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아웃
마크 엘스베르크 지음, 백종유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마크 엘스베르크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전세계적으로 그의 작품은 수백만 부가 판매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이 '블랙아웃'은 독일어권에서 180여만부나 팔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또한 몇 년 간 슈피겔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랫동안 이름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간단한 이력으로 그는 비엔나 응용예술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광고 업계에서 자신의 전공을 살리기도 했는데요. 동시에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일간지 데어 스탄다드에 칼럼을 쓰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Black Out"으로 201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3월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다만 국내 번역본은 현재 절판된 상황입니다.

제가 이 책을 다 일독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엉뚱하게도 "각 국의 발전소와 발전 설비가 해킹 공격으로부터 과연 안전한 것인가?"라는 의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실 그동안 전문가들의 영역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의 사회에 대한 기여와 능력을 어느 정도는 신뢰해야만 한다고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죠. 병원에서 담당 의사를 믿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작가인 엘스베르크가 가진 의문과도 동일해 보이는 발전소의 설비들의 아키텍처가 독립적이고 고유한 것으로서 자연재해나 혹은 불특정한 해커들의 공격에서 스스로의 안전을 지켜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엘스베르크도 글 한 자락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과거 일본의 후쿠시마도 그 문제가 터졌을 때, 원자력 전문가들은 일관되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이스라엘이 관여한 것으로 추측되는 이란의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공격도 짧게 언급이 되기도 합니다.


현재 유럽이 천연가스에 한해서는 파이프 라인으로 연결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전 유럽이 그렇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요. 그러한 맥락에서 이 소설이 경고하는 유럽 전력망에 대한 공격은 꽤 신빙성이 있는 소재였습니다. 더욱이 "세상에 완벽한 시스템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사는 크게 공감이 되기도 했는데요. 송전선이나 변전소와 같은 곳의 직접적인 공격도 위험하겠지만 오늘날과 같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네트워크 시대에서 해킹의 존재는 참으로 불안한 문제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엘스베르크의 이 소설에 대해 서평들을 남겨주셨지만 개인적으로는 스토리 라인 자체의 특별한 매력이 있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주인공인 만자노와 그와 엮이게 되는 몇몇 인물들의 개성, 그리고 유럽의 주요 도시를 넘나드는 서사는 매력이 될 수도 있겠으나 특별한 반전 없이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 자체는 크게 긴장감이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더욱이 극좌라든지 무정부주의를 언뜻 끄집어내며, 자본주의에 반하여 일종의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테러리스트들의 명분도 현실적으로는 크게 설득력은 없었는데요. 다만, 저들이 상당한 재산을 가진 부유층을 공격해서 자금 마련에 나서는 것과 일종의 발전소에 쓰이는 운영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독점 기업에 해킹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는 등의 일반적인 전문 해커들의 소재는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럽 연합 차원에서 아무런 해결 방안도 꺼내지 못하는 무능력한 상황을 어두운 과거를 가진 일개 시민이 유럽 전체를 거의 석기시대로 몰아가는 심각한 위기를 타파해 나가는 과정은 카타르시스 보다는 의구심을 갖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기자의 조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설 곳곳에 작위적인 설정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기도 했고요. 

끝으로 이 작품은 대체로 무난한 스토리 라인에 어느 정도 예상되는 사건 전개가 대체로 수월하게 읽히는 글이기도 했는데요. 그렇다고 무미건조한 글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색다른 소재에 비해서 중후반의 긴장감이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저에게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블랙아웃이 전유럽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유럽 정치와 전형적인 기업 이기주의에 대한 꽤 흥미로운 서술이 인상적이기도 했는데요, 더불어 다수의 독자들도 느끼셨겠지만 원자력 발전소가 그런 심대한 위기에 처하면 국가가 과연 재빠르게 대처할 수 있느냐에 대해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겼는데요. 이렇게 유사시에 원자로의 냉각을 위해 가동되어야만 하는 디젤 발전기가 만약 제 기능을 하지 않는다면 엄청난 재앙이 될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잖아도 며칠 전에 이와 비슷한 우려를 담은 기사 하나가 어느 언론사를 통해 올라온 기사도 이런 우려를 자아내게 하더군요.



- 본문 535페이지에 등장하는 1986년 학생운동은 아마도 1968년의 68운동을 오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아니면 소설 속의 고유한 장치로서 68운동을 오마주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정치가, 은행가 그리고 경영자라는 칭호를 달았지만 사실은 소수에 불과한 범죄 집단이 인간을 지배하고, 기만하고, 약탈을 자행하고 있잖아, 그런 현실 앞에서 절망을 느끼는 인간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에겐 언제라도 또다시 기회가 주어질거야,

