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1 사일로 연대기
휴 하위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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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하위는 1975년생으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샬럿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작가로 데뷔하기 이전에 서점 점원, 요트 선장, 지붕 수리공, 오디오 기술자 등, 많은 직업을 전전했는데요. 지금 이 소설의 원전이기도 한. '울 Wool'을 단편 소설 형태로 독립 출판이 되었고, 아마존 킨들에 소개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결국 이 작품은 장편 시리즈로 재탄생을 하게 되는데요. 더욱이 이 시리즈에 대한 영화 판권은 '20세기 폭스'에 매각되고, 결국 2023년, 애플TV에서 '지하창고 사일로의 비밀'이라는 TV시리즈로 방영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원제, "Wool"로 지난 201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3년 9월 초도 번역을 거쳐. 현재는 개정판 1쇄가 2023년 4월 새롭게 출판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유튜브를 좀 살펴보다 어떤 영화 유튜버가 1시간이나 넘는 분량으로 이 TV 시리즈를 소개하는 것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는데요. 그때 영상을 보자마자 지난 2008년에 개봉한 영화 "시티 오브 엠버"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 작품도 SF 디스토피아적 암울한 주제를 다루면서 공동체 권력의 붕괴를 현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는데요. 더군다나 양 작품에 팀 로빈스가 출연하는 점도 그렇고 미래의 음울한 인간 사회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어 이를 흥미롭게 지켜봤습니다. 그렇게 유튜버의 나레이션에 좀 집중을 하다 순간 이 TV시리즈를 찾아보는 것보다 먼저 원작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요 배경인 '사일로 silo'는 평시에 핵 미사일이 잠들어 있는 일종의 격납고를 지칭합니다. 다만 이곳에서의 사일로는 많은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편의 시설을 비롯한, 각종 기능적 공간이 구축되었고, 크기는 수직으로 나선형 형태의 144층이나 되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제목은 '청소형'을 구형 받은 사람이 형 집행을 위해 외부 바깥으로 나가, 사일로에서 일종의 광장 역할을 하는 '식당'에서 볼 수 있는 큰 화면으로 연결된, 외부 '렌즈'를 닦을 수 있는 '울 수세미'에서 인용되었는데요. 이미 바깥 대기는 인간이 숨 쉬고 살아갈 수 없는 '8가지의 독성 물질'이 만연된 상황으로 다만 지구 환경이 이렇게 된 정확한 연유는 아직 극에서 드러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폐쇄된 소규모 사회라 볼 수 있는 '사일로'가 하나의 도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할 텐데요. 다만, 이전 시대의 도시와는 달리 최적화 된 인구 조절을 위해, 아이의 출생을 법의 공인을 받는 부부 만으로 한정해, 추첨으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일로가 자급 자족으로 연명하는 공동체이다 보니, 산소와 물, 먹을 것까지, 어느 하나 법의 통제 안에 놓이지 않는 것이 없다고 봐야 했습니다.     

이 사일로를 이끄는 시장인 '잔스'는 자신을 옆에서 수행하는 '만스' 보안관과 함께, 내부 치안을 오롯이 책임졌던 전임 보안관인 '홀스턴'의 후임으로 내정된 인물인 '줄리엣'을 직접 만나보기 위해 최심층부에 있는 발전실로 향하는 여행에 나섭니다. 제가 봤던 TV시리즈 영상에는 사일로의 전체 규모가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이 인류 공동체는 아마도 꽤 거대한 규모라고 짐작됩니다. 굳이 비교해 보자면, 일전에 전세계적으로 히트한 워쇼스키 자매의 영화 '매트릭스'에서 나왔던 지하 도시 '시온'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사일로에는 여느 도시 기능과 마찬가지로 일반 법률로서 자리하는 '협정'과 이를 수행하는 사법부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도시 전체를 총괄한다고 볼 수 있는 특별한 'IT부서'가 있습니다. 이 IT부서는 심층부 석유 발전소에서 만든 전력의 총 4분의1 정도를 소비하고 있다고 언급되는데요. 이 부서를 책임지는 버나드 홀랜드의 전언에 의하면, 자신과 이 사일로를 위해, 여기에 구축된 서버 컴퓨터와 그 기반 시설의 중요성은 그만큼 진지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하는데요. 이것의 중요한 이유는 TV시리즈에서 자세히 나오지만 여기에선 따로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버나드의 저 진술의 주요한 배경이 1권 후반부에 비로소 드러나기는 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저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앞선 잔스 시장과 만스 부보안관은 서로 자애하고 동시에 가족과도 같은 관계입니다. 시장의 죽은 전 남편과 만스 부보안관은 서로 친구이기도 했고, 그런 친구의 홀로 남은 부인을 챙기고 보듬어 나가는 것이 어쩌면 그의 고귀한 의무로도 읽혔는데요. 나중에 드러나지만 그가 얼마나 그녀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했는지 그 비극적인 사건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만, 극의 전개 과정에서 TV시리즈와 원작은 전반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는데요. 전임 보안관인 홀스턴과 줄리엣의 얽힘도 그렇고, 극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심스의 역할이 원작에서 조금 축소된 측면이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2권에서는 과연 어떨지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합니다. 극을 이끌어가는 '잔스 시장-만스 부안관-후임 보안관인 줄리엣'의 따뜻한 유대감이 중요한 요소로, 여기에 대척점인 인물이 바로 IT부서 버나드 홀랜드 세력의 양자 구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선의와 음모의 대결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버나드는 스스로가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는 세상에 대한 비밀과 이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계산적이고 냉혈한에 가까운 인물인데요. 아마도 그에 대한 복선이 상당히 많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이것은 아마 2권에서 많이 해소될 것으로 예측됩니다.

저는 극에 등장하는 소재인 'IT부서'의 본질적인 면을 엿보고 나서, 우리의 민주주의 정체에서 시민의 안보를 위해 노력한다는 소위 정보 조직 혹은 정보국이 떠올랐습니다. 이를테면 미국의 CIA 정도가 되겠지요. 우리의 경우, 1980년에 전두환 보안 사령관이 국가의 정보와 수사를 다루는 등의 국가 권력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그에 대한 면밀한 견제가 제대로 되지 않은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부분인데요. 제가 뭐 미국의 정치를 일일이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인들 자신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CIA를 비롯한 중요한 정보 기관이 투표로 선출된 하원 의장의 강력한 감시와 견제를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의회가 이들 특수 정보 기관들을 면밀하게 감시해야만 미국 민주주의의 건전성을 지켜내는 길일 겁니다. 이 작품의 경우도(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IT부서의 독단과 전횡은 아주 큰 비중의 서술로 드러나고 있는데요. 물론 이 IT부서가 사일로 내에서 조직이 비대 해진 이유는 '과거 지구에서 벌어진 어떤 중대한 사건' 때문이겠지요. 조지 오웰도 그렇고 올더스 헉슬리도 그렇거니와, 시민을 보위한다는 명목으로 급격한 위기 상황에 자신들의 권력을 키우려는 세력들이 분명 '인간 세계'에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고하기도 했는데요. 한 번 그렇게 구축된 권력은 쉽게 철회되지 않는다는 측면의 교훈과 함께 말이죠.

이 작품의 여실한 배경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 하에 투표로 선출된 대표자 뒤 장막에 숨어, 조직의 전체적인 흐름과 시스템을 통제하고 사법마저 손 아래 두고 있으며, '언제나 겉을 미소로 포장하고 은신한 어둠의 권력'이라는 소재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기도 합니다.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바로 이러한 측면의 불행한 서사를 섬뜩하게 보여준 작품이기도 한 데요. 저는 이 작품이 주장하는 그 무엇보다, 여기에 등장하는 지구가 왜 그 모양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참을 수 없는 의문을 갖고 있어 이 소설을 계속 읽게 될 것만 같습니다. 휴 하위의 이 야심 있는 소설이 저에게 어떠한 교훈을 줄지 이 부분도 크게 기대하면서 하루빨리 다음 권이 도착하기를 바래야겠습니다.



"당신 말은 누군가 우리 역사를 지운 이유가, 우리가 그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 막기 위해서였다는 건가."

