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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토피아 - 실패한 낙원의 귀환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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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후기근대론을 대표하는 울리히 벡, 앤소니 기든스와 함께 인용되고 일독되었던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작이라도 불러도 무방한 작품, 레트로토피아 Retrotopia 를 정독했습니다. 2017년에 그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는데요. 고령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충분히 긴 삶을 보낸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으나 아직은 전세계에 그가 필요했던 것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무분별한 인류의 근대를 통렬하게 비판한 그의 양심은 실로 존경받을 만하며, 그가 남긴 메시지는 아직도 우리에게 충분히 유용하다고 여겨집니다.

이 책의 구입은 국내의 출간일 즈음이었는데요. 이제서야 서평을 남기는 것은 글이 다소 난해하여 정독이 한 번 더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부족한 편협한 글이 될까 걱정이 앞섭니다.

바우만은 이 책의 제목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대한 부정의 부정으로 말이죠. 이것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현재의 우리 사회의 모습이 차별적이고 일부 소수는 반대로 이 세계를 유토피아로 여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상황과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존재 내지는 상황”이 여기 이 글의 중요한 문제점의 인식이자, 마땅히 개선되어야 할 현실적 상황입니다. 이것의 유토피아는 “타인에 대한 절대적인 책임감”을 갖는 인간 및 사회일 것입니다.

즉 그런 확장된 의미로서, 1장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인식론으로 확장했던 과거의 홉스주의에 대해 2장은 작게는 부족주의 Tribalism, 크게는 민족주의적 과거와 현실을 오늘날의 난민 문제와 재조명 하고 있고, 3장은 과거 영국 총리였던 대처의 ‘대안은 없다’는 신자유주의의 유일론적 방식에 따른 현재의 우리 세계의 현실, 4장은 제대론 된 ‘연결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현대인들과 나르시스주의로서 변질된 성과 성의식, 성관념 등의 오늘날 변화된 남녀 관계론 및 인간관계론에 대해 비판론적인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여기의 바우만은 우리 인간사회가 매몰되어 있는 비인간화와 탈인간화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주의깊게 그의 나레이션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폭력을 관리하고 조정하기 위한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의 작업은 근대 국가의 출현에 큰 사상적 이론을 제공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국가만이 온전한 합법적인 폭력을 다룰 수 있다는 측면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루소와 토크빌의 주장대로 인간과 사회를 위해 아주 적절하게 조절되어야 함을 반증하는 것임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이 ‘국가의 폭력’이 탈국경화가 되어가고 있으며 유효한 폭력 수단을 더 많이 보유한 일부 국가들이 자신들의 국경 안이 아니면 된다는 식의 안일주의와 소급주의로 많은 희생자와 난민을 양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홉스주의가 이런식으로 발현되는 것을 바우만은 비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기대했던 ‘우리의 홉스주의’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실용주의가 최상의 합리성인 세상에서 살고 있고, 나는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할 것이다” 의 측면은 거침없는 폭력의 사유화를 동반했는데, 이것은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민들의 사적 무장과 이를 조장하는 수많은 무기 회사, 더 나아가서는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경고했던, ‘군산복합체’의 출현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우만의 이러한 사회 인식을 이것들의 만연한 확장들로 부족주의 및 민족주의적 감성이 초래하는 결과들이 더 위험하고 폭력적일 수 있다는 저의 사소한 예측이 어쩌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글의 일독을 통해 저는 이 정도의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불평등의 모습은 앞서 언급한대로 ‘타인의 상황과 고통에 별반 관심없는 자들’ 즉,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고착화 되어 왔고, 여기에 시민들의 네트워크적인 연결성이 어려워 짐에 따라 심각해지고 있는 것으로 글에서 분석되고 있습니다. 