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이동으로 보는 한국사 - 삼국통일전쟁에서 여말선초까지
이정철 지음 / 역사비평사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정철의 '권력 이동으로 보는 한국사'는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1부 7세기, 당나라의 등장과 삼국의 생존 투쟁, 2부 통일 왕국의 파편화, 3부 호족의 시대, 4부 원 간섭기 고려 국왕들의 개혁, 5부 개혁에서 건국으로 등이다.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당나라와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와 관련된 문제였다. 618년 건국한 당나라를 유화책으로만 상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 대당 강경파 연개소문은 유화주의자인 영류왕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알아차리고 선공했다.

 

연개소문의 큰 아들 남생의 묘지(墓誌)에 연개소문의 아버지와 연개소문이 양야양궁(良冶良弓)했다는 기록이 있다. 쇠를 잘 다루고 활을 잘 다루었다(병사를 잘 길렀다)는 뜻이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먼저 제압하려 한 데 비해 당나라는 고구려를 최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당나라에게 고구려 침공의 명분이 되었다.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 친정(親征)에 나섰다. 신라는 당의 지원군 파병 요구에 응했다. 고구려 남부 국경선인 임진강을 넘어 고구려를 공격함으로써 당나라를 배후 지원했다. 당나라는 고구려 침공 실패로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선공하는 전략을 세웠다.

 

신라는 당나라 이외의 선택지가 없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느슨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여 신라에 공세적인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백제의 패망은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660년 의자왕의 항복이 첫 번째이고 6대 663년 백제 부흥 운동의 실패가 두 번째다. 사비 도성이 함락된 후 매우 빠르게 대규모로 백제 부흥군이 일어났다. 백제 부흥군은 3년 후 소멸되었다. 백제 부흥군 지도부 내의 깊은 반목과 갈등이 부흥 운동을 종식시켰다. 신라와 동맹관계였던 백제는 554년 신라의 공격을 받고 성왕이 목숨을 잃는 사건을 당했다. 551년 신라와 백제는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 때문에 고구려는 임진강 영역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이 때로부터 668년 멸망할 때까지 약 120년간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신라와 대치했다. 642년 쿠데타 이후 23년만인 665년 연개소문이 사망했다. 642년 쿠데타 이전 고구려는 귀족 연립정권 체제였다. 연개소문은 제도화된 권력 창출 체계를 확립하지 못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무너뜨린 후 668년 12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660년 백제의 웅진 도독부, 663년 신라의 계림주 대도독부에 이은 것이다.

 

이로써 백제, 신라, 고구려는 모두 당나라 행정 체계의 일부가 되었다. 신라가 당나라를 상대로 치른 두 건의 전투가 있다.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다. 매소성을 연천 청산 대전리 한탄강 주변 일대로 보는 견해가 양주 대모산성으로 보는 견해보다 많다. 매소성 전투는 당군을 한반도에서 패퇴시킨 육상의 결전이다. 매소성 전투 다음 해에 벌어진 금강 하구 기벌포 전투는 당군을 한반도에서 패퇴시킨 해상 결전이다.

 

김부식은 신라를 상대, 중대, 하대로 나누었다. 상대는 성골 계통이 왕이 된 시대이고, 중대는 태종무열왕(김춘추) 직계가 이어진 시대이고, 하대는 태종무열왕계가 아닌 진골이 왕이 된 시대다. 박혁거세 거서간부터 진덕왕까지 28 임금이 상대, 태종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 8 임금이 중대, 선덕왕부터 경순왕까지 20 임금이 하대다. 신라를 파편화한 제도가 골품제였다. 신라는 골품제가 발생시키는 문제들을 관리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중앙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잃어 갔으며 지방은 파편화되었다.

 

6두품이 진골 귀족에 대한 비판 세력으로 등장했으나 개혁에 실패하자 6두품과는 전혀 다른 새 사회 세력인 호족이 등장했다. 진골 귀족들은 자신들 내부에서는 파벌화되어 내란 수준의 갈등을 빚었음에도 지방이나 6두품의 신분 상승 요구에 대해서는 일치 단결하여 단호히 반대했다. 언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고 정점을 지나 쇠퇴하는 사회에서 더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6두품 출신 지식인들과 관료들의 불만은 신라 패망과 관련해 자주 언급된다. 신라의 골품제가 강력했던 데는 이유가 있다 골품제는 신라의 성공적 성장 과정이 만들어낸 제도다.

 

그것은 사로국이 신라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주변 국가들의 지배 집단을 흡수하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세력을 인정하고 신라의 위계 체계에 반영하여 흡수, 편제했던 틀이 골품제다. 8세기 후반에 이르러 소농민층의 경제적 조건이 더 악화되었다. 소농민층은 전근대 시대 전체를 통틀어도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었던 적이 드물다. 개별 소농민들은 늘 생존과 소멸의 경계선상에 있었다. 소농민층의 생산력은 높지 않았다. 수리 시설은 크게 부족했다. 고리대도 소농민층을 힘들게 한 요인이었다.

