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5
데이비드 밀러 지음, 이신철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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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저명한 정치 이론가인 데이비드 밀러는 케임브리지와 옥스포드를 거쳐 현재 옥스퍼드 대학에서 정치 이론을 가르치면서 경제, 정치 및 사회학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너필드 칼리지의 공식 펠로우이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랭커스터 대학과 UEA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특히 '사회 정의'인데요. 아무래도 공적인 측면에서 공공선과 그것을 기반으로 시민들의 삶에 충분히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법과 제도 마련에 연구를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식인들이 범할 수 있는 이론과 글을 너무 과신하지 않고 현실적인 조건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하고 있기도 한데요. 사실상 정치철학이라는 분야가 현실 정치와 사회제도 및 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기에 그가 밝히는데요 정치철학 자체가 현실과 상당히 괴리되어 있다는 세간의 주장들은 어떻게 보면 정치철학에 대한 뿌리 깊은 선입견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Political Philosophy"로 지난 200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2022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는 도입에서 정치철학을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것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안내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는 목적을 밝히고 있는데요. 제가 이 책을 끝까지 일독하고 나서 들었던 느낌은 전체적의 글의 방향과 논지가 일관되고 정치철학 뿐만 아니라 정치학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지난 역사와 민주주의를 개괄해보고. 이에 독자들에게 건전한 생각할 거리들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상당히 만족스러웠습니다. 특히 3장 민주주의와 4장 자유와 정부의 한계, 5장 정의는 모두가 몇 번이고 읽고 곱씹어 봐야하는 부분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저자인 밀러의 이 훌륭한 글은 전반적으로 투입된 논증들이 일방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여러 논의와 주장들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이 정치철학과 정치 및 사회학의 강고한 편견에 빠지지 않게 하는 조심스런 배려가 글 여러 곳에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 글이 시도하고 있는 많은 논증과 주장들의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은 "시민들, 즉 우리가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테제인데요. 글 말미에 저자가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 사이의 선택은 기술이 진보하고 사회가 더 거대해지고 복잡해져 좋은 정부의 형태가 변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언제나 우리의 손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라고 진술되는 것과 거의 유사한 맥락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철학이라는 학문이 소위 정치엘리트들이나 교수, 공무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시민들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클로드 르포르가 강조했던 정치철학의 존재 의의가 퇴색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저자인 밀러 역시 그러한 점에서 착안해 정치철학 자체를 과신하지 않고 현실적 한계와 이론과 현실이 아직 일치하지 않는 미완성인 부분을 언급하고 이를 독자들에게 솔직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일전에 루소가 언급한 대로 "민주주의는 인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신들 만을 위한 것"이라든가, 5장 정의에서 "사회정의는 여전히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있다"는 진술들은 명확한 현실을 알려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반적인 정치권력을 다루고 있는 2장은 무엇보다 "정치권력 자체가 시민 전체에 의해 지탱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일전에 토머스 홉스는 인간은 본성상 이기적이거나 탐욕스러우며, 따라서 그런 연유로 정치권력에 의해 제약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가 인간 자체에 대한 불신을 평생 체화한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영국 정치가 얼마간 실종된 상황을 몸소 경험한 그가 아마도 인간이 야만적인 자연상태와 같은 무법적인 상황에 내몰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정치는 그것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라고 여겼습니다. 저자인 밀러 역시 그런 의미로 정치권력 자체가 시민들 사이에서 그리고 시민과 사회 전반에서 서로 간의 신뢰를 이어주게 하는 일종의 장치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타인과 타인의 관계 혹은 이런 타인들로 구성된 사회 전체가 어감이 좋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 통제가 필요한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러한 맥락을 그토록 거부하는 자유 지상주의자들이나 신자유주의자들도 극명하게 인지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밀러가 이 글 4장에서, "개인의 자유가 다양한 방식으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 자명하다"는 주장은 선뜻 거부감을 운운하더라도 그 필요성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전자의 자유 지상주의를 표방하는 우파에 대해 어느 정도 우려를 표하고 있기도 한데요. "자유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진지한 성찰과 더불어 신자유주의자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정부와 자유"와 관계에서 양자 간의 권력 관계를 많은 수사를 통해 분석하려 하기 보다는 자유 자체는 정부가 없다면 시민들에게 실질적으로 고르게 보장할 수 없다는 진실을 인식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2장과 3장에 걸쳐 논의되고 있는 '사회적 의무'와 다음에 나오는 '사회 정의'는 유사한 의미이기도 한데요. 특히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 의해 거부되어온 '정의'라는 관념, 더 나아가 '사회정의'는 그저 말로만 내뱉는 쓸데없이 허망한 단어가 아니라 그만큼 모두가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 체제를 기반으로 누구나 마땅히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사회의 존재 의의는 시민들의 삶이 스스로의 선택과 통제에 의해 보장될 수 있도록 제도와 법을 통해 이를 지지하는 것에 있겠는데요. 사실 미국을 영국으로부터 독립시켜 건국에 이른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이 여러 정치적 논의들 가운데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고, 후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 약간 상이해 보이는 논증일 수도 있지만 4장 전반은 오늘날처럼 각종 자원을 보유한 소수 기득권층이 프리드먼과 하이에크를 신봉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헌법이나 제도 바깥의 현실 측면에서 여타 시민들이 다른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그 자체로 순수한 욕망의 한 발로라는 것을 긍정하고 이러한 관념을 사회 전체를 가득 채워 자신들에게 쓸데없는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지 않도록 치밀하게 관리하는 복잡한 메커니즘에 다수 시민들이 생계의 덫에 빠져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물론 공공선과 사회 책임과 의무라는 가치를 인지하고 있는 다수 시민이 현시점에서 무슨 혁명 같은 걸 기대하는 건 아닐 겁니다. 다만, 여기에서 짧게 논의되는 '시민 불복종'이라는 의미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이론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 맞게 세밀하고 촘촘하게 뿌리를 내려야 하는 것은 거의 확실한데요. 이처럼 시민들에 의한 지배, 그를 기반한 정치 체제 전반, 이러한 체제가 어떠한 정치에 기반하고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어야 하는지는 사회적 의무와 시민 불복종이 서로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생각할 거리가 충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장에서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시민들 대다수가 자신들이 선출한 지도자의 활동을 계속해서 효과적으로 감시하는 일에 대해서조차 너무 무관심하다"는 점은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화의 영향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사회가 끊임없이 파편화에 이른 것은 거의 사실로 보입니다. 빈부 격차가 나날이 심화되고 사회적으로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의 상황이 시민들의 개인주의화와 더불어 상황을 악화시켜 왔는데요. 신자유주의화 초기에 공공선과 공적인 책임에 대해 강력한 공격이 이뤄진 이후로 시민들 대부분이 삶을 오로지 스스로의 책임 하에 놓이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데요. 즉, 권력을 위임하게 되는 투표 행위가 권력을 조정하고 정치 체제 전반을 감시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벤트'로 한정되면서 시민들이 정치에서 더욱 멀어졌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현실 사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여전히 많고 그 시발점에서 저자의 언급대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건전한 토론에 이를 수 있도록 그런 기반을 만들 수 있어야만 할 텐데요. 뒤에서 재차 현실적으로 분석되고 있는 자유 또한 사람들이 다양한 정보에 기반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전무하다면 그 사람이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감히 말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렇듯 시민들 스스로 현재의 삶을 결정하는 여러 사회적 조건과 정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더불어 정치권력을 포함한 정치 전반에 대한 관심과 비판이 전무하다면 그것이 신자유주의화이거나 만연된 정치 불신 혹은 사회적 신뢰의 결여가 원인이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자유와 삶의 통제를 주장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뒤이어 진지하게 살펴볼 수 있는 5장의 기본 정의와 확대된 사회 정의는 헌법이 규정한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가치에 기반하고 이 평등과 정의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논증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아직도 신자유주의자들을 비롯한 이러한 논리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자들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평등과 정의 자체는 만약 사회와 정치 제도를 제대로 정립하여 이를 전체에 걸쳐 편익과 비용의 공정한 분배 그리고 더 나아가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토대에서 더 강화될 수 있다는 이 장의 분석인데요. 소위 사회적 비용이라든지 또는 개인의 능력 차이를 중요 잣대로 들이대 사회가 최소 이상으로 해야 될 평등과 정의에 관련된 임무를 거의 수수방관하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강화된 민주주의가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저들의 뿌리 깊은 사고에 기인합니다. 물론 앞선 표현은 지극히 순화해 작성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기득권을 갖고 있는 계층과 이를 전방위적으로 지지하는 지식인들과 정치 권력에 의해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인 평등과 정의를 논하는 것 자체에도 급진주의적이고 혁명적인 더 나아가 터무니 없는 공산주의의 음모로 몰고가 사회가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는데요. 사실 지금 논하고 있는 주제와는 다르게 신자유주의에 의한 세계화 자체가 전통적인 국민국가의 해체를 진행시키고 있고 이런 '위 아 더 월드'로 인해 거대한 자본 차익에 대한 탐욕을 더 보장하기 위한 작업이 되었다는 것인데요.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적 기법인 기업들의 아웃 소싱은 지구의 남반구를 북반구에 종속시키는 결과와 개도국을 선진국들의 공장으로 전락시키면서 모두가 함께 번영하지 못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끝으로 토머스 홉스와 장 자크 루소, 존 스튜어트 밀로부터 시작된 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정치는 이제 모든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외치게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의 민주주의는 미완인 상태입니다. 더욱이 새뮤얼 헌팅턴과 헨리 키신저와 같은 이들에 의해 소수의 정치경제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심각한 과두제가 아니더라도 시민 전체의 지배를 거부하는 양상으로 기반이 된 정치 변형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미 저런 자들에게 넘어가 버린지 오래다." 라고 체념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데요. 이러한 정치 불신이 극우 포퓰리즘으로 이어지는 것은 되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이고 6장 말미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대로 '정치적 올바름'을 우리 스스로 버려서는 안 될 겁니다. 제가 굳이 여기서 '정치적 이성'이라든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올바른 책무 따위를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이라면 '표현의 자유' 뒤에 숨어 결국 현실 정치를 파괴하는 데 일조하는 '혐오 발언'와 '인종주의', '종교적 편견'을 무슨 인간의 권리인 양 내세워서는 안 될 겁니다. 모두가 누리는 자유, 개인의 기회가 평등한 세상, 시민의 말에 귀 기울이는 정부, 맹목적인 자본주의적 논리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시민들 그리고 미완의 사회 정의를 위해 한 발자국이라도 나아갈 수 있는 사회 인식은 전부 우리의 삶과 아주 밀접한 관관계가 있다고 보는데요. 이는 저자의 당연한 인식이자 저 역시 강하게 동의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한 줄기 불길한 생각은 저 극우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를 모조리 다 파괴하여 결국 모든 사회가 과두제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디스토피아적 공상인데요. 이건 그저 제 상상의 소산으로만 끝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 저자가 이렇게 짧은 분량에 정치의 거의 모든 논의들을 심도 있게 다뤘다는 점에서 칭찬을 하고 싶은 데요. 이 뿐만 아니라 번역 역시 거의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역자의 작업에도 마찬가지로 칭찬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잘 지배되는지 나쁘게 지배되는지에 따라 실제로 우리의 삶에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치에 등을 돌릴 수 없으며, 사적인 삶으로 물러설 수 없고, 우리가 지배받는 방식이 자신의 개인적 행복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이 이른바 ‘역사의 종언‘ 테제, 즉 본질적으로 모든 사회는 경제적 힘들에 의해 추동되어 스스로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또한 홉스의 시대에는 오직 소수의 극단적 급진주의자들만이 민주주의를 정부의 한 형태로 믿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민주주의적 관념들의 영향력 있는 원천이었던 루소조차도 민주주의는 인간이 아니라 신들에게만 적합한 것이라고 말했다

