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예찬 - 위대한 사상가들의 실패에 대한 통찰
코스티카 브라다탄 지음, 채효정 옮김 / 시옷책방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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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자이자 철학자인 코스티카 브라다탄의 ‘실패 예찬‘은 그노시스주의(영지주의)의 한 가르침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에 따르면 우주는 원초적 실패의 산물이다. 그 실패의 우주를 만든 존재는 데미우르고스다. 마르키온과 대조를 이루는 신이다. 그노시스파 인류학에서 인간은 나머지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구조적 결함, 불완전, 결핍을 공유한다. 전통 형이상학에서의 좀 더 어려운 질문은 왜 세상만사는 무(無)가 아니라 유(有)인가?이다. 이를 실존주의자의 언어로 바꾸면 나는 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 하는가?이다. 


저자는 실패는 우리가 존재할 이유가 없음에도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자각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잠복 상태의 끝없는 위협이라 말한다. 실패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우연의 산물이자 조악함의 성화, 잠깐의 깜빡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저자에 의하면 실패는 무서울 정도의 솔직함으로 모든 자아실현에서 결정적인 기능을 하는 각성을 수행한다. 저자는 실패보다 더 나쁜 것은 실패의 부재라 말한다. 실패는 우리를 찌르고 그러는 가운데 우리를 현실과 접촉시킨다. 


저자는 20세기 초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노동운동가로 활약했던 시몬 베유를 주된 논의 대상에 올린다. 태어난 이듬해 중병으로 11개월을 투병한 끝에 얻게 된 평생의 허약 체질을 가진 그녀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깊이 공감해 주변의 괴로움을 자신의 것처럼 느꼈다. 25세인 1934년 직접 몸으로 괴로운 현실과 접촉하기 위해 공장 일을 했다. 베유는 현대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것을 결단한 학자로서 공장에 들어갔다가 본격적인 신비주의자가 되어서 나왔다.(7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가톨릭 개념에 지적으로 공감하고 공장에서 우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음에도 베유는 자기 생이 끝날 때까지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심각할 정도로 꺼림칙하게 여겼다. 베유는 성육신의 고유함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일축하는 한편 예수는 이 세상 범죄와 고통이 있는 곳 어디에나 현존한다고 제안했다. 베유는 죽기 얼마 전 “나는 항상 믿었다. 죽는 순간이 삶의 핵심이자 목적이라고..... 그것 말고는 나 자신을 위한 좋은 일을 나는 결코 바라지 않았다.”고 썼다.


저자는 말한다. 실패의 경험에 대한 겸손은 치유의 약속이며 겸손은 우리가 치유에 신경쓴다면 우리를 치유할 수 있다고. 저자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는 것은 함께 사는 문제에 관한 한 당신이 당신 옆 사람보다 더 나을 것도 똑똑할 것도 없다는 걸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를 죽였을 때 아테네인들은 기존 기준을 따랐고 재판도 흠이 없었으므로 완벽히 민주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민주주의가 아테네인들 내부에 중대한 변혁을 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변화는 외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125 페이지) 


간디는 자신의 실수는 볼록렌즈로 보고 다른 사람의 실수는 그 반대로 보아야만 두 사람을 정당하게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썼다. 간디는 자신의 내면에는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사람들이 뭔가를 억지로 하게 만드는, 심지어 불가능한 일마저 시도하게 만드는 잔인성이 있다고 썼다. 저자는 타인의 죽음에 대한 오만한 태도, 자기의 싸움터에 다른 사람들을 배치하고 늘상 제대로 설명해주지도 않은 명분을 위해 순교자로 만들 때의 무사태평함을 간디의 가장 특징적인 실패라 정의한다. 


저자는 공포의 시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탄생했고 그들이 테러리스트가 된 이유는 그들이 열정적인 자선가였기 때문이라 말한다.(155 페이지) 이를 감안하면 저자가 말하는 실패란 한계(限界), 오류(誤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혁명의 폭력성에 관해서라면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보다 더 상징적인 인물을 찾기는 어렵다. 미라보는 그에 대해 이 자는 자기가 하는 말을 죄다 믿기 때문에 큰일을 낼 것이라 말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을 도덕적으로 순수하다고 간주하며 직접 혁명 프랑스의 도덕적 순수함을 책임지는 직무를 맡았다. 


로베스피에르가 애호한 해결책은 공포였다. 조지 오웰은 술, 담배 등을 성자가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성자되는 것 또한 인간이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디는 철도가 전염병을 퍼뜨렸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철도가 기근을 더 자주 발생시켰다고 말했다. 앞의 말은 이해 할 만하지만 뒤의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는 인도 농부들이 곡물을 팔지 않고 그대로 둘 수 있다면 기근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이동 수단 시설이 있어서 곡물을 팔아 기근을 겪게 되었다는 의미다. 간디는 1869년생이다. 영국(1825년)에 이어 영국 식민지 인도에 기차가 다니기 시작한 것은 1853년으로 간디 나이 16세 때이다. 


저자는 유토피아의 문제점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이질적이라는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실패는 우리를 겸허하게 만들며,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더 가깝다는 중요하고 단순한 교훈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고 말한다. “완벽하고 모든 것이 되려고 노력하다 보면 우리는 실제로 우리 손이 닿을 수 있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저자는 실패자라는 것은 당신이 누구냐의 문제이지 당신이 무엇을 하느냐, 말하느냐, 생각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말한다.(209 페이지) 마치 당신이 그렇게 될 운명인 것처럼 실패는 떨쳐버릴 수 없는 아우라다. 


