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영릉(寧陵)과 영릉(英陵) 해설을 만족스럽게 마쳤습니다. 영릉(寧陵: 효종대왕 능)을 지나 영릉(英陵: 세종대왕 능)으로 이어지는 숲길에서 영릉(永陵) 이야기를 했습니다. 파주에 있는 진종(眞宗) 10세에 삶을 마친 효장세자(영조의 아들)와 그의 비인 효순왕후(孝純王后) 조씨가 잠든 곳입니다.

 

잘 아시듯 효장세자는 정조(正租)가 된 이산(李蒜)의 법적인 아버지로 후에 진종으로 추존(追尊)되었습니다.(효장세자가 이산의 법적인 아버지가 된 것은 이산의 생부인 사도세자가 반역죄로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에 이산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이산을 자신의 아들인 효장세자 호적에 올린 영조로 인한 결과입니다.)

 

법적인 아버지도 생소하고 더구나 열 살 나이의 법적인 아버지라는 점도 생소하다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해설을 마치고 돌아오니 스터디그룹 방에 문종 이야기가 올라왔습니다.

 

** 선생님께서 문종은 8세인 1421년 세자 책봉, 29세인 1442년에 섭정, 37세인 1450년에 즉위, 39세인 1452년에 승하했습니다.”란 글을 올렸습니다.

 

이에 저는 , 감사합니다. 문종은 39세에 돌아가신 거네요. 32세에 삶을 마친 '태종의 서자 이우(?)'의 시호가 희도(僖悼)랍니다. 28세에 돌아가신 사도세자는 사도(思悼)고요. 20세에 타계한 예종은 시호가 양도(襄悼)고요..한 논자는 32세에 타계한 이우를 설명하며 중년이 되어 일찍 죽은 것을 도()라고 한다고 말하네요. 옛날에는 30이 넘으면 중년이었나 봅니다.”란 글을 올렸습니다.

 

사실 저는 문종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 도() 이야기를 덧붙인 것을 약간 후회했습니다. 주제를 벗어난 글이 아닌가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김** 선생님께서 꽤 괜찮은 스터디가 될 듯 합니다. 같이 공부 할 수 있는 벗들이 계셔서 감사한 삶입니다. 조선시대라면 넘치는 노년이겠지만 새로운 시작점의 우리 선생님들께서는 푸른 청춘입니다.”란 글을 올리셨습니다.

 

순간 불편하고 미안하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해피엔딩이 아니겠는지요? 어제 왕릉 해설에서는 한 가지 사건이랄 순간도 있었습니다. 남한의 40기의 왕릉 가운데 영월의 단종능인 장릉(莊陵)이 서울, 경기 지역 외의 유일한 왕릉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고양, 구리, 김포, 양주, 남양주, 여주, 파주 등이 능이 있는 경기의 주요 도시들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잘 아시듯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건릉(健陵), 추존왕 장조(莊祖: 사도세자)와 추존 왕비 현경왕후 홍씨(혜경궁 홍씨)의 융릉(隆陵)이 바로 경기 화성에 있는데 그것을 빼놓은 것입니다. 정조와 사도세자는 늘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경기도에 있는 능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얼마나 자주 서울을 드나들며 조선 중심의 삶(해설, 스터디)을 사는지 확인된 순간이라 할 것입니다. 물론 파주와 양주, 남양주는 제가 사는 곳과 같은 도인 경기 북부의 지역들이지만 심정적으로 멀게 느껴집니다.

 

앞에서 언급한 이**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사는 곳이 송파(松坡)여서 한성백제에 관심을 두는 것이라며 백제에는 큰 관심이 없지만 지금 하고 있는 국외 소재 문화재 공부에는 관심이 많다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조선에 초점을 맞추어 왔기에 어렵겠지만 백제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려 합니다. 조선 또는 백제가 아닌 조선 그리고 백제인 것입니다. ‘또는의 공부가 아닌 그리고의 공부가 진정한 공부가 아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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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독서를 거의 하지 못해 문제의식을 느낀다. 독서를 하지 않는다고 사는데 지장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무슨 걱정인가,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컨디션 저하와 집중력 부족이 부진(不振)한 독서 즉 부독서(不獨書)를 낳는 현실 자체다.

 

덧붙여 나는 삶에서 의미를 찾는 유형의 사람이라는 점에서 책을 통해 습득한 내용에 내 생각을 붙여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현실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미즈 이쿠타로는 논문 잘 쓰는 법에서 표현이라는 우회로를 거침으로써 우리는 진정으로 서적을 읽고 그 내용을 자신의 정신에 깊이 새길 수 있다고 말한다.(12 페이지)

 

또한 쓰는 것을 통해 진정으로 읽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13 페이지) 읽지 않으니 쓸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그렇기에 정신에 새길 내용도 부족하고 그럭저럭 만나는 내용도 제대로 새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난 시기의 독서에 의거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산만한 글일망정 쓴다. 하지만 시미즈 이쿠타로가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책을 읽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전면적인 독서를 못하는 현실이다. 단편적인 독서, 닥친 현안(懸案)을 해결하기 위한 땜질식 독서는 한다.