홉스가 이런 비관주의적 결론에 도달한 것은 사람들이 본성상 이기적이거나 탐욕스러우며, 따라서 정치권력에 의해 제약받지 않으면 자신들을 위해 가능한 더 많이 움켜쥐려고 할 것이라는 그의 믿음 때문이라고 자주 언급되었다

정치권력에 대한 공동체주의적 대안은 서로 직접 얼굴을 대하는 공동체를 사람들 사이의 신뢰와 협조를 가능케 하는 초석으로 삼는다

국가가 규제에 나서고 세금을 부과하고 군대에 징집하고 그 밖의 여러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 때 우리는 국가를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국가 없이는 잘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슘페터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시민들 스스로가 쟁점들을 직접 결정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대표해 일군의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 그 소임이락로 논했다

우리는 비록 여기서 루소가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시민들 대다수가 자신들이 선출한 지도자의 활동을 계속해서 효과적으로 감시하는 일에 대해서조차 너무 무관심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요컨대 정치권력은 결국 시민 전체에 의해 지탱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로크가 경고했듯이 마침내 우리를 지배하는 사자들의 먹잇감이 되고 말 것이다

즉, 각자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인정받을 때에야 비로소 삶의 성취를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개인인 것이며, 이것은 새롭고 인습적이지 않은 삶의 방식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국가는 공공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모든 사람이 적절한 보장을 받을 수 있도록 의료보험 시장을 규제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적절한 건강관리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할 의무를 진다

