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千洞好世, 얕은 책수레 (베터라이프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과연 책을 끊을 수 있을까요</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Mon, 27 Apr 2026 15:44:27 +0900</lastBuildDate><image><title>베터라이프</title><url>http://image.aladdin.co.kr/Community/myface/pt_7631671592278059.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베터라이프</description></image><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아그네스 그레이 - [아그네스 그레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230700</link><pubDate>Tue, 21 Apr 2026 21: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23070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02135236&TPaperId=172307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34/90/coveroff/k50213523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02135236&TPaperId=1723070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아그네스 그레이</a><br/>앤 브론테 지음, 허진 옮김 / 윌북 / 2026년 01월<br/></td></tr></table><br/>앤 브론테는 1820년 1월, 잉글랜드 웨스트오크셔 주 브래드퍼드의 자치구 중 하나인 손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친인 패트릭 브론테는 아일랜드계로 당시 교구의 부목사로 재직했으며, 모친인 마리아 브론테 (결혼 전 성은 브랜웰)는 콘월의 상인 가문의 여식이었습니다. 앤은 이들 사이에서 여섯 명의 자녀 중 막내였습니다. 그녀는 샬럿, 에밀리, 브랜웰의 여동생이었는데, 이 중 샬럿과 에밀리는 영문학에서 거의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1824년 중반, 그녀의 부친인 패트릭은 마리아, 엘리자베스, 샬럿, 에밀리를 웨스트요크셔 크포프턴에 있는 크로프턴 홀 학교로 보냈고, 그후 랭커셔의 코완 브리지에 있는 성직자들의 자녀를 위한 학교로 보냅니다. 그렇지만 외부에 나갔던 엘리자베스와 마리아가 결핵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가족, 특히 아버지인 패트릭이 남은 아이들을 다시 멀리 보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샬럿과 에밀리는 코완 브리지에서 나와 5년 동안 이모 엘리자베스와 패트릭에게서 교육을 받게 됩니다. 아이들은 목사관 밖의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교류하지 않았는데 특히 앤은 이모와 같은 방을 쓰면서, 이모의 보살핌을 받게 됩니다. 앤은 집에서 음악과 그림을 공부했고 아버지의 잘 갖춰진 서재에서 호머, 버질, 셰익스피어, 밀턴, 바이런 등의 글을 접하며 문학에 대한 열망을 키우게 됩니다. 앤이 11살이 되자 가족으로부터 그녀가 "사랑스럽고 온화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동시에 이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기도 했습니다. 1839년 4월, 19세가 된 앤은 웨스트요크셔 주 커클리스 자치구에 소재한 미어필드 근처, 블레이크 홀의 잉엄 가문에서 가정 교사로 일을 시작하는데요. 잉엄 부부는 당시로서는 매우 부유한 축에 속했고, 그녀는 이곳에서 다섯의 아이를 교육하는데 애를 겪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때의 경험이 『아그네스 그레이』를 쓰는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후 1848년 9월, 언니인 브랜웰이 끊없는 음주로 건강을 잃어 사망했고, 그 직후 에밀리 역시, 큰 병을 앓게 되는데, 두 달 동안 악화되어 그녀 역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다른 언니들보다도 앤은 에밀리에게 마음을 열고 크게 의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의 지나친 슬픔은 앤의 건강을 해치게 되는데, 크리스마스 기간에 심한 독감에 걸렸고, 이듬해인 1월 초에 의사로부터 폐결핵 진단을 받게 됩니다. 결국 5월 28일, 오후 2시경, 29세의 꽃다운 나이로 앤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유해는 노스요크셔 주 스카버러에 있는 세인트 메리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Agness Grey"로 지난 1847년에 출간되었고, 이번에 번역하게 된 원전은 1989년에 펭귄 클래식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최초 번역은 2007년에 나온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번의 번역본은 최근인 2026년 1월에 이뤄졌습니다.<br><br>앤 브론테의 이 작품은 많은 분량의 작품인 '와이드펠 저택의 여인'과 함께 그녀의 유일한 장편이기도 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아그네스 그레이'는 앤의 언니인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과 같은 해에 출간되지만, 이 작품은 자매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샬럿이 관여하여, 새로운 판본이 재출간되기도 했습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앤의 이 장편은 그녀 자신의 가정교사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글이기도 합니다. 이 '아그네스 그레이'의 설정 상, 약간 흥미로운 부분은 극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아그네스의 수기(手記) 형태로 서사가 진행되고, 그녀의 언행과 내밀한 생각들은 그 자체로 작가인 앤 브론테의 이야기로 쉽게 감정 이입이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정 부분 이 작품은 앤의 자전적 소설로 읽힐 수 있겠습니다.<br><br>아그네스의 부친은 영국 북부의 목사로 재직했고 모친은 지방 대지주의 딸로 결혼 전에는 그야말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이 결혼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대했지만 자신의 딸은 무엇보다 사랑을 위해 이 가난한 목사와 결혼을 감행하게 됩니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입 초반의 상황은 그녀의 어머니와 외가는 거의 의절을 한 상태로 추측됩니다. 이런 아그네스에게는 위로 메리라는 언니를 두고 있는데, 이 둘의 나이 차이는 열 살 정도로 추정됩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목사의 살림살이라는 것이 그다지 풍족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현명하면서 검소한 태도를 지닌 모친의 절제력 있는 운영으로 필요한 하인들을 두는 등, 약간의 사치를 부릴 수 있었지만 부친이 신뢰하는 사람의 말만 믿고 투자한 상행이 망망대해의 난파로 마감됨으로써, 집안이 적잖은 빚더미에 앉게 되었습니다. <br><br>아그네스가 18세가 되자, 그녀는 부모를 설득해 다른 집의 가정교사를 하겠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부모가 모두 반대를 했지만 무엇보다 집에 경제적 도움을 주면서 어른답게 자신의 몫을 하겠다는 결심이 그들의 반대를 이겨냅니다. 이런 아그네스가 처음 일하게 된 '블룸필드 가'는 자신의 아이들을 전혀 객관적으로 성찰하지 않는 오만한 부인의 과욕으로 그 문제가 드러납니다. 특히 이곳의 큰 아들인 '도련님 톰'은 나이에 맞지 않게 '거짓 술수'와 오로지 자신을 위해 어른을 수단으로 삼는 '교활함'까지 갖춘 아이인데요. 이 소년은 자신이 집안에서 지배자로 군림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그저 반항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동생들 뿐만 아니라 가정교사까지 마음대로 하려고 곧잘 술수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가문의 등장하는 인사들은 전부 비틀린 인물들로 '어른의 마땅한 역할'이라든지, '겉과 속'이 매우 다르게 행동하거나, 지속되는 언사와 행동들이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들이 자신들의 돈과 지위를 바탕으로 소위 '왕국'처럼 오만하게 지낼 수 있다손 치더라도 당시 상업을 기반으로 대두하고 있던 '계급들'에 대한 실질적인 내실의 빈약은 아마도 영국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br><br>주인공인 아그네스는 이러한 혹독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무기는 "인내심, 단호함, 끈기"로 순간의 감정으로 자신을 버리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특히 네 아이를 지도하는 가운데(물론 한 아이는 매우 어리지만) 어른도 우습게 보는 쉽지 않은 본성에 이들에게 따귀라도 쳤으면 행동에 경종을 울릴 수 있겠지만 그녀는 그런 태도를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작가인 브론테는 극의 지문을 통해, 이 시대 아이들의 훈율을 위해, 손을 올리는 어른들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결국&nbsp;이 대목에서 작가는 인간은 어렸을 때부터, 최소한의 분별력을 갖추려고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이에 좀 더 기독교적으로 해석하자면 겸허함과 겸손을 갖추는 것을 인간의 의무로 여겨야 한다고 간접적으로 피력합니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인 아그네스 역시, 매우 신실하고 스스로 종교적인 면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사람에게 도덕성을 중요하게 여긴다든지, 사람에 대한 진실한 태도를 중요시하는 점에서 말입니다.&nbsp;물론 여기서 굳이 현대식의 교육 환경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블룸필드 가의 인물들 대부분이 스스로의 분별력이 있다고 볼 수는 없었기에 그 영향이 그대로 아이들에게 부정적으로 이어졌다고 보면 될 것 같았습니다.<br>그렇게 채 1년이 되지 않은 시간을 블룸필드 가에서 혹독하게 보낸 아그네스는 어머니의 우려와 연민을 뒤로 하고 다시금 가정교사 자리에 지원합니다. 아그네스는 이미 모친이 가르친 바대로 "피아노, 노래, 그림, 프랑스어, 라틴어, 독일어"까지 능통한 여성으로서도 보기 드문 교양인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녀가 오만한 본성을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게 공개 지원을 통해서 두 번째 가정교사로 일하기 위해, 집에서 110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인 호턴 로지의 '머레이 가'로 떠나게 됩니다. 이 머레이 가는 마찬가지로 당시 귀족 다음으로 사회적 힘을 얻고 있었던 '젠트리 계급'으로 꽤나 많은 부를 축적한 신흥 가문이었습니다. 이때의 관습대로 장녀에게 칭하게 되는 '머레이 양'인 로절리는 극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상당한 미모를 갖춘 아가씨로 여겨집니다. "몸매가 완벽하고 살갖은 고우면서도 뺨에는 혈색 좋은 느낌"이 드러난다는 표현으로 어느 정도 미인임을 감안할 수 있었는데요. 다만 머레이 가의 로절리는 활기차고 낙천적인 성격 이면에 사람에 따라, "차갑고 오만하며, 거만하면서도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양면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부목사의 배경을 갖고 있던 아그네스에게 로절리가 간혹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그녀 역시, 분별이 있는 캐릭터라고는 볼 수 없었습니다.<br>"노처녀 소리를 듣기 직전까지 철저하게 즐기면서 온 세상을 유혹"하겠다는 로절리의 강한 응답은 뒤이어, 모두가 바라는 숙녀를 얻지 못하는 남자들의 마음을 찟어 놓고 싶다는 식으로 첨언됩니다. 앤 브론테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본성에 대해, 아그네스의 입을 통해, "분별과 도덕성, 그리고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을 예로 듭니다. 분명 로절리는 앞선 진술의 반대쪽에 있는 인물로 단순히 미모를 갖춘 소녀의 허영심 이상의 교활함을 드러내는데요. 지역의 교구 목사인 햇필드의 외모를 칭찬하면서도 그녀 스스로가 통찰력이 전무하여 그의 지성에 대한 잘못된 판단을 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종이라 볼 수 있는 햇필드 역시, 종교적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본질적으로 매우 오만한 인물로 스스로 하찮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해 가차 없는 평가를 내리기도 합니다. 아그네스는 호턴 로지 지역의 영지민들 가운데 빈한한 삶을 살고는 있지만 신실하고 겸손한 낸시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햇필드는 그런 낸시를 경멸합니다. 더욱이 로절리와 햇필드 이 두 사람은 진실된 면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위선적인 인물들로 이들의 관계 역시 그 가벼운 본성 만큼이나 쉽게 종말을 고하는데요. 여기에 "자신의 위력을 발휘하고 싶어하는" 로절리가 스스로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는 부목사인 웨스턴에 대한 아주 경박한 평가는 극의 전환에서 매우 중요한 서사로 자리매김합니다.&nbsp;<br>그저 삶의 낙관적인 전망을 떠나 아주 안일한 결정으로 결혼을 하게 된 로절리에게 아그네스는 어떤 질투나 이죽거림의 태도가 아니라, 진실로 로절리의 혼인을 걱정합니다. 부유한 유지인 토머스와의 결혼이 그녀의 모친이 나서서 주도한 결과로 이어졌고 그녀가 평생을 함께할 한 남자의 본성과 도덕성, 그리고 진실됨의 여부에 크게 개의치 않고 오로지 '안락한 삶'을 위해서만 목표로 삼는데요. 이러한 과정을 지켜본 아그네스는 로절리에게 몇 번이나 조언과 우려의 빛을 보내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습니다. 특히 겸허하면서 어려운 지경의 영지민을 보살피는 웨스턴을 자신의 매력으로 충분히 사로잡을 수 있다고 단언하는 로절리의 그 끝 모를 태도는 그녀의 불행한 미래를 예고하는 듯 보였습니다. 나중에 '애슈비 부인'이 된 로절리가 애슈비 파크로 아그네스를 초대해 이들이 몇 년 만에 재회했을 때, 이 신중하지 못했던 결정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는데요. 그저 보이는 것을 그대로 과신하고 사람의 값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기적이면서 자기본위적 태도자체는 작가인 앤 브론테가 가장 경계했던 인간상이 아니었나 추측해 봅니다. 앞서 이미 언급했지만 앤 브론테 역시, 제인 오스틴이 그녀의 작품에서 중요시 여겼던 점인, "인간의 분별력"에 대해 마찬가지로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제인 오스틴은 분별력이 없는 인간들에 대해 가차 없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는데요.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극의 골자를 구성하는 주요 인물들의 끊임없는 분별의 부재를 여실히 잘 드러내고 있었습니다.<br>극의 서사에서 후반부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대체로 예상되는 방향으로 흘러, 대체로 무난했다고 생각합니다. 아그네스의 결혼 역시 익히 예측이 된 모습이기도 했는데요. 특히 애슈비 부인과 재회하는 장면에서 머레이가 사람들, 그리고 호턴 로지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소식을 묻는 과정에서, 제일 나중에 언급되는 이의 뜻밖의 이주, 그리고 전혀 소개되지 않다가 드디어 드러나는 그의 풀네임은 이러한 정황이 소설적인 측면에서 다소 전형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아그네스와 그와의 재회 역시도 어느 정도 짐작이 되기도 했는데요. 다만, 사람을 진정으로 알기 위해서는 겉모습이 가리고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는 통찰이 때론 필요하고, 마찬가지로 예나 지금이나 그 사람의 지위나 가진 부가 누군가에게 욕망의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면 그 결말 역시, 분별력을 잃은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이 작품은 남겨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인간의 본성에서 도덕적인 측면 혹은 종교적 측면에서 더 크게 다가오는 겸허한 속성, 그리고 훈련된 지적인 능력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과신하지 않는 태도와 중요한 선택의 문제에서 분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작품이 누구보다 갓 이십 대에 접어든 사람들에게 유용한 교훈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무엇보다 작가인 브론테는 우리가 어떠한 인간들을 경계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 소설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이곳의 인물들이 오가는 자연 풍경이나 한가한 일상을 담은 서사 한 가운데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모든 인간들 가운데,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교훈을 다소 극단적이지만 이 작품이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nbsp; &nbsp;<br><br>-극 후반부, 로절리가 아그네스에게 햇필드과 관련된 가당찮은 욕망과 그에 대한 낮잡은 태도를 드러내는 장면에서, "그 매정한 허영심이 놀랍고 역겨웠다"는 꽤나 놀랄만한 표현이 나옵니다. 저는 이 장면의 서사를 거의 열 번 넘게 반복해서 읽게 되었는데요. 이 작품 전체의 묘사나 서사를 통틀어 가장 소름 끼치게 대단했던 전개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저급한 측면의 본성이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도 드러날 수 있다는 점에 가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nbsp; &nbsp; &nbsp; &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34/90/cover150/k50213523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349077</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개와 늑대 - [개와 늑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223071</link><pubDate>Fri, 17 Apr 2026 20: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22307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22935823&TPaperId=1722307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512/17/coveroff/k42293582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22935823&TPaperId=1722307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개와 늑대</a><br/>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3년 09월<br/></td></tr></table><br/>원래 본명이 이리나 르보브나 네미로프스카야인 이렌 네미롭스키는 1903년 2월, 당시 러시아 제국에 속해있던 우크라이나 키예프(현재는 키이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친은 레프 보리소비피 네미로프스키로 당시 키예프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은행가였습니다. 모친인 파니 요보브나 마리골리스 네미로프스키로 그녀에게는 별다른 가정사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딸인 이렌과 적잖은 불화를 겪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어머니와의 불안정하고 불행한 관계는 그녀의 많은 작품에서 주요한 뼈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시작될 무렵의 불온한 기운을 읽은 그녀의 가족은 러시아 제국을 떠나, 잠시 핀란드로 이주하게 됩니다. 1918년을 그곳에서 보낸 후, 그녀의 가족은 파리에 정착하게 됩니다. 네미롭스키는 곧 소르본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고 18세가 되던 해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1929년에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 많은 딸과 유대인 은행가의 이야기를 담은 '데이비드 골더 (국내에 번역된 제목은 『몰락』)'를 출간합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에서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인 1930년, 줄리앙 뒤비비에 감독에 의해 영화화가 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데이비드 골더의 원작자가 밝혀졌을 때, 당시 프랑스 문단은 여성 작가가 어떻게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는지 놀라워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쌓은 작가적 명성을 통해, 그녀도 파리에서 꽤나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8년에 자신이 신청한 '프랑스 국적' 취득이 당국으로부터 최종적으로 거부당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녀는 1939년에 유대교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인데요. 더욱이 극단적인 민족주의 잡지인 '캉디드'와 같은 곳에 글을 기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덧씌워진 '유대인'이라는 혐오는 그 민족의 역사 만큼이나 뿌리가 깊었습니다. 1940년이 되자 네미롭스키의 남편은 더 이상 은행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고, 그녀 역시 유대인이라는 이유 만으로 작품을 출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결국 나치가 수도 파리에 접근하자 그녀의 가족은 부르고뉴 지역의 이시레베크로 급히 피난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부르고뉴와 파리를 오가며 생활했던 네미롭스키는 1942년 7월 16일부터 17일까지 비시 프랑스 정부 경찰이 독일 점령 당국의 지시에 따라 파리에서 유대인들을 체포한, '벨 드 이브 검거 작전'에서 '유대인 무국적자'라는 이유 만으로 연행되어, 당시 오를레앙에 있던 비시 정부의 피티비에르 수용소로 끌려갔고,  1942년 7월 17일, 982명의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나치의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습니다. 이틀 후,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네미롭스키에게 나치는 유대인 식별 번호를 새겼고 이로부터 한달 후 쯤에 그녀는 장티푸스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 역시, 1942년 11월 6일,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즉시 살해되었습니다. 작가 자신과 남편의 이 불행하고 비참한 죽음은 유대인이기 전에 프랑스인과 다름없었던 그녀의 삶 자체를 유럽에 의해 인정 받지 못한 것이며, 나치 독일은 그 엄혹한 체제 만큼이나 인간이라고 전혀 볼 수 없는 잔혹한 행위 등을 국가 사회주의이라는 미명하에, 주저 없이 시행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정권이 되었습니다.&nbsp;따라서 그녀의 이 작품은 원제, "Les Chiens et les loups"로 지난 194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9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특히 이 '개와 늑대'는 그녀가 살아 생전에 마지막으로 출간된 작품이기도 합니다.<br>이렌 네미롭스키가 쓴 이 특별한 작품의 의의는 유대인과 그 민족을 다른 여타 문학들과는 달리, 그동안 우리가 명확히 알지 못했던 1900년대의 유럽, '유대인 디아스포라'에 대해, 상세히 알려주고 있는 점입니다. 특히 1900년대 초, 러시아 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우크라이나에서 유대인들 현지인들과 따로 분리한 '게토'가 이미 존재했다는 부분과, 이 게토가 실상은 많은 부와 권력을 가진 최상위 유대인 계층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들로 거주 구역을  나눴다는 놀랄만한 서사가 무엇보다 눈에 들어왔습니다. 또한, 이 작품에서 의미심장하게 다루고 있는, "그럼에도 돈이 많은 유대인은 쓸모가 있다'는 메타포 자체도 제게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기도 했는데요. 여기에 작품 서두에 등장하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에 대한 언급 역시, 이 대다수 유대인들이 실제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배타적이고 몰이해적인 혐오에 직면하고 있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br><br>러시아를 비롯한 각지를 오가며 물건을 팔고 있는 이스라엘 시너는 아내를 여의고 홀로 남은 딸을 힘겹게 키우고 있는 중년의 인물입니다. 아마도 키예프로 추정되는, '우크라이나 어느 도시'의 하층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구역에 허름한 집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은 딸의 외할아버지인, 장인까지 부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겨우 겨우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름만 사촌 동생의 부인이 남편을 잃고 그에게 의지하기 위하여 오게 되는데요. 아마도 유대인들의 관습 상, 혼자가 된 집안의 여인과 남은 가족을 친척이 부양하게 되는 의무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기존의 빠듯한 생계에도 불구하고 시너는 별다른 군말 없이 이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의 딸인 아다에게는 어린 나이에 겪게 되는 환경의 변화로 이렇게 대면하게 된 '라이사 숙모'와 마찬가지로 사촌 남매인 릴라와 벤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br><br>그런 와중에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 '러시아 기병대'를 비롯한 군중 무리들이 유대인 게토 지역을 침범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는 당시 암묵적인 사주로 이뤄진, '포그롬 pogrom'이라는 유대인 약탈 행위이자 박해이기도 합니다. 아다의 아버지와 숙모가 야밤에 아직 어린 아다와 벤을 좀 더 안전한 지역으로 보내는 와중에 그들의 식모이자 하녀인 나스타샤와 부지불식간에 떨어진 이 두 아이들은 유대인 상류층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자신과 성은 동일하지만 완전히 다른 '시너'의 대저택이 그곳이었습니다.바로 이때, 아다의 남은 평생을 의식하고 좌우하게 될. '해리 시너'와의 극적인 조우가 이뤄집니다. 