로 볼 수 있겠습니다.<br><br>물론 다중 세계 이론에서 A라고 불리는 세계에 살고 있던 내가 B라고 불리는 세계에 진입하게 된다면 이 B라는 세계에 살고 있는 또 다른 나와는 물리학적으로 어떻게 중첩될 것인가와 아니면 상상력을 더해, 아예 별개의 요소로 존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이 작품은 SF적 요소를 가미한 소설이기에 적절히 타협하며 읽는다면 주인공의 어긋난 서사에 집중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영화인『패밀리맨』의 주인공처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고 내가 이룰 수 있는 미래에 올인하게 됨으로써 막대한 성공을 거둔 월가의 엘리트가 만약 그때 여자친구를 선택했다면 어땠을까를 잠시 '엿보는 것'과 같은 설정이기도 합니다. 마치 "돈과 명성을 향한 충분한 성공이 과연 삶의 본질이 될 수 있을 것인가"와 같은 진지한 고민들을 떠올리듯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앞선 영화와 확연히 구별되는 부분은 소설의 주인공인 제이슨이 아내와 아들을 몹시도 사랑하고 그런 자신의 인생이 결코 실패라고 여기지 않는 부분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결과를 마땅히 수용하고 그런 삶을 애정해 마지 않는 주인공 캐릭터의 일관된 태도는 충분히 존중 받을 만합니다.&nbsp;&nbsp;<br><br>다만, 개인적으로는 저쪽 세계에서 위기에 처한 제이슨을 도운 어맨다 루커스에 대한 서사와 그녀의 마지막 선택으로 이어지는 이후의 이야기 없이 그대로 퇴장해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TV 드라마로의 제작이 되었을 때, 이 어맨다 루커스에 대한 분량을 재조정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아직 드라마를 접해 보지 못해서 이 부분은 정확히 말씀드릴 수가 없겠습니다. 그리고 이와는 별개로 극중 제이슨과 어맨다, 서로 간의 애정에 대한 가능성이 적절하게 조정된 것은 괜찮았지만, 저쪽 세계에서의 제이슨2와 어맨다의 관계가 모호하게 남게 되어, 이 부분도 서사에서 아쉬운 부분으로 남았습니다. 여기에 전체적으로 극의 진행이 중후반까지는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제이슨과 어맨다가 거쳐간 행로로 인해 벌어지는 그 후폭풍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 부족한 것은 물론, 후반부에서 전개가 극명하게 긴장감을 고려하지 않는 쪽으로 이어져, 재미 자체는 개인적으로 크게 줄었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연작 시리즈 중 하나였던,『웨이워드 파인즈』처럼 분량을 늘려, 새롭게 연작 시리즈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물리학적 기반의 다중 세계 이론이 꽤나 고유하게 느껴져, 이 때문에 더욱 아쉬움이 컸습니다. 작가 역시도 후기에서 이 작품에 들인 시간과 노고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좀 전에도 언급했지만 후반부의 서사는 너무나 급하게 마무리되는 느낌이 들었기에 소재의 독창성을 감안한다면, 이 소설에 대한 기회가 좀 더 주어진다면 어떨까, 글 마무리에서 곱씹어 보게 되었습니다.<br><br>-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여러 설정 가운데 크게 놀랐던 부분은, 우리의 뇌가 다중 세계를 인지할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오랜 세월에 걸쳐 오로지 하나의 세계 만을 인지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고 설명됩니다. 이는 꽤나 독창적인 설정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br><br><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105/91/cover150/k512839888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1059185</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어둠 속의 남자 - [어둠 속의 남자 - 개정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416223</link><pubDate>Tue, 28 Jul 2026 05: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41622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22031542&TPaperId=1741622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297/24/coveroff/k52203154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22031542&TPaperId=1741622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어둠 속의 남자 - 개정판</a><br/>폴 오스터 지음, 김현우 옮김 / 북다 / 2025년 09월<br/></td></tr></table><br/>미국의 소설가이자 시인, 영화 제작자였던 폴 오스터는 1942년 2월 3일, 미국 뉴저지 주 뉴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사무엘 오스터로 저지 시티에서 형제들과 함께 건물 소유했던 지주였고, 모친인 퀴니 보갓으로 평범한 가정 주부였습니다. 이 부부는 일종의 이민자들로 오스트리아계 유대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스터가 고등학교 3학년 때가 되던 해에, 부모는 이혼하여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뉴어크 위콰히크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게 됩니다. 