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 우리가 몰랐던 17세기의 또 다른 역사
김덕진 지음 / 푸른역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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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근(大饑饉), 조선을 뒤덮다‘는 소빙기, 현종(顯宗), 미수 허목 등에 대한 관심에 따라 고른 책이다. 책이 다룬 시기는 경신 대기근 시기로 경신년이란 경술년(1670년)과 신해년(1671년)의 머리 글자를 딴 이름이다. 소빙기란 16세기에서 17세기 또는 17세기에 해당하는, 빙하기는 아니지만 비교적 추운 기온이 지속되었던 때를 말한다. 유럽인들의 아메리카인 대학살이 원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세계 인구의 10%가량인 6000만명에 이르던 아메리카 원주민 수는 유럽인들로 인해 큰 변화를 맞았다. 유럽인들의 학살이 의도적 결과였다면 그들이 신대륙으로 천연두와 홍역 등의 바이러스를 가져온 것은 비의도적 결과였다. 침략의 충격으로 인한 사회적 스트레스도 한 몫을 차지했다. 이런 여러 요인이 겹쳐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는 100년 만에 500만~600만명으로 줄었다. 


줄어든 인구가 부른 것은 경작의 감소였다. 이는 초목의 자연적 재생(재산림화)을 유발했다. 이에 따라 이산화탄소가 줄어들어 온실효과가 사라졌다. 이런 연쇄가 초래한 것이 소빙하기였다.(2019년 10월 19일 한겨레신문 기사 '유럽인들의 아메리카인 대학살이 기후변화 초래' 참고) 컬럼버스가 신대륙에 진출한  1492년에서 1650년 사이 아메리카 인구가 5천 만에서 5백 만으로 감소했다는 보고도 있다.(2019년 1월 3일 오마이뉴스 기사 ’8천만 명→1천만 명... 인류 최대 인종학살‘ 참고) 당시 이산화탄소가 줄어든 사실은 남극 얼음 속에 갇혀있는 당시 공기를 분석해 알아낸 바이다. 


나무 나이테로 몇 백년전, 몇 천 년전의 날씨를 알아볼 수 있고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의 지구 온도는 얼음을 통해 알아낸다. 남극, 그린란드 등에는 몇 만년전부터 온 눈들이 얼음이 되어 쌓여 있다. 이 얼음을 분석하면 눈이 내린 당시의 연평균 온도, 계절별 온도까지 추정할 수 있다.(최성락 지음 ’말하지 않은 세계사‘ 17 페이지) 최성락은 조선 영정조, 청나라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프랑스 루이 14, 15세 등이 모두 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칭송받지만 이는 왕이 잘해서 국민들의 소득이 늘어났다기보다 날씨가 따뜻해져서 국민들의 소득이 늘어난 때에 우연히 왕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라 말한다. 18세기 말은 지구 평균 온도가 하강했고 온도 하강 추세가 몇 백년 정도 지속되었다.(최성락 지음 ’말하지 않은 세계사‘ 19 페이지) 


17세기 조선에 연이은 대기근이 닥쳤다. 소빙기가 초래한 사건이다. 전술한 경술년, 신해년은 모두 현종 재위기였다. 1659년에 즉위해 1674년에 타계한 현종의 치세는 내내 참혹한 기근의 고난을 겪은 시기였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었으니 현종 재위기는 기해예송(1659년)과 갑인예송(1674년)이라는 정치적 격변이 몰아친 시기이기도 했다. 저자 김덕진이 기본으로 삼은 자료는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 승정원일기 등이다. 덧붙여 이해 당사자들의 취사선택에 의해 작성된 실록 및 승정원일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문집, 기타 고문서 들을 참고했다. 현종실록이 남인 집권기에 편찬된 책이라면 현종개수실록은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을 추방하고 집권한 서인이 재편찬한 책이다. 현종개수실록에는 현종실록보다 재해 건수와 내용이 풍부하게 수록되었다. 하늘의 뜻에 부합하지 못한 남인 집권층의 실정을 부각하려는 의도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기후적 관점에서 소빙기란 약 100만년전에 시작해 10만년전에 끝났다는 빙하기에 비해 정도가 작다는 의미다.(22 페이지) 저자는 소빙기의 원인을 나열한다. 1) 태양 흑점 활동이 쇠퇴하거나 중지에 가까운 상태에 접어든 결과라는 설, 2) 거대 운석 등의 외계발(發) 충격으로 인해 대량의 먼지가 태양을 가려 급랭 현상이 일어난 결과라는 설, 3) 유별난 화산 활동의 결과라는 설 등... 17세기 위기론 또는 17세기 소빙기 설은 학계 전반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뒤 전 세계적 문제(글로벌 히스토리)로 발전했다. 조선시대에 기근은 마치 연례행사처럼 겨우 숨을 돌릴 만하면 어김없이 찾아왔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대기근이 전국을 휩쓸었다.(36 페이지) 


저자는 조선의 대기근 극복을 천혜의 자연조건, 상부상조 정신, 극복 시스템에서 찾는다.(39 페이지) 천혜의 자연 조건이란 말은 한 지역 안에 재해를 경미하게 입은 곳이 존재함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순창의 재력가 양운거는 몇 백 석의 미곡을 관아에 납부한 데 이어 1661년(현종 2년) 흉년이 들자 기아자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조선 영조 대의 무관(武官) 류이주가 세운 99칸 고택 운조루(雲鳥樓)의 일화도 예시할 만하다. 굴뚝을 낮게 만들어 밥 짓는 연기가 멀리 퍼지지 않게 함으로써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했다. 이뿐 아니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 누구나 먹을 만큼 곡식을 꺼내 가라는 뜻으로 뒤주를 놓아 두었는데 그곳은 가져가는 사람이 부끄럽지 않게 주인과 쉽게 마주치지 않는 곳이다. 


