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캘리니코스 시사논평 - 양극화, 극우, 좌파
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이정구 엮음 / 책갈피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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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지아 남부 솔즈베리에서 태어난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영국의 정치 이론가이자 동시에 좌파 사상가입니다. 그는 옥스포드의 발리올 컬리지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그곳에서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크리스토퍼 히친스를 만나게 됩니다. 이후 요크 대학의 정치학 교수를 거쳐, 2009년 9월, 킹스 컬리지 런던의 유럽학 교수로 임명되는데요. 캘리니코스는 경우에 따라 미국을 오가곤 했지만 주로 영국에서 활동한 지식인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특히 영국 정치권이 미국의 요구를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행태에 있어 이를 강하게 비판해 왔으며, 유럽의 신자유주의와 이것을 통해 광범위한 이익을 얻는 '극단적 중도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비판을 가한 바가 있습니다. 여기에 최근 벌어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서도 "자본주의 경쟁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는 제국주의 라이벌 국가들 사이의 진행 중인 전투"라고 묘사하기도 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이 캘리니코스를 로베르트 웅거와 자주 비교 분석해 보기도 합니다. 참고로 그의 이 책은, 일종의 시사 논평집으로 영국의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에 그가 쓴 시사 논평들 가운데 일부를 편역해 출간한 것이기도 한 데요. 따라서, 국내에는 지난 2021년 1월 번역 출간 되었습니다.

캘리니코스의 이 책은, 미국 정치와 유럽 정치의 양극화와 최근의 브렉시트와 전세계적 코로나 19 사태 등을 다루고 있는데요. 대략 2002년부터 2019년 사이에 쓴 다양한 논평 들을 주제 별로 편집하여 엮은 것입니다. 그가 전세계적으로 드문 좌파 사상가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미국 오바마 정권부터 도널드 트럼의 집권, 그리고 최근 코로나 19 사태에 있어 어떠한 비평을 보였을지 어느 정도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그가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의 맹렬한 비판자임을 감안해 본다면,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기득권 정치와 이를 지지하는 정치 세력과는 완연히 다른 정치적 스탠스를 취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특히 신자유주의의 전반적인 실패와 시장 자유라는 맹목적인 신뢰에 대한 그의 날선 비판은 유독 이 글에서도 도드라져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의 이 논평에서 제가 주목한 부분은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극단적 중도파'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이는 유럽의 현체제를 빗대어 여실히 분석한 것이기도 한 데요. 이를 약간 돌려 생각해 본다면, 최근 미국의 정치에도 마찬가지로 대입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비슷한 시기의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 상황에서 이 정권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을 분석해 보면 어느 정도 극단적 중도에 대한 개념이 도출되는데요. 캘리니코스는 이미 1장에서 인정하고 있듯, 도널드 트럼프는 여성 차별주의자이자, 인종 차별주의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트럼프를 강고하게 지지하는 세력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집중 공격한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일전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미국 정치 무대에 등장한 정치인이 대놓고 인종 혐오와 여성의 성적 취급과 같은 최악의 것들을 거리낌 없이 대놓고 드러내는 행위에 비판을 가한 바가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그와 같은 것들을 감히 입 밖으로 드러내는 시도 자체가 (정치적으로) 매우 잘못된 행위라는 것입니다. 하여튼 이러한 트럼프의 집권이 기성 정치의 실패와 체제 전반의 과오를 '분노 정치'로 돌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그야말로 양심이 구축된 정치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것은 한마디로 극우 포퓰리즘의 명확한 실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적 실체에 대해 캘리니코스 역시 동의하고 있었는데요. 트럼프를 '비이성적 인종차별주의자'로 언급하는 대목에서 선동하는 정치와 기득권 정치의 실패를 분노로 돌리는 교묘하고 무책임한 행태임을 독자들은 다시 한 번 목격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본질적으로 미국 정치의 실패도 거의 맹목적으로 사회에 신자유주의를 이식한 결과라고 여겨집니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2009년의 전세계적 금융 붕괴에 있어 신자유주의가 그토록 경멸하는 '국가의 지원, 즉 국민들의 세금'으로 자신들의 이익적 기반인 '금융 시장'이 구원을 받았지만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음으로써 미국의 주택 시장의 몰락과 더불어 평범한 시민들의 극심한 고통을 무시하였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보면 '정치의 무책임한 방기'리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핵심적인 사항은 '시장 자유 담론'에 우리 모두가 여지없이 인질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캘리니코스는 엄중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후 벌어진 충격적인 '코로나 19 사태'에 있어서도 다시 한번 그는 다시금 신자유주의가 실패했다고 단언하고, 이 시기 제한적인 통제에서 벌어진 거리 두기에서 "시민들이 자신의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너무 아끼는 것이 문제"라는 유럽과 미국의 대기업과 우파 정치인들의 망언은 대체로 경제적 이익이 얼마나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캘리니코스는 이에 대해, "죽음에 맞선 삶이란 (극명하게) 이윤에 맞선 삶"이라고 일갈하기도 하는데요. 신자유주의 체제가 과연 이 코로나 19 사태에서 위태로운 전염병에 노출된 시민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제대로 하기 위한 일말의 노력이라도 기울였는지 돌이켜 볼 때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빈국이 선진국보다 가난해서 가용 자원이 부족하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의료 서비스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시기에 혹독한 긴축을 겪어", 이 시기에 선진국과 빈국의 실질적 사태 해결은 그만큼 '돈'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또한 우리가 과거 경험한 2009년의 대붕괴에서 G20과는 달리. 최근의 미국과 유럽, 그리고 중국이 이 사태에서 제대로 협력하지 못했다는 그의 분석은 실로 뼈아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이 3개의 권역이 자신들의 이기심 때문에 결국 협력할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 보다 타당한 분석이라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최근 브렉시트와 관련해서도, 영국 정치 내에 극심한 사회 분열은 캘리니코스가 분석한대로 유럽의 '첨예화 된 양극화 정치'와 매우 연계되어 있습니다. 이는 신자유주의를 통한 금융 자본들의 막대한 이익 유지라는 관점에서 브렉시트는 어느 정도 결부되어 있는데요. 시티 오브 런던이 뉴욕의 월스트리트에 버금가는 전세계적 금융 중심지라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영국의 기존 정치권이 브렉시트와 관련된, '국론 분열'에 있어 일반 시민들에게 왜 무능해 보일 수밖에 없는지 대략 이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유럽을 거치지 않는 금융 거래에 집중한 영국 금융 엘리트들이 현재의 정치권과 결탁해, 브렉시트를 (잠정적으로) 원했다는 것은 단순한 음모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더욱이 시티 오브 런던에 대한 이들 엘리트들의 무한한 자부심과 캘리니코스가 비판하는 '사모펀드 경영자들'과 맞물려, 체제를 지탱했던 소위 극단적 중도파들의 행태는 끝내 사회를 어떻게 분열로 이끌었는지, 그 논리적 맥락 또한 짐작케 합니다. 아무리 브렉시트가 캘리니코스가 언급하는 대로 유럽 연합과 영국 정계의 온갖 행위자들이 내린 정치적 선택의 결과라고 할지라도 최근에 더 심각해지고 있는 유럽에서의 양극화 정치가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앞서 언급했듯, 극우주의 혹은 극우 포퓰리즘의 대두는 우리 모두가 심각하게 바라봐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시민의 파편화와 극단적 개인화를 조장하면서 사실상 시민 사회가 유명무실해졌다는 캘리니코스의 분석은 거의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만큼 이는 현 시대의 부정적인 자화상이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는 자본주의에 의한 사회와 시민권의 총체적인 부실로 이어진 것이라 추측되는데요. 아무리 자본주의가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하더라도 상업화 된 개인주의적 맥락은 그것의 양면성 내지는 부정적 측면이 단순한 서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글 말미에서 제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신자유주의 실패로 인한 극우 포퓰리즘의 대두는 절대 현실 정치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극우 포퓰리즘을 배경 삼아 기성 정치에 들어간 인물들 모두가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으며, 이보다 더 심각한 자들은 유대인 혐오나 이슬람 증오와 같은 인종주의 정치를 강화해 나가고 있습니다. 일전에 어느 정치 유튜버가 평가한 대로, 현 시대를 개선하기 위한 '똑똑한 시민' 내지는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제한적인 담론은 이미 상당한 정치적 변별력을 잃은 다수의 시민들을 고려했을 때, 상당히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됩니다. 더욱이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는 일 조차 평범한 시민들이 감당할 수 없는 기득권의 저항에 노출될 수밖에 없고, 이에 캘리니코스가 제안하는 '민주적 계획 경제' 혹은 이를 좀 더 탈이념적으로 분석한 '시장에서의 민주적 통제'가 앞선 세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만연된 분노 정치에 있어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왜냐하면 금융이 주도하는 자본주의가 무조건적인 붕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존에 누리엘 루비니가 거듭 경고한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장미및 미래 만을 갖고 그저 단기적인 이익 추구에 매몰된 금융 자본주의 자체를 지금과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시장에 맡긴다면 우리의 정치가 지금보다 더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수밖에 없다 생각됩니다.


