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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
김신조 / 동아출판사(두산) / 1994년 10월
평점 :
절판
김재현은 1968년 1, 21 사태의 유일 생존자 김신조의 새 이름이다. 북한에서 27년을 살았고 남한에서 57년째 살고 있다.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하다는 그가 쓴 자서전격의 책이다. 반공도 아니고 무슨 사상의 선언도 아닌 한 인간으로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쓴 책이다. 남한에서의 17년째 생의 해인 1994년 그는 가슴 치게, 북의 가족들이 그립다는 말을 했다.(책이 나온 해가 1994년이다.)
공작원 수는 76명이었으나 31명으로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1조 청와대, 2조 미 대사관, 3조 육군 본부, 4조 서울 교도소, 5조 서빙고 간첩수용소를 습격하려던 계획도 축소되어 청와대만을 노리게 되었다. 김신조는 자신들 중 누군가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적어도 자신은 살아올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다고 한다.
그는 오랜 훈련으로 단련된 자신의 신체를 믿었다. 42년생이니 그가 124 부대의 일원이 되어 남으로 침투한 것은 27세의 일이었다. 물론“당과 혁명을 생각한다 해도 죽음을 떠올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청춘"이었다. 한겨울이었으니 영하 25도의 매서운 찬 바람이 불었다. 황해북도 연산군 124 부대에서 출발한 버스는 개성 시내의 남동쪽에 외따로 떨어진 남파 공작원 초대소로 향했다.
개성은 한국 전쟁 당시 38선 이남에 있었기 때문에 도시가 초토화되지 않았다. 그들은 북방한계선 북한군 민경초소에서 국군 복장으로 갈아 입고 수령 동지의 명령대로 임무를 수행할 것을 맹세한다는 혈서를 썼다. 그들은 성공하고 돌아올 경우 민경 초소와의 문답 암호로 611을 부여받았다. 김신조는 2조 조장이었다. 1조는 청와대 본청사 2층, 2조는 청와대 본청사 1층, 3조는 경호실, 4조는 비서실, 5조는 정문 초소를 공격 목표로 정했다.
그들이 택한 코스는 한국군 25사단과 미군 2사단의 경계선 지역이었다. 경계선 지역은 서로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미루기 때문에 늘 소홀하고 취약한 지역이다. 그들은 전투지경선을 밟되 절대로 한국 25사단으로 가지 말고 미 2사단 쪽으로 들어서라는 지침을 받았다. 그들은 눈이 많이 온 지역이어서 멀리서도 움직이는 물체가 눈에 잘 띄지만 이 때문에 우리 군이 경계를 느슨하게 할 것이라 계산했다.
당시는 남방한계선이 모두 철책으로 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미군 주둔 지역은 철책이, 한국군 주둔지는 목책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른 철조망을 쇠기둥 뒤쪽에서 매어 원상태로 만들어 놓아 우리측에서 눈치 채지 못하게 했다. 후에 체포된 김신조는 현장 검증에서 철조망을 발로 툭 차 철조망이 벌어지게 했다. 미군은 그때까지 철조망이 잘린 줄을 모르고 있었다.
목책이었던 한국 부대의 남방 한계선은 124 부대가 넘어온 지 1년이 지나서야 철조망으로 교체되었다. 그들은 군견이 자신들의 발자국 냄새를 맡고 따라오지 못하게 군화 바닥에 횟가루를 뿌리고 그 위에 가랑잎이나 흙을 덮었다. 그들은 철책을 넘어오는 데 체력과 시간을 많이 썼고 아침이 가까워서 서둘러 숙영지를 잡았다. 낮에는 절대 이동하지 않고 밤에만 이동했다.
새벽 다섯 시면 모든 행동을 중단했다. 그들은 사방에 2명씩 보초를 세우고 교대로 휴식을 취했다. 잠들면 얼어 죽기에 서로 흔들어 깊이 잠들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장파리와 미군 부대를 잇는 리비교쪽의 임진강을 건넜다. 강물은 다리 아래를 지날 때 유속이 느려져 다른 쪽보다 얼음이 두껍게 언다. 맞은편 강 언덕은 석포라는 곳이었다. 수직의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진 곳이다.
