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적 친화력 을유세계문학전집 12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장희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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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9년 8월 2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태어난 괴테는 왕실고문관인 아버지와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시장의 딸인 어머니에게서 자라납니다. 부모의 신분이나 배경으로 보아 그는 꽤나 부족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런 괴테는 부모에게서 유전적으로 좋은 것들만 물려받았는지 어린 나이에 신년시를 써서 조부모에게 선물했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은 타고 났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767년에 첫 희곡인 '연인의 변덕'을 쓰게 됩니다. 1775년에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인 카를 아우구스트에게 초청을 받게 되는데요. 바이마르 시절의 약 10년 간, 그곳의 정무를 담당하여 추밀참사관, 추밀고문관, 내각수반으로서 치적을 쌓고 심지어 광물학, 식물학, 골상학, 해부학 등의 연구에도 정진하게 됩니다. 뒤이어 1792년에는 프랑스 혁명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제1차 대프랑스 전쟁에 아우구스트 공을 따라 종군하고, 발미 전투와 마인츠 포위전에 참전했습니다. 바로 이 직후에 독일 문학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 괴테와 실러의 상봉이었습니다. 마치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와의 관계처럼 두 사람은 즉시 서로에게 매료되는데요. 1805년 실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들의 우정은 지속됩니다. 지금 제가 서평을 쓰게 될 이 작품은, 괴테가 1807년 예나에 잠시 체류했을 때, 그곳 서점 주인인 프롬만의 양녀인 민나 헤르츨리프에게 한눈에 반해 정열을 불태우다 그 연애체험의 감정적 침전물이 바탕이 되어 탄생하게 됩니다. 이 책은 1982년 뮌헨의 C. H. 벡 출판사에서 나온 함부르크 판 괴테 전집. 제6권에 실린 '선택적 친화력'을 참고로, 2023년 6월 국내에 번역 출핀되었습니다. 번역은 동의대 독어독문과 교수이자 한국괴테학회 회장을 역임한 장희창 교수가 맡았습니다.

오랫동안 유럽에서 결혼 제도의 근간이었던 기독교적 결혼관은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차츰 상실한 가톨릭의 도덕 가치 체계로서 마지막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당시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귀족이 중심이 된 계급 체제가 다소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그 시대의 귀족들이나 지주계층들이 따로 정부를 둘 지언정, 자신들의 결혼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엄격한 윤리관을 유지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개인의 욕망은 어느 정도 절제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 가톨릭이 요구하는 인간관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혼외 관계 자체를 자신의 평판과 명예를 위해 조심하는 귀족들도 물론 적지 않게 존재했습니다. 다만, 부부의 연을 맺는 두 사람이 기본과 다름없는 인간적 신뢰와 호감 혹은 존중 없이 그저 가문 간의 결합이나 부모의 이익에 따라 맺어지기도 하고, 여성의 권리 역시 기대할 수 없는 시대였기에 무엇보다 여성들이 겪었던 고통은 이루 말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한, 부유한 남작인 에두아르트는 열렬한 구애 끝에 자신이 원했던 샤를로테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초혼이 아니라 두 번째 결혼이기도 했는데요. 한편 에두아르트는 전부인이 막대한 재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의 처인 샤를로테는 천성이 온화하고, 사람에 대한 편견이 적으며, 신중한 여자입니다. 안살림을 도맡을 정도로 꼼꼼하기도 하고 남편과의 일반적인 대화에서도 그의 감정을 잘 배려하고 성숙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꽤나 현명한 아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에두아르트가 한결 같은 열정으로 오로지 샤를로테만 바라보며 두 사람이 결합할 수 있을 때까지, 긴 시간을 인내했기에 비록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재혼이긴 했지만 소설의 도입부인 1부의 3장까지 이 두 사람의 이런 배경에 대한 꽤 상세한 설명이 잘 드러나 있을 정도로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의 초기 인물 구도는 뒤이어 나오는 사건들에 있어 그만큼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특히 샤를로테라는 작명은 실제 괴테가 큰 감화와 애정을 보인, 샤를로테 폰 슈타인 부인이 떠오르기도 하는데요. 물론 이에 대한 증거는 다소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에두아르트에게는 오토라는 이름의 대위인 친구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가 한 몸일 정도로 깊은 우정을 보이고 있는데요. 괴테가 간접적으로 계급 갈등을 서술했던 4장의 "귀족과 제3신분, 군인과 민간인의 대립"과 같은 사회의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에두아르트와 대위의 우정은 그만큼 견고하고 중요합니다. 대위를 위해 아내인 샤를로테를 끈질기게 설득할 정도로 에두아르트의 그에 대한 태도는 진실일 정도인데요. 