빌 클린턴은 미국 민주당이 이른바 ‘레이건 혁명‘을 수용하도록 해서 미국 공식 정치의 지형을 우경화시키는 데 핵심적 구실을 했다.

지금 벌어진 일(트럼프의 당선과 브렉시트 결정)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가 빚은 결과에 반발해 유권자들이 일으킨 커다란 반란이다.

트럼프는 신자유주의 시기의 금융 투기로 성공한 인물로 그 질서와 결별하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의 당선을 보면, 신자유주의와 경제 위기의 결과들에 맞선 반란에 우파 포퓰리스트가 올라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공화당과 영국 보수당의 주장과 달리, 코로나 19 방역과 경제 지탱 사이의 ‘균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가 생명을 지키기 위해 단호하게 대응한 나라들은 경기 수축의 폭이 더 적었다.

자율주의는 사회운동이 정치에서 독립적이어야 하며, 정당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운동의 요구들을 표현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이 어떤 것으로 나타날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영국 노동당과 프랑스 사회당은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탓에 지금은 "사회자유주의자들"로 불리고 있다.

유대인 혐오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인종적 음모에 의한 왜곡이 문제라는 자본주의에 대한 피상적 비판에 문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강한 대처가, 신자유주의가 위기에 빠지면서 자신이 임명한 내각과 소속 정당의 지지를 잃고 한없이 몰락했다.

각국의 자본주의는 국민국가의 경계선을 따라 불균등,결합 발전을 해왔으며, 각국의 정치 지형과 계급투쟁의 양상도 상이하다.

이는 부분적으로 빈국이 선진국보다 가난해서 가용 자원이 부족하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의료 서비스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시기에 혹독한 긴축을 겪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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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 - 동등한 관계, 동등한 즐거움을 위한 기혼 여성들의 섹스 말하기
부너미 외 지음 / 와온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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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페미니즘 글쓰기 공동체라고 볼 수 있는 부너미는 2017년 말 기혼여성들의 독서모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부너미는 한옥에서 아궁이에 불을 땔 때, 온기가 역류하지 않게 막아주는 '부넘이'에서 유래했습니다. 전작인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는 주변에서 의외의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한국 사회에서 기혼 여성들도 진정한 페미니즘 운동에 동참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에서 해당 분야의 독서 저변을 비롯해, 일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생각할 거리를 남겨준 논저라고 여겨집니다. 지금 서평을 쓸 이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는 기혼 여성들의 솔직한 섹스 담론과 결혼 생활의 본질을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르포르타주로 추측하건대, 일반 미혼 남성들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기존의 기혼 남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여러 주제에 대한 토론이 필요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쯤에서 각설해, 이 글은 지난 2020년 4월, 국내에 출간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인간은 누구나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갖고 있으며, 섹스에 있어서도 이러한 권리가 무엇보다 우선해야 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만, 부부 사이의 섹스 그 반대의 섹스리스 등 부부 관계에 대한 문제는 아무래도 내밀한 영역이고, 동시에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복합적으로 터부시되어 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즉, 가부장제에 기반한 전통적인 가족 제도 하에서 '남성의 성'은 거의 배타적으로(결혼한 아내의 성에 비하면) 사회가 이를 용인해 왔으며, 이 책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듯, 이러한 기조는 개인에 국한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현실에서 여전히 강고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섹스리스 부부'에 대한 일종의 편견이나 섹스리스 부부에 대한 과도한 주변의 관심은 '부부 사이의 섹스'라는 전형적인 담론에 매몰되어 어느 정도는 폭력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 소개된 여러 글들 가운데, 기본적으로 아내에 대해 섹스를 요구하는 아주 일반적인 남편의 사례와 반대로, 어떤 남편과 아내는 둘 사이에 굳이 섹스가 없더라도 잘 지낼 수 있다는 앞선 예의 바깥에 있는 경우도 드물지만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이 글의 도입부는 '섹스리스 상태'에 대한 판에 박힌 관심을 회피하고자 어느 정도 절충해서 변명거리를 마련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정서적 교감과 대화만을 통해 서로를 충분히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런 측면에서 관계 전반에 서로 만족하고 있는 일부 부부들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의 부부와 같은 사례는 어느 정도 소수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여러 부부들의 현실적 모습을 살펴보니, 보통 남편들은 거의 자신의 사정(射精)만을 위해 아내에게 성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를 좀 더 풀어보자면 대부분의 남성들은 연애 시절을 포함해 파트너인 여성과의 좀 더 서로 간의 성적인 교감을 위해 충분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꺼려하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오랫동안 접한 야동이나 포르노를 통해 잘못된 성지식을 켜켜이 쌓아왔다는 점 일텐데요. 특히, 여성의 클리토리스에 대한 남성들의 일반적인 무지는 매우 심각하다고 여겨집니다. 남성의 대표적 성적 기관인 페니스에 위치한 귀두와 거의 동일한 기능을 갖고 있는 클리토리스에 남성들의 의도된 무지는 주목할 만합니다. 특히 클리토리스에 대한 자극은 여성들에게 있어 오르가즘에 도달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도 여겨지기까지 하는데요. 하지만 많은 남편들이 아내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이 담긴 애무조차 무관심하고, 그저 자신의 만족을 위한 '삽입 섹스'에 중점을 두고 있기에 이런 남편들의 '일방적인 섹스'가 섹스리스 문제에 어느 정도 큰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보통의 부부들은 결혼 생활 과정에서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게 됩니다. 특히 출산은 여성의 몸에 있어 중대한 여러 변화를 초래하게 되는데요. 출산 도중 아이의 머리가 임산부의 방광을 눌러 전에 없던 요의의 불편함을 겪는다거나 출산을 위해 의사의 조언대로 회음부 절개를 하다 보면 그것대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은 아이의 건강한 출산에 맞춰져 있다 보니 미혼 남성을 비롯한 적지 않은 수의 남성들은 출산 문제는 당연히 여성의 몫으로만 취급했던 것이 현실입니다. 아이를 출산하고 모유 수유 하느라 몸이 처녀 때와 달리 체형이 급격히 변한 여성은 스스로 대한 사랑을 잃게 되었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아무런 변화도 없는 남편의 몸을 보면서 자신만 왜 이러한 신체적 변화를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탄식하기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자신의 몸에 대한 혐오'는 결국 남편과의 섹스를 기피하는데 이릅니다. 이는 더 이상 자신의 몸이 아름답지 않다는 부정적 인식이 바탕이 되어, 남편의 요구를 거부하게 되는 것인데요. 물론 하루 종일 집에서 아이와 씨름 해, 밤만 되면 거의 녹초에 이르는 아내에게 있어 변변한 대화도 없이 그저 손끝으로 몸을 툭툭 건드리며 관계를 요구하는 남편에게 "잠 좀 자게 내버려 둬"와 같은 분통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임신 시기에 남편의 욕구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아내들도 분명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대부분 시스템적으로 아내에게 전가 되고, 이것에 대한 배려가 전무한 남편들이 아직도 상당하다는 점은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오로지 '자신의 욕구가 우선인 남편'이라는 존재 자체가 현실의 사례에서 볼 수 없는 그저 공상 속의 산물로 치부해 버릴 수 있겠지만 그만큼 여기에 실려 있는 글들은 일부 독자들에게 쉽게 접할 수 없는 귀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특히 결혼 생활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어 더욱 그렇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결혼 생활의 여러 사례들 가운데 무엇보다 뜨악했던 부분은 어느 남편의 불법적인 성매매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직장 생활에 있어 상사가 원하는 분위기를 맞춰 주고, 접대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간혹 경험하게 되는 성매매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입장이었는데요. 다만 이 부분과 관련해, 일선 경찰들이 실정법에 규정된 불법 성매매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는 이유는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가야 하며, 만약 무리를 하게 된다면 오히려 그만큼 강력 사건에 투입될 인원이 부족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즉, 일선에서 음성적으로 벌어지는 성매매가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라는 논법으로 취급될 것이 아니라, 쉽게 단속에 나설 수 없는 국가 조직의 현실적인 제약이 있는 것이 본질이겠죠. 그래서 이러한 상황이 결코 성매매에 대한 법적 면죄부로 이어져서는 안된다고 판단됩니다. 더불어 여기에 소개된 글들을 읽으면서 분명하게 느낀 부분은 아직도 한국 사회가 여성의 성에 있어 폐쇄적이며, 그러한 측면에서 남성들 역시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부분입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많은 남성들이 섹스에 있어 서로의 만족을 위한 대화와 교감을 거부하고 있는 실정과 여전히 자신들의 사정만을 위한 섹스를 거의 노골적으로 원하고 있는 점은 일반적인 결혼 생활에 있어 어느 정도는 서로 간의 치명적인 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런 연유로 건전한 부부 관계를 위한 '부부 간의 성'이라는 주제는 좀 더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도 마찬가지로 더 이상 이를 금기시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달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어떤 분의 사례에서 과거 자신의 연애에 대해 지금 남편 분이 더럽다고 일컫는 내용을 접했는데요. 이런 분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나중에 '여성에게만 가해지는 순결주의'에 대해 글을 쓸 기회가 있을 것 같은데요. 한국 사회 곳곳을 이루고 있는 이러한 폭력들이 개화된 종교에서조차 여전하다는 점에서 이것을 그저 철지난 사회적 관습으로 치부하고 그냥 그러려니 해야 되는지 가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맥락의 '철지난 관습들'은 어떻게 보면 사회 통합을 방해하고, 서로 간에 편견을 극대화하며, 종내에는 의견조차 피력하지 못하게 하는 악습으로 발현되기에 이릅니다.      

