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도성, 권력으로 읽다 금요일엔 역사책 6
권순홍 지음 / 푸른역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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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역사 출판사의 '금요일엔 역사책'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인 권순홍의 ‘고대 도성, 권력으로 읽다‘는 자료 부족으로 인해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마음대로 하려고 가상의 마을 고도를 내세워 서술한 역사서다. 저자는 고도를 古都로 설정한 뒤 거기에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논증들을 덧붙였다. 이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저자가 윌리엄 조지 호스킨스다. 역사 지리학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 받는 호스킨스는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인공물은 물론 자연의 풍경까지도 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불평등의 기원, 권위의 창출’이란 챕터에서 저자 권순홍은 잦은 전쟁과 교역을 통해 인근의 잉여 소출을 취해 인구가 늘어나고 마을이 커진 고도를 통해 전쟁의 의미에 대해 논한다. 고도의 지도자는 자신의 자리가 하늘이 정해준 자리라고 선언한다. 책에 의하면 사람이 모여 산다는 이유만으로 도시라 부를 수 없다. 계층의 분화, 권력의 출현을 매개로 한 지배계층의 집주(集住)가 필요조건이고 자급자족성을 배제함으로써 필요해진 외부 의존성이 충분조건이다.

 

도시는 차별과 서열화에 근거하는 조직이다. 춘추좌씨전에 의하면 종묘와 선군(先君)의 주(主)가 있으면 도(都)이고 그렇지 않으면 읍(邑)이다. 주(主)는 위패를 말한다. 주대(周代)의 혈연적 종법 질서에서 대종(大宗)은 천자이고 그 지위는 적장자에게 이어지며 나머지 자식들은 제후로 봉(封)해진다. 적장자는 본처를 의미하는 적실(嫡室) 또는 정실(正室)의 장자를 의미한다. 왕의 권력은 설화나 상징이라는 관념적 장치뿐 아니라 무력에 바탕한 강제력이라는 실제적 장치를 통해 행사된다.

 

저자는 구금시설과 공적 세금이 어떤 과정과 배경에 따라 비롯되었는지 설명한다. 고도는 차별과 구분에 따라 운영된다. 처음에 전리품은 주민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었지만 점차 공을 세운 순서에 따라 차등 지급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율령과 불교가 절대적 권력의 장치로 기능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400여년의 집안(集安) 생활을 뒤로 하고 평양으로 천도했다. 국내성은 집안의 도성이었다. 도읍을 옮긴가는 의미의 천도는 遷都라 쓴다.(흥미롭게 옮길 ‘천; 遷‘은 낭떠러지의 의미도 갖는다.)

 

집안 지역의 왕릉급 고분은 도성 경관에서 빠질 수 없는 마루지(識)였다. 마루지는 랜드마크의 순화어다. 저자는 집안 지역과 달리 거대한 고분들이 도성 중심으로부터 멀어져 시야에서 사라진 평양에 대해 그것은 도성 경관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초대형 고분들의 상징적 기능이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라 추정한다. 궁금한 것은 집안의 초대형 계단식 적석총을 대신할 평양의 새로운 경관은 무엇일까?다.

 

평양 천도 전후 고구려 도성 경관은 왕릉급의 초대형 고분을 대신한 불교사원의 밀집, 평지 성곽을 대체한 격자형 가로구획으로 마무리되었다.(105 페이지) 격자형 가로구획은 서열을 시각화하는 것이다.(113 페이지) 격자형 가로구획은 지배질서로서 예제(禮制)를 구현한 것이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예란 친소(親疎; 친함과 친하지 않음)를 정하며 혐의(嫌疑; 꺼리고 싫어함)를 결단하며 동이(同異; 같음과 다름)를 구분하며 시비(是非; 옳고 그름)를 명백(明白)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란 권력의 범주를 규정하는 기본 원칙이다.(115 페이지) 

 

삼국사기 권 18에 광개토왕 2년(392년) 가을 백제가 남변(南邊)을 침입하자 왕이 장군에게 명하여 그를 막았고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저자는 이를 후일의 평양 천도와 무관할 수 없는 일이라 설명한다. 전기 평양에는 평지 성곽이 없었다. 물론 성곽의 부재가 경계의 부재나 공간의 평등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고구려 도성은 배타적인 권력 공간으로 궁실(宮室) 및 종묘 등을 내포해야 했다.(96, 97 페이지)

 

성(城)은 군(郡)을 위요(圍?)하기 위한 것이라면 곽(廓)은 민(民)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초기 고구려는 화폐경제가 성장할 여지가 없었다. 더구나 중심지를 위협 받는 외부의 침입을 겪지도 않았다. 곽(廓)이 필요 없었던 이유다. 342년 고구려가 전연의 침공에 대비해 세운 국내성은 집안 평지성일 가능성이 크다. 247년에 조영(造營)한 평양성의 성벽을 공유하는 가운데 더 두텁고 견고하게 새로 쌓는, 수즙(修葺)이 아닌 축(築)일 수 있었다. 수즙(修葺)의 즙은 수선(修繕)의 의미를 갖는다.

 

427년 고구려는 평양으로 천도했다. 저자에 의하면 천도에는 국내외적 조건이 두루 관계했다. 저자는 고구려 후기의 도성인 장안성(長安城)에 대해 논한다. 장안성에는 전기 평양 도성에 없던 평지 성곽이 등장했다. 그것은 고구려가 북위 낙양성의 도성 체제를 수용했음을 의미한다. 그 점이 천도의 동인(動因)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전기 평양 도성과 달리 장안성에는 도성 내 성벽에 의한 관민의 공간적 구분이 이루어졌고 추정이지만 높은 담을 통한 방장제(坊墻制)가 시행되었다.

