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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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全鎣弼: 1906 1962) 선생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우리나라 국보급 문화재들의 일본 유출을 막고 일부 문화재는 일본에서 되사온 문화의 투사 역할을 하신 분이다. 1938년 성북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박물관인 보화각(寶華閣)을 세워 평생 모은 문화재를 전시한 분이다.

 

() 아버지(작은 아버지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큰 재산을 허튼 곳에 쓰지 않고 우리 문화재를 지켜내는 데 쓴 분이다.(전형필 선생은 24세에 조선 거부 40명에 들 정도로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다.) 전형필 선생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문화재를 사들인 골동품상이 아니라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큰 돈을 적소(適所)에 쓴 수장가셨다.

 

전형필 선생의 재호(齋號)는 이종 형인 월탄 박종화 선생의 아버지인 박대혁 선생이 지어준 옥정연재(玉井硯齋). 우물에서 퍼올린 구슬 같은 맑은 물로 먹을 갈아 글씨를 쓰는 집이라는 의미다. 아호(雅號)는 스승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 1953) 선생이 지어준 간송(澗松)이다.

 

산골물 간자와 세한도의 송자를 조합한 호다. 휘문고보 미술 선생인 춘곡 고희동의 소개로 만난 위창 선생은 젊은 전형필이 흰 두루마기를 입고 들어오는 순간 깊은 산 속에서 흐르는 물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간()자를 택했고 논어 자한편의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에서 송을 택해 간송이란 호를 만들었다.

 

위창 선생은 간송의 평생 스승이었다. 위창 선생은 간송에게 서화(書畫)를 모으는 일은 안목도 있어야 하고 재물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오랜 인내와 지극한 정성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위창 선생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간송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 1856)의 제자이자 역관이었으며 선생의 선친인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1831 1879) 선생이 중국으로 보낸 탁본을 선생에게 선물했다.

 

간송은 스승 고희동 선생으로부터 서화 전적을 왜놈들로부터 지켜달라는 당부를 들었고 이종형 박종화로부터는 민족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는 조언을 들었다.(79 페이지) 아버지 전영기 선생으로부터는 반드시 교육사업을 하라는 유언을 들었다.(352 페이지)

 

간송은 위창의 질문에 우리 선조의 서화 전적과 골동은 조선의 자존심이라고 답했다. 위창은 간송의 문화재 수집 사업에 큰 역할을 했다. 서화와 골동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법이나 적정 가격 등에 대해 들은 것이다. 작품을 구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화가가 생존했던 시대에도 가품(假品)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미루어서도 알 수 있다.(100 페이지)

 

간송은 이익을 남기려는 골동품상이 아니라 문화재를 지키는 의지를 가진 사람답게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구입하는 데에도 정성을 쏟았다. 이런 점은 위창에게서 배운 바라 할 수 있다. 간송은 위창 선생에게서 어떤 경우에도 정치적 우여곡절에 휩쓸리지 말고 오로지 조상님들의 얼과 혼을 모으고 간수하는 데에 힘써 매진하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이 식민지 시대에 존엄을 지키는 길일 것이라는 것이다.(122 페이지)

 

위창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화가들의 그림들도 모았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미술을 총정리하기 위한 큰 뜻의 발로였다. 간송은 단원 김홍도나 현재 심사정을 더 알아주는 시대에 겸재의 그림을 구입했다.(90 페이지)

 

공재 윤두서와 관아재 조영석의 그림을 구한 것도 마찬가지 차원이다.(112 페이지... 공재와 관아재는 어진 작업에 참여하라는 어명이 내리자 선비가 환쟁이 취급을 받았다며 붓을 꺾은 선비 화가였다.: 116 페이지) 호고(好古)의 벽() 때문에 마구잡이로 수집한 것이 아니라 자료를 찾고 공부하며 체계적인 수집 계획을 세웠다.(117 페이지) 간송은 서화 골동이 눈앞에 나오면 취향보다 그것이 이 땅에 남아야 하는지 여부를 먼저 생각했다.

