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봉기 사회학 고전 시리즈 6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정헌주 옮김 / 간디서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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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과거 스페인의 철학자이자 문필가였습니다. 그는 지난 유럽의 격동의 시기라고 볼 수 있는 20세기 전반에 여러 문필 활동을 했는데요. 이 시기는 그의 모국인 스페인에게 있어 군주제와 공화제 및 독재 사이를 오가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때였습니다. 그는 특히 에드문드 후설에게 큰 영향을 받아, 그만의 독창적인 지적 원동력이 되었던 사실주의적 역사주의에 몰입했고 이는 당시 세계가 자유주의의 흐름에 놓여 있었을 때, 자유주의를 비판적으로 옹호하면서도 지식인들이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이 역사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평생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현실 정치에 있어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스페인 제2공화국 제헌의회에서 레온 주 의원을 활동하기도 했으나 곧 정치에 대해 실망하게 됩니다. 이처럼 그의 주요 사상은 존 스튜어트 밀의 개인의 합리적 이익을 바탕으로 한 자유주의를 지지하고 그런 연유에서 '대중의 분석'에 대해 학문적 역량을 기울인 인물로 오늘날까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a rebelión de las masas"로 지난 193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본은 스페인어 출판본이 아니라, 영역본인 "The Revolt of The Masses, 1932"를 바탕으로 번역됩니다. 이 논저의 국내 출간은 2022년 10월에 이루어졌습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이 논저는, 1929년부터 일간지 태양 El Sol에 기고한 글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예술가협에서 두 차례 걸쳐 행한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이 나오게 된 당시 유럽은 파시즘과 볼셰비즘이라는 불행한 역사적 파고 앞에 놓여 있었고, 가세트와 같은 논쟁적인 대중론은 여실히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자에게 영감이 되었던 것도 분명 사실입니다. 다만, 이 대중의 봉기에서도 대중들이 '폭력'에 몰두하는 등의 군중과 다름없는 행태를 비판하면서도 이 글의 9장에서, 전문가 그룹의 교양을 결여한 '야만적인 상태'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는 점은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 논의되고 있는 저자의 진술들 모두를 수긍할 수는 없겠지만 오늘날에 대입해 봐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대중 정치의 한계 혹은 민주주의적 참여 정치의 불가능성을 논법한 5장의 "보통선거 제도 하에서는 대중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집단이 결정하는 것을 후원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라는 분석은 귀담아 들을 만 했습니다. 18세기를 지나 당시 유럽을 변혁의 길로 이끈 자유주의는 귀족이 지방과 국가 전체에 큰 기여를 했던 전(前)시대와는 분명 다른 역사시대적 맥락이었습니다. 유럽의 귀족주의가 17세기와 18세기 초엽의 프랑스를 비롯한 사회적 부패의 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이런 귀족들이 몇세기에 걸쳐 그 시대에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기여한 점을 명백히 하고 있었는데요. 그의 이런 주장들은 앞서 언급한 전문가 집단의 몰교양과 관련하여 오로지 자신의 분야에 집착하고 그것의 큰 권위를 얻은 전문가들이 몇 시대 전의 귀족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고 다시금 평가합니다.