약간의 복선처럼 샤를로테는 대위의 집 방문을 달가워하지는 않지만 결국 4장에서 이 세 사람은 죽이 잘 맞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오틸리에라는 샤를로테의 조카가 성급한 자신의 딸에 의해 기숙학교에서 일종의 괴롭힘과 그녀를 위한 교육의 재검토 등을 이유로 두 사람의 집에 오게 되는데요. "차분하고 편견 없는 사고방식의 소유자"인 샤를로테가 자신의 남편을 향해 보이는 깊은 애정과 다름 없는 진술인, "무관심과 혐오의 감정이 보란 듯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진실한 애정이 얼마나 소중하게 평가되어야 하는지"가 마치 뒤의 큰 파국을 예견하면서, 에두아르트가 드디어 눈을 뜨게 된 그 사랑의 대상이 역설적으로 그녀의 아내가 아니었다는 진실은 뼈아프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뒤에 연이어 나오는 샤를로테와 대위의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도 젊은 남녀가 가까이 몇 날 며칠을 함께하며 쌓는 신뢰와 깊은 이끌림은 일종의 진정한 사랑에 대한 본질을 괴테가 마치 독자들에게 오히려 묻고 있는 듯 보입니다. "우리는 깊게 사랑했지만 결국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화자를 통한 괴테의 짧은 소회는 샤를로테와 이 관계에서 다소 냉정함을 되찾은 대위의 태도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가 살고 있는 지역의 많은 분쟁과 갈등을 몸소 나서 해결한 미틀러는 기존 기독교적 결혼관을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다만 여러분이 괴테의 이 장편에 무엇보다 편견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부분은 각기 다른 네 남녀의 파국을 견지하면서 판에 박힌 도덕 관념과 그것을 강요하는 세태에 대해 우선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오틸리에의 행적과 그녀의 감정선을 이 곳에서 전부 다룰 수는 없겠지만 괴테가 보이는 오틸리에에 대한 애정은 어느 한 사람을 그저 오해와 편견으로 평면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흡사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오틸리에가 얼마나 진정으로 에두아르트를 사랑했는지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충격적으로 드러나기도 하는데요. 소설의 서사적 관점에서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를 그저 단순한 혼외 관계로 치부할 수 없는 여러가지 이유가 마찬가지로 극에서 존재합니다. 물론 샤를로테와 에두아르트의 친우인 대위의 거의 불륜이라고 볼 수 있는 그 관계를 빗대어 공격적으로 분석할 수도 있겠지만 앞선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 두 사람의 사랑은 서로 간에 깊은 본심이 바탕이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괴테는 의도적으로 오틸리에에 대한 인물 묘사와 주변 인물들 간의 관계를 통해 약간의 함정을 설치해 놨기에 소설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성녀'를 배경으로 나오는 회화극과 그것에 대한 설정 자체를 독자들이 유심히 살펴봐야 할 부분이 분명 존재합니다. 덧붙여 사견이지만 이 오틸리에라는 괴테의 인물 조성은 어떻게 보면 여성 작가가 그린 다른 여성 캐릭터의 인물 설정보다도 더 여성에 가깝고, 내면의 놀라울 만한 도드라진 감수성을 엄청나게 만들어 낸 점은 아마도 괴테의 특출난 점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는 그의 다른 작품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도 이러한 부분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저는 이 작품의 결말에서 드러난 에두아르트에 대한 오틸리에의 애달픈 진심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앞선 부분에서 치밀하게 짜놓은 괴테의 서사적 판에 감탄을 금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더욱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부분은 주변에서 선한 의도를 내세우며 관계를 맺고 있는 가운데, 그저 재미와 호기심 따위로 사람들 간의 관계를 파탄으로 내모는 인간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선택적 친화력이라는 작품은 인물 간의 관계와 이들이 나누는 대화와 행위 전반이 맹목적인 관념으로 흐르지 않아 어떻게 보면 극을 이루는 흐름이 꽤나 명료하고 단순합니다. 그 와중에 등장하는 백작과 그의 불륜 상대인 남작 부인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조종하면서 스스로의 의도에 맞게 그저 호기심과 재미로 터무니 없는 조언과 조정을 일삼는 인물"인데요. 이러한 행동을 벌이는 그녀와 같은 인간들은 자신의 행동을 무엇보다 선의로 포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할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못지 않게 오틸리에에 대한 판단도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 놔야 할 것 같은데요. 아마도 이 작품을 쓴 괴테 역시, 이 부분에 있어 해석 상의 여지를 자신의 의도대로 따로 만들어 놓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런 인상을 받았는데요. 물론 이 소설은 무엇보다 '사회적 소설'답게 모두에게 인간 관계 전반에 대한 열띤 토론과 대화의 기회를 마련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1부 4장에서 화자인 샤를로테가 "여기서 말하는 친화력이 라는 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라고 묻는 장면이 있는데요. 앞선 대위의 발언이 구체적으로 친화력을 뜻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초입부터 그녀가 친화력이 무엇이냐는 질문 이전에는 이 '친화력'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샤를로테의 저 질문이 맥락 상 무조건 뜬금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번역상의 문제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누가 더 보태 주고 더 받았는지 계산할 수 없을 만큼 서로 간에 신세를 많이 지고 있소."