 

간송은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화가의 그림도 소중하게 여겼다.(152 페이지) 간송은 제 값을 주고 문화재를 구입하라는 위창 선생의 가르침을 따랐다. 위창 선생은 서화를 구입하는 데 값을 깎으려 하면 좋은 작품을 절대 만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서화상들은 장사꾼이지만 대부분 서화를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작품을 알아주고 대접해주면 좋은 작품이 나왔을 때 얼른 알려주지만 흠을 잡으며 깎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00 페이지)

 

간송이 백두용에게서 인수한 한남서림은 고서화 수집의 전진기지였다. 한남서림의 책들은 백두용이 평생 모아 각별하게 간직해온 것들이다. 백두용은 간송에게 자신은 훈민정음에 관한 책을 찾기 위해 반평생을 기다렸지만 만나지 못했다고 하며 자네에게는 인연이 닿을 수도 있으니 염두에 두고 기다리다가 인연이 오면 놓치지 말라는 말을 건넸다.(143 페이지)

 

간송은 청전 이상범(1897 1972), 심산 노수현(1889 1978)과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두 화가는 심전 안중식(1861 1919)에게서 배운 사이다. 심전(心田)은 나누어 노수현에게는 심자를 주어 심산(心汕)이라는 호를, 이상범에게는 전자를 주어 청년 심전이라는 의미로 청전(靑田)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간송과 소전(素田) 손재형(孫在馨: 1903 1981),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1916 1984) 등과도 인연을 맺었다. 한국 전쟁 당시 보화각의 수장품을 접수할 공산당원들이 들이닥쳤을 때의 일이다. 전형필은 수장품을 놓아두고는 어디도 갈 수가 없어 가족들은 모두 외가로 보낸 뒤 보화각에서 그리 멀지 않은 빈집에 몸을 숨겼다. 당시 보화각에 들이닥친 공산당원들의 책임자는 월북 화가 일관 이석호(1904 1971)였다.

 

이석호는 보화각의 수장품 규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자 피난 가지 않고 국립박물관을 지키던 혜곡과 소전을 데려왔다. 소전은 추사의 세한도를 찾아오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수장자 집 앞에서 몇 달 동안 무릎을 꿇고 사정해 되찾아온 전설의 수집가였다. 이석호는 자신이 데려온 자들은 골동품을 다룰 줄 모르니 두 사람이 지휘해 파손되지 않도록 잘 포장하라고, 하나라도 파손되면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지연작전을 폈다. 아무래도 수장품 목록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좋은 것과 덜 좋은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더 튼튼한 상자가 필요합니다 등의 핑계를 대었고 꺼냈다 넣었다를 반복했다. 최순우는 지하실에 위스키가 궤짝으로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형필이 미 군정청 고적 보존 위원회에서 활동할 때 손님 접대용으로 구해둔 미제 위스키였다.

 

이석호는 공산당원이기 이전에 풍류를 좋아하는 화가였다. 매일 술판이 벌어졌다. 이석호는 취하면 지인들의 안부를 물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석호는 소전과 혜곡이 시간을 지체하는 것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두 사람에게 물건을 평양으로 운반할 때 같이 올라가면 평양박물관에서 근무하게 힘써주겠다며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소전은 1층에서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일부러 구른 뒤 다치를 다쳐 움직일 수 없다고 엄살을 부렸다. 혜곡도 장단을 맞추었다.

 

이석호는 두 사람을 불러 며칠 내로 포장을 마치지 않으면 책임을 묻겠다며 권총을 겨누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이석호와 당원들은 모두 퇴각해갔다.