조선은 지역 차원의 기근 구제 제도를 두었다. 소현세자의 아들을 제치고 왕세자가 된 효종의 아들로 병사한 아버지를 이어 임금이 된 현종은 재위 내내 정통성 시비에 휘말렸다. 볼 사람은 미수 허목이다. 미수 허목은 기해예송(1659년)이 서인의 1년상 채택으로 종결되자 삼척에 부사로 좌천되었다가 2년이 채 되지 않아 경기도 연천으로 낙향했다. 윤휴와 허목은 10년 이상 야인 생활을 하다가 현종 말년에 정계 복귀했지만 윤선도는 복귀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서인과 남인의 대결은 신권 강화 vs 왕권 강화의 구도이지만 현종은 서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현종은 서인에 염증을 느끼고 1666년 이후 부쩍 남인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현종은 즉위 2년만에 아들(숙종)을 낳았다. 이에 송시열은 상중에 해서는 안 되는 부부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왕을 비난했다. 


현종은 누이들의 집을 신축하는 일에 강경 입장을 보이다가 대신들의 말에 한 발짝 물러섰다. 대기근 때문이었다. 1670년의 자연재해는 냉해로 시작되었다.(106 페이지) 놀라운 사실은 7월에 우박, 서리 눈이 전국에 내렸다는 점이다. 찬바람이 불고 된서리와 찬비, 눈이 잇따라 내리는 겨울 추위가 1671년 봄까지 이어졌다. 가장 두려운 자연재해는 가뭄이다.(111 페이지) 전국 각도에서 기우제를 올렸으나 속수무책의 상황이 이어졌다. 봄 밭농사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모내기를 할 5월이 되어도 해갈 기미는 없었다. 오랜 가뭄 끝 비가 왔으나 폭우로 이어져 수해(水害)가 발생했다. 수해는 가뭄 못지않은 자연재해다. 


76세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상소문을 올려 기청제(祈晴祭)를 행할 것을 건의했다. 영제()란 말이 있다. 오래도록 장마가 이어질 때 서울 사대문 다락 위에서 비가 그치기를 비는 제사다. 폭우는 폭풍과 함께 찾아오기도 했다. 아사자가 속출했고 황충(蝗蟲) 피해가 잇따랐다. 황충이란 농작물을 갉아 먹는 해충을 말한다. 1670년 ~ 1671년 재해는 냉해, 가뭄, 수해, 풍해, 충해 등 5대 재해가 겹친 전례 없는 대재해였다. 백성들은 재해, 염병, 우역(牛疫) 등 3대 악재에 시달렸다. 1670~1671년 2년간 우역으로 죽은 소는 4만여 두에 이르렀다. 소의 대량 폐사는 엄청난 재산 손실이었다. 소가 없으면 농사와 교통 수단이 막힌다. 소를 도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우금(牛禁)이라 한다. 우금은 소나무를 베지 몫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송금(松禁), 술을 담그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주금(酒禁)과 함께 조선의 3금이었다. 


서울과 지방에 우역이 나날이 번지는 가운데 남아 있는 병들지 않은 소를 도살한 후 쇠고기를 팔아 이익을 챙기는 자가 있다는 보고가 속속 들어왔다. 현종 즉위(1659년) 후 해마다 흉년이 들어 기근의 끝이 보이지 않았는데 1670년에는 유난히 갖가지 재해가 전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거칠게 일어났다.(160 페이지) 경신대기근은 기근, 전염병, 가축병, 혹한이 삼중 사중으로 겹친 대재앙이었다.(161 페이지) 곡물가가 폭등했다. 사재기가 기승을 부렸다.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솔잎 먹기가 여의치 않았다. 정부의 송금령(松禁令)과 민간의 송계(松契)로 입산 및 채취가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뒤늦게 채취 허가 명령이 내려졌다. 시늉만 내거나 전혀 시도하지 않은 수령도 있었으나 함경도 감사 부임 직전 청주 목사를 역임한 남구만은 관아 뜰에 절구를 놓고 솔잎 가루를 만들어 기아자에게 먹여 큰 효과를 보았다.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란 시조를 지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 시조는 전원의 소박한 삶을 그린 노래가 아니라 맹렬한 '권력비판'의 작품이라고 한다.(시인 이상국) 해가 뜨는 창인 동창이 밝았느냐는 의미는 임금의 안목과 총기가 밝아졌느냐는 의미고, 노고지리 우짖는다는 의미는 간신들이 왕에게 거짓을 고한다는 의미고, 소치는 아이가 일어나지 않았느냐는 의미는 충직한 목민관이 등장하지 않았느냐는 의미고,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는 벼슬아치들이  당파 싸움에 매몰되어 벌이는 말꼬리 싸움을 언제 그치고 산적한 현안 해결에 나설 것인가를 묻는 의미다. 남구만의 시조는 숙종이 장희빈을 책봉하는 일에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강릉에 유배된 상황에서 나온 작품이다. 


굶주린 엄마가 어린 자녀를 삶아 먹은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기아자와 걸인이 넘쳐났다. 아사자와 병사자의 동시 대량 발생이 현실이 되었다. 조선 천지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신 처리가 큰 문제였다. 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인륜 도덕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떠돌며 도둑질을 하는 사태가 잇따랐다. 시신의 옷을 훔치는 일이 빈번했다. 진휼소가 설치되었다. 줄을 잘못 서거나 동작이 느리면 솥을 국자로 빡빡 긁어도 국물 한 방울 없는 '국물도 없는' 사태를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억만(億萬)이 진창(賑倉)에 나왔으니 엉망진창이었다.(238 페이지) 진휼곡을 빼돌리거나 진휼에 소극적인 지방 관리들이 많았다. 