물론 이 만남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대면이기도 했습니다. 극에서 로스차일드와 비견될 정도로 부유하고 권력층과 유대가 깊은 본래의 '시너 가문'은 유대인 사회에서 독보적인 존재들이기도 헸는데요. 그들은 러시아 제국에서 큰 돈이 될 만한 사업들을 하고 있었고 이들 유대인들이 당시 상류층에게 특별한 '돈줄'임과 동시에, 이 가문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득에 기여할 것임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돈 많은 유대인'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처럼 이득이 될 만하다는 서사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더해, 극중에 등장하는 "유대인에게는 부유함이 곧 구원이다"라는 증언에 가까운 읊조림은 그야말로 '현실의 확인된 서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네미롭스키의 이 작품은 돈이 있는 유대인 상류 계층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들과의 확연히 분리된 인식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거듭 반복해서 드러내게 됩니다.<br><br>이때 딸의 갑작스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아다의 부친인 이스라엘 시너는 그에게 있어 '시너 본가'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극중에서 '그다지 똑똑하지는 않지만 꾀를 부리지 않고 꾸준한 성실성'을 몸으로 체득한 그는 일련의 시험을 거쳐, 성공적으로 시너 가문의 일에 스스로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그는 딸과 가족을 부양하는 데, 돈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데요. 물론 하루 아침에 풍족하고 부유할 수는 없겠지만 이들은 어느 정도 삶의 여유를 느끼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서 자신의 딸에 대한, 야심만만한 야망을 갖고 있던 라이사는 딸과 조카인 아다의 교육을 위해, 파리로 이주해야 한다는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그녀는 여기에 있어봤자 나날이 미모를 드러내고 있는 큰딸의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에 라이사는 프랑스에서의 경험을 갖고 있는 '마담 미미'와 협력하여, 이스라엘을 강하게 설득했고 이때 이들이 내세운 근거는 외동딸인 '아다의 더 나은 교육 기회'였습니다.<br><br>1917년, 러시아 혁명이 들불처럼 러시아를 휩쓸자, 이스라엘 시너의 사업 역시, 기존의 안정을 박탈 당하게 됩니다. 자신의 딸과 제수 가족에게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내주던 시너의 돈이 결국 마르게 되자 라이사는 부득이하게 생계를 위해, 그 자신과 전혀 맞지 않는 '옷 수선집'을 차리게 됩니다. 이때 자신의 딸보다 더 뛰어난 미모를 꽃피우고 있던 아다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라이사는 종종 그녀에게 손찌검을 하거나 저주를 퍼붓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적, 해리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반추하고 그때의 기억을 자신의 생명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던 아다는 숙모의 독심으로 말미암아, 더욱 내면으로 침잠하게 됩니다. 극중에서 자신이 돈 많은 남자를 골라 결혼했던 라이사와 마찬가지로 딸에게도 그러한 기회를 주고자 노력하는 라이사와, 아다는 완전히 대립되는 캐릭터로 자리합니다. 아마도 당시 좋지 않은 환경에 놓여있던 많은 여성 유대인들이 가졌을 법한, 소위 '상향혼'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던 아다는 무엇보다 '잔잔한 일상'과 '마음 가는 대로 살 수 있는 환경'을 열망합니다. 이는 단순한 서사로 봤을 때, 라이사가 그녀에게 행하는 손찌검과 증오에 가까운 발언 등이 직접적으로 아다를 무너뜨리지는 않았지만,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사촌인 벤과의 결혼을 감행하는 용기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주인공인 그녀가 '상향혼'을 거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전혀 없는' 결혼을 선택하게 된 것인데요. 그런 연유로 그녀가 집착하는 '해리에 대한 열망'이 이런 의도적인 설정에서 더욱 도드라지게 되었습니다. <br><br>자신의 어머니와 멀어지는 것을 감안하고 그동안 흠모해 왔던 아다와 결혼한 벤은 그 시대가 표출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편견'을 복합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입니다. 자신이 추구해야 될 것은 오로지 '돈'이며, 이것은 유대인들의 숙명이라고 언급하기까지 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다에게 보이는 집착에 가까운 마음과 반대로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점'을 체념하며 받아들이는 면모 또한 함께 드러냅니다. 그런 연유로 그는 무엇보다 아다가 있는 집을 벗어나 하염없이 외부로 겉도는 상황을 반복합니다. 이런 와중에 유년 시절에 겪었던 우크라이나 (러시아 제국 하의)와 무의식의 영역에서 자신을 지배한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극복할 수 없었던 아다는 '특유의 유대인의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엄혹한 분위기이면서 시대의 어두운 분위기를 안고 있던 유대인들의 면면과 그들이 처해 있던 도시와 환경을 그려내는 것으로 그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게 됩니다.<br><br>해리 역시, 아다와 마찬가지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어린 시절 '포그롬'에 대한 기억을 선연하게 갖고 있습니다. 자신을 포함한 유대인 민족에 대한 양가 감정과 명확히 분리되지 못한 인식과 그것에 사로잡힌 삶을 그는 동시에 영위하고 있었는데요. "해리는 유대인 특유의 결점과 마주할 때면 기독교도보다 더 예민하고 격하게 눈살부터 찌푸렸다."는 후반부의 서사는 이를 증명합니다. 여기에 "갈망하는 것을 얻으려는 그 끈질긴 에너지, 거의 본능적인 욕구, 주변의 눈치를 볼 줄 모르는, 체면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뻔뻔함, 그의 정신 속에서 이 모든 건, '유대인의 불손'이라는 오직 하나의 이름표 아래 정리되었다" 부연 설명됩니다. 이처럼 해리는 자신이 분명한 유대인의 후손이면서도 반쯤 왜곡된 그 '유대인 정체성'을 혐오합니다. 아마도 그런 연유에서 순수 프랑스인이었던 로랑스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애정 없이 결혼한 것이기도 한데요. 물론 그의 아내인 로랑스의 부친이 부유한 은행가이긴 했지만 해리가 돈 때문에 로랑스와 결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그에게 장인이 되는 로랑스의 부친은 애초에 이 결혼을 반대하는데요. 그는 어릴 때부터 크게 반항하지 않은 막내딸이 해리의 청혼을 받았다는 말에 가당치도 않다는 식으로 대처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동쪽으로부터 오는 것들"에 대한 극심한 혐오를 드러냅니다. 저는 이 부녀의 서사에서 작가인 네미롭스키가 생전에 프랑스 사회에서 어떠한 냉대를 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동쪽에서 온 유대인'이라는 설정은 당시 서유럽인들의 정서에는 어떠한 인종주의에 놓여 있었는지 짐작하게 할 만합니다. 그럼에도 작중에서 해리는&nbsp;그녀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더불어, 그동안 유대인 전통에 따른 '혈통 결혼'에 은연중 거부 의사를 가졌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을 애지중지 키운 어머니와 집안의 혈통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충동적인 모험의 길로 스스로 이끌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br>이후, 파리에서 다시 해리와 재회하게 된 아다와 이들을 둘러싼 벤과의 연민과 갈등을 주축으로 극은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물론 직전에 읽었던 '몰락 (데이비드 골더)'과는 다르게 극의 전환에 있어 당사자들의 '몰락'은 예견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를 사실상 유인한 벤 역시, 아다를 떠나는 것으로 끝나고 아다는 스스로 마음이 찢어지고 고통에 처하지만 해리의 안전과 삶을 위해 그의 곁에서 멀어지는 것을 결정하는데요. 이 과정에서 해리의 아내인 로랑스에게 있어, 아다가 차라리 그의 정부(情婦)였다면 쉽게 잊고 넘어갈 일이었지만 아다와 해리 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정서적으로 그리고 함께 기억을 공유하는 친구이자 특별한 우정 관계"라는 용서할 없는 그 관계성이 자신을 더욱 나락을 이끌었다는 간접적인 묘사는 큰 설득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연계가 상당히 상투적으로 느낄 수도 있지만 온전히 자신의 사람이 될 수 없는 사람과의 관계 지속은 그야말로 '심연의 고통'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저 역시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다가 맞게 되는 인생의 제2막은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는데요.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자세히는 언급할 수는 없겠으나 극이 일관되게 설명했던 아다의 개인적 인생사와 맞물려, 그동안 그녀가 견지했던 삶의 방향성과 마지막의 예상치 못한 장면은 서사의 관점에서 통일된 느낌이 들지가 않았습니다. 물론 여자에게는 갈망과 두려움 그 사이를 넘어서는 중요한 문제겠으나 만약 이 부분에 조금이라도 해리와 연관되어 있다면 마지막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독백하는 '그와의 연결성'에 대한 언급은 적당한 대미를 장식하기에 충분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점이 아마도 이 작품의 열린 결론이라는 증거일 수도 있겠습니다.&nbsp;전체적으로 극의 종결은 어느 정도 모호하게 마무리되고 있어서 작가인 네미롭스키가 의도적으로 이런 부분을 염두해 두지 않았나 잠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nbsp; &nbsp; &nbsp; &nbsp; &nbsp; &nbsp;<br><br>- 본문 229 페이지에 편집 오류인지 한 문장에 두 번이나 마침표가 찍혀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br>- 마찬가지로 본문 280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br>- 책 제목과 관련해, 극의 후반부에서 '벤과 해리'로 암시 되는 구절이 있었는데요. 개와 늑대로 대비되는 이 두 종은 극명한 점과 더불어, (종과 사회적인 인식 사이에)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제목의 차용 자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br>&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2512/17/cover150/k42293582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5121750</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서방의 패배 - [서방의 패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205013</link><pubDate>Wed, 08 Apr 2026 21: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20501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72135252&TPaperId=1720501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83/14/coveroff/k77213525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72135252&TPaperId=1720501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서방의 패배</a><br/>에마뉘엘 토드 지음, 권지현 옮김 / 아카넷 / 2026년 02월<br/></td></tr></table><br/>1951년 5월, 프랑스 중북부 일드프랑스의 이벨린 주, 생제르망앙레에서 태어난 에마뉘엘 토드는 부친인 올리비에 토드는 저명한 언론이었고, 모친인 안네-마리 니잔은 작가 집안의 여식이었습니다. 특히 토드의 외할아버지는 작가 폴 니잔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친할머니 줄리아 오블라트는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출신으로, 평소에도 에마뉘엘 토드는 자신의 논저들을 통해, 스스로 유대인계임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인류학 분야에 큰 관심을 가졌던 토드는 자신이 태어난 지역의 유명한 고등학교인 생제르망앙레 국제고등학교 (Lysee international de Saint-Germain-en-Laye)에 입학합니다. 1968년 5월, 그 유명한 '68혁명' 당시, 그는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하기도 했지만 그의 활동 시기는 매우 짧았습니다. 이후 파리 정치학 연구소에서 인류학적인 관점을 가진 두 역사가인, 피터 라슬레와 앨런 맥팔레인의 지도 아래,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이런 그에게 전세계적 주목을 받게 되는 연구가 1976년에 있었습니다. 그는 유아 사망률 증가와 같은 사회적 지표를 기반으로 과학적 분석과 아날 학파의 접근법을 사용해, 소련의 붕괴를 예측하여 당시 학계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또한 1992년에는 유럽 연합 조약인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명백히 반대했고, 이 시점에서 '사회적 균열' 또는 '사회적 격차'라는 용어를 그가 처음 사용했다고 언론에 통해서 나오기도 했는데, 그는 이를 부인합니다.  이런 인류학적인 역사 접근 방법과 유럽 연합 정치에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최근에는 (2002년 이후) 미국의 쇠퇴와 그에 따른 전세계 정지경제학적인 변화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a Défaite de l'Occident"으로 지난 202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6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br><br>그의 이 논저는 출간 당시, 프랑스에서 큰 논란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에겐 서구 진영에 대한 터무니 없는 비하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니힐리즘과 관련된 수사가 그렇습니다. 그럼에도&nbsp;제가 저자의 생각에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 부분은 지금의 유럽 연합이 자신들이 구축한 이데올로기가 동유럽이나 혹은 권위주의적인 러시아보다 정치경제학적인 면에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오만입니다. 이것은 유럽 연합 지도층의 뿌리 깊은 우월 의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저자인 에마뉘엘 토드는 자신의 이 논저에서, 앞선 '정치경제학'이 런던을 비롯한 유럽의 학계에서 가장 주목 받았고, 더불어 세계의 학문으로 여겨져 왔다고 소개합니다. 그럼에도 이 '중요한 학문'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본질을 제대로 예견하지 못한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 글은 마치 유럽 연합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국제정치적 행위자인 러시아를 제대로 이해해 보려는 조금의 노력도 하지 않은 것으로도 읽힙니다. 다만, 현지 프랑스 언론이 이 논저에 대해, 작금의 정세를 단순히 유럽과 미국에 밀접한 개신교의 유산이 쇠퇴했고 여기에 니힐리즘적 자기 파괴가 이뤄져, 이 틈을 교묘히 파고든 권위주의적 러시아의 승리라고 보는 관점은 그 기술적 논법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 어려운 측면이 있기도 합니다. 더욱이 미국은 2010년 이후로, 기독교적 세계관과 기독교주의적 정치 개입이 강화되어 왔기에 이것을 앞선 개신교의 쇠퇴와 결부짓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전반적인 관점에서 토드의 이 책은 흥미로운 부분이 적지 않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저자가 반복적으로 진술하는 "서구 자유 진영이 그동안 러시아를 방만하게 분석해 왔다"는 평가는 저자를 포함한 일부의 의견이라고 할지라도 유럽의 엘리트들이 새겨 들어야만 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br>그동안 여러 사회학자들이 줄기차게 주장해 온 바와 같이, 작금의 세계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한 체제가 아님에 인정하는 것이 이 책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특히 1장의 논증 가운데, 미국에 대해 "신자유주의에 물들었다"는 분석은 색다른 수사 만큼이나 그 본질을 꿰뚫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신자유주의에 의해 조직적으로 후퇴한 미국과 오로지 미국만을 바라보고 있는 유럽에 있어, 예상과는 다르게 오래 지속해 오고 있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과 관련해, 이미 제조업 기반이 무너져, 군수 물자 지원마저도 녹록치 않은 현실을 더욱 입증하게 된 혹독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더욱이 근래에 자주 오르내리던 미국 중부의 '러스트 벨트' 역시, '아웃소싱과 이윤을 위한 제조업 기반의 해외 이전'이라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핵심 사항이 이룩한 현실이기도 한데요. 여전히 신자유주의 자체는 실체가 없는 것으로, 그저 입을 놀리기 싶은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말로 넘어가는 사람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시절, 마거릿 대처의 "사회 따위는 없다"는 일갈 (사회경제학적인 양식이 전혀 없는 자의 발언처럼)은 시카고 학파의 이론을 추종하는 사람들 만큼이나 신자유주의 체제를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사람들의 극적인 마중물이기도 했습니다. 푸코의 말처럼 사회가 없는 시민들의 상태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 그 허위의 표본처럼 말이죠. 이것은&nbsp;"대처와 그녀를 따르는 자들이 사회에 무슨 짓을 했겠는가"와 같은 냉소와 연계되기도 합니다.<br>특히 저자인 토드는 이 책의 6장에서, 이런 영국이 처한 정치경제학적인 상황에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앞선 대처의 '사회는 없다'라는 진술이 당시 사회 기반 영역의 거침없는 민영화에 따른 일부 기업으로의 분배가, 지금까지 대다수 영국인들을 고통에 빠트렸다고 있다고 폭로하고 있는데요. 여기에는 의료 서비스와 그것을 가능케 했던 '의료 보험의 붕괴'를 함께 진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국 사회가 아주 심각하게 양극화되어 있다는 6장 후반부의 도드라진 분석은 그런 연유로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영국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제조업 기반이 붕괴되어 왔으며, 그 제반 산업이 이미 실효를 다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제조업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란 누구나 짐작할 만하겠죠.&nbsp;더욱이 같은 장에서, "영국이 취약해진 것은 이데올로기 때문이고 그 이데올로기란 당연히 신자유주의를 말한다"는 폭로는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로도 읽힙니다. 이렇게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체제에서, 에마뉘엘 토드가 인류학적인 관점으로 '자기 부정과 해체 그리고 급기야 소멸'에 처하게 되는 '니힐리즘적 양상'을 지금 서구 유럽과 미국이 처해있는 파국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니힐리즘이라는 수사가 어떻게 보면 급진적으로도 보입니다만 이들이&nbsp;잃어버린 계몽주의와 그것에 기반했던 자유주의적 유산이 더 이상 이 사회들에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이 바로 이 주장의 핵심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책의 2장 말미에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당사자인 우크라이나가 애초에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고 강조하면서, 이 나라가 러시아의 침략을 받는 민주주의 국가라는 극적인 서사는 여전히 이치에 맞지 않다는 점을 저자는 서술해 냅니다. 바로 이런 이해 관계에 놓인 서구 유럽 역시, 역설적으로 "서방은 더는 자유민주주의 세계가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하는데요. 이에 대해 저자는 부연 설명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서구 유럽은 겹치는 가치가 많은데, 그것은 심지어 '자유주의적이지도 않은 것들'이라고 폭로하면서, 우크라이나가 군사 원조를 받기 위해 법적으로 면제된 자금 조달 시스템에 편입했다는 점은 이 가운데 불법적인 이득을 취하는 자를 우선적으로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것이 무기 브로커이거나 서방의 고위 관료로서, 체제 내에서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의 이득처럼 말입니다.&nbsp;<br>제가 이 글의 초반에서 글이 나아가는 진행 방향성을 잠깐 드러내기도 했습니다만 저자는 우선적으로 이 글을 통해, "우크라이나-전쟁이 미국과 서구 유럽에게 대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자신에게 다시금 되묻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역사와 인류학을 통한 문답의 형태이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상당히 명확합니다. 마찬가지로&nbsp;'우리가 러시아를 오판하게 된 진정한 연유는 무엇인지"도 대해 중요한 주제 의식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서구 유럽이 더 이상은 자유주의 진영이라고 불릴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말이죠. 저자는 11장에서 미국을 아주 명확하게 "자유주의 과두제 국가"로 규정합니다. 저는 이렇게 묘한 의미로 겹치는 단어가 마음에 들어, 한동안 그 의미를 음미하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푸틴의 초기 정치적 행보와 관련해, 인용되기 시작하는 '올리가르히'이라는 권력 지향적이면서, 자유민주주의와 상당히 맞지 않는 이 용어 자체는 이미 미국와 유럽에서, "체제에 기생하는 엘리트 기득권층"으로 바꿔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자는 어떻게 보면 온전한 자유주의 체제라 부를 수 없는, 너희 서구 유럽이 어떻게 권위주의적인 체제인 푸틴의 러시아를 비난할 수 있느냐로 힐난하는 것 같습니다만, 이를 차치하더라도 푸틴이 제거했던 올리가르히와 미국의 경제 안보 엘리트들, 그리고 유럽의 자유주의적 엘리트들이 '서구 자유주의 식으로' 공통된 이해로 수렴하는 마치 '서유럽의 수수께끼'처럼 말입니다. 그렇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일관됩니다.&nbsp;이미 미국은 오래된 다원주의적 가치를 상실했고 이 다원성의 실종이야말로 자유주의 유산의 퇴행하고 있다는 증거로 읽힌다는 것입니다. 일정 부분&nbsp;그 뜻하는 바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매우 불온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는 단순히 민주주의적 제도 하에, 규정된 선거제의 지속과 평등한 투표권 등을 통해, 자유 민주주의가 완벽히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체제의 내실에서 자유주의에 반하게 되는 정치적 행위나 시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용납하지 않는 극단주의화 역시,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nbsp;또한 저자는 일관된 관점으로 미국과 서구 유럽의 엘리트들의 무능을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푸틴의 러시아, 혹은 푸틴 자체에 대한 오판을 수정하지 못하고 저자의 말마따나 유럽에서 러시아의 유산을 과소평가한 서유럽의 정치경제 엘리트들의 실책은 어쩌면 자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직 KGB 출신으로 능수능란한 모략을 지니고 있는 푸틴과 그의 러시아를 너무 '실패 국가'로 몰아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nbsp;<br>서구 자유 진영이 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통해, 광범위한 러시아 경제 제재를 지속해 오고 있지만 저자인 토드는 이에 근본적인 의문을 표시합니다. 이렇게 강력한 제재가 러시아에게 가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러시아에서 왜 큰 이변이 발생하지 않았는가로 반문합니다. 만약 서구 정치권이 이 경제 제재를 통해 푸틴 정권이 궤멸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오판이고, 이미 자급경제를 달성한 러시아의 식량 사정은 큰 위기 없이, 삶이 지속 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는 러시아인들을 본다면 확실히 이번 제재의 실효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특히, 앞서 설명한 것처럼 우크라이나가 완전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님은 초반 진술을 통해 분명히 드러났는데요.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무분별한 탄압은 우크라이나의 정치에 있어 흔한 일상이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지정학적으로&nbsp;우크라이나의 서부(독일 게르만주의와 연계)와 동부(친러시아 계열)의 민족적 이질성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 전쟁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는 저자의 분석 또한 큰 설득력을 갖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크라이나는 과거로부터 한번도 '국민국가'였던 적이 없다는 인류학적인 분석은 꽤나 독창적이기도 했습니다. 이 나라가 러시아의 영향력에 오랫동안 종속되어 왔다는 단편적인 서사보다도 통합된 국민국가로의 이행에 나설 수 없었다는 진술이 더 신빙성이 있었는데요.