다른 가족이었던 삼촌은 당시 큰 명성을 갖고 있던 번역가 앨런 만델바움이었습니다. 오스터는 뉴저지 주 사우스오렌지와 뉴어크 등지에서 자랐고, 메이플우드에 있는 컴럼비아 고등학교를 졸업합니다. 그는 1970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과 비교문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은 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여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프랑스 문학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1974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스테판 말라르메와 조셉 주베르와 같은 프랑스 작가들의 시, 에세이 등의 번역 작업을 지속하는데요. 이후 1982년에 호평 받은 데뷔작인 『고독의 발명 』으로 말미암아 『뉴욕 3부작』역시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1980년대까지 꾸준하게 작품을 발표했던 오스터는 1990년대 후반 영화 제작에 확고하게 전념한 후, 남은 20년 동안은 다시 소설과 회고록으로 작품 방향을 전환하게 됩니다. 작품 활동을 제외한 자신의 외적 활동과 관련해, 오스터는 스스로의 정치 성향을 "민주당 보다 더 좌파적이라고 설명했지만 자신의 표가 사표가 될 것 같아 민주당에 투표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2023년 3월 11일, 오스터의 아내 시리 허스트벨트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가 2022년 12월에 암 진단을 받았고, 뉴욕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 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지속적 치료에도 불구하고, 폴 오스터는 2024년 4월 30일 브루클린 자택에서 폐암 합병증으로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Man in the Dark"으로 지난 200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2008년 9월에 초도 번역이 이뤄졌습니다. 제가 구입한 번역본은 개정판으로 2025년 9월, 출판된 판본입니다. <br><br>극의 주인공인 오거스트 브릴은 현재 일흔두 살로, 1984년에 퓰리처 상을 받았을 정도로 명성을 얻은 비평가였습니다. 그는 자신 스스로를 "구덩이에 밀어 넣었다"고 말할 정도로, 사랑했던 아내가 암으로 떠난 뒤, 삶이 망가지는 정도가 아니라 무너지는 단계에 이른 상황입니다. 이런 그에게는 유일한 딸이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글을 업으로 삼으려는 미리엄과 그녀의 딸이자, 손녀인 카티야가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자신의 손녀 역시, 이제 시작된 인생에서 더할 나위 없는고통을 당하고 말았는데요. 카티야의 남자 친구였던 타이터스 스몰이라는 친구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이 타이터스 스몰이라는 청년의 죽음에 대해, 작가인 폴 오스터는 서두에 교묘한 함정을 만들어 놨습니다. "질병에 시달리는 젊은이"라는 표현이 물론 정신과 육체, 모두 해당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마치 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것처럼 배경을 유지했는데요. 후반부에 드러난 정확한 그의 죽음을 통해, 왜 손녀인 카티야가 그렇게 자신을 세상과 단절시켰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노년의 주인공인 브릴도 말년의 큰 과제를 손녀인 카티야의 '세상으로의 복귀'로 삼은 만큼, 할아버지와 손녀라는 관계는 결국에 서로를 좀 더 면밀하게 알아가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두 사람의 크나큰 아픔을 어느 정도 상쇄시키는 위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거스트 브릴의 남은 삶을 이끄는 힘은 오로지 손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귀한 손녀는 자신과 세상을 떠난 아내 소니아와의 귀한 재결합을 가능케 하기도 했습니다.<br><br>바로 노년의 오거스트 브릴의 이야기와 또 다른 이야기인, 오언 브릭의 서사가 메타 소설처럼 이어집니다. 이 오언 브릭의 따로 이어지는 별개의 이야기는, 바로 오거스트 브릴이 쓰고 있는 작품으로 설명되는데요. 작가인 오스터에 의해 이 의미심장한 브릭의 스토리는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즉, 오언 브릭만의 세계와 사건들이 2000년대 초반의 미국 정치를 몸소 체험한 작가에 의해,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인데요.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오언 브릭은 갑작스럽게 평행 세계로 이동하게 됩니다. 미국은 연방군과 독립군의 내전으로 치달은 상황입니다. 이것의 서사는 오스터 답지 않게 그다지 정교하지는 않지만 2000년 대선에서 대법원 판결 직후 주요 도시에서 발생한 시위가 끝내 폭동으로 이어져 유혈 사태로 번졌고, 뉴욕시와 자치구 대표들이 주도한 분리 독립 운동은 연방군의 공격으로 8만명의 무고한 피해자들을 낳습니다. 역사적으로 2000년의 미국 대선은 조지 W. 부시와 민주당의 앨 고어의 대결이었습니다. 이때 앨 고어가 승복해 최종적으로 조지 W. 부시가 백악관의 주인이 됩니다. 오언 브릭이 체험한 평행 세계에서는 이것을 아주 처절하게 비튼 것이죠. 