 

방장제란 곽(郭) 안을 벽(墻·장)으로 분할하는 시스템이다. 이는 주민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당나라 장안성의 경우 주민들이 방의 문이 열리는 낮에는 자유롭게 외부에서 활동할 수 있었지만 문이 닫히기 전 모두 안으로 들어와야 했다. 이는 유목민족이 가축을 기르는 것과 유사했다. 저자는 우리의 근현대사는 권력의 폭력성을 처절하게 경험하는 역사였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몇 권의 책이 읽고 싶어진다. 이기봉의 ’임금의 도시‘, 김용만의 ’숲에서 만난 한국사‘, 윌리엄 호스킨스의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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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매혹이 될 때 - 빛의 물리학은 어떻게 예술과 우리의 세계를 확장시켰나
서민아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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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민아 교수는 1 밀리미터 길이의 파장을 가진 테라헤르츠(1초에 1조번 진동하는)를 연구하는 물리학자이자 화가다. 책 전편이 빛에 관한 풍성하고 새롭고 의미 있는 이야기들로 가득하지만 가장 핵심 구절을 하나 들라면 책 후반부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택하겠다. “빛은 생명의 시작이자 끝이다. 빛은 스스로 하나의 물질이면서 동시에 다른 물질을 분석하고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다. 빛은 시간을 제어하고 공간을 해체한다.”(234 페이지)

 

저자는 여러 차례 과학자와 예술가에 대해 논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과학은 세상의 이치와 진리를 탐구하는 영역이라면 미술은 그 진리를 말하는 방향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표현하는 영역이다... 과학과 예술은 서로에게 영감의 원천이며 서로의 발전을 응원하는 동반자이기도 하다.”(233 페이지)

 

저자는 자신의 정체성(물리학자이자 화가)을 증명하듯 고전역학과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예술의 영역을 넘나들며 새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쳤다. 고전역학의 대표 존재는 뉴턴(1643 - 1727)이다. 그는 처음으로 빛 자체에 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는 흰색으로 보이는 햇빛을 프리즘을 이용해 일곱 가지 색으로 나누었고 그것을 다시 모으는 실험에 성공했다. 뉴턴처럼 데카르트도 빛을 입자로 보았다.(203 페이지) 뉴턴의 입자설 이전에 파동설을 제기한 사람이 있었다. 네덜란드인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다.

 

뉴턴의 입자설은 빛의 반사와 굴절은 설명해도 회절 현상은 설명할 수 없었다. 빛이 파동으로서 갖는 성질을 실험을 통해 증명해 뉴턴의 입자설을 무너뜨린 사람이 토머스 영이다. 그가 한 실험은 두 개의 좁은 틈(슬릿)에 빛을 통과시켜 스크린에 생긴 간섭무늬를 관찰하는 이중 슬릿 실험이다. 영은 검은색 판에 두 개의 길고 좁은 틈을 만들고 한 가지 색의 빛을 두 개의 틈에 통과시켜 맞은편 스크린에 나타나는 무늬를 관찰했다. 실험 결과 여러 개의 줄무늬가 나타났다. 빛이 파동이기 때문에 두 개의 틈을 통과하며 각각 회절 현상을 일으켰고 두 파동이 보강 간섭과 상쇄 간섭을 일으킴에 따라 밝은 선과 어두운 선이 차례로 나타나 빛이 일렁이는 득한 여러 간섭 무늬를 남긴 것이다.

 

괴테(1749 - 1832)는 빛과 우리의 눈 사이의 상호작용을 배제하고 빛과 색의 관계를 정립한 뉴턴의 관점을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이라 비판하면서 색채는 빛과 사물,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간의 감각에 의해서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괴테는 뉴턴 사후 태어났기에 한 번도 같은 하늘 아래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둘의 다른 견해 제시는 논쟁이라 하기에 충분하다. 영국인 뉴턴과 독일인 괴테의 대립(?)은 미분을 놓고 갈등을 빚은 영국인 뉴턴과 독일인 라이프니츠의 갈등을 연상하게 한다.

 

과학사는 논쟁과 대립의 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빛과 색채에 관한 뉴턴과 괴테의 다른 견해,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격렬한 논쟁(223 페이지) 등이 그런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뉴턴의 입자설은 여러 과학자에 의해 반박되고 다시 증명되기를 반복했다(199 페이지)는 사실도 그렇다. 빛이 입자라면 회절이나 간섭 현상을 설명할 수 없기에 파동설로 기울었다가 빛을 쪼이면 금속판 내부의 전자가 바로 튀어나오는 현상이 빛의 파동성을 설명할 수 없어서 다시 입자설이 힘을 얻는 식이었다.

 

빛은 때론 입자처럼 행동하고 때론 파동처럼 행동하며 그 상태는 확률로만 설명할 수 있다. 절대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상태는 없다. 이는 빛에 대한 최종 결론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론은 보어의 상보성 원리,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다.(211 페이지) 중요한 사실은 하나의 실험에서 입자설과 파동설을 동시에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힌 이론이다.(164 페이지)

 

이를 코펜하겐 해석으로 설명하자면 빛과 전자와 같은 입자들은 측정 전에는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지닌 중첩 상태에 있으며 그 위치는 확률로만 알 수 있다. 측정하는 순간 입자의 위치는 명확하게 알 수 있지만 운동량은 이미 변했기 때문에 측정치에 오차가 발생한다(213 페이지)는 말을 들 수 있다. 코펜하겐이란 상보성 원리를 제안한 닐스 보어가 살았던 도시명을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빛과 색의 차이도 대조적인 관점으로 볼 수 있다. 섞을수록 흰색에 가까워지는 빛 vs 섞을수록 검은 색이 되는 색의 대립으로 말이다.