&nbsp;즉, 저자가 설명하는 바대로 '공통된 언어를 사용하는 국민이 주축이 된 국가'로서 우크라이나는 그 자격이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단순히 나토 국가인 폴란드의 이해 관계와 우크라이나가 서로 밀접하다는 일련의 진술 말고 오히려 진정성이 있다면 푸틴의 우크라이나의 중립화 역시, 정치적으로 고려할만한 선택지가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이렇게&nbsp;우크라이나의 서부와 동부의 현격한 이질감은 단순히 선거를 강행하고 지역 내 정치인을 선출한다고 해서 이 나라가 자유주의에 기반한 국민국가인지는 여전히 단정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푸틴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과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일부였고 그런 연유로, 러시아의 국내 문제라는 잣대를 무시할 만한 수준의 개입 정당성이 서구 유럽에는 이론적 기준으로는 상당히 애매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쟁 개입에 대한 정당성 문제는 스스로를 입증 시킬 수 있는 명확한 증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 떠나서,&nbsp;제2차 세계대전에서 게르만주의에 호응했던 서부의 역사를 유럽이 선택적으로 이를 용인하는 것은 통합의 차원에서 상당히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더욱이 우크라이나의 '유로마이단 혁명'의 본질을 고찰해본다면 말입니다.&nbsp; &nbsp;<br>저자는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의 사례를 소개하며, 동유럽에서도 푸틴의 러시아와 협력할 수 있는 국가들이 있다는 점과 독재자인 푸틴 자체는 역사에 오르내렸던 무능한 독재자들과는 매우 다른 유형의 인물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러시아의 선거 제도에 대해 의구심이 드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많은 러시아인들이 푸틴을 여전히 지지하고 있다는 점은 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한 해석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문단 서두에서 잠깐 언급하기도 했지만 푸틴의 러시아와 협력을 유지해왔던 국가로 독일을 꼽을 수 있겠는데요. 구소련의 붕괴 이전에 당시 서독은 동독과의 통일을 위해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협력과 이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지만 반대로 미국은 독일 통일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마리옹 반 렌테르겜의 노르트스트림과 관련된 논저에서도 드러나듯, 러시아의 독일에 대한 가스관 연결은 이전의 '시라크와 메르켈, 그리고 푸틴의 커넥션'에서도 미국이 싫어하는 '러시아와의 경제 협력 케이스'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저자는 매우 충격적인 가설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일전의 원인불명으로 처리된 노르트스트림 가스관 사보타지에 있어, 미국에 주도로 노르웨이가 협력하고, 더불어 독일의 묵인으로 실행되었다는 설을 논증 가운데 실고 있었는데요. 저자는 이 증명되지 않은 가설을 상당히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유럽 내의 미국과 새로운 군사안보적인 협력 국가로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꼽으면서 이들 두 국가는 그동안 미국의 안보 정책과 발을 맞춰왔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br>물론 여기에서 분석되는 미국의 사회 병폐적 상황은 따로 말을 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다만, 기존에 쓰였던 용어로서 지칭되는 기독교가 아닌 '개신교'로 명칭을 전환하여,&nbsp;알게 모르게 사회전체에 신과 신자라는 영혼적 관계를 넘어, 종교적 지배가 가능했던 영향력에 대한 부침 자체는 종래의 미국 사회를 상당히 변질시킨 것으로도 읽힙니다. 1950년대 전후로 영국 성공회 기반의 교육 제도와 미래 엘리트 세대의 육성이 미국 사회가 한동안 유럽 사회를 닮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저자의 말마따나 종교의 부활인지는 모르겠으나 미국에서 감리교 신학의 확산이 어느 정도 개인주의와 자유 관념에 긍정적 요인이 되었다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작금의 기독교 우파의 등장은 타협과 관용을 실종한 일종의 극단주의로의 변질로 이해됩니다. 저는 이 과정의 논증에서 종래의 개신교가 본질적인 '인간 평등'을 부정해 왔다는 점이 과거 계급주의 질서에 편입한 개신교의 역사로 쉽게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영국 사회가 그러한 신분 차별에 대한 기존의 관행을 바탕으로 유지되어 왔다는 분석도 1980년대 이후의 미국 사회를 좀 더 조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와스프의 역사를 고찰해 본다면 이러한 이해가 쉽게 가능하기도 합니다.&nbsp;이 점과 관련해, 저자는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가 잉글랜드 섬 중북부 이후에는 영향력이 미진했고 오히려 스코틀랜드와 인접한 이북의 시민들에게 감리교가 주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진술 역시, 꽤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이를테면 보수적인 성공회나 그에 못지 않은 감리교가 인간 평등이라는 관념을 어떻게 보면 쉽게 용인할 수 없었던 불협화음 역시, 그 맥락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nbsp;부분이라 여겨집니다. 그런 연유로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이 스코틀랜드 계몽주의가 여전히 구체제에 있어, 인간 이성의 확신이 다른 유럽 지역에서 왜 제대로 먹히지 않았는지를 가늠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신앙적으로 가혹했던 과거 칼뱅파의 후손들에게 이러한 계몽주의적 맥락은 쉽게 계산할 수 없는 문제였을 것 같습니다. 아주 쉽게 말해, 인간의 이성과 신의 명령과 같은 개념적 대립 구도에서 말입니다.&nbsp;<br>끝으로 유로화의 출범으로 유럽 내부에서 좀 더 완전한 권력을 가질 기회가 있었던 독일이 다른 경쟁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다음 단계로 나가지 못한 이유에 대해, 저자는 '과거 원죄'를 들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강고한 관념이면 독일이 정치적으로 가혹하게 말하자면 거의 거세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자가 이런 독일의 현실에 대해 어떠한 감상을 갖고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우크라이나 전쟁에 있어, '모순에 처한 현실'을 인정한 부분은 어느 정도 해석할 여지를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2009년 이후로, 독일 정치권은 러시아와 잘 지낼 수 있다는 식으로 어필하기도 했지만 이는 미국이 절대 용납할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결국은 아무 쓰잘데기도 없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우선적으로 이 전쟁 이후에 러시아가 과연 폴란드를 포함한 위협에 직면한 순진무구한 유럽에 군사력을 투사를 할 것인가에 더 논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저자는 푸틴이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축하고 있지만 '폴란드의 우려'는 가볍게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반적으로 토드의 이 논저는 앞선 전쟁에 대한 현실의 분석은 물론, 대립하는 두 세력의 사회적 일면을 거의 생경하게 분석해 내고 있고 우리가 몰랐던 러시아의 경제적 조건, 그리고 지금 러시아인들의 생활이 어떻게 안정되어 있는지를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각 사회가 아무런 모순이 없을 수는 없지만 예를들어 영국 사회가 고학력자들과 저학력자들의 계층적 대립이 심각하고 특히 지난 브렉시트와 관련된 국민 투표에서 부유층과 고학력자들은 유럽 연합에 남고 싶었지만 반대로 노동자 계층과 저학력 계층은 탈퇴하고 싶어, 이를 대행할 보리스 존슨 총리를 신뢰했다는 일견 복잡한 진술의 내용은 그야말로 적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이미 이런 내용만으로도 영국 사회는 심각한 분열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미국도 마찬가지로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현상으로 '사회적 갈등과 파편화'를 적절히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 전쟁에서 저자의 여러 의견들 가운데, 가장 동의했던 부분은 일전에 조지아가 남오세티야를 상실하게 된 러시아와의 국지전에서 미국이 전혀 나서지 않고 수수방관 했던 점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대만과 일본이 중국으로부터의 전쟁 위협에서 미국의 보호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에 대해, 저 역시 일정 부분 동의하게 되었다는 점을 글 말미에 밝혀두고 싶습니다.<br><br>-저자인 에마뉘엘 토드의 중국의 WTO 가입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는 말에 일견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사실 미국의 경제적 안정은 서구 자유 진영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극명한 명암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시와 오바마 시절의 공화당 정치인들이 미국의 탈산업화의 책임을 전적으로 중국에게 떠넘기면서도 그것이 가능하게 했던 미국이 행한 정책에는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일전의 폴 하이드먼의 분석은 에마뉘엘 토드의 이 논저를 통해, 재차 미국 정치권의 실체를 이런 식으로 가늠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nbsp; &nbsp; &nbsp;&nbsp;<br>&nbsp;&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83/14/cover150/k77213525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831478</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극우의 시대 - [극우의 시대 - 정의를 외치는 극단적인 사람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184331</link><pubDate>Mon, 30 Mar 2026 18:5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18433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82137088&TPaperId=1718433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10/36/coveroff/k88213708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82137088&TPaperId=1718433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극우의 시대 - 정의를 외치는 극단적인 사람들</a><br/>폴 하이드먼 지음, 신재일 옮김 / 이글루 / 2026년 03월<br/></td></tr></table><br/>미국 뉴욕시에서 역사 교사로 일하고 있는 폴 하이드먼은 뉴저지 주의 연구 중심 대학인 럿거스 대학(뉴어크 캠퍼스, 럿거스 대학은 3개의 캠퍼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에서 미국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는 미국 정당의 역사는 물론, 더 내밀한 미국 좌파의 역사 및 지식인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강단 지식인에 머물지 않고 유튜브 등 미디어에 출현해, 자신의 논저를 설명하고, 또한 현재 미국 정치에 관한 나름의 분석도 수행해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 내 인종 차별과 계급 투쟁에 관련된 글을 내놓기도 했고 이러한 사회적 양상들이 어떻게 사회를 파편화에 이르게 하는지 분석해 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글은 원제, "Rogue Elephant: How Republicans Went from the Party of Business to the Party of Chaos"로 지난 2025년 11월에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은 최근인 2026년 3월에 이뤄졌습니다.<br><br>우선 국문으로 번역된 책 제목과 관련해 상당히 적절치 않은 편집이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이 글의 내용이 어느 정도는 (아니 상당 부분) 미 공화당의 극우화 내지는 내란 세력화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지만, 그럼에도 '극우의 시대'라는 제목은 여전히 자극적인 감상을 갖게 합니다. 또한 하이드먼의 이 글은 지난 미국 정치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대를 기점으로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치적 분화 내지는 뚜렷한 변모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주된 분석은 민주당보다는 공화당의 '이념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볼 수 없게 된 점과 이들의 선거 자금과 관련된 뚜렷한 '이익화'와 기업계의 일관된 지지에도 불구하고, 반자유주의화에 편승한 소위 정당으로서의 모습이 사라진, 작금의 변질된 공화당을 매우 면밀하게 비판적인 내용으로 분석하고 있었습니다.<br><br>1960년대 초까지, 미국의 공화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이 드리운 그림자를 현실에서 실질적으로 얼마나 제거할 수 있겠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이젠하워를 필두로 당시 다수 공화당 정치인들은 급격한 변경 시도에는 원만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었는데요. 이미 이 글 1장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듯, 첨예한 냉전의 시기가 도래할 그 시점에서도 노동자들과 기업과의 권력 싸움은 워싱턴 정가에서 매우 중대한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과정에서 과거 조지프 매카시가 불러 일으킨 '광풍(狂風)'을 프롤로그에서 따로 도출하여, 작금의 도널드 트럼프와 비교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이 둘의 차이는 어느 정도는 현격한 부분이 있어 무슨 연역의 방식처럼 모두를 처리할 수는 없지만, 우선 매카시가 초래한 '매카시즘'에 대해선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오늘날의 극단주의적 이행과 맞물려서 말입니다.&nbsp;여기에선 후반부에서 논증하게 될 미 공화당의 '부정적 당파성'이 이 매카시즘과 매우 닮아 있으며, 전자의 매카시즘이 (그저 명목상 허울뿐인) 자유주의를 위해, 그런 난장판을 조장했다면 지금의 공화당이 보이고 있는 '부정적 당파성'은 반자유주의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맥락의 워싱턴 정치 자체가 우려할 만한 수준이라고 판단됩니다.<br>이 책의 주요 해석 수단으로 등장하는 '그림자 정당'과 관련해, 저자인 폴 하이드먼은 서두에 미국 경제사에서, "상공회의소"와 "전미제조협회"의 등장을 시점으로 논증을 이어갑니다. 그 이전까지 미국 내 기업 경영인들이 상대적인 노동 조합에 맞서, 자신들의 이익 단체를 꾸릴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으나, 1910년대 이후 이들의 소위 권력화는 나날이 강화되어 왔습니다. 역대 미 행정부가 자유시장주의 노선의 견지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매번 갈증을 느끼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nbsp;어떻게 보면 이들 조직은 앞서 진술된 내용이 그저 경영인들의 친목 모임이라는 것을 웃으며 넘긴다 하더라도 1979년 그 유명한 '볼커 쇼크'로 수많은 기업이 도산에 이르자 단순히 '시장 자유'에 올인하는 것을 넘어, 노동 개혁과 이들이 언급하는 미국 내 반기업적인 (물론 이들의 말에 의하면) 세력에 사실상 맞서는 것으로 자원을 투입하게 됩니다. 이는 대체로 의회 로비와 선거 자금 투입이었습니다.&nbsp;결국에는 이들의 바람대로 1980년대 레이건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세법 개정안'이 요구대로 통과되고 "기업에 대한 실질 세율이 33퍼센트에서 16퍼센트"로 크게 낮아지게 됩니다. 이후, 빌 클린턴 행정부의 가장 큰 과업이기도 했던 '헬스케어 개혁 법안'이 공화당 주도의 조직적인 반대로 무산되기까지,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정치 세력과의 강고한 연대가 사실상 통념적인 시장의 자유로운 거래를 후퇴시킨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이에 쉽게 동의하는 공화당원은 없겠지만 말입니다.&nbsp;<br>2장에서 분석되는 바와 같이, 앞선 뉴딜은 미국 정치를 근본적으로 뒤바꾸게 만드는데요. 제 2차 세계대전 전후로 민주당은 '도시적 자유주의' 정당으로 자리매김했고 이에 반해 공화당은 미국 기업계의 확고한 지지와 더불어, 보수 세력의 정당으로 옷을 바꿔 입게 됩니다. 저는 하이드먼의 이 글을 일독하면서, 뒤이어 나타날 공화당 정치인들과 그 지지자들의 '민주당 혐오'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면밀히 추론해 보고자 했습니다. 이 글이 그러한 근거를 제공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nbsp;상대 당에 대한 근거 없는 지독한 혐오는 '티파티 운동'이 힘을 잃은 2014년 이후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이었습니다. 특히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다면적인 인신공격을 포함한 증오에서도 말입니다. 만약 미 정당사의 맥락에서 그 근원을 파헤쳐 본다면, 아마도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소위 3연임 집권과 그가 추인한 뉴딜 개혁에 이 공화당 세력이 아주 소름끼칠 정도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앞서 언급한 '티파티 운동'은 명목상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 및 '자유 지상주의'를 기반으로 미국 내 리버럴 정치와 민주당 세력을 일소의 대상으로 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의미로 저자인 폴 하이드먼은 정당 정치 바깥의 다수의 의견과 반하는 그림자 정당 세력으로 이 티파티 운동을 규정하고 있었습니다.<br>단순히 민주당이 '노동계를 포섭했다'는 정당사 과정의 소위 이익 집단화를 차치하더라도 함께 가야 할 보수 정당인 공화당이 그 저변의 여러 정치적 측면의 극단주의화를 그저 손 놓고 바라봤다는 점도 상식적인 측면에서 쉬이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물론 이런 면에서 저자는 현재의 공화당 정치를 '이념 정당'으로서가 아니라 반자유주의 세력의 '총집합'으로 해석하는 것 같았습니다. 독자들은 저자가 어떻게 공화당을 반자유주의 세력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아마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겁니다. 이에 간단한 설명으로 재 집권한 작금의 도널드 트럼프가 반자유주의적 기조를 통해, 무역과 경제 개혁에 나섰고 특히 통렬한 반이민주의는 세계화에 따른 자유주의 기조에 명백히 반하는 시도로,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그동안 미국에서 대놓고 볼 수 없었던, '삐뚤어진 민족주의'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도출된 논증으로 봤을 때, 이 모두의 공통된 기반은 노골적인 '반자유주의'였습니다. 저도 저자의 다음 의문인, "공화당은 왜 반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극단적 정치 세력화에 어떠한 반대 의견도 내놓지 못했는가?"에 동의하고,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된 논증들이 결국 공화당의 실질적인 정당성 상실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만약 공화당 정치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것에 대해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우리가 목도하게 될 미국 정치가 그리 밝지 만은 않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nbsp;<br><br>미국 시민들의 삶에 그다지 좋은 결과로 나타나지 않은 의료 보험 개혁과 사회 보장 제도의 개선의 필요성은 앞서 진술된 바와 같이, 빌 클린턴과 조지 W. 부시를 거치며, 정치권에서 쇠락하게 됩니다.&nbsp;저자의 진술대로 이 의료 보험 개혁과 사회 보장 제도를 실질적으로 유의미하게 보장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은 미국 시민 모두에게 중대한 문제였습니다.&nbsp;레이건 시대의 이인자로 여겨졌던 뉴트 깅그리치와 같은 강력한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소위 '반시장주의' 해법에 반대한 것은 분명한데요. 그럼에도 이렇게 확고한 정치 세력에 막대한 로비를 지속한 기업계는 "클린턴의 의료 개혁안이 자기 이익에 반한다고 판단해 스스로 반대해 나섰을 뿐이다"라는 편의주의적인 진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클린턴 대통령 재임 초기부터 공화당은 클린턴을 매우 증오했고, 더 나아가 그를 경멸"하기까지 했는데요. 민주당의 대통령이 신자유주의를 신봉한 가히 시장 친화적인 인물임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르윈스키 스캔들'을 지렛대로 클린턴의 탄핵 시도 당시, 공화당은 "담배 산업과 기독교 우파"의 강고한 지지에 눈이 멀어, 중대한 시기에 놓인 백악관을 유명무실로 만들려 노력했습니다. 물론 여러가지 갈등 끝에 탄핵은 무산되기는 했습니다.&nbsp;이렇게&nbsp;세계화를 이끈 자유주의 엘리트 세력이 2008년 전까지 미국에서 중심 세력으로 인정받고, 이들이 가진 생각이 최소한 레이건 행정부까지는 존중 받을 정도였으나, 공화당이 진행한 여러 법안에서 더 오른쪽으로 향하게 된 점은 지금에 와서 어떻게 보면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신자유주의를 이해한 민주당 리버럴들과 공화당의 강고한 신자유주의자들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nbsp;역사학자인 딘 베이커 역시 의문을 갖고 그렇게 진술했고, 최근에 읽은 게리 거스틀 역시 이러한 맥락으로 비평하기도 했습니다. 레이건의 그 개혁은 소위 리버럴의 묵인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다는 진술대로 말입니다.<br>그럼에도 이렇게 '기업의 이익'을 대변했던 공화당은 사실상 조지 W. 부시가 방조한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에 대응해, 긴밀한 시기를 놓치는 경우는 물론이고, 금융 시장의 붕괴로 현물 시장을 포함한 '신자유주의적 자유 시장'이 관 속에 들어갈 시점에서도 애꿎은 '자유 시장 담론'을 여기다 들이대기까지 합니다.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고 더 큰 위기가 찾아오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곧&nbsp;등장한 오바마 행정부가 내부 논의 끝에, 막대한 구제 금융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의회에 통보했음에도 그리고 그 수많은 전문가들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보면 민주당 정권의 백악관이 시도하는 대책에 보이는 마뜩찮은 반응이 부정적 당파성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지독한 당파주의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이런 편협함은 자유주의의 유산은 확실히 아니라는 점입니다. 반면에 오바마 행정부 이전의 조지 W. 부시의 막바지 임기 1년 간을 따로 레임덕으로 설명하면서, 다른 정치적 패착이었던뉴올리언스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는 일부 사람들에게 2008년의 금융 위기를 예견할 정도로 전조 상황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연방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는 물론이거니와 이를&nbsp;수습하는데 있어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무능한 정실 인사를 내려 꽂는 인사 실패는 조지 W. 부시 정권의 패착이기도 했습니다.&nbsp; &nbsp;<br>결국 오늘날 공화당 정치를 이렇게까지 변질 시킨 건 티파티 운동과 더불어 코크 형제와 같은 그림자 세력이 한 몫을 하게 됩니다. 현재의 미국 정치가 자유주의적 자정 능력을 거의 상실한 데에는 이러한 원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따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SNS로 인해 더욱 범람한, 극단주의의 파고도 이에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이행에 더욱 편승한 미국 정치의 부정적 파급, 그 자체가 되었던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저자인 하이드먼은 6장의 서두에서, 특별히 "트럼프의 집권은 반드시 해명이 필요하다"고 이처럼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더욱이 "트럼프의 대통령직 수행은 기존의 사회과학적 분석 틀을 무너뜨렸다."고 폭로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트럼프의 인기는 스스로 SNS를 통해, 정치적인 이슈 등에 즉각적인 답변을 업로드 하며, 일찍이 대중 정치의 속성을 간파한 것에 있습니다. 매우 영악할 정도로 말이죠. 여기에 그는 나르시시즘에 기반한 철저한 자기 이익과 기존의 정치인들과는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표현된 그야말로 '날 것'의 소통이 대중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는&nbsp;외견상 공화당의 이념(혹은 정치적) 정당으로서의 몰락과 이 '트럼프 현상'이 그 궤를 같이 했다는 점에서 두 현상의 부정적 시너지 효과로 인해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미국 정당 정치의 어두운 단면을 비로소 드러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 닉슨에 반대했던 블리스를 떠올려본다면 이는 극명하게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nbsp;2014년 당내 주류 세력이었던 칼 로브와 그 패거리들은 중간 선거의 승리를 바탕으로 정치적 도전들을 물리치고, 2006년 이후 처음으로 상원에서 공화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게 됩니다. 2015년 1월, 부시 일가의 젭 부시가 출마를 앞둔 시기에 당내 의원들은 이런 젭 부시가 승리를 하게 되면 당내 세력을 일소해, 진정한 통합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이것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br>6장에서 진술된 바와 같이, 2015년 초, 코크 형제는 2016년 대선에 9억 달러 가까이 지출할 계획을 잡게 됩니다. 이는 대선 캠프 전체의 지출과 맞먹는 규모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공식적으로 대선에 출마하게 됩니다. 2015년 8월에 열린 첫 공화당 예비경선 토론회 이후, 트럼프는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게 되는데요. 