또한 소득의 불균형과 마찬가지로 상위 소득자들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의 분리와 단절이 이론적인 모습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경계를 강화시켜 이 불평등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일면 근대론의 일상이 점차 이렇게 계층적으로 시스템화가 되어가고 있으면, 결국에는 고소득층 및 기득권층들이 다른 계층의 삶을 무지한 채로 넘겨버리는 몰이해적인 상황으로 이 인식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프레카리아트의 문제가 해결되기 힘든 것에는 고정적인 사회적 차별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이식된 자본주의가 더욱 계층의 고착화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바우만의 해석이라면 어떤 물리적 혁명이나 강제적 상황 전환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연대, 진실된 네트워크의 회복, 각 집단이 노골적으로 갈등하는 것들을 개선시키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 자체를 뒤엎거나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다소 시대착오적이며, 다만 오늘날 잊혀지고 있는 복지와 복지 국가 개념이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의 삶’ , ‘소위 인간쓰레기 취급’을 방지하고 그들과 우리의 삶을 분명히 개선시킬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서 받아들이고 복지라는 주제를 이념적으로 도태시키려고 하는 시도를 시민들이 먼저 거부해야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4장은 성과 나르시즘과 관련된 프로이트적 주장과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하지만 이 장 중간에 아인 랜드의 ‘이기주의적 가치관의 재해석’을 바우만이 삽입한 것은 미국에서의 아인 랜드의 재조명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는 티파티와 신보수주의자들을 통해 전면적 이기주의의 숭배를 그의 탁월한 분석으로 비판한 것에 대한 부분은 놀라웠습니다. 사실상 현재의 미국 시민들의 변화와 포퓰리스트들의 등장은 바로 이 ‘아인 랜드 현상’이 기반해 있고, 그것을 면밀하게 관찰한 것은 바우만의 통찰력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육체적인 정신적인 스트립쇼’라고 지칭하며 현재 변화된 성과 사랑에 대한 이번장의 분석도 어쩌면 인간과 인간의 네트워크성의 결여로 인한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통적인 성의 결박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인간 관계가 ‘애처롭게 트위터, 인스타, 페이스 북에 매달리는 수 많은 현대인들의 모습’에 보며 성찰한 바우만의 현실 해석이라 여겨집니다. 즉 앞선 이 부분을 먼저 해결하는 것이 성과 사랑 및 인간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연결성의 회복이라고 봐야겠죠.

끝으로 바우만은 우리가 서로 손을 맞잡을 것인지, 아니면 같이 공동묘지로 갈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사활적 선택’의 문제를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함께 가야만 하는 당위성의 문제이며, 현대 인간 사회의 통렬한 현존의 부조리들이 마찬가지로 함께 해결해야 되는 책무로 남겨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던져주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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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의 이해 경희대학교 국제학연구원 학술총서
우승지 지음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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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외교원 교수를 거쳐 현재 경희대 국제학부 우승지 교수는 지난 15년간 남북관계 연구를 해 온 학자입니다. 이 ‘남북 관계의 이해’는 11편의 논문 형식의 글인데요. 지난 1948년부터 남북 관계의 고찰을 통해 고찰해보고 현재의 남북 문제와 남북 대화 전반의 방향타가 되었으면 하는 저자의 바람이 담겨져 있기도 합니다. 현존하는 국제 정치 이론으로 독자들을 주눅들게 만드는 글은 아니어서 일반 독자가 보기에도 꽤 수월한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여튼 흥미로운 부분들도 적잖이 있어서 일독을 하고 나서 책의 내용에 대해 잠시 고민도 해보게 되었습니다.