 

빛에 관한 가장 간단한 정의 중 하나는 빛은 전자기파라는 말이다. 전기장과 자기장이 만나서 생기는 파동이 빛이다. 다시 말해 빛은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를 유도하며 진행하는 파동이다. 파동은 공간이나 물질의 한 부분에서 생기는 주기적 진동을 의미한다.(122 페이지) 요한 발머의 선스펙트럼, 막스 플랑크의 흑체 복사 이론을 빼놓을 수 없다. 발머의 선스펙트럼은 기체 상태의 수소를 방전시켜 발생한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켜 얻은 것이다.

 

태양광은 여러 파장의 빛을 방출하기에 연속적인 스펙트럼으로 나타나지만 수소는 특정 파장의 빛만 방출하기에 몇 개의 선 스펙트럼으로 나타났다. 특정 파장의 빛만 방출한다는 것은 특정 에너지값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원자 내부의 전자는 높은 에너지 값을 가진 궤도에서 낮은 에너지값을 가진 궤도로 이동한다. 이때 두 에너지 값의 차이만큼 빛을 방출한다. 흑체는 모든 진동수 영역의 빛 에너지를 흡수하고 자신이 흡수한 에너지를 모두 빛 에너지의 형태로 방출하는 물체를 말한다.(160 페이지)

 

양자(量子)는 헤아릴 수 있는 최소의 물리량을 뜻한다. 물리량이 양자화된다는 것은 최소량의 정수배로 띄엄띄엄한 값을 갖는다는 의미다. 빛은 입자이기도 하다. 파동으로서의 빛이 전자기파라면 입자로서의 빛은 광자다. 저자는 그랜드캐니언을 양자화된 세계의 단면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라 정의한다.(174 페이지) 양자화된 세계에서 빛은 어떻게 움직일까? 전자는 어떤 에너지 계단에서 다른 에너지 계단으로 이동할 때 빛을 흡수하거나 방출한다. 전자는 높은 에너지 계단에 있을 때 들뜬 상태가 되면서 불안정하다. 이 전자는 바닥 상태로 내려가면서 계단 높이만큼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원소에 따라 계단의 높이는 정해져 있어서 특정 계단 사이만 오갈 수 있다. 오로라도 에너지 계단의 높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대기권에 도달한 태양풍이 산소, 질소 등의 분자들과 충돌해 만들어지는 들뜬 상태의 분자들이 안정된 바닥 상태로 내려오는데 이들은 에너지 계단의 높이에 해당하는 빛 에너지를 방출한다. 이 빛이 오로라다. 오로라가 주로 초록색인 것은 우리 눈이 그 색에 가장 민감하기 때문이다. 오로라는 위도 60 ~ 80도의 극지방에서 주로 나타나 극광 또는 북쪽의 빛이라 부른다.

 

양자역학에서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여러 과학자가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던 개념은 양자의 중첩성과 불확정성이다. 두 개념은 고전역학에서 당연시하던 결정론과 인과율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중첩성이란 하나의 입자가 모든 가능성의 상태로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테라헤르츠, 반타블랙, 포웨히, 고출력 극초단 레이저, 어블레이션 등 이 책에는 낯선 용어들이 많이 나온다.

 

편광(偏光)과 레이저가 기억에 남는다. 편광은 전자기파를 구성하는 전기장이나 자기장이 특정 방향으로만 진동하는 현상이다. 레이저는 자연 상태에서 사방으로 퍼지는 빛을 한 방향으로 모아 세기를 극대화한 시스템이다. 특정과 한(하나)이란 말이 비교를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책에는 여러 화가들이 나온다. 세잔, 쇠라, 피카소 등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저자의 다른 책인‘미술관에 간 물리학자’를 읽어야 하겠다.

 

저자는 ‘빛은 얼마나 작은 틈까지 통과할 수 있을까?‘란 질문을 동력 삼아 다른 과학자들이나 화가들처럼 앞으로도 집요하고 꾸준하게 빛의 정체를 탐구하고 빛의 성질을 이해하는 일을 계속할 것이라 말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그랜드 캐니언을 양자화(量子化)란 개념으로 설명한 저자의 내공에 영향을 받아 다시 지구화학 공부를 성실히 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편광 현미경으로 암석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역시 빛과 관련한 이야기임에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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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을 다 읽지 못하는 습관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완독할 필요가 있는 책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책도 있다. 완독하면 좋은 책을 부분적으로 읽었다 해도 읽은 그 만큼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전체를 다 읽어야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경우가 있기에 의견 제시나 생각 정리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

 

최근 읽고 있는 서민아 교수의 ‘빛이 매혹이 될 때’는 오랜만에 완독할 수 있을 것 같은 책이다. 완독과 서평 작성은 별개의 문제다. 요즘 책을 선택하는 내 기준에 다소 변수가 생겼다. 전체의 문제의식에 여전히 주목하면서도 한 챕터 또는 몇몇 구절에 꽂혀 책을 선택하는 쪽으로 무게 중심이 다소 이동한 것이다.

 

뇌과학 책을 거의 읽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눈에 띄는 챕터가 있는 책을 만났다. 심리학 박사 에노모토 히로아키의 ‘하루 한 권, 기억’이다. 이 책의 챕터들 중 읽기 욕구를 자극하는 것들은 ‘기억 천재의 의외의 단점’,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강화되는 기억’, ‘출처 감시로 기억의 혼란 막기’, ‘기억력 향상에 좋은 음식’ 등이다.