에밀 시오랑은 실패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칼뱅은 어떤가. 그는 예정설이 포함된 TULIP 교리의 창시자이다. 칼뱅의 관심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전적으로 신에 있었다. 시오랑은 인간혐오자였던 만큼 루저에 대해 끝없는 이해심을 가졌다. 저자에 의하면 시오랑의 반우주적 사고에는 뚜렷한 그노시스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시오랑은 이 세상의 신은 무능하다고 썼다. 새로운 신들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그의 작품 원제는 사악한 데미우르다. 


저자에 의하면 자살은 종종 실패와 연관되어 있고 자살자는 루저로 간주된다.(307 페이지) 시오랑은 평생 우주를 꾸짖고 자기 소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정작 때가 되었을 때는 자살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그 실험을 설정하고 그것을 거친 사람이 있다. 장 아메리다. 그는 자살이 아니라 자유 죽음이라 말했다. 저자는 실패는 다른 어떤 경험보다 눈이 떠지는 경험이라 말한다.(377 페이지)


물리적 세상에서 삶이 발생한 덕분에 우리는 존재의 구조와 우리 자신의 내면에 생긴 균열을 보기 시작한다. 실패는 인간 역사가 타인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제거하려는 지속적인 분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저자는 이야기가 내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라고 묻는다. 답은 무엇일까? 그렇다, 가능하다이다. 실패는 우리가 누구인지의 중심에 놓여 있기에 우리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 읽는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일차적으로 실패의 이야기다.(38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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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본 고려 - 승자의 역사를 뒤집는 조선 역사가들의 고려 열전
박종기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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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하지만 언젠가 허실이 밝혀질 때가 있다. 30년 넘게 고려사 연구에 천착해온 역사학자 박종기의 책 ‘조선이 본 고려’는 그런 사례들을 모은 책이다. 조선이 본 고려라는 말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조선이 고려 역사를 편찬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저자는 고려와 조선, 현대를 오가며 인물 비평을 시도했다. 책은 태조 왕건, 광종, 인종 등을 다룬 1부 고려 전기 인물론, 의종, 이공승, 명종, 조위총 등을 다룬 2부 무신정권기 인물론, 정세운·안우·이방실, 최영, 이숭인, 권근 등을 다룬 3부 고려 후기 인물론, 이색, 정도전, 우왕, 창왕 등을 다룬 4부 폐가입진론에 연루된 인물론, 최치원, 김득배, 길재, 원천석 등을 다룬 5부 조선에서 부활한 고려 인물론 및 조선 역사가들의 ‘고려 열전’, 그 특징과 의미라는 맺음말로 구성되었다.


우선 이 책은 고려의 4 임금(태조, 현종, 문종, 원종)과 16 공신(신숭겸, 복지겸, 유금필, 배현경, 홍유/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조충, 김취려/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을 모신 숭의전이 있는 연천에 사는 사람으로서 관련된 새 지식을 얻을 수 있어서 유용하게 읽힌 책이다. 새 지식이란 김득배가 성호 이익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점, 폐가입진론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있다는 점 등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폐가입진론은 우왕, 창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는 데에 근거해 가짜 왕인 그들을 폐하고 진짜 왕인 공양왕을 세운다는 논리다. 공양왕은 신종(神宗)의 7대손이다. 폐가입진론은 조선 건국의 명분이 되었다.


이 내용이 반영된 고려사, 고려사절요 이후 300년이 지나서야 이 승자의 역사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는 성호 이익 및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 등에게서 나온 목소리를 말한다. 조선의 역사가들은 사대교린이라는 대외관계가 타당하다는 전제하에 고려사를 평가했다. 이익은 다소 복합적이다. 폐가입진론을 문제시한 이익은 거란과 단교를 한 태조 왕건에 대해서는 잘못된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성종,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초래했다고 평가했고 금나라와 선린관계를 유지한 인종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제현은 인재(人才)를 등용할 때 친소(親疏)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입현무방(立賢無方)을 내세운 광종의 인재등용이 현실에서 취지가 많이 상실되었고 광종이 실시한 과거제도가 겉치레의 문장을 숭상하는 폐단을 낳았다고 지적했다.(이제현은 고려 말의 역사학자이다. 이제현을 포함시킨 것은 조선이 본 고려라는 제목과 맞지 않지만 참고 삼을 만하다.)


이익은 인종은 사대(事大)에 마음을 다해 백성들을 편안하게 했으니 마땅히 숭의전에 모셔 제사해야 했다고 결론지었다. 이익은 고려가 475년간 유지된 원동력을 사대교린 정책에서 찾았다. 묘청의 난, 이자겸의 난이 일어난 당대의 임금인 인종은 금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스스로 신하라 자처하는 칭신(稱臣)의 사대관계를 맺었다. 무신정변을 초래한 의종은 자신의 덕과 총명함이 요순 임금과 같으며 유사 이래 자기 대(代) 만큼 평화로운 시대가 없었다고 자평했다. 조선 역사가들은 의종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의종은 유교가 아닌 풍수지리, 불교, 도교 등 고려의 전통사상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웠다. 의종은 자기 유모의 남편이자 환관인 정함을 관료로 임명하려 했다. 의종은 신료들의 서명을 요구했다. 이공승은 처음 서명했다가 후에 번복하고 임명에 반대했다. 이익은 이공승이 처음의 잘못을 뉘우쳐 입장을 번복한 사실에 주목했다.