우선 저자는 지난 남북관계를 해석하는 수단의 틀로 북한의 체제적 성격을 김일성 정권이 시작되는 1948년의 ‘48체제’ , 김일성 숭배체제가 확고화 되는 1968년의 ‘68체제’ 그리고 김정일 정권의 형성인 1998년의 ‘98체제’ 등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흥미로운 점은 68체제 기간의 남한의 박정희 전 대통령 시기의 ‘유신’체제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시기’를 한반도의 정치적 및 군사적 대립이 첨예했던 시기로 분석하고, 이것의 이유에는 남북한 양자의 군사정권이 강고화 되면서 그만큼 양자간의 불예측성과 불안정성이 심대하게 증가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꽤 설득력이 있었는데요. 굳이 ‘민주평화론’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배타적인 군사독재 정권이 서로 맞붙어 있으면 어떠한 불안감이 조성되는지에 대한 탁월한 증거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도 미국 닉슨 대통령에 의한 미중간의 데탕트로 한반도에도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어 갑작스런 화해 무드가 짧게 나타나기도 했습니다만 이것은 정말 우연에 가까운 것이었죠. 약간의 논외로 저자는 박정희 정권 시절의 한미 관계에 대해서도 얼마간 평가를 하고 있는데요.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체제 안정과 정권 유지를 위해 미국을 이용할 줄 알았고, 하나를 내주면 하나를 얻는 식의 거래 정치에 탁월해 이 시기의 한미 관계가 일종의 ‘밀월’의 시기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다 우리에게 ‘한국 전쟁의 기원’으로 잘 알려져 있는 시카도 대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언급을 덧붙이고 싶은데요. “1970년대에 미국 국무부 장관은 한국, 필리핀, 일본 외교 장관들을 거느리고 국제 회의에 나타나기도 했다”는 점은 사실상 자유 진영의 맏형인 미국이 당시 아시아 지역의 ‘동맹 위성국’을 당시 소련의 동유럽 위성국들을 영향력하에 둔 것과 마찬가지로서, 일본의 요시다 독트린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영향력에 의해 정권의 안정이 유지된 것과 비슷하게 한국도 동일한 위치의 시기였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각 정치 세력이 눈여겨 봐야 할 점은 미국 닉슨 대통령 시절의 헨리 키신저가 당시 국무부 외교 기조에 ‘두 개의 한국 정책’을 제안하고 강조한 것으로 봤을 때, 현실 국제 정치가 이처럼 명백하게 현실주의적이고 미국도 동맹이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의 이익과 행동 반경이 먼저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즉, 이렇게 이상주의적으로 여기는 국제 외교 내지는 국제 정치는 정말 공상에 불과한 것이죠. 특히 이 글의 저자도 서두에 밝혔듯이 “북한이 핵을 협상용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논지를 비판”하며 “북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핵무장”임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는 것이죠. 남한의 각 정치 세력은 북한의 핵무장 시도와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극렬한 남남 갈등을 보이고 있는데, 후자의 경우는 본질을 벗어날 위험이 있다손 치더라도 전자의 북한의 핵무장 시도는 매우 명백하고 이것이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의 협상용으로 쓰이기 위해 시도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우리의 대북 정책 전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저자는 이러한 이론적 접근을 통해서 남북 관계를 소위 ‘숙적 관계’로 분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숙적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적대관계에 있는 국가 관계에서나 쓰일 수 있는 것인데, 조금 냉정히 평가해 본다면 1998년 이후 진보 정권의 짧은 대북 포용 시기를 제외하면 숱한 직간접적인 남북 대결이 있어왔고, 앞서 설명해 드린대로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은 거의 40년 이상의 기간 동안 러시아와 중국, 파키스탄을 통해 핵무기 기술을 얻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표면상 이러한 수식은 합당해 보입니다. 우리가 북한에 대한 온정적인 관념인 같은 민족이자 같은 역사적 동질감을 갖고 있는 대화와 포용의 상대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과거 냉전 시기에 한국의 민주 정치와 국가 정체를 위해 대결에 나섰던 것은 분명합니다. 