 

소농민층은 수조권 및 토지에 딸린 노동력 및 공물을 모두 수취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읍을 하사받은) 고위관료로 인해 더욱 어려웠다. 신문왕 때 폐지된 녹읍이 경덕왕 때 부활했다. 열악한 생산 조건에서 가중되는 부담은 영세한 소농들을 좌절시키는 힘으로 작용했다. 다수의 소농민이 토지를 잃고 유민으로 떠돌거나 지방 유력자의 비호 아래 들어가 대토지소유제에 포섭되었다. 이렇게 되면 국가는 세금 낼 사람과 군인이 될 사람을 잃는다. 이 두 가지야 말로 국가 기구를 유지하는 핵심 자원이다.

 

이들을 잃고서는 국가가 유지될 수 없다. 고구려와 백제는 수도를 옮긴 적이 있지만 신라는 그렇지 않다. 기득권의 강도와 배타성은 특정 지역에 대한 고착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후삼국시대는 말 그대로 세 나라가 공존한 시대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한 900년부터 왕건이 통일을 달성한 936년까지 36년간에 해당한다. 신라 중앙 정부는 822년 김원창의 난 이후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는 말은 지방에서 생겨난 많은 호족이 왕경(王京) 경주에 대해 독립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889년 원종과 애노의 난은 그 흐름의 정점을 알려주는 사건이다.

 

견훤과 궁예도 원종과 애노의 난 이후 자신들의 진로를 분명히 했다. 왕건은 후삼국을 호족 연합적 형태로 아울렀다. 신라 중앙 정부에 대해 독립적인 호족들이 등장한 계기는 치안 부재다. 진성여왕 이후 도적, 군도, 초적 등으로 불리는 반란군들이 전국적으로 창궐했다. 진골 귀족에 비해 호족들에게는 혈연보다 지역성이 훨씬 중요했다. 견훤과 궁예가 초기에 성장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듯 호족은 혈연과 무관하게 주변 사람들을 자신에게 끌어들일 수 있을 때에만 더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발전했다.

 

고려 건국 초 태조 왕건이 처음 시행한 지역 기반의 본관 제도는 이 같은 사회적 변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호족 개개인의 사회적 출신은 다양했다. 지역의 터전을 둔 토착 세력이 호족이 되는 경우도 있고 견훤처럼 중앙에서 지방관으로 파견되었다가 독립한 세력도 있었다. 궁예, 원종, 애노처럼 공동체에서 일탈하여 도적 무리를 형성한 세력도 있었다. 이런 무리들도 호족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역에 기반을 둔 경제력을 갖추어야 했다. 호족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존재다. 호족 같은 존재는 사회의 기존 시스템이 무너져서 무질서해질 때 나타난다.

 

본인의 재능이나 운에 따라 귀중한 사회적 차원을 획득하여 비록 적은 규모라 해도 자기 주변의 일정한 영역을 지배하는 존재가 호족이다. 호족은 속성상 장기간 지속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기존의 사회 시스템이 붕괴된 상황에서 나타나는 존재였기에 호족이 등장하게 되면 사회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통합되는 힘이 자연스럽게 작동하기 마련이다. 고려 건국은 그런 흐름을 증명한다. 견훤은 실제로는 892년 무진주에서 스스로 왕이 되었다. 하지만 왕이라고 공공연하게 칭하지 못하다가 900년 후백제를 건국하고 난 후에야 왕이라 자칭했다.

 

궁예 또한 896년 철원에 도움을 정하고 건국의 태세를 갖추었지만 901년에 가서야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국왕으로 즉위했다.(238 페이지) 927년 견훤이 경애왕을 제거하고 경순왕을 대신 세운 사건과 930년 고창 전투 사이에 중요한 전투가 있었다. 927년 11월 견훤과 왕건의 군대가 격돌한 공산 동수 전투다. 신라 경애왕은 견훤이 공격해 오자 왕건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다. 왕건의 원군이 도착했을 때 이미 경주는 견훤에게 점령당했다. 고려군은 대패했다. 왕건은 신숭겸의 희생 덕에 목숨을 건졌다. 고창 전투에서는 견훤 군대가 대패했다. 패서(浿西)의 패권을 잡았던 박지윤이 궁예에게 귀부하자 송악의 왕륭이 그 뒤를 따랐다.

