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만 우리나라도 아닌 중국, 그 가운데서도 수천 년 전에 존재했던 주(周)나라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이합니다. ‘주역(周易)‘을 배울 때 접한 이야기이지만 주 나라 이전에 있었던 은(殷)에도 역(易)이 있었다고 하지요. 은은 귀신의 나라, 주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나라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선이 주나라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것일까요? 주나라는 주역 말고도 성리학으로도 21세기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잘 알려졌듯 정도전은 ‘주례(周禮)’라는 텍스트에 근거해 경복궁을 영건(營建)했다고 하지요.


그 원칙 가운데 하나가 좌묘우사(左廟右社)이지요. 그런데 최근 출간된 장인용의 ‘주나라와 조선’에 의하면 좌묘우사는 수적으로 밀리는 주나라가 다수의 은나라의 유민을 다스리기 위한 차원에서 낙읍에 주나라 조상의 묘당(廟堂)과 은나라의 묘당을 함께 설치한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가령 노(魯)나라에서는 굳이 은나라의 조상을 받들 일이 없었으므로 묘당이 하나였다고 합니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취한 방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은 은나라에 대한 주나라의 법식(法式)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두 개의 묘당을 설치했습니다.


물론 우리 실정에 맞게 받아들인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조선이 존주사대(存周事大)를 외친 것을 감안하면 우리 실정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주나라를 신앙 차원으로 수용한 결과가 아닐지요? ‘주나라와 조선’은 좌묘우사 말고도 종가(宗家) 및 제사 제도, 호주상속제, 성씨제도, 족보, 과부재가 금지법, 열녀문, 서얼 차별 등 주나라에서 유래한 것들이 조선을 옥죄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것들이 주나라에서 직접 연원한 것인지 아니면 주나라에서 발원하여 그 이후로도 이어지며 성리학의 나라 송나라를 통해 강화되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인지는 면밀히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종법(宗法) 시행은 남자와 장남 중심의 사회구조를 초래했고 여자들의 삶을 집안의 가사노동에 한정하고 청상수절을 강요했지요. 서얼들도 차별받았지요. 경복궁의 주산(主山)을 어디로 할 것인지를 두고 정도전과 무학 대사가 대립했지요. 무학 대사는 북악산(백악산) 불가론을 내세웠습니다.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이 허약하다는 이유였는데 풍수에서 좌청룡은 아들 특히 장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반면 우백호는 차남 이하의 아들과 여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정도전과 무학 대사의 대립 과정에서 백악 주산에 대한 보완책으로 낙산의 끝자락에 장자의 허약한 기운을 채우기 위해 어질 인(仁)자를 넣은 흥인지문을 설립했고 관악산의 불기운을 잠재우기 위해 광화문 앞에 불을 막고 잡기운을 쫓는 해태상을 만든 것이라지요. 그리고 북한산의 살기(殺氣)는 경복궁 내에 아미산을 세워 한북정맥의 정기로 바꿔 이어받게 한 것이라지요. 앞서 우리가 두 개의 묘당을 가진 것을 말했는데 정도전과 무학 대사의 대립의 결과 생긴 보완책들과 두 개의 묘당까지 볼거리가 늘어난 것으로 말한다면 철없는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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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성 있고 명확한 주제, 쉽고 친절한 내용, 독창적인 문제의식 등을 갖추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고치고 고치며 그런 점을 깨닫게 된다. 첫 시연때 ‘처음인 것을 감안하면’이란 단서를 다신 뒤 아주 잘했다고 하신 원장님의 평도 지금은 부담이 될 정도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 부담이라 함은 한, 두 번 그리고 그 이상 경험이 축적되면 그에 맞는 수준 향상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중촌(中村) & 남촌(南村)’ 시연(試演)을 위해 자료를 찾고 글을 썼다. 처음에는 다산(茶山)을 권력 소유 여부와 학문의 상관관계에서 예외적이었던 분으로 든 뒤 파격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분들을 설명하며 예외와 파격이 조선을 조금이나마 역동적인 나라가 되게 했던 바 그 파격과 예외를 우리 사회의 교훈으로 삼으면 좋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파격적인 분들이란 동래부 출신의 무인(武人)으로서 영조 시대에 활약하며 자명종을 비롯 각종 기계와 악기 등을 설계, 제작하고 예술품 등을 만들었던 만능 지식인 최천약(1684 - 1755), 평민 이하의 신분으로 장악원 악사가 되어 연주자로서 최고의 명예를 누린 김성기(1649 - 1724), 신분이 낮았음에도 큰 업적을 남긴 고산자 김정호, 노비 출신 과학자로 15 세기를 이끌고 간 장영실, 전남 나주의 노비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권율 휘하에서 종군한 뒤 병자호란 때 부원수가 된 정충신(1576 - ·1636) 등이다.


그런데 이는 주제가 무거울 뿐 아니라 교훈으로 삼기에는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계급 이동(상승)이 거의 불가능한 폐쇄적인 고착 사회를 생각하면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중인들의 위상 변화를 통해 생각해보는 우리의 과제라는 글을 다시 썼다. 이 글에도 다산이 포함된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문(文)을 숭상하고 과학 및 기술을 소홀히 했던 선조들을 둔 우리는 더욱 인문과 자연과학 및 기술의 조화로운 발전을 위해 성찰적 눈을 가져야 할 것인 바 제도적 장치와 함께 공부 주체들의 넓은 안목들이 필요하다는 주제를 제시했다.