군포 면제, 토지세 감면, 부채 탕감 등이 건의되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진휼에 쏟아붓고 세금을 탕감하느라 생긴 국고 구멍을 메우기 위해 국가 예산을 가장 많이 잡아먹는 군사비와 왕실비를 감축했지만 만족할 만하지 않았다.(283 페이지) 경신대기근은 남인과 척신을 앞세워 자신의 체제를 구축하려던 현종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302 페이지) 저자는 현종은 대기근에도 불구하고 궁지에 몰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기근 극복 과정을 통해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하며 자신의 권위를 과시해왔다. 측근 신료들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과감하게 비축곡을 풀고 세금을 감면해 민심 수습에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 서인들이 이상론으로 포장한 간섭을 물리쳤다. 대기근은 현종에게 돌파구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 


효종 비 인선 왕후 장씨가 죽자 예송이 다시 발생했다.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다. 1674년의 일이다. 1차 예송인 기해예송은 효종이 죽자 상복을 몇 년을 입어야 할지를 놓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한 사건이다. 1차 예송에서 서인은 1년, 남인은 3년을 주장했고 2차 예송에서 서인은 9개월, 남인은 1년을 주장했다. 1차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2차에서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1674년 재위 15년만인 서른 넷의 젊은 임금 현종이 죽었다. 저자에 의하면 현종은 신하들에게 끌려만 다니고 신하들의 눈치만 본 군주가 아니었다.(309 페이지) 여러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권위와 왕실의 위엄을 세우려 노력했다. 현실주의자로서 민생안정과 부국강병을 도모했다. 그러나 기후 변화가 끼친 영향 속에서 이상을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연천 사람인 나에게 대기근 중 미수 허목의 거취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미수의 이름은 오르내리지 않았다. 경신 대기근 시기는 미수가 연천으로 낙향해 세월을 보낸 시기와 겹친다. 대기근의 실상을 파악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사안은 예송논쟁의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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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02 2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중에 부부관계를 했다고 나무라는 송시열 같은 신하에게 현종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듯하다. 공교롭게도 지금 인기리에 방영중인 고려거란전쟁의 고려왕 또한 현종이어서 참으로 대비되네요.

벤투의스케치북 2024-03-03 06:46   좋아요 0 | URL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꼼꼼하게 읽고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시우행 2024-03-03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휴일되세요.

벤투의스케치북 2024-03-03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글 잘 쓰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 백마디 말보다 강력한 문장의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장현주 옮김 / 더모던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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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쓰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사이토 다카시의 책이다. 원고지 10장을 쓰는 힘이란 책을 통해 처음 안 일본의 저술가이자 대학 교수다. 저자는 글쓰기의 제1 원칙은 제3자가 자신의 글을 읽을 때 어떻게 생각할까를 늘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도 중요한 것은 글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거나 전하려는 바를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읽기는 쓰기를 전제로 해야 하고, 쓰기는 누군가 내 글을 읽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해야 한다. 논술에서는 과제로 나온 문장의 중심 의미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한 후 그것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새로운 개념으로 발전시킨 글이 좋은 평가를 받는다. 


글쓰기는 방대한 독서량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중요한 점은 글이 말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점이다. 생각이 정제되어 있고 논리정연하며 명료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렇게 되도록 애써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지 못한 글을 쓰는 사람들도 많다. 독해력이 쓰는 힘으로 연결된다. 잘 쓰는 사람은 다독가이다. 쓰기의 시작은 소재 찾기부터다. 본문에는 (일본의 경우이지만) 영화의 문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영화가 드라마처럼 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나의 경우는 어떤가. 나는 영화에 관심이 없는 편이기에 인문, 사회, 자연 등에 관심을 기울인다. 아니 영화에 관심이 많았어도 인문, 사회 자연 등에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영화에 관심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가 싫다기보다 영화 문법을 이해하기 위해 배우거나 궁리하는 것이 싫은 것이다. 저자는 읽었다는 것의 기준을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했느냐에 둔다. 그렇다면 이는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철학, 물리, 천문 등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물음에 답하는 것도 좋다. 즉 저자가 말하려는 바는 무엇인가?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어디인가? 등에 답할 것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다. locate란 단어가 있다. 어떤 것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다란 의미다. 인터넷 시대에 수준 높고 정확한 글을 찾는 능력 또는 노력이 필요하기에 하는 말이다. 저자는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독서 시간을 따로 내려고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라 말한다. 저자가 추천하는 것은 밥 먹으면서, 티브이 보면서 읽는 것이다. 


저자가 말했듯 읽고 말하는 것을 연결하려면 오랜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 수학 실력도 사실 언어 독해 능력에서 시작된다. 그러니 읽기 그리고 바르게 이해하기는 거의 절대적이다. 저자는 넓게 읽는 것과 깊게 읽는 것을 연동하는 읽기가 가장 좋다고 말한다. 넓게 읽는 사람은 대부분 깊이 읽을 수 있다. 깊이 읽으려면 어느 정도 넓게 읽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깊이 파내려갈 수 있다. 넓게 읽는 사람은 깊이 읽는다가 아니라 깊이 읽을 수 있다란 사실에 주목하자. 다독가도 매양 깊이 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깊이 읽을 수 있다. 