"당신네 여자들은 이런 식으로 나오기 때문에 당해 날 수가 없소. 처음에 조리 있는 말로 우리가 반박할 수 없게 하고, 이어서 사랑스러운 말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따르게 하고, 다정다감한 태도로 우리가 당신네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만들고는, 마침내 예감 운운하며 우리를 숨막히게 만들고 마는거요."

무관심과 혐오의 감정이 보란 듯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진실한 애정이 얼마나 소중하게 평가되어어야 하는지를 그녀는 살아오는 동안 충분히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긔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다루지요. 인간은 동물과 식물, 원소와 신들에게도 자신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제멋대로 같다 붙이고 말아요."

"부부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가는 자, 말이나 심지어 행동으로 윤리 사회의 근본을 해치는 자는 내가 그냥 두지 않을 거요."

이 여자는 누구보다도 잘 자제할 줄 알았는데, 이러한 자제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주 특별한 경우에도 평범해 보이게끔 위장해 주는 법이다.

샤를로테는 천성이 온화하고, 결혼 생활에서도 의도적으로 긴장감을 조성하는 일 없이 사랑스러운 연인의 태도를 지키는 여인들 중 하나였다.

순결한 감정에 싸인 채 바라 마지않는 행복의 길을 가는 오틸리에는 에두아르트만을 위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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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9
케빈 패스모어 지음, 이지원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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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패스모어는 영국 워릭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맨체스터 대학에서 강사로 경력을 쌓은 뒤, 현재 카디프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현대 유럽사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지난 유럽 제국주의 역사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갖고 있기도 한 데요. 여기에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전체주의, 즉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왔고, 프랑스의 경우는 1945년 이후에 진행된 프랑스 정치의 전반적인 맥락을 영국 지식인으로서는 드물게 꽤 해박한 이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최근까지 준비 중인 대전 당시, 마지노선을 아우르고 있는 '알자스-로렌 지역에서의 프랑스 군인과 민간인 연구'는 이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또한, 그는 1870년 이후 유럽의 극우라는 다소 민감한 주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거침없는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Fascism : A Very Short Introruction, Second Edition"으로 지난 201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패스모어의 이 글을 일독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히틀러의 나치즘이 등장한 배경에는 제국주의 경쟁에서 뒤쳐진 후발주자라는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비롯된 굴절된 분노가 그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요. 또한 4장에서, 히틀러가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이 절멸되어야 전쟁이 끝난다"고 공언했던 점과, 5장에서 히틀러가 "영국의 인도 지배"를 인종주의적 차원에서 이해했다는 분석은 어느 정도 짐작되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런 진술을 접하게 되니 정치 전반에 대한 깊은 회의가 들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저자는 히틀러가 어느 정도는 무솔리니의 그림을 참고하기는 했지만, 다소 명백하게 그와 무솔리니가 다른 점은 지극히 인종주의적이었다는 점입니다. 600만이 넘는 유대인들을 '가스실 절멸'로 처분했던 역사는 그 자체로 충분히 비극적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프랑스의 극우 정치를 이끄는 자들이 '히틀러의 이 유대인 절멸'을 수정주의적 시각으로 재편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작금의 현실이 실로 믿겨지지가 않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글 후반부에 저자는 유럽에서 불고 있는 '극우 정치'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기도 합니다. 1945년 이전의 파시즘이 지금의 극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명백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들 일부가 "훌리건과 스킨헤드의 정치학에 대해 공감하고 있다"는 패스모어의 평가는 실로 암울한 유럽 정치를 끄집어 드러낸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외에도 패스모어의 이 논저는 다른 어떤 글보다 과거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에서의 정치적 대두와 집권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진술하고 있는데요. 특히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주변의 국가들에게 참고 사항이 되었고, 당시에 공산주의 혁명에 두려움을 갖고 있던 비슷한 부류의 정치인들을 포함한 유럽의 정치 지형에 있어 매우 불행한 역사가 되었습니다.특히 오랫동안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지독한 편견인 "반유대주의"에 있어, 파시즘 정치가 동일한 연대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극우 포퓰리즘 내지는 극우 정치가 드러내는 이슬람 이민자들에 대한 배타적 편견, 내지는 전자와 다를 바 없는 인종주의에 경도되어 있다는 점은 단순히 지금 정치가 파시즘이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져 물을 계재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특히 당시에 '코포라티즘'으로 교묘히 포장된 파시즘이 거대 자본가들을 포함한 자본가 계층에 있어 '사회주의 혁명'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지렛대로 삼았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그 모습 자체'가 더 악랄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지금 시점에서는 파시즘과 파시스트라는 단어 자체가 일종의 멸칭으로서 쓰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파시즘과 전체주의 정치에 경도되었거나 지지하는 세력들이 오늘날 극우가 내포하는 폭력의 문제와 인종주의를 희석하는 데, '실체가 없다'는 식으로 나아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다음으로 놀라웠던 점은, 최근 이탈리아에서 베를루스코니와 연합했던 AN, Allenza Nazionale의 전신, 이탈리아 사회운동당 (Italian Socal Movement, MSI)이 무솔리니의 그늘에서 시작된 정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역사에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한 이탈리아 정치가 마치 '극단적인 돌연변이'처럼 현재에도 이르러 이탈리아 정치를 베를루스코니와 함께 막장으로 이끈 것인데요. 우선 이탈리아의 민주주의를 과연 어떻게 인식해야 될지도 문제지만, 여기서 분석되고 있는 유럽의 뉴라이트 New Right 처럼, 극우 정치의 토양이 먼 외부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매우 심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패스모어는 최근의 미국 네오콘이 극단적인 시장 자유주의를 옹호했다는 점에서 극단화 된 보수 정치의 양상이 유럽과 미국에서 상이하다는 해석도 첨부되어 있었는데요. 최근까지 프랑스의 신자유주의가 극단적인 양상을 띠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이들 극우세력이, "민주주의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현 상황이 실로 근심이 되었습니다.

끝으로 과거 독일에서의 나치즘은 이것을 수행한 대부분의 나치들이 인종주의와 더불어, 동성애 혐오에 빠져 있었던 점은 그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과거 대부분의 나치들이 '부르주아의 도덕성'을 여실히 경멸해 마지 않았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계보를 이은 작금의 극우 포퓰리즘도 그와 같은 전제로서 거의 일치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더불어 '우생학'적인 맥락에서 인간을 분류했던 점도 동일하고 앞서 언급한 반유대주의와 이슬람 혐오를 비교해 본다면 과거의 파시즘과 지금의 극우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 있는데요. 나치와 전체주의적 폭력은 자신의 지난 과거를 전혀 반성하지 않은 카를 슈미트와 같이 오만한 태도로 점철되었습니다. 이에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성찰하는 존재'로서의 모습이 여실히 결여된 수정주의적 입장과 같은 왜곡된 현상이 극우 정치의 계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후반부에 도출되고 있는 저자의 조언처럼 우리가 '정치적 변별력'을 통해, 20세기 파시즘이 남긴 정치에 있어서 그런 침식을 과연 유럽과 민주주의 정치 전반이 극복할 수 있으리란 희망은 아직 아득하기만 합니다. 특히 여전히 사회진화론을 비롯한 사회다윈주의를 옹호하는 세력들이 있고 그러한 영향력이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는 우리의 민주주의와 작게는 기본적인 학문적 입장에서 사회학의 건전성을 해치는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는 단순히 학문의 자유라는 측면에서의 막연한 권리가 아니라 이를테면 교육 받은 시민이 이를 구분해 내고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요. 따라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현실 정치를 보다 건전하고 올바르게 만드는 시민의 의무를 잊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파시즘의 정의는 파시즘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수만큼이나 많고, 그중에서 어떤 정의가 옳은지에 대해서도 합의된 바가 없다.

파시즘은 기본적으로 산업혁명 이전의 엘리트 세력과 프티부르주아지, 그리고 농민의 결속에 기반을 둔 반 근대 운동이었다.

전체주의 권력은 (가족, 교회, 노동조합 등) 모든 대안적 연대를 파괴하여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고자 한다.

보편적 법칙으로부터 도출된 설계도에 따라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는 계몽주의 사상은 분명 파시즘에 일정 부분 반영되었다.

그때까지 대학의 교수 사회를 지배하던 변호사들과 의사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는 경향이 특히 심했고, 앞서 살펴본 인종주의, 우생학, 심리학, 역사학 분야의 사상들에 관심이 많았다.

의사들과 변호사들은 그들에게 신적 권능을 부여하는 것으로 보인 우생학 이론을 옹호했다.

반면에 파시즘은 대중에 기반을 둔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부상과 이들이 이끄는 대중 정당을 전제로 한다.