이미 5장에서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현 시대의 번영과 관련해,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인 자유 민주주의가 최선의 유형이 아닐지라도 과거의 체제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본질의 차원에서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일반적으로 자유 민주주의가 추동한 일반적인 삶의 발전은 이보다 낮은 수준의 삶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사활적인 의미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가운데 대중의 삶 전반이 현실에 위축되지 않고 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존중과 인정 가운데 점진적으로 나아간 것인데요. 사회 조직적인 측면에서 대중이 자신들이 처한 입장과 사회가 본질적으로 변화가 된 이유를 지식인 계층보다 더 분석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삶'에 있어 대중이 갖는 의미는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과거 프랑스 혁명의 대중의 직접적인 봉기는 자신들의 삶을 무너뜨린 구체제에 대한 분노였다면 저자가 말하는 그 이후의 대중은 그의 말마따나 여전히 야만적이지만 그와 동시에 각자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쟁취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귀족의 시대에 대한 얼마간의 회고는 바로 이러한 인식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처럼 자유주의가 일정 부분 변화시킨 세계는 법과 규율 아래 사회가 요구하는 금도를 지키며 살아가는 대중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와 같은 지식인 계급에게는 이러한 현실이 명과 암이 교차하는 현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대중이 스스로를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게 되는 폭력적 상황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 가운데 사회 전반을 통제했던 귀족주의에 대한 향수를 느낄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즉, 계급적인 귀족이라는 사전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넘어서 현재의 자신을 뛰어넘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과 동의어로 간주한다"는 저자의 해석은 귀족의 다의성을 짐작하게 하는데요. 우리가 전근대적인 과거 귀족 계급의 폐해를 잠시나마 뒤로 물리고 진정한 귀족이 사라진 시대에서 대중이 소위 봉기하는 상황에 존 스튜어트 밀이 긍정한 자유주의적 대중의 시대를 마냥 받아들이긴 어려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저자가 강조하는 대중에 대한 (부정적인) 진면목은 바로 교양이 결여된 야만적인 상태라는 점일 텐데요. 교양 자체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고, 그런 가운데 한편으론 저자가 바라는 "적과의 공존 혹은 반대 세력과의 협치"와 같은 유연한 정치 형태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의문 부호를 찍고 있습니다. 이 8장의 논증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가운데 한 사람인 토머스 제퍼슨의 우려와도 맞닿아 있는데요. 자유주의적 이행의 한복판에서 소위 일반 대중들을 포함한 다수가 소수의 그룹을 무력으로 억압하거나 발언을 약화시키는 문제를 어떻게 하면 방지할 수 있을지 그러한 고민이 여기에도 담겨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의 말대로 자유주의가 다수가 소수의 권리를 마땅히 인정하는 체계라면 모든 대중들은 이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겁니다. 결국 평생의 교육과 관련된 대중들이 더욱 교양과 가까워지는 길은 스스로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지금까지 구축해 온 사회와 국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역사와 문화를 비롯한 상식과 지혜를 갖추는데 노력해야 됨은 거의 자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민주주의가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덕목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대중 정치에 대한 일부 엘리트들의 숱한 경멸과 비난을 감안한다면 오늘날 자본주의조차도 해결해 주지 않는 사회 전반에 있어 자본과 정치의 결탁을 방지하는데 대중 혹은 시민의 스스로에 대한 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어지는 파시즘과 볼셰비즘에 대한 저자의 비판 또한 당시에 어떤 지식인의 경고보다도 확실한 비판을 이 글에 담고 있습니다. 이 양자는 미래를 보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연연하고 그런 측면에서 반동적인 의미로 읽힐 수 있겠는데요. "볼셰비즘과 파시즘 둘다 거짓 여명이다"는 진술은 이처럼 설득적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강을 마주 보고 앞에 있는 자유주의와 그것의 이질적인 존재인 반자유주의 혹은 비자유주의는 유럽을 파괴하여 절멸에 이르게 한다는 경고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이 글이 전유럽을 다시금 비참한 전쟁으로 이끈 제2차 세계대전을 목도하기 전에 쓰여진 것이지만 후에 카를 슈미트가 분석한 자유주의의 나약함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할지언정 자유주의를 배격하는 반자유주의가 출몰할 때 유럽이 어떠한 상황에 놓였는지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대중과 자유주의'라는 주제로 이 글을 일독하게 되면 논증의 일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자의 의도를 어느 정도는 명확히 살펴볼 수는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거나 작금의 소수 지배 계급이 통제되지 않는 대중에 대한 공포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데요. 저자의 언급대로 인간이 항상 폭력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이를 대중과 부정적인 측면에 연결시킬 수도 있겠지만 이런 대중을 있게 한 원천이 자유주의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면 저자의 비판적 인식이 좀 더 수정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가 그토록 두려워 하는 '야만의 상태'는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전문가 그룹의 결여된 교양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선출된 국민 국가의 근본적인 변혁은 당시 유럽에 있어 크나큰 혁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혁명이라면 어떠한 것이든 게거품을 물었던 당시 일각을 고려해 본다면 뒤이어 역사에 등장할 '민족주의의 폭력적 기운'과 이에 다시금 동조한 국민 국가의 몰락은 어쩌면 치명적인 교훈으로 자리매김하기에 하등 부족하지가 않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의 대중이 어떠할 것인가에 대해 그리고 세계가 어떠한 변혁을 맞이하고 그로 인한 공화주의와 자유주의가 어떻게 생존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는 어쩌면 지식인의 사명일 수도 있겠습니다. 역사에 기초했지만 시대의 불안을 초래하는 급격한 변화를 누군가는 예견해야만 한다는 절박한 심정은 '대중의 봉기'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이 책을 '봉기'보다는 '대두'로 바꾸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싶기도 한데요. 원제가 '반란'에 가깝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저의 이런 해석은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다시금 '야만의 상태'로 회귀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독자들에게 이 논저가 읽혔으면 합니다. 특히, 극단주의의 앞머리에 노출되어 있는 현재 유럽은 가세트의 글을 염두해 둘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더욱이 카를 슈미트 식의 대결주의는 더욱더 정치적 분별력을 발휘해 해쳐 나갈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글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아쉽게도 번역이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 문장들마다 어색한 부분이 곳곳에 보이기도 했는데요. 특히 특정 조사의 반복적인 사용은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왜 원서를 바로 번역하지 않고 중역(사실상)을 했는지 조금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군중이나 대중이 아닌 소수집단은 대다수 사람을 배제하기 위해 구성원들 간에 욕망이나 이념, 이상 등을 효과적으로 일치시키려 한다.

유럽에서 대중이 승리하고 그에 따라 생활수준이 엄청나게 향상된 것은 내부적인 이유, 즉 두 세기에 걸친 사회의 진보에 따른 경제 향상과 대중교육 탓이다.

대중의 봉기는 흔히 유럽의 몰락을 가져온다고 말하는데 이와 반대로 유럽에 엄청난 활력과 가능성을 가져다 주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어떤 세기는 자신의 시대가 ‘절정‘에 달했다고 느낀 반면 어떤 세기는 수준이 높은 시대, 예컨대 아득히 먼 찬란한 황금시대보다 수준이 낮아졌다고 말했다.

보통선거 제도 하에서는 대중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집단이 결정하는 것을 후원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어느 시대나 ‘보통사람‘에게 ‘삶‘은 기본적으로 제약과 의무, 의존, 한마디로 압박을 수반했다.

식료품 부족으로 인한 혼란 상황에서 폭도들은 빵을 찾으러 다니면서 때때로 빵집을 부수곤 한다. 이것이 오늘날 대중이 자신을 후원해주는 문명에 맞서 대대적으로 취하는 복잡한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귀족이라는 말을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넘어서 현재의 자신을 뛰어넘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과 동의어로 간주한다.

