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일부 혹자들은 신자유주의가 실체가 없는 그저 상상 속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데이빗 코츠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이라는 용어를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980년대 이후 지속된 자본주의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기법은 거의 허구라 볼 수는 없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해 아주 간단히 말씀 드리자면 1920년대 세계 대공황 이후,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그로 인한 자본가들과 기업 집단의 이익이 사회 부조와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보호라는 선점된 가치에 밀려 그들의 표현대로 라면 나날이 힘들어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일종의 사회경제적 돌파구로 시작됩니다. 물론 정부 역시 나날이 늘어가는 사회 복지 지출에 문제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글쎄요. 당시 정부들이 시민들의 사회적 안전 장치 요구를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 볼 생각을 명백하게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처와 당시 영국 기업 경영자들간의 대화와 소통을 고려해 봤을 때, 정부가 어느 정도는 기업의 요구에 영합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시장과 사회를 통틀어 이 신자유주의적 기법의 초기 진행에 대한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학자들마다 신자유주의에 대해 다소 상이한 관점을 보이는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서평을 남긴 강준만 교수의 책에서 강교수는 "미국과 한국은 전세계를 통틀어서 강고하게 뿌리 내린 신자유주의 국가"라고 언급한 바가 있는데요. 많은 민주주의자들에게 있어 우리가 알고 있는 시장은 마땅히 헌법과 제도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당위를 인정합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대척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는 콜린 크라우치 뿐만 아니라 로버트 커트너, 대니 로드릭도 인정한 바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말 어처구니가 없게도 신자유주의 자체는 최소한 민주화 되고 민주주의가 뿌리 내린 국가에서 더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즉, 고도화 된 금융 기법이라든지 시장의 지배가 사회와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 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자유주의라면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도 안정화 된 국가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민주주의를 시녀로 부릴 수 있다는 것인데요. 설사 그 축에 속하지 못하는 국가들은 그저 '추악한 약탈'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과거 이르헨티나와 칠레를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역시 그런 시기가 있었죠.


제가 명백히 예언가는 아닙니다만 지금의 신자유주의가 시장의 초월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모든 사회 통념을 그 밑으로 두려고 하는 인식 자체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우리의 정치를 과두제에 이르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로서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모두에게 평등하고 자유로운 온기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자원과 경제적 부의 차이에 따라 상당한 차별이 존재하는 것이 실정입니다. 단순히 불평등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직업과 부에 따른 각자의 사회적 지위로 인해 헌법상의 보장과는 별개로 사실상의 계급화를 초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현실 자체는 비판의 성역화가 된 신자유주의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장에 대한 정상적인 비판을 백안시하는 분위기 자체가 바로 신자유주의의 이행의 부정적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신자유주의가 보수주의 정치와 매우 긴밀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개인의 이익 추구와 경제적 자유 보장이라는 관념은 보수주의가 좋아하는 것들이고, 시장이 완전 무결하다는 생각 또한 지금의 보수주의에게는 매우 익숙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강력하게 옹호하기까지 하죠. 그런 연유로 현재의 보수주의에게 예전의 전통적인 보수주의에서 볼 수 있었던 가치를 찾아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만약 정치적 주의와 경제적 관념을 서로 대등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우위라고 받아들인다면 신자유주의 이행으로 발생한 여러 사회 문제를 오로지 정치적 무능으로 몰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시장에 대한 대부분의 관념들이 전통적인 자본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로부터 대부분 비롯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만약 우리가 헌법을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면 각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유층들의 광범위한 탈세 행위 자체를 과연 우리가 어떻게 인식해야 될지는 거의 자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시장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강고한 이념을 고려해 봤을 때, 지금 우리가 몸소 체험하고 있는 대부분의 시장 자유적 토대가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로부터 왔고, 그것이 우리 나라를 넘어 세계 경제를 지탱하는 기본 토양으로, 2008년의 거대한 몰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전통적인 경제학이 이러한 인식에 강하게 수긍하고 있는 것도 전세계 주류 경제가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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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브로흐의 이 소설은 이미 현대소설사에서 나온 옛 번역판이 제 서가에 꽂혀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제였죠. 잠시 본가에 갔다가 아주 우연히 눈에 들어온 헌책방이 있었습니다. 간판도 없고 그저 허름한 쪽문과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밖에 없었죠. 바깥에 매장 입구로 보이는 이 조그만 문 앞에는 책을 산다는 사장님의 글씨가 보였는데요. 반가운 마음에 급히 계단으로 이어지는 매장 안쪽으로 걸어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안으로 들어서니 헌책방의 규모는 그리 크지는 않았는데요. 장서 보유가 대략 1천권 내외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입구 바로 옆은 소설 서가였는데, 바로 이쪽에서 블로흐의 몽유병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표지는 열린책들의 2007년 번역판인데요. 언제나 그렇듯 책 뒤편에 있는 밀란 쿤데라의 지극한 찬사가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그의 말을 살짝 개작한다면 아마도 유럽 최고의 박물 소설이 아닐까 싶습니다.