 

간송에게는 서화 골동계에서 잔뼈가 굵은이순황과 신보 기조(新保喜三) 등의 우정과 헌신의 동지가 있었다. 이순황은 위창 선생의 소개로 만났다.(149 페이지) 신보 기조는 간송의 부탁을 받은 이순황의 추천으로 알게 된 일본인 거간꾼이다.(174 페이지) 신보 기조는 자신이 일본인이지만 평소 위창 선생님을 흠모해왔다는 말을 했다.(180 페이지)

 

신보 기조는 조선을 떠난 유물을 되찾는 일이 이렇게 힘들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고 말하며 앞으로 조선에 꼭 남아 있어야 할 유물이 나타나면 가장 먼저 간송에게 연락하겠다고 덧붙였다.(188 페이지)

 

간송은 57세의 나이에 급성 신우염으로 타계했다. 1962126일이었다. 그가 타계한 후 그가 애써 모은 것들이 국보로 지정되는 경우도 많아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간송은 구제와 교육사업에도 헌신했다.

 

간송이 구입한 문화재들 중 국보로 지정된 것들은 12, 보물은 10, 서울시 지정문화재가 4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청자상감운학문매병(천학매병)과 훈민정음 해례본, 혜원 풍속도, 금동(金銅)삼존(三尊)불감(佛龕) 등이다. 학이 구름을 날고 있어서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으로 천학매병(千鶴梅甁)이라고도 한다. 실제 학은 69마리이지만 병을 빙빙 돌리면 천 마리의 학이 있는 듯 느껴지기에 그렇게 부른다.

 

매병이란 반드시 매화를 꽂아두었던 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화주를 담아두는 용도로 쓴, 조금 큰 병 모양의 도자기는 모두 매병이라 불렀다. 거래되는 골동품들 중 조선 시대 도자기는 집안에서 내려오는 전래품이 많아 대부분 온전했지만 고려시대 도자기는 무덤에서 꺼낸 도굴품들이 많아 흠이 있었다.

 

혜원풍속도는 일본에 가서까지 되사온 문화재다. 간송은 수집품 중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구입한 훈민정음을 최고의 보물로 여겼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갈 때도 품속에 품었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고 잤다.(377 페이지) 고서화나 골동 거간들뿐 아니라 학자들도 많이 드나들던 한남서림에 어문학 연구에 조예가 깊었던 김태준이란 사람도 찾아오곤 했다.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으로 제자 중 이용준이란 사회주의자의 집안에 세종대왕으로부터 하사받은 훈민정음이 있었다. 간송에게는 사회주의자인 김태준을 통해 훈민정음을 사들이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간송 전형필400 페이지가 넘는 책이다. 소설 형식의 책이어서 쉽게 읽힌다. 무엇보다 문화재와 그에 얽힌 인연들을 아는 기쁨 때문에 재미 있게 읽힌다. 고려청자, 불상, 서화 등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는 책이기도 해 의미가 큰 책이다. 관련된 다른 책들을 찾아 읽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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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514일 이후 발로 품는 서울(협동조합)2019 서울 백제역사유적 시민 강좌를 들었다. 어제는 그간 풍납동 문화재활용관에서 진행된 실내 강의와 답사(몽촌토성, 방이동과 석촌동 고분) 프로그램을 마무리 짓는 공주, 부여 답사 날이었다.

 

시기로는 조선을, 지역으로는 강북을 주 영역으로 공부해온 나에게는 새로운 시간들이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이런 저런 준비를 하고 첫 버스(450)와 첫 전철(530)을 타고 출발 시각인 740분보다 조금 이른 720분에 양재역 2번 출구에 도착했다.

 

목적지는 공주 정지산(艇止山) 유적지, 국립공주박물관(이상 공주), 국립부여박물관, 왕흥사지(王興寺址), 백제문화단지(이상 부여) 등이었다.

 

주지하듯 백제(百濟)는 한성(漢城), 웅진(熊津), 사비(泗沘) 시기를 거쳤다. 공주대 박물관 학예 연구실장인 이현숙 님과 또 한 분의 전문가의 해설을 듣기 위해 그간 개인적으로 드문드문 찾아다니며 듣거나 읽은 한성백제박물관과 풍납토성, 몽촌토성 등에 대한 내용을 떠올리며 단편적인 기억들을 조각조각 이어야 했다.

 

사실 나는 웅진(熊津)이 지금의 공주이고 사비(泗沘)는 지금의 부여라는 사실도, 문주왕에 의해 웅진 천도가, 성왕에 의해 사비 천도가 단행된 것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어제 답사지인 공주 박물관 자료를 보고 기억해냈을 정도로 그간 백제와는 거리가 먼 시간을 보냈었다.