저자는 매년 100권 읽기를 10년 할 것을 추천한다. 1000권을 읽으면 어떤 책이라도 대강 훑어보기만 해도 주요 내용을 힘들이지 않고 파악할 수 있다. 속도도 빨라진다. ”넓게 많은 책을 훑어보고 특별히 마음에 드는 책을 꼼꼼하게 읽으면 된다.“(53 페이지) 책을 읽고 누군가에게 전달해야 한다면 하나라도 더 기억하려 노력하기에 집중도도 높아진다. 읽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연습을 하면 흡수력이 높아진다. 


나에게는 읽은 내용을 들어주는 친구가 있다. 이런 과정은 해설에도 유용하게 작용한다. 기억을 배가(倍加)하고 내용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글이 책을 깨끗하게 읽으려고 하다 보면 책에 몰입할 수 없어 남는 게 별로 없다는 말이다. 빌려 읽거나 팔 생각으로 밑줄 긋기, 메모 부기(付記) 등을 하지 않는 경우다. 


여러 책을 낸 다독가이자 저술가인 저자도 한 글자도 쓰여 있지 않은 원고지를 보면 늘 긴장되고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말한다. 글쓰기를 잘 하려면 상상력이 풍부해야 한다. 픽션은 물론이고 논설문이든 에세이든 모든 글쓰기의 기본은 창작이다. 이 글을 읽고 생각한 것이 있다. 역사학자들의 글쓰기는 사료에 초집중해 사실성이 높은 반면 추론이나 서사가 부족해 서사가 떨어지고 한문학자들의 역사연구는 흥미진진하며 생동감이 있지만 사료를 근거로 함에도 지엽적인 것을 확대해석하거나 문학적 갈등 구조 등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어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벌어진 경우가 있다는 글이다. 


한 페이스북에서 읽은 글인데 이를 보며 사료에도 충실하고 상상력도 발휘하는 글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상상력이다. 앞에서 말한 원고지 10장이란 말은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분량 채우기도 어렵고 그 분량 안에 하고자 하는 말을 딱 맞춰 넣기도 어렵고 그 안에 기승전결을 갖춰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이야기이지만 문장은 정직한 것, 주술 관계가 명확한 것일수록 좋다. 한 문장 안에 하나의 정보를 담는 것이 좋다. 


저자는 발문과 단순 질문을 구분한다. 발문은 읽지 않으면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K가 자살하기 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같은 물음이다. 단순 질문은 어떤 작품의 작가는 누구인가요? 같은 물음으로 답하면 대화가 끝나게 된다. 저자는 쓰기 전에 발문을 나열하여 목차를 만든다고 한다. 발문만으로도 훌륭한 목차가 된다. 쓸 수 있는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키워드를 목록화하는 것도 좋다. 저자는 평론 독해의 팁도 제시한다. 대부분의 평론은 2항 대립 구조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A라는 생각이 있는데 B라는 생각도 있다는 것이다. 


한 역사 책에서 세종은 자신의 장인을 죽이라고 주장한 인물을 죽이지 않고 정승 자리에 두었기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나선 사람들을 죽인 정조보다 훌륭하다는 글을 읽었다. 상술할 수 없는데.. 나는 세종과 정조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런 글쓰기를 해야 할 것이다. 근거를 제시하면 된다. 본문에 평론의 대부분은 사실 저자의 좋고 싫음으로 성립되어 있다는 글이 나온다.(105 페이지) 논리적인 평론도 마찬가지다. 


관건은 누구는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는 누구를 싫어하는가가 아니라 누구의 논리와 근거가 더 설득력 있는가이다. A 주장과 B 주장을 쓰고 여러 근거를 A 그룹과 B 그룹으로 나누어 쓰고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을 B 그룹에 넣어두고 특히 강조하고 싶은 핵심 부분을 표시해둔다. 이항대립 방식이나 변증법적 글쓰기 방식은 꽤 긴장감 있는 글쓰기 방식이기 때문에 마지막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읽는 이를 끌고 가는 장점이 있다. 꽤 논리정연하게 보이기 때문에 문장이 서툴러도 상당히 그럴듯하게 보인다. 


결론은 먼저 쓰고 이유는 후에 쓰는 방식으로 글을 쓰면 누가 읽어도 논리를 잘못 이해하는 일이 없다. 결론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려면 머릿속에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와 글의 구성이 모두 있어야 한다. 글을 쓰는 시간보다 구성을 생각하고 그 안에 어떤 것을 담을지 결정하는 데 더 힘을 쏟아야 한다.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가능한 한 논점을 메모해두면 좋다. 길고 복잡한 글일수록 도식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식화한다고 해서 흑백논리를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먼저임을 강조한다. 내용이 알차면서 쉽게 읽히는 책이 ’글 잘 쓰는 독종이 살아남는다‘다. 그런데 비법(秘法)이나 임팩트 있는 노하우가 제시되지 않아 아쉽다. 꾸준히 읽고, 명료하고 독창적으로 쓰는 것이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비법이기 때문일까? 관건은 직접 읽고 구상하고 쓰는 것이다. 그것도 잘 쓰는 것이다. 읽기의 최종 지점은 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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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개념 - 고대에서 현대까지
박준영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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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를 만나면서 우리는 사유의 수준이 어떤 다른 국면으로 넘어감을 감지하게 된다.“(이정우 지음 ‘세계 철학사 1 ’93 페이지) 박준영의 ‘철학. 개념’의 서주부(序奏部)에서 파르메니데스를 만난다. 그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을 했다. 존재만 가능하고 비존재 즉 무(無)는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운동을 부정했다. 풀어 이야기하면 파르메니데스는 고정불변하는 있음만 인정하고 운동은 인정하지 않았다.(2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파르메니데스 방식의 사유로는 고양이가 거실에서 안방으로 움직인 것이 없어졌다가 있게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26 페이지)