 

신경과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의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을 통해 누렸던 이슈적 문제의식을 얻을 만한 것이 아니지만 유용한 책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슈적 문제의식이란 뇌가 담당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제어해 잘 살아 가게 하는 것이라는 주장 등을 이르는 말이다. 이 주장은 처음(2021년 8월) 접했을 때와 달리 그리 새롭게 다가오지 않는다. 생각은 탄탄한 토대 위에 세우는 잉여이기 때문이다.

 

이시즈 도모히로의 ‘아름다움과 예술의 뇌과학 - 입문자를 위한 신경미학’은 기대된다. 저자는 신경미학자다. 이 책에 빙하기 미술, 즐겁지 않은 아름다움, 숭고와 아름다움, 예술은 ‘억제’인가? 생물학적 욕구와 인간적 품성 같은 주목할 챕터들이 있다. 이 책들 후에 박문호 박사의 ‘뇌, 생각의 출현’을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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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가 만든 세계 아시아의 미 (Asian beauty) 12
조규희 지음 / 서해문집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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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희의 '산수화가 만든 세계'는 특별한 위상을 지녀온 산수화가 만든 동아시아 사회를 문화사적으로 탐구한 결과물이다. 루돌프 아른하임은 한 화가가 자신이 그릴 풍경의 대상으로 어떤 장소를 택할 때 그는 자연에서 자기가 발견한 것을 선택할 뿐 아니라 재구성한다는 말을 했다. 동아시아 산수화론의 핵심 이론이 와유론(臥遊論)이다. 군자는 산수를 사랑해 머물고 싶지만 현실적 의무 때문에 산수화에 마음을 의탁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연에 대한 감탄은 보편적이지만 수준 높은 산수화는 그림을 아는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격조 높은 미적 대상이라는 말을 전한다. 즉 산수의 아름다움은 보편적 미로서 누구나 즐길 수 있지만 산수화 감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하고 싶은 말은 산수를 감상의 대상이 아닌 앎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어떻겠는가? 하는 말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산수화처럼 산수도 아는 만큼 차원 있게 파악하고 논할 수 있으리라.

 

어떻든 저자는 산수미는 산수화와의 지속적 대화를 통해 재형성되는 관념이라는 말을 한다. 뛰어난 예술작품이 실제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다.(61 페이지) 이를 보며 재인폭포의 지질을 떠올린다. 정교한 지질이론이 재인폭포를 깊이 있고 다채롭게 대하게 한다고. 위의 견해는 그림을 효과적으로 자연을 모방하려는 욕구에서 발전한 환영(幻影)주의의 산물로 간주한 곰브리치의 견해와 상반된다.

 

미술사학자 키스 먹시(Keith Moxey; 1940 - )는 화가는 자연을 결코 직접 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자연이 문화적으로 코드화된 방식의 흔적들에 입각해 자연을 대한다고 말했다. 산수화는 순수한 자연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문화적 코드를 지닌 상징이라는 의미다. 흥미로운 점은 고원(高遠)의 거비파(巨碑派) 산수화와 평원(平遠) 산수화의 대비다.

 

알프레다 머크(Alfreda Murck)는 신법에 반대하던 구법당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송적(宋迪)의 소상팔경도에서 평사낙안의 평과 원포귀범의 원이 만난 평원(平遠)에 주목했다. 평원이 그것이다. 소상팔경(瀟湘八景)이란 중국 최대의 담수호였던 동정호(洞庭湖)의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만나는 지점의 아름다운 여덟 풍경을 이른다. 왕안석이 신법파였다면 소동파는 구법파였다. 왕안석은 신종(神宗; 재위 1067 - 1085)의 재가를 얻어 국가 재정 안정, 국방 강화 등의 개혁을 추진했다.

 

신종의 총애를 받은 곽희가 그린 조춘도(早春圖)는 거비파 또는 기념비적 산수화 그림을 잘 보여준다. 연천 장남 고랑포구 일대의 아름다운 여덟 경치인 고호팔경(皐湖八景)은 어떤가? 평사낙안(平沙落雁)이 있고, 원포귀범(遠浦歸帆)은 없지만 석포귀범(石浦歸帆)이 있다. 거비파와 다르게 가을이나 겨울의 저녁 무렵 풍경을 주로 그린 소상팔경도처럼 고호팔경도 저녁 무렵의 풍경이 주되게 반영되었다.

 

소상팔경도 이후 팔경(선정)이 뒤를 이었다. 고려에서 송적의 소상팔경도가 주목을 받은 것은 명종 때다. 명종은 의종을 폐위한 무신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임금이다. 이제현은 소상팔경시와 송도팔경시를 지었다. 전후팔경을 읊은 이제현은 후팔경에 장단석벽(長湍石壁)과 박연폭포 등을 포함시켰다. 예성강은 서강월정(西江月艇; 전팔경), 서강풍설(西江風雪; 후팔경) 등으로 표현되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단(李旦)은 송도팔경은 옛 노래임을 선언하는 차원에서 신도팔경도 병풍을 제작했다. 그러나 1398년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즉위한 정종은 다음 해 개경 천도를 단행했다. 저자의 주장은 팔경도는 정치적 목적의 장치라는 점이다. 세종이 총애했던 안견은 사시팔경도 제작을 주도했다. 숙종 15년(1689년) 기사환국으로 부친 김수항이 사사되자 김창협, 김창흡 형제는 출사하지 않고 후학 양성에 주력했다.