"안전을 영구히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만일 현 상황에서 유럽의 원자력 발전소에 디젤유가 추가로 공급되지 않으면 며칠 후에는 비상 발전 시스템이 멈출 것이고, 이는 원자로 냉각 시스템 가동 중단으로 이어질 것이다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전면 중단시켰다가 신속하게 곧바로 재가동하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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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 주식회사 - 진보는 어떻게 자본을 배불리는가
피터 도베르뉴 외 지음, 황성원 옮김 / 동녘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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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의 국제관계학과 교수인 피터 도베르뉴는 작가 이자 환경 운동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데요. 특히, 1997년에 그의 저서에서 동남아시아에서의 무분별한 삼림 벌채에서 일본 기업이 자행하고 있는 '파괴적인 수단'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전지구적 경제 상황에 있어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소비지상주의가 사회를 어떻게 무너뜨리고 있는지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다른 공저자인 제네비브 르바론은 영국 셰필드대학의 선임 연구원이자 셰필드 정치경제연구소의 연구원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세계 경제의 노동과 고용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특히, 강제 노동 및 현대 노예와 인신 매매가 관련된 불법적인 비즈니스에 관심을 두고 있는 학자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유엔과 정부 기관과 연계하여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적법한 노동 기준을 각 기업들에게 이해시키는 데에도 중점을 두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간단한 서지 정보는 원제, "Prostest, INC"로 지난 2014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3월 도서출판 동녘에 의해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국역된 글의 제목인 '저항 주식회사'는 본래 원제보다 저자들이 밝히고자 하는 오늘날 압도적인 세계 경제와 그것에 마땅히 저항해야 할 글로벌 시민 단체 혹은 진보주의자들의 진면목을 아주 여실히 드러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소위 많은 NGO들이 이제는 다국적 기업들의 직접적인 현금 지원 없이는 자신들의 꽤 특별한 활동이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거대 기업의 기부와 같은 사회 사업과 마찬가지로 더 강력하게 자본주의적 논리를 사회 전반에 강화시키는 역할 만을 아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저자들은 상당한 비판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린피스'와 같은 단체는 다국적 기업들의 막대한 지원이 자신들의 목적과 활동을 위해 중요한 배경이 되었으며, 이러한 단체들을 이끄는 수뇌부들은 자신들을 위한 막대한 활동비 내지 소위 '특별한 노동에 대한 대가'를 여지없이 수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마치 일반적인 기업의 임금 지급 상황과 거의 동일한 것인데요. 거의 대부분이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은 이들 단체들이 이 글의 4장에서도 도출되고 있듯, '1980년 이후 경제적 세계화'에 대한 비판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것은 선명한 도덕적 원칙론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런데 이들이 지원금과 관련해서는 거의 '친기업적인 모습'이라는 부분은 뭔가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과업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저들 단체가 과연 거침없는 신자유주의화에 도덕적 제동을 걸 수 있을지는 확언하기가 어렵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이 책에 오해를 해서는 안되는 부분은 두 공저자가 단순히 앞선 진보적 단체들이 선연한 원칙을 견지하면서 세계 평화와 자연 보호 혹은 인권을 위해 노력한다고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들이 자본주의의 논리를 강화시켜 나가는 첨병이 되고 있다는 점, 오직 그 점만을 부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민주주의 국가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오로지 안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반대의 세력을 '테러리즘'으로 몰아간 3장의 진술과 거침없는 자본주의가 소비주의와 개인주의라는 쌍두마차로 사회를 피폐화 시키고, 많은 시민들이 세대를 거치는 동안 쉬이 인정하고 있던 '사회적 삶'을 오로지 개인의 책임만으로 전가시켜 버린 4장의 진술과, 이렇게 '분명한 민주주의 국가들'이 다국적 기업들과 결탁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맹목적 논리를 강화시키는 등의 6장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분들도 충분히 읽어볼 만한 부분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미 이곳에서도 인용되고 있지만 토마스 프리드먼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주먹 없이는 결코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는데요. 1980년 이후 레이건과 대처에 의해 주요한 국가 경영의 논리이자, 자유 진영의 강화된 자본주의적 요구였던 신자유주의가 사실상 인위적이고 공격적인 정부의 개입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에도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정부의 시장에 대한 개입을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종의 금기로 보고 있지만 실상은 신자유주의가 정부의 손끝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국가의 복지 지출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은 정부가 '보이지 않는 손'이 노니는 연못을 콘크리트로 더 확장하기 위해 만든 특별한 기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동일한 맥락으로 4장에서는 신자유주의가 더 강화한 '개인주의'에 대해 꽤 면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시민성이 위축되고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등장하자 노동자와 약자들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권리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는 진술은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누군가의 삶을 떠받치게 되는 정신적이고 이상적인 조건과 마찬가지로 개인은 스스로의 경제적 조건을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개인주의적 담론과 함께 확산되기에 이릅니다. 자신의 삶은 오로지 스스로의 책임이며, 개인의 여타 불행한 상황에 대해 정부와 사회에 결코 채근해서는 안된다는 소위 '극단적인 개인주의화'는 좀 더 과격한 표현을 빌어, 마땅한 사회 부조와 시민에 대한 사회의 의무를 지구에서 퇴출시켜 버렸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여기 공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저항이 실제로 전무했고 이것을 거의 조종했다고 봐도 무방한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각 시민들에게 내면화 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 진보 세력의 몰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지구와 전세계의 지속적인 진보를 위해 노력한다는 저 수많은 진보주의적 단체들의 '영리화'도 이에 한 몫을 했는데요. 특히, 1장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이들 진보주의 운동들이 자본에 아주 이상할 정도로 '순응'한 것은 전반적인 사회적 책임의 후퇴와 동시에 시민 대다수의 각박한 삶은 기본으로 삶을 전혀 통제할 수 없고, 반대로 '특별한 계층'의 자유 만을 강화시켜 버린 현재의 극단주의적 메커니즘을 잉태했습니다. 여기에는 이러한 '사적 이익화'가 자연스레 공공선을 위한 지점으로 함께 나아갈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맹종과 함께 말이죠.

사실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단순히 어떤 시민 사회의 단편을 변화시키거나 자본주의적 논리를 온 몸으로 받아들인 단순히 소수의 몇몇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주류가 되었던 것은 3장의 일관된 진술에서 정부가 사회의 반대 세력을 공권력을 동원해 지속적으로 무력화 시킨 것에 있기도 한 데요. 일찍이 마누엘 카스텔은 시민들이 정부를 향해 투쟁하게 될 때, 먼저 중무장한 경찰 권력에 대해 두려움을 떨쳐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사회학자의 단순한 언설이 아니라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진보주의적 시민 운동을 사실상 탄압해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특히, 3장에서 아주 상세히 보여지는 캐나다의 사례는 의미 더욱 심장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우리에게는 평범한 민주 국가로 알려져 있는 캐나다가 실로 견고한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했는데요. 이미 캐나다 당국은 각 시민 운동 조직에 '프락치'까지 투입할 정도로 경찰 조직 전반이 잘 갖춰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이를 무턱대고 나무랄 부분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만, 정부가 건전한 사회의 여러 다양한 의견들을 경청하지 않고, 듣기 싫거나 가능하지 않다는 의견을 '반사회적인 주장'으로 몰아가며 민주주의의 아주 기본 원칙인 다원주의를 옥죄는 데 있는 것인데요. 더욱이 근래 주요한 정상회담이 된 G20 회의에서 단순한 피켓 시위도 거부하는 각국 정부의 일관된 태도는 뭔가 시민들을 '예비 폭도들'로 싸잡아 인식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아직까지도 범람하고 있는 여러 서적이나 양심적인 방송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음에도 여전히 철지난 음모론으로 받아들이는 분들도 분명 꽤 많을 겁니다. 우리가 현재 체험하고 있는 '전세계적 경제화'가 1980년대 이전보다 극적이고 차별적인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했다는 인식적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여러모로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데요. 이에 단적으로 경제적 자유화에 따른 극단적인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세력을 기득권으로 놓고 본다면 이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자원과 수많은 인맥들은 평범한 시민들의 그것보다 극단적으로 불균형적인 상황인 것은 자명합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소득을 비롯한 경제 체제 자체로 불균등한 이행이 있는 것인데요. 18세기 이후 축적된 마땅한 시민의 권리 그리고 시민 불복종 운동 등을 사실상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경제가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자체는 우리가 신봉하는 민주주의적 원리에 크게 위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설명을 전부 다 차치하고 지금까지는 신자유주의적 이행 자체가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시녀로 만들어 소위 자유 진영의 금기로 만들기까지 했는데요. 따라서 이 글에서의 공저자들이 도출한 논증에 빗대어 생각해 보면 아마도 대부분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사이비 민주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보수주의가 지금에서는 진정성이 없는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목도할 미래에는 헌팅턴 류의 터무니 없는 '민주주의의 과잉'이 아니라 그야말로 과두제로 나아갈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극우 포퓰리즘이 전사회에 일으킬 난장은 덤으로 말이죠. 