새롭게 다시 손에 쥔 이 몽유병자들은 불행하게도 제겐 처음 시도가 아닌데요. 1992년판이던가요. 정식 판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책을 읽다가 중간에 포기한 기억이 있습니다. 방금 카페에 들어와서 살짝 책을 열어봤는데, 조그만 활자들이 글 읽는 사람을 숨도 못 쉬게 할 정도로 빡빡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아..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그래도 헌책방에서 구한 책 치고는 상태도 너무 좋고 크게 의미는 없지만 2007년 판의 나름 초판이라 뭔가 기분이 좋네요. 그리고 가격도 아주 저렴했습니다.


지금 집 근처의 프랜차이즈 카페인데 공교롭게도 옆 테이블에서 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되는 여자 세 분이 서평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네요. 저분들이 직접 서평을 쓰는 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화 요지는 "다른 사람이 써 놓은 서평을 먼저 읽게 되면 정작 그 책을 읽는 데 좋지 않다."는 뭐 그런 얘깁니다. 저는 저 분들과는 약간 다른 입장인데 제가 몇 년 간 사회과학 분야 서적의 서평을 쓰게 되면서 제 서평이 이런 재미없는 책들의 약간의 '길라잡이'가 되길 바랐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독서 저변이 일반적으로 취약한 편이라 그런 면에서 뭔가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죠. 


책은 다른 여타 영화나 전시와는 달리 개인의 노력이 필요한 취미 생활입니다. 책 한 권을 일독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제법 상당하다고 볼 수 있고, 그에 비례하게 어느 정도 집중력이 필요하죠. 오랫동안 책을 접해온 골수 독자들이야 각자 책 읽는 요령이 생겨 독서 자체를 즐기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책을 평소에 접하지 않는 분들이 책과 친해지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그것에는 사소하지만 꽤 근사한 서평들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쓸데없는 흰소리가 많았습니다. 하여튼 제가 이 몽유병자들을 끝까지 손에서 놓지 말아야 할 텐 데요. 다시 화이팅 하고 책에 집중해야겠습니다. 저도 이 몽유병자들을 통해 커다란 감동을 받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네요. 이미 읽으신 분들이 최고의 소설이라고들 하시니 의지를 한 번 다져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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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으로 보는 미국과 중동 관계

양차 대전을 거치면서 중동에 관한 지리학적 입지와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한 양상을 띠게 되는데요. 대전 중이던 그 이후에도 영국과 미국의 중동에 대한 이권은 주로 원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 이스라엘이 영국의 지원을 받아 나라를 건국하게 되지만 일반적으로 이 지역의 석유 자원에 대한 안정적인 확보가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사활적인 이해관계였죠.

그래서 미국의 CIA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전제 정권과 밀착했던 것이고, 더불어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캐스팅 보트를 쥐고, 중동 지역 정치에 직간접으로 개입했던 것이 미국이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란 팔레비 왕조와의 밀월과 그 와중에도 이라크를 지렛대 삼아 중동 정세에 개입했던 것도 다름아닌 미국이었습니다.