이때 경쟁하던 젭 부시와 테드 크루즈는 곧 지리멸렬해지기 시작하는데 특히 테드 크루즈는 자신이 도널드 트럼프를 꺽고 그의 조직을 쉽게 흡수할 것이라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당시, 공화당 지지자들은 세금과 복지 삭감 문제에 있어서는 회의적이었던 반면에 이민자와 다문화 정책에는 더 적대적인 상황이 되었는데요. 이에 트럼프는 이 틈새를 완벽히 파고 들어, "매디케어, 메디케이드, 사회보장을 삭감 없이 지킬 것"이라고 약속하고 북미자유무역협정 같은 무역협정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특히 이민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혹자들은 이런 트럼프가 단순한 공화당의 대선 후보가 아닌, 의회 바깥의 반이민, 반자유주의, 그리고 극단적 보수주의 연합과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광범위한 세력이 결집해 나타난 현상이라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부분과는 별개로, 이 도널드 트럼프 현상이 초래한 중요한 것들 가운데, 공화당의 도드라진 부정적 당파성, 즉, '상대당에 대한 극도의 적대감'이 트럼프를 매개로 실질적으로 발현되었다고 분석합니다.&nbsp;<br>그럼에도 항간의 트럼프의 당선과 관련해, 저자는 널리 알려진 두 가지 주장을 언급합니다. "트럼프의 당선이 공화당이 새로운 노동 계급 중심의 유권자 기반을 확보하는 전환점이었다는 것과 인종주의 급증의 결과"라는 시각입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저자는 강조하면서, 첫째로 트럼프의 노동 계급 지지 상승은 2005년 이후, 노동 계급을 포획하기 위한 공화당의 추세와 다름 아닌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또한 둘째로 백인 유권자들의 '인종적 반감'이 이때 대규모로 퍼져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다는 주장 역시 사실이 아니라고 인용됩니다. 일례로 오바마 행정부 시절에 백인들이 인종적 반감이 깊어진 징후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강조하고 이런 주장에 대한 최신 분석들도 비슷했다고 언급합니다. 그 대신 "트럼프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를 이해하려면" 당시 트럼프 캠프가 보여준 독특한 전략에 있다고 진술하는데요. 힐러리 클린턴이 정치 광고에서 자신의 인격과 자격에 집중했던 반면, 트럼프는 공화당 내 다양한 세력을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메시지 전달과 각종 정책에 대한 의견 제시 등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선명성을 강조했던 바가 주효했던 것으로 분석됩니다. 특히 힐러리 클린턴은 대중에게 부정적 이미지가 뚜렷했고 일부 계층에게 반감을 사고 있던 점을 개선시킬 노력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살아온 발자취나 업적 만을 늘어놓는 자기 광고는 역시 패착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결국 트럼프 당선에 있어서 노동자 계급의 불만과 확대된 이민 정책과 이민 문제 자체 때문에 표가 몰린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대중들이 인식하는 힐러리 자신에 대한 문제에 있어, 캠프의 대응 실패와 실효적인 선거를 치르지 못한 정치적 무능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다만,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트럼프의 인종주의는 백인 우월주의와 이를 지지하는 단체들과 맞물린 측면이 분명 있고, 세계화의 어두운 측면으로 해석되는 '러스트 벨트' 지역의 산업 쇠퇴와 그에 따른 수많은 노동자들의 분노가 표로 트럼프에게 결집된 점도 그저 무시할 만한 사항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br>끝으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티브 배넌과 그에게 영감을 안겨준 지금은 작고한 앤드루 브라이트바트의 소위 영리한 정치적 연계는 그동안 코크 형제로 대표되는 그림자 정당과 마찬가지로 공화당을 정당으로서의 영향력을 붕괴시킨 주요 원인으로 불릴만 합니다. 특히 스티브 배넌은 지난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에서 특별한 참모로 활동하여, 전부는 아니겠지만 공화당 주류 세력이 트럼프에게 굴복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트럼프에게 일종의 카리스마를 엿본 바바라 F. 월터의 인상 만큼은 아니지만, 저자인 하이드먼 역시, 아주 일관되게 '작금의 정치 상황을 내전 상태'로 규정하고 이러한 이행에 기름을 끼얹은 극단주의 세력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바바라 F. 월터 역시, 하이드먼과 유사하게 이 내전 상태에 대한 놀랄만한 정치적 분석을 도출하기도 했는데요. 저 역시도 이미 동의하는 부분이지만, 2020년의 대선 패배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충동하여, 무장한 무리들이 미 의회에 난입하게 된, 2021년 1월의 그 사건에서 도널드 트럼프와 마이크 펜스, 그리고 그들의 무리가 어떠한 사법적 처벌도 없이 넘어간 장면은 미국 민주주의의 오욕임과 동시에 미국 정치가 어디쯤에 있는지 아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자신을 자유 지상주의자라고 설명하는 마이크 펜스가 자기 이익에만 영합하는 도널드 트럼프에게 그토록 아첨을 일삼았다는 내용도 충격이거니와, 워싱턴이 일개 대통령의 카리스마와 권력 향배로 유지되는 것이 아닌 의회와 행정부의 면밀한 대화와 의견 도출로 타협에 이르는 과정으로 유지된다는 점을 망각한 도널드 트럼프의 오만 자체는 이 시대의 정치가 그 세를 다하여, 붕괴를 드러내는 상징, 그 자체라고 보는 것이 과도한 해석은 아닐 것 같습니다. 또한, 미국 보수 정치가 사실상 자유주의 자체를 저버렸다는 점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그만큼 암담함을 넘어 그 끝이 불분명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nbsp; &nbsp;<br>- 과거 닉슨의 사례로 보건대, 당을 자신의 입맛대로 요리하여 장악하고자 하는 시도는 공화당을 사실상 위협에 빠뜨렸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 역시, 지난 2020년 대선에서 철저하게 당을 장악한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에서 패배한 사건을 거의 역설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는데요. 민주주의에서 정당의 진정한 값어치는 돈에 따라 움직이는 거수기 따위가 아니라, 할 말을 할 수 있는 의지와 그 선명성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 역시, 저자의 광범위한 분석인 "미국 정치가 선거 자금 획득의 소위 비약적인 혁명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진술에 동의하며, 앞으로 공화당의 미래가 밝지 않다는 점도 이 글을 통해, 분명히 수긍하게 되었습니다.&nbsp; &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10/36/cover150/k88213708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103601</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계약과 주권 - [계약과 주권 - 토머스 홉스의 정치사상 입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162577</link><pubDate>Fri, 20 Mar 2026 20: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16257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92136788&TPaperId=1716257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10/15/coveroff/k29213678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92136788&TPaperId=1716257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계약과 주권 - 토머스 홉스의 정치사상 입문</a><br/>헤어프리트 뮌클러 지음, 공진성 옮김 / 마농지 / 2026년 02월<br/></td></tr></table><br/>1951년 독일 헤센 주, 라인-마인 지역의 프리드베르크에서 태어난 헤어프리트 뮌클러는 유럽의 정치 이론과 사상사를 전문으로 하는 독일의 저명한 정치학자입니다. 뮌클러는 특히 마키아벨리 연구로 유럽 학계에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습니다. 이에 뮌클러는 1977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소재한 종합 대학인 요한 볼프강 괴테 대학에서 독일어학, 정치학,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여, 독일어와 사회 과목의 중등 교사 자격을 취득합니다. 이후 그는 현재 유럽에서 표준 연구로 일컬어지는 『마키아벨리 : 피렌체 공화국의 위기에서 본 근대 정치사상사의 기초』라는 제목의 박사 논문으로 학문적 명성을 얻게 됩니다. 이후 1992년 3월에 그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의 사회과학부 정치 이론 교수직을 수락합니다. 그는 1992년부터 1993년까지 학과장을 역임했고, 2002년부터 2003년까지 같은 대학의 사회과학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게 됩니다. 또한 1988년부터 1999년까지 뮌클러는 독일 정치학 분기별 학술지 (German Political Science Quaterly)의 정치 이론 부문을 담당했고, 1993년에는 비엔나 고등연구소 (Institute for Advanced Studies in Vienna)의 객원 강사직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그는 독일 외교부와 연계하여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했으며, 2024년까지 단극 세계 질서 시대가 끝나고 5대 강대국 (미국, EU, 러시아, 중국, 인도)이 지배하는 세계 질서가 등장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럼에도 뮌클러는 전세계에서 민주주의 확대와 발전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으며, 2018년 은퇴 이후에도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 있는 여러 방안들과 현실적 가능성 등을 언론과 지방 자치 단체에 이론적 초안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최근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서도 독일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더 강력한 지원을 주장하는데, 그의 의견이 중요한 근거로 제공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omas Hobbes, Eine EinFuhrung"으로 지난 2001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6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br><br>뮌클러의 진지한 이 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토머스 홉스의 생애와 주요 저작들인, 『시민론』, 『리바이어던』, 『법의 기초』, 그리고 『베헤모스』등의 원전을 통해, 홉스 사상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미 저는 영국의 정치 이론가인 리차드 턱의 유사한 성격의 글인『홉스』를 일독했던 바가 있습니다. 물론 턱의 논증된 글 또한, 동일하게 서평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여기 뮌클러의 이 논저도 홉스에 대한 면밀한 이해를 독자들에게 마찬가지로 제공하고 있었는데요. 특히 앞의 리차드 턱의 글과는 달리, 지금 소개할 뮌클러의 논저는 홉스의 여러 저서들에 대한 꽤 명료한 분석을 보이며, 그의 전반적인 삶과 불안한 정치적 입지를 거의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더불어&nbsp;입체적이면서 틀에 박히지 않은 관점 역시도 마음에 들기도 했는데요. 홉스는 이미 그의 많은 주요 저작들에서 가히 부정적으로 도출된 (무질서에 이르는 상황에서 인간이 폭력적 조건에 빠지게 되는 현실 자체) 소위 '내전 상태'와 그 순간 모든 시민들의 '자기 보존의 기대'가 충족되지 않고 쉽게 파괴될 수 있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지금도 잘 알려진 리바이어던의 '모든 사람에 대한 투쟁', 그리고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는 늑대일 수밖에 없는 이유, 혹은 야만성"을 일종의 연역적 방식으로 풀어 논증하고 있었습니다.<br>이 글의 1장 4부 이후의 논증에서 결론적으로 홉스는 자유주의자들과 절대 왕정주의 혹은 절대 권력 옹호자들에게 무언의 영감을 준 사상가로 도출됩니다. 이에 필연적으로 홉스가 언급하는 자유는 이사야 벌린에게 사상적 단초를 제공했고, 여전히 논란의 인물인 카를 슈미트와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에게까지 그는 일정 부분, 권력 집중에 대한 편의적인 이론 제공과 절대화 된 권력의 이론적 해석에 상당히 기여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가 이 지점에서 우선 인식하고 있어야 되는 부분은, 이 책의 저자인 뮌클러가 분석하고 있듯, 후자의 소위 '절대 권력'의 목적이 다수 시민의 '자기 보존'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당위입니다. 이는 과거 홉스가 살았던 영국에서의 내전 상황과 그에 따라 얼핏 인식적 연계에 따라 드러났던 '공화주의'에 대한 아이디어의 우려와 공포도 함께 언급하고 있는데요. 심각한 내전 전후로 이어지는 공화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홉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부분이었습니다.&nbsp;즉, 책의 1장에서 광범위하게 언급되는 바와 같이, 홉스에게는 시민들 사이에 덕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는 것보다&nbsp;'인간의 합리적인 이익 추구'에 기대어, 자신이 분석하는 그 특별한 '권력'의 조율된 원칙이 기반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 부분은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br>앞선 '덕의 부재'에 대한 관념적 해석은 이후에 등장하는 데이비드 흄에 의해, 토머스 홉스의 합리적 이익 추구의 신민들이라는 독창적 개념이 일견 부정 되기는 했습니다만 '왕의 목을 치게 되는' 심각한 내전 상황에서의 권력 붕괴와 그에 따른 대다수 신민들이 맞게 되는 위태로운 정치적 상황, 그리고 인간의 중요한 목표이자 욕망인 자기 자신을 (야만의) 자연 상태에서 보존하기 위한 노력들이 무산되는 정치적 현실을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가 올리버 크롬웰과 연관이 있었다는 내용도 나옵니다만 신민들의 자기 보존이라는 이익에 기대어, 정치적 파행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시도는 그가 궁정 정치인이 아니었음에도 일종의 사활적인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더욱이 그의 후기 저작인 『베헤모스』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자기의 진정한 이익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공공연히 피력하기도 합니다. 이는 그의 후기 사상이 어떤 식으로 강화되었는지 깨달을 수 있는데요.&nbsp;전반적으로 홉스의 이러한 관심은 실질적인 권력을 쉽게 조망할 수 있는 '가정 교사'였다는 사실이 실체에 접근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정치적 투쟁 속에서 파리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는 1961년까지, 기피 되고 거부 당하는 인물이었으며, 귀환한 뒤에는 철저하게 영국 공화정에 복종함과 동시에, 런던에 살면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학문에만 바치게 되었다는 일종의 타협은 홉스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간접적으로 엿 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br>리바이어던으로 통해, 드러난 홉스의 주요 관점은, "모든 권력을 주권자에게 양도하고 주권적 권력과 경쟁할 수 있는 어떤 집단과 단체도 허용하지 않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는 "오직 신민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장할 수 있는 통치자에게만 복종해야만 한다는 견해"와 맞닿아 있습니다. 물론 홉스가 '사회 계약'이라는 개념을 처음 밝히기도 했습니다만, 이 책의 저자인 뮌클러가 후반부에서 새롭게 밝히는 바와 같이, 이후에 사회 계약의 효시가 된 장 자크 루소에게 철저히 부정 되어야만 했던 역사로서의 의미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현재에 이르러, 우리가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통해 개인의 권리와 사회 보장에 따른 안전과 재산권 보호를 인정하고 수립했지만, 여전히 전세계의 실효적이고 실질적인 민주주의는 제한적이라는 현실은 과거의 토머스 홉스가 왜 강력한 권력을 빗대어, 소위 '성서와 하늘의 권리'로 승화시켜, 절대 왕정에 부여하게 되었는지 그 노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이런 수사와 정치적 맥락을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 사회에 누적된 지식 발전이 더불어 정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신뢰한다면 이를 뒤집어 '그 역'에도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nbsp;후반부에 언급되는 '정치 신학'에 대한 홉스의 특별한 기여와 그가 평생에 걸쳐, '무신론자'라는 누명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는 일화도 역시, 이처럼 인지부조화에 가까운 서로 충돌 되는 관념의 투쟁을 짐작하게 만듭니다.<br>이 글의 1장, 2부부터 3부까지의 주요 논증이 토머스 홉스의 정치 사상적 고찰에 의해, 그가 어떻게 고대 그리스 철학과 같은 전통적인 철학과 왜 단절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저자는 거듭 밝히고 있었는데요. 홉스에게는 늑대들과의 전면 투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자연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과거 그리스 철학의 전통과 길을 달리하는 방법이 거의 유일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여기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철학적 이론이 거의 '홉스식으로' 부정되기에 이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이기도 한, "소위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 극단들 사이의 중간을 지향하는 시민 관념을 포기하고, 이 시민을 복종 의무를 지닌 신민으로 대체"했습니다.  특히 정치적 불안을 심각하게 야기하는 것이 과거 그리스 전통에서의 평가와 점차 점진하는 정치인들의 명예욕이 이를 부채질하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더욱이 그가 말하는 야만적인 자연 상태를 분석할 때, 모두가 평등하게 태어나고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일반적인 평등 이론'이 더욱 '자연 상태'를 조장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홉스는 신분 상의 차이나 계급적 차별을 수용하고 이것에 반하는 평등 관념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후세에 홉스에 대한 평가들 가운데, 자유주의자 혹은 구왕권주의자와 같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수식어로 대비되는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는 저자인 뮌클러의 고찰대로, 전기와 중기의 홉스 사상과 후기의 내용이 상당히 변화가 있었다는 것과 이중에 '리바이어던'과 '베헤모스'를 놓고 봤을 때, 전자의 주목 받는 여러 논증이 '베헤모스'에서 상당히 신중해지거나 논리적 일관성의 문제가 발생하는 점은 앞으로 좀 더 분석이 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nbsp; &nbsp;<br><br>글 1장의 2부에서, 이들 자연 상태에 적나라하게 제시되는 "가장 약한 자조차 가장 강한 자를 죽일 수 있다"는 논리는 계략과 음모라는 매개는 물론, 거기에 동원되는 살인 무기 등을 통해, 그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여실히 논증하고 있었는데요. 이처럼 홉스는 그 시대에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관념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현대의 이 세계에서도 어떤 한 사람을 매장시킬 수 있는 모략(물론 심히 거창한 표현이지만)과 술수는 여전히 가능하며, 이러한 전제로 인해 인간의 선의와 도덕적 선행에 대한 인식을 매번 긍정할 수 없는 이유라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홉스의 분명한 인식처럼 수많은 개인들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합리적인 측면에서의 이익 추구가 절대 권력의 방만과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을 (견제할 수 있다거나)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날처럼 사실상 도덕이 붕괴된 상황에서 '연계된 개인들의 합리적 이익 추구'가 과연 홉스가 그토록 바라던 사회 질서와 안전 유지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지는 최근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장담해 마지 않던 자유 시장의 터무니 없는 관념과 일맥상통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홉스는 2장에서, "인격적 유대와 필요 지향적 노동의 자리에 들어선 시장 매커니즘에 사회적 통합이 고착된 것을 인간 본성의 산물로 묘사"한 귀결은 홉스가 "시장이 매개하는 사회는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관점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다만, 그는 '법의 기초'에서 철저한 '법의 보장'만이 신민들의 방종을 방지하고 이러한 법의 토대가 결정적으로 정치적 및 사회적 안전에 기본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는 있습니다.<br><br>앞서 강조했단 바와 같이, 홉스가 규정하는 주권자는 "시민 일반의 복지를 염두에 두어야한다"는 원칙과 그것을 지킨다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일종의 선결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세금 문제가 결부된 영국의 찰스 1세의 처형이나, 이후의 루이 16세가 단두대에 의해 목이 잘리게 되는 점도, 자기 보존성과 연계된 시민의 복지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절대 왕권의 몰락을 비극적으로 증명하는 역사적 사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홉스는 그러한 전제 정치 내지는 왕권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붕괴시켜, 한 국가를 내전에 빠트리게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 못 박고, 동시에 이러한 주권적 권력의 태만에 대해서도 경종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홉스가 자신의 후반부 논저에서 상당히 누그러진 태도를 보이기는 했으나, 2장 5부에서, 그의 리바이어던을 통해, "주권적 통치자를 갖춘 정당한 권력 구조"에 대한 논증은 그의 사상이 어떤 관점으로 어떤 맹목적인 위치에 놓여 있는지, 설득은 안되지만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br><br>끝으로 홉스의 시대 역시, 도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쉽게 야만에 빠질 수 있었던 정치적 위기의 순간들이었지만 그가 일관되게 서술하는 국가의 선결 과제와 그런 틀로 규정된 정치적 권력과 이 정점에 위임한, 이 '주권'에 관련된 내용은 현대에 살고 있는 저에게도 적잖은 고찰을 요구했습니다. 일반 신민들에 대한 다소 냉정한 평가와 이들의 방만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법의 단호한 대책과 같은 일련의 논리적 연계들은 '주권'을 온전히 발휘하고 그것을 권력화하여, 국가 통치에 나서는 소위 '존귀한 세력'에 대해서는 다소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부분은 특별히 주목할 만합니다. 특히, "반왕권주의적이고 친공화주의적인 결론을 피하기 위한 홉스의 노력"은 2장의 초입에서도 일관된 진술로 드러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nbsp;그의 논점들은 정치 구조와 그것의 행위자들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역설적으로 추동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시 요즘으로 돌아와, 홉스가 작금의 극단주의 세력에 어느 정도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고, 또한 제한적인 자유 관념과 그 정치의 목적이 오로지 사회 질서 유지와 그로 인한, 신민들의 자기 보존에 우선한다는 맥락은 그것의 서사적 전개 및 요지 자체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한편으론 지금의 현실과 비교하여, 어쩔 수 없이 씁쓸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글의 1장 중후반부에서 자유 평등의 상태가 홉스에게는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는 점과 이 자유와 평등을 근본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결론, 그리고 그 효력 범위에 대한 촉구는 여러모로 그가 전면적인 계몽주의 시대 이전의 사람임을 깨닫게 만듭니다.&nbsp;&nbsp;<br><br>- 행동의 동기를 이익으로 환원하고 그것을 인간 행동의 여러 요인들의 주된 목적으로 삼는 등의 이익 본위의 행동 원리는 지금까지도 그 역겨운 인상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인간의 합리적인 이익 추구'를 거의 신뢰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능한 한, 최대의 이익추구만이 인간에게 있다고 믿는 편인데요. 바로 여기에 왜 오늘날 도덕 관념이 불필요한 관념으로 추락하고 그것을 백안시 했는지, 이를 통해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홉스 이론의 한계는 바로 이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nbsp;&nbsp;<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10/15/cover150/k29213678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6101538</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궤도 - [궤도 (알라딘 리커버 특별판) - 2024 부커상 수상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149888</link><pubDate>Sat, 14 Mar 2026 15: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14988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92136949&TPaperId=1714988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30/79/coveroff/k59213694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92136949&TPaperId=1714988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궤도 (알라딘 리커버 특별판) - 2024 부커상 수상작</a><br/>서맨사 하비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06월<br/></td></tr></table><br/>1975년생인 서맨사 하비는 부모의 이혼 전까지, 잉글랜드 남동부 켄트 주의 메이든스톤 인근 디튼에서 10년을 살게 됩니다. 