-결혼에 이르기 전, 여느 연인 관계처럼 뜨거웠던 커플이 서로의 극명한 차이만 인식하게 되는 작금의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건 천천히 서로를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해야 될 겁니다. 

"우리에게 섹스는 대화였고 배려였고 존중이었다"

   



섹스리스가 되고 싶다는 사람은 없지만, ‘왜‘ 섹스리스가 되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많다.

내가 궁금한 것은, 남편의 섹스 요구를 자신을 향한 관심이나 애정으로 굳게 믿고 ‘남편이 조르기를 은근히 바라는‘ 뭇 여성들의 심리다. 못 이기는 척 응하든, 에둘러 거절하든 일단은 요구해 주길 바라는 마음.‘아직도 나를 원한다‘는 사실에서 자존감을 찾고 뿌듯해하는, 그래서 남편의 성욕을 자랑스레 떠벌리게 되는 마음.

임신 중인데도 자신의 몸보다 남편의 성욕을 더 걱정하던 후배. 그녀가 정말로 걱정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남성의 성욕은 본능이고 그에 비해 여성은 대화와 관계에 대한 욕구가 크다고 강조한다. 이런 생각들은, 남편의 성욕은 반드시 해소되어야 하므로 아내가 받아 주지 않으면 다른 여자를 만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서사로 완성된다.

여자의 몸은 소중하며 아무에게나 보여 줘서는 안 된다는 정도가 그들이 내게 해준 성교육의 전부였다.

여성의 성기에서는 어떠한 냄새도 나지 않아야 한다거나, 출산 전 성기의 모양을 되찾아야만 성적인 존재로서 가치있다는 믿음은 어디서 주입된 걸까?

내가 더럽다니?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귀를 의심했다. 그는 친절하게 설명하며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니까 나는 연애를 좋아했고, 지금껏 여러 남자를 만나고 섹스를 했으니 더러운 여자라는 뜻이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애를 돌보는 동안 식욕, 수면욕, 배변욕과 같은 기본적인 욕구조차 채우지 못해 절규하며 살았다.

사회에서 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유능한 남성들이 피임에 있어서는 심각하게 무능하다. 고통을 나눌 의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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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8-03 2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터라이프님 리뷰를 읽고 생각난건데요 한국에서 부부 사이의 강간이 인정된 것이 얼마 안된걸 보면
해결해야할 과제가 아직도 참 많다고 느낍니다. 이미 아실것 같긴한데 정희진님 책들도 좋아요! ^^

베터라이프 2023-08-03 23:25   좋아요 1 | URL
조금 유추해서 생각해보면 부부 사이의 강간은 특히 폭력이 동반된다는 점에서 문제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남녀 간 섹스와 성에 대한 관념을 너무나 차별적으로 취급해 온 게 부부 간의 ‘섹스 비극‘에도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아마 미미님도 동의하시겠지만 일반적인 연애 관계에 있어 젊은 커플들이 좀 더 성에 대해 터놓고 의견을 나누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판단됩니다. 이제는 피임 도구를 확실히 챙겨라, 이런 수준의 말들을 얼마간 넘어서야겠죠. 그리고 정희진 씨에 대해서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분의 글도 나중에 읽어보려고 고민하고 있네요 ^^ 엉망인 제 서평을 그나마 읽을만하게 수정하느라 미미님께 글을 남기는 게 늦었습니다. 모쪼록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소서! ^^
 