 

왕륭은 궁예에게 자신의 지역 기반인 송악을 모두 바치겠으니 맏아들 왕건을 송악의 성주로 삼아 달라는 제안을 했다. 궁예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궁예가 전제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은 904년 무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해에 궁예는 국호를 고려에서 마진으로 바꾸었다.(269 페이지) 마진은 마하진단의 약칭이다. 범어로 크다는 뜻이다. 진단은 동방 전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왕건은 견훤이나 궁예는 물론이고 어떤 다른 호족들보다도 좋은 조건에서 사회 경력을 시작했다.

 

좋은 집안과 아버지 왕륭의 대담한 거래의 결과였다. 가히 행운이라고 할 만한 요소를 갖추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조건이 왕건의 승리를 결정한 정도는 아니었다. 왕건은 22세에 궁예를 만나 42세에 왕위에 올랐고 60세에 후삼국을 통일했다. 왕건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쿠데타 세력의 추대를 받아 즉위했다. 왕건은 처음 기병장들이 쿠데타를 이끌어 달라고 요청하자 완강히 거부했다. 중폐비사(重幣卑辭)는 선물을 후하게 주고 말은 겸손하게 한다는 뜻이다.

 

즉위 이후 호족들을 대하는 왕건의 태도 즉 포용 정책을 함축하는 말이다. 그의 이런 태도는 궁예와 대척점에 있었다. 고창 전투에서 왕건이 예상 밖의 대승을 거두자 931년 신라 왕은 왕건에게 사람을 보내서 귀순할 뜻을 밝히며 만남을 요청했다.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가장 큰 관건이 된 요인은 수많은 호족과의 관계 설정 문제였다. 왕건은 견훤과 궁예 외의 호족들과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는데 월등한 기량을 보였다. 하지만 호족들과 관계만 잘 맺는다고 나라를 안정시킬 수는 없다. 나라를 근본적으로 안정시키려면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 왕건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왕건은 십일세법으로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였다. 호족에 대한 포용 정책과 백성에 대한 십일세법은 상충할 가능성이 높다. 왕건 재위 기간 이 문제는 현실화되지 않았다. 광종은 과거 제도를 도입했다. 후삼국시대를 포함하여 백여년에 걸쳐 성장한 무장 세력을 제도적으로 축소하기 위해서였다. 즉위 직후 광종의 왕권은 두 형(혜종,‘정종; 定宗’)이 가졌던 왕권과 다름없이 불안했다. 1231년(고종 18년)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여섯 차례에 걸쳐 30년 가까이 이어졌다. 고려는 1170년(의종 24년) 이래 무신 정권이 지속되고 있었다. 고려 정부는 일단 몽골이 요구한 조건들(곡물 납부, 군사 협력, 다루가치 설치) 등을 약속하여 몽골을 안심시킨 뒤 고려 땅에서 군대를 철수하게 했다. 몽골군대가 철수한 다음 해인 1232년(고종 19년) 6월 고려는 전격적으로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겨 대몽 항전체제에 돌입했다. 이후 1259년 국왕이 태자를 몽골에 보내 귀부할 때까지 항쟁이 지속되었다.

 

고려가 개경으로 되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다시 11년 후인 1270년(원종 11년)이다. 고종은 태자 왕식(후에 원종이 됨)을 몽케 칸에게 보내 귀부하기로 결정했다. 태자 일행은 몽케의 남송원정군이 사천의 조선행재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경요양부에서 조어산까지는 대단히 먼 거리다. 이 와중에 몽케 칸이 사망했다. 누구에게 가서 고려의 귀부 의사를 밝혀야 할지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당시 몽골 제국의 정치적 상황은 공석이 된 대칸 한자리를 놓고 몽 케의 두 동생 쿠빌라이와 아리크무카가 대결하는 형세였다. 어떤 이유로 그랬는지 불확실하지만 왕식은 아리크부카 대신 쿠빌라이에게로 갔다. 왕식의 행동은 고려를 대표한 귀부였다. 왕식을 만난 쿠빌라이는 크게 기뻐했다. 왕식의 귀부는 쿠빌라이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고려 태자 원종은 쿠빌라이를 만나 진행한 교섭에서 여섯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고려의 의관 등 풍속은 본국 즉 고려의 것을 따른다. 둘째 원나라 사신은 몽골 조정에서만 보낸다. 셋째 고려 조정의 개경 환도를 재촉하지 않는다. 넷째 압록강 유역에 주둔시킨 몽골군대를 가을 내로 철수한다. 다섯째 고려에 설치한 다루가치를 소환한다. 여섯째 고려에 설치한 몽골에 투항한 고려인들을 돌려보낸다 등이다. 강화 협상으로 내건 6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첫 번째인 불개토풍이었다.