이후 모친은 아일랜드로 이주했고 하비는 요크, 셰필드, 일본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십 대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그녀는 대학의 정규 교육 과정을 시작할 나이가 되자, 영국으로 돌아와 요크 대학과 셰필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2005년에는 바스에 있는 공립 대학인 바스 스파 대학에서 창작 글쓰기 관련 석사 과정을 수료하게 됩니다. 그녀의 첫 소설은 '황야 (The Wildeness)'로 2009년에 나왔고, 이후, 2012년에 '모든 것의 노래 (All Is Lost)', 2014년에는 디어 시프 (Dear Thief), 2018년의 '서풍 (The Westren Wind)' 그리고 2023년에는 '궤도 (Orbital)'가 출간됩니다. 그녀의 소설은 맨부커상, 베일리스 여성 소설상,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 월터 스콧상 등 많은 상의 후보로 거론되었고, 2010년에는 '더 걸쳐 쇼' 에서 선정한 최고의 신인 영국 소설가 12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녀의 작품들 가운데, 궤도는 2024년에 부커 상과 호손든 상을 수상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Orbital"로 지난 202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초도 번역은 2025년에 이뤄졌으나 제가 구입한 판본은 '알라딘 특별판'으로 리뉴얼 되어, 2026년 3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br><br>근래 출간된 영미 소설들 가운데 하비의 '궤도' 만큼, 크게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은 없을 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지난 추석 때, 본가에 있는 작은 동네 서점에서 구입을 할까 망설이다 놓고 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시류에 이끌려 특정한 글을 보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저로서는 내심 이 작품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으나, 알라딘의 상술(?)에 완전히 굴복하여 이번에 특별판으로 구매를 하게 되었습니다. 책 정면의 제목은 명품 시계의 '선레이 처리'처럼 빛의 각도에 따라 글자들이 빛나는 형태로 나타나고, 양장 역시 고급스런 코팅을 통해, 공을 들인 노력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이 국내에서 '특별한 판'이 나올 정도이니, 그 인기를 실감할 정도입니다.<br><br>하비의 이 소설을 완독하자마자 처음 들었던 생각은 잘 차려 입고 적잖은 돈이 있어 보이는 남녀가 이 세상에 대해 약간의 '지적 허영'을 포함한. 잘 포장된 진보적 의식를 백화점 쇼윈도에서 보는 것 마냥, 상품처럼 관찰할 수 있는 느낌을 들게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인간이 이룩한 문명의 진보가 확연히 이 지구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가와 또한 인간으로 한정하여, 각자가 지니는 삶의 태도는 완전하거나 완벽할 수 없으며, 그 삶 조차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하지 않으면 온전할 수 없다는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주제 의식을 담고 있었습니다. 얄팍한 관념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과학과 종교를 적절하게 얼버무렸으며, '딥스테이트와 세계 대전'을 함께 언급하는 것처럼, 앞으로의 총체화된 인간 문명의 그 끝이 어디에 있을지도 나름 경고하기도 하는데요. 이 작품에서 '잘 포장된' 오늘날 문명의 어두운 측면과 거기에 드러나는 인간 소외 및 삶의 파편화와 같은 문제들을 철학적 관념과 약간의 종교적 색채를 가미함으로써, 뭔가 마음의 의도적 평안(물론 안도감과는 거리가 있는)과 서사의 연계를 통한 포괄적인 지적인 만족을 독자들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인기를 간접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br><br>여전히 우리의 지구 위에 떠있는 우주 정거장에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우주 비행사' 혹은 '과학자'들인 안톤, 로만, 넬, 치에, 숀, 피에트로 이 6인의 사적인 인생과 이들이 거쳐온 삶, 그리고 주변인들의 관계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 독자들에게 삶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거나,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문명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그다지 간절하지는 않지만 적절한 서사를 통해서 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 정거장에서 생활하고 실험하는 장면에서의 풍부한 자료 제시는 물론, 우주 유영과 중력의 문제, 그로 인한 신체의 변화 등과 같은 아주 상세한 장면 장면의 묘사는 탁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우리가 특정한 SF 장르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정작 진보된 과학이 보여주는 탁월한 요소 보다는 스토리 라인에 숨겨진 핵심 주제가 "분명 소재는 SF물인데, 어느새 정치 스릴러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본말전도가 쉽게 이뤄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비의 이 작품은 고립된 이 우주 비행사들의 외롭고 절제된 삶을 조명하면서 이들이 지구에서 어떠한 삶과 어떠한 인간의 관념을 가졌는지 내밀하게 서술함으로써, 여기에 연계된 여러 일화와 대화들이 우리가 어떠한 배경 위에 삶을 영위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일상이 나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가늠하게 만듭니다. <br><br>미국의 평범한 펍에서 자신의 좁은 인간 관계 만큼이나 그 동네의 아는 사람들과 맥주 한잔을 하는 30대 혹은 40대 가량의 남성이 여기에 등장하는 우주 비행사를 매우 동경한다는 서사는 어떻게 보면 전형적입니다. 이는 우주에 올라가 문제를 일으킬 만한 사람들을 나사에서 전부 걸러낸다는 '우주 비행사 훈련 과정'의 대목을 드러내자마자 앞선 서술은 쉽게 대응됩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누구나 참여할 수 없는 특별한 직업은 그것의 명예나 영광 만큼이나 외롭고 고단할 수밖에 없다는 뭔가 '엘리트주의적인 교조주의'를 느끼게 만듭니다. 지구에서 로켓을 쏘아, 지구 대기권의 우주를 경험한다거나, 다시 달 탐사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유인 우주선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모습 자체는 일개 개인의 특출난 사명감이라든지 책임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쌓아 올린 '인류의 과학 문명이 통째로 기반이 된 시스템 그 자체'일 겁니다. 그 불행한 첼린저 호 폭파 사건을 보더라도 이 시스템의 아주 작은 단 하나의 불안 요소가 무고한 인간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진술 자체는 인간 문명의 진보가 앞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것인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합니다. 후반부에 언급되는 '딥스테이트'에 대한 의미는 바로 이러한 함축적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br><br>또한 오늘날 인간을 위협하는 문제로 대두 될 수 있는 '지구 온난화' 역시 이 작품은 인간들의 정치 문제로 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욕망의 정치'로 요약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손에 거머쥐겠다는 인간들의 무분별한 탈도덕적 태도는 마치 극중 피에트로의 딸이 아버지와 문답을 통해 밝히는 "인간의 진보가 마냥 즐겁지 않다"는 서사와 맞닿아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 등장하는 일본인 과학자 치에의 의미심장한 일화 가운데, 1945년 8월에 일본에 떨어진 원자 폭탄과 관련해, 할아버지의 우연한 삶의 구원, 그리고 이 위험한 원자 분리의 폭탄이 치에의 어머니의 대화로, "인류는 언제 멈춰야 하는 지를 몰라. 언제 그만둬야 하는 지를 말이야."로 불만족스럽게 귀결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정치적 수사와 관념적인 비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일본이 원자폭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으로 이를 간접적으로 갈음할 수 있는 것은 그 의미상의 구조로 보건대. 적절해 보이지만 '은연중 도덕이 붕괴한 인간'을 드러내는 작가의 일관된 모습을 봤을 때, 이는 아쉬운 부분입니다. <br><br>앞서, 작가가 과거에 일본에서 체류했던 일을 적기도 했습니다만 그래서인지 모르겠으나 산과 자연환경, 일본인들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그것이 바탕이 된 진술들은 서양인의 그것과는 매우 상이한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치에와 그의 어머니는 삶과 죽음이라는 모티브로 이어져, 이 작품의 중요한 서사의 축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우주에서의 중요한 임무 때문에 어머니의 상을 치루지 못한 일본인인 치에는, 그 일본인 특유의 철저한 분리된 관념을 드러냅니다. 어머니가 지구에서 삶을 마치셨다고 동료들에게 밝혔을 때,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지 못한 동료는 울음을 터뜨리지만 막상 치에는 덤덤한 태도를 취하는 모습에서 작가가 일본인들을 허투루 바라본 게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눈 대중으로 이들을 살펴본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br><br>끝으로 지구를 회전하며, 그 밑에 사는 인간들과 다른 시각과 삶의 태도 등을 새롭게 견지한 이 6인의 과학자 겸 우주 비행사들이 전형적인 '신과 인간'이라는 직렬적 배경에서 비롯된 차별적인 이해가 느껴져서, 일정 서사에서는 불유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앞으로 있을 인류의 화성 이주나 달 탐사에서 이 우주 공간이 인간의 신체에 미치는 영향과 중력의 차이로 발생되는 문제 등을 선험적으로 조사를 진행하는 일종의 선구자적 의미를 가진다 하더라도 이들을 뭔가 '선택된 사람들'로 간접적으로 규정하거나, 마치 신의 사도와 같은 교묘한 수사로 포장하는 듯 보이는 서술은 역시나, 설득력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이처럼 한 작품에 과학과 종교, 그리고 인간을 적절하게 버무려, 작가 나름의 어떤 통찰을 드러내는 행위는 간혹 특유의 몰이해적 방편이나 관념적 한계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애초에 신과 인간, 그리고 거기에 맞서 진보를 이룩한 인간 문명 자체에 대한 객관적이고 담백한 서사였다면 그럴 수 있겠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보통 작가들은 자신의 소위 '이데올로그'를 증명하거나 밝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만 하비의 이 작품은 잘 버무려진, 그렇지만 이미 잘 알고 있는 주제들을 적절한 SF소재로 풀어내, 그 때문에 저에게는 그다지 신선한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또한 평범한 삶과 자신이 특별한 임무를 하고 있다는 만족 내지는 우월감의 감각. 이 양자 간의 '특별한 화해' 역시,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애초에 우리가 이룩한 시스템이 인간을 거칠게 분류하게 만든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배제하고, 오로지 이러한 주제만을 다룬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br><br>- 이 부분을 따로 언급할까 상당히 고민했지만 한번 적어볼까 합니다. 지구 궤도에서 상행과 하행을 오가며 낮과 밤의 대륙과 도시들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유독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 심지어 북한도 언급되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한국은 아예 없는 것처럼 나옵니다. 밑에 타이완도 수차례 장면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죠. 저는 그저 실소가 나오기만 했는데, 왜냐하면 이 부분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 무엇이든 간에, 정말 웃기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br>- 극중에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 크로노그래프 모델이 등장하는데, 이 장면도 매우 전형적으로 우주 비행사가 남성적인 직업이라는 것을 드러냄과 동시에 치에가 여태 일본에 여자 우주 비행사는 없는지 묻는 장면과 묘하게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30/79/cover150/k59213694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307903</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142442</link><pubDate>Tue, 10 Mar 2026 20:2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14244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52135388&TPaperId=1714244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05/76/coveroff/k15213538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52135388&TPaperId=1714244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자유주의 이전의 자유</a><br/>퀜틴 스키너 지음, 조승래 옮김 / 교유서가 / 2026년 02월<br/></td></tr></table><br/>1940년 11월, 영국 맨체스터 근처의 올덤에서 태어난 퀜틴 스키너는 부친인 알렉산더 스키너와 모친인 위니프레드 스키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특이하게도 서아프리카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습니다. 스키너는 7세가 되자, 7세부터 18세의 남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베드퍼드 스쿨에서 본격적인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의 친형과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곤빌 앤드 카이어스 칼리지에서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여, 1962년 역사학과에서 최우등으로 졸업하게 됩니다. 졸업 후, 케임브리지 대학의 크라이스트 칼리지의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고, 2008년 런던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그곳에서 일하게 됩니다. 스키너는 1981년부터 영국 아카데미의 회원이었고,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1986), 유럽 아카데미(1989), 미국 철학회(1997), 오스트리아 과학 아카데미(2009), 덴마크 왕립 아카데미(2015) 등을 포함한 여러 국가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으로 참여합니다. 지금까지 그는 정치사상사의 '케임브리지 학파'의 설립인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정치적 글쓰기를 학문을 탐구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고전 텍스트를 연구하고 이를 자신의 글에 자발적으로 인용하며,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한 근거에 의해, '텍스트의 원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텍스트가 문화 및 정치 담론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한 것으로, 그가 단순한 강단의 지식인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연구 방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iberty Before Lberralism"으로 지난 199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6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br><br>우리 모두가 인식하고 있듯이 자유라는 단어의 기본 의미와 어쩌면 정치적 신념이 투영되어, 좀 더 확장된 함의는 이를 받아들이는 개인의 차이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역사상, 과거 첨예한 냉전 시기에서 구 소비에트 연방에 맞선, 소위 자유로운 미국과 이를 따르는 서유럽의 '자유'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데요. 이는 이 글의 역자와 더불어 저자인 퀜틴 스키너가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바대로, 냉전 시기에 '자유라는 관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아이제이아 벌린 (다른 말로 이사야 벌린)의 '소극적 자유'를 비판의 틀로 다루고 있습니다. 벌린의 이 소극적 자유는 아주 간단히 말해, 누가 나를 방해하거나 어떤 간섭이나 제약 없이 하고 싶은 바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자유'라는 이름으로 확산되어 왔습니다. 특히 저로서는 1980년대부터 경제적 헤게모니인 동시에 사회 지배적인 관념이 되었던, '신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내재된 신념'처럼 부르짖었던 것이 바로 이 '자유'였습니다. 물론 이들에게는 '우선하는 시장의 자유'를 포함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의미심장한 벌린의 '소극적 자유'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의 그야말로 자유라는 의미의 '확신하는 자기 결정'이 됨으로써, 이것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사회학과 정치학의 구조적인 기준과 잣대로 시대에 맞게 분류하고, 더 나아가 앞선 틀로 '재의미화' 할 수 있는 학문적 가능성 마저 원천 봉쇄되어 왔던 것이 이 자유라는 가치를 둘러싼 싸움이기도 했습니다.<br>어느 정도 필립 페팃과 인식의 궤를 같이 하고 있는 '역사학자' 퀜틴 스키너는 페팃의 '공화주의적 자유'에 많이 경도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세세한 명칭에 있어서, 과거 찰스 1세 시기에 등장했던 '신로마적 이론'에 그 연원과 한때 신로마적으로 해석된 자유가 어떻게 당시 영국 지식인들의 주제가 되었는지를 저자는 논하고 있었는데요. 도입에서 설명한 벌린의 '소극적 자유'가 그저 자신의 행동 자유, 즉 어떤 제한이나 간섭 없이 내가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그것이 자유의 본질이라는 해석에 저자는 몇 가지 반론을 제기합니다. 만약 과거의 노예주들이 남들보다 좀 더 선의와 아량을 갖고 자신이 소유한 '노예'에게 약간의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면, 이 노예는 과연, "자유로운 상태인가, 혹은 자유를 향유하고 있는가" 라고 명확히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보탭니다. 이는 그저 '자유롭게 행동할 자유'만을 강조하고 이것이 인간 자유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을 비관적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벌린의 자유가 명확한 인식의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소극적 자유에 극적으로 대비된 인식이 바로 '신로마적 자유'입니다. 이를 아주 간단히 언급해 보자면, 진정한 자유란 타인은 물론, 어떤 권력이나 체제에 지배 당하거나 예속된 상황을 극복한 '대의'로서의 자유를 뜻합니다. 우리의 가까운 역사에서, 5공화국 시절에 그나마 알량하게 누려왔던 시민들의 자유, 그리고 스포츠와 같은 허접한 취미,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던 것을 그 사회의 개방성이라고 지칭했던 당시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의 답습된 발언 등을 기억합니다. 민주주의와 하등 상관 없는 정권이 시민들에게 배려하는 듯 보이는 알량한 자유란 바로 그런 의미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br>18세기 공리주의의 역사가 태동하기 전까지, 영국이 찰스 1세의 처형을 계기로 아마도 진정한 자유, 즉 왕의 권리나 권의에 예속되지 않는, 자유의 본질에 대해 당시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그 시절의 논란을 일으켰던 토머스 홉스는 지금에야 대단한 사상가로 추앙받고 있지만 그 괴랄하기 짝이 없는 '리바이어던'에서 "국가의 권력과 그 신민들의 자유 사이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모두가 행하는 총체적 소산의 무언가인 리바이어던의 핵심은 법의 규제가 어느 정도 명시적으로 규명된 상황에서 소위 이 체제하에 놓인 신민들의 자유가 어떠한 맥락을 갖고 있는지 냉정하게 분석했던 것이 바로 홉스였습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법의 강제력을 부과하는 것이 일종의 자유라고 여긴 것이 확실히 그라면, 약간의 상상을 보태어, 소극적 자유와 신로마적 자유를 긍정하는 양쪽의 세력에게는 결과론적으로 악몽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여기서 소개되는 홉스의 또다른 결론인, "일치해야 하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 한, 신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대로 의미심장합니다. 강력한 주권자가 존재하고 그 주권자가 다수의 신민들을 지배하지 않는 경우, 신민은 그의 재량대로 무엇을 할 수 있거나 혹은 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것으로, 홉스 역시 이율배반적이지만 자유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판단됩니다.<br>그런 연유로 저자가 소개하는 니덤의 사상은 그 시대의 진보적 관념을 엿보게 합니다. "모든 정부의 목적은 인민이 지배자나 다른 동료 시민들에게서 압박과 억압 없이 그들의 권리를 확고히 누리게 하여 이익과 편안함을 누리게 하는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일종의 명시는 자유와 또다른 자연권에 대해 겸허히 숙고하게 만듭니다. 사실 저자인 스키너가 발굴한 그 시대의 저술가들이 거의 공통된 목소리로 말했던 것은 자유라는 본질적 의미가 결국엔 시민들(혹은 신민들)의 자연권 개념과 맞닿아 양자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점입니다. 그래서 절대 왕정의 국왕의 권리 내지는 권위가 그 신민들을 사실상 옥죄게 될 때, 귀족을 비롯한 중간 계급의 헌정적 함의에 대한 요구 역시, 비슷한 강도로 도출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자유라는 개념이 그저 일개 인간의 제한적인 행동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집중된 권력의 왜곡이 오로지 한 인간으로부터 체제적 종속으로의 폭력으로 시발되어, 결국 왕의 목조차 베어 버릴 수 있는 '목소리들의 요구'가 역사의 어법으로 '인정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의 행로에서 그 이전의 수많은 사람들의 요구가 지배와 예속의 굴레에서 억압되어 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맥락으로 '역겨운 obnoxius 조건'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는 누군가의 선의에 의지해야만 할 정도로 쉽게 곤경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 등을 뜻하는 것인데요. 이 선의는 도덕적 양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겸허한 선의 뿐만 아니라, 크게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국왕의 '임의적 재량권'과 같은 개념과 대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로마적 자유의 정의는 아주 명백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지배나 예속, 혹은 종속 상황에 놓여져 있는데도 그저 알량하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만이 주어져 있다면, 그 사람이 과연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이냐는 물음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br>이렇게 개인적 자유에 대한 시대적 고찰, 혹은 사상의 분기에 따른 분석을 거쳐, '자유국가'에 대한 이미지인 "자유국가 안에서만 개인들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시각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때의 국가들은 정복이나 전쟁을 통한, 국가의 영광 내지는 승전의 열매를 쟁취하기 위한 노력들로 국한되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언급된 바와 같이, 개인의 자유는 체제 안에서 확실히 부차적인 문제였을 겁니다. 이러한 가운데 니덤의 진술로 보건데, 자유의 또다른 부분이 모든 사람의 시민적 권리와 수준의 향상에 있다는 것을 주지한다면, 자유 국가에서 개인이 시민적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는 홉스적 이해는 어느 정도 그 개념적 이해가 가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전의 대부분의 왕정 국가들은 왕이 신민을 자신의 재산으로 인식하고, 신민들은 왕의 예속된 상태로 그런 상황에서 왕은 총신의 발언에만 주목하여, 대체로 권력의 방향은 일방적이었습니다. 