어떤 미소 프랑수아즈 사강 리커버 개정판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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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롯주의 카자르크에서 태어난 프랑스아즈 사강은 부르주아 부모의 막내로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도피네에서 전쟁을 피하게 됩니다. 특이하게도 사강의 부계 쪽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러시아 혈통입니다. 그리고 필명인 사강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인 princess de Sagan 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녀는 18세가 되던 해에 출간한 '슬픔이여 안녕'으로 당시 프랑스 문단으로부터 몇 세기 만에 등장한 천재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는데요. 이후 수많은 작품을 내놓으며 전세계 평론가들과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녀의 사생활적인 측면에서는 몇 가지 논란을 남기기도 했는데요. 1990년대에 코카인 소지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고, 스포츠카를 고속으로 운전하다 사고에 연루되어 한동안 혼수 상태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스스로를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이라 여겼던 사강은 2000년대 들어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게 되었고, 2004년 옹플뢰르에서 69세의 나이로 폐색전증으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이런 그녀의 죽음과 관련해, 당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사강의 죽음과 관련해. "그녀의 죽음으로 프랑스의 문학계의 가장 훌륭하고 열정적인 작가 중 한 명을 잃게 되었다"고 소회를 밝힌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에게 거대한 명성을 안겨다 준 '슬픔이여 안녕' 이후, 두 번째 작품이 된 '어떤 미소'는 원제, 'UN Certain Sourire'로 지난 195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7년 12월에 초도 번역이 이뤄졌습니다. 제가 구입한 판본은 2022년에 재간행 된 개정판입니다.

사강의 두 번째 작품이기도 한 '어떤 미소'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첫 작품보다는 어느 정도 무난한 장편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현 시대조차 일부 국가들에서는 결혼한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은 일견 법적 혹은 문화적으로 금기시된다는 부분에서 꽤 호불호가 갈릴 것 같습니다. 비슷한 입장에서 이 소설이 출간된 당시, 프랑스 사회가 이 작품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보였을지는 대략 짐작이 되기도 하는데요. 그럼에도 사강의 이 장편은 사랑을 겪는 평범한 젊은 여성의 심리와 감정선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고, 특히나 여성들이 '진정한 사랑'에 대한 의미와 그것을 대하는 태도 등을 남자들이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인정해야만 하는 '건전한 관계'에 대해 보통의 인간으로서 이를 고심해 볼 수 있는 점도 개인적으로 유익한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에서 내로라하는 대학에 다니고 있는 주인공 도미니크는 20대 초반의 여성으로서 누군가와 평범한 사랑을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작가인 사강이 여성의 첫 육체적 관계를 가볍게 지나치지 않듯, 첫 관계와 사랑의 현실적 변곡점을 도미니크를 통해 여실히 드러내고 있기도 한 데요. 더욱이 이 글에서 공격적이 아닌 꽤 완곡하게 묘사된 유부남 자체에 대한 설정은 주인공인 젊은 여성에게 보다 매력적인 장치로 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자친구의 훤칠한 외모와 육체적인 매력과는 달리, 현실적인 부분에 부합되는 경제적 능력은 있어 보이지만 그저 '슬픈 지식인'으로 규정되는 뤽과의 첫 만남과 그 전개 과정은 어설픈 편이고, 도입에서 관계를 나누는 세 사람의 결말이 대략 예상이 되는 점은 서사의 긴장감을 약화 시키기도 하는데요. 다만, 뤽의 아내인 프랑스아즈의 인물 조성은 꽤나 예상 밖이었습니다. 예측하건대, 자신을 포함해 두 주인공을 파멸에 이르게 할 것 같았으나 그녀의 예상 못한 성품과 인간됨은 작가 자신의 이름을 부여한 이 인물 자체의 애정으로도 읽힙니다. 2부 중간 부분에 뤽이 자신의 아내에 대한 감정, 그녀를 판단하는 여러 수식어들은 '상처를 안겨주고 싶지 않고 자신의 보살핌이 필요한' 여성으로 그려지는 점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결말을 독자들이 어느 정도 암시하게 되는 설정이 되지 않았나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본질적으로 사강의 이 작품은 여성이 겪게 되는 '진정한 첫사랑'의 체험을 독자들도 이미 스스로도 겪어 본 지난 날의 일들을 얼마간 곱씹어 보게 만듭니다. 물론 남자의 진정한 사랑과 여자의 처음 사랑은 그 결이 상이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도미니크 자신의 여러 대화와 독백 등을 통해 드러나는 내면의 고백은 스스로가 간절히 원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것이 사랑의 감정으로 도달된 점은 그 자체로 인간의 개인사에 있어 '중요한 시발점'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마도 사강은 역설적이게도 유부남으로부터 느끼게 되는 진정한 사랑에 있어 윤리적 문제를 다소 차치하고, 사랑으로 인한 여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일관되게 묘사하는 부분은 그것 자체로 문학적인 매력이 가미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강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특별한 여주인공이기도 한 도미니크의 존재는 작품 전반을 육체적인 성애화로 추락시키지 않고, 20대에 접어든 보통 여대생의 사랑에 대해, 우리 역시 이 작품으로 인해, 각자가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게 하여, "그때 우리의 사랑은 어떠했는가"를 스스로 반추해 보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 모두가 젊은 시절 느끼고 체험했던 각자의 '순결한 사랑'에 대해서 말입니다.

젊은 시절의 서툰 열정 그 자체를 떠올리게 하는 베르트랑과 세월을 겪고 여자에 대해 많은 경험을 한 뤽은 도미니크에게 있어, 각자 별개의 관계로 종속됩니다. 단순히 양자의 관계가 현실적인 문제로 이뤄질 수 없는 한계로 읽히기 보다는 도미니크의 입장에서 사랑의 존재 여부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르는 조건이 되기도 하는데요. 이를테면 여자에게 있어 '사랑의 의미'는 그저 육체적인 관계를 위한 자신 스스로에 대한 납득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순수한 열망이자, 순간 순간을 함께하고 싶고, 나만의 남자가 되었으면 하는 그야말로 원초적인 감정을 포함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초반에 불순한 의도를 갖고 접근한 뤽에 대한 '감정적인 면죄부'가 이 사랑을 통해, 확정되는 것이기도 하죠. 단지 사회적 시선으로만 봤을 때, 유부남과 여대생의 육체적 관계를 포함한 일련의 과정들이 역겨울 수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의 한 가운데에 있는 도미니크에게 있어서, 뤽의 아내 프랑스아즈의 선의와 자신을 향한 따뜻한 관심까지 거스르게 만든, 그녀의 남편과의 관계 그 자체가 때론 스스로를 경멸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복잡한 시점에서 사강이 여러 작품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안락함'에 있어 뤽이 제공할 수 있는 그러한 경제적 가치도 쉽게 치부할 수 없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젊은 여자가 보다 어른인 남자가 제공하는 '경제적 안락함'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는 인식 자체는 이미 현실에서도 관계에 있충분히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결국 자신의 안락함을 관계를 맺는 남자에게 기대하는 여성 주인공에 대한 사강의 고백은 이러한 맥락의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끝으로 이 작품은 2부 중후반부터 3부까지, 각 등장 인물들의 틀에 박히지 않은 대사와 감정선이 매력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도미니크의 뤽과의 예정된 결말에 대해 겪는 감정적인 변화와 스스로를 성찰하는 모습은 우리가 이미 겪었던 지난날의 서툰 편린들을 사뭇 떠올리게 합니다. 유부남의 마력에 빠진 도미니크의 모습 자체는 자신을 나락까지 끌고 가는 모진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한 한 인간의 순결함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작품에서 사강이 도미니크를 통해 거듭 언급하는대로 사랑이 때론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패악을 겪어본 우리에게 있어 이러한 사랑이 매번 아름다울 수 없다는 현실의 대면은 그만큼 의미심장하다고 여겨집니다. 설사 이런 모든 것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심리적으로 완고한 사람에게조차 말입니다.