연방 대법원의 판결에 반대하던 일부 미국 시민들이 봉기에 나섰고 여기에 호응했던 13개 주가 연방에 맞서 분리 독립하게 됩니다.  <br><br>앞서 폴 오스터 작가의 고유한 정치 성향에 대해 설명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민주당보다 더 왼쪽이라고 했으니, 별개의 액자 소설로 봐도 되는 브릭이 겪게 되는 평행 세계의 '미국 내전'은 오스터 그 다운 발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앞선 오거스트 브릴과 여기의 오언 브릭의 복잡한 셈법은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여기까지만 밝히겠습니다. 다만, 독립군의 자치 지역이 전국민 의료 보험 제도를 적용할 정도로 루즈벨트보다 더 진보적인 체제로 나아갔다는 점과 독립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조지 W. 부시의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꺼려하는 모습은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더욱이 이어지는 서사에서 딕 체니와 도널드 럼스펠드를 '파시스트'라고 주장하는 장면에서는 촘스키가 말했던 "누가 이들에게 전쟁을 할 권리를 주었는가"라는 대목이 절로 떠올랐습니다.&nbsp;이렇게 오스터는 개인이 지나온 역사와 그 속에서 살았던 인물들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영위했는지를 매우 기록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는데요. 실례로 1967년 뉴어크에서 있었던 인종 폭동인 '뉴어크 폭동'이 오거스트 브릴의 가족사를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저 역시도 놀랐던 부분입니다. 또한, 뉴어크 폭동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뉴어크로 차를 몰로 갔던 일은 지옥의 밑부분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는 작가인 폴 오스터와 오거스트 브릴이 혼재된 나레이션은 이때의 상황을 실감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도시에 있는 흑인 새끼들은 모조리 사냥할 겁니다." 라고 말하는 전직 대령 (아마도 백인이겠죠)의 서슬퍼런 모습은 '미국의 실체'에 대해 알리려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종언의 극적이고 비참하면서, 현대사의 오명이라고 볼 수 있는 장면을 앞선 타이터스의 죽음으로 극대화 시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인 오스터는 극명한 '선한 사람들'과 전쟁과 폭력 그리고 증오의 시대를 건너는 이들의 삶이 과연 어떻게 무너지지 않았는가를 의식적이지 않게, 교묘하게 탐구하고 있었는데요.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br>아주 격정적이지는 않지만 오거스트 브릴의 입을 통해, 손녀인 카티야에게 전해지는 그가 살아온 잔잔한 삶의 궤적들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어린 나이에 아내를 통해 구원을 받았다는 감정, 그들 사이에 태어난 작은 딸, 누나와 매형의 불행한 삶, 결혼 생활의 부침을 감내하며 큰 실수를 저지르고 태어난 손녀를 통해, 두 부부가 진정 삶의 구원을 받게 되는 이야기는 작중 오거스트가 거쳐간 일상들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습니다. 더욱이 그토록 선한 아내를 만나게 되는 과정과 세상을 떠난 아내인 소니아가 얼마나 인간적으로 훌륭하고 아름다운지, 눈에 보이는 미사여구나 도가 지나치는 서사 없이, 담백한 시선 처리와 언어로 이를 만들어낸 작가의 능력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한번 이상 '끔찍한 사랑'에 대해 회고하기도 합니다. 지독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내가 내 자신이 아니었던 시절의 맨 모습은 누구나 기억하고 있겠죠. 여기의 다른 주인공 혹은 서사의 조력자라고 볼 수 있는 오언 브릭이 자신을 만들어낸 오거스트 브릴의 다른 자아라고 애써 해석한다면 브릭을 구성하는 모습의 대부분이 오거스트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이며, 이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매우 이질적인 환경과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젋든 늙었든, 부자든 가난하든,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 기습해 오듯 우리에게 닥치고, 무감각한 상태에서 깨어난다"는 브릭의 예상치 못한 결말을 설명해주는 듯한, 이 작중 금언은 마치 이디스 워튼이 자신의 작품에 녹여낸,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쉽게 부서질 수밖에 없다"는 서사가 문득 떠오를 정도입니다. 과연 내가 내 삶에서 얼마나 통제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는 역시나 돈의 문제 아만은 아니었습니다.<br><br>이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문장 중에, 분명하게 이어지는 서사와 함께, 다음의 문장이 눈에 밟혔습니다. "오직 선한 사람들만이 본인의 선함을 의심하고, 무엇보다도 바로 그 점이 그들을 선하게 만들어준다."는 먹먹한 문단과 함께, 이들 선한 사람들은 남들은 쉽게 용서하지만 자기 자신은 쉽사리 용서하지 않는다는 점층된 설명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했습니다. 