집토끼를 먼저 간수하고 나선 이후에 외부의 집나간 토끼를 품에 안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러한 과정에서 상대를 명확히 파악하고 분석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책의 9장인 ‘북한은 현상 유지 국가인가?’ 라는 주제는 상당 부분 동의하기 힘들었는데요. 이 ‘현상 유지 국가’라는 잣대는 현재 중국에 대한 분석틀로 많은 국제정치학자들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미국과 서구 유럽이 만들어 놓은 국제 체제 시스템에 대해 중국이 이것을 받아들이고 존중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이 참여해서 일조한 것이 아니므로 거부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중국 경제에 대한 위협론으로 대두된 일종의 이론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북한에 적용해 이론화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감이 듭니다. 우선 북한은 체제 속성상 자신들의 안전에 일순위를 두고 있는 국가로서 핵무장과 핵무기를 통해 현실 타파를 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멸망에 직결되니까요. 그리고 국제 정치 이론에서 ‘비대칭 동맹’에 대한 부분을 후견국과 피후견국 관계로 미국-남한, 중국-북한을 개념화 했는데요. 연루와 방기의 문제를 언급했을때부터 좀 더 정확하게 ‘비대칭 동맹 관계’로 설명하는 것이 마땅해 보였는데요. 이미 널리 통용되고 있는 용어를 후견-피후견 개념으로 사용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끝으로 일전에 이삼성 교수는 파키스탄의 물리학자 압둘 아디드 칸의 북한 핵무기 개발 관여 여부에 대해 그의 자백 번복에 따라 다소 불확실하다고 밝힌 것이 기억이 나는데요. 우승지 교수의 이 글에서는 이 파키스탄인 물리학자가 북한에 13차례 방북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파키스탄과 북한의 미사일-핵기술 거래는 거의 기정사실이라고 봐야 할 것 같고, 이집트에서 일부 도입한 스커드 미사일의 분해 및 역설계와 관련된 내용을 봤을 때도 이 부분이 사실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결론에 대한 보론이라 볼 수 있는 11장의 ‘제3의 길 : 북한 문제와 창조적 관여’는 대체로 귀담아 들을만 하지만 한반도 주변부의 강대국들의 한반도에 의한 이익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현재 문재인 대통령과 우리 정부가 미국과 북한에서 치열하게 중재 외교를 펼치고 있지만, 중국에 대한 영향력이 사실상 전무하고 러시아는 주변 지역의 경협을 통해 이끌어 낼 수도 있지만 일본과의 관계는 이미 상당히 틀어진 부분이 많아서 이러한 주변 4대 강국의 정치 과정이 우리에게는 녹록하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미국과 북한과의 중재 만으로도 우리 외교 당국이 이렇게 진을 빼고 있는데 우리의 영향력이 전무한 중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또 어려운 길이 있는 것이죠. 트럼프와 김정은을 움직여 궁극적인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기초를 만든다는 설정은 크게 지지할 만하고 이것에 대해서는 우리 각 정치 세력과 국민들의 응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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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론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토마스 홉스 지음, 이준호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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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장자크 루소와 사회계약론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위대한 주저 ‘리바이어던’의 저자인 토마스 홉스의 ‘인간론 (On Man)’을 읽었습니다. 홉스의 이 책은 얼마전에 서평을 쓴 코리 로빈의 ‘보수주의자들은 왜?’에 인용이 되어 참고로 읽게 되었는데요. 뒤이어 연결되는 홉스의 ‘시민론’을 읽기 전에 이 ‘인간론’을 먼저 읽는 것이 개인적으로 필요해 보입니다.

이 책을 구입하기 전에 너무 얇은 분량이라 과연 완역본일까 고민을 했는데요. 하지만 따로 대안은 없었습니다. 다만 따로 삽입된 해설에서 홉스의 인간론 영역본이 1장부터 9장까지 인간에 대한 직접적 논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서 편집이 되었고 바로 이 영역본을 번역한 것이 이 글인데, 결국 10장부터 15장까지의 분량을 책에 실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역본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토머스 홉스가 프랑스 망명 중에 불어본으로 이 글을 출판해서 아마도 그런 연유에서 영역본이라는 판본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보는데요. 따로 찾아보지는 않았습니다. 이 점 양해 말씀 드립니다.