하지만 내 속에는 이 젊은 남자의 말끔히 면도된 목덜미를 따라가게 만드는 어떤 것, 나로 하여금 저항하지 않고, 생선처럼 차갑고 미끌거리는 사소한 생각들을 지닌 채 늘 그를 따라가게 만드는 어떤 것이 있었다.

베르트랑은 내 첫 애인이었다, 내가 내 몸의 고유한 냄새를 알게 된 것은 그의 몸 위에서였다.

그녀는 사람들을 극도로 주의 깊게 대했고, 대단한 선의를 지녔으며, 그 선의 속에는 침착한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게임은 베르트랑에 대한 충분히 견고한 감정을 파괴시키는 것은 물론, 나 자신에 대해 당혹스럽고 신랄한 감정을 갖게 할 터였다.

나는 그들의 잡담이, 남자애, 여자애 사이의 이야기들이, 소위 사랑에 빠진 어린애의 장난들이, 그들의 드라마들이 역겨웠다.

나는 새벽이 올 때까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와 키스만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베르트랑은 키스할 때 매우 빨리 지쳐버렸다.

왠지 모르지만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난생처음으로 내 어린 시절과, 가족의 안전함과 결별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벌써부터 아비뇽이 싫어졌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베르트랑이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고, 프랑스아즈는 나를 떠나지 않을 거야.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고"

그와 같은 음색의 목소리, 한순간 아마도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하지만 그가 나에게 그것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가슴속에서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는 조금 지친 기색이었고, 나는 우리가 이 조그만 모험을 잘 치러냈다고, 우리는 정말로 문명화되고 합리적인 성인들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나 자신에 대해 일종의 분노와 함께 끔찍이도 굴욕적인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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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 - 미중 패권 대결 최악의 시간이 온다
마이클 베클리.할 브랜즈 지음, 김종수 옮김 / 부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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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 메사추세츠 터프츠 대학에서 정치학과 부교수로 일하고 있는 마이클 베클리는 미국내 강대국 경쟁과 관련한 연구에 있어 권위를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애틀랜타에 소재한 에머리 대학에서 국제학 학사를 마치고,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는 미국 국방부와 정보국에 특별한 자문을 제공하고 있기도 한데요, 특히 그의 여러 논저들은 파이낸셜 타임즈, 포린 어페어즈,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등에 소개되었고, 미국 정치학회 (American Political Science Asssciation)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책의 다른 공저자인 할 브랜즈는 미국 외교 정책에 있어 국제 관계 분야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스탠포드 대학을 거쳐 예일대에서 역사학 석,박사를 취득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 내에서 존경 받는 역사가이기도 합니다. 현재 그는 존스 홉킨스 대학의 헨리 키신저 국제 문제 특훈 교수로 일하고 있으며, 동시에 미국 기업 연구소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의 상주 학자이기도 합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이 책은 요즘 국제 정치와 외교에 관련된 귀중한 지식들을 시민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국제정치학자 김지윤씨의 개인 유튜브의 소개 영상을 보고 급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영상에서 소개된 이 글은 대체로 평가가 나쁘지 않았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요 근래 미중 대결과 관련된 여러 글 가운데 현실적 측면에서 이를 고려한 글로 여겨졌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2023년의 중국의 대단한 굴기를 예측했던 옌쉐퉁의 기대와는 달리 현재 중국에 놓여 있는 국제정치학적 배경이 결코 낙관적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이에 이곳의 공저자들은 현재 중국을 '거의 정점에 오른 국가'로 단언하고 있었는데요. 이러한 주장의 맥락은 아마도 지오바니 아리기가 중국에 대해 예측한 '불안정한 강대국' 혹은 '한계를 갖는 강대국'과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인식적 상황에도 중국은 기존의 덩샤오핑의 유훈이기도 했던 '도광양회'를 철회하고, 본격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위한 공격적인 외교에 나서게 됩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이해하고 있듯, 현재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중국 공산당이 제일의 과업으로 삼은 건, 과거 서구 열강의 침탈과 관련된 치욕적인 역사를 만회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땅한 세계관으로는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맹목적인 관점을 포함한 매우 자국 중심적인 사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과거 우리 선조들의 국가였던 백제는 대륙의 중국을 그저 '서국 西國'으로 지칭했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한반도의 중국 대륙이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니 이를 규정한 조상들의 지혜는 정말 대단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렇게 아픈 역사를 어떻게든 만회하고자 하는 욕망은 당과 중국인들의 뜨거운 열망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중국의 정치적 변화는 공저자들에 의해, "소위 과거의 대국이었던 중국이 엄청난 경제적 발전을 통한 굴기에 나서면서 1970년대 이전의 다면적인 인내를 더 이상 감내하기 어려워졌다"고 보는 분석은 일견 타당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즉, 과거의 강대국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보유한 국가가 현재 자신들의 국력에 걸맞는 지위를 국제사회로부터 당당히 요구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미국과 유럽 국가들에 의해 현실 타파 세력으로 인식된 중국은 현재 자유주의 체제 성립에 있어 자신들이 참여한 바가 전무하기에 이런 국제 체제가 다소간 불합리하다고 여기는 중입니다. 아마도 '대국 중국'에 걸맞는 국제 체제의 새로운 요건을 미국과 서구 유럽이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믿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날 중국 외교가 벌이고 있는 '전랑 외교 wolf-warrior diplomacy'가 어느 정도 복잡한 양상이 자리하지만 거의 반쯤은 이러한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보게 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중국은 남중국해에 구죽한 강제적인 자국 영해 추진과 군사 기지 구축은 필리핀이 제소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결에 대해, '꼭두각시 재판소의 판결은 구애 받지 않을 것이라고 거의 일갈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몇 년 간 중국이 벌인 남중국해 지역에 대한 불법적인 내해화에 대해 국제 사회가 아무런 관여를 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으로 남아 있는데요. 캄보디아를 동원해 아세안을 적극적으로 분열시킨 중국의 노골적인 개입이 있기도 했지만 해당 지역의 국가들에게 여전히 중국과의 교역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전체적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녹록하지 않은 상황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런 대 중국과의 교역 문제라는 아킬레스 건에 있어 우리도 역시 사드 배치 문제로 중국의 혹독한 경제 제재를 겪은 바가 있는데요. 제가 일일이 당시 워싱턴의 태도를 물고 늘어질 생각은 없지만 그때 미국이 보인 태도는 실로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2015년 9월 중국 전승절에 참석한 대통령과 우리 정부를 소위 '손봐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런 사태에 모호한 태도를 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드 보복'에 대한 미국의 인식이 어떤지 이 글을 통해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굳이 이 사건을 언급하는 이유는 여기 이 논저의 명백한 한계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논증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즉 민주주의 국가들의 소위 '대 중국 연합'과 관련해, 일본을 제외한 대다수 해당 국가들의 중요한 경제적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 교역의 현실적 딜레마를 여기 전문가들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세계 공급망에서 중국을 퇴출시키고 건전한 민주주의 국가들이 주도하는 '공급망 통제'에 대한 필요성은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국과의 교역과 관련해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를 보이는 일본을 제외한다면 각국에게 경제적 다변화를 위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물론 미국은 지난 1985년 플라자 합의에서 독일과 일본에게 강요했던 것처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동맹국의 경제 전반을 후순위로 취급할 의지도 배제할 수 없는데요. 과거 냉전의 엄혹한 시대를 거치는 동안 미국의 민주주의 세력의 보호와 유지를 위해 기여한 노력들은 충분히 인정을 받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패권이 강요하거나 배타적이지 않고 자유 민주주의라는 틀 안에 다수의 국가들과 공존하려고 했던 저자들의 분석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내 민주주의 국가들이 중국과 경제적 관계를 완벽하게 철회하기란 매우 어려우며,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주의하에서 이뤄지는 수많은 금융 거래와 산업 전반이 중국에 소재한 공장에서 이익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이것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대체할 수 있겠는가에 미국이 원하는 대 중국 봉쇄의 실효적인 효과가 여기에 결부되어 있다 볼 수 있겠습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국제 레짐의 차원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민주주의 국가들과 중국의 직간접적인 대결에 있어, 앞으로 비정상적으로 초래될지 모르는 중국의 대만 침공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관건이 될 텐데요. 지금 세계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위치를 자임하고 있는 미국은 대만의 방어가 무엇보다 중요해진 시점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남중국해 문제와 관련해 최근 약한 축으로 인식되고 있는 필리핀에 대한 중국 인민 해방군의 선제 공격 가능성도 동시에 중요한 문제이기도 한 데요. 여기의 공저자들은 앞선 진술에 대해, 5장에서 "만일 중국이 필리핀 군을 공격한다면 미국으로서는 매우 힘든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다소 냉정히 판단하고 있었는데요. 만약 필리핀을 소위 버리는 패로 취급한다면 전세계에 있어 미국의 리더십은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마 중국과 러시아는 이런 미국의 리더십이 타격 받는 상황을 무엇보다 바라고 있을 텐데요. 이처럼 유사시 대만 해협에서의 사태는 그저 지역적 해협의 위기로 끝나지 않고 그 주변으로 여파가 미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센카쿠/댜오위다오를 실효 지배하고 있는 일본에게 있어서도 현재의 조짐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시점입니다.