19세기는 자동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냈고 그에게 엄청난 욕구와 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온갖 종류의 강력한 수단을 부여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대중은 우연하게 얻은 진부한 상식, 편견, 엉터리 관념 또는 공허한 말을 가슴속에 수북이 채워놓고서 그것들을 순진할 정도로 대담하게 아무데나 들이댄다.

즉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권위에 호소하고 그 권위에 복종하며 그것의 규약과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과 동일하며, 따라서 최고의 상호교류 형태는 우리 사상의 근거를 가지고 논의하는 대화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일하다.

유럽과 그 주변 지대에서 태동하고 있는 볼셰비즘과 파시즘이 두 ‘새로운‘정치적 시도는 근본적인 퇴행을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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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 - 똑똑한 사람들은 왜 민주주의에 해로운가
마이클 린치 지음, 황성원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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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코네티컷 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마이클 린치는 미국 상원에 출석할 정도로 학자적 명성을 얻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시라큐스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곧 강단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2019년에는 대중 담론의 비판적 분석에 뛰어난 공헌을 한 작가에게 수여하는 조지 오웰 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그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적 담론에 큰 관심을 갖고 있고, 거의 처음으로 다원론적 진리 이론을 도출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에 그는 민주주의 정치에서 차츰 쓰이고 있는 '빅 데이터 이론'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요. 린치가 다원론적 진리 이론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로 보건대, 기본적인 진리에 대한 입장이 여느 학자들에 비해 차원이 다르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진리인가에 대해 무엇보다 성찰적 실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의 글을 충분히 일독할 이유가 된다고 여겨집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Know It All Society : Truth and Arrogance in Political Culture"로 지난 201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20년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글의 원제와도 관련되어 있는, "now-it-all"은 실제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분명 이와 같은 현상은 반쯤 농담에 가까울 테지만 여기서 분명한 점은 현재 미국 사회가 진실을 오도하면서 가히 오만하고 독단적인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전에 리처드 J. 번스타인은 이런 현상에 대해 명백히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저자도 번스타인과 비슷한 목소리를 내기에 이르는데요, 무엇보다 미국 사회철학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존 듀이의 선구자적 업적을 무색해 하는 이런 행위들은 크게는 미국 정치를 쇠락으로 이끄는 중입니다. 특히, 오만한 백인 우월주의가 어떻게 사회 내에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이를 추종하는 다수의 백인들이 전혀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이 글 6장을 통해 입증되고 있습니다. 린치는 자신의 이 글에서 언급하는 내용들이 대체적으로 애즈라 클라인의 논저와도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는 정체성 정치에 대한 어느 정도 설득력이 부족한 공격과 더불어, 극단주의자들의 명백한 공격성이 사회 내부에서 제어되지 않고 있다는 부분은 쉽게 생각해서는 안될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또한 이를 통한 정치적 양극화가 전혀 통제가 되지 않고 있는 현실도 심각한 문제인데요. 다만, 린치는 오늘날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철학적인 접근에서 상대방을 표용하지 못하는 보다 다층적인 문제에 접근해 보려는 모양새입니다. 이와는 별개로 저는 여성 혐오와 다른 인종에 대한 명백한 배격과 혐오에 빠져 있는 일부 시민들과 이 책에서 논하는 바대로 대화가 이뤄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맞붙었던 2016년 말에, 민주당과 관련한 한 가지 괴담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것은 워싱턴 DC의 어느 피자 가게에서 민주당 정치인들이 아동 성매매 조직을 운영한다는 상당히 기괴한 음모론이었습니다. 보통 기본적인 상식으로 이러한 음모론이 가당치 않다는 점은 많은 분들이 인정하고 있으실 텐데요. 그런데 트럼프를 지지하는 극단주의자들과 일반적인 공화당 지지자들까지 이 음모론을 거의 기정 사실인 양 믿었습니다. 이러한 괴담은 순식간에 여러 SNS를 통해 퍼져나가게 되었는데요. 이미 저자인 린치를 비롯, 많은 사회학자들이 오늘날 SNS가 거짓 뉴스와 선동의 장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개인 소셜미디어가 건전한 민주주의를 위해 기여하는 것보다 자본주의적 논리에 맞게 오로지 개인의 사익을 위해 편파적이고 황당한 소문들을 확대 재생산하는 매개체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물론 현실이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존 듀이가 설파한대로 우리가 정치적 분별력을 갖고 있었다면 거대 인터넷 기업의 이런 SNS에서의 괴담이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만 문제는 저자가 6장에서 논의하는 바대로 우리에게는 이러한 거짓들을 규명하기 위한 시간이 거의 주어지지 않고 있으며, 저자가 강조하는 성찰적 실천이 필요한 각각의 개인들이 오로지 작은 핸드폰 화면에만 몰두해 있는 상황은 시민들 간의 '격의 없는 대화'가 더욱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것을 자본주의에 의한 개인의 소외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만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일종의 대안을 내놓기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대체적인 정치 권력자를 포함한 다수의 시민들까지 앞서 희화화한 'know it all' 현상은 그저 멀리 있는 현상은 아닐 겁니다. 이에 저자는 4장에서 이 오만함이라는 문제가 크게 민주주의를 어떻게 붕괴 시킬 수 있는지 논증을 더하고 있는데요.. 과거 나치 독일에서 권력자가 시민의 이익에 대해 무지했고 마찬가지로 시민들 역시 자신들의 이익에 관심이 없었던 점은 일차적으로 선동가의 의지에 따라 체제가 왜곡되어 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순수한 게르만인에 의한 독일이라는 인종적 구호에 따라 수많은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내몬 것은 자신들의 입장과 태도가 지극히 선(善)과 다름없다는 오만함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를 토대로 지금 유럽에 불고 있는 네오 나치와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대략 추정해 볼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일전에 트럼프가 "미국에 입국하는 멕시코인들이 항상 선량한 것 만은 아니다"라는 주장과 맞물려 지극히 오만한 인종주의와 다름 없는 헛소리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다수의 미국 백인들이 지금의 미국에서 흑백 갈등과 흑인과 백인 간의 불평등이 과연 존재하느냐고 반문하는 행태와 더불어 소수 인종이나 여성이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노골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백인 남성을 포함한 일부 계층의 잘못된 신념은 작금의 미국을 극단적인 분열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글 초반에 이러한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과연 건실한 대화가 가능할 것인가에 회의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은 이런 이유 떄문인데요. 