여기서 두 가지 관점을 논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나 사건을 오로지 선과 악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는 포폄(褒貶)론과 공과 과를 두루 고려하는 공과(功過)론이다. 이익은 공과론을 채택했다. 고려사절요를 편찬한 조선 전기 역사가들은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명종을 철류(綴旒) 같은 존재로 평했다. 철류란 깃대나 면류관에 매달린 끈을 말하는 것으로 철류 같은 신세가 되었다는 말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부림을 당한다는 의미다. 현대 역사가들은 무신정권 초기 명종 때 왕권이 이전에 비해 무력했지만 명종이 대외교섭, 인사권, 과거제 운영의 주체로서 어느 정도 왕권을 보장받았다고 평가한다.(84 페이지)


이익은 명종이 무력한 군주였지만 의종이 시해되었을 때 바로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지 않은 것에 대해 죄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서경 유수 조위총(趙位寵)은 명종 재위시 무신 정권에 불만을 가진 서북지역 주민들의 호응을 업고 봉기(蜂起)를 일으켰다. 벌 봉(蜂), 일어날 기(起)를 쓰는 봉기는 벌떼처럼 무리지어 세차게 일어난다는 말이다. 당시 조위총의 위(位)에서 사람인 변을 뺀 입(立)과 총(寵)에서 갓머리 변을 뺀 룡(龍)을 합치면 입룡(立龍)이 된다는 말이 나돌았다. 왕을 세운다는 의미다. 이에 사람과 머리가 없어진 용은 죽는다는 말이 나돌았다. 흥미롭지만 실제하는 것이 아닌 글자에서 부수를 빼서 어떤 메시지를 반들어 전하는 것은 관념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정세운과 김용, 안우, 이방실, 김득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정세운과 김용은 공민왕이 원나라에 머물던 시절부터 공민왕의 측근으로서 정치적 행보를 같이했다. 그런데 김용이 정세운을 살해했다. 홍건적 침입으로 인한 위상 변화가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김용은 총병관으로 개경 방어에 실패했고, 정세운은 개경을 수복한 공신이었다. 김용이 안우, 이방실, 김득배를 꾀어(조서를 꾸며) 정세운을 살해했다. 김용은 이에 그치지 않고 안우, 이방실, 김득배를 제거했고 개경 수복 후 왕이 임시로 머물던 흥왕사에 침입해 왕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여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했다.


이익은 최영이 요동 정벌을 계획해 이성계를 사령관으로 임명한 뒤 그에게 책임을 전가해 제거하려고 했다고 썼다. 이른바 촤영 음모론으로서 이는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여 우리 영토를 잠식하려 하자 이에 반발하여 우왕과 최영이 주도하여 요동 정벌을 단행한 것이라는 학계의 연구성과와 아주 다른 견해다. 도은(陶隱) 이숭인의 행보를 놓고 간관(諫官)과 양촌 권근(權近)이 벌인 설전은 흥미롭다. 모친 상중에 이숭인이 과거 시험관을 맡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간관은 부모상으로 3년이 지나지 않으면 고시관을 맡을 수 없다고 했고 권근은 생전에 자신이 고시관이 되는 것을 보려한 늙은 아버지를 위해 고시관을 맡았다고 했다.


당시 문반의 최고위직 판문하부사로 있던 목은 이색은 이숭인과 권근이 처벌을 받자 사직하고 장단(長湍)으로 낙향했다. 반개혁파를 제거하려는 이성계 세력의 정치적 음모를 간파한 결과였다. 이색은 명나라의 힘을 빌려 창왕의 위상을 높여 이성계와 개혁파를 견제하려 했지만 명나라 황제가 거부해 도리어 개혁파의 의심과 불신을 받았다. 개혁파에 의해 왕이 된 공양왕은 개혁파를 제거하기 위해 장단에 물러가 있던 이색을 복직시켰다. 그러나 이는 이색에 대한 정치적 공세가 앞당겨진 계기가 되었다. 이색은 이인임이 신씨(우왕)를 옹립할 때 알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단에 유배되었다. 이긍익은 이색이 창왕 즉위 시 전왕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 한 것은 당시까지 우왕이 신씨라는 주장이 없었고, 우왕이 신씨라는 이유로 폐위된 것이 아님을 뒷받침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정도전은 스승인 이색의 처형을 주장했다. 신씨를 왕으로 옹립해 왕씨의 혈통을 끊은 것은 임금을 시해한 반역과 같다는 논리였다. 정도전은 주희(朱熹)가 선배인 소식(蘇軾)을 꾸짖은 사실에 빗대어 자신의 입장을 변명했다. 즉 정도전 자신은 주희에, 이색은 소식에 비유한 것이다. 우왕, 창왕 신씨설은 조선 건국에 정당성을 제공해주었지만 현대의 역사가들은 부정적 입장을 보인다.(180 페이지) 상촌 신흠은 개혁파의 주장과 다르게 이색이 창왕을 옹립한 것은 올바른 일이라 주장했다. 이익은 우왕은 신씨가 아니며 우왕이 폐위된 것은 그가 최영과 함께 단행한 요동정벌 때문이라 주장했다. 우왕과 창왕은 왕의 역사를 다루는 세가(世家)가 아닌 열전(列傳) 그것도 반역열전에 수록되었다. 두 왕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주장은 처음이 아닌 공양왕을 추대할 무렵에 나타났다. “뒤늦게 제기된 혈통문제”라 할 수 있다.


두 왕의 정통성을 인정한 최초의 역사서는 안정복의 동사강목이다. 안정복은 최치원이 신라의 네 임금을 섬겼으면서도 ‘신라에 반기를 든 도적 무리인 왕건’에게 몰래 글을 올린 것은 잘못이라 썼다. 김득배는 정몽주의 스승이다. 이익은 김득배가 정세운을 살해한 사실 자체를 부정했다. 김득배는 권신 기철 일당을 제거한 후 2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정몽주는 제문을 통해 스승 김득배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정당한 절차 없이 죽었다는 것이다.