여기서 국왕은 신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자신의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짐은 하늘의 명령을 받은 국왕이다"와 같은 절대 왕권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 책에선 엘리자베스 여왕조차도 폭군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왕의 임의적 재량권이나,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광범위한 조세 권리를 가졌던 것처럼, 국가는 어쩌면 국왕의 소유물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종속되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은 그저 제한과 강제를 빗겨낸 자유가 아니라 근본적인 지배에서 벗어난 자유가 그 사람의 진정한 자유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nbsp;결국 이러한 역사 과정을 헤쳐 나오는 가운데, 시민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이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거나, 혹은 입법에 관여하는 수 밖에는 그 인식과 현실의 합치의 유일한 대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설사 그것이 유토피아적 발상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여기에 더해, 신로마적 자유의 퇴행과 원래 신로마적 이론이 강조했던 공공선에 대한 후퇴 내지는 공공성의 상실 역시, 자유국가에 대한 맹목적 요구가 그 파급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nbsp; &nbsp;<br>이제서야 언급하는 것이지만, 앞선 벌린의 '자유'와 대비되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공공선에 이바지하게 되는 공적인 자유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최근에 68혁명의 실패로 좌파가 지녀왔던 공공성의 가치 추구와 공공선에 대한 개념적 혹은 실제적 가치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목도했습니다. 흘러간 샹송 가수인 에디트 피아프의 애처로운 목소리 만큼이나, 공공선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은 지리멸렬을 넘어, 실낱같은 희망도 찾아 볼 수 없는 수준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분명하게 '역사가'로 지칭하는 퀜틴 스키너가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자유에 대한 소위 변질된 신자유주의자들(제한된 권력으로서의 자유를 사실상 특정 계급에게만 용인하자는)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서 기본적인 시민적 권리마저 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신자유주의자들의 대대적인 사회 부조와 정부 지출을 철회한 시점에서, 그 이유는 무엇보다 자본의 이익을 위해) 작금에, 과거 공화주의의 부활을 외치는 여러 학자들과 그 중에, '공화주의적 자유'를 도출한 필립 페팃이 주목 받는 이유는 이처럼 그럴 수밖에 없는 맥락을 갖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명백한 신자유주의 이론조차도 망상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자리를 비켜나고 있지만 그 대폭락의 2008년 이후에도 여전히 그 체제는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락에서 언급한 공공성의 추구와 공공선을 통한 공적인 자유의 복귀 내지는 부활은 이만큼 수많은 시민들의 삶을 위해 필요한 선제 조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샹탈 무페가 떠오르긴 합니다만 벌린을 위시한, 제한적이고 다른 매개로 시장 친화적이면서, 부를 가진 계급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하는 민주주의에서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것들을 치워버릴 수 있는 혁명적인 진보 세력(허위의식에 사로 잡힌 자들이 아닌 알짜배기와 같은)의 부활이나 대응 세력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나, 앞선 자유로 대표되는 제한적인 자유 담론은 이미 극단적 헤게모니가 된 지가 이처럼 오래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br>끝으로 스키너의 이 책을 통해, 제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부분은 "공화주의만이 진정한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는 문구였습니다. 다만, 겉으로 자유주의와 자유 세계로 포장하는 국가나 사회의 자유로서, 그 한계를 명확히 한 것도 인상이 깊었는데요. 일전에 다른 책에서, 권위주의 체제에 놓여 있는 국가의 시민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자신이 자유를 누리고 있고 또한 자유롭다"라고 조사된 어떤 설문을 보면서, 자유의 헤게모니적 차원의 비극적 운용 방식은 정권의 차원에서 차등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의 후반부에서, 저자인 스키너가 "현대 정치철학에서 자유주의 이론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위치에 오르면서, 신로마적 이론은 시야에서 너무나 멀리 사라져 오로지 자유주의적 분석만이 관련된 개념들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논리정연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진 것이다"라고 일침을 가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벌린이 의도치 않게 확산시킨 '강제의 제거'로서의 자유가 궁극적인 지배와 예속 상태로서의 해방에 가까운 자유를 압도하게 됨으로써, 벌린 자신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떠한 명성을 얻은 점은 분명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 체제하의 자유의 본질이나, 국가가 시민들의 자유를 어디까지 보장할 수 있겠느냐와 같은 건설적인 논쟁이 필요한 것은 거듭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여기에 권력의 분립으로 인한 분명한 이득, 혹은 '모두가 평등한 자유'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적 가치의 실체적 복귀만이 시민들에게 더 확실한 자유를 보장하는 길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이러한 "공화주의적 자유론을 발굴해 내는 작업이 가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 도전할 수 있는 소중한 사유의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라는 제언은 더욱 귀담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nbsp;&nbsp;<br>-본문 91페이지에 띄어쓰기 오류 한 곳이 있었습니다.&nbsp; &nbsp;&nbsp; &nbsp; &nbsp; &nbsp; &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05/76/cover150/k15213538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4057667</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이성과 감성 - [이성과 감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128014</link><pubDate>Tue, 03 Mar 2026 16: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12801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02034983&TPaperId=1712801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701/22/coveroff/k402034983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02034983&TPaperId=1712801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성과 감성</a><br/>제인 오스틴 지음, 김선형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br/></td></tr></table><br/>1775년 12월 16일, 영국 햄프셔주 스티븐턴에서 태어난 제인 오스틴은 성공회 교구 목사로 재직한 아버지와 유서 깊은 가문인 리 가(家) 출신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납니다. 그녀의 부모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삶의 지향에서도 냉정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에 오스틴은 가족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인세를 통한 경제적 이득에도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독신인 그녀가 안정적으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입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익명으로 출판된 "이성과 감성 (1811)"을 비롯, 순차적으로 "오만과 편견 (1813)", "맨스필드 파크 (1814)", "에마 (1816)" 등을 내놓게 됩니다. 특히 에마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생전에는 압도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녀의 사후 "노생거 수도원"과 "설득"이 출간되었고, 다른 작품인 "샌디턴"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불완전한 상황이었던 가문의 지위를 계승한 유산 계급의 여성들의 삶과 연애를 다루었는데, 특히 이 여성들의 지위 추구와 경제적 안정을 위한 "결혼"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앞선 배경의 여성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 아니라 세태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이런 사회적 구조 자체를 일종의 "사실주의적 글쓰기"로 드러낸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녀의 여러 작품은 이미 드라마 혹은 영화화가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작품은 원제, "Sense and Sensibility"로 지난 1811년에 출간되었고, 제가 구입한 번역본은 2025년 12월에 출판된 판본입니다. <br><br>얼마전에 읽었던 존 스펜스의 제인 오스틴 전기를 통해, 이 이성과 감성을 슬슬 손에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그동안 그녀의 다른 장편들을 시공사 판본을 통해 읽었던 만큼 같은 출판사의 번역본을 구하려고 했으나 알라딘에서 검색중 이 번역본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수려하고 적확한 번역이어서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역자의 상세한 주가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는데요. 에마를 비롯, 그녀의 다른 작품에서 작가인 제인 오스틴이 의미부여한 단어의 상세한 설명을 첨부한 점도 역자의 큰 노고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br><br>서식스 지역의 존경받는 영주였던 대시우드 일가는 정상적인 승계가 어려워지자, 당시 조카였던 헨리 대시우드에게 그 유산이 이어지게 됩니다. 그는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안락한 삶을 영위한 이후, 세상을 등지게 되었는데요. 그에게는 전 부인에게서 얻은 아들 하나와 뒤이어 새롭게 맞이한 젊은 부인의 슬하에 세 명의 딸을 얻게 됩니다. 죽음을 앞둔 그는 장남을 통해, 새어머니와 여동생들을 살뜰히 보살필 것을 거듭 강조했는데요. 그렇지만 원래 귀가 얇고 줏대가 없던 장남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익과 셈에 밝은 아내의 강요된 조언으로 끝내 새어머니와 여동생들이 같은 교구이지만 다른 마을인 데번셔로 이주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절차에는 대시우드 부인의 체면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는데요. 이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할&nbsp;바턴 파크가 그녀들이 새롭게 삶을 시작할 곳이었습니다. 남편을 사별한 여자가 의붓 아들과 같은 집에서 쉬이 지낼 수 없는 사정은 이미 짐작할 만한 부분인데요. 당시 영국의 사회 분위기를 보건대, 가정을 이룬 상속자의 일가와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새어머니와의 합가가 녹록치 않은 일이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br>이 대시우드 부인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 딸이 있었는데, 맏딸인 엘리너와 둘째인 메리앤, 그리고 마거릿이 그들입니다. 미스 대시우드로 불리게 되는 첫째 엘리너는 매사가 신중하고 자신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 분별력과 통제력을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이미 작가인 제인 오스틴에게 이 '분별 sense'이라는 단어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본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한데요. '분별력을 잃은 인간'에 대한 오스틴의 일관된 냉소는 작중 화자의 입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뒤이어 둘째인 메리앤은 열일곱 살로 흔한 그 나이대의 소녀답게 감정적이고 또한 자신의 기준보다 떨어지는 사람들에 대해, 가차 없이 대응할 정도로 상당히 자기 본위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메리앤의 매력적인 용모는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어서 우리가 보기에 여러 인물들의 대화나 행적 등으로 조금씩 드러나는 그녀의 결함 자체가 크게 문제시 되지 않을 정도로 가히 범접할 수 없는 후광이 되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이들 자매에 다소 인색한 의붓오빠인 존 조차도 메리앤의 아름다운 외모를 여러 대화에서 꼬집어 칭찬하기도 했습니다.<br><br>작가인 제인 오스틴은 막내인 마거릿의 비중을 거의 두지 않고, 그저 어머니의 곁에 자리한 딸로 국한시킵니다. 이와는 달리 엘리너와 메리앤을 같은 비중의 캐릭터로 두고 이들을 두고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두 자매의 심경 변화와 내면의 성장 등을 이 작품에 드러난 여러 주제 의식들과 맞물려, 서사의 감정이 고조되기도 합니다. 특히 2부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내면의 붕괴와 절망을 경험하는 메리앤의 이율배반적인 성장은 쉽게 예견되지 못할 정도로 대체로 놀라운 부분이었습니다. 이성을 잃고 감정이 무분별하게 폭발하는 듯보이는 행동의 결과로 메리앤이 겪는 그 붕괴의 서사는 쉽게 극복될 수 없는 문제로 여겨지기까지 했는데요. "사랑에 빠진 젋은 아가씨"에 대한 당시 문학의 치명적인 서사들은 인간으로서의 메리앤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됨을 쉽게 예견하게 만들었습니다. 짐작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구조의 대미였다면 말이죠.&nbsp;저는 그저 작가인 오스틴이 독자들에게 어떠한 교훈을 남겨주기 위해 누구도 예상 못한 전개를 더한 줄 알았습니다. 또한 엘리너 역시, 자신이 오랫동안 흠모해 왔던 남자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기에, 어쩌면 이 자매의 붕괴를 다면적인 측면에서&nbsp;부각시키기 위한 서사 구조로도 읽혔습니다.&nbsp;그럼에도 이는 '사랑-배반-증오'의 메커니즘으로 남김없이 파괴되는 인물로 유독 메리앤을 조형한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이런 제 예상은 어김없이 빗나가게 되었습니다.<br>맨스필드 파크의 헨리 크로퍼드가 절로 떠오를 정도로 불쾌한 인물인 존 윌러비는 자신의 체면과 지위, 그리고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입니다. 이러한 본성의 증거보다도 더 과거의 어두운 족적을 태연히 남긴 윌러비는 작품의 3부 중후반까지 개심의 가능성조차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앞선 '맨스필드 파크'에서 헨리 크로퍼드가 젊은 여성(물론 유부녀를 포함해)을 매혹시키는 것을 그저 자신의 자존감을 재확인하고 동시에 고차원적인 유흥거리로 여기는 일련의 '재미'로 점철된 인물이었다면, 윌러비는 자신의 체면을 위한 소비 유지와 돈 나올 때를 귀신 같이 찾는 '자기 이익의 화신'으로 대비됩니다. 그럼에도 윌러비는 3부 후반부에서 죽을 열병에 걸려 하루하루 생명이 위독했던 메리앤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수치심으로 말미암아, 엘리너를 증인으로 세워, 자신의 죄를 어느 정도 회개하게 되는데요. 바로 이 장면에서 엘리너의 남다른 인격과 타인에 대한 연민을 서사로 드러내는 동시에,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메리앤에게도 그 이전의 자신과 완전히 다른 삶을 인정하게 되는 중요한 사건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자신보다 더한 언니의 고통을 알게 된 메리앤은 이제 자신의 남은 삶은 오로지 언니와 어머니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메리앤은 전과 완전히 다른 인물로 그려지게 되었습니다.<br><br>마찬가지로 맨스필드 파크의 메리 크로퍼드가 절로 떠오른 인물인, 스틸 자매의 둘째, 루시 스틸은 그야말로 '자기 중심적이면서 그와 동시에 위선의 화신'입니다. "루시 스틸로 말하자면 예쁜 구석이라고 하나도 없는데 제 정신이 박힌 남자가 그런 여자를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덧붙이는 것과 동일하게 외향과 내면이 부정적으로 일치하는 인물이기도 한데요. 여기에 매사에 자신감을 잃어 어느 정도 자기 혐오에 빠진, 메리앤과 마찬가지로 중요 등장 인물인 에드워드 페라스를 가히 제 손으로 옭아매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작가인 오스틴이 그 비중에 걸맞는 대단한 시련을 얹기 위한 착각이 들 정도로 에드워드와 루시를 비상식적으로 엮은 것이 아닌가 눈을 비빌 정도로, 엘리너를 향한 루시 스틸의 충격적인 고백의 1부 후반부와 사건이 계속 중첩되는 2부 후반부까지 더해지는 이들(엘리너와 루시 스틸)과 관련된 서사는 정말로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오로지 사람을 이용할 목적으로 접근하는 루시 스틸에게 한때, 어머니의 강압과 요구로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해 스스로 방황하기에 이르렀다는 에드워드의 그 지독한 사연이 어떻게 루시 스틸과 같은 '천연덕을 가장한 협잡의 화신 '에게 덜미를 잡히게 되었는지는 극의 개연성의 측면에서 지금도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루시 스틸과 같은 인물 조형에서 시골 처녀가 으레 갖는 순수성을 가면으로 삼아, 돈과 이익 그리고 평판을 교묘히 안으로 갈무리해, 주변 사람을 조정하고 이들의 언행과 지향을 자신의 사활적 이익으로 쓰이게 만드는 메커니즘 자체는 문학의 오래된 설정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 스틸의 최종 행로는 가히 충격이라고 불릴만 했습니다.&nbsp;<br><br>개인적으로는 제인 오스틴이 앞선 메리앤의 인물 조성에 큰 공을 기울였던 점을 수긍하면서도 이 루시 스틸 역시, 메리앤에 준하는 극의 전환을 소용돌이 치는 비중 있는 캐릭터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자신과 에드워드와의 약혼을 최종 국면에서 심각한 방해자가 될 수 있는 엘리너를 자신의 수중에서 '요리'하려고 했던 루시의 협잡은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 루시 스틸의 배경이 될 수 있는 실제 인물을 작가인 오스틴이 어디서 찾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범인의 이해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던 형상이기도 했습니다.&nbsp;특히 서신 교환에 있어 상대방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관례임을 고려해 봤을 때, 자기 임의대로 엘리너에게 서신을 보내는 루시의 행동 자체는 그만큼 의미심장한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이 루시라는 캐릭터를 '나르시시즘'에 기반한 자기 이익 추구라는 설명을 넘어, 쉽게 예상할 수 없는 능수능란한 수단을 본인이 적극적으로 사용할 줄 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인물의 전형 이상의 입체적인 캐릭터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루시가 대미에서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에드워드의 동생, 로버트와의 결혼으로 전환된 점은 실로 역겨운 감상을 남길 정도였습니다. 다만, 에드워드의 자포자기한 심정에서 비롯된 충동과 그런 결과물들의 서사가 극이 진행되는 가운데 연계에 따른 근거들이 다소 부족해 보여, 저로서는 아쉬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우유부단한 인물이라고 해도 일찍이 엘리너가 극찬한 그의 양식과 이해를 고려해 봤을 때, 속수무책으로 루시에게 끌려다니는 그의 모습은 약간 의문인 상황이기도 했습니다.<br>결국 극의 서사가 진행될 수록 새롭게 인정되는 '두 명의 신사'와 연을 맺게 되는 엘리너와 메리앤의 해피 엔딩은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사건들과 이것에 발을 걸치게 되는 주변인들의 때론 단순하지만 그 이면의 복잡한 심상, 그리고 그러한 감정의 높낮음을 몸소 겪으면서 성장하는 이 두 자매의 생생한 모습은 이 작품을 읽어야만 하는 근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메리앤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스스로 '분별있는 여성'임을 쟁취하게 되는 일련의 서사들은 브랜던 대령과의 화촉으로 귀결되어, "신사는 마땅히 분별있고 조리있는 여성을 만나게 된다"는 금언을 새삼 곱씹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교훈 때문에라도 메리앤의 변신(?)은 참으로 기꺼웠는데요. 여기에 극중, 사람과 가문을 오로지 돈으로 판단하는 존 대시우드 부부와 화려한 외모는 가졌지만 그외에는 전혀 갖추지 못한 파머 부인과 결혼한 파머의 자포자기식의 불행한 일화는 결혼에 대해 숙고하는 이들이라면 충분한 교훈을 전해줄 것으로 여겨집니다.&nbsp;다만, 이 작품을 통해, 저는 "평범한 어머니는 딸들 가운데 자신과 가장 닮은 딸을 편애할 수밖에 없다"는 사소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인 오스틴의 문장력과 이를 통해 이끌어가는 서사의 집요함에 저로서는 감탄을 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br><br>- 엘리너라는 인물의 자기 통제력에 기반한 인물됨과 분별력에 기반한 타인을 인식하는 태도는 거의 일관되었고 당장 느끼는 자신의 기분보다 일의 선후 과정을 살펴보는 (이성적) 접근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과연 이런 사람이 주변에 실제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에 거듭 고민해봐도 대체로 누구에게나 회의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nbsp; &nbsp;&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701/22/cover150/k402034983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7012223</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제인 오스틴 - [제인 오스틴 - 세상 모든 사랑의 시작과 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109420</link><pubDate>Mon, 23 Feb 2026 19: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10942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355165&TPaperId=1710942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00/40/coveroff/899235516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355165&TPaperId=1710942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제인 오스틴 - 세상 모든 사랑의 시작과 끝</a><br/>존 스펜스 지음, 송정은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11월<br/></td></tr></table><br/>존 헌터 스펜스는 미국의 저명한 제인 오스틴 전문가로, 2003년 오스틴의 전기 영화인 '비커밍 제인 오스틴 (Becoming Jane Austen)'의 고증 자문으로도 참여했습니다. 그는 1945년 미국 조지아 주의 미첼 카운티 소재인 카밀라에서 태어납니다. 이후 그는 조지아 대학에서 영문학 학사 학위를, 그리고 뉴올리언스에 위치한 사립 연구 대학인 툴레인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영국 런던의 공립 연구 대학인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최종적으로 박사 학위를 마쳤습니다. 그는 학위 취득 후, 사우디아라비아의 킹 사우드 대학과 일본 히로시마 대학 및 도시샤 대학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또한, 스펜스는 본인이 제인 오스틴 전문가로서 호주 제인 오스틴 협회의 편집 위원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했지만 2011년 5월, 다소 불명확한 이유로 시드니 더블 베이에 있는 자택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집필한 '제인 오스틴 되기 (Becoming Jane Austen)'는 지난 2003년에 출간되었는데, 이 책은 "지난 25년 동안 오스틴과 관련해, 출판된 최고의 여섯 권 중 하나"로 평가를 받았고 제인 오스틴에 대한 방대한 사료와 개인 오스틴에 대한 성격과 인성, 그리고 그녀의 소설에 대한 스펜스 자신의 고유한 해석은 그의 놀라운 업적으로 평가를 받은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Becoming Jane Austen"으로 지난 200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7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br><br>존 스펜스의 이 글은 무엇보다 1장과 2장에서, 제인 오스틴의 가계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부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외가 쪽의 가계도 적잖은 자료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부계인 '오스틴 가'와 모계인 '리'가의 많은 인물들의 살아생전 행적 등을 치밀하게 조사했는데요. 여기에는 제인 오스틴이 어떠한 분위기의 가정에서 성장했고 그녀를 둘러싼 가족들의 내밀한 생활사와 더불어 먼 친척까지 관계도로 분류하여, 오스틴 가의 인적 가지들을 독자들이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대략 1740년대부터 1810년대까지 오스틴이 살아간 시대상과 더 나아가 그때의 영국인들이 어떠한 사회상을 품고 인생을 살았는지도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자인 존 스펜스는 제인 오스틴이 남긴 작품들과 그녀 자신이 어떻게 연관되어 나타났는지 이 점도 주요 관점으로 해석했으며, 특히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그녀가 왜 결혼에 이르지 못했는지에 대한 '인연의 한계' 혹은 작가 스스로의 신중함 등을 빠짐없이 언급하고 있었습니다.