 

지난 2016년 문화유산 해설사 공부 중 만난 금동대향로 이야기가 내가 최근 접한 백제 관련 내용일 정도로 나는 백제에 관한 한 초학자(初學者)나 다름 없다. 정지산 유적지는 백제 시대의 제사 유적지이다. 배가 정지한 곳이라는 어의(語義)가 재미 있다. 공주가 나로 하여금 떠올리게 하는 것은 동학년 곰나루의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는 신동엽 시인의 시 껍데기는 가라의 한 구절이다.

 

곰나루는 웅진의 우리식 표현이다. 공주, 하면 금강(錦江)을 빼놓을 수 없다. 금강은 공주에서 부여에 이르는 강이자 신동엽 시인의 장편 서사시 제목이기도 하다. 해설자께 해설하실 때 신동엽 시인의 금강이나 껍데기는 가라이야기를 하시느냐 물으려다 그만 두었다.

 

웅진 시대를 대표하는 백제 왕은 무령왕이다. 우리는 무령왕릉이 삼국 시대의 고분 중 거의 유일하게 시기는 물론 주인공이 밝혀진 고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흥덕왕릉과 태종무열왕릉도 무덤 주인공이 밝혀졌다.)

 

무덤의 주인공이 토지신에게서 땅을 구입했음을 증빙하는 서류인 묘권(墓券)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사비 즉 부여에서는 부여박물관을 보아야 하고 그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금동대향로다.

 

끌로드 모네처럼 물가의 아름다움을 거두어 충분한 저장을 해두고 강가에 피는 꽃들의 짧고 격렬한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꿈꿀 권리의 한 구절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 사비다. 물과 강이 모두 나오는 구절이고 지명이기 때문이다.(사는 물 이름 사, 비는 강 이름 비다.)

 

왕흥사는 600년 백제 법왕 또는 무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지만 2007년 왕흥사지에서 발견된 창왕 청동사리함 명문에 의거해 위덕왕 때인 577(위덕왕 24)으로 파악하기도 하는 절이다.

 

덧붙일 말은 없다. 다만 지난 해 타계한 시인 허수경 님의 글을 하나 인용하고 싶다. 고대 근동 고고학을 전공한 시인은 고고학자의 발굴은 사건이 이미 일어난 뒤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탐정의 수사와 닮은 데가 있다는 말을 했다.

 

시인에 의하면 발굴지에서 고고학자가 과거와 만나는 그림은 조각이 나 있다.(‘모래 도시를 찾아서’ 50 페이지) 그렇게 조각난 그림들을 이어 붙이는 것이 고고학자의 임무다.

 

어제 마지막 코스는 백제문화단지였다. 백제의 궁궐인 사비궁과 백제 생활문화 마을, 백제의 사찰인 능사(陵寺), 고분 공원, 위례성 등이 재현된 공간이다.

 

능사는 왕릉의 원찰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다. 제향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정경을 즐겼고 치미(鴟尾)를 보았고 하남을 위례성으로 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쓰레기라는 말을 기억하며 관련 자료를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벽 430분 집을 나서 답사 일정 종료 후 광화문에서 식사를 하고 책을 본 뒤 집에 도착하니 밤 1030분이었다. 18 시간의 타이트한 일정이 꿈 같이 사라져 갔다. 몹시 피곤했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참여자들이 갖춘 백제에 대한 정확하고 박식한 지적 자산이 부럽고 놀라웠다. 참 좋은 강의와 답사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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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품에 돌아온 문화재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엮음 / 눌와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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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소재 문화재 재단이 펴낸 '우리 품에 돌아온 문화재'는 여러 경로로 국외로 유출되었다가 우리에게 돌아온 문화재를 유형별로 정리한 책이다. 유형은 다섯 가지다. 1) 소장자의 기증으로 돌아온 경우, 2) 정부의 협상으로 돌아온 경우, 3) 민간의 노력으로 돌아온 경우, 4) 민관협력으로 돌아온 경우, 5) 일제강점기에 돌아온 경우 등이다.