 

형제는 서인이 재집권한 1694년의 갑술환국 이후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에서 강학을 재개했다. 김창흡의 수제자로 영조 대를 대표하는 시인이 된 이병연은 1696년 겨울 동생 이병성과 함께 석실서원에 들어섰다. 이병연은 명산대첩을 찾아 사색해야만 좋은 시를 쓴다는 스승 김창흡의 문예론에 깊이 영향을 받은 시인이었다.

 

이병연은 금강산 초입의 금화의 현감으로 부임한 후 그 해 8월 설악산에서 은거하던 스승 김창흡과 함께 마하연에서 비로봉으로 금강산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1712년에는 장동에 이웃해 살던 화가 정선을 초청해 함께 금강산을 유람했다. 김창흡의 호는 삼연(三淵)이다. 이는 그가 머물던 장동 김씨의 별서지인 삼부연에서 따온 이름이다. 김창흡의 문인들에 의해 금강산 유람이 촉발된 후 18세기 후반이 되자 금강산 유람은 속되고 악한 일로 여겨질 정도로 열풍이 되었다.

 

강세황은 사람들이 산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지도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산을 유람하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아취 있는 일이지만 자신은 이런 세태가 싫어 금강산 유람을 가장 속악한 것으로 여긴다고까지 했댜. 김창흡의 문예론에 영향을 받은 서인계 벌열 가문 문인들 사이에서 시작된 금강산 유람이 강세황의 시대에는 속된 행위로 간주될 만큼 돈만 있으면 꼭 한 번 탐방하고 싶은 열망의 대상이 되었다.

 

대개 이러한 현상은 점차 유람이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는 말로 설명된다. 그러나 실상은 늘 그곳에 존재했던 금강산의 산수미가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주목받게 됐음을 말해 준다. 즉 금강산에 직접 가서 꼭 보고 싶은 특정 풍경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선은 문벌 없는 집안 출신이었지만 송시열의 문인으로 청풍계에 세거해온 외조부 박자진의 도움으로 김창흡 문하의 인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김조순의 증언에 따르면 어려운 정선의 집안 사정을 잘 알던 김창집이 벼슬자리를 마련해주어 정선의 출사 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송도팔경에 대한 기억을 지우며 새 도읍지 한양이 가장 아름다운 곳임을 신도팔경을 통해 말했듯 한 나라 도읍지의 팔경은 대개 통치와 관련된 특별한 경관이었다. 국왕의 은혜가 미치는 경관이었기 때문이다. 정선의 금강산 화첩에 발문을 적은 신정하는 자신만이 금강산의 명성에 이끌려 무턱대고 유람하는 호명지병(好名之病)을 면한 인물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한없이 바라보고 싶은 욕구는 이 세상에서 충족되지 않는 영원을 향한 갈망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저자는 그러나 산수화 속에서 조망된 특정 경관은 그 시점에 문화권력을 쥔 인사들의 특정 장소에 대한 정치 경제적, 사회 문화적 이해 관계와 관련된다고 덧붙인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경관을 왜, 어떻게 아름답다고 하는지? 이와 같은 질문 속에서 산수를 섬세하고 풍부하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산수미는 산수의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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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이동으로 보는 한국사 - 삼국통일전쟁에서 여말선초까지
이정철 지음 / 역사비평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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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철의 '권력 이동으로 보는 한국사'는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1부 7세기, 당나라의 등장과 삼국의 생존 투쟁, 2부 통일 왕국의 파편화, 3부 호족의 시대, 4부 원 간섭기 고려 국왕들의 개혁, 5부 개혁에서 건국으로 등이다.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당나라와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와 관련된 문제였다. 618년 건국한 당나라를 유화책으로만 상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 대당 강경파 연개소문은 유화주의자인 영류왕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알아차리고 선공했다.

 

연개소문의 큰 아들 남생의 묘지(墓誌)에 연개소문의 아버지와 연개소문이 양야양궁(良冶良弓)했다는 기록이 있다. 쇠를 잘 다루고 활을 잘 다루었다(병사를 잘 길렀다)는 뜻이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먼저 제압하려 한 데 비해 당나라는 고구려를 최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당나라에게 고구려 침공의 명분이 되었다.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 친정(親征)에 나섰다. 신라는 당의 지원군 파병 요구에 응했다. 고구려 남부 국경선인 임진강을 넘어 고구려를 공격함으로써 당나라를 배후 지원했다. 당나라는 고구려 침공 실패로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선공하는 전략을 세웠다.

 

신라는 당나라 이외의 선택지가 없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느슨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여 신라에 공세적인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백제의 패망은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660년 의자왕의 항복이 첫 번째이고 6대 663년 백제 부흥 운동의 실패가 두 번째다. 사비 도성이 함락된 후 매우 빠르게 대규모로 백제 부흥군이 일어났다. 백제 부흥군은 3년 후 소멸되었다. 백제 부흥군 지도부 내의 깊은 반목과 갈등이 부흥 운동을 종식시켰다. 신라와 동맹관계였던 백제는 554년 신라의 공격을 받고 성왕이 목숨을 잃는 사건을 당했다. 551년 신라와 백제는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 때문에 고구려는 임진강 영역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이 때로부터 668년 멸망할 때까지 약 120년간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신라와 대치했다. 642년 쿠데타 이후 23년만인 665년 연개소문이 사망했다. 642년 쿠데타 이전 고구려는 귀족 연립정권 체제였다. 연개소문은 제도화된 권력 창출 체계를 확립하지 못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무너뜨린 후 668년 12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660년 백제의 웅진 도독부, 663년 신라의 계림주 대도독부에 이은 것이다.