여기에 할애된 분량은 언어와 학문, 욕구와 혐오, 만족과 불만 그리고 그 원인에 관해, 정념 또는 정신의 동요에 관해, 기질과 태도에 관해, 종교에 관해, 인공 인간에 관해로 분리되어 있는데요. 한 가지 특이할 만한 부분은 마지막 장인 15장 ‘인공 인간에 관해’에서 보듯이 일종의 물리학과 자연법칙 등을 넘나들며 이론의 수단으로 취합하는 홉스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는 당시 영국 귀족의 교육이 여러 방면의 전인을 만들어내기 위한 방편으로서 나타난 결과가 아닌가 추측하면서, 이러한 다방면의 이해도를 갖춘 사상가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지식인과는 조금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스스로 수용한 학문의 밀도 격차가 있어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더불어 홉스도 도박에 중독된 불우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삼촌의 배려로 당시 귀족의 준하는 교육을 받은 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실로 크나큰 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홉스가 인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고유한 ‘인간의 그 기질’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규명하고 구분하는데 수단인 언어를 비롯한 학문, 의지와 무관한 감정 상태인 여러 상반되는 개념들과 인간 고유의 특징이라고 봐도 무방한 정념에 대한 홉스의 부정과 가까운 태도는 흥미로웠습니다. 이러한 홉스의 태도는 이를테면, 언어가 학문을 만들어내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언어의 단점인 ‘오류와 망상의 원천이기도 하다’라고 서술하는 것에서는 그의 면밀한 이성적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홉스는 익히 알려진대로 자연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이기적이라고 언급한바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후에 토크빌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장 자크 루소도 마찬가지로 ‘특별한 계약 상태’ 에 따른 인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사상의 많은 부분을 천착해 왔습니다. 다시 홉스로 되돌아와서, 그가 이렇게 양쪽의 대비되는 가치들을 서로 연계하여 분석하고 이를통해 균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명확한 의미 부여가 되지 않나 판단해 봅니다. 더 나아가서는 “홉스가 인간의 정신을 과학적 방법으로 탐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역자의 해석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인간 정념에 대한 부정적 태도와 종교에 대한 제한적인 의미 부여, 즉 ‘신앙은 법률에 따른다’ 와 같은 경우도 홉스가 얼마나 현실 전제 왕권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영국의 성공회가 국왕에 귀속된 상황에 대해 옳다고 믿었던 것 같고, 이러한 측면의 입장은 영국 국왕의 종교 수장으로서의 지위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도 느껴집니다. 여기에 인간 괘락의 감정에 대해 이것은 ‘경험적인 것’이라고 밝히며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서도 확실하게 홉스가 이성의 우위나 이성의 감정에 얼마나 주안점을 두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끝으로 인문학 특히 역사학이 유용하다고 언급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로서 가늠해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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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의 기원 - 패권 경쟁의 격화와 제국체제의 해체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논저) 612
박상섭 지음 / 아카넷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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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와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서울대 명예 교수로 있는 박상섭 선생의 ‘1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일독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접해왔던 1,2차 양차대전의 글들은 주로 영미 출신 학자들의 주저였습니다. 대중적으로도 명성들이 있어서 일반 독자들에게도 익히 관심을 받고 있는데요. 여기의 박상섭 교수의 책은 국내 연구자가 쓰고 종래의 전쟁사 기술과는 다른 1차대전 참전국 5개국의 외교, 정치, 군사적 상황을 바탕으로 이것이 어떻게 거대한 전쟁으로 이끌었는지에 대한 치우치지 않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싶습니다. 사실 이 책을 손에 쥔 이유는 며칠전에 서평을 쓴 로버트 거워스의 ‘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에 대한 다른 보론이 필요해서라고 먼저 밝히고 싶은데요. 이 책을 이틀 내내 읽는 동안 막힘 없이 수월하게 읽혀졌고, 꽤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이 책을 위해 준비한 박상섭 교수의 온전한 연구 노력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기존의 1차대전 연구들은 서부전선 당시 지독한 참호전과 독가스 살포에 집중하며 군사 작전에 보급과 지원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의 사라예보 암살사건이 전통적으로 큰 분기점으로 이해되었지만 점차 이것은 여러 요인 중에 하나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즉, 동맹과 협상국에 따른 국제 관계의 불안정성과 각국의 잘못된 정보로 인한 판단 실책 등의 복잡한 정치외교적 행위가 거대한 확전을 불러 일으킨 중요한 근거로 해석되고 있는데요. 이에 저자인 박상섭 교수는 큰 틀에서 영국-독일, 오스트리아-러시아의 대립축이 대전의 원인이었으며 심혈을 기울인 독일 제국 재상 비스마르크의 이전 독일 중심의 비스마르크 체제가 독일 황제의 친정체제로 전환된 것도 여기에 일조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사실 비스마르크에 의해 보불 전쟁을 통한 독일 제국의 탄생은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지속하여 후발 제국주의적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싶어하는 독일 황제와 독일인들의 야망을 현실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독일 해군 건설에 따른 영국과의 갈등이 해결 불가능한 문제였고, ‘범슬라브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던 세르비아와 갓 보스니아 지역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빼앗아 편입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러시아에 대한 오판과 정치적 패착 등 이 두 개의 큰 골격의 첨예한 갈등이 전쟁을 터무니없이 확전시킨 이유가 되지 않았나 판단해봅니다.