 

오늘 아침 예스24에서 내 리뷰를 읽고 도움을 받아 책을 구매한 사람으로 인해 내게 소액의 적립금이 셍겼다. 김태연의 소설 기형도를 잃고 나는 쓰네란 책을 읽고 쓴 리뷰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쓴 것은 지난 해 9월이었으니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주 오래 전의 일인 듯 느껴진다.

 

나는 무엇을 잃고 (책을 제대로 읽지는 못하고) 겨우 글이나 쓰고 있는 것인가? 자신감, 희망, 방향, 목표 등이 그것일까? 내게 적립금이 생긴 이 일은 나로 하여금 지난 시절 내가 치른 독서의 흔적을 기억하게 하는 사건이라 해도 좋겠다.

 

책은 나의 스승이고 친구였다. 아니 지금도 그러니 현재형으로 써서 스승이고 친구라고 해야 옳다. 우치다 다츠루가 이런 말을 했다. “스승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한 자는 텍스트를 읽을 수가 없다. 타자 안에서 무한을 찾아낸다고 하는 목숨을 건 도약을 해내지 못하는 자는 텍스트 안에서 무한을 찾아낸다고 하는 목숨을 건 도약도 역시 잘 해낼 수 없다.”(‘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44 페이지)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자신의 전 생애를 건 기투(企投) 즉 내던짐이다. 책 역시 그렇게 해야 할 중요한 만남 대상 중 하나다. 현실적으로 모든 책이 그런 대상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의미한다. 나는 한 번 읽고 더는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폭력적이지만 책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첫 시간이 지났지만 레비나스로 읽는 민중신학 혹은 민중신학으로 읽는 레비나스란 강의를 알게 되었다. 앞으로 다섯 차례(526, 62, 69, 616, 623, 경기대 앞 카페 까멜로. 14301630) 일정이 남았다.

 

무한을 찾아내는 목숨을 건 도약을 말한 레비니스와 민중신학의 만남이라니 흥미가 생긴다. 전혀 무연(無緣)한 관계항이 아니니 접점을 찾았겠지만 친연성을 짐작하지 못한 두 항을 만나게 한 것이어서 관심을 부른다.

 

지난 달 함석헌 기념관에서 열린 함석헌과 양심적 지식인들이란 시리즈의 마지막 순서를 맡으신 김진호 목사님과도 관계 있는 한백교회가 주최하는 모임이어서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책을 많이 읽을 때 행복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책을 읽고 고투할 때 행복했다. 여기서 말하는 고투란 고투(苦鬪)이지만 고투(孤鬪) 즉 외로운 싸움이기도 하다.

 

그 외로운 읽기, 외로운 공부가 힘들어 다른 사람들을 찾아 이리 저리 다녔던 것이 지난 3년의 내 행적이었다. 그 안에서 최고의 스승 같은 도반(道伴)‘을 만났으니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여기 저기서 공부는 계속되고 좋은 만남이 생겨나지만 지속적이어야 의미가 있다. 인연을 더욱 의미 있게 하기 위해 책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때맞춰(?) 나온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를 읽고 독서의 의미, 방식, 전망 등을 다시 새기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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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의 파격을 주제로 이야기 해야 한다. 그 가운데서도 범종(梵鐘)에 관심이 간다. 범종은 불교 4물 가운데 하나로 쇳소리가 나기 때문에 멀리까지 소리가 퍼진다. 쇳소리에는 귀신이나 정령들이 잘 반응하는 소통의 기능이 있어 지옥 중생들을 제도한다고 믿어진다.

 

범종루는 대웅전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에 위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허균 지음 사찰 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211 페이지) 범종은 경종(鯨鐘)이라고도 한다. 종의 꼭지에 장식한 용에 얽힌 전설에서 연유한 이야기다.

 

일본 소재 한국 공예품의 현황과 특징이란 글도 요약해야 한다. 이 자료에 의하면 일본에 소재한 공예품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범종이다. 문제는 요약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연곽(蓮廓)을 알기 위해 상대(上帶)를 찾아야 하고, 당초문을 알아야 하고...사전에 있지도 않은 시문이란 말을 알아야 하고..

 

시문은 무늬를 새긴다는 의미의 施文인 듯 하다.. 상대는 종의 어깨 부분에 둘려진 무늬띠를 말한다. 연곽은 상대 밑쪽의 네 곳에 붙어있는 네모난 테를 말한다. 힘을 내서 열심히 하자. 재미 있는 게임이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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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서 2012년 전 세계 사망자 수 5600만명 가운데 당뇨로 80만명이 죽었고 전쟁으로 12만명이 죽었으니 설탕은 화약보다 더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망과 관련해 교통사고와 흡연을 비교하는 경우가 있지만 당뇨와 전쟁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해 보인다.