사일로 시민 모두가 품고 있는, 말하지는 않지만 막을 수 없는 희망이 있었다. 우스꽝스럽고, 근거도 없는 희망이었다. 그들 자신에게는 안 될지 몰라도 자식들 세대에는, 아니면 자식들의 대에는 다시 바깥세상에서의 삶이 가능해질지도 모르고,

그녀는 문득, 이 여자를 보안관으로 얻고 싶어 하는 이유에 얻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층에서 심각하게 전력을 규제해야 했던 것은 주로 IT부가 지닌 면제권 때문이었다.

부부 사이에 오간 삭제된 이메일들에 초점을 맞추고, 이메일이 폭발적으로 오간 시기가 앨리슨이 삭제 복구 방법에 대한 책을 출간한 무렵이라는 점을 알아차린 줄리엣은 제대로 길을 찾았다고 느꼈다. 앨리슨이 서버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더욱 강한 확신이 들었다.

줄리엣은 이 뒤틀린 공정성의 개념이 다른 이유 못지 않게 가엾은 만스를 갉아머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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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자격 - 지식인의 책임과 그 후편
노암 촘스키 지음, 강성원.윤종은 옮김 / 황소걸음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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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엄 촘스키는 1929년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의 이스트 오크 레인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유대인 이민자 출신으로, 부친인 윌리엄은 1913년, 징병을 피해 러시아 제국에서 미국 볼티모어로 이주를 해왔습니다. 촘스키가 16세가 되던 해인 1945년, 그는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일반 학습 프로그램을 시작하여 철학, 논리학, 언어학을 공부하고, 특히 아랍어에 대한 관심을 키웁니다. 그런 그의 지적 호기심은 젤리그 해리스를 만나 꽃을 피우게 되고 그런 해리스의 인도 하에, 노엄 촘스키는 언어학 분야에 발을 디디게 됩니다. 그리고 1955년에 촘스키는 MIT에서 조교수를 시작으로 강단에 서게 되는데요, 특히나 '통사론의 측면','생성 문법 이론의 주제'와 같은 논문들은 그에게 큰 명성을 가져다 줍니다. 미국 내부의 정치적 혼란기였던 1967년 이후의 시기에, 촘스키는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노선을 걷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같은 해에 출간된 "지식인의 책임"이 그를 대표적 반체제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드는데요. 더욱이 직접적인 반전 운동으로 여러 차례 당국으로부터 체포되었으며,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반대자 명단에도 포함되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에서 공개적으로 반유대주의를 피력하고 1985년에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개입한 니카라과 콘트라 사건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며 미 정부를 강하게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의 삶이 노년기에 접어 들었을 시기에는 9.11 테러로 촉발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을 멈추지 않았으며, 일련의 그의 활동으로 친정부 지식인이 아닌 저항하는 대중 지식인이자 좌파 지식인으로서 전세계 자본주의 문제, 미국이 저지른 타국에 대한 불법적 군사 개입,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문제 등을 언론과 평단에 끊임없이 제기하는 그야말로 미국의 실천하는 양심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Responsibiltiy of Intellectuals"로 지난 2017년 출간되었고, 일종의 합본 형식으로 추가된 후편은, "The Responsibiltiy of Intellectuals, Redux"로 "누가 세계를 지배하는가? Who Rules The World?"의 발췌본입니다. 이에 국내 번역은 2024년 3월 이뤄졌습니다.

편의상 촘스키의 이 글을 전편과 후편으로 나눈다면, 전편은 1964년 통킹만 사건으로 촉발된 미국의 베트남 전쟁과 관련되어 있는데요. 이 시기의 촘스키는 반전 운동으로 비롯된 반정부 운동으로 유명했고, 스스로 '행동하는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로도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지식인의 개념이란 무엇인가?"로 시작되는 도입부는 당시 출판된 비평가 드와이트 맥도널드의 거의 동일한 제목을 가진 에세이로부터 글이 전개됩니다. 지금도 '통킹만 사건'에 대해 말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물론 이 사건과 배경과 사건이 상이하지만 1961년의 '피그만 침공'을 고찰해 본다면, 1960년대의 미국이 과연 어떤 국가였는지 대략적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촘스키가 이 글을 통해 일일이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미국의 행정부의 권력 조직이라는 것이, 헌법을 통해 의회의 견제를 받는다고 하지만 로널드 레이건 시절의 위법한 '이란-콘트라 사건'을 기억한다면, CIA와 국방부 엘리트 관료들이 주축이 된 비공개 군사 작전 같은 것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나날이 첨예화 된 냉전 시기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 진영 간의 소위 극명한 이념 전쟁을 다른 영화나 드라마로 접해본 분이라면, 자신들의 사활적 이익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던 이 거대한 자유주의 정부가 어떤 식으로 법과 정의 위에 있었는지 분명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헌법을 거의 국체로 여기는 국가인 미국은 의회의 권한이 상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다소 도식적인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의회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권력 분립 원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행정부의 오판이라든지, 외부에 대한 과도한 군사력 투사, 타국에 대한 불법적인 개입, 인접 국가들의 군사 쿠데타 지원 등은 의회의 견제 만으로는 '행정부의 일방주의'를 방지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점에는 시민들의 입을 통한 여론이 필요한 부분이고, 이를 보장하기 위해 언론의 의무 또한 포함됩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지식인의 책무와 더 나아가 이들의 양심이 무척이나 중요한 지점인데요. 이에 촘스키는 이 글의 후편에서, 일반적인 지식인들은 '체제 순응적 지식인'과 '가치 지향적 지식인'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후자는 특히 역사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처벌을 받는 일이 벌어진다고 단언하는데요. 그만큼 가치 지향적 지식인들은 행동에 따른 대가가 그 발언과 비판에 비례하여 처벌이 가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자의 체제 순응적 지식인이야 따로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다들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촘스키가 말하는 "지식인은 특권을 갖고 있다"는 설명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언제든 어떤 식으로든 원하면 권력에 합류할 수 있고, 엘리트 지배 정치에서 전문가 그룹의 정치와 같이 사회 내부의 존경과 개인적 이익을 쉽게 거둘 수 있다는 단편적이고 평면적인 내용일까요. 촘스키는 독자들을 위해, 정확한 답변 없이 그저 '진실의 여백'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일찍부터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협력(이것의 수사는 아마도 다양할 겁니다.) 아래 지속적으로 헤게모니를 확장하면서, 그렇게 지식인들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땅히 이익을 추구할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했는데요. 그래서 보통의 지식인들이 사회의 공익과 다수의 이익에 소위 기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어려워진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위의 얄팍한 진술로 그저 지식인들을 두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론에 근거한 입장과 양심의 문제로만 추동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능력주의와 개인의 이익 추구'가 미덕인 사회로 진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자본주의가 개인의 자아 실현과 사적인 이익 획득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다만, 이 책에서 말하는 촘스키의 '지식인의 자격'은 아마도 권력과 가깝고, '미국의 국익을 우선'하는 조직과 그런 이데올로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지식인들을 냉정히 비판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스스로에게 자신의 치열했던 삶을 어쩌면 내면의 목소리로 확인 받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서두에 등장하는 아서 슐레진저의 사례는 촘스키가 '함량 미달의 지식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의 말대로 지식인의 책무라는 측면에서, 마땅히 해야 될 말을 하고, 권력에 대한 비판이 주가 되어, 사회를 위해 양심의 소리가 적시적소에 전달될 수 있다면, 그것은 정부의 오판을 충분히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을 겁니다. 이것은 단순히 저의 순진한 생각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슐레진저와 같은 내각에 참여했던 지식인이 시민을 오도할 수 있는 베트남 전쟁과 같은 일련의 군사적 개입 사태에서 미국 시민 뿐만 아니라 베트남 국민의 운명까지 포함해, 가감 없이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촘스키가 "자신이 내세우는 명분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 명분을 위해 기꺼이 거짓말하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그 추악한 본질을 드러냅니다. 다시 한 번 '굴절된 지식인의 양심'이라는 것이 사회에 얼마나 해악이 될 수밖에 없는지 곧이어 등장하는 논증들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겠는데요. 권력에 봉사하고 권력과 함께 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을 마냥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 힘에 굴복하는 동물의 날 것 만큼이나 유리된 시민 다수의 이익과 안전은 추방되고, 그렇게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 과연 우리의 미래일지 진지하게 궁금할 따름입니다.