유럽 보수주의의 새로운 특징으로 부상한 이들 대중 정당은 파시스트를 모방하고 그들과 경쟁했지만, 기존의 권위 주체에 복종했고 독점적 지위를 얻지 못했다.

르 펜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수정주의적‘ (즉 홀로코스트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시각에 동조한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뉴라이트는 한 민족의 고유한 특질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소수족에 대한 차별이 불가피하며, 그것은 모든 인종이 자신의 순수성을 지킬 권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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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주의 - 민주주의는 어떻게 자유주의 없이도 다양성을 지키며 번영하는가
조사이아 오버 지음, 노경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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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이아 오버는 미국내에서 저명한 고대 그리스와 관련된 역사학자이자 고전 정치 이론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미네소타 대학을 거쳐, 미시간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에 몬타나 주립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서 고대사를 가르치다, 현재는 스텐포드 대학의 차코풀로스-코우날라키스 교수이자, 동대학의 고전 및 정치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고대 그리 역사와 철학을 현대 정치 이론과 연계하는 것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 더해 그는 현대 민주주의를 아우르는 '민주주의 이론'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지금 소개할 책과도 관련되어 있기도 하지만 '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주의'를 학문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Demopolis : Democracy before Liberalism in Theory and Practice"로 지난 201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1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글의 제목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듯, 저자의 이 글은 '데모폴리스'라는 진정한 민주주의 실험을 통해, 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주의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더불어, 이러한 작업이 현재에도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분석적 논증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지금도 많은 시민들은 자유주의가 관여하지 않는 민주주의 자체에 대해 어느 정도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을 겁니다. 또한 의도적인 신자유주의적 작업에 의해, 시민의 삶에서 정치는 쓸모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믿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겠죠. 하지만 아주 표면적으로 관찰해본다 하더라도, 고대 아테네부터 시작된 민주주의의 역사는 인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정치적 유산임은 분명합니다. 여기에 저자는 대다수 시민들이 실질적으로 원하는 번영(경제적 번영을 포함한)과 이들을 위한 안전한 삶에 대한 욕구, 더 나아가 인간 존엄과 평등 그리고 자유를 우리 민주주의가 지난 역사를 통해, 충분히 보장해 왔다는 점을 증명하는데 글 전반에서 이를 논증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과거에서 전통적인 자유주의는 일전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분석한 바와 같이, 기본적인 도덕주의를 비롯, 공동체 인식에 대한 필요성까지도 포함했던 것으로 인식되는데요. 하지만 오늘날의 이 (변형된) 자유주의가 시민들의 삶을 보장하는 최소한의 공공재와 이를 위한 기본적인 정부의 필요성 등을 부던히 공격해 왔던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특히나 오늘날의 자유주의가 모두를 위한 자유주의가 아니라, 돈과 권력을 가진자들이 민주 정치 하에 그렇지 않은 다수의 하위 계층에게 참정권이라는 명목으로 발목을 붙잡히지 않도록 최소한 반세기 동안 고도로 고안되어 왔다는 점은 이것이 '날 것'과 같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일 겁니다. 이는 지지 파파차리시가 소개한 '모두가 평등한 자유'에 위배되는 본질적인 측면이라 볼 수 있을 텐데요. 이 부분에도 저자 역시, 글의 7장에서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는 '자기 통치를 위한 제도와 그 실천'에 있어, 어떻게 하면 엘리트 독점을 방지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심은, 기본적이면서 선언적인 시민들의 권리를 보장한 헌법의 개념들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부합하고 보장될 수 있을 것인가를 심층적으로 고찰해봐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비록 변질된 자유주의가 이를 기피하는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이 책이 쓰여진 주된 목적과 다름없는 2장의 서두는, "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정에 대한 정치 이론이 그저 유토피아적이거나 또는 다른 식으로 이상적인 수준에 머물지 않고 현실성을 갖추려면, 반드시 그것의 실현 가능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점은 보수주의자들이 정말 흔하게 말하는 '자유 민주주의'라는 문구에서 어떻게 보면 자유주의가 없는 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다는 식으로 간혹 해석되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사회정치적으로는 다소 별개의 관념이고, 지금처럼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에 사실상 봉사하는 형태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은데요. 물론 이 점은 엄밀히 보자면 자유주의 때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의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자유주의가 없는 민주정의 비용과 수익을 가장 쉽게 알아보는 방법은 자유주의적 가치가 헌정 질서에서 중시 되기 이전의 한 공동체의 민주정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해 볼 수 있을 겁니다. 특히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시민 사회에서 시민들의 삶을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점은, 바로 "안전, 풍요 그리고 비폭정"입니다. 이 필수적이면서 우선적 가치들을 자유주의와 연계해 해석해 보면, 과연 자유주의만으로 안전과 풍요 그리고 비폭정을 시민들에게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로 반문해 볼 수 있을 텐 데요. 물론 오늘날 현대 정치와 그것을 구성하는 이론 체계들은 그저 단순히 취급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도 분명 존재할 겁니다. 더욱이 자본주의가 체제 전반에 강고하게 자리 잡고 나서는 그 양상이 더 복잡해졌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공화주의에 디소 회의적인 홉스조차도 자신이 옹호했던 군주정과 절대 권력이 과연 시민들이 요구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말을 아꼈던 사실은, 상반된 시각에서 민주주의는 과연 앞선 자유주의와 어떻게 다를 것인가에 대해 내심 고민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타인을 지배하고 스스로도 지배받는 체제로 요약해 볼 수 있는 데모폴리스 실험은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의 당위이기도 한 앞선 3가지의 사활적 가치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또한 저자의 일관된 논증 가운데 시민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서도 이론적인 고찰을 진행합니다. 따라서, 3장은 바로 이러한 내용들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민주정의 필요조건이기도 한, "정치적 자유, 정치적 평등, 시민적 존엄"은 결국 현실적인 시민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판단됩니다. 전제 정치나 절대 권력에 의한 폭정을 방지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정치적 자유와 정치적 평등 임을 감안해 본다면 '모두가 모두를 지배하는' 정치적 참여를 막는 빗장을 방지하고, 이렇게 규명된 체제 전반을 시민들이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해야 하는 지를 깨닫게 하는 '교육의 필요성'으로 4장까지 논증은 이어집니다. 물론 민주주의 체제가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정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면밀한 정치적 작업이 필요하기도 한 데요. 사회적으로 용인된 공공재에 대한 접근의 문제에 있어 어떻게 시민들을 규율할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이고, 정치적 공동체와 이를 기반으로 한 민주정 전반의 필요성은 시민들이 최소한의 의료와 먹거리 및 주거를 지원할 책임이 사실상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점으로 더불어 인식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보장을 위한 정부의 책임과 그 필요성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도록 시민 모두가 노력해야만 하기 때문인데요. 결국 저자의 논법대로 민주정 자체가 모든 시민들의 건전하고 자발적 참여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통치하는 대전제와도 여실히 맞닿아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6장에서 도출되는 힘이 없는 사회적 하위 계층의 참정권이 엘리트 지배 체제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는 비대칭적 권력화하라는 반민주주의에 있어, 시민이 끊임없이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7장 후반부에 '시민들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된 부분은 이를 달리 해석해 보면,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민주정이 기반하고 있는 시민의 권리에 대한 인정과 보장을 우리 모두가 이를 명백히 자각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것'에 그 본질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와 관계된 민주주의 체제 하에 자유와 평등의 그저 터무니 없는 긴장은 가벼운 문제만은 아닙니다. 물론 극단적 자유 지상주의와 극단적 평등주의라는 양 극단의 문제는 당연히 인지할 필요가 있겠죠. 특히나 부권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극단의 평등 그리고 자유 시장 자유 지상주의 Free Market Libertarianism 이라고 사실상 해석되는 자유 지상주의는 끝내 민주정의 좋은 점들과 거리가 멀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신자유주의자들이 거의 자유 지상주의자들과 다름없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민주주의가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공동체에 대한 인식, 시민들이 가져야 할 도덕률 그리고 사회 부조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들이 역시나 자유 지상주의자들이 지극히 꺼려하는 점이라는 부분의 해석은 거의 명백한 편입니다. 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자유 지상주의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는 일련의 주장들은 바로 이러한 인식에 기반해 있는데요. 하지만 민주주의가 다원주의적 합의틀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과 어쩌면 대치될 수도 있겠지만 맹목적인 자유 지상주의를 여느 다원주의적 시각에 부합하는 고유한 사상으로 취급해야 될지는 어쩌면 토론이 있어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종래의 데이비드 런시먼의 평가대로 민주주의가 겉으로는 불안해 보이는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내실은 안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은 민주주의의 이점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결국 우리가 인식하는 자유라는 개념이 그동안 꾸준하게 많은 화자의 발언대로 각광을 받아왔던 반면에 또다른 민주주의적 가치인 평등은 그렇지가 못했는데요. 저자가 잠깐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 '혁명의 기운'이라는 것에 착안해, 터무니없는 이념으로 몰아세워 평등 자체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불안한 무언가로 몰아온 작업들 자체는 다소 유감스러운 부분입니다.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와 그것을 떠받치는 능력주의가 한 팔을 거들었던 것이죠. 