일단 이 중동 지역의 시민들이 미국에 대한 증오를 갖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들은 자유 민주주의의 큰형을 자임하면서도 중동에 있어서 만큼은 권위주의 정부를 지원했던 것에 있습니다. 이것은 칠레에 대한 CIA의 피노체트 프로그램이나 콜롬비아의 한 지역이었던 파나마를 강제로 독립시켜 파나마 운하에 대한 소유권을 공고히 한 미국의 행위와 거의 유사한 행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이든 대통령이 자신들의 국익과 상관없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단순하게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과는 달리 복잡한 속내가 도사리고 있던 것입니다. 그 일관되지 않는 미국의 국익 말입니다. 더불어 여기에는 미국 의회에 대한 광범위한 로비와 각 싱크탱크들의 행정부에 대한 고차원적인 압력을 고려했을 때, 바이든 행정부가 그렇게 나오게 된 연유에는 그와같읃 일말의 연유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자유 민주주의 거대한 수호 국가로서의 미국은 겉으로는 그러한 대의를 견지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국익에 따라 권위주의적인 독재 정부를 지원하는 행태가 남중아메리카를 비롯 중동에서도 있어왔는데요. 또한 이것은 우크라이나의 서방 밀착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무력 시위에 별반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은 혹독한 전례를 남겼습니다. 물론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과 일본은 우크라이나와 이집트와는 다르다고 말들을 하죠. 물론 일정 부분은 그런 이해로 흘러가고 있긴 합니다. 일전의 브루스 커밍스의 말대로 미 국무 장관이 각종 국제 회의에서 무슨 속국처럼 양 옆에 한국과 일본의 외무장관을 거느리고 나타난 것은 비대칭 동맹에 대한 일종의 극명한 수사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이 제공하는 한국에 대한 핵우산이 이러한 맥락을 갖고 있다 여겨집니다. 미국 서부의 로스엔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가 핵공격의 위협을 감수하고 서울에 대한 핵우산을 제공할 수 있을지 지금도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국제 외교가 일정 부분 프로파간다의 형식을 띤다고 봤을 때, 그러한 주의와 제스처가 과연 자국의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고 동맹국에 대한 지원이 실질적으로 가능할지는 막상 닥쳐봐야 아는 것이겠죠. 저는 이 지점에서 미국의 신뢰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갈등에 놓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조만간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만약 제3차대전이 일어난다면 그 시발점은 센카쿠/댜오위다오나 대만이 될 것이라는 것은 이처럼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작금의 아프가니스탄의 반동 정치는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 가장 큰 문제인 것은 이미 파키스탄 서부를 장악하고 있는 파키스탄 지역의 동일한 탈레반이 파키스탄의 군부가 몰락할 시에, 그 핵무기를 탈레반이 장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처럼 탈레반의 존재 자체가 세계 안보의 크나큰 위험요소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파키스탄과 밀월 관계인 중국이 파키스탄 군부의 몰락 상황에서 얼마나 빠르게 개입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마찬가지로 미국역시 유사한 상황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 중동에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정국 혼란이 그저 불구경으로 쳐다만 볼 수 없는 맥락이 이처럼 수면 아래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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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8-20 06: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제가 지식이 부족해서...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많은 도움이 되는 글입니다.

베터라이프 2021-08-20 09:47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노회찬 의원의 서거 소식이 들렸을 무렵에 저는 집 근처 한강에 나와 운동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잠시 공원 벤치에 앉아서 스마트 폰을 보고 있었는데 노의원의 황망한 일을 접하게 되었죠.


저는 이날 바로 회사를 퇴근해 고인이 계시던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바로 갔는데요. 당시 글에서도 간략하게 소회를 남겼지만 제가 고인을 처음 직접 뵌 것은 고 백남기씨와 관련한 집회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심상정 의원과 함께 계셨는데 고인의 어두운 표정이 유독 생각납니다.


어느새 벌써 노 의원님의 3주기가 되었네요. 저는 오늘 출근하면서 일부러 검은 정장과 검은 넥타이를 목에 두르고 나왔습니다. 회사에 직원들이 누가 돌아가셨냐고 물어보더군요.


아직도 노의원이 발을 담그셨던 그 정치에는 자신의 노골적인 사리사욕을 믿지도 않는 대의로 포장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은 상황입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다고 봐도 무방한 자들이 입으로만 민주주의를 외칠 때 복잡한 심경이 드는 건 지금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다른 누구와는 달리 돌아가신 노회찬 의원은 이 민주주의의 그늘을 국민 모두에게 드리우겠다는 생각을 누구보다 갖고 계셨는데 실로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합니다.