미국의 현저한 국익과 관련해, 1954년 미국 정부가 과테말라를 침공했을 때, 그리고 1973년 합법적으로 들어선 칠레 아옌데 정부를 미국이 무너뜨리기 위해, 시카고 보이스(시카고 대학 출신의 경제학자들)와 불법적인 CIA의 개입은 일전에 브레진스키가 남아메리카를 꼭 집어 '미국의 앞마당'이라고 한 언급을 새삼 떠오르게 만듭니다. 당시의 지식인들이 정의와 권리를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미국에 의해, 아르헨티나, 엘살바도르, 콜롬비아 등지에서 벌어진 비극을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눈을 감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에 촘스키는 "요컨대 미국은 자국의 경제적 침투와 정치적 지배에 열려 있으면 그 나라의 정부 형태가 어떻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꼬집고 있는데요. 더욱이 1973년 9월 11일의 칠레 피노체트에 의한 군부 쿠데타는 묘하게도 28년 뒤의 9월 11일과 불길하게 매치가 됩니다. 저자인 촘스키는 마찬가지로 이 23년전의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서도 당시 미국 정보 당국이 충분히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않은 여러 정황들을 포함해, 설득력이 높은 논증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에게 보일 '답변'과 비극적인 테러 이후, 2011년 5월, 미 특수부대에 의해 그가 살해되고 시신이 바다에 버려진 사건에 대해서도 "왜 그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지 않았는지"에 합리적 의심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물론 빈 라덴의 처리를 둘러싼 여러 현실적 요건을 고려해, 이런 자에게 알량한 재판 따위는 필요 없다고 윗선에서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당시 국제정치학적인 배경에서 빈 라덴을 그렇게 처리했을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럼에도 오사마 빈 라덴에게 중요한 법의 단죄가 내려지지 않은 점은 재판에서 '그날의 비극과 참상'이 빈 라덴에 의해 오염되고 훼손될 것을 두려워해서였을까요.


촘스키는 평생에 걸쳐, 미국의 헤게모니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행된 불법적인 군사 개입과 은폐된 작전에 대해,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 비판했던 지식인입니다. 만약 그가 미국 시민이 아니라 중국이나 러시아의 시민이었다면 쥐도새도 모르게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그가 말하는 지식인의 자격과 책무란 참으로 무거운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텐데요. 후편의 결론에서 지식인은 특권이 있다고 단언하는 부분에서 촘스키 자신은 사회로부터 얻은 그 특권에 보답하기 위해, 그런 고난의 길을 서슴지 않고 걸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지금도 티파티를 비롯한 극우 포퓰리즘 세력에 의해 '미국의 배신자'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촘스키는 우리 나라에서도 그를 전형적인 좌파 지식인이라는 틀을 씌워 그의 경력과 양심을 애써 폄하하기도 합니다. 촘스키 이전에 지식인의 의무에 대해 언급했던 쥘리앙 방다는 지식인은 양심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어야만 한다고 그 당위를 강조했는데요.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유복한 자본주의의 시대에는 양심에 목숨을 걸기에는 지식인 개인이 '잃을게 너무나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더욱이 자칭 지식인이라는 벼슬로 자신의 입장과 스스로가 지지하는 정치 세력이나 조그만 이익을 가져다 주는 기득권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며, 진실을 오도하고 더 나아가 대안적 사실과 같은 궤변으로 이 세상을 아주 재미난 곳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과연 지금의 이 시대는 어떤 식으로 귀결이 될지 참으로 음울한 생각이 드는데요. 1960년대부터 미국에서 '과잉된 민주주의'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던 것처럼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은 자유가 사람을 고르는 시대'를 우리는 곧 목도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하고 널리 알려진 헨리 키신저는 전문가의 책임을 자세히 설명했다. 키신저에 따르면, 전문가는 자기 선거구민의 합의를 "높은 수준으로 구체화하고 정의"하여 선거구민이 세운 틀 안에서 주어진 일을 수행함으로써 자격을 갖춘다.

독일과 일본 국민은 자국 정부가 저지른 만행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가? 그리고 아주 당연히 맥도널드는 이 질문을 독자에게도 던진다. 전쟁 중 민간인을 잔혹하게 폭격한 데 영국과 미국 국민은 어느 정도로 책임이 있는가?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말을 폭로하고, 정부가 내세우는 명분과 동기, 숨은 의도를 파악해 정부의 행동을 분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진실을 말하고 거짓을 드러내는 것은 지식인의 책임이다. 이는 구태여 설명이 필요 없는 진부한 말로 들릴지 모른다.

자신이 내세우는 명분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 명분을 위해 기꺼이 거짓말하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에 반해 미국의 동기는 순수하며 분석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종교적 믿음이나 다름없다.

‘전문 지식‘이 세계정세에 영향을 끼치는 한, 정직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 지식이 타당한지 어떤 목적에 쓰이는지 의심할 필요가 있고,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이는 더 논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한 사실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도 미국의 공격적 행보가 세계정세를 좌우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며, 미국의 정책은 그 이면에 있는 명분과 동기를 가지고 분석해야 한다.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고 어느 정도 권력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이런 문제에 신경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벨이 던진 물음으로 돌아가자. "민주적 제도를 구축하면 새로운 사회가 성장할 수 있는가?", 아니면 사회변혁은 전체주의적 수단으로만 이룰 수 있는가? 나는 정직한 사람이라면 이 물음을 제삼세계의 이데올로그보다 미국의 지식인에게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미국은 자국의 경제적 침투와 정치적 지배에 열려 있으면 그 나라의 정부 형태가 어떻든 신경 쓰지 않는다.

버틀란드 러셀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센 비난을 받았으며, 최근에 나오는 전기에서도 여전히 욕을 먹는다.

닉슨 행정부의 표현을 빌리면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린 목적은 "외국인이 우리가 엿 먹도록", 즉 국내 자원을 장악하고 더 넓게는 미국 정부가 싫어하는 노선에 따라 독자적인 발전 정책을 추구하도록 부추길 가능성이 있는 "바이러스"를 죽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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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 반대한다 - 무능한 민주주의를 향한 도전적 비판
제이슨 브레넌 지음, 홍권희 옮김 / 아라크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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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브레넌은 1979년생으로, 미국 메사추세츠의 턱스베리와 뉴햄프셔의 허드슨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 소재한 사립 연구 대학인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과 뉴햄프셔 주 더럼에 있는 공공 연구 대학인 뉴햄프셔 대학을 거쳐, 애리조나 대학에서 데에빗 슈미츠의 지도하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2006년부터 2011년까지 로드 아일랜드 프로비던스에 있는 브라운 대학의 연구 센터인 PTP (Political Theory Procject)의 연구원으로 활동했고, 같은 대학의 철학과 조교수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브레넌은 민주주의 이론, 유권자 투표 역량, 공공 정책, 미국식 자유주의 및 자본주의 사회의 도덕적 기초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는데요. 그의 논저들은 대부분 이론과 현실 정치의 괴리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유권자들의 무지성, 그리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그것의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포함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Against Democracy"로 지난 201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스스로를 '현격한 도구주의자'로 규정하고 있는 저자는 민주주의가 더 나은 정치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지, 그 자체로 흡사 숭고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자신의 글에서 줄곧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와 관련해, 제가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 이후의 독일이 유럽을 포함한 전세계에 어떠한 참화를 초래했는지 돌아봐야만 하고, 저자의 강조대로 민주주의 자체를 혹여 과도하게 신성시 할 필요는 없지만 기존의 체제를 그저 쉽게 생각하여 경우에 따라서 비상시에 '어떤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소위 '결단주의자들'의 지독하고 편의주의적인 논법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역시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저자는 꽤나 직접적인 수사로 분석되고 있는 우리 유권자들의 '무능'과 민주주의 체제 특유의 내재적 분열로 정치가 더 이상 누구에게나 이익이 되지 않는 작금의 모습을 고통스럽지만 거의 가감 없이 규명하고 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현재 민주주의의 한계를 저자 자신이 분석한 여러 근거와 인용을 통해서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그동안 여러 민주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이 현실과 일정 부분 괴리가 있던 민주적 이상도 회의적인 측면에서 동일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한 대안으로 뒤이어 충분히 논증되는 '에피스토크라시'를 현실 정치의 대체제로 제안하며, 전체적으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에피스토크라시(Epistocracy)는 일종의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정치 체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지식인들과 주요 지식 체제 전반이 주가 되는 통치로, 현재의 전문가 정치 내지는 전문가들의 정치와도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다수의 '위임된 주권'이 기반이 되었지만 그 속에서 질 좋은 교육과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특정 영역의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사실상의 '엘리트 지배 체제'임을 감안해 본다면,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에피스토크라시가 이 엘리트 지배 체제와 과연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문득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에 저자는 현대 민주주의 정치의 한계와 그 불확실성을 비판하기 위해 해당 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수많은 유권자들을 크게 3가지 성향의 부류로 나누고 있었는데요. 독특한 작명 센스 만큼이나 그 내용들도 충분히 평범하지가 않았습니다.