즉,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 사이의 선택은, 비록 기술이 진보하고 사회가 더 거대해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좋은 정부의 형태가 변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우리의 손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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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충돌 - ‘차이메리카’에서 ‘신냉전’으로
훙호펑 지음, 하남석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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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호펑 교수는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 소재한 사립 명문인 존스홉킨스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현재 같은 대학의 사회학 계열인 Henry M. and Elizabeth Wiesenfeld 정치경제학과의 교수이자 학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정치 경제, 민족 국가 형성론, 사회 이론 및 동아시아 개발론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는데요. 그에게 큰 명성을 가져다 준 '차이나 붐'은 전세계 7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미국 사회학 협회, 사회 과학 역사 협회 및 스위스 세계 사회 재단의 5개 부문에서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훙호펑 교수는 근래 미국과 중국 간에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신냉전 상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마찬가지로 현재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중국의 정치 상황과 경제 문제에도 전문가로서 미국 국내에 많은 의견을 제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Clash Of Empires"로 올해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역시 최근인 10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훙호펑 교수는 근래 첨예화 되고 있는 미중 간의 갈등과 그런 신냉전의 도래에 대해 그 원인을 오로지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문제로 치부하는 것은 정치인들의 행동과 정책에 대한 손쉬운 정당화라고 비판하고 있는데요. 이와 관련해, 우리가 먼저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 부분은 지금 '중국의 대두'가 반쯤은 미국 정부와 경제계가 주도하여 중국을 '생산기지화'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에 신자유주의가 명확하게 관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소위 '베이징 컨센서스'에 대한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이 크게 실망한 점은 중국의 고도화 된 경제 발전이 그들이 기대하던 중국내 '민주화'가 사실상 실패했다는 것인데요. 이것은 애초에 훙호펑 교수의 논증대로 과거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의 '아시아 네 마리 용'이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게도 마찬가지로 미국의 내수 시장을 개방하게 된 것이 중국의 발전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볼 수 있을텐데요. 이 부분에 정치적인 의도가 아예 전무하다고 볼 순 없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따른 다국적 기업들의 이익도 크게 동반되는 흐름이었습니다. 뒤에서 더 다루겠지만 지난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 연계된 중국의 최혜국 대우 Most favoured nation treatment (MFN) 문제는 중국 경제 발전의 시작점이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소련이 붕괴하기 전까지 정치외교적으로 긴밀한 관계였던 미중은 크나큰 대적이 자멸하게 됨으로써 양자 간의 관계가 그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간간히 워싱턴 밖으로 흘러나오게 됩니다. 당시 일부 전문가들은 중국이 가까운 미래에 미국의 세계 패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로 조심스럽게 점치기도 했습니다. 덩샤오핑의 파격적인 개혁 개방에 있어 실질적으로 1993년은 분수령이 된 해였습니다. 훙호펑 교수의 논증에 따라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자신의 선거 공약으로 중국에 대한 MFN과 관련해, 중국내 인권 문제와 결부시키겠다고 선언합니다. 초기에 의회와 협의하는 과정에서도 중국의 인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미국이 중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해줄 수 없다고 강조하는데요. 하지만 결론적으로 빌 클린턴은 자신의 이 같은 결정을 철회하게 됩니다.

우리가 국내외에 여러 전문가들에 의해 인지하고 '기업들이 주도하는 과두제'는 바로 미국에서 '금권 정치'라는 형태로 변질되어왔습니다. 많은 로비 단체들이 미국 의회와 정치권에 막대한 로비 자금을 뿌려 가며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쪽으로 관련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다소 믿기지는 않지만 미국의 기업들이 중국이 최혜국 대우를 연장하는 데 연방 정부를 상대로 강력한 로비를 펼치게 됩니다. 결국 미국의 많은 인권 단체가 요구한 중국 내의 인권 문제에 대한 이슈가 신자유주의적 기조를 필두로 중국에서 좀 더 저렴한 비용으로 비즈니스를 할 기회에 대한 요구에 처참히 무릎을 꿇게 됩니다. 아마도 이러한 빌 클린턴의 변절이 소위 노엄 촘스키가 강도 높게 비판했던 미국 내 리버럴 정치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항복'의 다른 의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는 당시에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중국에 대한 MFN의 갱신이 중국 내의 '정치적 자유화'를 견인 시킨다는 희망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중국은 세계적 자본주의의 흐름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게 됨으로써 덩샤오핑이 그렇게 간절히 바랐던 '진정한 대국에의 초석'을 쌓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그 와중에 미국의 기업들이 중국 당국으로 받았던 모진 취급, 즉 자본주의적 경쟁 질서와는 매우 위배되는 중국 당국의 사법권을 동원하기까지 하면서 심지어 불합리한 강요까지 받게 되는데요. 여기에는 듀퐁을 비롯해 많은 미국 기업이 중국 당국으로부터 받은 반자본주의적 조치와 부적절한 개입이 숱하게 언급됩니다. 지적재산권과 특허와 관련된 중국 기업들의 불법적인 행태에 대한 중국 정부의 무차별적인 옹호는 과거 모토로라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이 같은 행태는 중국 시장에 대한 접근을 인질로 삼아 중국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들의 목을 옥죈 것으로 볼 수 있는데요. 이것을 불행한 일로 봐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말까지 중국을 생산기지화 했던 많은 다국적 기업들이 해마다 상당한 이익을 거두게 됨으로써 앞선 심각한 문제들이 몇 년 간 수면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습니다.

2008년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중국은 이제 미국이 패권에 있어 쇠퇴기에 들어섰다고 판단하고 자신들이 보유한 막대한 미국 국채를 무기 삼아 남중국해와 같이 양도할 수 없는 자신들의 지정학적 이해 관계에 더욱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데요. 이 부분과 관련해 미국도 거의 동일한 맥락으로 5장에서 "기업의 이해관계와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적대적인 방향으로 일치할 때만 워싱턴 당국은 중국에 대해 더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진술 됩니다. 이제는 양국이 사실상 기업의 이해 관계와 지정학적 이해 관계가 서로 적대적인 상황으로 단순히 즉흥적이고 나르시스트로 치부되었던 도널드 트럼프의 본격적인 중국 적대는 이 같은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훙호펑 교수의 평가대로 이런 흐름은 바이든 행정부에 이르러서도 진행되고 있는데요. 과거 니얼 퍼거슨이 극찬했던 미중 간의 협력인 '차이메리카'가 부정되어 사실상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저자는 현재의 미중 갈등은 마치 20세기 초의 독일 제국과 영국의 첨예한 갈등처럼 흡사한 면이 있으며, 앞으로 미중 간의 경쟁은 다년간 더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해 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미중 간의 '신냉전'의 회귀는 단순히 이데올로기적 진영의 대결 양상이 아니라 일전의 리민치 교수의 분석대로 미중이 경제적으로 현재 너무나 밀착되어 있기에 소위 지정학적 대결에 국한된 것이라 할지라도 양자 간의 갈등은 그만큼 전세계에 심각한 파급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로 첨부 글을 쓸 정도는 아니지만 훙호퐁 교수가 말하는 현재의 중국 경제 발전의 시작점은 신자유주의가 마련했고 그것의 실행을 미국이 주도한 것으로 중국의 대두와 관련한 상당 부분의 억측은 현존한 미국 전문가들의 오판이라고 볼 수 있을겁니다.