물론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암살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최후 통첩을 내리고 나서 그 기간의 각국의 정치외교적 행위가 이해관계에 따른 돌이킬 수 없는 결과에 이르고, 그것의 기름을 끼얹은 러시아 제국의 총동원령이 독일의 총동원령과 선전포고에 이르러 확전이 되었다는 기존의 학설 또한 충분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러일 전쟁 이후 러시아가 지역내에서 종이호랑이 취급을 받으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및 독일 제국이 러시아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고 이러한 과정에서 러시아 제국이 극심한 수모를 당했다는 피해 의식과 관련하여 “러시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및 독일에게 겪은 수모감이 1차 세계대전의 반발과 관련된 수많은 요인 가운데 하나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임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덧붙입니다. 반대로 영국은 유럽 대륙 자체에 대한 기존의 중립적 태도가 일관될 것이라는 초기 독일 외교의 오판과 중립국 벨기에와 동맹인 프랑스의 안위가 걸려 참전했고, “1차 세계대전 주요 참전국 5개국 가운데 유일하게 프랑스는 참전을 원하기 보다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발을 들여 놓은 나라이다” 라고 구분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런 초기 정치적 상황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손보고, 이 ‘범슬라브 민족주의’를 성공적으로 제거하고 발칸에서 교두보를 마련하는 정도의 한정되고 제한된 전쟁으로 오판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원인일 것입니다. 영국이 러시아와 밀접한 동맹 관계도 아님에도 프랑스와의 동맹인 관계로 그 지원에 나설 수 밖에 없는 것도 참고해야 될 부분이겠죠.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될 사실은 전장의 주요 무대였던 발칸 반도가 오스만 제국의 급격한 영향력 축소와 정치적 퇴출로 인해 힘의 공백이 발생했고, 이런 상황에서 이 지역내의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갖기 시작했으며,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를 거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종전 후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앞선 것으로 아마도 세르비아처럼 오래전 독립국가였던 국가의 민족이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나 ‘민족국가’를 세우고 싶어 하는 열망은 공감이 되나, 보스니아 지역의 사람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호에 들어가면서 오스만 제국 시절과는 다른 기대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조금 생각해 볼만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프랑스와 맞닿은 서부전선을 신속히 제압해 프랑스를 굴복시킨다는 ‘슐리펜 계획’에 대해 저자는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즉, 온전한 철도 기반과 보급 문제 해결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독일 군부와 정치권이 ‘리더쉽이 결여된 채’로 이러한 낙관적인 기대만으로 이 계획을 만들었고 다소간의 독일 제국 인사들의 터무니 없는 낙관주의가 전쟁을 오판하게 된 것이 아닌가하는 개인적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독일 제국 황제의 전쟁에 대한 다소 우유부단하고 수동적인 태도도 병사들을 사지에 내몰면서도 이들을 지휘할 엘리트들이 얼마나 무능하고 무책임했는지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각 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전쟁 후반기의 극심한 소모전과 독일의 루덴도르프 공세가 실패로 끝나면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불러온 미국의 참전을 무시한 것도 독일 정치 엘리트의 무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1차대전은 귀족과 전제정치를 비롯한 구체제의 종말 뿐만 아니라 전쟁 자제에 대한 다소간의 낭만주의적 태도와 낙관주의를 일시에 제거한 사건이라고도 평가할 만합니다.