우선 정치에 무관심하고 무지하며, 사회과학적인 지식도 거의 없는 '호빗'은 그저 일상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미국의 일반적인 비투표자들을 대변합니다. 그리고 다음 '훌리건'은 정치적 광팬으로 이들 모두는 대체로 강경하고 비타협적인 그룹입니다. 특히나 이들은 앞선 호빗들과는 달리 사회과학을 어느 정도 신뢰하지만 자료를 선별해서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나 연구만 취합하려는 경향이 다분하고,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이 속한 정치적 그룹의 일원임을 자랑스러워 하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부분은 가히 배타적인 속성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이들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고 때에 따라 혐오하기까지 합니다. 이 훌리건 그룹은 미국에서 매번 꾸준히 투표하는 유권자들의 어느 정도를 포함하고 있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벌컨(아마도 미국 SF 드라마 '스타 트렉'의 모든 사적 감정을 배제한 채, 철저히 이성적인 삶을 지향하는 종족인 '벌컨 Vulcan'을 모티브로 삼은 듯 보입니다)은 정치를 과학적이고 이성적으로 여기며, 이들의 의견은 사회 과학과 철학에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습니다. 벌컨의 특성은 정치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편향되고 비합리적인 것을 피하려 하기에 냉정하지만, 유권자 그룹 전체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습니다.

이렇게 2장에서 3장은 유권자들을 '3그룹'으로 나눠 분석한 내용들을 담고 있고, 저자의 분석은 어느 정도 날카롭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벌컨을 제외한 호빗과 훌리건은 어느 정도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그룹으로, 저자인 브레넌이 체제의 구성원들과 혹은 유권자들의 소위 정치적 기본 능력에 기반한, '역량 원칙'에 있어서도 이 두 그룹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었는데요. 특히 이들이 "정치에 관한 기본적인 질문조차 대부분은 아무것도 모르고, 이들이 아는 것은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것만 못하다"고 언급하는 부분은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그 맥락은 어느 정도 수긍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2장에서, 미국의 유권자들 가운데, 현직 대통령이 속한 정당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하다는 자료 해석은 전세계에서 가장 고도화 된 대학 시스템을 보유한 국강의 시민들이 그와 같은 간단한 정치적 배경 지식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으로 이는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는데요. 기초적인 지식도 갖추지 못한 유권자가 민주주의 전반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기란 아마도 어려운 일일 겁니다. 또한 이러한 다수가 구성하는 민주주의의 불확실성 자체도 심각하다고 봐야 할 텐데요. 기존의 기득권층과 지식인 계급이 오랫동안 보여왔던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은 대중 자체에 대한 불신과도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가 거듭 분석하는 이런 비판은 "기본적인 기초 경제학 지식도 없는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경제적 지식과 그렇게 확대한 주장이 근본적으로 타당성이 없다."고 해석하는 측면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현대로 넘어오며 요구되었던 민주주의 정치의 기본은 시민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스스로를 위한 재교육과 이를 통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끊임없이 토론하고 상대방의 의견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는 부분일 텐데요. 이러한 사고는 어느 정도 계몽주의에 기반한 것이고, 저자가 계몽주의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그의 정치적 인식이 얼마나 회의적이고 부정적인지 짐작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더불어, 저자가 진단하고 있는 현재 민주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들 중에 하나인 "숙의 민주주의"의 현실적 한계를 마찬가지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대다수의 시민들이 상당한 인지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자료적 증거와 함께 현실 민주주의에 있어 정치가 유권자들 대부분이 "무지하고 비합리적인 채로 있기를 심지어 부추긴다."는 2장 후반부의 도발적인 진술은 선연히 이해될 수 없었는데요. 이것은 정치와 그것을 구성하는 민주주의 체제 전반의 일반적이고 기초적인 지식도 갖추지 못한 누군가가 이 현실 정치의 진면목을 올바르게 이해하기란 어려운 법이며, 그런 유권자의 기본 자질이나 자격조차 없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어찌됐든 현실 정치에 관여하고 더 나아가 그런 '주권적 형태'를 저자는 그리 아름답게 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유권자로서의 시민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관념상 무의미하다고 보는 장면은 저자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을 갖게 했는데요. 이어지는 3장의 진술도 '시민들의 재교육'과 '스스로를 위한 학습'이 쉽지 않은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현실 정치를 알고자 지식을 찾는 행위 자체가 많은 시민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저자의 분석은 이처럼 반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일전에 알렉시스 토크빌과 존 듀이는 시민들 스스로의 역량 재고를 위해 광범위한 재교육이 체제에 있어 시급히 필요한 일임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런 명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자의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시민들에게 정치 참여 자체가 이들 개인에게 있어 불행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저자의 논평은 꽤 흥미로웠던 부분인데요. 3장을 관통하는 주제를 대변하는 듯 보이는, "정치 참여는 타락시킨다"는 제목은 마치 옳은 방법으로 숙의하지 않는 다수가 정치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그만큼 순진한 생각이라고 저자가 말하는 듯 보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알고 있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확증 편향과 인지적 편견에 쉽게 벗어날 수 없고, 특별한 정치적 각성이 전제되지 않는 이상, 재논의나 오류로 판명된 의견의 개선 역시 불행하지만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이러한 맥락에서 공론장을 매개로 시민들 간에 건설적인 토의가 가능할 지는 이곳의 논증대로 라면 거의 회의적인 수준이라고 여겨지는데요. 예를들어 티파티와 같은 극단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이 자신들과 다른 방향성을 가진 정치 세력과 토론이 가능할지는 가히 짐작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공화주의자들은 저자의 해석대로,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공적 숙의와 시민들 사이에서는 더 큰 포용과 진정한 정치적 평등이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자는 이 부분을 현실에서는 상당히 달성하기 어려운 조건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 보였는데요. 숙의의 개념은 앞선 부분에서 같은 맥락으로 한계가 있다 손 치더라도, 뒤이어 이어지는 저자의 '정치적 평등'에 대한 분석은 쉽게 수긍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회 내부적으로 모든 시민들의 정치적 평등이 개선되지 않기 때문에 시민 사회에서 소위 '정치적 효능'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는데요. 이를 단적으로 말해, 현재 미국 의회에 대한 정치경제적 금권 로비는 의회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위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돈과 권력을 가진 소수의 계층이 전투적인 로비를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워왔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정치적 평등이라는 기본 가치를 어떻게 개념적으로 수치화 할 수 있을지는 다소 불명확합니다만 이는 역으로 놓고 봤을 때, 다수의 시민들이 정치적 평등과 현저히 거리가 있는 민주주의를 몸소 체험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의 논증적 한계는 현실의 이러한 불평등한 구조적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고 있으며, 그저 정치적 평등에 대한 모호성을 다소 빈약한 근거로 확대 해석하여 이것이 시민들의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요. 더욱이 앞선 숙의 민주주의가 인간의 원초적인 불합리성으로 인해 시민들이 편견에 빠진 상태에서 숙의 자체가 시민권을 가진 개인에게 어려운 과제임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촘스키가 분석한 지식인에 대한 몇 가지 분석과 맞물려, 어느 특정 지식인들은 시민들이 정치와 국가에 대해 너무나 많이 알게 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는 진실의 공개는 사회의 지식인 그룹과 권력층이 어느 정도는 다수의 시민들이 정치와 관련된 직접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일을 달가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습니다.    