 

이로써 백제, 신라, 고구려는 모두 당나라 행정 체계의 일부가 되었다. 신라가 당나라를 상대로 치른 두 건의 전투가 있다.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다. 매소성을 연천 청산 대전리 한탄강 주변 일대로 보는 견해가 양주 대모산성으로 보는 견해보다 많다. 매소성 전투는 당군을 한반도에서 패퇴시킨 육상의 결전이다. 매소성 전투 다음 해에 벌어진 금강 하구 기벌포 전투는 당군을 한반도에서 패퇴시킨 해상 결전이다.

 

김부식은 신라를 상대, 중대, 하대로 나누었다. 상대는 성골 계통이 왕이 된 시대이고, 중대는 태종무열왕(김춘추) 직계가 이어진 시대이고, 하대는 태종무열왕계가 아닌 진골이 왕이 된 시대다. 박혁거세 거서간부터 진덕왕까지 28 임금이 상대, 태종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 8 임금이 중대, 선덕왕부터 경순왕까지 20 임금이 하대다. 신라를 파편화한 제도가 골품제였다. 신라는 골품제가 발생시키는 문제들을 관리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중앙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잃어 갔으며 지방은 파편화되었다.

 

6두품이 진골 귀족에 대한 비판 세력으로 등장했으나 개혁에 실패하자 6두품과는 전혀 다른 새 사회 세력인 호족이 등장했다. 진골 귀족들은 자신들 내부에서는 파벌화되어 내란 수준의 갈등을 빚었음에도 지방이나 6두품의 신분 상승 요구에 대해서는 일치 단결하여 단호히 반대했다. 언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고 정점을 지나 쇠퇴하는 사회에서 더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6두품 출신 지식인들과 관료들의 불만은 신라 패망과 관련해 자주 언급된다. 신라의 골품제가 강력했던 데는 이유가 있다 골품제는 신라의 성공적 성장 과정이 만들어낸 제도다.

 

그것은 사로국이 신라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주변 국가들의 지배 집단을 흡수하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세력을 인정하고 신라의 위계 체계에 반영하여 흡수, 편제했던 틀이 골품제다. 8세기 후반에 이르러 소농민층의 경제적 조건이 더 악화되었다. 소농민층은 전근대 시대 전체를 통틀어도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었던 적이 드물다. 개별 소농민들은 늘 생존과 소멸의 경계선상에 있었다. 소농민층의 생산력은 높지 않았다. 수리 시설은 크게 부족했다. 고리대도 소농민층을 힘들게 한 요인이었다.

 

소농민층은 수조권 및 토지에 딸린 노동력 및 공물을 모두 수취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읍을 하사받은) 고위관료로 인해 더욱 어려웠다. 신문왕 때 폐지된 녹읍이 경덕왕 때 부활했다. 열악한 생산 조건에서 가중되는 부담은 영세한 소농들을 좌절시키는 힘으로 작용했다. 다수의 소농민이 토지를 잃고 유민으로 떠돌거나 지방 유력자의 비호 아래 들어가 대토지소유제에 포섭되었다. 이렇게 되면 국가는 세금 낼 사람과 군인이 될 사람을 잃는다. 이 두 가지야 말로 국가 기구를 유지하는 핵심 자원이다.

 

이들을 잃고서는 국가가 유지될 수 없다. 고구려와 백제는 수도를 옮긴 적이 있지만 신라는 그렇지 않다. 기득권의 강도와 배타성은 특정 지역에 대한 고착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후삼국시대는 말 그대로 세 나라가 공존한 시대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한 900년부터 왕건이 통일을 달성한 936년까지 36년간에 해당한다. 신라 중앙 정부는 822년 김원창의 난 이후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는 말은 지방에서 생겨난 많은 호족이 왕경(王京) 경주에 대해 독립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889년 원종과 애노의 난은 그 흐름의 정점을 알려주는 사건이다.

 

견훤과 궁예도 원종과 애노의 난 이후 자신들의 진로를 분명히 했다. 왕건은 후삼국을 호족 연합적 형태로 아울렀다. 신라 중앙 정부에 대해 독립적인 호족들이 등장한 계기는 치안 부재다. 진성여왕 이후 도적, 군도, 초적 등으로 불리는 반란군들이 전국적으로 창궐했다. 진골 귀족에 비해 호족들에게는 혈연보다 지역성이 훨씬 중요했다. 견훤과 궁예가 초기에 성장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듯 호족은 혈연과 무관하게 주변 사람들을 자신에게 끌어들일 수 있을 때에만 더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발전했다.

 

고려 건국 초 태조 왕건이 처음 시행한 지역 기반의 본관 제도는 이 같은 사회적 변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호족 개개인의 사회적 출신은 다양했다. 지역의 터전을 둔 토착 세력이 호족이 되는 경우도 있고 견훤처럼 중앙에서 지방관으로 파견되었다가 독립한 세력도 있었다. 궁예, 원종, 애노처럼 공동체에서 일탈하여 도적 무리를 형성한 세력도 있었다. 이런 무리들도 호족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역에 기반을 둔 경제력을 갖추어야 했다. 호족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존재다. 호족 같은 존재는 사회의 기존 시스템이 무너져서 무질서해질 때 나타난다.