-극단주의자들 혹은 극단주의 정치가 주류 정치에 점차 머리를 내밀고 있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는 자신들의 이익이 될만한 것에 마땅히 베팅을 하게 될 텐 데요. 이 책의 중요한 통찰로서 2001년 이후 미국을 비롯한 민주 국가들이 시민 연대와 정부에 대한 비판을 공권력으로, 더욱이 중무장한 병력을 사용해 이를 막아왔다는 점에서 우리의 민주주의를 향한 새뮤얼 헌팅턴이 '민주주의의 과잉'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권위주의 국가들이 입과 얼굴로는 민주주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실로 위기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와 좀 더 강력한 공존을 원하는 기득권 정치가 강화된다면 말이죠.
   



하지만 인권,성평등,사회정의,동물권,환경운동 조직들의 의제와 담론, 그리고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와 제시하는 해법들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도전하기보다는 순응하는 경향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군대와 민간 경찰을 갈라 놓았던 구분선이 갈수록 흐려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희망과 분노, 그리고 참혹함의 사유화는 공동체를 갈가리 찢어 놓아 사회 조직을 지탱하기 어렵게 만든다

가령 여성운동 조직들은 나이키, 골드만삭스 같은 기업들과 협력하여 개발도상국 여성들을 위한 사회경제적 기회 마련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해 왔다

유명 브랜드 회사들은 젠더와 여성의 권리 문제를 중심으로 비정부기구와 공동의 기구를 꾸리고 재정을 지원하며 이를 관리하기도 한다

좀 더 지속가능하고 공정한 무역을 위한 이런 노력들은 이윤 극대화를 우선시하는 사업 모델에 대해서는 아무런 토를 달지 않는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 공동선을 창출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다고 가정하기도 한다. 그 누구도 애덤 스미스가 1776년에 내놓았던 다음 주장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제는 일각에서 말하는 대중 시위에 대한 ‘준準군사적인 경찰 활동‘이 민주주의 체제와 권위주의 체제 모두에서 증가하고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국가가 무역을 자유화하고, 자원을 사유화하며, 외국 기업을 달래 가면서 세계화와 전 지구적 자본주의를 안착시키기 위해 여전히 폭력을 사용한다

2012년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개인에게는 최소 9,000달러, 조직에는 최고 3만 달러까지 벌금을 부과하는 등 강경한 처벌로 시위를 범죄화하는 법률에 서명했다

소비주의와 개인주의의 득세는 사회적 삶의 사유화를 심화시켰고, 사회적 삶의 사유화는 다시 소비주의와 개인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 담론은 구조적인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반박한다. 그리고 국가정책으로 공동의 책임을 관리해야 한다는 요구를 잠재워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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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통령들은 거짓말을 하는가? - 시민 권력을 위한 불온한 정치사史 울도 담도 없는 세상 1
하워드 진 지음, 김민웅 옮김 / 일상이상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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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엄 촘스키와 함께 미국 내에서 '실천하는 양심'으로 불렸던 하워드 진은 매우 진보적인 역사가이자 사회사상가였습니다. 본인을 민주적 사회주의자라고 칭하는 것을 즐겼던 그는 가난한 이민 노동자 가정에서 자라나, 소위 '계급적 인식'을 여러 독서와 사색을 통해 수용하게 됩니다. 일생을 외로운 진보주의자로 살아온 그는 뉴욕대학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박사를 취득하고, 조지아 주 애틀란타에 있는 사립 흑인 여성 대학에서 첫 교편을 잡게 됩니다. 이곳 스펠만 대학에서의 여러 기억은 하워드 진에게 깊게 각인되는데요. 당시 미국의 혼란한 정치와 그로 인해 사회가 실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그 스스로가 '지식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는 계기가 됩니다. 이런 그와는 완전 다른 길을 가고 있던 보스턴 대학의 총장 존 실버와의 일화는 선선한 인연은 아니었는데요. 여러 구설수에 휘말린 존 실버는 하워드 진에게 엄청난 비판을 당하게 되자 그와 노엄 촘스키를 빗대어 "이미 미국 대학이라는 우물에 하워드 진과 노엄 촘스키라는 독이 풀어져 있다." 고 개탄스럽다 밝히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이 글에서 서술되는 바와 같이 하워드 진이 거쳐온 1950년대는 그저 '좌파'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멀쩡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매카시즘을 이 정도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구절은 세상에 아마 존재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 하워드 진이 2010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 노엄 촘스키가 그리 애석하게 여긴 것은 평생에 걸친 두 동지의 치열한 삶과 생생한 그들의 양심이 동시대를 함께 관통했기 때문일 겁니다. 대략 짐작들을 하시겠지만 하워드 진의 삶은 단순히 지식인 그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가 진정한 시대의 지성인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The Historic Unfullfilled Promise"로 2012년 6월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 10월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워드 진의 이 책은 현재 절판된 상황입니다.