뒤이어 4장에서 저자는 우리의 정치적 참여가 "도덕적이고 인식론적인 성격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경향이 있지만, 이보다 큰 다른 이점을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에 사실상 필요할 수도 있다."고 실로 어정쩡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정치적 참여가 그 자체로 정부에 대한 견제이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자유와 자율성을 증명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맥락이 기반이 된 정치적 투표 행위 자체가 현실에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인식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에서 우리의 한 표가 정부의 내각을 구성하는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는 다소 불확실한 측면이 있다는 점도 저 역시 쉽게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지배와 피지배의 양자'에서 주권 개념이 중요한 가치 수단으로 작용해 왔다는 점과 시민이라면 마땅히 공직에 지원할 수 평등한 자격이 주어져 있겠으나 현재 대다수 시민들이 공직에 지원하여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사실상 제한되어 왔다는 점에서 '주권 개념에서 도출된 공화주의적인 정치'가 얼마간의 시대를 거치며 변질되어 왔다는 부분도 우선해서 인식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요. 더욱이 저자는 필립 페팃이 주창했던 '비지배 자유'를 특별히 인용하면서 앞서 진술했던 정치적 평등과 이 전자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살펴보고 있는데요. 이 정치적 평등과 관련해, 자체 의미와 개념을 애써 재단한 부분은 조금 문제가 있어 보였는데요. 민주주의 하에서 정치적 평등이 사실상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저자가 강조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거 냉전 시기에 신자유주의적인 '시장 자유'에 어느 정도 협력한 민주주의에서 반이데올로기적이든 태세를 바꾼 능력주의의 신봉이든 간에 어느새부턴가 '평등'이 상당히 금기시 되었다는 점도 부정할 수가 없을 겁니다. 이는 일전에 지지 파파차리시가 인터뷰를 통해 도출된 결론이기도 한, "모두가 평등한 자유"가 현 시점에서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실질적으로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일관된 논증 가운데 저자는 각각 시민들의 투표 역량 검증을 위해, 일종의 지식 테스트를 사회에 도입할 것을 제안하고 있었는데요. 이것을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일정 부분의 점수에 도달한 유권자에게만 투표권을 주자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저 역시 즉각적인 반감이 들기도 합니다만, 그의 앞선 주장을 단순한 '기호론'으로 국한해 해석할 수는 없기에 앞선 유권자들의 역량을 측정해 보겠다는 아이디어의 발상 자체는 아마도 에피스토크라시가 민주주의에 반해 고유한 의견을 갖는 핵심적 내용으로도 읽힙니다. 제가 맨 처음에 언급 했듯이, 저자는 철저한 도구주의자로 현실 정치가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면 민주주의든 권위주의든 현실에 잘 부합하는 체제를 선택할 수 있다는 입장이기도 한 데요. 그가 제안하는 에피스토크라시 역시 이러한 맥락 가운데에 놓여 있는 동시에 쉽게 말하자면 현실에서 간단히 취사 선택이 가능한 정치 체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5장 후반부에서 저자가 이 에피스토크라시가 일종의 엘리트주의적인 것으로 인정한 진술은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이 논저에서는 엘리트주의와 에피스토크라시를 구분하여 독자들에게 인식 시키고 있진 않지만 에피스토크라시 역시 엘리트주의적인 한계를 갖는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 점은 어떻게 보면 저자가 서두에 존 스튜어트 밀을 인용하면서도 '공리주의'에 대한 언급을 자제한 것이 의도된 차원인지 의심을 갖게 하는데요. 그런 면에서 저자가 말하는 시민들의 이익이라는 것이 매우 모호하게 그려지고 더 나아가 힘없는 다수와 권력을 가진 소수의 지배 체제에서 어떻게 하면 모두의 이익을 지켜낼 수 있을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저자가 비판적으로 분석한 유권자들의 성향, 그들 본질에 대한 회의적인 분석 역시,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여겨집니다. 이는 6장에서 유권자들을 불합리하고, 제 역할을 못하고, 부도덕하며,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분석하면서 이들이 주가 된 민주주의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것으로도 이해됩니다. 결국 이 논저의 원제가 의미하는 'Against Democracy'는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를 적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정치'전반에 대한 확고한 반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글에서 짧게 언급되는 도덕적 원칙은 민주주의에서 정의의 관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앞선 '시민들의 이익'이 사회가 보장하는 정의와 일맥상통한다고 보여지는데요. 인류가 구축한 여러 정치 체제 가운데 민주주의 만큼 다수의 이익을 보장하는 시스템은 현실적으로 그만큼 규명하기가 어렵다고 봐야 할 텐데요. 민주주의의 근원적 가치인 다양성과 다원주의는 저자가 인정하는 시민들의 인지적 다양성과도 맞닿아 있으며, 비록 현실 민주주의에서 여러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민주주의 정체 자체를 경험한 시민들이 과두제나 혹은 엘리트 지배체제와 비슷한 에피스토크라시를 수용할 지는 그만큼 예측하기 어렵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브레넌의 이 책이 일관되게 유권자와 이들이 갖고 있는 명백한 한계를 드러내고 상대적으로 다른 시대와 비교해, 질적으로 고등 교육의 사회임에도 시민들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기본 인식에 대한 무지와 그런 이들이 절대 다수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의 또 다른 한계라고 볼 수 있는 오늘날 왜곡된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만연된 경제적 불평등과 맞물려, "오늘날 민주주의가 왜 불공평해졌는지"에 대한 근본적이 대답이 결여되어 있는 상황은 스스로 견고한 지식인 계급에 속한 사회 주류로서, 대중들에게 알릴 수 없는 금기시 되는 문제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인식적 한계는 명확합니다. 결국 그의 최종 결론이기도 한, 정치가 앞선 부정적 요소들로 인해, 시민들을 서로 적대하게 만들고 정치 전반이 시민들을 교묘히 충동질시킨다는 진술은 어느 정도 비극적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굳건한 권력을 갖고 있거나, 충분한 자원을 가진 소수의 기득권층이 절대 다수의 무지한 시민들을 손쉽게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몇 세대 앞의 민주주의는 전망 그 자체는 상당히 암울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자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일반 유권자들에 대한 직접적이고 의도적인 분류를 적어보고자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대중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의 배격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투표권을 역량의 수준에 따라 유권자들에게 부여하자는 아이디어도 그렇고 논증과 주장의 과격함은 제가 읽었던 여느 논저들에 비해 가장 극단적인 글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불합리한 유권자 : 대다수는 선거의 세부 사항과 쟁점에 어느 정도 관심을 기울인다. 이와 동시에 증거에 근거하지 않고, 희망적인 사고와 타당성 없이 우연히 믿게 된 평판 나쁜 다양한 사회과학 이론에 근거해 투표한다.

제 역할을 못하는 유권자 : 대다수는 선거의 세부 사항과 쟁점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논의는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 넘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지능을 요구한다.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한 명의 후보를 선택한다.

부도덕한 유권자 : 대다수는 인종차별주의에 따라 흑인보다 백인 후보를 선택한다. 아니면 피상적으로, 더 잘생긴 후보를 선택한다.

부패한 유권자 : 대다수는 어떤 정책이 소수자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거나 그럴 위험이 매우 커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정책을 선택한다.

              





"일반적인 시민은 정치 분야에 들어오자마자 정신적 수행 능력이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다. 자가기 정말 관심 있는 범위 내에서 어린애 같은 방식으로 논쟁하고 분석한다. 다시 원시인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길게 주장하겠지만) 보통 선거가 대다수 유권자에게 무지하고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정치적 결정을 하도록 부추기고, 이러한 무지하고 비합리적인 결정을 무고한 사람들에게 강요한다는 점이다.

에피스토크라시는 지식인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치체제는 역량, 기술, 그리고 그 기술에 따라 행동하는 선의에 의해 공식적으로 분배되는 정치권력의 정도만큼 에피스토크라시적이다.

먼저 어떤 형태의 에피스토크라시가 현실적인 결함이 있더라도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낸다면, 우리는 민주주의 대신 에피스토크라시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명사에서도 대부분 정치권력은 도덕적으로 자의적이고 혐오스럽고 사악한 이유 때문에 불평등하게 분배됐다.

시민 개개인은 정부에 관한 힘이 거의 없고, 개인의 투표는 기대 가치가 거의 없다. 시민들은 정치 지식을 얻는 일에 투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지식은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정치적 선호가 이타적이든 이기적이든 상관없이, 정치를 잘 알기 위해 시간을 쓸 가치가 없다.

그 결과는 많은 피실험자가 집단에 순응하기 위해 실제로 세상을 다르게 본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동료의 압박은 의지뿐만 아니라 시력까지 왜곡시킬 수 있다.