 

불개토풍은 원나라 세조가 약속한 제도라는 의미의 세조구제(世祖舊制)였다. 왕식(원종)의 귀부가 힘이 되어 대칸이 된 쿠빌라이는 왕식의 다소 과한 요구들을 흔쾌히 수용했다. 부왕 고종의 사망 이후 뒤늦은 즉위식을 하고 왕위에 오른 원종은 쿠빌라이와의 인연으로 고려에서의 발언권과 권위가 높아졌다. 고려 조정에는 원종으로 대표되는 강화파와 몽골과의 항전을 계속 주장하는 무신 정권이 공존했다.

 

원종은 임연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쿠빌라이의 군사 파견에 힘입어 4개월만에 복위했다. 원종은 임연 제거와 출륙환도를 조건으로 쿠빌라이에게 군사를 얻었다. 원종은 몽골군을 이끌고 돌아와 무신 정권을 붕괴시키고 강화도를 나와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1170년 성립된 고려 무신 정권은 정확히 백년 만인 1270년에 종식되었다. 원종은 원나라에서 돌아온 다음 해인 1271년 2월에 사신을 보내 정식으로 세자와 원나라 공주의 결혼을 요청했다. 11월에 귀국한 고려 사신은 쿠빌라이가 청혼을 허락했음을 알렸다.

 

몽골 황실의 통혼은 혈통적, 문화적 동질성이 우선 고려 대상이었다. 여기에 정치, 군사적 목적성이 더해졌다. 첫 통혼자는 충렬왕이었다. 충렬왕은 아버지 원종보다 훨씬 더 자발적으로 몽골 제국의 일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원나라는 고려를 황제의 부마국으로 대우했다. 충선왕은 첫 혼혈 군주였다. 충선왕의 초휘(初諱)는 왕원이고 후에 왕장으로 개명했다. 충렬왕의 세자 왕원(충선왕)은 16세에 원에 독로화(禿魯花; 뚤루게; 원나라에 인질로 보내지는 고려 왕족 및 귀족 자제)로 보내졌다.

 

원 간섭기 초에는 독로화로 원나라에 가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나중에는 그 성격이 변하여 일종의 정치적 기회의 성격을 띠게 된다. 쿠빌라이 칸의 신임을 얻은 세자는 아버지 충렬왕과 갈등의 휘말리게 된다. 충선왕은 심양왕(瀋陽王; 원의 황제가 고려 왕에게 내린 봉작)과 고려 국왕의 지위를 함께 가졌다. 충선왕은 무신 집권기의 인사권 독점 기구인 정방을 폐지했다. 정방은 고려 패망의 한 원인이었다. 충선왕은 환관 임백안의 참소로 티베트로 유배를 갔다. 아들 충숙왕은 정방을 다시 설치했다.

 

조선을 건국한 신흥 유신들이 그들 스스로 처음 결집한 계기는 공민왕 16년에 이루어진 성균관 재건이다. 성균관이 재건되자 성균관 대사성 이색을 중심으로 김구용, 정몽주, 박상충, 박의중, 이숭인 등이 교관으로 성균관에 모여서 성리학 부흥의 계기를 만들었다. 신흥 유신들이 이제현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현상은 당시 고려에서 진행되었던 주자 성리학 보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나라로부터 주자 성리학이 고려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이제현의 역할 또는 지위는 독보적이었다.

 