끝으로, 저자는 이런 민주주의 하에 '민주정의 좋은 것들'이 상당함에도 체제의 한계가 될 수 있는 '엘리트 독점 상황 혹은 과도한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지그문트 바우만이 미국에서 지난 몇 년 간의 지나친 안보 위협 상황을 사회에 주입해, 엘리트들이 사법과 공권력을 틀어 쥐어 사실상 시민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겠느냐는 우려를 표명한 바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지 오웰이 그려낸 이 디스토피아가 아주 허무맹랑한 것은 아닐텐데요. 더욱이 유럽에서 극우 포퓰리즘에 의한 파시즘의 망령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이는 마찬가지로 터무니 없는 소리가 아닐 겁니다. 즉, 글의 8장을 조금 과도하게 해석한다면 그동안 민주주의 체제하에 마련된 자유주의적 제도들이 다수의 시민들을 위한 것이 되지 않을 때, 즉 헌법과 사법 제도가 다수 시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인데요. 이는 서로의 관계가 여실히 상호의존적임을 감안해 본다면 그저 망상으로 그칠 문제가 아니기도 합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 정치적 평등, 인간의 존엄은 공익과 공동체 인식에 기반한 체제 하에서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존 롤스의 반대 급부로 여겨질 수 있는 사적 이익 추구, 즉 공동체 이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의 사적 이익 추구는 그만큼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맨 처음에 제가 '지금의 자유주의는 변질되었다'고 언급한 배경에는 과거의 '전통적 자유주의는 그렇지 않았다'가 마땅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부 국가의 지배 계급은 자신들의 배타적 자유라는 명목하에 민주주의를 그저 시녀로 부려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데 이용하고 있다는 현실은 마찬가지로 그저 공상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6장에서 이를 대변하고 있는데, "오직 엘리트들이 미리 자신들의 지배에 무해한 의견이나 사전에 허가한 의견 몇 가지 만을 놓고 시민들에게 투표하도록 한다면, 그런 민주정은 허상이다."라고 밝힙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의 7장과 8장은 눈 여겨 볼만하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8장에서 민주적 체제를 떠받치는 자유주의적 관념의토대가 누군가에게 이용 당할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한데요. 인간의 합리적 이익 추구라는 것이 과연 규명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고, 반대로 하나의 사례로 등장하는 비폭정이면서 비자유주의적인 체제가 과연 가능할 것인지도 의구심이 듭니다. 따라서 한 가지 확실한 부분은 자유주의는 바뀌어야 하고 동시에 민주주의는 조금 더 독립적으로 홀로서기를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근래들어 꽤나 오랫동안 이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여러 역사적 사례들과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저자의 제언들에 쉽사리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제 서평이 빈약하여 '인간의 존엄'에 대한 저자의 명민한 분석을 담지 못했는데요. 이는 순전히 저의 얄팍한 해석에 기인한 것입니다.


-비폭정이 일종의 공공재라는 저자의 인식은 정말 놀랍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도덕적 자유주의는 원초적 민주정과 충분히 양립할 수 있다고 믿는다.

원초적 민주정은 시민들이 전체적으로 치배받지 않고도 안전하고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시민들 자신에게 좋은 정체이다.

이는 (민주정에서 다른 시민의 존엄을 보호하고 합리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 곧 타인을 모욕하거나 어린애 취급 infantalization 함으로써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려는 오만불손한 개인들의 행태를 어떻게 통제할지라는 고질적인 사회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이 된다.