이익은 사람들이 정몽주만 알고 있을뿐 그의 스승인 김득배의 존재를 모른다고 하면서 김득배를 역사의 무대로 불러냈다. 고려 왕조에서 벼슬길에 올랐지만 뚜렷한 존재감을 남기지 못한 야은 길재는 조선에서 절의의 인물로서 모습을 드러내며 조선의 학인들에게 오랜 세월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방원의 스승 운곡 원천석은 우왕 신씨설을 최초로 부정한 인물이다. 저자는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이 아니라 은폐된 진실을 밝혀서 기록하는 일이라 말한다.(267 페이지) ‘조선이 본 고려’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역사가의 가치와 참된 역할을 새삼 일깨우는 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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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9-26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는 역시 재미있어요. 배울 내용이 많기에.ㅎㅎ

벤투의스케치북 2024-09-27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다행입니다
 
과학의 기쁨 - 세상을 구할 과학자의 8가지 생각법
짐 알칼릴리 지음, 김성훈 옮김 / 윌북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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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란 바라보는 사람의 눈 속에 있다는 말이 과학에도 적용된다(14 페이지)고 주장하는 짐 알칼릴리의 책 ‘과학의 기쁨’은 과학을 대하는 우리의 시각을 정교하게 해주는 의미 있는 책이다. 양자물리학자이자 BBC 과학 커뮤니케이터인 저자는 자신의 이전 책인 ‘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비전문가를 위해 쓴 책으로 설명한다. 책은 모두 8부로 구성되었다. 서문에서 저자는 꼭 전문가의 수준에 도달할 필요는 없고 그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한다.(15 페이지) 서문의 결론 부분에서 우리는 과학은 우리가 세상을 더욱 깊게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하고 깨우침을 주는 학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려면 우리는 과학에 대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있다.


’들어가며‘에서도 과학에 대한 정의가 등장한다. 예컨대 과학은 생각하는 방식이자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27 페이지) 저자는 과학적 방법론을 다른 이데올로기와 구분해주는 몇 가지 특성에 대해 논한다. 1) 반증가능성, 2) 반복성, 3) 불확실성의 중요성, 4) 실수를 인정하는 것의 가치 등이 그것들이다. 과학적 방법론의 또 다른 특성은 자기수정적(self  - correcting)이라는 점이다.(34 페이지) 종합하면 과학의 작동 방식은 자기수정적이고, 이미 사실로 확인된 확고한 토대 위에서 구축되고, 정밀조사와 반증 과정을 거치고, 재현성이 담보되어야 한다.(39 페이지) 


’들어가며‘에서 우리는 중성미자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2011년 한 실험에서 중성미자가 빛보다 빠르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우주의 그 무엇도 빛보다 빠르지 못하다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어긋나는 예이다. 그런데 중성미자 실험을 수행했던 연구진이 광학케이블 하나가 시간 측정 장치에 부적절하게 부착된 결과임을 알아내고 그 부분을 고쳤더니 중성미자가 빛보다 빠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32 페이지) 저자는 현실세계의 과학이 전적으로 가치중립적이지는 못하더라도 건강한 과학적 과정을 통해 얻은 지식은 가치중립적이라는 데 모두가 동의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42 페이지) 


1부 진실이거나 진실이 아니거나에서 저자는 탈진실 시대에 대해 말한다. 앞 부분에서 과학에 대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이와 관련지어 말할 수 있는 바가 저자에 의해 제시되었다. 이는 저자의 이런 말에서 연유한다. 즉 많은 사람이 과학의 성공에 눈이 멀어 과학이라는 포장지만 쓰고 나오면 그 출처나 위조 여부를 따지지도 않고 기사나 광고를 다 믿어버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출처도 따져야 하고 충분한 생각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신중하게 증거를 기반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필요하다.(4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과학은 정치와 달리 이데올로기나 신념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46 페이지)이다. 과학적 방법론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품고 질문을 던지고 관찰하고 실험하고 추론하려는 의지의 결합체(47 페이지)이다. 저자도 말했지만 지금은 탈진실 시대다. 특정 이데올로기적 신념에 동기를 둔 노골적인 거짓 주장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신뢰할 만한 증거가 뒷받침하는 지식을 압도하는 세상을 말한다. 부정(否定)의 몇 가지 유형이 눈에 띈다. 1)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믿기를 거부하는 말 그대로의 부정(literal denial), 2) 사실 자체는 받아들이지만 개인의 이데올로기나 문화, 정치적 신념, 종교에 맞추어 다르게 해석하는 해석적 부정(interpretive denial), 3) 기후 변화를 막는 행동에 나서려면 생활 방식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기에 기후 변화 주장을 부정하는 것 같은 함축적 부정(implications denial) 등이다. 


무엇인가에 대한 특정 진술이 신념, 감정, 행동, 사회적 상호작용, 의사결정, 우리가 접하고 논란을 벌이는 온갖 주제와 복잡하게 얽히면 단순한 흑백논리로는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진술이 참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진술은 그 자체만으로 모든 상황에서 전적으로 타당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61, 62 페이지) 


사회적 구성주의라는 말에 대해 알아보자. 이는 진리가 사회적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한 우리의 지각도 주관적이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너무 깊이 끌고 들어가면 결국 사회 전체가 동의하기로 결정하면 무엇이든 진리가 될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으로 빠져들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기로 결정하는가와 상관없이 참인 우주에 관한 사실은 존재한다.(65 페이지) 과학자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주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는 의미다. 각각의 주제를 구성 요소로 분해해서 각도를 달리하면서 보기도 하고, 한 발 뒤로 물러나 더 폭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하는 것이다.(69 페이지) 