여기의 이 글은 하워드 진이 요즘의 시민들을 위해 특별히 기획한 것으로 자체가 일종의 논설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미국 내의 대표적인 진보 잡지 '프로그레시브'에 실린 그의 여러 논설을 펴낸 것으로 1980년부터 2009년까지의 기간에 실린 글들을 모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소개된 글들은 시대를 설명하는 시론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하워드 진 특유의 사회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성격의 가감 없는 문장들이 단연 저의 시선을 끌고 있었습니다. 전체적인 그의 글들 가운데서 제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새뮤얼 헌팅턴의 소위 '민주주의의 과잉'에 대한 하워드 진의 면밀한 해석을 접할 수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헌팅턴이 밝힌 소위 '민주주의의 과잉'은 그 본질이 일반인들이 여러 사회적 권위에 잘 복종하게 만들지 않는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마찬가지로 진은 "헌팅턴을 비롯한 이들이 원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기들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다."라고 냉정하게 비판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민주 사회 내부의 많은 시민들이 겉으로만 민주주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속으로는 자신들의 이익 혹은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을 추구하며 그에 걸 맞는 정치를 추종하게 마련이라는 콜린 크라우치 식의 논법에 상당히 긍정하는 편이기도 한 데요. 이것을 사회 내부의 분열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자유 민주주의 사회의 당연한 의견 개진 일지는 모르겠으나, 이와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이익으로 삼는다는 점일 겁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위 특별한 엘리트 계급이 일반 시민들이 주도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한 지배'를 마땅히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단한 통찰을 보이기도 했는데요. 특히, 하워드 진의 이 글에서는 선출된 권력에 대한 기득권과 자본 계층이 보이는 일종의 적대감에 대해 앞선 논법과 비견될 정도로 진술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하는 사법 당국이 스스로의 권위 의식에 취해, 조지 W. 부시의 연임을 거의 불법적으로 이끌어 내었다고 봐도 무방한 일전의 사례는 이를 대변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이러한 과정을 오로지 사법 관료의 문제로만 전부 치부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미 미국이라는 나라는 금권 정치와 로비의 힘이 지대한 상황이어서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우려한 다수(일종의 일반 시민)에 의한 소수(기득권과 엘리트 계층)의 핍박이라는 우려가 이미 무의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지난 트럼프 정권이 시민들에게 보인 반민주적인 행태는 누구나 봐왔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후자에 있는 자들은 동원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인맥과 강력한 법적 조언을 받을 수 있는 자원, 원하는 모든 것들을 거의 가능하게 하는 권력과 부를 손아귀에 쥐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존 듀이가 "시민 대다수가 좀 더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기를 바란다."라는 점을 언급한 것은 실로 우울한 현실을 대변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거의 가감 없이 지난 미국 현대사를 비평하고 있는 하워드 진의 양심은 그래서 더욱 대단하다고 여겨집니다. 바로 미국 시민들에게 몇 번의 시대적 격변기에서 자신들의 정치가 어떠한 길을 걸었는지를 낱낱이 밝히는 것이 자신의 양심이 시키고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에드워드 W. 사이드가 언급한 진정한 지식인의 범주에 하워드 진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날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 이라크에 즉각적으로 개입해 벌인 일들과 그에 반해 코소보의 인종 청소에 시일을 끌며 머뭇거린 점은 가히 대비되는 사건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이라크 개입에 대한 명분이 되었던 독재자 후세인의 대량 살상 무기는 날조로 밝혀졌고,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세르비아인들에 의한 인종 청소는 소위 자유 리더의 정치적 무능력을 온전히 드러내게 되는데요. 하워드 진은 이를 미국이 돈이 되지 않는 전쟁이나 개입에는 일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정의로운 미국'의 진면목이라 글을 통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유와 인권을 제일가는 가치로 매번 부르짖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국가가 강력한 명분을 손에 쥐고 있었음에도 최소한의 UN을 통한 개입도 스스로 주저한 것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하지만 이라크에서는 딕 체니와 도널드 럼스펠드와 같은 자들이 더한 이득을 위해 조지 W, 부시를 좌지우지하면서 이라크를 초토화 시킵니다. 이미 영화화 된 바 있는 '거물' 딕 체니에 대한 일대기는 실로 돈과 권력의 결정체라는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작품이었습니다. 막강한 전직 부통령이었던 딕 체니의 민간군사기업 '블랙워터'와 권력과의 유착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전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의 리더이자 스스로 자신들이 쌓아올린 민주 정체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미국이 어떻게 저런 '과두제'의 극명한 속성이 도출되게 된 것인지 지금으로선 사뭇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에 하워드 진은 모든 정치가 가져야만 하는 '도덕적 책무'에 대해 새삼 강조하고 있기도 한데요. 지난 2차 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 지역의 민간인들에 대한 '부수적 희생'이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는 점이 미국이 주도한 전쟁의 암울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토마호크 미사일로 온 가족을 잃은 어느 가장의 피 끓는 일화를 하워드 진이 소개하면서 어떻게 미국 내에서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가 하나도 없는지 개탄해 하고 있었는데요. 물론 전쟁 상황에서 민간인에 대한 피해를 완전히 방지하기란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극히 현실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은 이러한 모든 것들을 컨트롤 하는 것은 거의 무리라고 주장할 텐데요. 하지만 "어떤 행동이 무고한 사람들을 '필연적'으로 죽게 한다면, 이는 민간인에 대한 '의도적'인 공격만큼 비도덕적인 것이다."는 저자는 하워드 진의 비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저 도덕론적인 이상주의라고 최소한의 견제 장치를 제거해 버린다면 아마도 현실의 이익이라는 유일주의에 심하게 경도된 이 세계에 거의 희망을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또한 하워드 진의 이 책에는 베트남 전쟁부터 로널드 레이건이 CIA를 동원해 벌인 '더러운 개입 작전'과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정치적이고 근본적인 분석이 담겨 있습니다. 소위 평화를 사랑한다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 어떻게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는지는 어쩌면 꽤 많은 학문적 조사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군사적 이익이나 전쟁으로 인해 이익을 얻는 대부분의 인사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모두가 인정하는 '국익'으로 치환하고 싶어 하겠지만 문제는 그러한 역사 전부가 모두 도덕적으로 '옳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하워드 진 역시 참전한 2차 대전이 지난 세대들에 의해 어느 정도 '좋은 전쟁'이라는 평가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이후 냉전 시기의 CIA식 개입을 비롯한 얼마간의 제한 작전들이 군사적 복수와 날조, 거짓 선동이 뒷받침되어 있다는 것은 거의 부정하기 어려울 겁니다. 이와 관련해, 국제 정치를 비롯한 정치 대부분이 현실 세계에서 이상주의적 목적에 부합하는 노력들이 이미 실종된 지 오래이기에 진정한 자유와 평등, 도덕적 책임, 양심, 정의 등도 역시 책에서나 등장하는 사전적 의미로 전락한 지 반세기가 넘게 지났습니다. 아마 오스카 와일드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사전에서나 언급되는 귀중한 단어들 대부분이 우리가 스스로 버린 것과 다름없다고요.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사회를 엄정하게 감시하는 언론의 무능에 대해 여러 분량을 할애해 비판하고 있는 점은 여러 맥락에서 우리의 민주주의가 힘을 잃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마 큰 의미는 없겠지만 본문 82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사무엘 헌팅턴은 이 위원회에서, "1960년대 미국에서 민주주의 열풍이 극적으로 상승했다."면서 이런 현실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중략) 결국 1960년대 민주주의 열풍의 본질은 기존의 공적 사적 권위 체계에 대한 일반인들의 도전에 있다