이 책에 결론에서 저자는 1차대전 종전 후의 전제정치와 귀족정치의 종말로 인한 국민국가 내지는 대중국가의 출현으로 인한 결과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요. 이 당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식민지 지역의 유색인종들을 배제한 발칸반도와 동부 유럽에만 해당되는 제한적 주장으로 그 한계가 명확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뒤이어 대중을 선동하는 파시즘이 출현했다는 점에서 견고한 교육체계가 결여되고 정치의식이 전무한 대중주의 정치가 아무런 기반없이 출현한 것은 두고봐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대전으로 막대한 희생을 치룬 일반 대중들의 희생이 정치적 유연화를 가져온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이 대중들이 정치 전면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과 일반 투표권을 비롯한 참정권에 대한 한계가 영국을 비롯한 각국에서도 보였다는 점에서 이러한 점을 전면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회의감이 듭니다. 끝으로 5장에 있는 보론은 특히 중요하게 읽어야되는 부분으로 여겨지는데요. 슐리펜 계획과 발칸 문제, 피셔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5장만 보더라도 이 글을 향한 저자의 노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앞선 서두에 그동안에 소개된 1차대전 자료와 글들 중 영문으로 나와 있는 자료들만을 참고해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밝히면서, 앞으로 이후 연구자들이 좀 더 보완되고 가치있는 글이 나오기를 바라는 저자의 기대가 보였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연구물이 시장 논리와 상관없이 계속 나왔으면 하는데요. 다행히 제가 구입한 이 책이 3쇄를 찍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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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자들은 왜?
코리 로빈 지음, 천태화 옮김 / 모요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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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학하고 현재 브루클린 대학과 뉴욕 시립대학원에서 정치학 등을 가르치고 있는 코리 로빈은 저명한 정치 이론가이자 언론인이며, 그의 주요 관심사는 약간의 예상대로 과거 냉전시기의 미국 정치 전반인데요. 원제 The Reactionary Mind인 이 책은 2011년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국내엔 이듬해인 2012년 후반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책에도 간략히 소개되어 있지만 코리 로빈의 이 글은 출판 당시 미국 정치 평론계와 일반 정치를 다루는 블로그로부터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가 있는데요. 저자는 서두에서 보수주의를 선악의 대비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 어쩌면 소모적이고 감정적인 상황이 나타난 것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의도했다고는 보기 어려운 점이 있는데요. 대체로 미국의 보수주의와 보수주의자들의 아픈 구석을 사정없이 드러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들었습니다.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요. 1부는 6개의 장으로 2부는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 1부의 큰 맥락대로 보수주의 자체의 기원은 에드먼드 버크의 위기감 섞인 주장대로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동적인 성격으로 잉태되었다고 저자는 요약합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혁명과 이상에 대해 주저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현실 자체를 타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순응하고 적응하는 일종의 취향의 문제로 이들을 판단합니다. “보수주의는 원래 교조주의 운동이었으며, 취향의 문제”라고 저자가 단정짓는 이유에는 바로 이러한 해석적 기반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1부 2장의 다소 노골적인 보수주의가 반혁명적인 측면이 있다고 밝히는 것처럼 보수주의가 현실 순응과 현재의 가치에 몰입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저로서도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보수주의자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모두에서 민주주의의 진보를 가로막으려 했다”는 주장도 이것을 저자의 편협한 해석으로 여겨지기 보다는 혁명 자체의 반대, 이상의 거부라는 측면에서 인간 정치에 의한 민주주의적 체제를 보수주의가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기득권과 엘리트들에 있어서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하고, 그렇지 않은 계층에게는 달리 말하면 지배 계급에 대해 더 예속을 시킴과 동시에 그것 자체가 이들에게 더 큰 안정과 보장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에서 단편적으로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죠.