2부 오컴의 면도날이 무뎌질 때에서 우리는 가장 단순한 설명이 반드시 올바른 설명은 아니며 올바른 설명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한 설명이 아닌 경우도 많다(76, 77 페이지)는 저자의 설명을 접하게 된다. 단순성은 우리가 항상 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너무 단순해져도 안 된다. 연구실 실험과 세상의 차이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라 말할까? 인간의 행동을 연구할 때는 인위적이고 이상적인 환경을 만들어 특별하게 통제된 조건 아래에서 실험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 실제 세상은 어지럽게 뒤엉켜 있고 너무 복잡해서 단순화하기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80 페이지) 


과학자들은 오컴의 면도날의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오컴의 면도날은 단순한 설명이 복잡한 설명보다 올바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저자는 조금만 더 깊이 파고 들어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만큼 보상을 받게 되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풍부해지면서 인생관도 더욱 풍부해질 것이라 말한다.(86 페이지) 


3부 미스터리는 인정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에서 저자는 우주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이 무지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보다 항상 낫다고 말한다.(95 페이지) 4부 이해가 안 된다고 포기할 필요는 없다에서 저자는 어떤 주제에 대해 심오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헌신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그것을 얻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설명한다.(105 페이지) 5부 의견이 아닌 증거에 집중하라에서 저자는 건강한 증거는 객관적이고, 편향이 없고, 확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토대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적 믿음과 일상의 믿음은 의미가 다르다. 과학적 믿음은 이데올로기, 희망사항, 맹목적 믿음을 기반으로 삼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129 페이지) 


다른 전문가가 그렇듯 과학자도 자기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말하는 것이라 믿을 수 있다. 그들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런 전문 지식을 쌓기 위해 여러 해를 투자해서 공부하고 연구했기 때문이다.(130, 131 페이지) 새로운 아이디어나 타인의 관점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합리성을 잃을 정도로 그래서는 안 된다.(132 페이지) 6부 타인의 관점을 평가하기 전에 해야 할 일에서 저자는 자연과학은 확증편향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경계를 늦추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 자체가 확증편향의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 말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의 수와 범죄 건수 사이에는 강한 양의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둘은 인과관계는 아니다. 둘 다 인구라는 매개변수와 관련되어 있다. 인구가 많아서 교회도 많고 범죄 건수도 많은 것이다. 7부 생각 바꾸기를 두려워 하지 말라에서 저자는 과학에서는 의심과 불확실성도 중요하지만 확실성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없다면 결코 진보가 이루어질 수 없다.(159 페이지) 진보는 의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의 수준을 점차 줄여나가는 신중하고 정당한 단계를 거쳐 결론을 확립함으로써 이루어진다.(160 페이지) 


하지만 불확실성은 모든 이론, 관찰, 측정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과학에서 불확실성은 아는 것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는 것이 있다는 의미다. 과학에서 불확실성은 무지가 아니라 확실성의 결여를 뜻한다. 불확실성은 의심의 여지를 남기고 그것은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161 페이지) 과학에서는 항상 새로운 증거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생각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163 페이지) 


저자는 일관성은 상상력이 없는 자들을 위한 마지막 도피처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인용한다. 일관성과 확실성에 대한 욕망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8부 우리가 원하는 현실을 만들기 위해에서 저자는 이 세상은 모든 가능한 결과가 다중우주 안에서 현실화될 수 있는 양자물리학의 세계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현실은 아원자입자의 세계와 다른 바 우리에게는 하나의 현실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171 페이지) 


저자는 우리 모두는 좀더 과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현실세계가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을 더욱 잘 이해하고 견뎌내는 방법이며 인생에서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방법이라고 말한다.(180 페이지) 마무리하며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과학을 응용햐는 것 역시 과학이라는 말이다.(183 페이지) 과학은 지식의 창조이고 기술은 그런 지식의 응용이라는 말로 담을 수 없는 새 정의인 셈이다. 


저자는 아인슈타인의 방정식과 과학 지식이 인류에게 악행(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의 잠재력을 부여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과학적 지식 자체가 사악하다거나 그 지식을 몰라야 더 나은 세상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말한다.(184 페이지) 과학이 없었다면 나날이 늘어나는 전 세계 인구를 먹여살릴 수도 없고, 더 행복하게 장수할 수도 없고, 집 안에 조명과 난방을 들일 수도 없었을 것이며 서로 소통하고 세계 여행을 하고 우주로 나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과학은 제한된 감각을 넘어, 두려움과 불안을 넘어, 무지와 약점을 넘어,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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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는 말이 없다 - 독살설에서 영웅 신화까지 금요일엔 역사책 10
이명제 지음 / 푸른역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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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이왕은 그의 아버지 인조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더욱 비운의 주인공으로 여겨온 인물이었다. 소현세자를 불행에 빠뜨린 운명은 그의 가족에게까지 미쳤다. 소현세자는 8년의 청나라 인질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지 두 달만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이명제의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는 소현세자에 대한 세간의 평에 이의를 제기하는 책이다.


저자가 바라보는 소현세자는 미약한 존재다. 저자에 의하면 백년 전 일본인 학자들은 조선의 실패를 설명할 존재로서, 백년 후 대한민국 국민은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적인 경험을 극복하고 부국강병의 조선을 건국하여 근대화를 이룰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 소현세자를 주목했다. 세자가 될 운명이 아니었던 소현세자가 세자가 된 것은 그의 아버지 능양군의 반정 덕이었다.


반정 세력의 명분 중 하나는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와 내통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명이 후금에 대한 공격을 제안한 시기에 조선의 신료들이 명의 요구를 수용하자고 한 것은 합리적이었다고 말한다. 후금이 명을 등 뒤에 두고 조선을 공격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명의 요구를 듣지 않으면 위기시 명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후금은 사르후 전투 결과 요동 지역에서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주목할 것은 밀지설이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려 누르하치와 몰래 연락을 취하도록 했으며 강홍립의 투항도 사전에 조율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린다. 광해군은 명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후금과 비밀리에 교섭을 하려고 했다.