저자에 의하면 그들의 침투로는 개성에서 출발하여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능이 있는 고랑포를 지나 미 2사단과 25사단의 경계지역을 통과, 석포를 건너고 파평산에 이르는 길이었다. 파평산을 넘어서는 양주 노고산을 거쳐 파주 앵무봉을 지나 서울 구기 터널 위쪽인 북한산 비봉을 넘어 청와대 뒷산인 백악산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들은 파주 삼봉산에서 나무꾼 사촌 4형제를 만났다. 30, 22, 21, 18살의 나이였다. 막내인 우성제는 문산 파출소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들은 총조장 말고는 아무도 말을 걸어서는 안 되었는데 여럿이서 너무 많은 말을 했다. 그들은 북에 상황을 알렸다. 그들은 암호를 풀지 못했다. 김신조는 후일 북에서 온 암호가 원대 복귀하라는 것이었음을 알았다.
4형제를 죽이자는 쪽은 남파 경험이 있는 대원들이었다. 4형제를 불쌍히 여긴 그들은 자신들이 그런 사람들을 위해 혁명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등 마음이 흔들린 끝에 투표를 했다. 살리자는 의견이 반이 넘었다. 그들은 4형제에게 경찰에게 알리지 않고 비밀을 지킨다는 내용의 서약서와 입당원서를 쓰게 했다. 그들은 4형제에게 이북에 가면 무상으로 대학 교육까지 받게 해주겠다고 하며 그 자리에서 첫째는 경기도 도지사, 둘째는 파주 군수로 임명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고 말았다. 그들은 4형제가 신고를 해서 작전이 전개될 것을 대비해 빨리 그 지역을 벗어났다. 그들은 필요한 것을 모두 빼고 땅에 묻기로 했다. 김신조는 납득할 수 없었던 점은 실탄, 수류탄 등을 묻은 대원들이 있었다는 점이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송추 골짜기에 이르러서야 비상이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김신조에 의하면 무장한 채 124 대원을 등지고 선 우리 군은 길가에 불을 피워놓고 모여서 불을 쬐고 있었다. 모닥불 안으로 수류탄 한 발만 던지면 다 죽을 상황이었으나 임무가 그게 아니었으므로 코웃음을 치며 은평구 진관사로 오르는 계곡길로 접어들었다. 서울의 방어선이 뚫리는 순간이었다. 그곳을 통과하고 나서 자하문 고개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
허기가 져 입조차 뗄 수조차 없었던 그들은 청와대가 내려다보이는 백악산에 가 있어야 했지만 북한산 비봉에서 맴돌았다. 계획을 바꿔 비봉 북방에 숙영지를 마련했다. 중대한 오류였다. 1월 21일은 일요일이었다. 평일에는 대통령이 사찰을 나가 어디서 잠을 잘지 알 수 없기에 일요일 밤에 청와대를 기습하기로 했었으나 문제가 생긴 것이다. 살을 에는 듯한 저녁 바람이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속에서 그들은 세검정 버스 정류장까지 갔다.
그들은 버스를 타고 청와대까지 가는 길을 택했다. 원래 계획은 밤 10시 30분까지 청와대를 습격하고 청와대 차량을 이용해 북으로 전속력 질주해 자유의 다리를 통과하거나 남파 루트를 따라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총조장 김종웅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계획 대로 대열을 편성하여 길을 따라 청와대 정문까지 가자고 말했다. 상명여대 입구의 세검정 사거리 검문소를 아무런 검문도 받지 않고 통과한 그들은 자하문 고개에서 경찰들과 마주쳤다.
김신조는 우리측이 30명 이상의 대부대가 청와대로 향한다는 연락을 받았음에도 순경들은 다 어디 가고 경찰서장 혼자 나섰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124 부대는 24kg의 장비에 피피 기관단총을 메고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추위에 시달린 상태로 교전을 벌였다. 대원들은 경복고등학교 후문을 지나 정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몇 차례 겸재 정선의 집터를 찾아 경복고등학교에 들어선 기억이 난다. 그곳은 그런 역사가 있는 곳이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무장을 풀고 수류탄 하나를 들었다. 무기를 휴대하면 노출되기 때문에 민간인처럼 행세하기로 했다. 수류탄은 만약의 경우 자폭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청와대 경비와 외곽 경비는 수경사 예하 30대대가 맡고 있었다, 대대장은 전두환 중령이었다. 대원들이 자폭하기 시작했다. 김신조는 포위 되었다. 자수를 권고하는 소리에 김신조는 투항했다. 국군은 김신조를 생포했다고 말했고 김신조는 투항했다고 말한다.