이성계가 연이어서 두드러진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요인은 당시 고려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거느렸기 때문이다. 선대부터 거느려온 이성계의 친병은 동북면 인민과 여진인들로 구성되었다. 사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만 대략 1000에서 2000명 정도로 구성된 정예 병력이었다. 고려는 동북면의 지역민을 회유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역역(力役)을 부과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평소에도 군사훈련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성계가 여진족 추장까지 포함하는 휘하 부대의 충성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선대의 유산 덕분만으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자신의 용맹함과 능수능란한 용병술, 적조차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이 더 큰 요인이었다. 그는 무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전투에서는 늘 용맹스럽게 싸웠다. 더구나 그는 적이라도 우수한 무공을 가지고 있으면 살려서 자신의 수하로 삼곤 했다. 부하 장수들 중 여진족 추장 출신이 여러 명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위화도 회군 1년 뒤에 창왕은 유배지 강화도에서, 우왕도 역시 유배지인 강릉에서 피살되었다. 이들의 무덤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왕건이 견훤에 대해서 그랬듯 저항 세력의 결집을 자극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왕과 창왕이 피살된 후 3년이 채 못 되어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폐위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우왕을 잇는 두 왕의 재위 시기는 실질적으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양상은 이전의 왕조 교체 과정에서 볼 수 있는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신라에서 고려로 전환될 때는 정치 중심지인 수도와 핵심 인물들의 사회적 신분이 말 그대로 완전히 변화했다. 경주에서 개경으로 정치무대가 바뀌었고 정치 집단도 진골 귀족에서 평민 호 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교체는 정치 무대나 주인공들의 성격에 뚜렷한 단절이 보이지 않는다. 개경이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고려의 쇠망과 조선의 건국 과정이 겹쳐서 진행되었다. 심지어 개국에 반대했던 인물들이 조선 건국 이후 새 나라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려 태조왕건의 동상 - 황제제도.고구려 문화 전통의 형상화
노명호 지음 / 지식산업사 / 201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려 4대 임금 광종이 아버지 태조 왕건을 위해 개경에 진전(眞殿)인 봉은사를 짓고 동상(銅像)을 만들어 모셨다.(광종은 어머니 신명왕후를 위해 불일사를 창건했다. 고려 말까지 기록에 자주 등장한 봉은사는 조선 개국 후 기록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개성의 다른 사찰들이 언급되었으나 봉은사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봉은사 태조 진전의 태조 조각상이 마전으로 옮겨질 때 봉은사는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현종 2년 거란이 개경을 열흘 정도 점령했을 때 태묘가 불탔다는 기록이 있는 것과 달리 봉은사는 전화(戰禍)를 입었다는 기록이 없다. 현종은 봉은사 태조 진전을 대대적으로 중신(重新)했다. 고려 사람들은 나라를 세운 태조를 신처럼 받들어 나라의 중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제사를 지냈다. 1392년 고려 태조에 대한 제사를 마전군으로 옮겨 거행하는 절차가 시작되었다.

 

고려 태조를 모신 사당(옛 앙암재)에 고려 태조묘(太祖廟)란 이름이 붙었다. 혜종, 현종, 원종, 충럴왕(8월 11일), 성종, 문종(8월 12일)을 고려 태조묘에 합제(合祭)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다음날인 8월 13일 고려 태조의 동상을 마전군으로 옮겼다. 2개월 후 고려 왕조의 태묘(太廟)를 헐었다. 1397년(태조 6년) 마전에 고려의 사당을 지었다. 1423년(세종 5년) 고려 태조의 동상을 위판으로 바꾸어 제사지내게 되었다.

 

1429년(세종 11년) 고려 태조의 동상과 혜종의 소상(塑像)을 현릉 옆에 묻었다. 1992년 고려 태종 능 확장 공사 중 고려 태조 동상이 발견되었다. 발굴 과정이 아닌 공사 과정에 발견한 것이어서 오른쪽 다리가 부러지고 여러 곳이 찌그러졌다. 통천관도 많이 훼손되었다. 1997년 10월 모 신문에 일본인 한국미술사 전공자 기쿠다케 준이치 교수가 촬영한 고려 태조 동상 사진이 실렸다. 고려 태조 동상은 개성의 고려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었다가 현재는 평양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고려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데 이어 발해 세자 대광현(大光顯)과 유민들을 받아들였고 만주 동남부의 여진과 발해 유민들을 규합해 대륙의 신흥 초강대 세력인 거란을 상대하는 동맹을 이룬 영웅이다. 고려의 칭제(稱帝)는 고려가 구심점이 되는 대거란(對契丹) 동맹에서 강력한 권위가 필요한 고려 군주의 위상에 부합한다. 고려 태조 동상은 통천관(通天冠)을 쓴 모습이다. 여진 부족들은 고려에 방물을 바치고 고려는 답례품을 하사했다.

 

여진 부족들은 고려 군주에게 황제에게 보내는 문서인 표문(表文)을 올렸다. 통천관 착용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태자나 제후가 쓰는 관은 원유관(遠遊冠)이다. 통천관은 진나라 때 황제의 관으로 쓰기 시작했고 한대 이후 널리 쓰였다. 고려 태조 동상은 하단에 폭 2. 5cm의 띠를 두르고 있고 높이 10. 3cm의 오각형 금박산(金博山)을 포함하고 있다. 금박산은 도교에서 통용되는 신성한 산이다.(금동대향로에서도 박산을 볼 수 있다.)

 

원래 통천관에만 있다가 당(唐) 대부터 원유관에도 포함되었다. 구별을 위해 양(梁)의 숫자나 매미 문양의 숫자에 차등을 두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쓴 통천관의 양의 갯수는 24개다. 양은 관의 전면에서 솟아올라 뒤로 꺾이어 관의 후면에 연결되는 폭이 좁은 띠 모양의 융기된 선이다. 고려 태조 동상은 고려 임금이나 고위 대신들만이 공식적으로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옷, 옥대(玉帶), 가죽신 착용을 전제로 만든 착의형 나체상이다.