광해군의 줄타기 외교는 1621년 이후 설득력을 완전히 잃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해는 1623년이다. 인조 정권은 친명배금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인조 정권이 반정을 온전히 완수하려면 광해군이 폐위 및 인조의 집권에 대한 명 황제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조는 후금 친정(親征) 의지를 강하게 표했다. 무리한 듯 보였지만 이는 친정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명에 보여주어 책봉에 유리한 포석을 깔아두겠다는 것이었다.


인조의 책봉이 이루어진 이후 후금에 대한 선제 타격 논의가 전혀 있지 않았다는 점이 이러한 점을 방증한다. 반정 당시 대장 김류가 시간이 되어도 집결지에 나타나지 않아 반정군이 동요하자 임시 대장을 맡아 반정을 성공시킨 이괄은 2등 공신으로 결정된 데 이어 사지나 다름 없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자 난을 일으켰다.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사이에 광해군 - 인조 - 흥안군 - 인조로 집권자가 바뀔 때마다 피의 보복이 이루어졌다. 흥안군은 이괄이 왕으로 추대한, 선조의 열 번 째 아들이다. 1626년 명과 후금의 영원성 전투에서 누르하치가 패했다. 조선은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을 수는 있으나 명과의 사대관계는 끊을 수 없었다. 명의 존재로 인한 갈등은 곧 현실로 다가왔다.


후금은 결정적 순간이 되면 조선이 명예 편에 설 것이라고 우려했다. 공유덕과 경중명의 귀순 사건 이후 후금 내부에서는 명, 몽골과 함께 조선을 적국으로 규정했다. 차하르를 정복하고 전국 옥새를 손에 쥔 홍타이지는 중대한 조치를 취했다. 여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만주라는 새로운 이름을 채택한 것이다. 이는 후금의 성장 과정에서 복속된 수많은 이방인에게 소속감을 제공했다.


뒤이어 홍타이지는 1636년 만주와 몽골, 그리고 항복한 한인 무장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금국에서 대청국으로 바꾸었다. 완벽한 진전을 단행한 것이다. 청 태종 홍타이지의 즉위식에 참석해 삼궤구고두례를 하지 않아 두드려 맞은 뒤 홍타이지의 국서를 받고 귀국하다가 내용을 확인하고 국서를 버려두고 귀국한 나덕헌과 이확은 참람하게 황제를 자칭한 홍타이지의 국서를 처음부터 거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저자는 정묘호란 당시 후금이 조선과 명의 관계를 인정했는데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 동참하라고 요구한 것은 명을 버리고 청의 신하가 되라는 것이었기에 정묘호란에서 도달했던 합의점을 청이 스스로 깨버린 것이라 말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조선의 선택이 유연하지 못했다며 비판한다. 하지만 이는 17세기 동아시아의 격동이 청의 승리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현대인의 시선일 뿐이다. 당대 조선인들의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여전히 명분으로 보나 실리로 보나 최선의 선택은 명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조선은 왜 청의 막강한 군사력을 감안하지 못했을까? 당대의 결정은 불확실하고 불분명한 상태에서 내려야 하기에 이해되어야 하는가?란 말을 하고 싶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선봉은 300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남한산성으로 대피한 조선이 이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반격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었다.


홍타이지가 도착하기 전에 강화를 맺는 것은 월권이었기에 선봉대는 세자를 인질로 삼아 본대가 도착하기까지 시간을 벌고자 했다. 세자를 인질로 보내는 건은 무마되었지만 상황은 반전되지 않았다. 문제는 강화의 조건이었다. 청에서는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칭신의 태도를 분명히 할 것, 척화신을 압송할 것, 그리고 조선 국왕 인조를 출성시킬 것 등이었다.


칭신은 조선이 청의 신하가 되는 것으로 명과의 단절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청은 황제가 직접 출정한 전쟁인 만큼 조선 국왕이 출성해야 한다며 출성할 수 없다는 조선의 입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세자의 출성 의사에 대해서도 청은 단호히 반대했다. 강화도 함락 소식이 전해지면서 인조는 출성을 결심하고 삼전도로 나가게 되었다.


홍타이지는 인조의 맏아들 즉 소현세자와 다른 한 명의 아들을 인질로 보낼 것을 명시했다. 또한 인조가 사망한다면 인질로 보내진 아들 중에서 임금을 세울 것이라 선언했다. 홍타이지의 조치는 원나라가 고려에 행한 것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크다. 소현세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동생 봉림대군을 비롯하여 3공 6경 대신들과 자제 혹은 동생이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로 끌려왔다.


게다가 세자를 보필하는 시강원의 관원 및 각종 명목의 관료들이 동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딸린 종인들까지 있었다. 이렇다 보니 처음 심양에 도착했을 때 세자 일행은 500여 명에 달했다. 소현세자 일행은 단순히 수만 많았던 것이 아니었다. 세자가 생활했던 심양관은 각종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했다.