 

본인의 재능이나 운에 따라 귀중한 사회적 차원을 획득하여 비록 적은 규모라 해도 자기 주변의 일정한 영역을 지배하는 존재가 호족이다. 호족은 속성상 장기간 지속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기존의 사회 시스템이 붕괴된 상황에서 나타나는 존재였기에 호족이 등장하게 되면 사회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통합되는 힘이 자연스럽게 작동하기 마련이다. 고려 건국은 그런 흐름을 증명한다. 견훤은 실제로는 892년 무진주에서 스스로 왕이 되었다. 하지만 왕이라고 공공연하게 칭하지 못하다가 900년 후백제를 건국하고 난 후에야 왕이라 자칭했다.

 

궁예 또한 896년 철원에 도움을 정하고 건국의 태세를 갖추었지만 901년에 가서야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국왕으로 즉위했다.(238 페이지) 927년 견훤이 경애왕을 제거하고 경순왕을 대신 세운 사건과 930년 고창 전투 사이에 중요한 전투가 있었다. 927년 11월 견훤과 왕건의 군대가 격돌한 공산 동수 전투다. 신라 경애왕은 견훤이 공격해 오자 왕건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다. 왕건의 원군이 도착했을 때 이미 경주는 견훤에게 점령당했다. 고려군은 대패했다. 왕건은 신숭겸의 희생 덕에 목숨을 건졌다. 고창 전투에서는 견훤 군대가 대패했다. 패서(浿西)의 패권을 잡았던 박지윤이 궁예에게 귀부하자 송악의 왕륭이 그 뒤를 따랐다.

 

왕륭은 궁예에게 자신의 지역 기반인 송악을 모두 바치겠으니 맏아들 왕건을 송악의 성주로 삼아 달라는 제안을 했다. 궁예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궁예가 전제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은 904년 무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해에 궁예는 국호를 고려에서 마진으로 바꾸었다.(269 페이지) 마진은 마하진단의 약칭이다. 범어로 크다는 뜻이다. 진단은 동방 전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왕건은 견훤이나 궁예는 물론이고 어떤 다른 호족들보다도 좋은 조건에서 사회 경력을 시작했다.

 

좋은 집안과 아버지 왕륭의 대담한 거래의 결과였다. 가히 행운이라고 할 만한 요소를 갖추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조건이 왕건의 승리를 결정한 정도는 아니었다. 왕건은 22세에 궁예를 만나 42세에 왕위에 올랐고 60세에 후삼국을 통일했다. 왕건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쿠데타 세력의 추대를 받아 즉위했다. 왕건은 처음 기병장들이 쿠데타를 이끌어 달라고 요청하자 완강히 거부했다. 중폐비사(重幣卑辭)는 선물을 후하게 주고 말은 겸손하게 한다는 뜻이다.

 

즉위 이후 호족들을 대하는 왕건의 태도 즉 포용 정책을 함축하는 말이다. 그의 이런 태도는 궁예와 대척점에 있었다. 고창 전투에서 왕건이 예상 밖의 대승을 거두자 931년 신라 왕은 왕건에게 사람을 보내서 귀순할 뜻을 밝히며 만남을 요청했다.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가장 큰 관건이 된 요인은 수많은 호족과의 관계 설정 문제였다. 왕건은 견훤과 궁예 외의 호족들과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는데 월등한 기량을 보였다. 하지만 호족들과 관계만 잘 맺는다고 나라를 안정시킬 수는 없다. 나라를 근본적으로 안정시키려면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 왕건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왕건은 십일세법으로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였다. 호족에 대한 포용 정책과 백성에 대한 십일세법은 상충할 가능성이 높다. 왕건 재위 기간 이 문제는 현실화되지 않았다. 광종은 과거 제도를 도입했다. 후삼국시대를 포함하여 백여년에 걸쳐 성장한 무장 세력을 제도적으로 축소하기 위해서였다. 즉위 직후 광종의 왕권은 두 형(혜종,‘정종; 定宗’)이 가졌던 왕권과 다름없이 불안했다. 1231년(고종 18년)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여섯 차례에 걸쳐 30년 가까이 이어졌다. 고려는 1170년(의종 24년) 이래 무신 정권이 지속되고 있었다. 고려 정부는 일단 몽골이 요구한 조건들(곡물 납부, 군사 협력, 다루가치 설치) 등을 약속하여 몽골을 안심시킨 뒤 고려 땅에서 군대를 철수하게 했다. 몽골군대가 철수한 다음 해인 1232년(고종 19년) 6월 고려는 전격적으로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겨 대몽 항전체제에 돌입했다. 이후 1259년 국왕이 태자를 몽골에 보내 귀부할 때까지 항쟁이 지속되었다.

 

고려가 개경으로 되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다시 11년 후인 1270년(원종 11년)이다. 고종은 태자 왕식(후에 원종이 됨)을 몽케 칸에게 보내 귀부하기로 결정했다. 태자 일행은 몽케의 남송원정군이 사천의 조선행재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경요양부에서 조어산까지는 대단히 먼 거리다. 이 와중에 몽케 칸이 사망했다. 누구에게 가서 고려의 귀부 의사를 밝혀야 할지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당시 몽골 제국의 정치적 상황은 공석이 된 대칸 한자리를 놓고 몽 케의 두 동생 쿠빌라이와 아리크무카가 대결하는 형세였다. 어떤 이유로 그랬는지 불확실하지만 왕식은 아리크부카 대신 쿠빌라이에게로 갔다. 왕식의 행동은 고려를 대표한 귀부였다. 왕식을 만난 쿠빌라이는 크게 기뻐했다. 왕식의 귀부는 쿠빌라이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고려 태자 원종은 쿠빌라이를 만나 진행한 교섭에서 여섯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고려의 의관 등 풍속은 본국 즉 고려의 것을 따른다. 둘째 원나라 사신은 몽골 조정에서만 보낸다. 셋째 고려 조정의 개경 환도를 재촉하지 않는다. 넷째 압록강 유역에 주둔시킨 몽골군대를 가을 내로 철수한다. 다섯째 고려에 설치한 다루가치를 소환한다. 여섯째 고려에 설치한 몽골에 투항한 고려인들을 돌려보낸다 등이다. 강화 협상으로 내건 6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첫 번째인 불개토풍이었다.