물론 저자는 진실에 대한 개방성과 개인의 성찰을 바탕으로 이를 어느 정도 개선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 듯 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연상되는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 교회의 끝모를 오만함 또한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여겨집니다. 특히나 기존의 자유주의자 혹은 진보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상당히 오만했고, 이 글 5장 말미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태도로 말미암아 보수 우파는 한술 더 떠 자유주의와 진보주의를 경멸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일침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진보와 보수 혹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양쪽이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식의 책임론으로 규정되기도 하는데요. 근데 다만 1980년대 이후 미국 사회를 비롯 냉전시기에서 진보주의가 거의 유명무실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저자인 린치의 해석이 현실적으로 합당한지는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자유주의 자체를 나약한 것으로 이해했던 카를 슈미트는 과거 자신이 벌인 짓거리를 전혀 반성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오늘날 피아 식별의 극단적인 정치의 명백한 시조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미국의 경우에 과거 유럽에서 잉태되어 끝내 인간을 해방시킨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회의와는 별개로 자유 자체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자유가 더욱 변질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자의 언급대로 민주주의가 이성의 논리로 기반해야 하지만 3장에서 보다 비판적으로 논증한 거의 종교적 믿음과 다름없는 비합리적인 확신에 사로잡힌 개개인들이 이성적인 측면의 정상적인 타협과 대화의 기본 인식을 뿌리 채 뽑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이 자유와 자유주의에 있어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는 거의 명약관화한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릇된 믿음이 기반이 된 자기 확신 또한 민주주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분명한데요. 사회진화론에 부정적인 기여를 한 토머스 멜서스와 마찬가지로 "남부의 백인 남성이 유전적,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라는 이미지를 강화"한 일부 학자들의 논법은 시민들에게 부정적인 여파를 끼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과학의 개방성과 사회과학의 여러 진리들을 언급하며 일반적인 개인이 학문과 진실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져야만 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이론에 상대방이나 다른 사람이 반론을 제시하는 것에 대해 보다 진지한 태도를 견지할 의무가 있다고 배웠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무오류성'이라는 이론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단순히 지지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자기 확신을 더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있어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집니다. 과연 이러한 자기 확신적 태도를 전혀 바꿀 가능성이 없는 계층과 사람들을 어떻게 개방적인 공론장의 무대로 이끌어 낼 수 있을지는 대략 요원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것 차원을 넘어 극단주의에 대한 다수 시민들의 일관되고 공통된 의견이 먼저 수립되어야만 한다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됩니다. 이는 오늘날 정치 현실을 명확히 설명한 이안 브레머의 기존 주장과 함께 기존의 정치 무대에 들어선 극우 포퓰리즘 혹은 우파의 극단주의에 대해 시민들이 얼마나 정치적 분별력을 발휘할 수 있겠느냐에 따라 앞으로 다음 몇 세대의 민주주의 건전성이 달려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이 글은 전반적으로 오늘날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 행태와 이를 더욱 조장하는 인터넷을 비롯한 정치적 발언의 획기적인 변화가 철학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으며, 이런 상황에 주도적으로 발언을 드러내는 다수 시민들의 행태가 우리의 정치에게 있어 어떤 영향이 될 것인지에 대해 전망과 대안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실과 겸손함을 바탕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이에 따라 정치가 시민들의 정치적 태도 변화로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는데요. 과거 불행한 나치 시대를 잉태한 전간기의 민주주의를 경멸한 괴벨스의 이런 비아냥은 많은 자유주의자들에게 뼈아픈 고통으로 남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비화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이런 글들에서 교훈을 찾는 것이 시민들에게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다수의 시민들은 제2의 전체주의를 몸소 겪어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존 듀이의 선명한 주장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더욱 교육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의 3장과 4장은 오늘날 현실 정치의 근본적인 원인을 독자들에게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점에서 따로 단행본으로 추려도 될 만큼 논증이 훌륭했는데요. 이에 많은 분들이 읽어 보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게 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사실‘로 여길지 합의가 없을 때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실을 가르쳐준다고 해서 진실과 확신에 대한 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좌파에서든 우파에서든 오만함의 이데올로기는 ‘우리와 그들‘을 넘어 ‘그들 위에 있는 우리‘라는 문화적 서사를 선전함으로써 우리의 공포와 욕구를 이용한다.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더 큰 사회적 맥락에 스며 있는 여타 차별적인 연상들이 서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왜곡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너무 심하게 증오한 나머지 급기야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실제보다 더 많이 안다는 확신을 심어주려는 노력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진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단지 정보 문화가 너무 부패해서 진실과 증거에 대한 자기기만적인 태도를 용인하고 부추기는 것뿐이다.