반면에 나는 당신의 정치적 자유와 참여가 당신이 정부에 동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당신의 이익을 증진하지 않으며, 어떤 의미에서도 당신의 자율성을 증가시키지 않고, 지배로부터 당신을 보호하지 않으며, 당신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으로 도덕적 발전을 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민주주의의 상징적 힘에 광범위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테면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주는 것이 무엇을 표현하는지, 동등하지 않은 정치적 권리를 주는 것은 또 무엇을 표현하는지, 그러한 표현이 사람들의 자부심과 사회적 지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같은 것들이다.

제2장에서 보았듯이 정치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서도 대부분의 시민은 아무것도 모르고, 많은 이들이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만 못하다는 사실이 경험적 증거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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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단어 -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
르네 피스터 지음, 배명자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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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피스터는 독일의 언론인이자 작가로 현재 미국 워싱턴 DC에서 슈피겔의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일 뮐하임의 마르크그래플러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뮌헨에 위치한 루트비히 막스밀리안 대학(LMU)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독일 엘리트 언론인의 산실이라고 불리는 독일 저널리즘 스쿨(DJS)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는 DDP와 로이터를 거쳐, 2004년부터 독일의 세계적인 언론인 슈피겔(Der Spiegel)에서 기자로서의 경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2013년 10월, 미국 NSA에 의한 당시 독일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도청 사건을 폭로해, 독일과 미국의 위기가 촉발했고 이에 '독일 연방 의회 조사 위원회'에 출석하기도 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그는 2012년에 독일 기자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Ein falsches Wort : Wie eine neue linke Ideologie aus Amerika unsere Meinungsfreiheit bedroht"로 지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3월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피스터의 이 논저는 원칙적으로는 "좌파의 정체성 정치"가 '표현의 자유'와 맞물려, 현실 정치와 건전한 여론 형성에 사실상 위협이 되고 있다고 일관되게 평가합니다. 이는 글 서두에 "우파 포퓰리즘만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차별 반대, 평등, 소수자 보호라는 이름으로 표현의 자유,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이념, 누구도 피부색이나 성별로 차별받아선 안 된다는 헌법 등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려는 독단적 좌파도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단호하게 이들 경직된 좌파를 비판하고 있는데요. 결국 이러한 맥락은 '좌파'마저도 사실상 민주주의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측면의 주장을 펼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일단 글을 쓰기에 앞서, 저는 앞선 '우파 포퓰리즘'을 '극우 포퓰리즘'으로 용어 변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중 명사의 한 단어인,우파라는 단어는 저들의 범위를 너무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극우'로 고쳐 쓰는 것이 논지 확대와 설득력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다시 글로 돌아가, 저자는 이러한 좌파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적 담론을 위해, 로빈 디안젤로의 '백인의 취약성'의 여론 몰이를 이 글의 여러 곳에서 다루면서 종국에는 미국 민주당 정치가 기존의 '노동자들의 정당'이 아니라, 높은 교육을 받고 소득이 높은 중산층의 정당으로 변화된 것이, 현재 미국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었다고 다시금 의미를 확장해, 비판적으로 논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일독 이유는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체성 정치에 대한 소위 극단적인 반작용과 지속되고 있는 이러한 기묘한 현상을 미국인의 입장이 아니라, 외부인인 독일 언론인의 시점으로 이해하고 분석하는 점일 텐데요. 더욱이 피스터의 이 글은 전반적으로 '르포르타주'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주제에 대한 실질적 근거 예시를 포함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충분히 설득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최근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났던 '미투 운동'이 초래한 비극적 결말인, 헌법상의 '무죄 추정의 원칙'과 전자를 의도적으로 무시해 벌어진 '인터넷에서의 마녀 사냥'이 여론에 있어서 새로운 경향성을 낳았다고 생각됩니다. 이에 대해 저자 역시 동의하는 바대로,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다른 말을 하게 될 경우, 무엇보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하고, 나아가 이것의 시시비비는 법원이 객관적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은 거의 명백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가해자 (남성)-피해자 (여성)의 극단적인 구도로 일련의 페미니즘 운동이 벌였던 '부정적 여론 몰이'가 특히나 무분별하게 인종 차별과 성차별주의에 물든 극우 운동에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부분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도 이미 여러 사례로 드러나고 있지만, 과거 또는 현재에 누군가의 인종 차별 발언이나 대중의 심기를 거스르는 부적절한 언사가 회사 내부에서 벌어질 경우, 그 기업의 CEO나 이사회는 손쉽게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고, 그것을 그저 홍보 효과로 삼는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의 억압과는 또 다른 사회적 역효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이는 작게, 민주주의와 헌법에서 보장하는 개인의 권리와 행복 추구권에 위배되는 '사회적 매장'으로 이어지고, 동시에 그러한 언사를 내뱉은 사람의 사회에 대한 '영구 격리'에 준하는 (사회적 및 도덕적) 처벌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좌파의 정체성 정치는 너무나 과도하게 '파시즘적 교만'으로 변질되었고, 앞선 일례처럼 페미니즘 또는 반인종차별을 어떠한 명확한 기준 없이 무분별하게 '비이성적 집단의 분노'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히 민주주의의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과도한 '정체성 정치'는 그 주제에 대한 다른 접근 방식과 이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슈미트 식의 '피아 정치'로 몰고 가고, 이는 결국 트럼프 전 대통령의 극단적인 지지자들의 폭력적 지지와 극단 행동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저자는 우파 취소 문화(다른 말로 캔슬 컬처 cancle culture)를 등에 업고, 사회적 주목과 경제적 이익까지 챙긴 크리스토퍼 루포의 사례를 들며, "2021년 1월 6일 스티브 배넌의 부추김에 넘어가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의회 습격'에 성공한 사건에 대한 이 자의 망언인, "그 당시에 실제로 민주주의가 실제로 위기에 처하지는 않았다"가 회자되기에 이릅니다. 이슬람 혐오와 인종차별주의 그리고 성차별에 공감하는 이들 극우 포퓰리즘이 기존의 여론 무대에서 이렇게 활보를 하게 된 연유에는 미국 내부의 경직된 정체성 정치를 주장했던 좌파들에게도 이처럼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것인데요. 물론 미국의 진보적 언론인인 크리스 헤지스의 말마따나 미국 정치에서 진정한 좌파가 존재하는 것 인지에 대한 의문을 차치 하더라도 말입니다.

일찍이 철학자인 리처드 J. 번스타인은 "기존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오판으로 드러났을 경우, 이를 마땅히 수정해야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언급했었는데요. 저는 앞선 그의 주장이 우리 민주주의의 가치와 확실히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저자인 피스터 역시, 글 후반부에서, "자유주의는 진리의 독점권을 한 인종, 한 종교, 한 계층에 주지 않고 토론과 더 나은 주장의 힘을 믿는다."고 자유주의적 맥락을 강조하며,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 이러한 관용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데요. 이 자유주의는 인류의 역사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인간과 그 사회의 진보를 탄생 시킨 큰 조류였음은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켰고, 인간이 다른 어떤 것에 억압 받지 않고, 마땅히 인간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큰 틀에서의 대의'를 주지 시켰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산을 익히 알고 더 나아가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지금의 정치가 극단주의적 발언에 숨이 막혀, 하버마스가 주장했던 '공론장의 토론'이 거의 상실된 현실은 어떻게 보면 정치 스스로의 크나큰 비극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끝으로 제게는 앞선 디안젤로의 '백인의 취약성'이라는 논저가 어느 정도는 미국의 인종 문제와 흑백 간의 인종적 간극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물론 교육 받은 백인 중산층에 대한 적대적 함의를 여론 몰이에 이용해, 자신의 이익에 소모했다는 피스터의 의견에 쉽게 동의할 수는 없지만 분명 "거스를 수 없고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비타협"의 반인종차별주의의 경직성을 공고히 한 점에 디안젤로의 앞선 논저가 그 책임이 전혀 없다고 개인적으로는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최근에 미국 영화인의 축제인 아카데미 시상식을 통해 드러난 사건으로 인해, 평범한 미국인들의 인종 차별에 대한 인식이 아직도 전근대적이라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을 불식시키는데 있어 무엇보다 진보 좌파가 건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은 아주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기도 한 '표현의 자유'와 다시금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노골적으로 이익화에 매몰된 오늘날의 자본주의와 이를 바탕으로 배타적 사회 건설을 추종하는 극우 포퓰리즘 내지는 극단주의 정치를 좀 더 개혁하는데, '완고한 정체성 정치'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욱이 맹렬한 신념화 단계에 빠진 극우주의자들을 어떻게 하면 상식선의 기준으로 다시 되돌릴 수 있을지, 그러한 방안에 대해 모색하는 것이 지금의 정치에서 더욱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단순히 케케 묵은 도덕성 정치 만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 대화와 토론이 필요하며 이것을 선결하는 것이, 어느 누구보다 좌파의 의무임을 더 늦더라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진보 좌파의 재건'은 시급히 필요하지 않나 글 말미에 떠올려 봅니다.