 

이는 실제의 사람 형상에 되도록 가깝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다. 1203년(신종 6년) 최충헌이 봉은사의 태조 진전에 제사하고 겉옷과 내의를 바쳤다. 고려 태조의 착의형 나체상은 제례용 상징물이라는 점에서 인접지역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이는 고려의 토속신앙에서 유래했다. 원종 11년, 충렬왕 16년 태조 상을 소상(塑像)으로 표현한 기록이 있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태조 왕건을 지칭한 소상, 주상(鑄像)은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오랜 역사 과정에서 초기 제작에 대한 전승이 희미해진 가운데 당시의 조각상 표면에 따라 소상으로 불리다가 금속 주조 부분이 노출되고 나서 주상으로 불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려 태조 동상은 불상과 다르면서도 불상 같은 느낌을 준다. 광종대(代)에 태묘는 없었다. 성종대에 태묘를 건축했다. 성종 2년 박사 임노성이 송나라에서 태묘당도(太廟堂圖), 태묘당기(太廟堂記) 등을 가져와 바쳤다. 진전(眞殿)에 조각상이나 어진(御眞)을 모신 것과 달리 태묘에는 나무 위패인 목주를 모셨다.

 

진전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奉安), 향사(饗祀)하는 곳이다. 1009년 강조(康兆)가 일으킨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顯宗)이 즉위한 뒤 성종대의 화이론계 정책도 끝났다. 최대의 군사적 위협 세력인 거란을 무시하며 국초 이래로 강화해 온 대거란 군비를 축소하고, 침략군의 출발 첩보가 있어도 거란에 대해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아 국방과 외교에 일대 위기를 초래할 정도로 송나라와의 사대관계에만 경도되었었다.

 

그들에 의해 고려의 태묘도 5묘제로 운영되었다. 현종 즉위와 함께 천하다원론자들이 정책을 주도했다. 천하다원론자들은 송(宋)이나 거란 등과 마찬가지로 고려도 나름의 소천하(小天下)라고 생각했다. 1232년(고종 19년) 6월 고려는 몽골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했다. 강화도가 고려의 수도 이던 때를 강도(江都) 시기라 한다. 이때 고려 태조 왕건 동상도 함께 피난했다.

 

'고려사'는 고려 태조의 진전 명칭을 봉은사 태조진전, 봉은사 진전, 효사관(孝思觀), 경명전(景命殿) 등으로 기록했다. 관(觀)에 누각이라는 의미가 있다. 건물 외형을 두고 쓴 말인 듯 하다. 고려 왕실의 최고 상징물이었던 고려 태조의 진전과 동상은 조선 왕실에게 이중의 의미를 가졌다. 옛 왕조에 대한 충성을 뿌리뽑고 조선 건국을 굳히기 위해 제거해야 할 전왕조의 1차적 정치 상징물인 한편 도의(道義)로 보면 선대가 고려의 신하였던 조선 왕실에게는 예우해야 할 대상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은 저자가 2005년 개성에서 열린 개성지역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한 남북공동학술토론회 및 유적답사에 학술토론회의 남한측 사회로 참여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저자는 고려 태조와 혜종 등 7왕의 묘를 마전현여 세웠다는 조선 정종(定宗) 1년 4월의 기록을 태조묘에 합사(合祀)하던 혜종 이하의 왕들을 명목상 개별묘로 바꾸었을뿐 건물 상태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풀이한다.

 

앙암사의 고려(前朝) 태조묘는 사위사(四位祠)로 바뀌어 불린 뒤 숭의전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고려 태조의 동상과 진영(眞影)은 개경 봉은사에서 마전현으로 옮겨졌다가 충북 청주 문의현으로 옮겨진 뒤 세종 대에 현릉(顯陵) 옆에 묻혔다. 저자는 고려 태조 동상을 묻은 것을 고려 왕실의 권위를 깎으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하지 않는다.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자마자 고려의 태묘를 헐고 조선의 종묘를 세운 뒤 고려 태묘의 위패들과 고려 태조 동상을 작고 누추한 지방 사찰(마전현 앙암사)로 옮긴 것만으로 충분히 고려 왕실의 권위가 부정되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앙암사의 제사 대상이 8위에서 4위로 축소한 것은 이미 완전 붕괴된 고려 왕실의 권위를 새삼 깎는 차원이기보다 제례법이 정비된 결과로 본다.