끝으로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중국의 불법적인 대만 침공과 관련하여 '한국의 군사적 기여'라든지, '한국의 역할'에 대해선 거의 언급하지 않은 부분은 무엇보다 적잖이 마음이 놓였습니다. 물론 이 점은 그저 저만의 개인적 감상일 따름일 텐데요. 이 뿐만 아니라 7장에서 언급되는 푸틴이 미국이 주도하는 NATO에 흠집을 내고자 하는 점이나, 독재 정치의 정당성을 드높이는 것으로 중국이 깨뜨리고자 하는 국제 질서의 위태로운 상황은 확실히 심상치 않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두 독재자들을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점은 거의 분명해 보이고, 이들이 지배하고 있는 전제 정치 혹은 독재 권력이 어떤 식으로 우리 민주주의 진영에 위협이 될지는 자명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경제적인 부분에서 지금까지 신자유주의 이행으로 상당한 이익을 톡톡히 누린 중국과 서구 자유 진영 역시 마찬가지로 한때는 공동 운명체였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어야 될 겁니다. 더불어 막대한 경제적 성과를 이룩한 베이징이 자유 민주주의로 변화되지 않은 것은 당시 서구권의 안일한 판단이라는 점도 분명히 해야할 텐데요. 이와는 별개로 현재 진행 상황에서 있어 미국에게 일본이 얼마나 중요한 동맹국인지 이 글을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점은 우리가 미국에게 있어 그저 부차적인 동맹이 되지 않도록 외교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만반의 준비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현재 유럽 각국이 과거 냉전의 상흔 때문에 대 중국 봉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부분도 우리가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이런 복잡한 양상 때문에 최근의 수가 뻔히 다 보이는 아마추어적인 외교로는 미일 양국이 주도하는 국제 정세에 있어 그저 그들에게 필요한 장기 말이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됩니다. 그래서 우리 정부가 대 중국 봉쇄에 대한 민주주의 진영의 체제 구축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행동에 나서고 있는 미국조차도 글의 8장에서 공저자들이 잠정적으로 제언하고 있듯, 중국에 대해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준비해야 한다고 언급하는 부분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제외교적 상황의 본질이 무엇인지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저 동맹 외교에 기대는 순진한 생각은 마땅히 접어두는 편이 국익을 위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대체로 이 글의 논지는 무리할 만한 근거가 거의 없었는데요. 반복되는 몇몇 진술을 제외한다면 글 전반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경희대 안병진 교수의 해제의 결론 부분을 보니 이 분의 어투가 자연스레 생각났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안교수의 글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중국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이 차상위권 강대국에 머물 수밖에 없는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는 역사적으로 정상이 아닐뿐더러 몹시 분통 터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1950년대 대만해협에 위기가 발생했을 때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에 핵공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권위주의 정권은 자유주의적 개혁을 실행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중국의 인접국에는 15개의 세계적인 인구 대국이 포함되어 있고, 이 가운데 4개국은 핵무기로 무장하고 있으며, 5개국은 과거 80년 이내에 중국과 전쟁을 벌인 적이 있고, 10개국은 여전히 중국의 영토 일부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중국공산당의 터무니없는 인권 유린을 언급할 때조차 중국이 경제적으로 더 개방되면 결국에는 정치적으로도 더 개방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은 국제정치에 죽기 살기식으로 접근하는 자신들의 무자비한 외교 방식을 감추기 위해 ‘상생 외교‘라는 환상을 이용하는 데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트럼프는 미국과 가장 가까운 민주주의 협력국을 상대로 무역 전쟁을 시작하는 한편, 수십 년을 이어온 동맹 관계를 깨뜨리는 것에서 파괴적인 쾌감을 얻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은 경쟁자들의 공세를 저지하고 중국몽의 실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하게 계산된 강압 정책과 팽창 정책을 추진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미 함정에 빠졌다. 자신들의 정치 체제를 지탱하는 정실 자본주의를 위태롭게 하지 않고서는, 결코 경제 제국주의를 폐기하거나 진정으로 경제를 개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민해방군 역시 사이버 공격과 함께 지상 발사 미사일을 사용해 미군 상호 간 교신 및 워싱턴과 통신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인공위성을 파괴하려 들 것이다.

만일 미국이 조약에 따르는 긴밀한 동맹국인 호주, 캐나다, 프랑스, 독일, 일본, 한국, 영국 등 단 7개국만 결집시킬 수 있어도 강력한 경제 동맹체를 결성하게 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과 동맹국의 기업이 첨단 음성 인식 기술, 안면인식 기술, 컴퓨터 시각인식 기술, 자연어 처리 기술 등 특정 기술을 권위주의 정권에 이전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다.