 

불개토풍은 원나라 세조가 약속한 제도라는 의미의 세조구제(世祖舊制)였다. 왕식(원종)의 귀부가 힘이 되어 대칸이 된 쿠빌라이는 왕식의 다소 과한 요구들을 흔쾌히 수용했다. 부왕 고종의 사망 이후 뒤늦은 즉위식을 하고 왕위에 오른 원종은 쿠빌라이와의 인연으로 고려에서의 발언권과 권위가 높아졌다. 고려 조정에는 원종으로 대표되는 강화파와 몽골과의 항전을 계속 주장하는 무신 정권이 공존했다.

 

원종은 임연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쿠빌라이의 군사 파견에 힘입어 4개월만에 복위했다. 원종은 임연 제거와 출륙환도를 조건으로 쿠빌라이에게 군사를 얻었다. 원종은 몽골군을 이끌고 돌아와 무신 정권을 붕괴시키고 강화도를 나와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1170년 성립된 고려 무신 정권은 정확히 백년 만인 1270년에 종식되었다. 원종은 원나라에서 돌아온 다음 해인 1271년 2월에 사신을 보내 정식으로 세자와 원나라 공주의 결혼을 요청했다. 11월에 귀국한 고려 사신은 쿠빌라이가 청혼을 허락했음을 알렸다.

 

몽골 황실의 통혼은 혈통적, 문화적 동질성이 우선 고려 대상이었다. 여기에 정치, 군사적 목적성이 더해졌다. 첫 통혼자는 충렬왕이었다. 충렬왕은 아버지 원종보다 훨씬 더 자발적으로 몽골 제국의 일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원나라는 고려를 황제의 부마국으로 대우했다. 충선왕은 첫 혼혈 군주였다. 충선왕의 초휘(初諱)는 왕원이고 후에 왕장으로 개명했다. 충렬왕의 세자 왕원(충선왕)은 16세에 원에 독로화(禿魯花; 뚤루게; 원나라에 인질로 보내지는 고려 왕족 및 귀족 자제)로 보내졌다.

 

원 간섭기 초에는 독로화로 원나라에 가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나중에는 그 성격이 변하여 일종의 정치적 기회의 성격을 띠게 된다. 쿠빌라이 칸의 신임을 얻은 세자는 아버지 충렬왕과 갈등의 휘말리게 된다. 충선왕은 심양왕(瀋陽王; 원의 황제가 고려 왕에게 내린 봉작)과 고려 국왕의 지위를 함께 가졌다. 충선왕은 무신 집권기의 인사권 독점 기구인 정방을 폐지했다. 정방은 고려 패망의 한 원인이었다. 충선왕은 환관 임백안의 참소로 티베트로 유배를 갔다. 아들 충숙왕은 정방을 다시 설치했다.

 

조선을 건국한 신흥 유신들이 그들 스스로 처음 결집한 계기는 공민왕 16년에 이루어진 성균관 재건이다. 성균관이 재건되자 성균관 대사성 이색을 중심으로 김구용, 정몽주, 박상충, 박의중, 이숭인 등이 교관으로 성균관에 모여서 성리학 부흥의 계기를 만들었다. 신흥 유신들이 이제현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현상은 당시 고려에서 진행되었던 주자 성리학 보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나라로부터 주자 성리학이 고려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이제현의 역할 또는 지위는 독보적이었다.

 

이성계가 연이어서 두드러진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요인은 당시 고려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거느렸기 때문이다. 선대부터 거느려온 이성계의 친병은 동북면 인민과 여진인들로 구성되었다. 사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만 대략 1000에서 2000명 정도로 구성된 정예 병력이었다. 고려는 동북면의 지역민을 회유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역역(力役)을 부과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평소에도 군사훈련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성계가 여진족 추장까지 포함하는 휘하 부대의 충성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선대의 유산 덕분만으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자신의 용맹함과 능수능란한 용병술, 적조차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이 더 큰 요인이었다. 그는 무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전투에서는 늘 용맹스럽게 싸웠다. 더구나 그는 적이라도 우수한 무공을 가지고 있으면 살려서 자신의 수하로 삼곤 했다. 부하 장수들 중 여진족 추장 출신이 여러 명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위화도 회군 1년 뒤에 창왕은 유배지 강화도에서, 우왕도 역시 유배지인 강릉에서 피살되었다. 이들의 무덤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왕건이 견훤에 대해서 그랬듯 저항 세력의 결집을 자극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왕과 창왕이 피살된 후 3년이 채 못 되어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폐위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우왕을 잇는 두 왕의 재위 시기는 실질적으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양상은 이전의 왕조 교체 과정에서 볼 수 있는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신라에서 고려로 전환될 때는 정치 중심지인 수도와 핵심 인물들의 사회적 신분이 말 그대로 완전히 변화했다. 경주에서 개경으로 정치무대가 바뀌었고 정치 집단도 진골 귀족에서 평민 호 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교체는 정치 무대나 주인공들의 성격에 뚜렷한 단절이 보이지 않는다. 개경이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고려의 쇠망과 조선의 건국 과정이 겹쳐서 진행되었다. 심지어 개국에 반대했던 인물들이 조선 건국 이후 새 나라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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