물론 여전히 많은 미해결의 과제들이 있다. 그 어떤 장애도 없이, 공산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자유를 비롯한 무수한 주제들에 대해 자유롭고 개방적인 토론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서구에서 지금까지 생존해 올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뒤집어엎는 혁명 대신에 자본주의 연명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의료보험과 주택, 일자리와 먹을 것, 그리고 교육을 비롯해 이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주어져야 하며 그것은 확실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체첸 사태에 대해 어느 기자가 질문하자, 클린턴은 남북전쟁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다면서 링컨 대통령이 남부 분리주의자들의 요구를 용납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 아니냐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 맥락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미국의 폭격에 의한 민간인의 희생, 세계 도처에서 인종청소라는 학살극이 벌어졌을 때 이것을 무시하거나 부추켜온 미국 정부의 그간의 행적, 제3자가 유고 사태에 대해 미국과 나토에게 합리적이고 협상 가능한 제안을 내놓았을 때 그것을 거부해 버린 일 등이다

미국과 세계 도처에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식량 또는 직업이 없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은 (언젠가 교황 바오로 2세가 말한 적이 있는)"야만적이고 통제되지 않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부수적인 손실이라고 할 수 있다

창문으로 전쟁이 날아 들어오면, 민주주의는 그 창문 밖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래서 워싱턴의 정부 관료들은 이 나라를 전쟁으로 끌고 가려 할 때, 이 나라 안에서나 밖에서의 민주주의 대해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기들이 모든 것을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는 것이다

정부의 권력이란 결국 시민, 군인, 공무원, 언론인, 작가, 교사 그리고 예술가들이 정부에 복종해야만 유지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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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6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27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적인 사람들을 위한 보수주의 안내서 - 개인, 가족, 사회, 역사에 대한 보수의 철학
러셀 커크 지음, 이재학 옮김 / 지식노마드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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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시간 주 플리머스 출신의 정치 이론가,사회 비평가, 문학 평론가이자 스스로 전통적 보수주의자로 여겼던 러셀 에이모스 커크는 미시간 주립대와 듀크대를 거쳐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군에 복무했고 당시 자유지상주의자 이사벨 페터슨과의 서신 교환으로 초기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그에게 크나큰 명성을 가져다 준 '보수의 정신 Conservative Mind'으로 미국 내에서 보수주의의 사상적 기초를 쌓은 인물로 이해되는데요. 그의 여러 일화들을 살펴보다 문득 C. 라이트 밀즈가 머리에서 오버랩 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둘 다 동시에 약간 유쾌한 괴짜 같은 취향을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밀즈와 커크는 사상적 경향이 완전 다른 인물들입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Concise Guide to Conservatism"으로 아마도 지난 1957년에 출간된 것을 최근인 2019년에 새롭게 펴낸 것으로 추측됩니다. 국내에도 마찬가지로 2019년 12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러셀 커크는 그의 생애 내내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버크식 보수주의를 추종했던 인물입니다. 제가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의 최근 보수주의적 역사에 대해 달통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보수주의의 대부분은 신자유주의와 강력하게 결합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커크의 이 글은 크게 3가지 키워드를 배경으로 진술되고 있었는데요. 그것은 양심과 재산권, 자유였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보충 설명을 드린다면 커크가 설명하고자 하는 보수주의의 맥락은 미국의 공화주의적 보수주의며, 존 애덤스와 제임스 메디슨 등의 사상이 기초한 전통적 보수주의라는 점을 먼저 염두해 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외에 다른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린다면 커크의 이 글을 전체적으로 일독해 보면 아시겠지만 현재 우리의 보수주의와는 그 궤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겁니다. 어느 정도 우리의 보수주의적 토대가 미흡하고 주장하는 바가 주먹구구식이며, 본질적으로 반공주의와 시장 자유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지난 현대사를 통해 이들 대부분이 소위 강력한 우파를 추종한다는 점에서 커크가 줄곧 주장하는 공동체의 선에 기여할 수 있을지에 대한 토론의 가능성은 아직 미지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커크의 논지에 대해 전반적으로 깊은 인상을 받기는 어려웠는데요. 무엇보다 대중과 공중에 대한 정확한 개념 도출이 되지 않고 '민주적 전제주의'라는 일종의 거의 일원화 된 다수 지배 정치에 대한 설명이 미흡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커크가 살았던 첨예한 냉전 시기를 고려한다면 오늘날 건전하게 뿌리 내린 사회 민주주의에 대해 그가 경멸을 보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특히, 커크가 보이는 '평등'에 대한 사실상의 혐오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민주주의에 있어 다른 걸 다 떠나 자유와 평등이 중요한 가치라는 것은 분명한데요. 지지 파파차리시의 언급대로 '모두가 평등한 자유'라는 개념은 이처럼 중요한 맥락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이와는 별개로 오늘날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민주주의가 과잉된 상황'이라고 시대적 이해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니, 저로서는 (현재의 변형된) 보수주의 자체가 민주주의를 별로 달가워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커크의 이 글에서는 '도덕적 경쟁', '질서 있는 자유'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전통적 보수주의와 지금의 보수주의가 얼마나 상이한 개념인지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커크가 설명하는 보수주의에 있어 '인간의 양심'은 중요한 화두로 여겨졌습니다. "비양심적인 인간들이 모여 만든 사회가 양심적일 수 없다"는 취지의 문장도 이를 잘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양심의 문제는 더 나아가 사회적 불평등, 특히 경제적 불평등과 관련해서도 양심이 '자선'을 도덕적으로 권유하고 이는 기독교적 겸허한 양심에서 비롯되었고 가난을 구호 하기 위해 돈 있는 계층이 자발적으로 지갑을 열 수 있는 양심이 보수주의의 기본적 맥락이라고 인용됩니다. 일반적으로 보수주의는 혁신과 혁명이라는 이름과는 반대로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선인先人들에 의해 이어져 내려온 사회 체계나 전통 문화 혹은 가정에 대한 기존의 가치들을 수호하고자 합니다. 이는 일종의 하이에크와 같은 입장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사회를 좀 더 개선시키기 위한 소위 개혁가들의 사회적 시도들이 우리 모두를 고통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경고와도 같은 것이겠죠. 물론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전통 자체가 지키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해야 하는 중요한 가치로서 더 중요한 맥락에서 "개인들의 자발적인 양심이 사회를 아무런 부작용 없이 개선해 나갈 수 있다."는 인식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글에서 재산권과 자유는 거의 한 몸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보수주의자들이 흔히 인정하고 있는 인간의 이기심이 자유와 연계되어 있지만 커크는 그렇다고 모든 보수주의자들이 방만한 이기심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물론 그는 "간단히 말해 사유 재산제는 자유를 누리려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라고 진술합니다. 다만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와 결합한 보수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은 자본주의의 아주 자연스런 요소로서, 그 이기심 자체는 사악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죠. 이를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사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이기심 추구는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제한 없고 무분별한 자유의 추구와 신자유주의자들의 거의 제한을 두지 않는 이기심 추구를 거의 동일한 맥락에서 바라보고 있는데요. 그래서 커크는 이기심에 대해 인간의 도덕성 혹은 도덕주의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는 관리되어야 한다고 언급합니다. 보수주의자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맹렬히 수긍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본의 축적이라는 기본적인 인식에 있어 동의하는 것이다."라고 언급되는 부분도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즉, 힘 있는 자들의 마땅한 자유가 아니라 모두가 마땅히 누려야만 하는 기본적인 권리로서 자유를 바라볼 수 있겠는데요. 따라서 커크의 말대로 "보수주의자는 개인의 양심, 법원, 정부가 모든 사람과 계급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언제나 눈을 부릅떠야 한다고 믿는다."는 진술은 이를 정확히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이 쓰여진 시대를 감안해 보면 커크의 공산주의와 집산주의에 대한 격렬한 혐오를 잘 엿볼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인류에게 남긴 상처를 감안해 본다면 이는 지나친 감정이 아닐 수 있는데요. 부의 재분배에 있어서도 전자가 모든 인간들에게 실패한 결과물을 남긴 것도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혁신과 진보에 대해 커크가 보이는 부정적인 인식과 그가 이를 바탕으로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의 반감은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능력이 있는 자들이 좀 더 많은 권리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대로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 쳐도 사회적으로 능력 있는 자들의 권리가 커크가 말하는 대로 '공짜'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는 줄곧 양심과 의무를 들어,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편안한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측면에서 앞선 관념을 경계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작금의 보수주의와 커크의 보수주의는 매우 상이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는데요. 에드먼드 버크의 사상을 추종한 커크라면 그리고 미국식 공화주의에 '충성스런' 신념을 갖고 있는 커크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더불어 저자의 글을 통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이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해석대로라면 과거 전체주의의 화신인 히틀러가 '급진주의적 선동가'라고 취급할 수 있을 텐데요. 이러한 히틀러의 전체주의를 왜 겸허한 양심의 보수주의자들이 전혀 저항하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자크 파월이 당시 평범한 독일인들을 어느 정도 이해했던 부분이나 한나 아렌트가 일생을 소비해 천착했던 전체주의에 대한 해부까지는 바라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여기의 커크가 2차 대전에서 어떠한 양심에서 참전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보수주의적 관념을 떠나서 전쟁을 몸소 체험한 것은 어쩌면 가볍지 않은 일일 겁니다. 그가 수없이 언급했던 것처럼 만약 히틀러가 급진주의자라면 왜 독일의 보수주의자들은 전혀 저항을 하지 않은 것일까요. 작고한 토니 주트의 언급대로 당시의 평범한 독일인들이 히틀러가 만든 거대한 흐름에 전혀 저항을 할 수 없던 것이었을까요. 오히려 일상에서 안온한 행복감을 느꼈을 정도로 말이죠.