-글을 읽다 떠오른 생각은 우리가 언론에게 흔히 요구하는 '기계적 중립'에 대해 논할 때, 미국에서는 이 기계적 중립보다 대립되는 두 가치나 주장에 대해 판단을 언론이 요구 받는다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단순한 옳고 그름이 아니라 각각의 주장에 있어 잘잘못을 판단해주는 것이 언론의 기본 의무로 판단하는 듯 읽혔습니다. 이 부분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지 않나 싶습니다. 

-얼마 전에 서평을 쓴 "내전, 대중 혐오, 법치"에서도 이들 공저자들이, 좌파 답지 않은 좌파를 여실히 비판한 바가 있었는데요. 실로 지금 사회의 문제들의 가장 큰 원인이 사실상 '변질된 좌파들들" 때문이 아닌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왜곡된 사회에 대한 자정 능력과 그 의지를 상실한 좌파들이 얼마나 해로운지는 이번 논저를 통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화당이 지배하는 여러 연방주가 그사이 선거법을 개정했다. 목표는 명확하다. 공화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2025년에 트럼프나 다른 우파 포퓰리스트를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 입성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몇몇 미투 운동은 어떻게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법치주의의 초석을 흔들 수 있었을까?

그러나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좌파 정치 세력의 변질 역시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봐야 한다.

결과가 두려워 일부 국민이 표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을 문제로 여기는 미국인이 84퍼센트나 되었다.

"그냥 하는 비교가 아니라, 정말이지 바이마르공화국을 약간 닮았습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나치를 싫어했지만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더 증오했어요. 오늘날에는 나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사방에서 공격받고 있습니다. 트럼에게서 그리고 독단적 좌파들에게서, 이는 민주주의를 위협합니다."

벨은 이전 글들에서 백인이 흑인 차별을 반대하게 하는 힘은 도덕과 양심이 아니라 명확한 자기 이익에서 나온다는 견해를 이미 드러냈다.

표현의 자유는 특정 상황에서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데, 사이드먼은 이 발전을 재산 불평등의 수정과 "인종, 국적, 성별, 계층, 성적 지양 같은 특성을 기반으로 하는 권력 구조의 폐지"로 보았다.

흑인 여성 최초로 외무장관이 된 콘돌리자 라이스는 러트거스대학 연사로 초청받았지만, 학생들이 이라크 전쟁에서 그녀가 한 역할을 지적하며 분노했기 때문에 강단에 설 수 없었다.

미국의 수많은 대학에서 학생들이 자기들의 세계관과 맞지 않는 견해를 격하게 공격하는 동시에, 정신적 안정을 위협받지 않게 자기들을 보호해달라고 요구했다.

후쿠야마는 1980년대에도 이미 인종차별을 주제로 토론 수업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객관적 토론이 가능했다. 반면 지금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 기본적으로 인종차별에 있다고 보는 매우 단순한 관점이 지배한다고 한다.

로워리는 분명 ‘도덕적 명료성‘이 공상주의나 이슬람 테러에 맞선 투쟁에 필요한 결단력이 부족하다며 미국 우파가 좌파를 공격하는 데 수십 년 넘게 사용한 용어라는 점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을 터다.

언론에서 편파성은 필연적으로 실수로 이어진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중국 실험실의 사고로 전 세계에 퍼졌을 가능성을 가장 먼저 얘기한 사람이 공화당 의원 코튼이었다.

트럼프는 거짓말과 언사로 나라를 약극화했지만 좌파의 독단주의도 나라를 다시 합치기 힘들게 하는 데 일조했다.

과거에 미국인이 중도좌파를 선택한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사람들의 삶을 물질적으로 개선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쇼어의 사례는 갈등에 대한 도덕적 비난이 객관적 기준에서 잘못한 것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서 어떻게 직업을 박탈할 수 있는지를 표본처럼 보여준다.

나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다. 좌파의 정체성 정치는 특히 중도층과 고학력 계층에게 해롭다. 정체성 정치는 스스로를 위안하고, 자기 의견을 강화하고, 더 높은 도덕성을 장착하는 특정 정치집단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런 작은 버블 속의 독단과 신념은 무엇보다 성별과 피부색에 무관하게 유권자 과반에 거부감을 줄 정도로 너무 견고하다.

자유주의는 진리의 독점권을 한 인종, 한 종교, 한 계층에게 주지 않고 토론과 더 나은 주장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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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3-17 23: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엄지척입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 2024-03-17 23:05   좋아요 2 | URL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추풍오장원님~ 스포일러 땜에 글에서 보인 논증을 다 담지를 못했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챕터는 꽤 좋았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한번 일독해보시길요 ^^

추풍오장원 2024-03-18 18:36   좋아요 2 | URL
바로 주문해서 읽을 생각입니다 ㅎㅎ
정체성 정치나 정치적 올바름(사실상 양자는 동일합니다)은 정치의 탈을 쓰고 정치를 삭제해 버린다는 치명적인 해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해로움이지요. 정치가 삭제된 자리에는 소위 형식적 법치주의가 강고히 자리잡게 되지요....진보를 말한다는 사람들이 사법 엘리트에게 권력을 상납하는 꼴입니다. 대한민국도 비슷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해부
고이즈미 유 지음, 김영배 옮김 / 허클베리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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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유(小泉悠)는 일본 지바현 출신으로 현재 군사 평론가이자 저명한 러시아 전문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와세다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 과정을 수료합니다. 오래전부터 그는 러시아의 군사 동향과 군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었지만 군사력 전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국제 관계, 국제 질서론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을두지 않았는데요. 그래서 대학에 남아 연구자의 길을 걷는 것은 중도에 포기하고 군사 잡지에 글을 기고하거나 일본 국립 국회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하게 됩니다. 그러다 2009년 영국과 유사한 일본 외무성의 정보 조직인 국제정보통괄관조직(国際情報統括官組織)의 전문분석원이 됩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부터 2011년에 걸쳐 러시아에 체제 방문, 러시아 측의 연구자와 정부 관료들과 인맥을 구축합니다. 그러다 러시아 대학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있던 지금의 러시아인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고, 현재는 도쿄대의 첨단과학기술연구센터의 준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ウクライナ戦争"로 2022년 12월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9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국제 정치학자나 순수한 정치학자가 아닌 군사 전문가가 바라 보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무엇인가에 대해 궁금해하다 발견한 글이 바로 고이즈미 유의 이 논저였습니다. 저자인 그가 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사실상 개전 시기는 글 서두에 언급되듯이, '2021년 봄'이었습니다. 2014년 돈바스 전쟁의 정전 협정이기도 한 '민스크 협정'의 불안한 정치적 산물은 결국 양국 간의 전쟁으로 치달았다 볼 수 있겠는데요. 앞서 지목한 2021년 봄, 러시아 군은 훈련을 핑계로 우크라이나 주변에 병력을 산개시키고, 이는 결국 서방 첩보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저자는 푸틴의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에 대한 장황한 논문을 인용하면서, 그의 전쟁 의도가 결국은 우크라이나 속국화 내지는 우크라이나 내의 친러시아 핸들러들을 투입, 정치적으로 러시아에 유리한 국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는 러시아 내에서의 푸틴의 입김으로 불리게 되는 소위 "특별군사작전"에서의 중요 목표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젤렌스키의 조기 제거에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앞의 주장과 대략 일맥상통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푸틴과 러시아 정보 당국은 개전 초기나 그 이전의 상황에서 젤렌스키를 국제 정치에 무지하고 멍청하며, 아둔한 인물로 이해했으나 결국 이러한 분석은 오판임이 드러납니다. 이보다 저 개인적으로는 '우크라이나어를 할 줄 모르는'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이끌고 나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뭔가 역사의 아이러니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사석이든 공적인 자리이든 푸틴을 '대머리 악마'로 지칭한 젤렌스키는 그의 힐난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전쟁 개전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 주도권은 푸틴이 갖고 있었습니다. 제2차 민스크 합의를 위해 당시 독일 외무장관인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의 이름을 따 작성한 '슈타인마이어' 방식의 협상안이 최종 결렬, 그것을 타결시키기 위한 의지와 노력이 다소 불명확하게 보였던 젤렌스키의 우크라이나는 결국 러시아와의 전쟁을 맞이하게 됩니다. 과거 전쟁으로 잃은 돈바스와 크림 반도를(정치적이든 개인적인 바람이든 간에) 회복하고 싶어했던 젤렌스키는 우선 우크라이나 내의 대표적 친러 정치인이자 자신의 정적인 메드베드추크를 정치적으로 제거하기에 이르는데요. 특히 메드베드추크는 푸틴과 아주 긴밀한 관계라는 추측이 있었습니다. 저자인 고이즈미 유는 바로 이 메드베트추크의 제거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내의 친러파들을 배제하기 시작했을 시기와 2021년, 양국 간의 군사적 위기가 묘하게 겹친다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이 글의 4부에서 드러나지만 전쟁 이전에도 러시아 FSB가 주도하는 '우크라이나 간첩 작전'이 실행되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겠는데요. 미국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불법적으로 침공하기 이전부터 러시아가 군사적 진공 뿐만 아니라 온라인 공격 및 우크라이나 내의 러시아 첩자들을 이용해 일종의 사보타지를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했던 바가 있겠는데요. 이점은 개전 전에 이미 서방의 첩보 당국들이 우크라이나-러시아 국경의 군사 이동 첩보는 물론, 다양한 인적, 물적 정보를 취합해 어느 정도 결론에 이르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결국 전쟁의 초기 양상은 바이든 대통령의 예상대로 흘러갔고, 동시에 푸틴 역시 젤렌스키를 빠르게 제거하려고 했던 것으로 그 전개를 십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러시아의 푸틴이 가장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은 우크라이나 군의 끈질긴 저항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러시아 군의 무능도 한몫 하기도 했는데요. 영국 외교 당국이 개전 초기, 우크라이나의 운명이 48시간 내에 결정될 것으로 추측했지만 그 추측은 완전히 빗나가게 됩니다. 개전 초기 재블린 미사일을 비롯한 보병 전술 수준에서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무기들을 지원했던 미국과 서방은 의외로 러시아의 기갑 전력을 이들 무기로 우크라이나 군이 효과적으로 견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한 우크라이나 군의 전투력이 예상 외로 뛰어났다고 분석이 되는데요. 반대로 러시아 군은 잦은 사령관 교체와 그런 군부를 미덥지 않게 여긴 건지, 아니면 과거 KGB 시절에 자신이 모든 걸 해냈던 경험으로 인해, 지지부진한 전쟁 상황을 타개하고자 직접 개입하기 시작한 푸틴의 소위, " 마이크로 매니지먼트"는 사실상 그의 잘못된 선택으로 판가름이 납니다.