법의 평등이란 법, 법적 절차에 접근하고 법적 보호를 누리는 것에서의 평등을, 발언의 평등이란 숙의의 현장에 참여하는 것에서의 평등을, 즉 공적 사안에 대해 발언하고 타인의 발언을 청취할 평등한 권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민주정의 조건인 정치적 자유와 평등이 다수가 아무런 제약도 없이 휘두르는 권위에 의해 잠재적으로 훼손되었음을 깨달으면서, 시민들은 이러한 필요성을 (체제가 갖춰야 할)미덕으로 바꿔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항구적으로 안전하고 풍요로운 국가를 지켜 나가기 위해서는 시민들에게 체제의 정당성을 납득시키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원초적 민주정에서 능력들의 발휘라는 가치가 실현된다는 것만으로는 체제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완전하지 않으며, 원초적 민주정은 안전과 풍요를 마련해 주는 그 능력에 기반하고 있다.

원초적 민주정은 시민 교육의 커리큘럼 속에서 민주정이 변화무쌍한 조건들하에서도 어떻게 안전과 풍요를 마련해 줄 있는지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력을 가진 내용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개인들이 자신의 생존 자체보다 스스로 매긴 자신의 우월성을 표현하며 타인을 모욕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면, 이런 개인들의 행태는 리바이어던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

자유와 평등은 고대 그리스의 정치 저술가들에 의해 민주저의 가치일 뿐만 아니라, 민주정의 핵심적인 관행들 practices 로서 널리 인식되었다.

시민이 공적 사안에 대해 대단히 중요한 정보를 제시하면서 주장하고 있음에도 존중받지 못한다면, 또는 그가 자신의 의견을 갖기 위해 필요한 정보에 어떤 이유로든 접근이 제한된다면, 그런 민주정은 엉터리다.

국가기관이 시민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오직 엘리트들이 미리 자신들의 지배에 무해한 의견이나 사전에 허가한 의견 몇 가지만을 놓고 시민들에게 투표하도록 한다면, 그런 민주정은 허상이다.

재분배를 위한 공공복지 정책을 통해 적정한 먹거리, 보금자리, 안전, 교육, 의료 서비스를 보장해 시민들이 의미 있는 개인적 선택을 내리고, 스스로 위험성을 평가하며,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께 하는 일은 시민적 존엄의 유지에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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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데이션 파운데이션 시리즈 Foundation Series 1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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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아시모프는 일종의 장르 소설이라 볼 수 있는, SF 소설계에 있어, 로버트 A. 하인라인과 아서 C. 클라크와 더불어 빅3로 불리는 거장입니다. 그는 미국 뉴욕 출신으로 뉴욕시 공립학교에서 수학했고, 잠시 뉴욕 시립 대학에 다니기도 했는데요. 그는 당시 미국 대학계의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컬럼비아 대학의 의학 과정에 지원했지만 두 차례나 거절 당한 끝에 동 대학 화학 대학원에 받아 들여집니다. 이후 종신 부교수에 이를 정도로 그는 해당 학과에 큰 기여를 했는데요. SF 소설의 초기 경력이라고 볼 수 있는 그의 작품 활동은 1939년과 1950년의 창작으로 시작됩니다. 그 중에 아시모프에게 가장 큰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은 파운데이션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기존 소설에 대한 속편과 전편에 몇 편을 더 출판해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통일된 시리즈로 자리매김한 파운데이션은 집필 시기상의 차이로 인해, 몇몇 매니아들에 의해서 각각의 편이 독립된 장편으로 인정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SF 소설 작업 외에, 아시모프는 일반 대중들에게 열린 강연으로도 명성을 떨친 지식인기도 한데요. 특히 대학에서 일할 때, 간간히 강연한 일화들이 아직도 회자되기도 합니다. 이외에 아시모프는 과거 뉴딜 정책 기간의 민주당 정부에 대한 확고한 지지자였고, 이후에도 정치적 자유주의자로 남게 됩니다. 그는 말년에 위험한 심장마비를 겪게 되는데요. 1983년 12월, 뉴욕대 메디컬 센터에서 삼중 우회 수술을 받다가 수혈로 인한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개인사에 있어 상당히 불행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1992년 4월 6일 맨해튼에서 사망했을 시, 사인은 신부전이었습니다. 그의 이 장편 시리즈는 1951년과 1979년에 기획되어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여러 판본의 번역 작업 끝에, 2013년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파운데이션을 지난 2009년 경에 읽기 시작하다가 끝내 완독은 하지 못했는데요. 이 황금가지 판 이전에 나온 현대정보문화사판(2003)을 갖고 있음에도 새로운 번역으로 읽고 싶어 이 판을 구입해 읽게 되었습니다. 조금 이른 평가일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에서 위대한 예언자이자 선구자로 등장하는 해리 셀던을 고찰해보니, 작가인 아시모프가 귀스타브 르 봉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나 추측해 보게 되었는데요. 아시모프에게 영향을 받은 폴 크루그먼이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의문이기도 합니다만 이 작품으로 관통하는 역사심리학이라는 주제는 귀스타브 르 봉의 사회심리학과 닮아있고, 또한 그가 군중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해왔던 점을 감안해 본다면, 파운데이션에 보이는 군중심리학의 일부 흔적도 마찬가지로 이런 분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도 읽힙니다. 물론 이 작품이 종래에 알려진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인데요. 제국의 멸망이 예정되어 있다는 논법은 뭔가 '역사적 종말론'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것의 본질은 아마도 역사가 증명하는 완벽하고 영구적인 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분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이 1편은 '파운데이션'의 기초 작업으로, 앞서 언급한 해리 셀던이 준비하고 활약하게 되는 부분은 좀 더 뒤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 도입부에서는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무엇보다 '과학이 가져다 주는 광범위한 이득'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광대한 영역의 제국조차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바로 과학이라는 점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종교와 과학 또한 그저 맹신에 이르게 되면 인류가 어떠한 결과를 받아들이게 될지 예측해 볼 수 있는 장면들이 여럿 나오는데요. 이것을 기반으로 전통적인 국가의 영향력은 생산 수단과 동시에 무력을 가능하게 하는 '특별한 자원'에 달려있고 그것이 설사 중앙과 지방에 따르는 다소 느슨한 중앙 체제라고 할지라도, 큰 형태로서 엘리트 지배 체제 전반을 포함한 귀족주의적 신분 체제 역시도 앞의 진술과 밀접하게 관련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아시모프가 이 장편 시리즈의 큰 줄기로서, 정치 체제의 기본 맥락을 시민 혁명이나 공화주의에 주안점을 둔 것이 아닌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초기 터미너스 정착 과정에서 파운데이션 조직과 소위 시민 정부 사이의 원초적인 정치 갈등이나, 무섭게 등장한 샐버 하딘의 그 놀라울 만한 정치적 수완은 어떻게 보면 보편적 시민주의 와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눈을 크게 뜨게 만드는 개인의 위기 상황에서의 능력은 어떻게 보면 셀던이 극적으로 예견한 위기의 긴장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바로 이 '셀던 위기'가 어떤식으로 규명되고 분석될지는 좀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인류 역사의 영속성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인물들의 서사는 마치 역사의 주(主)가 인간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까지 들게 합니다. 보편적 인간보다 체제 자체가 숭고하다고 항변했던 수많은 파시스트들이 떠오를 정도로, 지금까지 아시모프가 보인 도입은 뭔가 불명확한 부분이 있습니다.