 

저자는 세종대에는 고려 왕실 권위를 깎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 조선 왕실이 전대 왕실에 대한 예우에 너무 야박하다는 세평을 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4위사에서 숭의전으로의 명칭 변경이 논의된 것은 문종대이지만 왕의 죽음으로 아들 단종대에 마무리되었다. 조선이 고려 태조의 동상을 묻은 것은 동상이 불교식이어서인 점과 주인공이 황제가 쓰는 통천관을 썼다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영정은 두루마리 형태여서 말아 놓으면 존재가 쉽사리 드러나지 않지만 성인 크기의 동상은 덮어 두어도 존재를 감추기가 어려웠을 바 매장이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리 멘탈이지만 절대 깨지지 않아 - 상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자주 흔들리는 사람들을 잡아줄 마음 강화 습관
기무라 코노미 지음, 오정화 옮김 / 밀리언서재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멘탈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항상 긍정적이고 표정이 밝은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멘탈이 강한 사람들은 화가 나고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 얼른 궤도 수정을 해 우울한 기분을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중요한 것은 강한 멘탈이 아니라 회복력이다. 멘탈이 약하면 약한 대로 괜찮다. 멘탈이 무너졌다면 생각을 멈춰라. 저자는 멘탈이 무너졌을 때 빠르게 일반 모드로 회복할 수 있는 데에 능하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것은 연습의 결과다.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은 감정 조절에도 능하다.

 

자신도 파악할 수 없는 마음속 응어리의 해상도를 높이려면 말로 표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감정에 민감해져야 한다. 색의 종류를 많이 아는 화가가 그림을 섬세하게 그릴 수 있는 것을 보라.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면 막연한 불안감만 커진다.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때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이해하는 데도 필요하다. 저자는 멘탈이 약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은 실은 섬세한 사람이라 말한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 상태를 파악하는 데 서툰 이유는 주변 눈치를 보는 문화의 영향이 크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는 점을 기억하자. 남보다 잘하는 것 찾아보기도 추천할 만하다. 우리의 뇌 속에서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일시적으로 정보를 보존하고 처리하는 작업 기억이라는 과정이 이루어진다. 인간이 한 번에 생각할 수 있는 작업 기억은 5가지다. 불안할 때일수록 불안을 제공한 원인이 사실인지 망상인지 검증하고 사고의 폭주를 멈추어야 한다.

 

부럽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도 해보자고 생각하자. 2가지 선택지가 있다. 3년 후에는 나도 저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하나다.

 

저자의 말 중 인상적인 것은 장애인은 한정된 것에만 의존할 수 있고 비장애인은 다양한 것에 의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의존하는 대상이 많을수록 좋다. 흥미로운 점은 하루 2시간 연속으로 스마트폰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에 대해 평가할 때는 지나치게 엄격하게 점수를 매기지 않아도 괜찮다. 열심히 할 수 없다는 생각은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월 7일 오산 문화원에서 오시는 분들에게 선사박물관, 호로고루, 태풍전망대 해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태풍전망대에서는 북한 삭녕의 우화정을 그리는 마음으로 전망대 앞에 게시한 다산의 시 ‘우화정에 올라‘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 시는 1794년 33세의 다산이 암행어사로 경기도 지방을 순찰하는 길에 우화정에 올라 쓴 시입니다. 미수 허목을 그리는 마음도 개입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태풍전망대에서 북녘을 바라보려면 갈 수 없는 곳이라는 점으로 인해 생기는 아련함과 멋진 풍경을 보는 데서 나오는 감탄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닐지요? 

 

지우재(之又齋) 정수영(鄭遂榮; 1743~1831)의 우화정 그림도 준비해 연관된 설명을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역시 소동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화정이란 이름이 소동파에서 연원(淵源)했기 때문입니다. 삭녕은 홍경보, 신유한, 정선(鄭敾)의 우화등선과도 관련된 곳이지요. 물론 태풍전망대에서는 분단 이야기, 생태 이야기도 아울러 해야 할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탄소가 기후 위기랑 무슨 상관이야 - 안전한 내일을 위한 어린이 환경 교과서, 2023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선정
정지윤 지음, 조천호 감수 / 파란의자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탄소가 기후 위기랑 무슨 상관이야‘는 어린이를 위한 책이지만 어른들도 읽을 만한 책이다. 아니 어른들이 더 읽어야 할 책이다. 푸른 하늘, 산 등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사는 정지윤이란 분이 대기과학자 조천호 저술가의 감수를 받아 내용을 구성하고 그림까지 그렸다. 이 책은 한 마디로 기후 위기와 탄소의 강력한 연관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공기 구성 요소들 중 0.04%에 지나지 않지만 지구의 급소를 때리는 온실가스는 종류에 따라 수십 년에서 수천 년 동안 공기 중에 남아 누적된 채로 미래 세대에게 넘겨진다. 지구 평균 기온이 1.5도 오르면 생기는 본격 기후 위기가 2030년대에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2050년대에는 우리를 파국에 이르게 하는 2도 온도 상승이 전망되고 있다. 중요한 점은 미래 기후는 인간이 하기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지구 온도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바뀌는 날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 전역의 계절을 평균해 구하는 온도를 말한다. 기후란 날마다 변하는 날씨들의 정보를 30년 넘게 모아 평균을 낸 수치다. 매일 변화하는 기온, 강수, 바람 등의 정보를 평균하는 것이다. 빙하기 때부터 지구 온도가 5도 오르는 데 1만년이 걸렸으니 평균 2천년에 1도가 오른 셈이다. 그런데 지금은 1도 오르는 데 170년이 걸렸다. 170년이란 산업혁명부터 지금까지를 말한다. 기후 차이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은 지구의 둥근 모양이다. 이 때문에 태양 열을 골고루 받지 못한다. 넘치거나 부족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태풍은 이런 불균형을 해소하는 다양한 활동들 가운데 하나다. 태풍의 풍이 바람이란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바람이 큰 역할을 한다.