무엇보다 백인 남성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경제국이라는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미국의 능력을 잠식하고 있다는 두려움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자신들은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듯 그렇게 까지 노골적인 인종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는 아니라고 정당하게 지적한다.

정치가 오로지 권력과 파벌 싸움의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은 서글플 정도로 흔하다. 그리고 이는 정치는 본질적으로 다른 수단을 이용한 전쟁이라는 마키아벨리의 관점을 공유하는, 어두운 시각이기도 하다. 20세기에 이 사고를 철학적 관점에서 지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악명 높은 나치 정치 이론가 카를 슈미트였다.

특히 2016년 봄에 진보주의자들의 저녁 만찬 파티에서는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를 선출할 정도로 ‘멍청하지/인종주의적이지/성차별적이지‘않다는 일반적인 통념이 지배적이었다. 미국인들이 트럼프를 진지하게 여길 리 없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나치의 선동을 책임졌던 괴벨스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훌륭한 농담은 민주주의가 자신의 적들에게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수단을 주었다는 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모든 것 알지 못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편견과 추정에 입각한 것일 수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듀이와 아렌트 모두 민주주의는 일종의 공동 공간, 폭력이나 억업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의견차를 탐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민주주의는 이성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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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에 관한 편지 고전의세계 리커버
존 로크 지음, 공진성 옮김 / 책세상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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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서머셋 주 링턴에서 태어난 존 로크는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자유주의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인식론을 비롯해, 정치 철학, 고전적 공화주의, 자유주의 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훗날 전반적인 대의제 정부에 대한 영감을 후세 사상가들에게 전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16세기부터 시작된 유럽의 종교 전쟁으로 인한 여파로 구교와 신교 사이의 직접적인 대결로 인한 극심한 사회 분열에 대해 로크는 크게 우려하기도 했는데요. 그가 원칙적으로는 칼뱅주의의 삼위일체론을 인정했지만, 성전에 대한 일부 다른 해석으로 말미암아 종교적으로 공격을 당하기에 이릅니다. 그럼에도 종교가 속세의 삶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인정하고, 이를 통해 뿌리 내리기 시작한 공화주의에 맞서지 않는 (건전한) 종교가 되기를 내심 바라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관용에 관한 편지 Epistola de Toleranta"를 라틴어에서 한국어로 온전히 옮긴 판이며, 이에 1968년 판을 저본으로 삼았다고 책 서두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초판 번역은 2008년 4월에 이뤄졌고, 제가 읽은 판은 개정판으로 2021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로크가 살았던 17세기 유럽의 종교 전쟁은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색할 정도로 사회 전반을 피폐한 지경으로 몰아갑니다. 누구를 위한 종교 개혁,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모르겠으나,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지식인 계층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엄혹한 세월에 놓여 있었던 것은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이에 로크는 세속법과 종교의 매우 명확한 구분을 인정하고 또한 종교와 공화주의가 서로를 인정하여 양자의 권역을 서로 침범하지 않을 것을 강조한 글을 쓰기에 이릅니다. 바로 이 글의 도입에서 로크는 "참된 교회란 삶을 올바르게 하고 경건하게 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강조하는데요. 이것은 세속적 삶에 있어 인간을 영적으로 인도하고, 이들이 좀 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교회가 뒷받침하는 것으로도 읽힐 수 있겠는데요. 특히 이러한 의무를 망각한 교회가 어떤 교리를 맹렬히 추종하는 열성분자들에 의해, 사회에 대체 어떠한 일이 자행되고 있는지 저자인 로크는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타인의 재산의 빼앗고, 신체를 절단하고, 더러운 감옥에 가두어 괴롭히고 마침내 목숨마저 앗아가는 행위"는 그야말로 로마서 1장에서 언급하는 이교도들이나 하는 짓이므로 이러한 행위가 소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로크라는 일개 개인이 가졌던 절망감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되기도 합니다.

영혼의 구원을 찾는 일이 어떠한 방식이든 간에 세속의 통치자들에게는 속할 수 없다는 단언은 마찬가지로 반대의 입장에서, "시민의 권리,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가 종교에 속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좀 더 명확히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에야 서로 얼굴 붉히지 않는 '정교 분리'가 헌법에 의해 규정되어 있고, 종교인들이 자신의 성전에 대한 의무와 마찬가지로 공화주의가 뿌리 내린 사회에 있어 이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이에 우리가 인정하고 있는 종교에 대한 문제, 종교가 인간과 사회에 대해 가져야 할 관용의 원칙을 먼저 주장하기에 이른 사람이 바로 로크였습니다. 그는 종교적 구원이 종교에 있어 중요한 가치라면, 동일하게 재산권과 인간의 기본권은 통치가 해낼 수 있는 권리이자 의무라고 논증하는데요. 즉, 그리스도인이든 간에, 아니면 비그리스도인이든지 간에 양자는 모두 사회로부터 기본적 권리를 보장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단과 이교도라는 명분으로 종교가 불신자들을 탄압하기에 이른다면, 이것은 결코 종교가 손을 대서는 안되는 영역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에 로크는 통치차의 통치 행위, 혹은 사회가 마땅히 보장해야 될 인간의 권리에 있어 종교의 개입을 거의 엄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대전제로 단순히 사회와 종교가 어정쩡한 화해를 지속해야 된다는 소위 원칙을 넘어, 마땅히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된다는 중요한 당위라고 여겨집니다.