 

1)의 대표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다. 2)의 대표는 외규장각 의궤 297책이다. 3)의 대표는 겸재정선화첩이다. 4)의 대표는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 47책이다. 5)의 대표는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이다.

 

환수를 위해 정부기관이 나서면 문제가 복잡해질 수 있다. 섣불리 약탈, 반출한 문화재를 원소유국에 되돌려주면 비슷한 사례가 줄을 잇기 때문이다.(41 페이지) 한일간 문화재 반환 협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1965년 한일협상이다.

 

경제협력자금이라는 모호한 명목의 배상금을 받는 대신 역사의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한일협정은 일제강점기 35년간의 한일 관계의 질곡을 해소하는 데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일본 소재 우리 문화재의 반환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가 일본에 문화재 반환과 관련해 처음으로 공식 거론한 시기는 19584차 한일회담 때이다. 용어도 민감한 문제 중 하나다. 반환이라는 말에는 약탈과 불법 반출이라는 범죄 행위를 인정, 사과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모은 오구라 컬렉션이 있다.

 

그는 전형필 선생이 문화재 보존에 쓴 돈의 열 배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간 협정으로 돌려 받은 국외 소재 문화재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한 반환이다. 두고두고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는 협정이다.

 

물론 문화재 반환에서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정부의 지원과 정부간 협상이다. 민간이 여론을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해 성과를 내는 경우가 바람직하다. 의궤는 임금이 보는 어람용(御覽用)과 보관하기 위한 분상용(分上用)으로 나뉜다. 두 판본은 질적으로 큰 차이가 난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 어람용 의궤다. 문화재 불법 반출을 금지한 유네스코의 문화재의 불법적인 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 금지와 예방 수단에 관한 협약이 맺어진 것은 1970년이다. 그 이전 반출된 것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다.

 

20101112일 사르코지 대통령은 5년 단위로 갱신되는 대여 형식으로 외규장각 의궤 전부를 한국 측에 일괄 양도한다는 발표를 한다. 교류와 대여라는 원칙을 내던진 획기적인 결단이었다. 어보와 국새는 다르다. 어보는 존호와 시호를 올리는 등의 의례용, 국새는 외교문서나 공문서에 쓰는 공무용이다.

 

국새는 정변이나 전쟁 등으로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어보는 종묘에 보관했기에 대부분 보존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어보의 세계기록 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민속학자 조창수(1925 - 2009) 여사는 어보의 반환을 이끌어낸 분이다.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 1837 - 1928)가 있다. 오구라 컬렉션의 주인공인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 - 1964)와 다른 인물이다. 경복궁 철거작업 중 자선당을 일본으로 반출한 사람이다.

 

자선당은 오쿠라 기하치로에 의해 반출되어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 사설박물관)으로 활용되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화재를 만나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채 방치되었고 근대 건축사를 전공한 김정동 교수의 노력에 힘입어 우리나라에 80년만에 돌아왔다.

 

책은 민관협력으로 돌아온 문화재로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47책을 말하며 조선왕조가 5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어진 것을 기록의 힘이라 설명한다. 역사가 자신을 어떤 인물로 판단할지 두려워 한다면 왕이든 관리든 사적 이익을 위해 함부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원주 법천사지(法泉寺址) 지광국사탑은 조선총독부도 뒤돌려줄 수 밖에 없었다는 제목으로 다루어졌다. 이 탑은 일제강점기에 돌아온 문화재다. 남한강과 그 지류인 섬강 주변에는 불교가 융성한 고려시대에 명성을 떨친 큰절들이 있었다. 흥법사(興法寺), 고달사(高達寺), 거돈사(居頓寺) 등이다.

 

이 절들은 임진왜란 때 뱃길을 차지하려는 일본군에 의해 폐사된 뒤 다시 세워지지 못했고 이후로는 새로운 교통로로 자리 잡은 물길과 멀어지면서 지금은 궁벽한 오지 같이 한산해졌다.