아마 제가 그다지 선한 인간이 아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거스트가 정말 선했던 아내에게 자신의 과오를 용서 받았기에, 그리고 아내가 자신을 남겨두고 떠난 것이 "왜 좆 같은지". 이 때문에 나는 내 삶을 궁지로 몰 수밖에 없었다는 전반부의 서사가 너무 의도적이지 않나 싶었지만 손녀를 통해, 다시 밟는 인생 경로와 그의 참회는 소시민들에게는 분명하게 충격으로 다가왔을 미국의 굴직한 그리고 부정적인 현대사와 맞물려, "당신은 이딴 세상에 왜 나를 남겨두고 갔는가"를 오거스트의 입을 그려보며,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아내를 몹시도 그리워하며 회상하는 한 어둠 속의 노인을 극에서 꺼내 그런 희한한 세상에서도 삶을 유지할 수 있는 희망 무언가를 찾았느냐고 되물어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여기까지 우리에게 명시를 넘어선 각인의 삶을 보여준 작가는 그럼에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는데요. "그럼에도 괴상한 세상은 굴러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의 삶도 여전히 굴러갈 것이란 말이다"라는 역사 앞에 놓인 개인의 읊조림처럼 내뱉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자신의 내면을 울릴 뭐라도 건질 수 있다면 그 삶은 그나마 온전하게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를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말입니다.<br><br>- 본문 226 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br>- 극 중 오거스트의 출신 학교가 컬럼비아 대학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캐릭터는 작가인 폴 오스터의 모습이 투영된 인물로 짐작되었습니다. 책과 관련된 일도 그렇거니와 오랫동안 문학계에서 일한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297/24/cover150/k52203154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2972416</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돈, 거짓말, 신 -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돈, 거짓말, 신 - 미국 극우는 어떻게 권력을 설계했는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408089</link><pubDate>Thu, 23 Jul 2026 20: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40808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02130291&TPaperId=1740808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66/62/coveroff/k50213029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02130291&TPaperId=1740808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돈, 거짓말, 신 - 미국 극우는 어떻게 권력을 설계했는가</a><br/>캐서린 스튜어트 지음, 안효상 옮김 / 책과함께 / 2026년 07월<br/></td></tr></table><br/>저자인 캐서린 스튜어트는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출생연도와 초기 성장 자료는 구글링을 해봐도 나오지가 않았습니다.) 그녀와 관련된 저자 파일과 각종 사이트에서는 스튜어트가 시카고 대학을 다녔다는 언급이 나오지만, 취득한 학위나 전공은 공개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약력이 전혀 공개되지 않는 저자는 거의 처음인 것 같은데요. (다만, 스튜어트가 미국의 우익 집단과 이들을 지원하는 부유층들을 취재하고 있기 때문에 신변 보호를 위해, 공개를 하지 않은 것으로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그럼에도 짤막하게 공개된 정보는 그녀가 유대인이고, 남편이 카톨릭 교도라는 점 정도입니다. 그녀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 종교적 민족주의의 부상 및 자유 민주주의에 반하는 미국에서의 극우 포퓰리즘과 같은 반동 정치의 부상에 대해 비판적 취재를 하고 있는 언론인입니다. 초기 그녀의 경력에서, 미국 뉴욕시 그리니치 빌리지에 기반을 둔, 뉴스 및 문화지인 『빌리지 보이스 The Village Voice』에서, 탐사보도 전문기자인 웨인 바렛 밑에서 경험을 쌓게 됩니다. 이후 2012년에 스튜어트는 자신의 자녀가 다니는 공립학교에서 기독교 우파 단체의 개입을 목격한 후, &lt;굿 뉴스 클럽 : 미국 어린이에 대한 기독교 우파의 은밀한 공격&gt;을 씁니다. 또한, 2020년 3월에는 『권력 숭배자들 : 종교적 민족주의의 위험한 부상』을 출간해, 포린 어페어스에 관련된 서평이 실렸고,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도 내용이 일부 발췌되어 게재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Money, Lies, and God : Inside the Movement to Destroy American Democracy"로 지난 202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6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br>일전에 일독한 폴 하이드먼의 『극우의 시대』가 미국 공화당이 어떻게 반자유주의 정당으로 변모했고 미국 정당사에서 의회 로비로 인한 공화당의 극우화를 다뤘다면, 스튜어트의 이 