<br><br>이미 확인된 여러 기록에 의해, 그녀와 언니인 카산드라와의 단순한 자매를 초월한 깊은 우정은 많은 '서간'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만 카산드라가 제인에게 보낸 편지들은 저자인 스펜스가 언급한 바와 같이, 거의 전부가 유실되고 말았는데요. 그럼에도 언니인 카산드라와 제인의 어떻게 보면 친밀하고 부모를 비롯, 동기 간의 이야기들이 후세에 전해지면서 이 두 사람과 전체적으로는 오스틴 일가를 살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제인과 아일랜드 출신의 톰 러프로이와의 짧은 인연이 젊은 시절의 열정으로 끝나자, 그녀는 그 과정에서의 이야기들을 함구하기에 이르렀는데요. 동생을 깊이 이해하고 있던 언니인 카산드라 역시 이에 동참합니다. 후에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제인 오스틴을 가리켜, 톰 러프로이는 젋은 시절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찰나의 열정'을 인정했고 그것이 작가적 명성을 쌓은 제인 오스틴의 연결 고리를 그저 수긍하려는 러프로이 자신의 이기심의 발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실패에서 제인 오스틴이 경험한 '결혼하지 못한 여성'에 대한 편견과 수근거림을 뒤로 하고 그녀는 더욱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혼에 대한 감수성 자체는 오스틴에게도 중요한 문제였기에 그녀 작품 종종 보이는 "사랑하지 않는 상대"와 결혼하는 여성들에 대한 작가적 시선이 아마도 그녀의 숙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nbsp;이에 저자인 스펜스는 "오스틴 일가 대부분이 제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었지만 유독 제인 오스틴은 더욱 개인적 성향이 짙어졌고,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고 언급합니다.&nbsp;<br>경제적으로 그다지 풍족하지 않은 조건에서 꽤나 까다롭게 굴 수밖에 없던 오스틴의 양친은 상대적으로 주변인들에게 '합리적인 인사들'이라는 평가를 종종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오스틴의 형제들을 대부분 별 탈 없이 삶을 영위하게 되는데요. 큰 고난과 굴곡 없이 오스틴의 형제들은 스스로의 인생을 어느 정도 주도합니다. 토머스 나이트의 유산을 물려 받은 에드워드의 사례 뿐만 아니라 장남인 제임스 역시, 그러한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nbsp;특히 군에 투신했던 오스틴의 두 남동생의 여정은 바로 열정과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점철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nbsp;저자인 스펜스가 기록해 낸 당시 영국 사회의 일면들이 꽤나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앞선 오스틴 일가가 분주하게 연결된 혈연에 의해, 간혹 자식이 없는 일가 친척의 유산을 승계하고, 그런 경제적 이익을 얻는 과정에서 영국 사회의 일종의 '현실적 유산'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부동산과 그로 인해 발생되는 연간 수입에 의존하는 귀족 혹은 준귀족 계급의 경제적 안정에 대한 관념 등을 잘 드러내고 있었습니다.&nbsp;특히, 오스틴의 외숙모인 리 페럿의 재산 승계를 바랐던 그 과정에서 오스틴 일가와 리 페럿 간의 밀고 당기는 양상은 그 장면 하나하나가 꽤나 인상이 깊었습니다. 후에 제인이 너무 아끼던 오빠인 헨리가 무리하게 운영하던 은행 사업이 파산하면서 외숙모에게 끼친 손해가 막심하자, 리 페럿이 보인 오스틴 일가에 대한 분노 역시, 새삼스럽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다만, 저자인 스펜스가 깊게 서술하지 않은 관계로, 1800년대 초반, 유럽 대륙에 벌어졌던 '나폴레옹 전쟁'에 대한 영향력과 그 파급이 그냥 지나치는 수준인 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제인 오스틴 본인을 비롯, 그녀의 일가가 마치 유럽 대륙과 멀리 동떨어진 하나의 섬처럼 작용했던 영국에서의 삶이 그렇게 차분하고 고요할 수밖에 없던 점이 쉽게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br>스펜스는 오스틴의 작품과 관련하여, 우선 '맨스필드 파크'를 언급합니다. 이는 그녀의 작품들에 있어 위계를 세운다면 이 작품이 우선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들고 있는데요. '오만과 편견'은 물론, 후에 등장하는 '에마'역시 쉽게 탈고를 끝낸 반면에, 맨스필드 파크는 그녀 스스로가 오래 고민했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제인은 '맨스필드 파크'를 1811년 2월경에 쓰기 시작해, 소설을 구상하는 데만 적어도 10년이 걸렸다."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 작품에서 패니 프라이스에게 상당 부분 자신을 투영한 오스틴을 저자가 따로 분석하면서, 그 시대를 통틀어 약간 괴상하면서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 낸, '아주 못되 처먹은' 메리 크로퍼드를 요새 말로 톱 스타 마냥 소개하고 있기도 했는데요. 물론 이는 반쯤은 그 시대의 독자들의 의견을 덧칠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저자인 스펜스는 맨스필드 파크가 출간되어 인기를 끌자, 당시 독자들이 메리 크로퍼드에 보인 열광적 반응을 빗대어 설명하고 있었는데요. 그다지 낙관적인 분석은 아니지만 오스틴이 왜 메리 크로퍼드와 같은 인물을 그려냈는지에 대해, "자신이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 그 자유라는 측면의 이상"을  제인 오스틴이 새롭게 발견했고, 또 그것을 자신이 원하게 될 것을 예견했던 것에 이유가 있지 않나 추측해 봅니다.<br><br>이미 언니인 카산드라를 통해, '에마'에 대한 그녀의 기대가 드러나듯, '에마'역시 오스틴의 작품들 가운데 한 획을 그은 소설이기도 합니다. 실제 삶에서 오스틴은 그녀가 너무나 사랑했던 스티븐턴을 떠나 우여곡절 끝에 이른 '초턴'에서의 일기가 '에마'의 하이버리 마을에서의 장면들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느껴질 만한데요. 앞서 스치듯 지나간 제인 오스틴이 '여자 가정교사'에 대한 상당히 저어했던 감정을 차치하더라도 아주 극적인 태도의 변화까지 느껴지게 만드는 '에마'에서의 테일러 양의 인물 조성은 상당히 작가의 인식과 간극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에마의 주인공인 에마 우드하우스가 일전의 테일러 양의 사례에 힘입어, 보는 사람에 따라 다소 경솔해 보일 정도로 가여운 운명의 해리엇 스미스를 통해, 적절한 남자를 소개하는 장면 자체는 실제로도 제인 오스틴이 자신의 조카를 위해 그러한 '중매'를 했다는 점에서 꽤나 놀라운 사연이기도 했는데요. 앞선 맨스필드 파크에서, 패니 프라이스에 대한 아이디어를 오스틴 자신의 조카인 패니 나이트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도 몇몇 애정을 둔 조카들을 극의 인물들에 대입시킨 사례는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에마에서 자유분방하고 장난스러운 성격인 에마 우드하우스에게 덧입힌 것이 조카인 애나의 성격이기도 했습니다.&nbsp;이미 5장과 6장에서 따로 설명되는 바와 같이 오스틴의 여러 작품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과 모티브는 대부분 자신의 가족과 친척으로부터 차용되었습니다. 외가인 리 일가의 세 자매 역시, 맨스필드 파크에서 간접적으로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br>오스틴의 다른 작품인 '이성과 감성'은 유독 다른 작품들과 달리, 섹스와 관련된 간접적인 긴장감과 감성적인 측면이 드러납니다. '오만과 편견'도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관계를 통해, 저의 해석으로는 섹스를 통해 발산되는 관능과 감정의 고조가 다소 간접적으로 소비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섹스라는 주제 자체를 간접적으로 또는 완곡한 어법으로 처리한 제인 오스틴 특유의 주제 의식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을 따로 주제의 한 방편으로 꺼내 그녀의 여러 작품들과 연계해서 분류해야 될지는 독자들의 판단이기도 하겠습니다만 그녀의 작품 대부분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젊은 남녀들임을 감안해 본다면 그 시대에는 매우 희소한 여성 작가가 그리는 연애와 결혼, 그리고 그 속에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런 섹스 자체의 간접적인 요소 채용은 독자들의 흥미를 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br><br>적당히 압축해 담은 저의 글이 이 상당한 분량의 자료들을 담은 '제인 오스틴' 개인의 삶을 얼마나 담아낼 수 있을지는 불명확합니다. 다만 저와 비슷하게 이미 그녀의 작품 여럿을 경험해 본 독자들에게는 스펜스의 이 책은 파란만장한 그녀의 작품들을 내면에서 다시금 되새김질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직 '이성과 감성'을 일독하지 못해, 이 책에서 소개되는 이성과 감성과 레이디 수전에 대한 부분은 그저 읽고 참고하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또한 '노생거 수도원'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캐서린 몰런드에 대한 짧은 인상과 작가인 제인 오스틴이 실제로는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 배스 (혹은 바스) 에 대한 인상과 이곳에서 그녀가 느꼈던 감상들이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스티븐턴과 바스를 비교하여 후자를 가히 살기 어려운 도시로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이해될 만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분주한 휴양지에 대한 인상이 대개 그렇듯 말입니다. 또한 그녀의 후기 작품 가운데, 자신의 친오빠인 헨리와 그와 결혼한 사촌 엘리자 드 푀이드를 투영한 레이디 수잔은 영미 문화권에서 대표적으로 '수잔의 계략'으로 소개될 만큼 중요한 작품입니다. 여기에 헨리는 특유의 진취적 사고와 긍정적인 기질로 인해 오스틴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형제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친오빠와 결혼한 엘리자 드 푀이드는 이들이 처음 스티븐턴에서 대면했을 때, 당시 십대였던 헨리와 엘리자는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도 했습니다. 이미 어린 나이에도 감수성이 예민했던 오스틴은 이들의 부적절한 관계 (보기에 따라 아주 역겨울 정도로) 에서 그 어떤 사건에서 보다 감정적 변화를 드러냅니다. 이 감정적 변화는 그녀 평생에 걸쳐 나타나게 되는데요. 엘리자의 첫 결혼 상대였던 프랑스의 귀족이었던 푀이드 백작이 혁명 재판에서 목숨을 잃자, 얼마간의 공백기를 거쳐 헨리와 그녀는 맺어지게 됩니다. 바로 이 두 사람의 결혼과 그것을 이뤄낸 (헨리와 엘리자, 여기선 엘리자의 시점에서)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연계된 것이 바로 '레이디 수잔'이라는 작품으로 여겨집니다.<br>끝으로 스펜스의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일독했던 제인 오스틴의 여러 작품들에 대한 나름의 재해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약간의 첨언이지만 맨스필드 파크에서 등장한 그 조악한 연극의 시도는 작가인 오스틴이 과거 스틴븐턴에서 크리스마스 시기에 올린 '가족 연극'에 모티브를 가져왔다는 기록도 해석의 사소한 확장을 제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주인공인 패니 프라이스가 연극에 대한 그런 모호한 태도를 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일독하실 분들에게 권유하고 싶은 것은 먼저 오스틴의 작품을 되도록이면 전부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여기에는 제인 오스틴의 삶과 일상 생활에서 그녀가 견지한 태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출간한 작품들에 대한 그동안 알 수 없었던 숨겨진 사실들이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인명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물론 작품의 각 인물들이 오스틴의 어떤 형제, 어떤 친척, 혹은 어떤 익명의 이웃에서 차용했는지, 이 책은 아주 상세히 이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그동안 읽었던 '노생거 사원', '맨스필드 파크', '설득', '오만과 편견' 등에서 새로운 감상을 느껴보기도 했습니다. 특히 한때 오스틴의 짦은 사랑이었던 톰 러프로이와 그를 투영한 '어떤 작품'에 대한 저자의 분석을 직면하게 되었을 때, 짧은 탄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모든 것들 때문에 얼마 전까지 생생하게 함께한 제인 오스틴의 말과 생각이 제 뇌리를 쉽게 떠나지 않게 된 연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nbsp;<br>- 그저 어떤 개인의 인생으로 조망해 보건대, 제인 오스틴 역시 글을 쓰기 이전의 자신의 삶이라는 조건에서 결혼과 안정적인 경제적 생활이 불확실해 놓였을 때, 아마도 그녀 자신을 숨기는 법을 터득했으리라 이해됩니다. 오로지 언니인 카산드라에게만은 자신의 기질에 기인한 유쾌함과 기민함을 보여주지만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남자들과 그런 남자들이 가지는 특성과 개성에 의구심을 갖지 않고 존중했으며, 이러한 관점은 그녀의 작품 여러 곳에서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녀의 작품 전반을 사회적 구속에 놓인 여성들의 결혼과 그런 관념의 총체라고 볼 수 있다면 그것을 만든 사회를 쉽게 비난할 수 있었지만 각 인물들의 개인사와 주변의 삶을 파고들어 그것을 문학적 집약체로 만든 것이 제인 오스틴의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혹여 페미니스트들이 그녀의 작품을 '페미니스트 문학'이라고 대변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nbsp; &nbsp; &nbsp;<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00/40/cover150/899235516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004019</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정치는 말로 설득되지 않는다 - [정치는 말로 설득되지 않는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079900</link><pubDate>Sun, 08 Feb 2026 21: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07990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62030402&TPaperId=170799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854/95/coveroff/k66203040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62030402&TPaperId=1707990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정치는 말로 설득되지 않는다</a><br/>사라 스테인 루브라노 지음, 이혜경 옮김 / 북플라자 / 2025년 07월<br/></td></tr></table><br/>저자인 사라 스테인 루브라노는 하버드 대학을 거쳐, 케임브리지에서 석사를 그리고 옥스포드 대학에서 정치 이론을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녀는 인긴 심리학과 정치 이론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에 따라 시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인지 부조화 현상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인지 부조화 현상이 어떻게 현대 정치적 일상에서 음모론과 확증 편향, 더 나아가 민주적 담론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조사하고 있는데요. 이런 일환으로 그녀는 영국 런던에 있는 '더 스쿨 오브 라이프 (The School of Life)'에서 콘텐츠 책임자로 일했고 여러 소셜미디어와 앱 기반 및 영화 등지에서 활동을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그녀의 이 논저는, 자신이 처음 발표한 글로 출간 즈음에 유튜브와 여러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 활발한 홍보 활동을 겸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Don't Talk About Politics : How To Change 21st Century Minds"로 최근인 2025년 5월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br><br>저자인 루브라노에 대한 정보를 구글에서 찾다가 이 책에 대한 그레이스 블레이클리의 짧은 감상평이 보여 제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근래들어 어떠한 정치경제학자들도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극단주의, 극우 포퓰리즘 정치에 대해 특별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지 못하는 실정을 감안해 본다면 루브라노의 이 글은 부분적으로는 상당히 독창적이라 여겨집니다. 우선 저자는 자신이 누구보다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소위 다른 계층의 지식인들과는 다른 정치경제적 배경을 갖고 있다고 서슴없이 고백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엘리트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표출하는 것도 신기했고, 극단주의 정치를 자신의 연구 목표로 삼은 점도 제가 보기에 흔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서두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지만 그녀의 이 논저는 아주 철저하게 이론과 고증에 집착한 학문서가 아니라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 정치,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그 구성원들인 우리 시민들의 관점에서 글을 진행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목도하고 있는 현실 정치를 기반으로 시민들이 처해 있는 인터넷 기반의 '인지 부조화'와 확증 편향 등이 강화되는 문제적 현실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근본적인 문제 인식과 여기에 좀 더 실효적인 개선 방법을 시도할 수 있는 방안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br><br>저자가 보는 현실 정치에서 소셜 미디어가 갖는 위상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올라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자인 루브라노는 1장의 논증에서 아주 기본적인 '의사 소통'이라는 관점으로 이들 소셜 미디어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단언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저자가 서두에서 도출한, "자유주의라는 오래된 명목에서 개인의 권리, 사유 재산, 법 앞의 평등을 강조하는 이 유산"이 과연 오늘날 현대 정치에서 제대로 기반해, 작동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되묻고 앞선 '소셜 미디어 혁명'을 자신의 고유한 이론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자유주의적 전통과 유산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신뢰 구축과 지향에 어느 정도 이바지하고 있다고 표면적으로는 인정할 수 있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이 자유주의는 특정 정치 세력이 이를 왜곡하거나 혹은 시민 전체를 아우르는 자유라는 이상의 확대가 더이상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이 지점에서 필립 페팃의 공화주의적 자유를 굳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자유라는 정형화된 가치가 아니라 이제는 현실에서 이 자유라는 권리가 얼마나 평등하게, 혹은 실질적으로 보장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인 루브라노가 밝히는 소셜 미디어 상의 우리가 흔히 수렴하고 있는 의사 소통과 시민들 간의 의견 개진이 그저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백히 인식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br><br>이미 이 글에서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본질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지만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개인의 자아 실현과 소비를 통한 개성의 확대, 혹은 (능력을 통해 돈을 축적하는) 신분 상승과 그런 이상을 교묘하게 언설로만 그친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더욱 조장된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서 이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교묘하게 작동했는지를 여기서 따로 논하지는 않겠지만 저자 역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부와 능력을 과시하는 이런 포장된 '선물 세트'가 무슨 시민들간의 소통의 한 방편이 될 수 있겠느냐고 오히려 반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근본적으로 이 글에서 논증되는 부분이 과거 위르겐 하버마스가 고안한 '공론장'의 기능이 거의 유명무실화 된 상황에서 후에 드러나겠지만 이 공론장에서의 토론과 의견 교환이 시민들, 서로 간의 건전하고 생산적인 정치적 무대가 되지 못하고 있는 점은 직시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요. 여기에 저자인 루브라노는 이 전통적인 공론장을 새로 고쳐서 혁신해야 된다는 접근은 애초에 제시를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저자의 공론장에 대한 막연한 회의를 전통적인 공론장이 민주주의 정치에서 유명무실해졌거나 아니면 공론장의 이상들이 현대 정치에서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공론장에서 시민들이 공공선에 대한 논의가 예전 같지 않은 환경에 놓여 있다는 것은 분명하고, 또한 행동에 앞선 인식과 무엇보다 중요했던 시민들의 도덕적 분별력이 예전보다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비상한 다른 관점의 분석이 요구되는 분위기는 거의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br><br>그런 면에서, 저자가 '토론'에 대한 실질적 의미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근본 이유를 2장, 이후의 논증에서 대략적으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듯 토론은 정치 전반을 통틀어 매우 중요한 가치이자 담론이었습니다. 과거 미국의 대선 시점에서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의 치열한 양자 토론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정치적 문화가 말하는 바는 분명했습니다. 서로 간의 의견 대립을 충분한 토론을 거쳐, 좁힐 수 있으면 좁히고 심지어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동안 잘못 알고 있던 부분이나 혹은 왜곡된 인식을 바로 잡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토론, 그러니까 정치인들의 필요한 상식선의 논쟁이라든지, 일반 시민들 간의 사소한 의견 교환까지, 그 본연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맥락은 이렇습니다. "내가 공화당의 지지자인데 우리 정치인이 상대 당의 정치인(이를테면 민주당)과 공개된 토론이 시작되면 나는 상대당 정치인의 합리적인 의견이나 사리에 맞는 상황 인식보다는 우리 편의 정치인이 어떻게 저 정치인을 찍어 누를 수 있을 지를 고민하고 또 기대한다."는 일종의 이종 격투기와 같은 승리자와 패배자로만 구분되는 잔인한 논리 같은 것들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공론장과 연계 될 수 있는 토론이 그만큼 설자리를 잃었다고 봐야 될 것 같습니다.&nbsp;&nbsp;<br>즉, 미국의 정치 현실은 민주주의가 그려내는 제도적 기반과는 그만큼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저자인 루브라노는 앞선 정치인들의 소위 타협하지 않는 정치적 극단화를 포함하여, 일반 시민들조차도 각 개인들이 이미 심각한 '인지 부조화'에 빠져, 존 듀이식으로 말하자면 '정치적 분별력'을 상실한 상황이라고 사실상 분석해 냅니다. 이미 토크빌이 강조했듯 초기 미국이 유럽과는 다른 정치적 분위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저 사람이 나와는 다른 정치적 의견을 갖고 있을지라도 정치적 차이에 따른 각자의 최소한의 신념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그 본질을 증언합니다. 바로 미국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국의 아버지들의 사례가 이와 같은 선명성을 대변하는 일례이기도 합니다. 일전에 제가 다른 서평에서도 언급했지만 과거 보스턴 티파티 운동을 차용한 현재의 풀뿌리 극우 포퓰리즘 운동인 티파티 운동이 민주당을 비롯한 리버럴 정치 전부를 싸잡아 '격멸'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오로지 적과 아로 구분되는, 즉 소위 '구시대의 반동'을 드러내는 결과물이라고 여겨집니다. 카를 슈미트의 잔재와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런&nbsp;저자의 표현대로, 각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정치적 감수성'을 갖고 있다고 그저 전제한다면 스스로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내면의 정치적 극단주의를 통제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정치적 분별력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시민들이 과연 어디까지 통제가 가능할 지는 다소 회의적이긴 합니다.&nbsp;이것은 시민들이 민주주의에 하등 쓸모가 없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 영리 목적의 인터넷 기업들을 배불리는 것에 국한된 소셜 미디어 자체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요청케 합니다. 현실적으로 이미 다수 시민들이 매몰되어 있다는 점은 심각한 부분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진실에 가까운가."라고 끊임없이 고찰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요구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 가장 먼저 시도해야 될 결정이라 봐도 지나치지 않습니다.&nbsp;<br>이 책에서 보이는 저자의 여러 통찰 가운데, 가장 수긍할 수 있었던 부분은 앞서 언급한 실제 권력과 비등해진 소셜 미디어가 특유의 네트워크성으로 말미암아, 극단주의 정치의 저변을 더욱 두텁게 만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소위 나와 같은 생각, 나와 유사한 정치색, 그리고 비슷한 세계관 등으로 연결된 수많은 네트워크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숙고해 봐도 종래에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시킬 수 있는 것으로 예견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온-오프라인의 극단화의 근본적 원인은 기존의 공론장의 기능 상실에 있다기보다는 많은 정치학자들이 지적해 온 신자유주의 체제 이행에 따른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에 있습니다. 