현재의 보수주의와 커크가 논증을 통해 설명하는 보수주의는 아마도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날 겁니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도덕주의적 정치는 철지난 것으로 치부 되었고,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존경한다는 밀턴 프리드먼 역시 사회에 정의 따위는 필요 없다고 일갈했었죠. 이와는 상반되게 커크는 자유와 정의, 도덕, 질서, 공동체 등을 보수주의의 핵심이라고 열거하고 있습니다. 사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선명한 진보, 건전한 보수는 필연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보수는 과거 개발 독재와 철저한 반공에 기대어 반대의 의견을 철저히 묵살했던 것과 같이 심지어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까지 앗아간 역사와 제대로 화해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제 스스로가 민주주의에 경도된 사람입니다만 여러 서평에서 언급했듯 에드먼드 버크식의 보수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기도 했는데요. 일전에 버크는 프랑스 혁명의 잔인한 결과들에 대해 양심에 비추어 토로하여 모든 혁명이 역사와 사회에 만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보고 있노라니 우리의 보수주의가 과연 에드먼드 버크의 보수주의적 전통을 얼마나 체화시키고 있는지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걔 중에 커크가 말하는 이기심과 지금의 이기심은 매우 차원이 다른 것이 되었기에, 어쩌면 시대와 환경이 다른 미국의 보수주의와 우리의 보수주의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커크의 글을 일독하고 난 후에, 다른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보수주의가 민주주의를 본질적으로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이를 명확하게 다룬 글이 새롭게 나와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보수주의자들 가운데 자유와 민주라는 탈을 쓰고 입으로만 이를 강조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은 실정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커크의 이 책은 홉하우스의 자유주의의 본질과 더불어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정부를 필요악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커크가 말하는 보수주의는 정부를 필요선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보수주의는 많은 재산과 영향력을 가진 이들만의 관심사가 아니고, 특권과 지위만을 방어하려는 사상도 아니다

무슨 의미인지는 분명치 않은 ‘인민people‘이나 ‘군중The Masses‘혹은 ‘핍박받는자The Underprivileged‘는 기독교의 관심사가 아니다

사전적 정의 양심은 ‘사람의 행동이나 동기의 측면에서 내적으로 인식하는 옳고 그름, 다시 말해 사람의 행동과 동기의 도덕적 측면을 파악해 그것이 도덕률에 일치하도록 명령하는 능력이다.‘