예컨대 조선의 행정기관은 6조 중 이조와 형조를 제외하고 나머지 4조를 모방하여 호방, 예방, 병방, 공방이 설치되었다. 일종의 작은 정부가 구성된 것이다. 세자는 인질 생활임에도 공부를 피해 갈 수 없었다. 고달픈 인생이었다. 세자는 매달 5일, 25일에 열리는 청나라의 조참에 참여해야 했다. 조참은 신하들이 황제에게 문안을 드리는 동시에 황제가 신하들에게 주요 사안을 공지하는 모임으로 조선이 청이 제후국이 되었기 때문에 소현세자 역시 참석의 의무가 있었다,


이 밖에 황제가 주최하는 연회, 황실의 혼인이나 제사와 같은 주요 행사에도 참석해야 했다. 세자가 참석해야 하는 행사 중에는 사냥도 있었다. 사냥은 청이라는 국가를 지탱하는 주요한 의식 중 하나였다. 청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팔기(八旗)가 사냥의 단위였던 니루를 근간으로 하기도 하거니와 전투기술을 습득하고 만주 고유의 기풍을 유지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또한 사냥은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을 피하는 수단이었기에 황제는 지속적으로 대규모의 사냥을 기획하여 만주인의 정체성을 상기시켰다. 황제 홍타이지는 곧잘 소현세자를 비롯한 조선 왕족에게도 사냥 동참을 명했다. 자신들의 군사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궁궐 바깥을 나갈 일이 없던 소현세자에게 사냥 참여는 무척이나 고역이었다. 말 타기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자는 사냥 중 후미로 뒤쳐지거나 낙마로 부상을 입는 일이 많았다. 이십여 일 이상의 노숙을 동반하는 사냥일 경우 고된 일정으로 병을 얻기도 했다. 사냥도 고됐지만 인질로서의 의무 중 소현세자를 가장 괴롭힌 것은 전쟁이었던 듯하다. 홍타이지는 명과의 전쟁에 몇 차례 소현세자를 동참시켰다.


이 역시 사냥과 마찬가지로 청의 군세를 과시하여 명의 승리를 믿는 조선의 희망을 꺾어버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또한 조선의 세자가 청의 편에 서서 명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선전효과도 노렸을 것이다. 홍타이지는 명의 장수들이 항복할 때마다 소현세자를 대동하고는 심정을 캐묻기도 했다. 세자가 참전했다고 해서 직접 창이나 총을 들고 전투에 참여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전쟁터는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세자가 위치한 청 진영이 항상 승리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가 항시 존재했을 것이다. 1644년 소현세자는 청이 북경을 점령하는 전쟁에도 동참했다. 자신의 눈으로 명이 멸망하는 현상을 바라봐야만 했으니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현세자는 1644년 청이 중국의 주인이 된 이후 북경에서 두 달여를 생활했다.


소현세자가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났다고 알려진 것 역시 바로 이 시기에 해당한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수행해야 할 의무사항 가운데 징병문제를 포함시켰다. 명과 청이 전쟁을 벌이면 조선은 청에 군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가의 존속이 달린 상황이라 일단 수락했지만 실제로 징병요구가 이루어지자 조선은 난처했다.


공격 대상이 명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차일피일 시간을 끌거나 전투에 불성실하게 참여하는 등 소극적 저항을 이어나갔다. 그러자 청에서 인조를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울 수 있다는 식의 발언들을 내기 시작했다. 이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인조와 신하들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부자 관계가 정치적 경쟁 관계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세자의 귀국 문제에 시큰둥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홍타이지가 죽고 즉위한 여섯 살의 순치제를 대신해 섭정에 나선 도로곤은 인질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서 조선 내에 친 도르곤 세력을 조성하려 했고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위협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소현세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상황은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불충을 의심하던 청에서 인조의 입조(立朝)를 요구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자 대책이 논의되었다. 신하들은 고려 충혜왕의 사례가 재연될 것을 우려했다. 충혜왕은 상국인 원나라에 압송되어 유배를 가던 중 사망한 고려의 국왕이다. 원 황제에 의해 고려 국왕이 교체된 사례가 다수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인조는 섬뜩함을 느꼈다. 청에서 정말 조선의 왕위 교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더라도 이는 소현세자의 책임이 아니다.


물론 사람이 마음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조 입장에서는 소현세자가 연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소현세자는 귀국해 부왕인 인조와 눈물의 재회를 한 후 부왕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큰 실망감에 소현세자는 서연 참석을 점점 게을리했다. 소현세자는 2차 귀국 후 심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위치한 평양에서 유생들과 무인들을 모아놓고 과거를 실시했다. 이는 월권이었다.


명은 청과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만리장성 바깥에서의 상황이었다. 청의 막강한 군사력으로도 만리장성은 돌파할 수 없었고 청의 중국 정복은 요원한 일처럼 보였다. 이자성의 농민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만리장성의 산해관을 수비하던 오삼계는 산해관 문을 열어 청을 이끄는 도르곤에게 항복했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과 오삼계의 병력은 이자성의 군사와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5월 2일 북경까지 점령했다. 소현세자는 이 모든 역사적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도르곤이 전쟁에 소현세자의 동참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조선이 그토록 의지했던 명이 붕괴하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도르곤은 명의 멸망과 청의 중국 정복으로 조선과 청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주요 변수가 제거되자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을 허락했다.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은 식량 원조를 얻어내기 위한 협상 카드 중 하나였다. 조선 왕족의 일원이었던 소현세자는 1625년 조선, 1634년 명, 1639년 청에 의해 세 차례나 세자 책봉을 공인받으면서 훗날 조선의 왕위에 오를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끝내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소외받던 소현세자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일본인 학자 이나바 이와키치가‘정교봉포’라는 자료를 입수해 소개했다.‘정교봉포‘ 는 19세 후반 강남 지역에서 활동하던 신부 황백록이 중국 천주교 역사를 정리한 서적이다. 이 책에 소현세자와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의 교유가 기록되어 있다.