논저는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 사회를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의 미국 부유층이 주가 된, 정치 자금 조성과 이것의 대상이 되는 각종 극우 단체와 기금, 및 싱크탱크와 마찬가지로 미국 공교육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을 벌이고 있는 기독교 근본주의와 이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극단적 교회 (개신교과 카톨릭을 포함한)들을 주요 타겟으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LGBT와 동성애, 및 임신 중단에 대한 끊임없는 거짓 뉴스와 증오를 부추기고 있는 극우 포퓰리스트들과 종래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복귀를 바라고 있는 각계의 인사들의 궤변을 아주 상세히 다루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녀의 이 책은 유럽의 우파 포퓰리즘을 면밀히 조사한 카스 무데와 마찬가지로, 미국 사회 내부와 정치 기반에서 조직되어 행동하고 있는 여러 단체들과 그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극우적 사고의 추종자들 및 근본주의에 가까운 극단적 종교인들을 분석하고 때에 따라 인터뷰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저자의 신변에 대한 걱정이 들기도 했는데요. 취재를 위한 기자 본연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스스로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또한 저들과 관계된 자신의 인맥들을 이용하여 내부 결정권자들과도 접촉해, 이들의 본심을 분석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도 했는데요. 이런 그녀의 노력에 힘입어 르포르타주 형식이 주가 된 논쟁적이고 분석적이 글이 탄생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br>스튜어트의 이 글은 현재 미국의 정치와 이를 기반으로 한 사회가 현재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거의 가감 없이 드러낸 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저도 크게 수긍하는 부분이지만 미국의 건국 이념이 무엇보다 계몽주의에 근거한 자유와 평등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권력의 압제에 대한 초기 미국 이주민들에 생각과 그리고 자신들이 과연 어떠한 국가를 만들어야 하는지와 같이, 당시 유럽의 전제 왕정 국가들과는 확연히 다른 아이디어를 중요시 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앞선 계몽주의의 역사는 그만큼 미국이라는 국가에 있어서 하나의 유산이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하지만 1930년대 대공황을 거치면서, 루즈벨트 행정부가 구축한 기업에 대한 과세와 복지 정책, 그리고 정부 주도의 공적 기반이 점차 부침을 거치면서, 1980년대 신자유주의로 인한 급격한 경제 기조의 전환은 사실상 저자가 동의하고 있는 바와 같이, 경제적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저자인 스튜어트는 이 글의 말미에서, 다른 저명한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경제적 불평등이 결국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등장했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누진과세와 폭넓게 공유되는 경제 성장"의 1950년대로, 미국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으로 갈음할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인식 하에, 미국 내부에서는 정치적인 면에서 자유주의적 기조가 나날이 퇴출의 압박을 받았는데 이를 주도하는 것이 바로 극단주의자들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그리고 여기에 얽혀 있는 부유층의 존재였습니다. 일전의 도널드 럼스펠드와 같은 네오콘들이 자유주의의 나약한 측면이 국가를 흔들리게 만든다는 소위 레오 스트라우스식의 서사를 입에 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의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유럽을 비롯한 미국이 온전한 자유주의적 국가를 구축하겠다고 약속했으면서도 (물론 냉전의 시기였지만) 자유주의와 자유 시장의 아주 철저한 분리는 어쩌면 문화 전쟁의 시발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nbsp;<br>도입인 1장에서 이와 같은 사항이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정치와 사회에서 유지되어 왔던 '정교 분리'를 사실상 바꾸려고 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문제는 여기에 더해지는 위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 근본주의자들이 문화와 교육을 비롯한 여러 측면에서 정교 분리에 대한 아주 노골적인 주장을 사회에 내비치고 있지는 않지만, 몇 번의 논증을 통해 드러난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한 끝모를 증오는 이들 말대로, 기존의 하나님이 가르친 위계와 복종, 그리고 질서에 아주 위배되는 것들로 이것이 "정교가 분리되었기 때문"이라는 맥락으로 주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 역시도 저들의 저런 주장이 어떠한 논리적 근거를 갖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바라본, 저런 극단주의자들의 논법들 가운데, '대 위선의 시대'에서 알량한 지식이나 혹은 이성의 무결주의가 아니라 '성경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아주 직접적으로 말해, 무신론자들을 복음의 길로 이끄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사회와 자신들과 다른 이들의 인식을 아예 개조해야만 한다는 과격한 목소리로 이어졌습니다. 