-저자는 나치 법학자 카를 슈미트의 사상과 저작이 한때 베이징의 저명한 학자와 관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는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80년대 위기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해법의 핵심은 노조 와해와 긴축통화 정책을 통해 조직화된 노동을 길들이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 세계 경제에서 미국은 항상 ‘최종 소비자 the consumer of last resort‘역할을 하고 있다

닉슨과 키신저 이후 지정학적 이유로 중국과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전념해온 공화당이 백악관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중국의 MFN 지위 갱신에 대한 민주당의 반대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사후 정당화로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과의 자유무역이 중국의 민간 기업과 중산층에 힘을 실어줄 수 있고, 이는 결국 정치적 자유화의 추진으로 이어진다는 ‘건설적 관여‘이론을 내세웠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미국의 최종적인 쇠퇴가 왔다고 베이징 당국이 판단하면서 중국은 광범위한 지정학적 문제에서 더 대담하게 대립적인 입장을 채택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중국 경제의 국가주의적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중국에서 미국 기업의 이익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영업 비밀을 탈취한 직원들이 해당 기업이 보유한 특정 기술을 노리기 위해 중국 기업이나 심지어 중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파견한 스파이였던 사례들도 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인 2019년 8월에서 2020년 1월까지의 잠깐 동안을 제외하고는 정부가 중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하고 이들이 요구한 교정 조치를 채택하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들이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중국으로 제조 부문을 아웃소싱해 낮은 중국 환율 덕에 이득을 보고 있는 미국 기업들로 구성된 대항 로비 연합이 이들의 로비 능력을 상쇄시켰기 때문이다

달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위안화 블록을 만들려는 베이징 당국의 시도는 지금까지 무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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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적 지배 막스 베버 선집
막스 베버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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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사회학자, 역사가, 법학자, 정치경제학자였던 막스 베버는 에밀 뒤르켐, 오귀스트 콩트와 더불어 인류에게 사회학의 서막을 연 위대한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프로이센 왕국의 작센 주, 에르푸르트 출신으로 괴팅겐 대학과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수학하였고 당시 사회적으로 부상하고 있던 자본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고찰과 함께 경제사회학과 종교사회학을 결합한 특유의 사상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이처럼 숙련된 종교학과 사회학을 각자 취합하여 관료제에 대한 분석으로도 명성을 쌓기도 했는데요. 더욱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자유주의 독일 민주당의 창당인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그가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을 반대한 것으로 보아 민족주의적 보수 정치인으로 이해되기도 하나 사회민주당과 적잖이 협력한 이력도 갖고 있어 그의 정치 이력과 관련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1922년에 출간된,'경제와 사회 Wirtschaft und Gesellschaft'에서 카리스마적 지배, 카리스마적 일상화 등을 발췌해 편집한 것으로 1985년판의 원서를 이상률씨가 번역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따라서, 국내 출간은 2020년 11월에 있었습니다.

사회학의 다른 논저에서도 짤막하게 언급되듯, 이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처음 사회학적으로 규명한 것이 바로 막스 베버였습니다. 여기에서 카리스마는 한 개인의 비일상적인 자질이나 특질로 어떤 초자연적이거나 초인간적인 능력을 갖췄다고 평가받거나 혹은 신이 보냈다고 인정 받는 일종의 특수한 리더십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이 카리스마적 지도자에게는 거의 확실시 되는 추종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와 관련해, 베버는 이들을 '행정 직원'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는데요. 이것의 국문 번역이 제대로 된 것인지는 약간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카리스마적 지배에 복종하는 추종자 집단이라는 보충 설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일단 의미는 전달된다고 보겠습니다.

베버가 분류하고 분석하는 이 카리스마는 비일상적인 것으로 '합리적 지배, 특히 관료제 지배와 대비되고 전통적 지배에서 가부장제 지배나 가산제 또는 신분제 지배와도 첨예하게 대비된다고 글에서 주요하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소명과 사명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고 특히 많은 이들이 이 카리스마적 지배를 용인하고 추종하는 것으로 그 형태가 드러난다고 베버는 보고 있는데요. 이런 차원에서 합리주의 시대 이전에는 전통과 카리스마가 행위의 지향 방향 전체를 거의 양분했다고 그는 다시금 분석하고 있습니다. 결국 단편적인 이해에서 이 카리스마는 이성이라든지 합리성과는 거리가 있는 약간의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데요. 다음 2장에서 예시로 나오지만 전체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이나 국가의 위기에서 기발한 해결책과 나아갈 길을 개척한 많은 봉건 군주에서 카리스마의 의미를 되짚어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2장의 '카리스마적 일상화'와 관련해, 카리스마가 기존의 사전적 의미에서 벗어나 꽤 변질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데요. 족벌 국가화에 따른 전통주의적 통치로 나아가는 카리스마는 세습적 메커니즘과 함께 이를 지지하고 추종하는 수많은 지지자들의 정치로 규정되는 듯 보였습니다. 즉, 카리스마 지도자를 추종하는 다수의 추종자들은 합리주의와는 크게 상관없이 경제적 이익 또는 다수의 복리를 이 지도자에게 기대하고 단순히 이 지도자의 특출난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제도화된 과정으로 이해되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베버는 처음과는 달리 카리스마적 일상화가 진행되면 이 모든 지배 단체가 신분제 형태 또는 관료제 형태로 발전한다고 분석합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13세기 이후의 신성로마제국과 로마의 분할된 종교-세속 권력 체계가 떠올랐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손이라고 여겨지는 로마 교황이 유럽 가톨릭을 보호하고 번영하는 의무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부여함으로써, 이러한 시스템 자체가 카리스마에서 변형되어 일종의 세속화 혹은 일상화가 아주 성공적으로 이뤄진 사례로 여겨졌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서는 이러한 비슷한 사례를 적잖이 꼽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특히, 베버의 카리스마적 지배와 그 일상화와 관련된 분석과 논증 가운데 제가 주목한 것은 두 부분인데요. 종교적 카리스마와 관련해 이들이 세습과 선출을 함께 아우르며 사회와 국가에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나, 근대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도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특히, 베버는 이와 관련해, 1912년 미국에서 나타난 대통령 선거에서 보였던 강한 카리스마적 지도 유형을 그 예시로 들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을 주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민주주의적 카리스마 지도자의 전형으로 생각되는데요. 대공황을 극복할 당시 그가 의회를 휘어 잡은 것이나 반대의 의견들을 특유의 카리스마로 헤쳐나간 것은 꽤 유명하고 그런 연유로 오늘날 미국 시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의 순위에 항상 수위를 놏치지 않는 배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의 뒷부분에서 베버가 우려한 대로 민주주의 혹은 민주 정체 하에서 과도하게 경제 권력이라든지 사법 권력이 사회와 국가를 손아귀에 넣게 되는 과두제 상황의 카리스마적 지배도 민주주의의 토양 아래서 시작되어 체제 전반을 뒤흔들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겠는데요. 그래서 베버는 금욕과 남들과 우월한 도덕적인 선명성을 위해 보다 '객관화된 카리스마적 교육'을 통해 사실상 이를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국가나 종교가 주도하는 카리스마 교육이 전문성을 떠나 창의적으로 발휘될 수 있다면 그것이 사회 체제에 이득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았습니다. 다만, 종교가 과거와는 달리 엄격하게 정치 영역에서 분리되어 있듯이 지금의 종교가 가히 초월적인 지도자를 배출하여 사실상 지금의 '정교분리'에 위해를 가할 상황이 발생한다면 과연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 교회를 보더라도 단순히 정치적 의견이나 이데올로기보다 순수한 기독교 자체가 정치 무대에 올라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는 종교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종교적 관용과 더불어 다수의 의견은 물론 정치적 주장을 할 권리를 보장하기 때문에 과연 그 '종교적 카리스마' 다수의 이익이 될지는 큰 의구심이 듭니다.