파르메니데스가 단 하나의 있음을 인정했다면 플라톤은 모든 개별자들 위에 존재하는 이데아를 주장했다. 플라톤은 감각보다 관념을 실재적이라 생각했다. 가령 커피의 실재성은 감각적 맛에 있지 않고 씀(bitterness)이라는 관념적 본질에 있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흐른다는 말을 했다. 그는 우리는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도 했다. 저자는 세상이 변하는 만큼 우리도 변하고 그 가운데 우리는 존재한다 또는 존재를 겪어간다는 말을 한다.(37 페이지) 우리는 유한성 한가운데서 어떤 목적을 이루려 하고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작은 성취감에 감사하고 또 다른 목적을 설정하고 거기에 몰두한다.(38 페이지) 헤라클레이토스는 변증법의 시조로 볼 만하다. 당시에는 변증법이란 용어보다 로고스(명사이기보다 셈하다, 말하다 등의 동사)란 용어가 있었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생성의 대우주는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는다. ”감각을 믿을 때 세계는 다자(多者)와 운동으로 다가온다. 무수한 사물들이 존재하고 그 사물들은 늘 어떤 식으로든 운동한다. 그것이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경험이 아닌가.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오로지 논변을 통해서만 사유할 때 다자와 운동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감각을 통한 그런 경험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이정우 지음 ‘세계 철학사 1’126 페이지) 철학사의 적자는 파르메니데스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제자들을 스토아학파라 한다. 저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를 한다. 두 사람 모두 존재를 생성보다 우위에 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플라톤의 이데아에 해당하는 개념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형상(에이도스)이다. 에이도스는 사물이나 사태의 내적 형식이며 전형이다. 모르페(morphe)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아이온은 변화무쌍하며 언제나 움직이는 생성의 시간이고 크로노스는 변하지 않고 멈춘 존재의 시간이다.(49 페이지) 아이온은 차이 나는 것의 반복이고 크로노스는 동일한 것의 반복이다. 이 두 시간은 대립적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조작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같기도 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두 시간 사이에 어떤 탁월한 인간의 의지를 새겨놓고자 했다. 바로 카이로스다. 크로노스의 규칙성과 아이온의 우발성을 연결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시간을 다루는 기술을 에우카이리아(적기; 適期)라 불렀다. 저자에 의하면 칸트가 자칭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스스로에 대한 오인의 결과다. 그가 이성을 비판한 것은 사실이지만 존재론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인간 주체의 이성적 능력에 대한 과도한 확신으로 철학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칸트 이후 인간은 눈에 보이는 세상 만물보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회의적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불교의 윤회는 동일한 것들이 되돌아오는 것이고 영원회귀는 차이 나는 것들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에는 법칙적 요소들이 없고 다만 힘의 증감, 그 과정의 반복만이 있다.(55 페이지) 니체의 생성은 차이 나는 생성이다. 원(原)은 물이 흘러나오는 샘을 형상화한 글자다. 첫번 째 장소를 의미한다. 기슭 엄과 샘 천의 결합어다. 철학은 신화가 아닌 합리적 이론, 유용성이 아닌 탐구 자체의 가치에 초점을 두는 학문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의 철학과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의 철학이 엠페도클레스에 의해 거칠게나마 종합되었다. 고대의 원리와 근대의 원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고대의 원리는 질료적이고 물질적인 원소였고 근대인들에게 원리는 법칙 즉 로고스였다.(96 페이지) 


현대철학에서 원리와 원인은 더 이상 중차대한 문제가 아니다. 대상을 인식하는 우리의 파악 작용도 감응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이것이 어떤 원리나 원인에 의한 것인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감응이란 처음부터 파악 주체와 그 대상이 명확하게 구분되거나 정해져 있지 않는 상태의 과정이다.(99 페이지) 감응의 과정에서 유일한 것은 애매모호한 직관 같은 것이다. 카메라의 초점이 불분명한 채로 이 세계에 놓여 있다. 이때 어느 것이 원인이며 결과인지 정해지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명확해지고 경계가 설정되면 제한되는 때는 감응의 과정이 지각과 지성의 작용으로 이행할 때다. 지성은 비로소 주체가 되며 화병 안의 꽃은 대상이 되어 서로 인과관계를 형성하거나 주체의 원리나 대상의 원리로서 자리잡는다.(99 페이지)


이렇게 보면 원인이나 원리는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생성된다. 즉 파생되는 질서다. 이 파생되는 인과적 질서의 한쪽 면에 주체가 자리잡는다. 그리고 저쪽에 객체가 놓인다. 이렇게 현대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고유한 특성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주-객 이분법도 파생된 질서에 불과하다. 바슐라르적인 의미에서 과학자 또는 철학자는 모든 것을 애초에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주체가 아니라 실험과 조작의 과정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주체다. 이를 과정 속의 주체라 할 수 있다. 이 주체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106 페이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능동적으로 지식을 추구하지만 그 안에서 늘 불안정을 견딘다. 우리는 우리의 능동성 안에서 불안하다. 저자는 바야흐로 철학이 과학과 긴밀하게 갈마드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111 페이지) 