저 하늘 위에서 잘 지내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어디엔가 가까이 계실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부디 아무 걱정 마시고 편하게 계시길 바랄 뿐입니다. 모쪼록 편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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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Meritocracy 와 관련된 단상이랄까요

과거 자본주의와는 약간 성격이 다른 꽤 성공적인 현대 자본주의화의 노선에서 하이에크와 프리드먼 류의 학자들과 엘리트 계층 및 기득권 세력에 의해 이 능력주의는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능력에 따라 다른 처우와 댓가를 받게 된다는 이러한 교조가 민주주의 가치와는 상반된 개념이기도 합니다. 스미스를 곡해한 경제학자들이 과거 전통주의적인 자본주의 체계에서 도덕주의적 공공성을 제거하기에 이르는데요. 사실 지식을 비롯해 사회적 자본의 수용과 활용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다릅니다. 특히 자원 자체에 접근이 용이한 사람의 능력은 그렇지 않은 계층의 사람들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있는 것이죠.

우리의 민주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조화로운 사회화와 각 개인들의 기본적 평등을 위해 노력하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길이고 견고한 사회학자들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서로 완벽한 균형을 이루면서 발전하는 것이 매우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깨닫게 되죠. 다만, 경제학자들은 이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결국 1980년대 이후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언급대로 케인스식 자본주의의 토대에 각종 시민들을 위한 자원을 국가가 초래하는 비용이라는 명목으로 손쉽게 제거에 나선 ‘신자유주의의 승리‘로 능력주의 자체에 대한 맹신이 시작됩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거세된 사회 부조 상황에서 모든 것은 개인의 능력으로 치부되기 시작한 것이죠. 저는 과거 유럽의 계몽주의적 역사에서 이러한 경제사회적 급변은 매우 불행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어차피 사회계약 자체가 모두가 잘 살고 모두가 안전하게 살기 위해 마련된 것인데 거의 300년 가까운 공화주의적 가치가 신자유주의에 의해 부정된 것입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개인이 자신의 자아실현과 성취감을 위해 자본의 축적과 상위 계층으로의 진입 노력이 무조건 부정당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토크빌의 경고대로 타인과 다른 시민들의 마땅한 권리까지 짓밟으며 개인의 이익과 영달을 찬양하고 정당화하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죠. 이 부분은 퇴임한 도널드 트럼프가 평생을 오로지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온 인물이라는 점을 대변하기도 하는데요. 이러한 사회 구조 자체가 이미 막대한 부를 쌓아 올린 거대한 부유층에게 큰 이익이 되는 상황이고 도덕과 평등이 없는 능력주의화에 대한 선호가 자신들의 탈세 노력과 더불어 이익을 대를 이어 구축하는 작업에 있어 또한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작업들은 하위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까지 주입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이 맹종의 능력주의가 무엇보다 해악인 것은 우리의 민주주의를 더욱 위축시켜 나간다는 점에 있습니다. 앞으로 민주주의의 위협은 파시즘이 아니라 ‘과두제‘인 것은 아주 명백합니다. 모두가 그저 자신의 능력대로 돈을 벌어 먹고 사는 관성의 이념은 너무나 뿌리 깊어서 많은 시민들이 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놓치고 있는 실정이죠. 매번 제가 신자유주의를 비판할 때마다 강조했던 것은 시장 자체가 민주적 통제 바깥에 있었고 그것을 몇 십 년 동안 강요한 하이에크 류의 담론이 민주주의 자체 뿐만 아니라 아주 개인적인 삶들의 안정성까지 위태롭게 했다는 점입니다. 모든 것은 개인들의 책임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이 능력주의가 한몫 챙겼으며 궁극적으로는 사회를 파편화 시키는 데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죠.

따라서, 이 능력주의는 많이 볼 수 있는 극우적 포퓰리즘과 같은 극단주의와 그 인식적 궤가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적당하지 않은 막대한 능력과 기반을 가진 소수 부유층의 탄압이라는 민주주의의 해악을 부르짖는 극우 보수적 시장주의자들에게는 민주주의 자체가 달갑지 않을 것입니다. 무지하고 기반이 빈약한 다수의 시민들이 주도하는 민주주의가 사회를 후퇴시킨다고 생각하고 있죠.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이 글은 거의 즉흥적으로 쓴 것인데요. 아까 개인 톡으로 대학 강단에 있는 제 지인 가운데 한 사람과의 설전(?)에 영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전도되어 있는 능력주의는 위험한 것이며, 자본주의 만큼이나 민주적 가치 또한 현실화시켜 지켜나가야 할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누구보다 민주주의의 강고한 신봉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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