반면 인간이 도덕적으로 표류하고 양심에 무지하며 감각적 욕구의 충족에만 매달리는 사회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투표에 참가하든, 또 그 공식적 헌정 체제가 얼마나 ‘자유주의적‘이든 모두 나쁜 사회다

시기심을 견제하는 오직 하나의 진정한 방법은 비상한 재주를 지닌 사람들에겐 그들만의 고유한 권리가 있음을 많은 대중에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일반적 원칙을 인정하는 사회다. 더 나은 사람들에겐 스스로를 계발할 권리가, 보통 사람들에겐 잔잔하게 살아갈 권리가 부여된다는 원칙이 인정되는 사회 말이다

공동체가 약화되면 대개는 무질서한 자유 anarchic freedom가 아닌, 숨 막히는 집산주의가 들어선다

따라서 급진적 선동가는 일단 권력을 잡은 뒤엔 지역 공동체의 활력을 뿌리 뽑으려 애쓴다. 그 짓을 히틀러가 독일에서 시도했고, 또 러시아의 다른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이 처절하리만치 철저하게 완수했다

따라서 깨어 있는 보수주의자는 공동체, 마을, 국가, 사업 조직, 시민 사회 모임, 노조, 교회 집단, 동업자 집단, 학교와 대학, 그리고 자선 기금이 요구하는 의무를 다한다

보수주의자는 개인의 양심, 법원, 정부가 모든 사람과 계급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언제나 눈을 부릅떠야 한다고 믿는다

사유 재산 제도는 불평등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인간은 도덕적으로는 평등하지만 다른 모든 관점에서는 불평등하다

국가는 때때로 탐욕스런 빈자를 억누를 필요가 있듯이 오만한 부자를 저지하는 조치도 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치권력이 아닌 개인적 양심과 공중의 여론에ㅔ 호소함으로써, 보수주의자는 재산 소유자들에게 그들의 타고난 권리와 함께 타고난 의무를 환기시키려 노력한다

보수주의자는 진보 그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 반드시 작동하는 신비로운 진보, 그 자체의 힘이 있다는 주장은 강하게 의심한다

‘민주적‘ 국가가 누구의 자유도 빼앗지 않는다는 얘기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자유 경제 없이는 어떤 형태의 자유든 유지되기가 매우 어렵다. 공화국은 그 어떤 특별한 경제 체제보다 중요하지만, 자유로운 경제가 없으면 실질적으로 공화국은 지속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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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데이터를 가져다 뭐하게 - 디지털 시대의 자기결정권
브리기테 비어만 외 지음, 김현정 옮김 / 책세상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독일의 젊은 정치인이자 인터넷 시대의 시민권 보장을 주장하는 논설가인 말테 슈피츠는 1984년생으로 오스트베번에 소재한 사립 기숙학교 콜레기움 요한네움 슐로스 로부르크에서 수학했습니다. 이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하겐에 소재한 하겐 대학에서 정치 및 행정학을 공부합니다. 2006년에는 독일 정당인 가운데 최연소로 녹색당 연방집행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어 2012년까지 위원직을 맡게 됩니다. 현재 그는 자유 권리 협회 공동 설립자 겸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있고, 동시에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독일 내의 여러 TV 방송에 출연해, 시민을 위한 데이터 권리 보호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 글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인 브리기테 비어만은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하고, 저명한 주간지 노이에 베를리너 일루스트리어테에서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이후 잡지사 브리기테에서 통신원 및 범죄전문기자로 일했습니다. 여기 이 책은 거대 기업과 정부에 의해 시민들의 사생활 보호와 그에 따른 기본적인 권리가 위태로운 상황을 진술한 일종의 르포르타주로 원제 "Was Macht Ihr Mit Meinen Daten?"으로 지난 201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5월에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국내 번역본은 현재 절판된 상황입니다.

이 글의 전반부는 현재 EU를 포함해, 독일 내에서 정부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시민들의 광범위한 데이터 수집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에드워드 스노든이 인용되고 있습니다만 미국이 NSA가 주도한 전세계 광범위한 감청 프로그램 프리즘 Prism으로 대표 되는 오늘날 위태로운 시민권을 잘 묘사해내고 있습니다. 공저자 중 한 사람인 슈피츠는 어느 날 독일 통신업체인 도이체텔레콤이 보유한 자신의 개인정보 수집에 관심을 갖고 이를 독일 법원에 고소한 이력을 갖고 있는 행동가인데요. 대략 2008년 이후의 독일 정부는 EU의 잠정적이 조치대로 다수 시민들의 무분별한 정보를 '통신정보저장법'으로 수집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의 근거는 모두가 알다시피 국가 안보였죠. 여기에 슈피츠는 거의 처음 제동을 걸고 시민의 권리 보호를 주장하며 이 문제를 법원으로 끌고 갔고 마침내 국가에 대한 연방 판사의 시정명령을 받아내게 됩니다. 즉, 2010년 3월 2일에 이른 판결, "통신정보저장법에 관한 유럽연합 지침 2006/24/EG을 국내법으로 전환한다는 독일 법은 기본법에 위배된다는 취지"였습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인지하고 있듯이 독일은 시민 자유에 대한 개념이 다른 유럽 국가들과 미국에 비해 더 확고한 국가이기도 합니다. 그런 국가가 자국의 국민들이 축적한 데이터를 미국 정보 당국에 제공한 이력을 갖고 있는데요. 물론 미국은 독일에게 있어 절대적인 나토 동맹국이고, 2001년 이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할 때 크게 협력한 국가가 독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책을 통해서도 대략 좋지 않은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인터넷 통신과 제반 산업이 고도화 될 수록 권력을 쥔 정부의 관리들이 데이터의 기본적인 수량화에 따른 데이터 수집을 아주 손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저자인 슈피츠의 개인 경험을 통해 밝혀진 독일에서 벌어지는 시민들의 정보 수집은 같은 민주주의 국가라고 불리는 우리에게도 유사한 상황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이를테면 법원의 영장을 발부 받아 어떤 개인의 금융 계좌와 핸드폰 통화 내역을 수사 기관이 통상적으로 조회해 봤을 때, 그 당사자 본인에게 이러한 조회 이력을 통보하는지 매우 궁금했습니다. 독일은 당국이 시민의 개인 정보를 특정 목적을 위해 열람을 하면서도 당사자에게 알리지도 않는 듯 보였습니다.