닐스 보어는 전자 자체에서는 빛을 방출하지 않고 제 궤도에서 이탈하여 다른 궤도로 진입할 때 빛을 방출한다는 대담한 가설을 세웠다. 궤도를 점프해서 들어가는 운동에너지가 빛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112 페이지)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전자가 일정한 궤도를 도는가, 또 그것이 왜 점프하는가, 하는 문제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자가 일정한 궤도를 도는 것은 무시하고 왜 점프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드브로이는 빛이 입자와 파동이라는 이원성을 가진다면 전자도 그럴 것이라 가정했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전자가 일정한 정수값을 가지는 궤도를 도는 이유가 드러난다. 파동이란 늘 주기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나에 대한 아주 오래된 논의는 파르메니데스로 거슬러 올라간다.(126 페이지) 


파르메니데스에게 하나란 생성 없는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운동을 긍정하면 존재를 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운동한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은 하나의 존재자가 A에서 B로 둘이 된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파르메니데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생성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온전한 한 종류의 것이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으로서 그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게 될 것도 아니라는 말을 했다. 플로티노스는 자신의 세계관을 마련해놓고 인간이 도달해야 할 목표를 정한다. 일자와의 합일이다. 감각적인 세계를 벗어나 초감각적이며 세계를 하나로 아우르는 일자로 올라가는 상승의 이미지가 여기서 탄생한다. 


기독교 철학자들이 플로티노스 사상에서 가장 큰 매력을 느낀 지점도 바로 여기다. 기도와 선행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최종적인 지복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창조의 의지는 신의 존재에 속해 있는 선성(善性)이다. 존재의 상태가 무의 상태보다 선하다는 것은 서양 사상에서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는 생각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분이 선하셔서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는 존재하는 그 만큼 선하다고 말했다. 하나를 거부하고 여럿을 긍정한 고대 사상에서 스토아주의를 빼놓을 수 없다. 스토아 철학 사상은 당시의 그리스 로마인들의 영혼과도 같았다. 기독교인들이 플라톤 사상에서 교리의 철학적 내용을 따왔다면 스토아 사상에서는 실천적 풍모를 카피했다. 


스토아주의자들에게 세계는 로고스의 표현이다. 이 세계관은 헤라클레이토스의 것이기도 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만물유전의 강에 운명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는 세계의 법칙, 다수의 물체들이 운동하는 물리적인 경과를 의미한다. 스토아주의자들은 보편자(본질)를 개별적인 것(개쳬)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놓았을뿐 부정하지는 않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보편적인 개념으로서의 인간에 상응하는 것은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대개의 철학자들은 철학의 근본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일(一)과 다(多) 즉 하나와 여럿의 문제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다.(155 페이지) 데카르트는 감각적 다양성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생각하는 나(코기토)의 획실성만을 진리의 근거로 보았다는 점에서 일원론자라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인간과 그 이성적 능력을 중시하긴 했지만 데카르트와 달리 그것을 모든 것의 토대로 특별하게 취급하지는 않았다.(157 페이지) 그래서 이들에게는 인간보다 자연 또는 세계의 모습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라이프니츠와 유사하게 스피노자에게서도 하나는 곧 여렷이다. 신 즉 자연이 그 예이다. 신이라는 일자는 곧 자연이라는 다자와 같다는 의미다. 스피노자에게 세계는 실체, 속성, 양태라는 근본적인 세 개념으로 갈무리된다. 실체는 개별자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립하는 하나의 존재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바 실체란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이 신조차 자연의 다양성 안에 놓이면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스피노자에게 자연은 신적인 실체가 변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실체의 변용이다. 


물론 변용한다 해도 실체는 그대로 남는다. 실체는 양태로 변용된다. 양태는 사물들의 모양새 즉 갖추어진 꼴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지각에 해당하는 매개체가 속성이다. 지성이 대상을 지각할 때 대체로 우리는 그 대상의 공간적 속성 즉 연장(延長; extention)을 파악한다. 리쾨르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를 의심의 세 대가(大家)로 불렀다. 동일성이라는 큰 이념을 의심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동일성이란 하나의 모습을 항구적으로 유지하는 것이고 차이란 여러 모습으로 생성, 소멸하는 것이다.(169 페이지) 생성이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차이 나는 것이다. 동일한 것은 하나의 동일성을 의미하고 차이 나는 것은 여럿의 다양성을 의미한다. 들뢰즈의 사유에서 어떤 것들이 대립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에 비해 거리가 멀다, 성기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대립을 사물의 본질로 보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재현(representation)된 것 즉 우리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뿐이다.(179 페이지) 실제 사물들의 세계는 그렇게 대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작은 차이들과 큰 차이들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들뢰즈는 모든 것을 차이로서 긍정하지만은 않았다. 들뢰즈에게 대립은 없지만 적대는 존재한다. 들뢰즈의 사유가 적대하는 것은 동일성의 사유, 노예적 사유, 재현적 사유다. 이 셋은 공히 어떤 큰 범주 또는 큰 대상에 의존하는 부자유한 사유의 이미지라고 들뢰즈는 부른다. 부정하기의 반대인 거리두기는 긍정의 역량으로서 우월한 힘이며 부정이 아니라 적대를 인정한다. 들뢰즈에게 하나와 여럿은 이분법적으로 대립한다기보다 여럿으로서 하나를 펼쳐내고 하나로서 여럿을 함축하는 긍정과 적대의 운동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대립하는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들과 어울려 펼쳐지고 함축하면서 긍정하고 적대하는 관계다. 변증법의 대립이라는 성긴 그물은 차이의 조밀한 그물보다 열등하다.(173 페이지) 신유물론은 의심의 대가들에 이어 차이의 대가들을 계승한다. 들뢰즈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아 실재의 본모습을 바라보고자 하는데 이분법을 극복하고 거기에 차이들의 운동이라 할 수 있는 횡단성(transversality)을 도입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서로 함축하고 함축되는 운동이 횡단성이다. 여기에는 어떤 위계도 없고 오로지 실재하는 것들의 아나키한 활동들이 있을뿐이다. 이 관계는 인간 ? 기계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기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에 제한받는 수동적 존재다. 신유물론은 중심적인 하나를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연결되지 않는 여럿도 인정하지 않는다. 연결 즉 관계 이전에 홀로 서 있는 어떤 주체나 객체도 인정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고 했다면 실재는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하나/ 여럿이 된다. 철학에서 무한은 infinitude보다 정해지지 않음이라는 의미의 indeterminate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아페이론은 무규정, 비결정이란 의미다. 무질서는 아페이론이고 질서는 페라스가 된다. 페라스는 한계라기보다 규정성을 의미한다. 고대철학자들의 무한은 외적으로 무한히 뻗어나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적으로 무한히 분할가능하다는 의미다.(202 페이지) 제논의 역설은 스승인 파르메니데스가 다(多)와 운동을 부정한 데 대해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 개발한 논변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은 피타고라스에 반대한다. 피타고라스는 많음을 설정하는데 이 많음은 불연속적이다. 기하학적으로 수를 나타내는 점들 사이에 텅 빈 공허가 있듯 수의 계열에 있어서 하나의 단위에서 다른 또 하나의 단위로 가는 데는 갑작스러운 도약이 존재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는 기본적으로 기하학적 연속성을 전제한다. 그것은 꽉 차 있으며 어디서든 단속되지 않고 연속적이다. 