중촌과 남촌에 대한 글이기에 노론 명문 가문의 연암 박지원과 몰락한 남인 가문의 다산 정약용을 비교한 글(서울신문 2012년 8월 12일 기사 다산 연구소 기획실장 김태희 씀 ‘노론 명문 가문 박지원 vs 남인 몰락 가문 정약용’)이 눈에 띄었다. 여러 가지가 비교되지만 문장 부분만 인용했다.


박지원은 사마천의 ‘사기’를 읽을 때 사마천의 마음을 읽으라 했고, 정약용은 연표를 꼼꼼히 챙기라 했다. 박지원은 글쓰기엔 요령이 있다고 가르쳤고, 정약용은 문장학이야말로 유학의 큰 해악이라고 내쳤다. 박지원의 글은 감추는 방법을 잘 활용한 글이어서 다 읽고 나서도 뜻을 제대로 포착했는지 돌아보게 하는 글이고, 정약용은 명징하게 드러내는 방법을 주로 써 곡진(曲盡: 간곡하게 정성을 다함)했다는 글이다.


나는 두 유형을 역동적이고 유연하게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를 고르라면 다산의 문체를 고를 것이다.(누가 하나를 고르라 말하겠냐만) 문장학을 내친 것은 그렇지만 명징하고 곡진한 글을 쓴 다산, 조심하고 경계했던 다산이 마음을 움직인다. 다산은 학자 같고 연암은 문장가 같다. “연암이 인상파 화가 같다면 다산은 사실주의 작가” 같다는 글도 인상적이다. 사실 연암과 다산의 사례는 두루 활용하고 상황에 맞게 익숙해져야 할 유형이다.


예전 명상 선생님은 깨달음은 있어도 깨달은 사람은 없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깨달음을 얻었어도 매순간 새롭게 마음을 보고 다스리고 다듬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해설 글도 그렇다. 선생님들 또는 선배들이 글을 잘 쓰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제에 따라. 듣는 대상에 따라 도입부와 문제의식, 주제, 자연스러운 흐름 등을 감안하는 글쓰기는 순간적인 영감에 좌우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연암과 다산의 사례를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활용해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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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丁若鏞) 선생은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분이다. 정치에서 배제되었으면서도 실학적 작업에 몰두하지 않고 “주자학의 심장부를 정면으로 돌파”(이정우 교수의 표현)한 분,

주역(周易)의 세계관을 가졌으면서도 음양오행을 비판한 분, 서양의학을 수용한 뒤 중국의 의학사상을 조선의 의료현실에 수용, 발전시킨 분,
오늘 밤에 마셔야 할 술을 자꾸 내일로 미루면 저 환한 달빛 아래 술을 마실 기회가 영영 사라지고 말 수도 있다는 시(友欲月下飮: 우욕월하음/ 勿放今夜月: 물방금야월.. 若復待來日: 약부대래일, 圓光已虧缺; 원광이휴결)를 쓴 분,

“수십 년간 역(易)을 연구하였지만 나 자신의 일을 가지고 점을 쳐 보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신유년 봄에 장기(長鬐)로 귀양을 가서 꿈에서 운명을 점쳐 ‘둔지복(屯之復)의 괘를 만난 뒤

“처음에는 둔했지만 이것이 변해 양복(陽復)이 되었으니 모르긴 해도 마침내 기쁜 소식이 있겠구나!”하고 말한 분.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謀)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하기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하지 않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그만두어야 할 일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에 남아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두지를 못한다.”고 스스로를 표현한 분,

’의심도 하지 않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하는 것’은 ‘망설임이여, 겨울 내를 건너는 것이로다. 주저함이여,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함이로다’란 의미로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내세운 것과 대조적이게 “의심도 두려움도 없”었던 분,

‘천주학으로 인해 서양 과학 사상까지 섭렵하여 사상의 폭이 넓어졌지만 쓰라린 유배 생활을 감내해‘(박석무 교수의 표현)해야 했던 분, 한 동양철학자로 하여금 ’주희에서 정약용으로’에서 ‘정약용에서 주희로’를 슬로건으로 내세우게 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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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들렀더니 이** 선생님께서 1등으로 자료를 올리신 것이 보이네요.(부지런) 저는 하루 사이(22, 23일)에 36기 해설인 중촌 & 남촌과 개인적으로 하는 해설인 경복궁을 맡았는데요 늘 그렇듯 자료 의존성이 높아 빌린 책들과 참고 가치가 있는 소장 책들로 책상을 예외 없이 혼잡한 시장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촉매는 적당히 집어넣어야 제 역할을 한다. 술도 촉매여서 적당하면 이야기꽃을 피우고 사랑과 시(詩)를 끄집어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마구잡이로 넣으면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혼수 상태)'...제가 참고로 하려는 많은 책들이 마구잡이로 집어든 촉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죽도 밥도 아닌 무언가가 되지 않으려면 필요하지 않은 것은 과감하게 자르고 버려야겠지요? 멋진 해설들 기대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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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의 출현은 사진 및 튜브 물감의 발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화가들의 지향점이 물질적 조건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물론 화가들의 성향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인상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빛이었다.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음영, 그로 인한 느낌의 차이는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쉼없이 시간이 흐른다지만 초단위로 무엇인가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고(故) 김현 평론가는 해 (빛)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 보이는 대상을 관찰하기 위해 한 자리에서 오래 머무는 감상자를 보고 아픔을 느꼈다는 내용을 책에 담았었다. 그런 인상주의적 시각이 그립다.

건축가 스티븐 홀은 빛을 공간의 효과 즉 공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빛의 효과에 따라 생겨나는 것으로 보았다. 빛의 양, 각도, 종류 등에 따라 공간이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는 의미이다.

새롭고 낯선 체험과 인식을 위해 귀하게 다루어야 할 한 줌 햇빛이 그리운 겨울 초입에 서서 잠시 나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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