 

지구는 추운 곳은 덜 춥게, 더운 곳은 덜 덥게 해서 균형을 맞추고 있다. 문제는 너무 빠르게 오르는 온도다. 지구가 뜨거워지면서 조절 작용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문제다. 제트 기류란 것이 있다. 적도의 뜨거운 공기와 북극의 차가운 공기가 만나는 부분에 생기는 바람층을 말한다. 좁은 지역에서 부는 쏘는 듯한 강한 바람으로 두 공기를 잘 섞어 공기가 잘 흐르게 해준다. 그런데 지금 북극과 남극의 온도 차이가 줄어 제트기류가 힘을 쓰지 못한다. 그 결과 여름은 더 더워지고 겨울은 더 추워졌다. 제트 기류가 힘을 쓰지 못해 북극의 찬 공기의 하강을 막지 못하고 있다. 물론 북극이 뜨거워졌지만 여전히 북극은 지구에서 가장 추운 곳 중 하나다.

 

북극의 하얀 빙하는 햇빛을 반사해 지구 온도 상승을 막는다. 이에 비례해 어두운 빛을 내는 바다가 넓어져 햇빛을 더 많이 흡수한다. 바다도 물이니까 뜨거워지면 부피가 늘어나 해수면이 올라간다. 바닷물은 뜨거워지면서 수증기를 많이 발생시킨다. 비를 부린 수증기는 주변으로 이동하고 점점 차가워지면서 아래로 내려간다. 공기가 내려가기만 하니까 비를 내릴 구름을 만들 수 없어 가뭄이 들기도 한다. 문제의 근원은 탄소, 아니 탄소를 집중적으로 내보내는 우리다. 탄소는 누구하고나 쉽게 친해지는 성질 때문에 어디에나 있다. 모든 생명체의 몸 속에 탄소가 있다. 산소, 질소, 아르곤, 온실 가스 등으로 이루어진 공기층을 알 필요가 있다. 빠져나가는 열의 일부를 막아 지구를 너무 뜨겁지 않게 해 살기 좋게 해주는 것이다.

 

이산화탄소는 석탄과 석유에서 만들어진 탄소로 구성된 대표적 온실가스다. 온실가스 때문에 열이 빠져나가지 못해 온도가 높은 것이다. 지금껏 늘어나는 탄소를 흡수해주던 바다도 그 능력에 한계에 이르고 있다. 대륙 이동, 운석 충돌, 거대 화산 폭발 등은 기후를 급격히 변하게 하는 요인들이다. 지금의 급격한 온도 변화는 인류의 책임이다. 플라스틱 병을 만드는 과정에서 온실가스가 생긴다. 최초의 석유를 높은 열로 가열해 플라스틱 원료를 분리해 내는 과정에서다. 높은 열로 가열하려고 석탄이나 석유를 태우기 때문이다. 이 병들을 차로 나르는 중에 탄소가 나온다. 방방곡곡 실어나른 플라스틱 병을 냉장 보관하는 중에 온실가스가 생긴다. 우리는 이런 병을 너무 쉽게 버린다. 이것이 바로 플라스틱 병이 만드는 탄소 발자국이다. 발자국이란 이동 경로를 말하는 듯 하다.

 

우리가 탄소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지금의 세상을 당장 바꾸기는 어렵다. 햇살이나 바람 등으로 에너지를 만들고 전기 자동차도 만들어 사용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탄소를 흡수하는 산림이나 갯벌을 잘 가꾸어야 한다. 석탄을 태워 만드는 과정에서 탄소를 내보내는 전기를 아껴쓰는 것도 방법이다. 고기를 적게 먹는 것도 중요하다. 쓰레기 분리배출을 잘 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나바다 운동은 변함없이 중요하다. 목표는 탄소중립이다. 탄소 배출과 흡수 사이의 균형을 말한다. 자기 집에 불이 난 것처럼 재빨리 행동하라는 스웨덴의 환경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