’정교봉포‘보다 더 신뢰할 만한 자료는 아담 샬이 쓴 ’중국전례보고서‘다.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이야기는 1964년 김용덕의 '소현세자연구'라는 책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저자는 소현세자가 단 한 편의 글도 남기지 않았음을 상기 시키며 소연 세자의 삶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파편적이고 편향적으로 작성된 사료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소현세자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소현세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행실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글들이 현재 소현세자 서사의 증거로 쓰이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다. 저자는 인조 실록에서 소현세자를 비판하느라 안달이 난 이유를 봉림대군에서 찾는다. 소현세자 사후 세자의 자리는 원손에게 돌아가야 했지만 실제로 봉림대군이 지위에 올랐다.


이는 당시에도 논란이 대상이 되었고 훗날 예송논쟁의 발단이 되기도 했다. 봉림대군(효종)은 정치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소현세자와 그의 아들이 세자의 자리에 적합하지 않음을 입증해야 했다. 저자는 심양에서의 경험이 소현세자의 생각을 바꿔놓았다는 논리라면 함께 심양에서 생활했던 조선인들에게서도 비슷한 변화가 발생해야 하지만 소현세자 외의 인물에게 그런 변화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정은 심양관을 단순히 인질들을 구류시키는 장소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대사관으로 여겼다. 청은 조선의 차기 국왕인 소현세자가 외교관의 역할을 해주기로 기대했다. 조선의 경우 모든 권력이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다. 국왕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종친들의 정치 참여는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다.


종친이란 국왕의 4대손까지로 이들은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청의 경우 황족들의 정치 참여가 제한되기는커녕 오히려 권장되었다. 청의 정치체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팔기이다. 청의 황족들은 여덟 개 구사(조직)에 대한 지분을 토대로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소현세자에게 상당한 정치적 역할을 기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조선과 청의 관계를 매끄럽게 만드는 외교관의 모습을 기대하지 않고 오히려 고초를 겪더라도 절개를 지키며 청의 요구에 맞서는 모습을 연출하기를 내심 바랐을 것이다.(157 페이지) 저자는 소현세자가 적극적인 활동을 촉구하는 청의 요구에 대해 매번 세자의 직무는 문안을 여쭙고 수라를 돌보는 것에 불과하다고 회피한 것을 언급하며 소현세자가 외교관으로서 자신의 역량을 선보일 환경이나 의지를 가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심양 생활 초기에 식사가 현물로 제공되었으나 상주 인원이 많아 부담을 느낀 청이 돈을 주고 알아서 찬거리를 마련하라고 했다. 문제는 돈이 턱없이 부족하게 지급되었다는 점이다. 이 방침은 밭을 떼어줄 테니 직접 농사를 지어 먹으라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홍타이지는 포로 속환을 통해 일꾼 문제를 해결하라고 통보했다.


저자는 소현세자가 명나라 조정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가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지만 끝내 항복하지 않아 관왕 묘에 사실상 유폐되어 있는 장춘과 위험을 무릅쓰고 마주했음을 지적한다. 소현세자의 행보는 숭명반청의 태도다. 독일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은 본래 명 황제를 위해 복무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중국 선교가 중요했지 명나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의 역관들이 흠천감과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천문학 지식을 습득했다.


이는 1648년 이후의 일로 아담 샬은 1644년 소현세자와의 만남에 끼워넣었다. 소현세자는 심각하게 병약했다. 항상 조선을 의심하던 청도 세자의 병약함은 인정했다. 소현세자는 1643년 12월부터 1644년 3월까지 심양에서 한양까지 왕복했고, 심양 도착 2주만에 명과의 전쟁에 동참했다. 1644년 5월 북경을 점령한 이후 심양으로 돌아갔다가 9월 다시 북경으로 이동했고 11월 한양을 향해 출발했다.


전근대 교통수단을 감안하면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환한 데다가 산해관을 통과한 이후 북경까지 가는 과정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중탄과 화살이 빗발치는 군사작전이었다. 소연 세자가 병을 앓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온전한 건강 상태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실제로 소현세자는 상당히 건강이 악화된 상태로 귀국했다. 도착한 이유 회복기를 거쳤다 하더라도 재발과 병세 악화로 인한 사망이 그리 어색한 그림이 아니다.


세 명의 의관이 실시간으로 치료에 투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한 사람이 의도적으로 상황을 악화시키려 했다면 나머지 두 명의 의관이 분명 눈치를 채고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세자가 사망할 경우 자신들도 처분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이형익의 치료 덕분에 3월 14일 이후로는 탕약을 복용하거나 침을 맞지 않아도 될 정도로 회복되었다.


법의학자 유성호는 소현세자의 증상은 장기적 관점에서 분석하면 제1형 당뇨병일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소현세자의 당뇨증세는 1640년 하반기부터 눈에 띄게 악화되는데 악화의 요인으로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작용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시기는 바로 소현세자가 1차 귀국 이후 일탈을 시작한 시점이다. 저자는 과거의 인물에게 현재의 열망을 투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이지만 그것이 자칫 과도할 경우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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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체(陵替)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여 윗사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진산군(晉山君) 하륜(河崙)이 종묘(宗廟)가 오히려 오실(五室)에 불과하니 고려 태조 이하는 당연히 오주(五主)만 두어서 제사지내야 한다고 하자 세종이 경들은 물러가 예전(禮典)을 참작하여 아뢰고 능체(陵替)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능체라는 말은 드물게 쓰였고 능멸이란 말이 많이 쓰였다. 능멸은 凌蔑, 陵蔑이다


전자의 능은 능소화(凌霄花)의 능이다. 능소화의 별칭은 능초(陵苕). ()는 완두 초, 능소화 초이다. 凌苕라고도 하는 듯 하다. 능소화를 자위(紫葳)라고도 한다. ()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인(武人) 박위(朴葳)란 사람의 위다. 위는 둥굴레 위다. 단어들이 이렇듯 미끄럼을 타고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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