끝으로 전통적인 카리스마적 지배가 본질적으로 많은 추종자들을 양산한다는 점에서 이것을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하의 정당 정치나 혹은 특출난 지도력을 보이는 정치 지도자에게 대입해보면 베버의 분석들을 과도한 해석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는데요. 저는 앞선 1장에서 베버가 '추종자들의 복리'라는 부분과 관련해,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아예 이를 눈 감을 수 없다는 논증에서 우려 섞인 감정이 들었습니다. 이미 앞선 진술에서 카리스마가 일상화를 통해 거의 전통적인 관료제에 준하는 체제로 변화되고 이식되는 것을 보았는데요. 그래서 베버의 논증대로 민주 체제 하에서 특출난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출현이 타협과 대화라는 민주적 가치에 위배될 수 있는 환경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과거에 히틀러가 어떤 식으로 권력을 쟁취하여 그러한 권력을 사유화 했는지는 역사가 명확하게 이를 증명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베버가 언급하는 '윤번제 원리'와 직접 민주주의 체제의 언급은 그래서 뭔가 기시감을 느끼게 해주기도 합니다. 결국 고결함과 도덕적 책무 그리고 겸허함을 결여한 카리스마와 그것을 유지하게 하는 몰개성적 추종자들의 존재는 카리스마의 양가적 측면을 여실이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왜곡된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드러낼 게 없는 자가 그러한 카리스마를 연기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의미로 경계해야 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일상화가 이루어지면서 카리스마적 지배 단체는 점점 더 일상적인 지배 형태(가산제 형태, 특히 신분제 형태 또는 관료제 형태)로 발전한다

국왕의 경우에는 후계자 지명이 전통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역사시대에는 독재관,공동 통치자, 초기의 후계자 재정 임명도 그러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카리스마 힘으로 정당한 수장이 된 자는 복종자들 덕분에 수장이 된 것이다

반면에 진정한 카리스마적 지배에서는 ‘올바른‘법에 대한 논쟁이 사실상 종종 추종자 집단의 판단에 의해 해결되는데, 이 판단은 단 하나의 올바른 결정만 있고 이러한 결정에 도달하는 것이 의무라는 심리적인 압박감에서 이루어진다

전통적인 정통성은 형식적인 합법성과 마찬가지로 혁명적인 독재에 의해 똑같이 무시된다

카리스마의 혁명적인 역할과는 달리, 정치 영역과 종교 영역에서 전통적이며 친숙한 일상적인 요구는 관습, 전통 존중, 부모와 조상에 대한 효심, 하인의 개인적인 충성에 근거한 가부장제 조직에 의헤 충족된다