스피노자에게 신 = 실체 =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한한 것이 유한한 곳 안에 속속들이 펴져 있다. 양태들은 실체인 신의 표현이며 이 표현 안에서 무한한 것은 유한한 것과 화해한다. 이를 변용이라 한다. 무한자로서의 신은 연장(延長; 물질)과 사유(思惟; 지성)로 변용된다. 연장으로 변용된 것이 세상 만물이며 사유로 변용된 것이 지성이다. 실체 일원론에 따르면 이 두 가지는 분리되어 있을 수 없다. 스피노자는 이 두 가지를 한갓 자연으로 본다. 중요한 것은 자연은 유한한 양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은 무한하다. 무한한 신이 유한한 자연에 내재할 때 모든 것이 소진되지는 않을 것이다. 스피노자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신적인 무한은 무한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중 극히 일부인 연장과 사유가 이 세계에서 표현될뿐이라고 말했다.(209 페이지) 저자는 비단 철학자나 수학자가 아니라도 일상인으로서의 우리는 스스로의 유한성을 늘 깨달으면서도 어떤 무한한 존재, 무한한 사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한다.(215 페이지) 


근대를 지나 포스트 근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제 자연 자체의 무한이 아니라 문명 도는 기술의 무한성에 당혹감을 느낀다. 무한 즉 아페이론에는 법칙을 벗어나는 우발적 사태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유한 즉 페라스는 한도를 정하는 법칙적인 필연성을 요청한다.(219 페이지)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자들에세 그것은 로고스와 모이라로 대표되었다. 로고스는 자연의 질서 내지 운동을 가리켰다. 모이라는 불가피하고 불수의한 힘으로서의 운명이다. 스토아학파는 운명을 필연성으로 생각했던 철학 학파였다. 초기 스토아 철학자들이 활동했던 시기를 헬레니즘기라 부른다. 스토아 철학은 헬레니즘기뿐 아니라 로마 제국 말기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시간 동안 이어졌다.(224, 225 페이지)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의 사망에서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 이르는 헬레니즘기의 주류 철학은 스토아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이었다. 이 시기를 지나 두 학파는 기독교에 의해 오랜 시간 사장되었다. 스토아철학의 핵심인 존재론은 잊히고 앙상한 도덕철학만이 남았다. 초기 스토아철학의 대표인 제논(Zeno of Citium)과 크라시포스는 누구보다 장녀과 존재에 관심을 두었으며 그것을 운명이라고 여긴 철학자들이다. 제논은 제논의 역설의 제논(Zeno of Elea)과 다른 사람이다. 스토아철학의 운명(fatum)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모이라와 상당히 다르다. 한탄의 대상이었던 모이라는 스토아철학에 와서 파툼이 된다. 파툼은 로고스 즉 세상의 이법(理法)이다. 이는 물질적인 법칙이다. 이를 프네우마라 한다. 숨, 숨결 정도의 의미다. 


스토아철학의 핵심은 ‘운명 = 로고스 = 프네우마 = 불‘이다. 프로타고라스가 말한 인간은 만물의 척도란 말에서 인간은 수동적이다. 척도로서의 진리가 인간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데카르트에게서 나의 주체는 현저하게 주도성을 띤다.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타자 또는 타인이었다. 그에게 타인은 우리가 세상을 지각할 때 배경이 되는 존재의 의미를 가졌다. 타인의 첫 번째 효과는 내가 지각하는 각각의 대상과 생각하는 각각의 관념 주위에서 바탕을 조직한다는 점이다. 한 생애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극히 일부다. 그렇기에 우리가 보는 세상은 열에 아홉은 나의 시선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다. 이 논의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나의 시선으로 구성한 세계상은 거의 대부분 나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이고 이에 따라 나는 내가 아니라 타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323 페이지) 