오늘날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멀게는 조지 오웰부터 가깝게는 미셀 푸코의 논법으로 어느 정도 예상된 시나리오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 하에서 시민의 정당한 위임을 받은 정부가 자신들을 선출한 시민의 사생활 정보를 비롯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쓰일 수밖에 없는 여러 개인 정보들을 수집하고 개량화 하는 것에 어떠한 명분이 있을지 요즘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미 영화의 짤막한 장면으로도 묘사되고 있습니다만 미국의 해외정보감시법인 FISA의 영장 요청을 감독하기 위해 FISC를 설립했지만 2001년 이후, 그것이 명백하게 법이 규정하는 의미 하에서 발부되었다고 하지만 무고한 피해자를 낳은 것도 분명 사실입니다. 이처럼 안보라는 특수한 관점으로 대다수 시민들의 개인정보를 손아귀에 넣고 싶어하는 정부를 제대로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은 어떻게 보면 전무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 10장에서 "만일 개별 국가와 기관 및 조직이 개인정보에 대한 권력을 일부 국가과 기관, 조직이 소유하게 될 경우 한 나라의 주권이 위협 받을 수 있다"는 경고는 매우 의미심장한데요. 안보에 대한 함의를 통해 자유 진영의 수호라는 명목으로 독일이 미국에 했던 일들과 구글과 페이스북과 같은 다국적 기업이 주권국의 개념을 모호하게 만들 정도로 거대해지고 있는 상황은 미래의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될지는 두려울 정도입니다.

일전에 지그문트 바우만은 한 나라의 안보에 대한 욕망과 그에 따른 강조가 결코 전부 채워질 수 없음을 예측한 바 있습니다. 아무리 정상적인 국가라 할지라도 크든 작든 권력이 여러 감시 데이터를 통해 이것을 수치화하여 손에 쥐고 있다면 그것의 파급력이 항상 좋을 수는 없을 겁니다. 이를테면 미국 FBI가 최소 600만명 이상이나 되는 안면 인식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것이 단순히 범죄 예방과 테러 방지를 위함이라는 설명으로 우려하는 다른 이견과 비판을 침묵으로 만들 수 있는 이유인지는 불명확합니다. '개인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적 기본권을 중시한다는 독일이라는 나라도 현재 이런 상황이니 다른 국가들은 어쩌면 말할 필요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이 글 7장의 개인의 의료 기록의 사실상 거래 상황이 보험사들에 의해 자행 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소름 끼치는 상황인데요. 여기에 인용된 테크니커 보험사가 고객의 데이터를 평가하지도, 다른 시스템과 대조하지도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는 절반에도 이르지 못한 사실로 글에서 증명되기에 이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기관과 보험회사에서 주도 되는 개인 정보 유출이 독일에서도 이미 심각한 상황이라는 점입니다.

끝으로 개인들 간의 누적된 데이터 교환을 비롯한 축적된 정보들에 대한 통제권이 아직까지는 시민이 주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글의 결말에서 슈피츠가 제안하는 12가지의 제언들은 눈 여겨 볼만하다고 여겨지는데요. 그중에 3번째 조언인 "모든 국민은 공공기관, 데이터를 가공하는 모든 기업과 전자식 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이는 비밀이 보장되도록 암호화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정보기관이 무엇보다 의회의 막강한 감시를 받는 것을 전제로 투명하게 관리되어야 한다는 점은 또한 명백한 당위성인데요. 그럼에도 구글과 같은 거대 인터넷 기업을 어느 한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는 점은 실로 우려스러울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까운 미래에도 우리의 사생활 보호 권리와 기본적인 시민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해 당하지 않고, 또한 누구나 자유롭게 걱정하지 않게 살아갈 권리도 마땅히 보장 받아야 할 텐데요. 이것의 전제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욱 건전해져야 하며 시민들이 하루라도 빨리 정치와 정부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씀드리면 작금의 민주주의가 일종의 엘리트 지배 체제의 편의적인 기능성을 포함하고 있다면, 선출 권력에 의해 소수의 엘리트 들을 견제할 수 있게 시민들이 이들에게 정치적 명분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가 결코 안온할 수 없을 겁니다.

경찰이 당사자에게 그와 같은 데이터 조회 사실을 알릴 의무가 법으로 명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데이터는 누구와 이야기를 하는지, 남자친구가 누구인지, 가족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며, 숨겨진 네트워크뿐만 아니라 은밀한 연애사도 폭로하고, 심지어 당사자조차도 명확하게 느끼지 못하는 관계까지도 입증해준다

경찰과 검찰, 독일 정보기관이 인터넷을 감시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통신 및 인터넷 사업자는 사법기관들이 범죄를 처벌할 수 있도록 도울 의무가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특정 단어에 따라 메일이 필터링되고 특정 패턴에 따라 통ㅎ신이 분류되면서 이미 감시가 시작된다

중국, 터키, 이란, 미국, 영국 등 점점 더 많은 국가들이 자국민이 온라인으로 무엇을 하는지 되도록 정확히 알고 싶어 한다

국경을 넘는 이러한 협력은 법의 사각지대에서 일어난다. 예컨대 해외 정보기관들은 독일 정보를 독일 기관에 넘겨주면서 국내 경찰이나 사법기관에 제공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단다. 그렇게 되면 반국가 단체를 수사하는 헌법수호청이 독일에서 발생한 범죄, 특히 중범죄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으면서도 이 정보를 경찰에 주지 않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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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9-17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휴우....관심이 있어야, 12가지 제언 중 어떤 것을 취하는 게 특히 좋을까를 알텐데 저부터도 평소 무심하게 지나가는 이슈였어요. 영화 소재라고만 생각하지, 제 문제로 생각하지 못하는 안이함...

베터라이프 2022-09-17 19:27   좋아요 2 | URL
안녕하세요 얄라님.^^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안보 구축이 엘리트들에 의해 시민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닌가 많은 분들이 우려하고 계시죠. 그럼에도 얄라님의 말씀대로 이런 소재는 영화의 단골 장치입니다. 보수주의자인 러셀 커크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무슨 망상으로 취급했는데 뭔가 안타까운 일이죠. 가까운 미래의 수많은 정보 당국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을지 사뭇 걱정입니다. 엘리트적 사고관을 갖고 있는 관료들은 민주체체에서의 감시와 통제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점이 소위 전문가들의 정치가 양면성을 띠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