반면에 카리스마 복종자들은 정기적으로 지대를 받는 ‘신민‘, 세금을 내는 교회, 종파, 정당, 조합 등의 회원, 규칙과 명령에 따라 복무를 강요받고 훈련받아 규율이 잡힌 군인이나 준법정신이 투철한 ‘국민‘이 된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 각각의 혈족이 지닌 권리의 ‘정당성‘ 근거는 재산이나 관직을 주는 것에 따른 개인적인 충성 관계가 아니라 각각가의 가문에 내재하는 특별한 카리스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일상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신성한 힘으로서의 바로 그 성질이 일상화 이후에도 카리스마를 지닌 영웅의 후계자들에게는 지배권을 정당하게 획득할 수 있는 적절한 원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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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일상생활 - 사랑, 결혼, 그리고 페미니즘 현대의 지성 119
크리스토퍼 래쉬 지음, 엘리자베스 래쉬 퀸 엮음, 오정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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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크리스토퍼 래쉬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진보주의자이면서 역사가, 도덕주의자 그리고 사회비평가였습니다. 흔히 미국의 진보주의 역사에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와 더불어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크리스토퍼 래쉬이기도 한데요. 이와 더불어 C. 라이트 밀스와 하워드 진과도 같이 회자되는 지식인입니다. 그는 미국 네브레스카 주 오마하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박사를 수여 받습니다. 특히 래쉬는 헨리 조지와 지그문트 프로이트, 테오도어 아도르노 등에게 학문적으로 큰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래쉬의 치열한 사상적 행로 가운데에서 그가 비판한 '냉전적 자유주의'에 절로 관심이 갔는데요. 미국내 자유지상주의자들에 대한 래쉬의 비판을 접하고 나니 참으로 외로운 길을 자청해서 걸었던 지식인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지식인들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은 자유주의 자체가 인류에게 있어 과거의 억압으로부터 역사의 진보를 이루게 한 원동력이었지만 그렇다고 오직 자유주의만이 비판을 받지 말아야 하는 절대지고의 가치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자유주의가 오도한 적지 않은 병폐에 대해 많은 지식인들이 눈을 감고 있는 실정에서 유독 래쉬의 도덕적 양심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는 엘리트 지배 계층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의 본래적 의미가 퇴색되고 결국 이러한 파국적 이행이 시민들에게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기도 했는데요. 여기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의 여러 논저들이 제대로 국내에 번역되지 않는 상황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모쪼록 래쉬의 다른 글들도 우리 독자들이 볼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래봅니다. 여기 이 책은 원제, "Women and the Common Life : Love. Marriage and Feminism"으로 지난 199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4년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글의 책머리에는 크리스토퍼 래쉬의 딸인 엘리자베스 레쉬 퀸의 이 책에 대한 소개와 아버지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가 본문에 앞서 수록되어 있습니다. 래쉬가 죽기 10일전에 완성한 이 소중한 글은 그가 죽음의 병마와 싸우면서도 마지막 글을 탈고하기 위해 얼마나 귀중한 시간들을 사용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는데요. 사회에 적잖은 이정표를 남긴 한 지식인의 마지막이 담담하게 쓰여져 있어서 개인적으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래쉬의 이 책은 유럽에서 계몽주의가 정착하기 이전의 시기부터 이후 1980년대까지 우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이라는 존재와 그들이 처했던 비이성적인 상황, 그리고 일반적인 여성들의 삶을 고찰해 보고, 최근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어떻게 '여성의 권리'가 정치적 편의로 인해, 주류에서 소외 되었는지에 대한 일종의 논증 작업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이에 1장부터 3장은 계몽이 일부 유산계층의 남성들에게 집중된 시기에 이들과 사회 전반이 여성들을 어떤 식으로 취급했는지에 대해 여러 사료들과 문학 작품 등을 통해 살펴보는데요. 이미 탁월한 역사학자이기도 한 저자의 사료 분석은 꽤 설득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서도 드러나지만 당시 사회의 중간 계급조차도 남녀 간의 결혼은 동등한 남녀의 결합이라기 보다는 여성의 입장에서 자신의 안온한 인생을 위한 일종의 사회적 안전 장치라고도 볼 수 있었는데요. 래쉬의 의견 역시 이에 부합하는 측면에서, "여성의 성을 남성에게 제공한다"는 의미가 그 시대의 뿌리 박힌 관습이었다고 분석합니다. 따라서 일부 귀족 계급의 여성들을 제외한다면 대다수의 여성들은 이러한 사회적 인식 하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 거의 타당한 분석일 겁니다. 남성에게 교태를 부리고, 남자들에게 성적인 만족을 자신이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포함한 매혹과 이러한 메커니즘 전반이 여성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의의라는 고정관념이 당시 사회에 팽배해 있었는데요. 이러한 현실을 처음 비판한 여성은 바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였습니다. 울스턴크래프트의 문제 제기 이후에도 현실에서 노동 계급에 속한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남성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4장에서 울스턴 크래프트는 "경제적 자립성을 결여한 여성을 아름다움에 바쳐지는 감각적인 경의"를 통해 남성들에게 힘을 행사하고자 했다고 평가하는데요. 아마도 경제적 자립성의 중요성을 여성에게 연계해 자신의 외모를 통해, 스스로 '생활의 고단함'을 회피하고자 했던 것이죠. 여성의 성이 남성에게 단순히 섹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하층 여성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먼저 숙고해보는 것이 이 글의 전체적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이미 중세사와 관련해 어느 정도 당시의 사회상을 어렴풋이 나마 인식하고 있듯이, 가장의 권위가 중심이 된 오래된 가부장제의 틀이나 소위 '가정성'에 대한 여성의 의무가 16세기 이후에도 고착화 된 것이 여성 자체를 사실상 남성의 소유로 여겼던 배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기본적으로 강조하는 자신의 성에 대한 통제는 남녀가 결코 이성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한데요. 래쉬에 의해 이미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여성이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기본적인 인식을 사실상 인정하는 문호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당시에도 일부 지식인들도 사회적 관습으로 강요하고 있던 여성의 이 같은 굴레들에 대해 어느 정도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귀족 문화를 비롯 상류 계급의 결혼 문화라든지 상류 여성들이 항유하는 문화가 시대적 관습의 과오에 머물러 있었으며, 1장에서 비판적으로 진술 되듯이 부르주아 집단에서 시골 귀족층의 계몽되지 못한 성의 왜곡 상황을 이 즈음부터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꽤 고무적인 일이라 볼 수 있었는데요. 사실 인간을 모두를 위한 '이성의 불빛'은 오로지 하나의 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성에게도 해당되는 것으로 이를 모든 세대가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러여 했습니다. 이처럼 역사적 진보 자체가 더디고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나 에릭 홉스봄의 과거 언급대로 과거 역사를 거스르는 진보의 힘은 분명 아주 조그만 단초로부터 비롯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날과는 상이한 차이를 보이는 당시 남녀 간의 사랑은 다분히 여성들이 남성들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해야 하며, 그런 와중에 자신의 아내들을 쉴 새 없이 '임신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윤리적인 무계획까지도 포함하고 있는데요. 래쉬가 언급하는 당시 '여성 재사들'이 아직도 강고한 '여성들의 정절에 대한 요구'와 더불어 현존한 결혼 제도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여성 재사들이라는 표현은 일종의 이성에 눈을 뜬, 각성한 여성들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이들은 초기 활동 시기에 남성 위주의 사회 제도와 관습에 열정적으로 비판을 가했으며, 그로 인해 울스턴크래프트가 여성주의(초기 전통적인) 자체가 이성의 산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로서 본격적으로 개화한 부류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사회의 강고한 관습에 반해 저항한 계층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즉, 남성 위주의 기득권들을 위한 사회적 제도를 이성적 측면에서 다시 돌아보고 개선해야 된다는 흐름이기도 한 데요. 이러한 진보는 그저 당대에 국한된 여성들 뿐만이 아니라 후에 이런 사회적 관습 하에 태어나게 될 다른 여성들과 더불어 사회 제도가 기본적인 '도덕적 양심'에 의해 재구축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현재에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진정한 남녀 평등은 바로 이러한 인식 하에 공통된 사회적 저변를 대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가 표출했던 단순한 사회상으로 여길 수 없는 '충동적인 결혼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다루고 있는 3장은, 앞서 서술한 결혼 제도가 전반적으로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린 나이의 소년 소녀들이 충동적으로 결정한 결혼에 대한 결정을 단순히 돈과 명예를 위해 교회가 비이성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실태를 꼬집고 있습니다. "젋은 여자들이 본질상 너무나 쉽게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의 절개를 믿게 되고 자신과 결혼하겠다는 남자의 진지한 약속을 잠자리로 받아들이고 보답하려는 경향"에서 기존의 교회가 갖고 있던 결혼 예식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는 사회적 명령은 일종의 개혁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이 사실상 결혼하지 못하게 막는 교구 관리인들 혹은 교구 정치인들의 폐단은 대단한 것이었는데요. 단순히 종교 자체가 사회에 기여하는 바를 나열하고 그것의 정당성을 강화시키는 여러 논의들 가운데서 당시 유럽의 종교 권력 자체가 예전과는 다른 '이성의 시대'를 목도하고 있었으며 그런 계몽주의가 종교를 마땅히 '대단한 권력'으로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의 폐단과 더불어 18세기 영국에서 대부분의 여성이 이십대 중반에 결혼을 한다면, 십대나 이십대 초반에 결혼한 임산부는 우발적이고 비정상적인 만남의 과정에서 임신을 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생각하게 된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는 점에서 여성의 성에 대한 여성들 스스로의 통제가 이 시기에도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18세기 말엽과 19세기 이후 유럽에서 본격적인 산업 발전이 이뤄지면서 여성 노동에 대한 정치권과 부르주아 계층의 함의가 드러나게 되고, 본격적으로 가계 경제에 여성이 기여할 수 있게 되는데요. 그동안 전통적인 가부장제도 하에 본래적인 가정성에 대한 지지와 결속이 당시까지도 이어졌다고 봐야 할 겁니다. 다만 신대륙이었던 미국은 구대륙의 유럽과는 다른 경향을 보이기도 했는데요. 물론 신대륙에서도 남성들이 오로지 상업 거래와 자신의 경제적 성취에 모든 걸 투입하게 됩니다. 여기에 가정의 희생도 포함되는 것이죠. 그렇지만 신대륙의 많은 여성들은 래쉬에 의하면, 여성의 공적 세계에 대한 자발적인 참여는 폭발적인 것이었습니다. 진보적 시기라 불리는 1890년부터 1920년 사이에는 오늘 기업 세계와 비견될 정도로 조직된 연계망을 구축합니다. 이 여성들은 노동자들과 흑인들의 인권 개선을 위해 '돈을 받지 않는 자발적인 자원 봉사'로 운동을 구축하고 이러한 활동들이 미국 사회의 진보에 큰 역할을 하게 되는데요. 수많은 남성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자아 성취에 빠져 있는 동안 여성들은 이렇게 큰 역사적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제가 보기에도 역사의 기적으로도 여겨지는데요. 이러한 큰 공동체적 기여와 책임 의식이 신자유주의 이행 상황에서 오로지 개인주의화되는 미국 사회의 단편을 래쉬 역시 크게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약간 다른 접근이지만 이런 개인주의화는 사실상 사회의 진보와 시민들의 건전한 활동을 사실상 저해하는 요소로 이해되는데요.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와 아주 밀접한 만큼 일반적인 사회적 책임이나 도덕적 의무와는 완전 별개의 생명체임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래쉬는 글 초입에서 "현대 페미니즘이 결혼과 남녀 평등을 화해 시키려 노력했다고 강조합니다. 아직도 많은 여성들과 특히 페미니스트들이 대다수의 남성들이 "위선자이며 사기꾼"이라는 인식을 어느 정도 저변에 깔고 있는 것처럼, 전통적인 가부장제도와 가정성에 대한 강고한 의문을 페미니스트들은 파헤쳐 왔습니다. 현대 의사들과 정치인들이 한통속이 되어 저출산 문제와 같은 현대 사회의 고민들을 자신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고 저들이 결탁해 "어디 즈음에 여성의 책임"있다는 식으로 치부해 왔다는 것을 공격하기도 했는데요. 아마도 이러한 인식의 최종 책임은 남녀 평등에 대한 민주주의의 경시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와 관련해, 1950년대 미국에서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민주주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1960년대에 서구 사회에서 여성 참정권이라는 정치적 권리를 여성계가 획득하게 되는데요. 그럼에도 당시 미국 사회는 앞으로 이어질 진정한 남녀 평등이라는 의제를 뒤로 물리고 '당면한 흑백 간의 차별과 흑인의 권리'에 대해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도 역시 민주화 과정에서 여성주의 운동과 관련해, 먼저 시민의 정치적 권리와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먼저 나서게 됨으로써, 폐미니스트들의 불만을 초래한 바가 있습니다. 사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조정이 필요한 시기에서 우리가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하고 공격하여 좀 더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함과 동시에 뒷짐 지고 있는 자본주의는 민주주의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결함이자 축복이라고 볼 수 있는 갈등과 대결을 아무런 불안감 없이 그저 웃으면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래쉬가 토로한 '일상 생활의 강등'은 이런 의미가 아닌가 생각해 보는데요. 또한 기존의 페미니스트들이 오늘날 심대되고 있는 과학 기술과 전문 영역이 사회에 끼치는 오판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도 이들이 스스로 민주주의가 우선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착화 된 논리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하는데요. 물론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스펙트럼이 다양하다고 볼 수 있기에 이들이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어떠한 인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하는 래쉬와 함께 우리 시민들도 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일반적인 성에 대한 솔직성을 강조하는 의사들의 권유를 단순히 전문가들의 긍정적인 기여라고 전부 치부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역사사회적 발전에서 근대성이 갖는 의미도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변혁과 개변이 이뤄지기도 하는데요. 물론 남녀 평등과 여성의 권리에 대해 아직도 부족하다고 여기는 일각의 의견도 많을 겁니다. 이것을 어떠한 식으로 바라봐야 하는 지에 대한 다양한 여러 의견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남녀 평등과 여성의 권리를 마땅히 보장해 주었던 우리의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점은 분명하고 이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막말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여성의 권리나 남녀 평등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며, 다수의 시민들이 스스로의 정치적 인식과 배경을 바탕으로 여러 정치적 문제와 마찬가지로 남녀 간의 문제도 다룰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여성의 권리라든지 남녀 평등 문제가 오로지 페미니스트들만이 다룰 수 있는 고결한 분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덧붙여 앞으로도 많은 여성주의 운동가들도 우리의 민주주의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71페이지 문장 한 곳에 조사 하나가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문에 래시와 래쉬와 같이 저자의 이름이 통일되지 않은 문장들이 보였습니다. 