미국 기독교의 특수한 상황 때문인지 저자인 스튜어트가 바로 '종교의 제한적 기능'에 대해 자세히 논하고 있지는 않지만 실상은 이들 극단적 종교인들이 마침내 정치에 까지 자신들의 영향을 펼치려고 한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nbsp; &nbsp;&nbsp;<br>또한, 저자는 이런 미국 사회의 반동적 진행이 자유주의에 대한 배격으로 이어지는 파시즘 사회의 출현으로 디스토피아적으로 서술하고 있었지만, 기본 맥락은 앞으로 미국 민주주의 정치의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엄혹한 순간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극단주의적 인사들의 논법과 언어 행태가 바로 '돈과 권력을 가진 극단적 소수의 출현'이라는 단순한 서사에서가 아니라, 한 마디로 미국 정치의 위기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nbsp;바로 2장에서, 연방주의자협회의 막후 실력자인 정치 활동가 레너드 레오를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이렇게 기부자들과 활동가들의 돈이 자신들에게 밀려 들자, 미국 문화 · 정치 지형에서 사법부를 바꾸는 것을 목표로 수많은 극보수 싱크탱크, 법률 지원 단체, 미디어 조직, 정책 단체와 각종 행동 조직들이 이에 연합"하여 위세를 보이고 있는 실정이라고 여겨집니다. 연방 대법원의 판사들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고자 하는 연유는 결국에는 이 문화 전쟁에서 저들이 승리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nbsp;우선 이들을 뒤에서 지원하는 부유층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또한 '사회주의'라는 왜곡된 관념의 지배 하에, 자신들을 향한 어떠한 개혁도 용납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이행에서 개인의 이익과 욕망이라는 도덕적 관념의 비판을 '당당한 부자'라는 이미지로 각인 시키고, 많은 선진 국가에서 부유층들이 삼엄한 울타리와 개인 경호원들을 투입해, 일반 시민들과 철저히 삶의 경계를 유지하는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인식과 행위의 근거가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nbsp;<br>이미 이 글의 10장에서 다시 논증되고 있듯이, 이들 부유층에게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나 모두에게 필요한 민주 정치의 이상 따위도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오직 안전 사회라는 틀 안에 사회를 재조직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권력을 재조정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따름인데요.&nbsp;설사 사회가 과두제에 이르더라도 혹은 더 나아가, 폭력적 전체주의에 이르더라도 자신들의 기득권만 보장이 된다면 전혀 상관이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과거 히틀러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던 포드와 같은 부유한 기업가의 분리된 인식과 상당히 맞닿아 있기도 합니다.&nbsp;이러한 인식과 의지 하에 이들의 돈이 극단주의 세력에 살포되고 있는 상황이 지금 미국 정치가 직면한 상황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일전에 읽은 서맨사 하비의 『궤도』에서 평범한 펍에 모여 술을 나누는 3~40대 흔한 미국 남성들이 우주로 향한 우주 비행사들에 대한 동경과 질투를 보이는 장면은 마찬가지로 아메리칸 드림과 상관없이, 철저히 실패한 인생으로 여기는 많은 남성들이 그 분노의 화살을 민주당과 동성애자들, 심지어 LGBT에 돌리는 모습은 이들 계층의 역설적 자화상으로 이해됩니다. 자신들이 사회와 조직에서 낙오되었고 실패했다고 여기는 분노감과 열패감에 사로잡혀, 이런 자신의 감정을 향할 수 있는 대상을 찾은 것이 일반 여성과 성소수자들이었습니다. 물론 저들이 정당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nbsp;이미 8장에서, 저자는 "반민주적 반동의 자금 제공자들, 사상가들, 하사관들, 파워 플레이어들"이라는 용어로 반동적 극우 조직의 인적 설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앞선 저들은 자발적으로 '조직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는 점을 폭로하기에 이릅니다. 저는 여기 더 노골적으로 말해, 저들은 극단주의 세력에 의해 쓰고 버릴 수 있는 무언가의 취급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nbsp; &nbsp; &nbsp;<br>여기에 더해, 국내의 여러 기사에서 미국 정치가 과거 네오콘을 넘어서는 '냇콘 NatCon'의 대두를 다루기도 했습니다만 여기에서도 '냇콘과 워크 Woke'의 대립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가안보 대변인을 지낸 마이클 앤턴은 반 워크를 집요하게 부르짖은 인물이기도 한데요. 