 

더구나 당뇨가 설탕 때문이라는 생각도 문제다. 당뇨는 설탕 때문이 아니라 췌장 기능 저하나 부조화(망가짐) 등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췌장 이상으로 너무 많은 당분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당뇨가 생기고 그로 인해 합병증이 발생하는 것이라는 점을 하라리는 모르는가?

 

당뇨는 당분으로 인해 일어나는 병이 아니라 몸안에 당분이 모자라(몸 밖으로 당분이 너무 많이 빠져나가) 생기는 병이다.(과도한 당분 또는 탄수화물이 췌장을 무력하게 하지만 췌장을 무력하게 하는 것은 당분만이 아니다.)

 

당분은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자세한 것은 의사가 아니라서 패스) 세계적 베스트 셀러의 저자가 너무 안이한 생각을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발 하라리가 사람들 입에 폭발적으로 오르내릴 때 나는 한 발 물러서서 예의 그 너무 많은 인기를 얻는 책을 꺼리는 습관을 발휘했다.

 

나는 물론 하라리가 설탕에 관해 어이 없는 말을 했기에 그의 모든 생각을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읽지 않아 단언할 수 없지만) 그의 구성력이나 전체를 보는 안목 같은 것은 좋아 보인다.

 

처음부터 내키지 않는 저자여서 읽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할 뿐이다. 설탕에 대한 하라리의 진단은 페북에서 읽은 것이다. 그렇다고 진의를 바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왜곡할 우려는 없다.

 

전체를 다 읽지 않아도 당뇨가 설탕 때문이라는 말은 잘못이고, 설탕이 전쟁보다 위험하다는 진단은 무리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만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지 못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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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대한 이야기는 몇 차례 쓴 적이 있어 다시 쓰고 싶지 않지만 또 쓰게 되었다. 물론 비슷한 듯 하지만 다른 부분이 있어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난 주인가 독서에 대한 신간을 낸 한 유명 작가가 페친 신청을 해와 삭제했고 오늘도 비슷한 책을 쓴 유명인이 페친 신청을 해와 삭제했다.

 

책을 낸 유명인이든 단지 페친수가 수천명씩으로 많은 사람이든 친구 신청에 응하면 거의 대부분 좋아요한 번 누르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이 답글을 남기기를 기대하는 것은 거의 무망한 상황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결론은 자신이 쓴 책을 알리려는 것 이상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유명인을 싫어하는가?‘라는. 그런 경향이 없지 않다.

 

독서법에 대한 책을 예로 들어 말하자면 나는 유**, ** 등이 쓴 글쓰기 책을 읽지 않았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유명인들이 쓴 글쓰기 관련서는 몇 권 읽었으니 내가 유명인이 쓴 글쓰기 책을 별 이유도 없이 무조건 외면했다고 할 수는 없다.

 

기준은 무엇인가? 극히 주관적이지만 거품이 많다고 생각되는 책은 읽지 않는 것이다. 나는 실력이 있지만 덜 알려진 사람의 책을 찾는 유형에 속한다. 몇 번 말했지만 글쓰기 책은 읽을 필요가 있기도 하고 필요하지 않기도 하다.

    

깔끔하고 쉬운 글을 쓰는 기술을 가르치는 부분은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좋은 컨텐츠를 갖춘 논리적인 글을 쓰는 것은 본인이 부단히 노력해서 갖추어야 하기에 굳이 글쓰기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물론 어느 정도 도움은 된다. 그러나 대체의 책들이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기에 실망스럽다. 다독하고 다작하라는 등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런 점은 책쓰기를 가르치는 책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어떻게 아이디어를 얻었고 남들이 쓰지 않은 부분을 발견하게 되었는지 등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알게 모르게 수십 권의 글쓰기 및 책쓰기 책을 읽었지만 이렇다 할 것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책들을 읽는 것이겠지만 비슷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도 몇 권 읽은 장르의 책이어서 말하기가 불편하지만 사람들이 문학 작품을 해설한 책을 읽는 것은 읽을 책을 선택하는 데 참고하려는 의도가 아닌 듯 하다. 학습 참고서를 읽는 것이 독서의 알리바이이듯 즉 독서하는 것이 아님을 증거하는 것이듯 독서법 책을 읽는 사람은 해당 책으로부터 요약된 정보를 얻어 시간을 절약하려는 의도가 강한 듯 하다는 의미다. 진정한 독서라 할 수 없다는 의미다.

 

말하고 싶은 것은 나와 진정 친구가 되고 싶다면 신청 전에 답글도 달고 좋아요도 누를 것을 바란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 나와 친구가 되려는 것인지 자신의 책을 알리려는 것인지 가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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