끝으로 그것이 정치적 술수나 연막인지는 모르겠지만 과학의 교조화와 국가를 지탱하는 주요 권력인 전력에 대한 파운데이션 측의 개입은 실로 소름끼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과학을 일부 소수의 전유물로 만들어 파운데이션이 이것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모습은 다소 충격적이고, 이번 편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인간 자체에 대한 극심한 호불호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서사는 혹여 작가 본인이 갖고 있었던 인간에 대한 부정적 평가인지는 아직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아시모프의 분석을 좀 더 살펴보기 위해 저는 다음 편을 연이어 읽어보려고 합니다. 뭐 통렬한 서스펜스 정도의 감상을 이 작품에서 기대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작품 자체에 있어 뭔가 어두운 분위기가 흐르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그래서 한편으론 더 읽기가 두려워지기까지 합니다.


시회조직이 붕괴하면서 과학은 수백만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질 것입니다. 개개인은 마땅히 알아야 하는 극히 작은 지식만 알게 될 것입니다.

"석유와 석탄으로 돌아갔단 말인가?" 하딘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음에 있다르는 생각은 마음속에 묻어두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태양계였는지에 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유구한 역사의 안개에 파묻혀 버렸다고나 할까. 하지만 학설은 여러 가지가 있지. 시리우스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알파센타우리, 솔, 또는 시그니61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네. 그런데 한 가지 공통되는 점은 모두 시리우스 성역에 속한다는 사실일세.

"사실 지금 정부는 원자력의 무분별한 사용에 대한 규제 방안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네."

"인슐린은 칼 없이도 당뇨병을 치료합니다만 맹장염은 수술이 필요합니다.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지요."

"결코 그렇지 않네. 해리 셀던은 시간 유품관에서 이렇게 말했네. 위기가 닥치는 순간마다 우리가 누리는 행동의 자유는 단 한 가지 행동만 취할 수 있도록 범위를 제한시켜야 한다고."

"또 원자력은 그 이상의 위력을 가진 원자력에 의해서만 정복되지."

"우리는 해리 셀던이 미래의 역사적 개연성을 계산해 놓은 걸 알고 있습니다. 또한 언젠가 우리가 제국을 재건하게 된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고요."

"내가 파운데이션의 보스가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여. 100퍼센트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고. 바로 그게 이번 위기를 극복하는 비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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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토크하다 - 팩트 뉴스를 넘어 토크 뉴스의 시대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85
엄기영 지음 / 스리체어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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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문화방송에 재직 중인 엄기영 기자는 앵커와 MBC 사장을 지낸 엄기영씨와는 동명이인이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엄기영 기자의 간단한 약력도 찾기가 힘들었는데요. 그의 약력과 관련해, 그저 한양대 커뮤니케이션 저널리즘 박사과정을 수료했다는 짤막한 한 줄이 전부였습니다. 저자는 국민일보의 기자 생활로 출발해 언론계에서 근 20여년을 버틴 인물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MBC 백분토론에 관여했고, MBC의 2022년 대통령 선거 방송에도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미국 네바다주립대 UNR의 저널리즘스쿨 방문연구원으로도 이름을 올리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의 이 글은 네바다주립대에서 방문 연구를 할 때, 탈고를 마친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국내 출간은 2022년 1월에 이뤄졌습니다.

유튜브의 등장은 기존 뉴스 미디어의 사실상, 재편을 초래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지난 2007년 이후, 대형 포탈과 공존을 모색하던 각 언론들이 유튜브의 충격적인 미디어 진보로 말미암아 이제는 각 방송사의 뉴스 포맷들이 유튜브에 실시간으로 영상을 송출할 정도로 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이런 뉴스 미디어의 변화를 현직에 있는 사람답게 꽤 객관적으로 다루고 있었는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뉴스 토크'라는 용어의 의미는 투표권을 가진 많은 시민들이 정치 전반을 비롯, 그것을 편집해 알리는 미디어 전체에 대한 변혁을 요구했다고 봐도 크게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에 저자는 1장에서, 단순히 뉴스를 전달하는 것보다, 소위 뉴스 토크의 뉴스와 관련된 이슈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이면에 담긴 맥락을 아는 것이 좀 더 핵심 정보"이기에 이러한 부분을 강하게 원하는 시청자들로 인해, 포맷 자체가 변화되기에 이르는데요. 아마도 이러한 변화 자체는 어떻게 보면 진정한 뉴스에 대한 시민과 시청자들의 욕구가 큰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기본적으로 뉴스를 취급하는 기성 미디어의 변화된 시도는 앵커 스스로가 기자들이 작성한 기사 몇 줄을 읽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두 양자가 '토크 형태'로 자신이 취재한 기사에 대해 좀 더 세밀한 맥락과 숨겨진 의미 등을 화면을 보고 있는 시청자에게 전달하게 됩니다. 이는 뉴스를 보는 시청자들의 좀 더 깊은 이해를 돕기도 하고, 해당 사건이나 이슈에 대해 방송 이후,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고 심지어 댓글을 통한 토론이나 확대된 의견 개진까지 이뤄지게 되는데요. 다만, 이러한 변화는 과거 전통적인 언론을 통해 우리가 수용하고 인정했던 진실에 대한 겸허함과 동시에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즉각적이고 부정적인 개변으로 진행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이런 부정적 변화는 지난 도널드 트럼프 정권의 백악관 선임고문인 캘리언 콘웨이가 적극적으로 오도한 진실에 대한 거부인, '대안적 사실 alternative facts'의 발명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단순히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에 대한 합리화 수준을 넘어, 그것을 둘러싼 사건과 저변에 깔린 맥락을 사실의 존중으로 이어져, 견실한 토론의 무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정치꾼들이 난립하는 최악의 야바위 공연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는 저자가 언급하고 있듯, 유튜브를 통해 영향력과 수익을 얻기 위하여 전혀 사실과 관계없는 내용들을 전방위적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것에 이르게 되는데요. 바로 이 부분에서 일찍이 존 듀이가 강조한 시민들의 정치적 변별력이 무엇보다 필요해지는 시점이 도래했다고 여겨집니다.