이 세계에 종교적 권위가 갖는 영향력이 어떠한지는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무리 종교적 권위가 사회적 맥락에서 까지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을 기울인다 할지라도 부정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권위에 몰입한 광신자들을 처벌할 권리는 분명 '세속법'에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즉, 종교인인든 비종교인이든 사회적 틀에서 마땅히 인정하고 있는 법의 지배는 결코 종교가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정통 교리를 신봉하는 교회든, 소위 우상 숭배를 목적으로 있는 사이비든 간에, 공화주의적 통치자가 이를 구분해서 어느 한쪽만 처벌할 권리 또한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명확히 하고, 이것을 통치자의 '정치적 권리'라고 우리가 이해했을 때, 무엇보다 종교가 정치에 우선해, 관용을 교리만큼 중요하게 견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데요. 물론 자신들의 종교적 입장에서 우상 숭배라든지 이단이라는 설정은 그들의 영역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가 명확히 해야 하는 부분은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로서 개인의 정치적 권리와 함께 이는 누구나 법 앞에서 보장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인데요. 종교가 이런 사회적 원칙에 무분별하게 대립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적절하게 정도를 지킬 수 있는 내부의 건전성이 어느 정도 요구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종교든 간에 자신들의 교리에 따라 이를 사회적인 수준에 까지 강요하는 것은 사실상 금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로크가 강조하는 관용의 원칙은 어느 정도는 우리가 믿고 있는 자유의 원칙과도 상당히 결부되어 있습니다. 사실 모두가 평등한 자유라는 관념은 로크 역시 지지하고 있었는데요. 종교의 자유라는 관념적 이해 또한 결국은 필요한 것이어서, 서로 다른 신을 믿는 경우나, 교리나 숭배의 방법이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종교적 관용은 나의 종교적 자유 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른 종교적 자유와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후반부에서 간략하게 등장하는 그리스도교 진영에 있어, 이슬람인들에 대한 표면적인 이단이라는 입장은 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는 다수의 종파가 소수의 종파를 억압하지 않는 것을 넘어 공화국의 평화를 위해 모두가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대전제에 의해서 존중 받는 것과 유사한 체계라고 여겨집니다. 로크가 앞으로의 종교 문제를 어떻게 예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화국 내에서 사실상 다양한 종교가 존립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통치자와 사회 구성원의 노력이 무엇보다 더 중요한 시기가 도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신앙으로서의 원칙에 대한 관용과 이해를 통해, 각 종교 간의 대립의 불식을 추구하는 것으로도 볼 수도 있겠는데요. 물론 종교와 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지점은 저자인 로크가 말하는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세속적 삶에 기여하고, 또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구원을 위해 종교가 선량한 사람들을 인도하고, 속세의 법을 존중하고 따르는 것이 지금의 정교 분리의 대원칙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공공의 편익'이라는 부분에 있어 각자가 충분한 이해를 갖춰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된 교회는 삶을 올바르게 하고 경건하게 하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만약 자비와 온순과 호의를 세강 모든 사람에게는커녕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에게조차 결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코 그들에 대한 박해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잔혹함을 공화국에 대한 걱정과 법의 준수로 미화해서는 안됩니다.

실제로 어느 누구도, 자유나 목숨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이익의 일부분조차 자발적으로 박탈당하지 않으므로, 통치자는 남의 권리를 침해하는 자들에게 처벌을 가하기 위해 무력, 곧 자신의 모든 신민의 신체적 힘으로 무장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종교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권한을 하나님께서 그 어떤 사람에게 부여하신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민으로서의 권리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도 엄숙하게 보존되어야 합니다. 이 권리들은 종교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서 그들의 권위가 기원했든지 간에, 그 권위는 교회적인 것이므로 (어디까지나) 교회라는 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도대체 바티칸에서 준비한 것 외에는 혹은 제네바 (칼뱅주의) 공장에서 나온 것 외에는 어떠한 약이나 음식도 섭취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까?

왜냐하면 종교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데, 어떤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서 그에게 바로 그 예배에서 하나님을 기쁘지 않게 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도덕적 행위들은 정치적 지도자와 개인적 지도자, 곧 통치자의 지배와 양심의 지배 모두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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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남자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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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릴본에서 노동자 계급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 5년 뒤에 부모를 따라 이브토로 돌아갑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캉 인근과 루앙 지역의 지도 교사를 역임하고, 1959년에 루앙의 여성 사범대학의 입학시험에 합격합니다. 이후 그녀는 짧게 영국을 오고 가며 지내다 루앙 문과 대학의 교양 과정을 등록합니다. 대략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중등 교원으로 활동하다 남편인 필리프 에르노가 행정직으로 임명되어, 파리 근교 신도시인 세르지퐁투아즈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 가운데 그녀는통신대학 고등교육 교수로 임명되어 은퇴까지 직함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2022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데요. 수상 이후 세계 각지에서 자신의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게 됩니다. 이미 국내에도 그녀의 많은 작품이 번역되었고 재번역과 재판 발행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에르노의 이 책은 원제, "Le jeune homme'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2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꽤 교육을 받은 중년 여성과 이십 대 초반 남성의 사랑은 지금까지 상당한 사회적 금기였습니다. 반대로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고 있는 육십 대 이상의 남성과 갓 이십 대 여성의 관계는 사람들의 표면적인 지탄을 차치하더라도 이미 수많은 영화와 소설의 단골 소재로 등장합니다. 후자를 보는 많은 여성들과 페미니스트들은 일면적인 이해에서, 돈으로 젊은 여자를 만나는 중년 이상의 남성을 심하게 말하자면 역겹다는 표현도 서슴치 않는데요. 마찬가지로 전자의 경우도 역시 일반 남성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나이 많은 여자를 만나는 젊은 남자에 대한 대체적인 연민과 불편함이 섞인 감정일 텐데요. 비슷한 나이의 사람끼리 사회적 금기를 넘어서지 않은 평범한 연애를 하는 것이 일견 맞다는 식의 통념은 지금도 사회 구성원들의 주된 관점이기도 합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연애에는 나이와 국경이 없다고들 하지만 '자신에게 없는 젊음을 사는 것'과 같은 주변의 불쾌함은 그걸 보는 사람들의 단순한 질투라는 감정으로 이해하기에는 다소 난감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느끼는 데 있어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어느 정도는 진지함을 갖고 있을 겁니다. 상대방을 만날 때 이 사람을 진지하게 여겨야만 그것대로 스스로를 가볍게 취급하지 않는 태도일 것인데요.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만나는 데 있어서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진지함을 없는 것처럼 취급하고, 어떤 이익을 위해 그 혹은 그녀를 만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장황한 사설과 맞닿아 있는 에르노의 이 소설 역시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작가 스스로의 경험을 투영되어 있습니다. 이는 작가 본인이 과거에 불법 낙태 시술을 받은 것마저도 작품에 등장시키는 것과 유사해 보이는 솔직함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20대 대학생과 관계를 지속하면서 그의 궁핍한 경제적 조건마저도 어느 정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연인인 남자가 언제든 젊은 여자에게 갈 수 있다는 결론을 애써 인정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물론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정도 육체적 쾌락에 의지하고 있으니 이러한 인정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서로가 자신들의 미래까지 기약한 관계가 아니라 결말을 예견하고 있는 이런 처지에서 자신이 되돌아 보는 '관계의 속성'이 거의 가감 없이 드러나고 있는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 생각됩니다.