미국의 몇몇 분석가는 미국이 더 나가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엄밀히 따지면 조약을 맺는 동맹국이 아닌 대만에게 조약에 준하는 안전 보장을 해 줘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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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자 2023-06-29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국제정치학자 김지윤씨 유튜브 영상을 보셨군요! 저도 그 영상 통해서 이 책 궁금해져서 장바구니에 넣어놨었는데! 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베터라이프 2023-06-30 04:4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달자님 ^^ 유튜브에 국제정치를 제대로 소개하는 영상이 드물어서 가끔 김지윤 박사 영상을 보게 되네요. 이 책을 소개한 영상에서는 근래 미중 대결 가능성을 염두해 놓고 최근 이슈에 맞게 해석하고 있었는데요. 실제 책은 주요 논점들에 대한 사례와 근거들 가운데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예를들어 2차대전 당시 일본과 독일의 패착을 현재 중국의 오판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비교 분석하고 있는 부분도 흥미로웠죠.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시길 바랄게요. ^^ 다시 한번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권력
버트런드 러셀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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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몬머스셔의 레이븐스크로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버틀란드 러셀은 영국의 저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 논리학자 및 존경 받는 대표적인 공공 지식인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수학철학, 언어철학, 인식론, 형이상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사상가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학문적인 접근에서의 러셀과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믿는 바를 실천했던 사회적 지식인으로서의 그는 상당히 다른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합니다. 영국 역시 양차대전을 겪으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를 겪기도 했고 전쟁 수행에서 비정상적인 권력의 집중을 경험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평화에 대한 확신과 그에 따른 지식인의 의무를 알고 있던 러셀은 공공선이라는 측면에서 전쟁을 반대했고 마찬가지로 파시즘과 공산주의 역시 그에겐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적극적인 의견 개진은 사회와 대중으로부터 많은 지지와 반대로 상당한 논란을 야기했지만,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의무에 대한 자각은 무엇보다 존경을 받을 만하다고 여겨지는데요. 그는 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첨예화 되어 가던 시기에 BBC를 비롯한 많은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중을 향한 강의와 견고한 시민 사회를 위한 지성적인 기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정치권조차도 러셀의 이런 노력을 인정했고, 그의 왕성한 대외 활동에서 이를 지켜보는 언론인들조차 그를 지지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의 논저를 통해 이미 수차례 러셀을 존경한다고 밝힌 노엄 촘스키는 러셀의 이런 치열한 삶을 정중히 인정했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생애 말년까지 정치적 활동을 지속하며 정력적인 삶을 이어간 러셀은 1970년 2월 2일, 웨일스의 한적한 지방인 펜린듀드레스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ower'로 1938년에 초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번역가 안정효 선생에 의해 1988년 1월 처음 번역됩니다. 제가 구입해 읽은 판은 2003년 8월에 펴낸 신판입니다. 자리를 빌어 이 책과 관련된 짤막한 개인적 소회를 남기고 싶은데요. 러셀의 이 책은 제가 지난 2008년 5월에 신촌에 있는 모 헌책방에서 구입한 후, 오랫동안 기억에서 잊고 있었던 물건이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이사를 하게 되면서 이 책을 비로소 찾게 되었는데요. 때문에 이제야 완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이성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라면 누구나 권력의 존재에 대해 인지하게 마련일 겁니다. 더욱이 이 권력이라는 존재는 직간접적으로 나를 포함한 모두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중대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권력자의 명암'이라는 수식어처럼 러셀 역시 '고래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권력의 속성'에 대해, 그의 특유의 현란한 수사를 통해, 거의 통사적으로 분석해 내고 있는데요. 글의 후반부인 16장에서 러셀이 지나가듯 밝히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권력의 양상과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대체로 부정적인 것이 많습니다. 제러미 벤담의 언급대로 인간의 무리는 적절한 통제가 필요한 편이다라는 점을 우리가 인식한다면 권력의 존재 유무는 바로 '통제를 통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물론 러셀에 의해 여기에 제시되고 있는 많은 역사적 사례들은 유럽의 사료가 대부분입니다. 특히나 14세기 이전, 유럽의 전제 정치 하에 국가 사회적으로 양대 권력이었던 왕권과 가톨릭에 의한 소위 신권은 유럽 사회 전반을 끌고 온 중요한 원동력이기도 했는데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짐작하고 있듯, 특히 가톨릭에 대한 전반적인 서술 대부분은 비판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교황과 황제가 체제의 질서를 위해 서로가 협력하지 않고 몇세기에 걸쳐 대립한 역사는 이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한데요. 특히나 14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후, 교황권에 대한 본질에 있어, 종교에 대한 길드 상업주의의 개입은 꽤나 중요한 전환점으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러셀의 강조대로 교황권의 몰락이 촉발되었던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몰락 이후 교회의 통치는 유럽의 지배력 나날이 잃게 됩니다. 여기에 교황의 스스로 자초한 권력의 이탈은 교황에게도 불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매우 불행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뒤이어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루터 이후에, 전 유럽이 종교 전쟁으로 피바람을 몸소 겪을 수밖에 없던 점을 감안하면 종교가 비정상적인 수단으로 끝내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시도 자체는 비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훌륭한 성인들이 교회에서 나타나 이들이 "무절제한 탐욕과, 방탕과, 사리사욕이 판치는 세상에서 교회의 뛰어난 인물들의 탄생과 헌신"은 이러한 교회 권력의 전반적인 몰락을 막지는 못했는데요. 저는 이 부분에서 후에 등장하는 '실천적인 도덕'과 관련한 중요한 역사적 맥락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러셀의 주장대로 일반적인 도뎍률과 그에 따른 도덕의 함의는 권력을 보다 강하게 유지시켜주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저 윤리 교과서에서나 등장하는 말장난 같은 도덕이 아니라, 앞선 '실천적인 도덕'을 중요하게 여기는 저자는 이 실천적인 도덕의 부재는 과거 교회 권력의 빠른 종언을 부채질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부모를 공경하고, 간음을 하지 않는 등의 교회의 가르침과 거의 다를 바 없는 기본적인 도덕 관념의 이행은 아주 예전의 청렴하고 신실한 사제들에 의해 더할 나위 없이 깨끗했던 교회의 모습과도 일치합니다. 그런 연유로 '종속은 항상 도덕성에 의해 강화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이러한 진술은 꽤나 엄숙한 종교적인 측면을 갖고 있어, 도덕 스스로가 과거 말고 현대에 있어 어떠한 모습을 갖춰야 하는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게 만드는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혁명 세력이 등장하기 이전의 초기 자본주의 혹은 상업주의적 시대의 태동은 사회에 적지 않은 부유층을 만들게 됩니다. 이들에 대한 콩도르세의 언급대로, "부유층 대부분이 과두제를 좋아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는 6장에서 "경제적으로 커다란 불만이 없는 곳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분석과 비슷한 맥락을 갖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지금과 같은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의 부유층이 아닌 비로소 잉태하기 시작한 그 시기의 부유한 자들의 대두는 역사적으로 사뭇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차적으로 자본주의가 공고한 권력을 갖는 이 시기에서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자본가들의 기저에 깔린 근심은 완벽히 제거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파시즘이 유럽을 강타할 시기에 미국의 포드와 같은 자가 히틀러의 전체주의가 효과적으로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다고 확신했고, 마찬가지로 이 글 11장에서 언급되는 바와 같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구실로 삼아 국가가 다른 모든 것들과 대기업의 위로 올라섰다"는 전체주의가 어떻게 대두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를 여실히 잘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히틀러에 의해 종말을 고한 바이마르의 비극이나, 무솔리니의 철권 통치는 권력을 심각히 오도한 역사적 사례로 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르네상스 시기 이후의 부유층의 대두와 그들이 가졌던 과두제에 대한 동경과 함의는 2차 대전시기의 자본가들의 그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인식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철저히 민주적인 정부라고 해도 권력의 재분배는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혁명을 배제하기 위해 더 큰 악을 사회에 용인시키는 소위 다른 형태의 권력을 보유한 자들의 비정상적인 행태는 우리가 충분히 곱씹어 볼 만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러셀은 이 글의 후반부에서 한 가지 비극적인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로서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보존이 엄청난 숫자의 아이들을 독가스로 죽이고 다른 여러가지 끔찍한 짓을 저지름으로써만 확보될 수 있다고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얘기한 바 있다"고 고백하는데요. 어떤 목적을 위해 가혹한 수단이라도 필요하다는 식의 권력의 오만은 그것의 정당성을 답보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공공선과 공공의 이익을 거듭 강조했던 과거 공리자주의자들이 스스로 도덕적으로 고결하고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들이었던 반면에 지금의 많은 정치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월급과 이익을 향상시키는데 노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공의 선 같은 것을 '겉치레 과시'처럼 강조하는 연유의 바탕에는 '현대 정치의 복잡한 양상'이라는 왜곡된 지식인들의 선전 효과의 지속적인 영향을 받은 요인도 있습니다. 결국에는 많은 정치인들이 사익을 추구하기 마련이라는 권력의 후퇴에 있어 많은 시민들이 그저 거수기에 지나지 않게 되는 작금의 정치는 참으로 불행하다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수의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부나 정치 권력'이 시민에 대한 정부의 검열과 박해로 이어진다면 이에 따른 민주주의의 위기는 심각한 수준으로 추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러셀이 심히 경고하는 듯한 어조의 다음의 진술인, "광범위하게 얘기하자면 독일과 이탈리아의 민주주의가 몰락한 이유는 다수가 민주주의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군대의 우세한 힘이 수적으로 다수인 쪽에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그 시사하는 바가 명백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시기에서 군대가 어떠한 정치적 결정을 할 수 있겠느냐와 같은 물음은 다소 논점을 벗어난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는 다수가 원하고 바라는 지향에 있어 상당한 권력을 가진 집단이 대다수의 의견에 반할 수 있다는 경고를 담고 있는 것인데요.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국민의 복지를 위해 존재한다는 러셀의 주장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는 '권력'에 대한 본질을 어쩌면 예상보다 빨리 깨닫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끝으로 과거 권력이 초래했던 여러 불행한 사건들과 다수의 이익에 반하는 권력의 오판을 방지하기 위해 정치적인 측면에서 러셀은, "법을 존중하는 태도와 더불어 자신의 견해가 아닌 다른 견해라도 꼭 나쁘지 만은 않다고 믿는 습성이 필요하다"고 12장의 논증 가운데 강조합니다. 그의 말대로 과거에 민주주의에 영향을 끼친 것이 부와 전쟁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전쟁 자체가 민족주의와 경제적 이익의 인질이 되지 않도록 대다수의 민주 국가들이 이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민주주의 자체는 그것의 이식과 더불어 체제 안정에 있어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정치인들의 인내심과 그에 준하는 시민들의 안정된 삶 또한 강하게 요구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논증 하에 글의 후반부에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권력을 길들일 수 있겠는가'에 우리의 민주주의의 안위가 달려 있다고 봐도 무방해 보이는데요. 또한 우리의 민주주의가 지속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러셀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자신의 판단을 옹호할 어떤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그들의 뜻과 어긋날지라도 다수의 결정에 기꺼이 응해야만 한다"는 제언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온순한 시민'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와 정치의 본질에 끊임없이 질문을 할 수 있는 시민들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소위 '강한 기질'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자인 러셀이 "국가가 스스로 과학이나, 형이상학이나, 도덕의 수호자로 자처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이른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10장에서 논의되었던 바와 같이 시민과 시민, 국가와 국가 사이의 서로 간에 공감을 찾기 위한 노력 또한 필요하며, 러셀의 논증에서 드러난 민주주의가 갈등과 대립에 다소간 취약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이러한 갈등 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무엇보다 현명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저자는 그 어떤 사상가 보다 국가 간의 전쟁과 그러한 전쟁의 원인에 대해 정치사회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과거의 숱한 역사에서 면밀한 분석을 시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시대를 거쳐간 많은 엘리트 계층이 은폐했던 전쟁의 본질에 대해 그처럼 파고든 지식인은 아마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러셀의 조언들은 현재에도 충분히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 본문 140 페이지에 역자는 모슬렘과 무슬림이라는 단어를 동시에 기입하고 있었는데요. 단순히 동어 반복을 피하기 위해 저렇게 두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아쉬운 부분입니다.