이미 여러 언론을 통해 잘 알려진 미국이 지원한 하이마스의 성과는 이 글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데요. 정밀 타격에 능한 하이마스가 우크라이나 군의 유능한 사용으로 인해, 러시아 군의 보급이 지지부진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고 저자는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서방 측의 군사 위성이 수집한 적진 정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러시아 군의 100여개 넘는 거점을 정밀 타격했다고 확인되는데요. 하지만 이러한 우크라이나 군의 빛나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부차에서 발생한 러시아 군의 참혹한 전쟁 범죄는 반대로 전쟁의 지독한 참상으로 대두되었습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 군의 기강이 아주 형편없었다는 점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손이 뒤로 묶인 고문 흔적 투성이의 시신"."성폭력을 당한 것으로 보이는 여성의 벌거벗은 시신","하수구에 던져진 시신"등 거리는 비참한 시신으로 가득했고, 중심부와 교회 및 마을 변두리는 집단 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고 저자는 거듭 밝히고 있었습니다. 이는 2015년 시리아의 개입을 통해 러시아 항공군의 잔혹한 폭격으로 이미 드러난 바가 있는데요. 이 초토화 작전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우크라이나에서도 역시나 자행 되었으며, 이 민간인 학살이라는 전쟁 범죄는 이것에 관련된 모든 자들이 그 죄에 맞는 법의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저자는 최근에 나토에 가입한 핀란드와 스웨덴에 대한 러시아의 전쟁 확대 가능성을 살펴보면서 왜 하필이면 우크라이나에 이러한 비극이 초래되었는지를 다시금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는 1994년 12월에 교환된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이 얼마나 외교적 허상에 지나지 않았는지를 돌아보고 있는데요. 우크라이나에 이 안보 보장은 당시 주우크라이나 미국 대사인 스티븐 바이퍼가 미국이 보증한 것은 안전 '보증 assurance'이며 실제로 군대를 파견하는 것을 의미하는 '보장 guarrantee'은 아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의 본질을 고찰해 보면서, 과거 한국 전쟁의 직접적 원인 중 하나라고 여겨졌던 '애치슨 라인'의 결과물 또한, 본인과 그의 부인이 수차례 입장을 전하긴 했지만 어쩌면 고도로 집약된 교묘한 외교적 수사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한 국가의 안전 보장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자위권을 발동할 수 있을 정도로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자원을 가진 이후에, 국제 외교든 담판 외교든 추후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판단해 보는데요. 물론 나토 가입이라는 조건에서 우크라이나 정부의 세련되지 않은 일처리와 서방을 너무 과신한 우크리아나 내의 정치 세력들의 순진함이 러시아의 직접적인 침략 원인이 되긴 했지만 이로써 국제 정치는 쉽게 판단하거나 재단하지 않는 것이 외교에 있어 가장 필요하지 않나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논저의 가장 중요한 분석은 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이후, 우크라이나가 복수의 국가로부터 안전 보장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13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바이든의 생각은 트럼프와 완전히 달랐다. 제1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바이든은 크림 강제 합병과 돈바스에 대한 군사 개입을 인정할 리 없었다.

푸틴은 러시아를 방문한 존 케리 국무장관에게 주러시아 미국 대사가 자신을 쫓아내려는 세력을 지원하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말한 적도 있다고 한다.

여기서 젤렌스키가 제안한 것은 2015년과 2016년에 각각 한 번씩 열렸던독일, 프랑스, 러시아, 우크라이나 4자 협의체, 이른바 ‘노르망디 4N4‘에 미국과 영국을 추가한 확대 회담을 열자는 것이었다.

메드베트추크는 푸틴과도 깊은 관계인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메드베드추크의 딸에게 세례명을 지어 준 사람이 푸틴이라는 것만 보아도 두 사람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바이든 대통령이 러시아가 2월 16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이라는 판단을 동맹국들에게 통지하고 미국인들에게 24시간에서 48시간 이내에 우크라이나를 떠나도록 한 사실이었다.

마지막으로 2월 15일에는 또 다른 중요한 움직임이 있었다. 러시아 하원이 우크라이나의 친러파 무장세력(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다)의 독립을 승인하도록 푸틴에게 요청하는 결의안을 가결한 것이다.

개전 직전에 바이든이 ‘제트 전투기, 전차, 탄도미사일, 사이버 공격 등으로 폭넓게 편성한‘공격 형태라고 예언한 내용이 완벽하게 들어맞았으며 이는 미국 정부가 상당히 깊숙한 정보원을 러시아 정부 내에 갖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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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3-14 18: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터라이프님 덕분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 알 수 있어 유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별이 왜 세 개인지 궁금하네요.

베터라이프 2024-03-14 18:30   좋아요 2 | URL
안녕하세요 건수하님 ^^
너무나 후하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ㅡㅜ 제가 왠만하게 읽어볼 만한 글에 3개의 별을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평가한지 벌써 8년이 되었네요. 그외 4개와 5개는 저의 아주 개인적인 평가가 담겨 있습니다 ^^; 사실 제가 혹평이나 하려고 3개를 주는 건 아닙니다. 그만큼 서평을 진지하게 쓰려고 항상 노력중입니다 ㅠㅠ 하여튼 댓글 남겨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건수하 2024-03-14 19:07   좋아요 1 | URL
바로 이전 리뷰에는 별이 4개길래 여쭤봤습니다.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