애인의 솔직한 바람을 들어줄 수 없는 자신의 육체적 조건에 깊은 회한을 보이는 여 주인공의 독백은 임신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는 '나이든 여성'의 고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뜨거운 연애를 하면서 흔히 '나의 아이를 낳아줘'라는 말을 자주 읊게 됩니다. 서로 불타는 알몸으로 껴안고 있는 상황에서도 저런 농밀한 대화는 흔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이를 갖고 싶은 젊은 남성의 기대가 그저 이 여자를 버리기 위함인지 아니면 정말 진솔한 고백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질책하는 시선을 보내는 타인들을 겪게 되니, 비로소 주인공은 자신의 나이를 깨닫게 됩니다. "나의 젊음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그만큼 이 남자와의 관계에서 그만큼 영속성은 멀어지게 된다"는 진실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이것은 결말의 예측과 맞닿아 있고, 두 사람이 함께하던 나날의 진실과 끝내 결말을 맞이한 그 후의 일상이 보기보다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이미 숱한 연애를 경험한 우리들에게도 보란 듯이 전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육체적 쾌락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모든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오만함은 관계의 본질을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끝으로 아니 에르노의 이 작품도 자신의 실제 경험과 문학적 장치가 혼합되어 있는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소설을 통해, 노년의 여자가 젊은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 느끼게 되는 다양한 감정들을 거의 처음 접할 수 있었는데요. 단순히 이러한 만남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권력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향해 일정 부분 원하고 지향하는 바가 있는 일반적인 모습의 연애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더욱이 아직 노년에 들어서지 않은 저 같은 사람이 이들이 보이는 여러 회한과 일생을 살아온 스스로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장소, 바로 그 병원이 내가 학생 시절, 불법 임신중절 후에 출혈을 일으킨 1월의 어느 밤에 이송된 곳이다.

그의 집에서 나는 학생 시절, 신혼 초 남편과 살며 겪었던 불편함과 초라한 가구들을 떠올렸다.

그는 내게 쾌락을 주었고, 다시 살아나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다시 살아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가 질투에 휩싸일 때마다 비난했던 이 같은 이중성은 그의 상상과는 달리 그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내가 품었을지 모를 욕망에 자리 잡지 않았다.

쉰 살 먹은 남자가 분명 자기 딸이 아닌 여자와 아무런 지탄을 받지 않으면서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마당에.