저는 이 책의 일독 중간에 “보수주의가 과연 민주주의를 존중하는가” 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는데요. 허버트 스펜서를 추종하는 사회진화론자들, 사회생태학자들 및 그것의 기반의 보수주의자들이 일종의 인간에게도 생태적 도태를 강조한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허버트 스펜서가 그러한 사회진화론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론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지만 어찌됐든 그런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많은 보수주의자들의 행태이기도 합니다. 또한 상당한 보수주의자들 가운데에서도 시장 자본주의와 자유 시장에 대한 지지를 밝히고 있는 자들도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시장과 자본의 기득권을 갖고 있는 상위 계층에 대한 좀 더 지배적인 자유권을 보장하기 위한 기반으로서의 입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모든 평등한 인간이 누려야 할 자유가 아니라 전통적인 계급적인 이론의 수단에서 적잖은 보수주의자들이 이러한 관념 체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엔 이러한 보수주의가 민주주의적 가치에 얼만큼 동조하고 편입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사실상 회의적인 판단이 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지배와 의존이라는 관계의 존재만으로도 우리를 ‘자유인’에서 노예 상태로 전락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고 강조하는 것도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나 기득권의 좀 더 수월한 움직임, 반대의 진보와 좌파 세력에게 이러한 점을 주지시키고자 하는 것도 신념 체계로서 ‘보수주의’가 반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와 정치적 진보가 끊임없이 인류의 역사를 통해 노정해 왔는데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체제에 대한 소수의 결속과 이득을 표면적으로 내새울 수는 없겠으나, 그것을 잠정적으로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이들의 본질이기 때문이죠. 물론 저는 사회 가치와 체제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의 균형적 발전이 분명 필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 미국의 사회정치 현실이 트럼프를 포함한 우익 포퓰리즘의 대두 뿐만 아니라 종래의 티파티 운동이 진보와 좌파를 제거 대상으로 노골적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할 만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보수주의 자체가 새로울 것도 뭔가 가치 중심적인 것은 이 책을 통해서도 별반 드러나지는 않지만 진보의 개혁 보다도 보수의 계급 정치적 폐쇄성이 시민 사회와 민주주의 자체에 있어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미국은 이런 해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요. 이 책 2부에서 다루고 있는 것들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격렬한 냉전 시기에 CIA와 보수 진영의 전략가들이 니카라과와 파나마, 온두라스에 효과적으로 투입한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정치 및 군사 작전의 결과가무고한 인명 피해를 수반했다는 점에서 이것이 그냥 단순한 ‘부수적 피해’로 국한될 것인지는 모두가 자문해봐도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막대한 부수적 피해를 생산해가며 기존의 가치를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미명이 언제까지 그 근거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이 책을 통해서 명백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온전한 정치를 위해 보수주의가 자신들의 유일성만을 위해 움직일 것이 아니라 그외 다른 사상, 이를테면 동성애와 여성 인권, 진보주의와 공존하고 공생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저자가 말하는 보수주의 자체의 급락과 지지부진함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른 차원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수주의가 다른 상반된 가치들을 제거와 도태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민주주의가 주장하는 가치로서 토론과 타협 등으로 기득권과 엘리트 지배 정치, 계급주의적 동의에만 신경쓰지 말고 좀 더 대의적인 건전한 시민 정치와 민주주의의 성숙에 신경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오해와 억측을 받고 있는 허버트 스펜서는 보수주의자들이야 말로 민주주의의 온존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네오콘과 보수주의의 아이콘인 아인 랜드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등, 저자의 태도를 불편하게 여기고 터무니 없는 것이라 여기는 보수주의 및 보수주의자들이 이 책 자체를 백안시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과 현실이라는 양대 가치에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차포를 떼고 보면 이처럼 단순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 그동안 여러 측면의 과오가 보수주의로부터 촉발되었고 그 명확하지 않은 태도로 말미암아 많은 시민들로부터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이 어쩌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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