이들 냇콘은 작금의 워크를 핵무기보다도 더 위험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들의 증오는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시키는 일종의 프로파간다에 가깝지만 이들이 자술하는 내용들은 쉽게 넘어갈 부분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중대한 위협은 핵보유국도, 기후변화도, 경제침체나 부패도, 악화되는 건강치료나 범죄도 아닌 '워크주의'다"라는 분석은 이들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 깨닫게 만듭니다. 즉, 앞선 앤턴이 이 워크주의가 서방 전체를 삼킬 수 있다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주장한 그 장면은, 글의 2장에서 조심스럽게 언급한 '적대적 정체성 정치'의 진면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글들을 접하지 못했던 독자들은 아니 저런 황망한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으냐? 라고 되물을 수 있을 겁니다. 민주당을 악으로 규정하고 전부 일소해야 하는 대상으로 삼은 극우 단체의 인사들이나, 임신 중단에 대한 기존의 헌법적 조치를 무시하고 여성의 신체적 자기 결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임신 중단을 옹호하는 단체나 인사들을 기독교의 적인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거나 혹은 과거의 고분고분했던 여성들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피켓 시위로 옹호하는 실체적 장면은 이 모두를 포함한 사례가 과연 소수에 불과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를 들게 만듭니다. 저자인 스튜어트가 우려하는 지점은 앞선 열거의 속하는 자들이 조직적으로 정체성 정치와 같은 정신 무장으로 구축되어 있고 이들의 행동에 자신의 이익이 결부되어 있는 부유층의 현금 지원, 그리고 극우를 지향하는 언론인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이들에 앞서서 사상을 강화시키는 싱크탱크의 협력으로 나날이 위세를 더하고 있고, 반면에 미국 내에서 진보주의 운동과 진보적 기독교주의, 그리고 리버럴에 가까운 정치 세력이 가히 지리멸렬한 상황임을 그녀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과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의회를 점령하라고 부추긴 것을 봐도 극단주의자들의 방식은 극단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nbsp;<br>이렇게 미국 정치는 저자의 말마따나 암울한 "정체성 정치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앞선 장에서 그녀는 이러한 반자유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인 극우 정치 자체를 우리가 알고 있듯 사상의 스펙트럼 내의 공히 인정받는 정치 사상이 아니라, 반동적 극우 단체 혹은 극우 정치로 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거의 전세계에서 이 극우 정치를 어떻게 규명하고 분석할 것인가에 대해 각계 각층의 많은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의 극우 정치는 이들에게 매일 돈이 수혈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파급이 단순한 과두제의 실현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의 7장에서, "기부자들은 세금을 낮추고, 공공을 보호할 힘은 없지만 자기들의 사적 이익을 지켜줄 정도는 되는 작은 정부만 보장된다면 날달걀 광신, 청동기 시대를 운운하는 기행, 존넨라트, 민주주의의 종말 따위는 얼마든지 감수한다"는 핵심 요점은 충분히 충격적입니다. 더욱이 각 장에서 이들과 관련된 논증에서, "페미니스트는 강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던, 클레어몬트 링컨 펠로십 수혜자 잭 머피와의 인터뷰를 저자가 따로 언급하는 것처럼, 저러한 생각을 머리에 갖고 다니는 인사가 미국 내에서, 특히나 고학력의 백인 남성들에게서 적지 않게 보인다는 점은 이들을 같은 '인간의 범주'내에 두고 설명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또한, 워크주의에 대한 지독한 혐오와 증오를 바탕으로 "페미니즘은 이 나라를 약화시키는가", "페미니즘의 해로운 궤적" 등을 아주 무분별하게 내뱉는 언사가 이들 극단주의자들에게 자신의 솔직함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여겨진다는 점은 저에게 비참한 기분을 느끼게 만듭니다. 또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함께 획책하고 있는 "동성 결혼 합법화에 대한 반대 정도가 아니라 임금에서 성차별을 허용하고, 이혼법을 70년 전으로 되돌리고, 동성애를 다시 범죄화하려는 시도"까지 나올 정도로 이들은 지극히 반동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br>2장 서두에서 언급된 패트릭 드닌의 "자유주의는 실패했다"는 복합적 외침은 저자의 비판적 인식대로 유구하지 않은 미국 정치에서 칼 슈미트와 레오 스트라우스의 극단적이지만 반동적인 이념을 떠오르게 합니다. 