래쉬는 여기에서 보편적으로 인간의 힘과 평등 그리고 자존감의 본질은 우리가 삶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오랜 시간 헌신하며 정면으로 도전에 맞서는 것으로부터 얻어진다는 사상을 추구한다

이와 같이 구시대의 전통인 가부장제가 자유주의 국가라는 새로운 헤게모니에 의해 대체되는 것이 대국적인 그림이다

그들은 성간의 평등에 기초한 사랑과 부인이 남편의 권위에 복종할 것이 당연시되는 계층적 타협인 결혼 사이의 모순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결혼으로 인한 결합이 토지 재산의 강화와 상속, 그리고 귀족 가문과 혈통의 유지를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한, 낭만적인 열정이나 당사자들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결혼은 이루어졌다

여성 정절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험담가들에 대항하여 여자를 지키기 위해 말을 달리는 기사들과 같이 여기는 것이다

풀랭 드 라 바르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로 시작한 여성주의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는 차원의 원칙에 따라 사회 제도들이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기조로 하고 있다

성실한 부모들은, 그들의 딸들이 교회의 묵인 하에 낚아채이고 꼬임을 당해 결혼으로 이끌어질 때 무능력하게 방관해야만 한다

물론 그들 역시 사랑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지만 결혼을 일찍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그들의 주장은 그들이 사랑을 성숙한 사고와 오랜 사귐의 산물로 여기기보다 성적 매력의 작용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대부분의 여성이 18세기 영국에서 대부분 그러했듯이 이십대 중반에 결혼을 한다면, 십대나 이십대 초반에 결혼한 임산부는 우발적이고 비정상적인 만남의 과정에서 임신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생각하게 된 경우라고 추정할 수 있다

울스턴크래프트의 글에서는 결혼이 본질상 여성에 대한 감옥이라는 어떠한 의견도 없다. 그녀는 대신 결혼을 우정의 최고 형태로 보았고, 따라서 본질적으로 평등한 결합으로 보았으며 여성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주는 동반자 관계라고 생각했다