그가 태어나기 전의 시간에 대한 이 긴 기억은, 결국에는 내가 죽은 후 나는 결코 알 수 없을 사건들과 정치적인 인물들이 새겨진 그의 기억이 될 것과 짝을 이룰 것이며, 뒤집힌 이미지가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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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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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노동자 계급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 프랑스 노르망디 인근 이브토에서 자랐던 아니 에르노는 루앙 대학과 보르도 대학을 거쳐, 현대 문학 전공으로 교사 자격을 취득하게 됩니다. 그녀는 1974년에 '빈 옷장'으로 등단해 주로 자전적 소설과 사회 문제적 주제를 포함해, 특히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금기를 소재로 삼아 글을 발표할 때마다 평단과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녀의 작품 대부분에서 '여성의 심리 묘사'와 더불어 '노골적인 성애'를 담고 있어 문학적 경건주의에 빠진 평론가들의 비판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이런 문학적 활동에 힘입어 아니 에르노는 2022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와는 별개로 그녀는 정치적 활동에 있어, 2012년 프랑스 대선에서 멜랑숑을 지지한 바가 있고,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어 반이스라엘적 입장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이란의 강제 히잡 착용 문제와 관련해서도 그녀는 이란 당국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한 바가 있는데요. 이에 이란에서 일어났던 민중 봉기에 대해서 자신도 연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L'Occupation'으로 지난 200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5년 3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에르노의 이 책은 지금 읽고 있는 마농 가르시아의 논저, '여성은 순종적으로 태어나지 않는다'에서 인용이 되었기에 최근에 구매를 하게 되었는데요. 일전에 제가 에르노 작품에 대해 서평을 쓴 일도 있거니와, 소설 작품을 잘 접하지 않는 저에게도 에르노는 꽤 개성 있는 글을 쓰는 작가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여성의 다층적인 심리 묘사를 바탕으로 잘 짜여진 한 편의 '모노 드라마'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남녀 간의 성애적인 측면에서 여성이 남자의 남근에 대한 성적이면서 동시에 감정적 집착에 대한 '감정선'이 꽤 흥미롭게 다가왔는데요. 흔히 사랑하는 남성의 남근에 대한 좀 더 집요한 감정과 이 남근을 통해 애인을 육체적이면서 정신적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평범한 여성의 심리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통해 무슨 남근주의적 사고를 피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남성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의 가슴과 성기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마찬가지로 여성에게 있어서도 비슷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을 살 만한 내용인데요. 일찍이 공화주의적 혁명을 경험한 프랑스 사회에 있어 여성의 이런 남근에 대한 소유 열망이 어떻게 보면 인간의 욕망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평등의 관점에서, 이러한 감정 자체가 사회적으로 백안시 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글 전반에서 보여지는 주인공의 많은 독백과 생각이 어쩌면 남성 주도의 연애관을 넘어, 여성이 받아들이는 연애와 사랑이라는 근본적인 접근에서 충분히 읽힐만한 소설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의 페니스가 자신이 질투하고 있는 여성의 성기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마치 자신이 알고 있는 그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 같은 절망을 그려낸 소설 중간의 독백은 여성도 마땅히 사랑하는 남자를 소유할 수 있고, 자신이 알고 있는 페니스가 스스로 애정의 척도의 근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저자는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물론 육체적 관계가 쾌락을 추동한다는 점에서 섹스 본연의 감정을 저자는 잊지 않고 있는데요. 다만, 소설의 제목과 관련해, 꽤 중의적인 해석을 해볼 수 있는 상대적으로 어린 연애 상대와 40대 중반의 주인공 여성의 관계가 일반적인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한 해석을 포함해, 사회적으로도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있어서도 '이해와 갈등'이라는 두 가지 감정의 혼선 속에서 이를 잘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매력적인 남성의 발기된 페니스를 그저 손으로 쥐는 행위마저도 슬픔과 만족이라는 양가적 입장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의미는 꽤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외설적인 접근이 아니라 사랑하는 남성의 페니스를 마땅히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고 더 나아가 페니스에 대한 다른 여자의 접근마저도 방지하고 싶은 소위 '사랑에 빠진' 여성의 전형적인 감정의 레퍼토리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에르노의 이런 집적적인 성기에 대한 묘사를 통해 이 글을 읽는 남성 독자들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인간으로서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도 합니다.

찬찬히 에르노의 이 소설을 읽고 난 후에, 저는 그동안 알고 있던 사랑에 대한 의미가 너무나 틀에 박히고 가부장적이지 않았나 되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 모두는 인간이기 때문에 설사 그것이 육체적 쾌락만을 요구하는 '섹스 파트너'일지라도 서로의 관계성을 모두 베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여성의 사랑에 대한 편견을 재고하는 것이기도 한 데요. 그러면서 전형적인 남성들의 틀에 박힌 여성에 대한 육체적 관계를 포함한 '여성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 불행하게도 상대방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다른 여자, 혹은 다른 남자에게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글 말미에 자신만이 알고 있던 사랑이 어떤 식으로든 끝을 맺게 될 때, 그러한 과정이 스스로에게 어떠한 의미가 될지는 최소한 스스로에게 내면의 탈각(脫却)을 통해, 최소한 자신을 인정하고 성장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그것이 경솔하고 즉흥적인 감정으로 점철된 혼자만의 괴로움 그 자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 에르노 작품에서 관계가 마무리 될 때, 등장하는 '에이즈 검사'는 뭔가 그녀의 클리셰인 것일까요. 왠지 모르게 이 대목에서 실소가 나오더군요. 


잠에서 깨어나면서 내가 제일 먼저 하는 동작은, 잠결에 일어서 있는 그의 페니스를 쥐고 마치 나뭇가지에라도 매달린 듯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이걸 쥐고 있는 한 이 세상에서 방황할 일은 없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내가 내 자리에 세워놓는 사람은 다른 여자가 아니라, 다시는 그렇게 될 수 없을 나, 사랑에 빠져서 그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으며 아직 우리 사이의 그 모든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나였다.

오장육부 깊숙이 뿌리내린 또다른 법, 그러니까, 당신의 육체와 정신에 침입한 자를 제거하고자 하는 의지에는 반했다.

잡다하기 짝이 없는 사실들을 끼워맞춰 인과관계를 부여하는 나의 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삼십대 남자에게 제공되는 모든 가능성 속에서 그가 마흔일곱 살의 여자를 기꺼이 택했다는 사실은 나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것이었다.

상대방과 다른 점은 모두 열등한 것으로 바꾸어놓으며 자아를 지어버리는 질투라는 감정을 겪으면서, 나의 육체, 나의 얼굴뿐만 아니라 나의 활동, 내 존재 전체가 평가절하되고 있었다.

그의 페니스가 생각날 때면, 첫날밤에 본 모습 그대로 떠오른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내 눈앞에, 거대하고 강력하며 끝이 버섯 갓 모양으로 부푼 채 불끈 솟아 있던 그의 페니스.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낯선 사람의 페니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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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6 0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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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6 12: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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