특히 칼 슈미트에게 매료된 미국 정치인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건전한 정치를 결국은 해치게 만드는 '적과 우리 편'의 대결적 개념은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기업을 일군 경제인들에게도 '아주 후련한 개념'을 도출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스트라우스의 영향력은 지금도 상당히 논쟁적이지만 이와 관련된 적지 않은 책을 읽은 저로서도 왜 이렇게 일부 미국인들이 '자신만 알고, 자신이 우주가 되는 극단주의'로 매몰되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단순히 사회 구조적인 측면에서 공공의 의미가 개인주의에 맞서지 못하고 퇴락하고 이들 개인을 둘러싼 선택과 책임의 문제를 오로지 그들 자신의 문제로 획일화 시키는 과정이 교묘하게 중첩되었다고 하더라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근본주의적 성격이 강화된 오늘날의 미국 기독교가 "젠더 질서에 대한 불안, 특히 동성애 의제와 트랜스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포가 그들을 기성질서라고 간주하는 대상에 맹렬히 돌진하게 만드는 로켓 연료"다 라고 기독교적 구원 서사와 맞물려 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가 따로 구술한 이 대목은 극우 정치의 이익과 기독교 근본주의의 폭력적 사회 개조가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특히, 저들이 "트랜스젠더 이데올로기"라는 새로운 단어 채용이 스튜어트의 이 책에 수차례 등장한다는 점에서, 작금의 미국 기독교주의가 어느 지점에 추락하여 망가지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저로서는 현재의 근본주의적 기독교가 미국 헌법의 유구한 전통인 "정교 분리"를 무너트리려고 하는 의중에는 (캘리포니아 채프먼 대학의 법학전문대학원의 교수이자 전 학장인 존 이스트먼은 "미국 건국자들이 애초에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원한 적이 없었다는 식으로 사실이 아닌 내용을 공공연하게 주장했습니다.)&nbsp;"인간은 마땅히 불평등하게 태어났고 남녀는 마땅히 차별적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는 근본 시각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적이었던 '자유주의'의 목숨 줄을 끊으려는 시도로 읽힙니다.&nbsp;물론 저들이 왜곡해 받아들인 (시장 및 불평등한) 자유주의와 제가 생각하는 계몽주의에 기반한 자유주의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밝혀두고 싶습니다.<br>끝으로 '다양성은 미국 사회를 파괴하는 트리거'라고 여기는 극단주의자들의 범람은 그 자체로 미국 민주주의의 위협이자, 오늘날 민주 정체가 당면한 위기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또한, 다수의 미국 부유층들이 배인 우월주의에 사실상 동의하고 있다는 분석에도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고 '동성애의 위협'이라든지, 워크가 핵무기보다 위협적이라는 표현 등 극단적 정체성 정치의 여파가 결국에는 민주주의를 파국으로 이끌 것이라는 점은 결코 상상의 산물이나 허접한 소설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저자인 스튜어트는 글의 결론에서 아직은 저들에 비해 우리가 절대 다수임을 표방하고 었었지만 미국 정치가 공화당의 반자유주의 정당화와 더불어, 이를 기본으로 극우 포퓰리즘의 대두, 그리고 과거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와 미국 내에서 리버럴 등에 의해 점차 요구되고 있는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아주 극명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경제 엘리트들 및 부유층의 이합집산 등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미국 정치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과거 공화당이 로널드 레이건을 앞세워, 민주당과 진보, 및 리버럴 과의 문화 전쟁에 최종적으로 승리하고자 몇 십 년에 걸쳐 설계했고, 여기에 공교육에 대한 거부와 기독교 민족주의에 의한 이민자 배척 및 소수 성적 그룹에 대한 증오는 로버트 달이 강조했던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인 다원주의를 악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에 저자는 거듭 선거 제도를 건전하게 보존하고 극단주의 시대에 자신과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어떤 조직을 이뤄, 사실상 사회 연대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의 선명성을 차치하더라도 결국 이러한 과정이 쉽지 않아 보인다는 점은 거의 자명해 보입니다.<br>-미국에서의 극단주의 흐름이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신우파 New Right로 거의 통합하여 설명되고 있습니다. 저는 저자의 논증에서 도널드 트럼프 1기 하의 극우 포퓰리즘이 기존 정치 무대에서의 정치 투쟁 이후, 백인 우월주의를 비롯한 극단주의자들 그리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함께 영합하여, 이른바 '신우파'라는 탈을 쓰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nbsp; &nbsp; &nbsp; &nbsp; &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66/62/cover150/k50213029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6666214</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