-크게 의미는 없겠지만 200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동기 가운데 가장 강력한 한가지인 권력에 대한 사랑은 아주 불균형하게 분포되었으며, 안락함에 대한 욕망이나 쾌락에 대한 욕망 그리고 때로는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 따위의 갖가지 다른 동기들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다.

그리고 새로운 신들의 벼락불에 의해 파괴되는 도시들이 런던과 파리가 아니라 베를린과 로마라고 하더라도, 그런 행동이 이루어진 다음에 그 파괴자들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인간다움이 남을 수 있겠는가?

상당히 묘한 일이지만 이른바 지식이라고 일컬어지는 세력은 가장 야만적인 집단 사회에서 가장 강하고,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점점 더 약해진다.

안정된 사회에서는 불의에 대한 끓어오르는 의식을 지닌 상당한 규모의 계층이 없어야만 하고, 따라서 경제적으로 커다란 불만이 없는 곳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

<권리>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납득할 수 없는 벤담 공리주의자는 실질적인 목적에 있어서 똑같은 개념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할 수도 있으리라. <어떤 외적인 권위의 간섭이 없이 개인이 자유롭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황으로 만일 어느 생활 영역을 규정지을 수 있다면 그때는 만인의 행복이 증가한다.>

기독교의 윤리에 의하면 어떤 국가의 필요성도 어느 사람에게 죄악 행위를 범하도록 강요하는 권한을 정당화활 수는 없다.

개별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은 비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길잡이로서 받아들인다는 것도 잘못이다. 그것은 보다 광범위하게 권력을 연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아주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한 가지 요소일 따름이다.

정부의 구성원들은 아무리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권력을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의해서 임명된 관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손에 넣지 못한 까닭은 러시아가 그곳에서는 영국만큼이나 강력했기 때문이고,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판 것은 그가 그곳을 방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지구가 평평하다거나,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는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자유가 부여되어야만 한다.

소크라테스는 법에 의해서 수립된 권리자들이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그의 영혼이 내리는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진실하지 못하기보다는 차라리 순교를 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로서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보존이 엄청난 숫자의 아이들을 독가스로 죽이고 다른 여러 가지 끔찍한 짓을 저지름으로써만 확보될 수 있다고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얘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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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6-22 2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권력 참 인간을 행복하게도, 비참하게도 만드는듯요. 인류역사의 불행의 이유인듯요.

베터라이프 2023-06-23 00:08   좋아요 1 | URL
러셀이 이 글에서 인간이 지배를 하는 쪽과 지배를 당하는 쪽으로 분류할 수 있고, 상당수가 은연중에 지배를 당하는 것을 원한다고 인간을 그리 평가했어요. 권력에 대한 측면도 이와 비슷한데 모순적인 부분과 동시에 자유주의에 반하는 속성을 권력이 역사에서 여럿 드러냈다는 점은 독재 권력과 그렇지 않은 자유주의 정치의 상반된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순된 존재라고 읽히는 걸까요. 쓸데없이 주저리 쓰게 되었네요 ^^ 참.. 그레이스님이 쓰신 에르노 관련 글들은 에르노가 생각날때마다 읽고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