 

하지만 이들 절에 있던 여러 석조 문화재들이 여전히 당당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한때 매우 큰 절이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일제가 약탈해간 유물 중에서 보기 드물게 일찌감치 국내외 여론의 힘으로 찾아온 우리 문화재다. 모범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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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 탓일까? 근원(近園) 김용준의 '김용준 수필선집'을 읽으니 참 좋다. 간결 소박한 글이 읽는 맛을 느끼게 한다. 아무 데나 펴보아도 좋고 아무 데서나 펴보아도 좋은 글이다. 잘 알듯 김용준은 상허 이태준 선생이 지어준 노시산방이란 이름의 집에서 살았던 분이다.

 

근원은 옛 고자를 써서 고시산방이라 하는 것이 어떻냐는 말이 있었지만 노()자가 좋아 노시산방이라 이름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으니 자신을 오수노인(午睡老人)이라 칭한 최순우 선생 생각이 난다.

 

성북 준비를 하며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시인 이상에 더 호감을 갖게 되었다. 이상은 구인회 등 이태준과의 인연, 수향산방의 김환기, 변동림과의 인연이 있다. 평론가 김민수는 김환기 화백의 점() 그림과 이상 시인의 선에 관한 각서가 연결된다는 말을 한다.

 

이상은 제비다방을 비롯 무기(むぎ: ) 다방, 츠루(つる; ) 카페 등을 열었다. 그에게는 공간에 대한 감각, 선호가 있었다. 무엇보다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등에 조예가 깊었던 사람이고 여성을 자신처럼 거세된 존재로 보며 불쌍히 여겼지만 아파하지 않는 존경스러운 존재로 본 이상.. 매력적이다.

 

나는 상자에 갇힌 근대인을 풍자한 이상(李箱)이 마음에 든다. 그의 글들, 그에 대한 글들을 읽자. 그의 권태는 시간이 남아 한가롭게 노닥거리는 데서 온 권태가 아니라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사로서 창의성이라고는 필요하지 않은 관공서 건물 설계를 답습한 데서 비롯되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말한 윤동주 시인이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서촌에서 너무도 다른 두 시인을 거울로 비교한 적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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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독서 모임에서 전혜린(田惠麟) 선생 이야기가 나왔다. 여고 시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같은 책을 통해 자살에 대해 읽었던 문지온(‘남은 자들의 길, 800km’의 저자) 선생에게 자살은 지고지순하고 순수한 사랑을 꿈꾸는 영혼들이 편협하고 경직된 현실에 부딪혔을 때 맞게 되는 비극적인 결말이었고, 그래서 슬프지만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런 저자의 환상을 산산조각 낸 것이 있었으니 바로 고교 시절 겪은 아버지의 자살이었다. 저자는 결국 800km에 이르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 걷고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어제 한 일간지를 통해 독일에 소설가 이미륵(1899 1950: 한국명 이의경: 李儀景’)의 추모 기념동판이 세워졌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미륵 선생은 전혜린 선생이 번역한 압록강은 흐른다를 통해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분이다. 한국 정신문화와 생활상을 서구에 알렸다는 평가를 받는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인 이미륵의 독일행은 3.1 독립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경성의전 3학년 때 일어난 3·1운동에 가담한 이후 일본 경찰의 수배를 피해 상하이 임시정부로 간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당시 이미륵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인 안봉근 선생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독일 망명 길에 올랐다.

 

이미륵 선생은 독일에서도 김법린(金法麟), 이극로(李克魯) 등과 함께 항일 활동을 펼쳤고 반나치 지식인인 쿠르트 후버 교수와 교류했다. 한용운 전기를 보면 한용운 스님이 1937년 만주의 호랑이 김동삼 선생의 장례를 치를 때 찾아온 사람들 중 한 분이 이극로 선생이다.

 

이리저리 얽힌 인연과 사건의 실타래를 바로 보아야 하리라.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던 것이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 같이 선명해질 때까지 거듭 읽고 생각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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