비록 우리 시대에 와서 여성을 부엌에 머무르게 하려고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로 곡해하기는 하지만, 가정성에 대한 예찬은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꼭 생각하지 않은 여성들에게도 페미니즘적 사고를 형성해내었다

이에 따라 잘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폐미니즘에 대한 반대가 나오게 되었다. 더 이상 시민적 평등권에 대한 이의로 만족할 수 없게 된 운동에 대한 반대였다

성간의 전쟁은 강연장을 떠나 침실로 그 자리를 옮겼다. 성적 쾌락에 대한 여성의 평등권 주장은 이전에 사회 개혁과 시민 문화 향상에 집중되던 에너지를 흡수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고소득 법률가, 광고업계 중역, 방송 언론인, 대학 교수 같은 직업이 "조직적 체계"를 유지하는 데에만 봉사한다면, 이러한 직업이 자동차 수리공같이 스스로 유용한 척 꾸미지도 않는 직업보다는 더욱 부도덕하다

여성이 기업과 로펌, 신문, 출판사, 텔레비전 방송국, 대학, 병원을 운영할 수 있게 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기관들을 더 인간적이고 민주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

고결성은 최소의 저항선에 굴복하는 것, 군중을 따르는 것, 정직과 자기 존중의 대가로 대중의 비위를 맞추는 것 등을 거부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대는 페미니즘이 가사일과 자녀 양육을 집단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과 너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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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10-16 15: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크리스토퍼 래쉬!!!
하워드 진과 함께 거론된다고 하니 관심이 가네요.
이책 내용도 그랗구요

베터라이프 2022-10-16 00:23   좋아요 2 | URL
부족한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제 글을 읽어보니 비문하고 오타가 많네요. 게으른 저는 내일에나 손을 보려고 합니다. 혹시 이 글을 읽게되신다면 따님이 남긴 첫머리글을 꼭 읽어보세요. 부친에 대한 따님의 속정이 엿보이더군요. ^^ 와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블랙아웃
마크 엘스베르크 지음, 백종유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마크 엘스베르크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전세계적으로 그의 작품은 수백만 부가 판매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이 '블랙아웃'은 독일어권에서 180여만부나 팔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또한 몇 년 간 슈피겔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랫동안 이름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간단한 이력으로 그는 비엔나 응용예술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광고 업계에서 자신의 전공을 살리기도 했는데요. 동시에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일간지 데어 스탄다드에 칼럼을 쓰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Black Out"으로 201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3월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다만 국내 번역본은 현재 절판된 상황입니다.

제가 이 책을 다 일독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엉뚱하게도 "각 국의 발전소와 발전 설비가 해킹 공격으로부터 과연 안전한 것인가?"라는 의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실 그동안 전문가들의 영역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의 사회에 대한 기여와 능력을 어느 정도는 신뢰해야만 한다고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죠. 병원에서 담당 의사를 믿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작가인 엘스베르크가 가진 의문과도 동일해 보이는 발전소의 설비들의 아키텍처가 독립적이고 고유한 것으로서 자연재해나 혹은 불특정한 해커들의 공격에서 스스로의 안전을 지켜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엘스베르크도 글 한 자락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과거 일본의 후쿠시마도 그 문제가 터졌을 때, 원자력 전문가들은 일관되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이스라엘이 관여한 것으로 추측되는 이란의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공격도 짧게 언급이 되기도 합니다.


현재 유럽이 천연가스에 한해서는 파이프 라인으로 연결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전 유럽이 그렇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요. 그러한 맥락에서 이 소설이 경고하는 유럽 전력망에 대한 공격은 꽤 신빙성이 있는 소재였습니다. 더욱이 "세상에 완벽한 시스템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사는 크게 공감이 되기도 했는데요. 송전선이나 변전소와 같은 곳의 직접적인 공격도 위험하겠지만 오늘날과 같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네트워크 시대에서 해킹의 존재는 참으로 불안한 문제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엘스베르크의 이 소설에 대해 서평들을 남겨주셨지만 개인적으로는 스토리 라인 자체의 특별한 매력이 있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주인공인 만자노와 그와 엮이게 되는 몇몇 인물들의 개성, 그리고 유럽의 주요 도시를 넘나드는 서사는 매력이 될 수도 있겠으나 특별한 반전 없이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 자체는 크게 긴장감이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더욱이 극좌라든지 무정부주의를 언뜻 끄집어내며, 자본주의에 반하여 일종의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테러리스트들의 명분도 현실적으로는 크게 설득력은 없었는데요. 다만, 저들이 상당한 재산을 가진 부유층을 공격해서 자금 마련에 나서는 것과 일종의 발전소에 쓰이는 운영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독점 기업에 해킹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는 등의 일반적인 전문 해커들의 소재는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럽 연합 차원에서 아무런 해결 방안도 꺼내지 못하는 무능력한 상황을 어두운 과거를 가진 일개 시민이 유럽 전체를 거의 석기시대로 몰아가는 심각한 위기를 타파해 나가는 과정은 카타르시스 보다는 의구심을 갖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기자의 조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설 곳곳에 작위적인 설정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기도 했고요. 

끝으로 이 작품은 대체로 무난한 스토리 라인에 어느 정도 예상되는 사건 전개가 대체로 수월하게 읽히는 글이기도 했는데요. 그렇다고 무미건조한 글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색다른 소재에 비해서 중후반의 긴장감이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저에게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블랙아웃이 전유럽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유럽 정치와 전형적인 기업 이기주의에 대한 꽤 흥미로운 서술이 인상적이기도 했는데요, 더불어 다수의 독자들도 느끼셨겠지만 원자력 발전소가 그런 심대한 위기에 처하면 국가가 과연 재빠르게 대처할 수 있느냐에 대해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겼는데요. 이렇게 유사시에 원자로의 냉각을 위해 가동되어야만 하는 디젤 발전기가 만약 제 기능을 하지 않는다면 엄청난 재앙이 될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잖아도 며칠 전에 이와 비슷한 우려를 담은 기사 하나가 어느 언론사를 통해 올라온 기사도 이런 우려를 자아내게 하더군요.



- 본문 535페이지에 등장하는 1986년 학생운동은 아마도 1968년의 68운동을 오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아니면 소설 속의 고유한 장치로서 68운동을 오마주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정치가, 은행가 그리고 경영자라는 칭호를 달았지만 사실은 소수에 불과한 범죄 집단이 인간을 지배하고, 기만하고, 약탈을 자행하고 있잖아, 그런 현실 앞에서 절망을 느끼는 인간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에겐 언제라도 또다시 기회가 주어질거야,

"안전을 영구히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만일 현 상황에서 유럽의 원자력 발전소에 디젤유가 추가로 공급되지 않으면 며칠 후에는 비상 발전 시스템이 멈출 것이고, 이는 원자로 냉각 시스템 가동 중단으로 이어질 것이다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전면 중단시켰다가 신속하게 곧바로 재가동하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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