저자는 2장에서 홍준표 대구 시장과 유시민 작가의 지난 토론 방송과 이들의 뒷얘기들을 언급하면서 양쪽 진영에 있는 유력 인사들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입장과 해석에 대한 열린 토론을 할 수 있는 부분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물론 홍준표 대구 시장의 토론 방식이 전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유시민 작가가 전에 언급한 것처럼 상대 진영에 어느 정도 토론이 가능한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은 우리 정치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지난날 계몽주의의 유산이기도 한, '진실에 대한 겸허한 태도'는 우리의 정치가 정치꾼들의 이익을 위한 무대가 되었을 때부터 거의 악랄한 방식으로 매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실을 끊임없이 비트는 데 큰 재주를 보였던 인사들이 그저 당과 지지자들에게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그저 존경을 받는 현실은 정치 전반이 시민들의 변별력에 의해 전혀 걸러지지 않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유튜브와 같은 혁신적인 통합 미디어의 등장은 기존 언론계의 큰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물론 이 유튜브의 등장이 앞으로 정치적 진정성을 얼마나 대변할 수 있을지는 상당히 불확실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이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의 극단주의자들의 발호는 마누엘 카스텔이 예견한 미래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미래 세대의 건전한 정치를 위해 얼마나 실효성 있는 진보를 거둘 수 있을지는 마찬가지로 불명확합니다만 진보와 보수 양자가 서로를 위한 건실하고 상식적인 '다양한 미디어 언론'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점은 분명합니다. 극단적인 언사와 그것의 저열한 나르시시즘을 선동해, 짭짤한 수익 만을 거두려는 가짜 미디어들이 범람하는 시점에 우리는 더욱 우리 자신을 교육해야만 하는 이 사활적 의무를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필자가 생각하는 토크 뉴스란, 진행자와 출연자가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대중이 관심 있어 하는 이슈를 전달하고, 의견과 관점을 담아 분석하는 뉴스 형식이다.

다루는 이슈에 대해 진행자가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하고, 패널이 충분한 배경 지식과 자신의 관점을 바탕으로 시원시원하게 답변할 때 듣고 보는 즐거움이 생긴다.

전문성을 가진 진행자들은 대선 주자들의 답변이 부족하면, 어물쩍 넘어가는 게 아니라 묻고 또 묻는 방식으로 파고들었다. 이런 질문 방식은 격렬한 토론이 아니어도, 시청자들에게 속 시원한 대리 만족감을 충분히 줬다.

실제로 많은 연구들은 유뷰브 진행자나 출연자들이 구독자의 정치 성향에 맞는 이야기를 하면, 구독자들은 검증되지 않은 발언이라도 사실로 믿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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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8-22 2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번 알렉스 캘리니콜스의 책도 그렇고 베터님 읽으시는 책들이 제가 관심 가는 주제가 많네요.
막상 읽기는 미루게 되는 어려운 주제라서 대리만족 할때가 많습니다만 ^^; 2장에 나온 홍준표,유시민 토론은 어떤 장면인지 알 것 같아요.ㅎㅎ 각자도생에 팩트 체크는 물론 크로스 체크까지 해야하는 어려운 현실에 놓여 있네요.

베터라이프 2023-08-22 20:54   좋아요 1 | URL
제가 원래는 민주주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찾다보니 정치와 경제 쪽 글을 읽게 되었고, 결국 민주주의의 약화와 심각한 불평등의 주된 원인이 신자유주의임을 알게 되었죠.
사실 말씀하시는 대로, 이쪽 책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여간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니더군요. 결정적으로 아주 재미가 없죠..... ㅠㅠ
그리고 홍준표 시장이 그래도 보수 우파 쪽에서는 토론이 잘 되는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가 유시민 작가에게 하는 그런 낯 뜨거운 수사라고 해야 할까요. 그 얕은 평가에 저는 동의하지 않는 편입니다.
요즘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년에 고민했던 즉, 경제 엘리트들이 정치를 소수의 사적 이익의 무대로 삼아, 자본이 막대한 이득을 취하게 하는 고질적인 사회체제적 문제를 공익에 맞게 개선하는 데 있어 과연 정치와 법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전혀 철회되지 않은 시점에서 언론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시도는 엘리트들이 안보를 위해 시민을 감시하는 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 해악이 될 텐 데요.
과거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으로 인해 세계 민주 정치의 매커니즘이 완전히 변질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윤 대통령의 당선도 바로 이런 맥락 가운데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요. 증오를 부추겨 그것을 정치적 이익으로 삼는 굴절된 정치가 이미 시작되었으니, 과연 이것의 결말이 대체 어디서 어떻게 끝날지 걱정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달리 주변 머리도 없고 할 줄 아는 거라곤 책이나 읽을 수 있는 것 밖에 없으니 앞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 보려고 합니다.
미미님.. 이렇게 매번 구차한 저의 서재에 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글과 함께하시는 삶이 더욱 윤택하시길 바랍니다~
아.. 마지막은 뭔가 쓸데없는 주례사 느낌이라고 보실 수 있는데, 그냥 기분 탓일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