김신조는 자신들 개개인은 모두 탁월했지만 똘똘 뭉치지 못했다고 말한다.지휘 체계가 흩어져 너도 장교, 나도 장교인 셈이었다고 말한다. 삶을 선택하는 순간 그저 자신의 나이, 아직 꽃을 피워 보지 못한 자신의 청춘을 생각했다는 김신조는 투항을 하고 기자 회견을 하고 동료 대원들의 주검을 확인하며 비로소 동료와 가족들에 대한 미안한, 자신이 비겁자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가책을 느꼈다고 말한다.
임진강까지 이르러 강 위를 흐르는 얼음을 타고 북으로 가다가 사살당한 대원도 있었다. 노고산에서 가장 많은 11명의 대원이 사살되었다. 한 국군 중사는 쓰러져 있는 대원들을 수색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시신을 뒤집는 중 수류탄이 터졌기 때문이다. 안전핀을 문 채 엎드려 죽은 대원의 시신이었다. 29명의 시신을 판문점으로 가져가 북에 인도하려고 했으니 북은 그런 사람들을 남파시킨 적이 없다며 끝내 시신을 받지 않았다.
아무도 애도해주지 않는 스물 아홉 구의 주검이 경기도 문산 가는 국도변에 묻혔다. 김신조는 공학도를 꿈꾸다가 군에 입대하면서 새 목표를 찾았다. 북에서는 군대를 가지 않으면 인정을 받지 못한다. 평생 허드렛 일을 하게 된다. 군대를 갔다 와야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우러러보는 대상이 될 수 있다. 김신조의 아버지는 김신조가 청진 집에 돌아와 인사를 드리자 네가 우리 당의 고급 당원이 되려면 앞으로 군 복무 기간에도 잘 싸워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신조는 특수 부대에 잘 적응해나갔다. 당원이 된 김신조는 정찰 업무 대신 민족보위성 업무를 맡게 되었다. 김신조는 특수부대에 걸맞은 체질을 타고 났다. 하체가 길고 굴곡이 깊은 발바닥을 가지고 있어서 뛰기에도 적합했다. 게다가 통뼈였다. 김신조는 지형학도 잘 했다. 방향 감각이 좋고 기억력도 좋았다.
31명은 124 부대 창설 이후 처음으로 남파 공작 임무를 수행한 사람들이다. 김신조는 도면에 청와대 내부 구조와 인원 및 화력의 배치 등을 그려 가며 설명할 정도로 우리 사정을 잘 알았다. 김신조는 124 부대를 남조선 적화를 위한 게릴라 부대라 설명했다. 1968년 1월 23일 미군 장병 83명이 납치된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졌다. 미국이 선원들을 보내 달라고 하자 북한은 못 보낸다고 했다. 이에 미국은 김신조와 바꾸자고 했다. 그대로 북으로 가면 김신조는 죽은 목숨이 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김신조는 미국의 처사를 듣고 무척 분개했다. 북한은 자신들은 김신조라는 인물을 모른다고 했다. 김신조는 자신을 이어 특수 훈련을 받은 124군 부대가 대량으로 남파될 것이라고 했으나 미군은 믿지 않았다. 그해 11월 124 부대에서 훈련받은 특수부대 요원 120명이 내려왔다. 울진 삼척 무장공비 사건이었다. 124군 부대가 창설되었다는 말을 믿지 않던 미군은 1, 21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남한에 1억 달러의 원조를 했다. 우리는그것으로 전방의 목책을 철거하고 155마일의 철책선을 만들었다. 탱크 저지선도 만들었다. 당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고 군 복무도 6개월이 늘었다.
미군을 원수로 여기던 김신조는 미군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자 분노가 폭발해 미군 경비병의 코를 주먹으로 강타해 지하 독방에 갇혔다. 울진 삼척 공비 침투 사건이 김신조의 말을 입증해주었다. 김신조는 헬리콥터를 타고 공비들에게 자수할 것을 권했다. 김신조는 낮에는 기자회견도 하고 밤에는 수사도 받고 서류 재판을 받은 끝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70년 4월 10일의 일이다.
김신조는 자신이 워낙 엄청난 사건을 저지른 사람이었기에 어느 땐가 죽임을 당할 것이라 생각하다가 주민등록증을 받고서야 산 목숨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김신조(金新朝)는 주민등록상의 이름을 김재현(金在現)으로 바꾸었다. 무엇보다 아이들 때문이었다.
김신조는 말한다. 사건 당시 자신은 총 한 방 쏘지 않았다고. 살아 남은 유일한 사람이라는 죄로 사건의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김신조는 세 번의 탄생을 말한다. 하나는 생물학적 탄생이고 둘은 1.21 사태 때 투항해서 얻은 두 번째 생명이고 셋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은 생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