동일하게 이런 맥락에서 현재 도널드 트럼프 현상이 시작되어 그가 기존 정치 무대에 서게 된 실질적 연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자 역시, 시민들 간의 불신과 혐오 및 대립이 확산된 이유에도 각자의 삶을 통째로 흔들어 놓은 경제적 불평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5장의 후반부에서, "극우는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일반 시민들조차 가장 인종 차별적이고 가장 이민자를 혐오하면서 그 지향은 흡사 파시스트적인데도 이들은 민주주의를 칭송한다"는 역설은 경제적 환경의 악화 그리고 동시에 유입된 이민자들로 일원화된 단순 도식이 "이들에게 권리를 빼앗긴 선량한 시민들"이라는 서사를 만들게 했습니다. 이러한 매커니즘 자체는 이 서사에 속한 이들이 절대로 타협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nbsp;<br>글의 결론에 이르면서 저자는 결국엔 우리가 안과 바깥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며 시간과 관계를 소모시키는 것보다 좀 더 친구와 이웃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정부들이 신자유주의 이행에 따라 사회적 기반의 제거와 그에 따른 '민주적 인프라'가 민영화되었고 이는 아주 근본적으로 "자주 자본주의의 요구와 민주주의의 요구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상황에 놓인 우리들의 모습"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신자유주의 경제를 민주적 삶보다 우선시하는 '정치적 선택'을 내렸다"는 과거의 결정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기도 합니다. 결국&nbsp;이러한 상황은 모든 정치인들도 쉽게 인식하고 있는 문제로 이는 다른 면에서 시민들이 정치인들의 가면에 쉽게 속아 넘어가서는 안되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본질적으로 자본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 기반의 전반적인 후퇴를 결정했던 지난 대처리즘의 이행이 바로 저 정치인들이 주도한 것이며, 이들의 진면목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보다 '정치가 만들어 내는 혐오와 차별과 같은 날 것'에 더는 부화뇌동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선언과도 같습니다.&nbsp;물론 우리의 정치를 위해 진실과 증거를 구별하는 능력을 키울 필요가 있지만 그와 동시에 저자가 강조하는대로 친구와 이웃들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도 그만큼 의미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 글 후반부에 도출된 것처럼 "사회적 자본이 풍부한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타인을 덜 의심하고, 공격적인 성향도 덜하며,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한다."고 강조한 이유일 겁니다. 그런 의미로 글의 결론에서 저자가 밝히는 "오직 민주주의만 생각하라"는 대목에서 저는 한 가지를 더 첨언하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이익과 민주주의의 가치가 합치되는 쪽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라."라고 말입니다.<br><br>- 본문 118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nbsp;<br>- 너무나 반갑게도 마크 피셔가 본문에서 인용되고 있었는데요. "자본주의를 대체할 그 무엇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그의 한탄 아닌 언급은, 현재의 경제 및 정치적 불평등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더 생생한 연관성을 느끼게 해 줍니다.&nbsp; &nbsp; &nbsp; &nbsp;&nbsp;<br>&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854/95/cover150/k66203040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8549569</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지식인의 자격 - 노엄 촘스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077540</link><pubDate>Sat, 07 Feb 2026 19: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077540</guid><description><![CDATA[<br>&nbsp;제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지식인에 대해, 여러 차례 서평을 통해서 지그문트 바우만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제가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던 신자유주의 체제의 본질과 18~19세기의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시기 동안 인류가 이룩한 '근대성'이 얼마나 문제가 많았는지를 '직보'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약간의 논외로, 지그문트 바우만 살아 생전에 단 한번이라도 대담의 형식으로 이제 언급할 노엄 촘스키와 함께 전세계 문제에 대한 공개 논의를 했으면 어땠을까, 혼자 상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두 사람이 과거 실제로 연이 닿아 잠깐의 사적인 만남조차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nbsp;<br>2월 6일, 어제였죠. 간혹 듣던 모 유튜브 프로그램에서 엡스틴 (엡스타인은 그를 가리키는 정확한 발음은 아닙니다.)과 한 눈에 보기에도 친밀해 보이는 사진이 공개되었습니다. 이것은 '엡스틴 파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2월 6일 전까지 '세계의 양심'으로 불렸던 노엄 촘스키는 특히 저에게는 과거 조지 W. 부시 정권의 네오콘을 아주 적나라하게 비판했고,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 이행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비판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기여한 학문적 업적은 물론이거니와, 하버드와 MIT를 비롯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nbsp;<br>소위 행동하는 양심, 자신이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진실과 연계하여 그것을 욕되게 하지 않고 할말을 기어코 하는 촘스키의 행동력은 일반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보신에 힘쓰는 지식인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대학 경력과 이후 이어지는 미국 지식인 사회에서 그가 갖고 있는 위상은 단순히 말만 잘해서 인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전에 조지프 슘페터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식인들의 역할은 중요하고 특히나 비판이 필요할 때는 지식인들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그의 말을 공허하게 느끼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지식인들이 돈(시장)과 권력에 점차 순응함에 따라, 이러한 의무는 이익에 매몰되어 갔습니다.<br>그런 노엄 촘스키가 엡스틴과 아주 친밀한 관계였다는 것이 거의 '폭로'되었습니다. 촘스키는 그 누구보다도 정치 권력의 위선과 부패를 증오하던 사람입니다. 그의 글들을 보면 자격이 없는 권력이 어떠한 일들을 벌이는 지에 대해 낱낱이 밝히기도 했습니다. 또한 특히나 국내 방송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노란 봉투 캠페인'의 일환으로 그가 제작진에게 47달러를 건넨 일화는 매우 유명하기도 한데요. 자유주의를 왜곡하고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권력과 부를 쫓는 일종의 수익 사업으로 생각하는 인간들을 강도 높게 비판한 그가, 지금까지 알려진 바대로 그런 권력자들의 유흥거리 (아주 불법적이고 비인간적인 그리고 금수만도 못한)를 제공한 불명예스런 인간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진실은 저에게 무엇보다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nbsp; &nbsp;&nbsp;<br>저는 노엄 촘스키가 그동안 자신이 견지해 온 양심적인 글쓰기와 후학들과 독자들에게 수많은 영감을 제공한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면 추후 이 사건에 대한 명확한 발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사건이 그가 과거로부터 목숨과 같이 여겼던 스스로의 양심과 선명한 진실, 그리고 비도덕적인 정권을 비판했던 과거의 행적이 그저 위선이 아니었다면 마찬가지로 자신이 분명하게 과거의 오명을 세상에 명확하게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그가 몇 번이나 강조한 '지식인의 책임'을 증명하는 아주 사소한 일이 될 것입니다.&nbsp; &nbsp;&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207/pimg_7631671595022361.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077540</link></image></item><item><author>베터라이프</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선셋 파크 - [선셋 파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060974</link><pubDate>Sat, 31 Jan 2026 19: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3167159/1706097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5938&TPaperId=1706097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97/1/coveroff/893291593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5938&TPaperId=1706097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선셋 파크</a><br/>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03월<br/></td></tr></table><br/>폴 오스터는 1947년 2월 3일,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부친인 사무엘 오스터는 저지시티에서 형제들과 함께 건물을 소유한 지주였으면, 모친의 이름은 퀴니 보갓으로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출신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둘의 결혼 생활은 좋지 못했고 오스터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이혼하여, 그와 누나는 어머니를 따라 뉴어크의 위콰히크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게 됩니다. 1958년과 1959년 여름 동안 오스터는 야구 내야수로서 뛰어난 운동 재능을 인정받기도 했는데요. 유년 시절의 선수 재능이 미국에서 야구를 지속하는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는만큼 스스로도 꽤 고양되었던 것 같습니다. 1970년이 되자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 및 비교문학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이후 파리로 이주하여 프랑스 문학 등을 번역하여 생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뜻대로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1974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에티엔 말라르메와 조셉 주베르 등과 같은 프랑스 작가들의 시, 에세이 번역 작업을 지속하게 되는데요. 이런 가운데, 1982년이 되어서야 그의 데뷔작인 '고독의 발명'이 출판되기에 이릅니다. 이어지는 뉴욕 3부작과 달의 궁전, 우연의 음악, 환상의 책, 브루클린 폴리스, 보이지 않는 것, 선셋 파크 등이 문단과 독자들의 큰 호평을 이끌게 되면서, 이즈음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감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성공적인 작품 활동 이외에, 그는 자신의 정치 성향을 미국 민주당보다 훨씬 더 좌파적이라고 공개 선언하고 소위 사회주의(개량된 사회주를 포함한)를 지지하는 후보자가 정치 무대에 설 수 없는 미국의 정치 환경을 비판하기도 했는데요. 특히 그는 공화당원들 가운데 극우, 극단주의에 쏠려 있는 지지자들을 대놓고 '지하디스트'라고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2022년 12월에 전문 병원에서 암진단을 받았고, 2년 뒤인 2024년 4월 30일, 브루클린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폐암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Sunset Park"로 지난 201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은 2013년 3월에 이뤄졌습니다. 다만 현재 이 국내번역본은 절판된 상황입니다.<br><br>이 작품의 출판 당시, 미국에서의 출간 시기와 맞물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에 따른 사람들의 비틀린 삶을 작가가 절묘하게 그려내는 등의 홍보를 진행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각자가 처한 관계에서 사실상 실패한 사람들의 방황과 옳다고 믿는 것과 삶의 통제력 사이에서의 도덕적 갈등과 그러한 가운데, 인간 내면의 힘을 복합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이 작품의 주요한 주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화해와 사소한 것으로 읽히는 단순한 관계가 정작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맥락으로 자리매김하는 그런 따뜻하고 뭉클한 과정도 잘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서두에 등장하는 마일스 헬러와 모리스 헬러 부자의 서사를 중심으로, 마일스의 친모와 계모, 그리고 마일스의 연인인 필라와 그의 숨겨진 벗인 빙, 더불어 빙을 매개로 모인 앨리스와 엘런 등의 인물 등을 큰 틀의 주제를 엮어가는, 일종의 서사적 가지로서 전자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마치 각자의 서사가 따로 노는 듯 보이기는 하지만 앞서 언급한 마일스의 사유와 행적을 중심으로 이들 모두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br><br>마일스는 부친인 모리스 헬러의 짧은 첫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녀의 모친은 너무나 어린 나이에 그를 출산했기에 여기서 그려지는 봐야 같이, 그녀는 스스로가 어머니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더욱이 연기에 대한 열정을 미처 지울 수 없었고 물론 연기에 대한 소위 목마름과 육아에 매진하느라 경력이 단절될 수도 있다는 공포심에서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마는데요. 한참 모성의 보호가 절실하게 필요할 시기에 그것의 중대한 결핍은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바와 같이, 마일스와 같은 아이에게는 대체로 불행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의 부친인 모리스와 계모인 윌라가 경제적 안정 내에서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으나 여전히 윌라는 그의 친모가 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다 의붓 형이었던 보비가 불행한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자 그것에 대한 책임과 고통으로 말미암아, 마일스는 스스로를 도덕적 유배에 처하게 됩니다. 명문 브라운 대학의 재학생으로서 여기에 명민한 두뇌와 통찰까지 겸비했던 그가 어쩌면 주어졌을지도 모르는 꿈같은 미래를 저버리고 스스로를 가까운 이들로부터 멀어진 것인데요. 그는 극의 초중반에서 부친인 모리스와 윌라와의 대화를 자기도 모르게 엿듣게 되는데, 이는 '자신을 벌주기 위한' 도피의 시작점이 되고 말았습니다.<br><br>마일스의 특별한 성취와 시와 고전을 아우르는 그의 천재적 분석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매일 손에 책을 놓지 않는 감수성의 폭발적 시기에 그가 얼마나 일반적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었는지를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돈벌이에 전혀 쓸모가 없다든지,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나, 스스로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도 글을 읽는 사람들에 대한 터무니 없는 냉소를 겪어봤던 사람들이라면 마일스라는 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거의 주저함이 없을 겁니다. 마치 대학의 정규 과정은 저버릴 수는 있어도 책은 결코 손에서 저버릴수 없다는 마일스의 행동 원리 그 자체는 세상의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홀로 된 느낌, 그리고 그런 자신을 누구도 이해해 줄 수 없는 고립감 등이 다른 것들로는 채워질 수는 없었기에, 그저 숨만 쉬고 있는 상태였던 마일스에게 글 자체는 구원이었을 겁니다. 그런 그에게 필라라는 소녀의 등장은 그만큼 자신의 모든 걸 줄 수 있는 '사랑'이기도 했는데요. 후반부에 모리스 헬러는 심정적으로 마일스가 처한 상황을 동정하면서 그런 아들이 필라를 만나게 됨으로써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을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개인적으로도 극의 서두를 차지하고 있는 마일스와 필라의 만남과 이들의 깊어지는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 조금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마일스가 필라를 처음 대면하게 되는 공원에서의 장면은 그녀가 십 육세였고, 갓 성인이 된 마일스와 십대 여자 아이에게 느끼는 그만의 감정들이 솔직히 감정적으로 면밀하게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br><br>마일스의 어린 연인인 필라 산체스는 플로리다에서 힘겹게 살고 있는 쿠바계 이주민으로 위로 세 명의 언니들이 있지만 그녀의 부모 모두 세상을 떠난 상황입니다. 당시 시카고를 거쳐 플로리다로 하염없이 넘어온 마일스는 자신도 부모가 없다고 여겼기에 그녀에게 자신도 고아라고 강조합니다. 물론 상대인 십대 소녀에게 이러한 거짓말이 충분히 나쁜 점이라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었고 이 어린 소녀에게 같이 부모가 없다는 동질감이 어떤 식으로 내면에 작용했을지는 거의 명확합니다. (마일스가 그녀를 향해 진실을 고백하는 장면과 그것의 올바른 마무리는 두 사람의 약혼으로 마무리 됩니다.)&nbsp;그런 연유에서 조심스럽게 마일스는 십대에 놓여 있는 필라와 어떠한 스킨쉽도 자제하고 섹스 역시,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유보를 하기로 결정을 합니다. 또한 마일스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은행에 넘어간 집들을 정리하는 일을 하면서 버려진 장물들을 필라의 언니인 안젤라에게 자신과 필라를 잘 봐달라는 의미로 전하게 됩니다. 이는 자신의 양심에 매우 위배되는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안젤라가 더 많은 것을 그에게 요구하게 되고 더욱이 동네 불량배를 동원해 협박하자, 눈물을 머금고 필라를 플로리다에 남겨두고 그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br>빙 네이선은 마일스의 십대 시절 일부를 공유한 친구였습니다. 물론 마일스에게는 그에 대한 기억이 전반적으로 제한적이지만 빙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일스의 아버지인 모리스와 모친인 메리-리의 '끄나풀'로 일한 것입니다. 마일스가 지난 7년 반의 시기동안 이리저리 도시를 옮기고 여러 직업을 전전할 때, 마일스의 행적을 비밀리에 알린 인물입니다. 그렇다고 빙은 모리스에게 어떤 금전적 이득을 기대하고 이러한 일을 맡은 것은 아닙니다. 오로지 친구인 마일스가 걱정되었기에 그리고 자신이 그런 마일스와 부모들 사이에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후 서사에서 오스터가 그려낸 이 빙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사려깊고 상대에게 대한 깊은 온정과 관심을 갖고 있는지, 엘런 브라이스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게 됩니다. 다만 후반부 설정에서 작가가 만들어 놓은 빙과 마일스의 그 특별한 물놀이 장면은 뭔가 작위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요. 결국 이 장면의 모티브와 빙의 인물 형성의 대부분은 후반부에서 적절하게 잘 조절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마일스와 빙 사이에 아주 급격한 변주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엘런 브라이스와 관련해, 그녀가 사회와 인간 관계에서 느끼는 중대한 결핍에 대해 그녀가 거쳐온 인생사 대부분이 설명되었을 때,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는데요. 다만, 선셋 파크에서의 엘런 브라이스를 거의 부정적으로 만들어 놓은 벤 새뮤얼스와의 우연한 대면은 정말 노골적으로 인위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폴 오스터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우연의 마술사' 임을 감안하더라도 엘런과 벤의 재회와 "분명 사랑은 아니것 같으면서도 그에게 빠져든다"는 엘런의 대사는 문학의 서사 구조적 측면에서 너무 억지로 만든 티가 나기도 했습니다.<br>모리스 헬러는 윌라와의 두번째 결혼 생활에서 보비와 마일스라는 두 아들을 놓고, 이 두 부부가 다른 자식을 두지 않게 된 것은 윌라의 바람과는 반대였습니다. 이는 모리스가 원했던 것으로 그는 이 같은 결정이 자신과 윌라와의 관계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인물들의 서사들 가운데, 이 윌라라는 캐릭터의 인물 형성이 제 나름대로는 큰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모리스가 몇 번이나 '의미 없이 질에 삽입한 페니스'라는 문구로 후회를 드러내는 불륜과 친아들 보비의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 그와 전처 사이의 아들인 마일스를 양육하고 또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던 삼십여 년 이상의 시간이 그녀를 점차 무너지게 했다는 점층된 서사에 저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보비가 죽게 된 정확한 연유를 모리스를 통해 듣게 됨으로써, 마일스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윌라는 진정으로 마일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나자 그의 안타까운 형편, 그리고 이 때문에 겪게 된 고통을 절실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극의 진정한 화해와 해후는 이처럼 윌라가 마일스를 용서하게 되는 장면이었는데요. 좀 더 앞선 모습이기도 했던 윌라가 완전히 무너져, 남편인 모리스를 애타게 찾는 긴 통화에서, 활달한 이성과 명쾌한 결단력을 지녔음에도 주변인들의 감정과 생각을 이해하고, 항상 글을 손에 놓지 않았던 이 여성의 거듭된 절망과 고통이 저에게 (타자지만) 연결되기도 했습니다.&nbsp;<br>물론 주인공인 마일스 헬러가 스스로를 벌주게 되었지만 이후 개심을 통해, 스스로 대면할 용기를 내어 부모에게 돌아갈 선택을 하는 이 결심의 장면이 인상 깊었는데요. 다행히 조심스럽고 소극적인 마일스답게 극적인 분절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nbsp;한 인간의 구부러진 인생 행로를 올바르게 자신의 힘으로 찾아가는 행로 자체는 작가인 폴 오스터가 잘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나 마일스가 어떤 도덕적 완벽함 속에 자신을 가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도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익히 알고 있으며, 지나간 행적들이 그 자신의 방황과 분노를 잘 드러냈고 그런 면에서 누구보다 스스로를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소설 속 장면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는다면, 모리스가 필라를 처음 대면하는 모습에서 그가 일찍 요절한 천재 작가로 그려지는 수키 로스스타인의 뚜렷한 모습을 필라에게서 찾은 얼마간의 서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필라가 윌라의 모교인 바나드 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합격하게 되었다는 모리스의 독백 역시, 이들 가족의 해후를 드러낸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모리스가 아들의 여자친구인 필라의 대학 합격과 뉴욕으로의 이주를 그만큼 조심스럽게 반가워했던 것은 어쩌면 필라를 자신의 가족을 받아들이겠다는 결심의 소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연계되는 서사들의 합일이 마찬가지로&nbsp;작가의 비범함이 느껴지는 설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최종 결말은 약간의 열린 결말로 마무리 되고 있었습니다. 보기에 따라 우발적으로 벌어진 결론은 마일스를 이해하는 분들이라면 충분히 납득이 되겠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사건의 설득력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nbsp;끝으로 이 작품을 읽고 느낀 개인적인 소회는 오스터의 이 작품이 참으로 오랫동안 제 기억에 남을 것만 같습니다.&nbsp;첫 장부터 이어졌던 문장의 흡인력은 물론이거니와, 번역 역시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고 여기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정밀한 서사는 꽤나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nbsp; &nbsp; &nbsp; &nbsp; &nbsp;<br><br>-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언급하는 극중 장치로 쓰이는 서사들과 그러한 적나라한 일부 묘사들은 간혹 이언 매큐언의 그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497/1/cover150/893291593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970138</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