이는 데카르트적 자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근대인들에게는 상당히 불안하고 섬뜩한 결론이다. 여기서 나의 존재를 보증하는 코기토는 유령처럼 느껴진다. 들뢰즈의 생각은 나는 늘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말을 생각하게 한다. 과연 나의 욕망이 나의 고유한 내면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욕망이 본래부터 내 것이었을까?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은 주로 자연철학 즉 존재론 위주의 사유를 전개했다. 소크라테스 이후에도 인식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보다는 윤리학이나 정치철학이 전경(前景)을 차지하게 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이르러 인간 인식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340 페이지)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회의주의에 대응하면서 인간 의식의 심층적인 면모를 드러내 보이려고 했고 플라톤주의는 근대에 이르러 데카르트에서 스피노자에 이르는 합리론으로 계승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플라톤식의 인식론은 비판받기 시작했다. 전면에 선 것이 경험론이다. 이 경험론의 핵심을 이어받으면서 칸트는 자신의 이성비판을 전개했고 20세기에 와서 다시 합리론적 경향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바슐라르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와중에 존재론은 베르그송이라는 거대한 산맥을 형성하면서 인식론과 일정한 길항(拮抗)관계를 형성했다.(340 페이지)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 나오는 논의들은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앎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떻게 이루어지고 또 궁극적인 앎이란 무엇인지 말해준다. 앎은 경이에서 시작되어 추론과 기억에서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다. 


어떤 앎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언제나 무지의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무지를 다시 인정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앎과 무지에 대한 고대 철학자들의 언어들을 넘어 나아가면 엄청나게 거대한 앎 ? 무지의 철학자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가 바로 칸트다.(351 페이지) 존재론의 개념들은 범주라고 일컬어진다. 철학은 사실상 범주론을 통해 정점에 이른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을 밝혀 드러내는 분과는 형이상학적 존재론이다. 여기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존재 또는 존재자이고 이를 근원적으로 분류, 탐구하는 것이 범주론이기 때문이다. 범주라는 말을 철학적 의미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플라톤의 최상위 유는 다섯 가지다. 존재, 운동, 정지, 동일자, 타자가 그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범주론은 인식론적 전회를 거쳐 일신된다. 그 중심에 칸트가 있다. 전회라는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이 존재자의 존재를 탐구하는 방향에서 추구되었다면 칸트의 범주는 존재에서 인식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359 페이지) 그래서 범주는 인간 주체의 인식 가능성과 관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인식 능력이 존재자들과 상응한다는 전제하에 성립한다면 칸트에게서 그것이 역전되어 존재자들이 인식 능력에 상응한다는 전제가 나타난다. 칸트는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때 인식 능력(지성)은 대상을 구성하는 주체다. 이 구성 작업이 인식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보장한다. 감성을 통해 받아들여진 재료인 잡다(雜多)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지성의 범주다. 


칸트는 범주표를 도출하기 전에 그것이 우리 인식 능력인 판단력으로부터 나오는 종합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제시했다. 지식의 한계에 대해 더욱 철저하게 깨달은 철학자는 중세의 부정신학자 니콜라우스 쿠사누스다. 인간이 아무리 신에 대한 앎을 조장하고 거기에 접근하려 해도 궁극적으로 신에 대해서는 완전히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 쿠사누스는 원 안의 다각형을 예로 들었다. 원 안에 다각형을 아무리 많이 그려넣어도 원이 되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정신도 절대적 진리에 접근하기는 해도 그것에 적합한 진리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365 페이지) 인간의 이성은 동일률에 근거한다. 모순적인 것이 동시에 참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무한자를 파악하려 할 때 모순율은 무용지물이다. 


쿠사누스에 따르면 유한한 인간은 진리에 만족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교화된 무지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무지의 긍정이 지적 허무주의를 초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366 페이지) 쿠사누스의 교화된 무지는 과학과 수학 연구의 원동력이 되었다. 무지는 더 정교한 지성의 연마를 촉진하는 기반이 된다. 쿠사누스는 이성이 불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지하기 때문에 그러한 무지를 깨치고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비록 그것에 한계가 있을지라도 무한한 것에 접할 수 있다면 추진하라는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무지에 대한 무지다. 무지에 대한 무지는 무지의 최대치이고 무지에 대한 앎은 알의 최소치다. 여기에서 말하는 앎은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고 무지의 최대치와 앎의 최소치 사이에는 아주 미세한 차이만이 있다.(376 페이지) 칸트는 인식 주체의 시야를 벗어난 것을 물자체(物自體)라 이름했다.(378 페이지) 


현상은 우리 앎의 최대치이고 물자체는 무지의 최대치다. 최근 철학사상의 첨단은 신유물론이다. 가장 중요한 인물이 카렌 바라드다. 바라드의 철학을 행위적 실재론이라 한다. 바라드는 이 사상을 존재-인식론이라 불렀다. 존재론과 인식론이라는 철학의 분과는 데카르트 이래 분화되어 칸트에 이르러 완전히 다른 영역이 되었다. 이 이후 사람들은 이 두 영역이 완결된 체계로서 때로 대립하고 때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바라드는 이 두 영역이 이미/ 언제나 하나라고 선언한다. 바라드는 이론물리학자였다가 철학자가 된 사람으로 양자역학에 기반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바라드는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에 기반하여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것은 불충분하다고, 더 신랄하게 말하면 그릇된 것이라고 본다.(389 페이지) 


대안은 하이젠베르크의 스승인 보어에게서 나왔다. 보어의 이론은 하이젠베르크의 그것과 달리 미결정성 원리 또는 상보성 원리라고 불린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발표되자 다소 우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해석이 아주 중요한 부분에서 잘못된 것인데 대중적으로 너무 급격하게 유명세를 타는 바람에 그에 대한 논의가 붇혀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서 보어의 상보성 원리는 부차적으로 다루어졌다. 하이젠베르크의 핵심적인 주제는 실험 상황에서 입자의 운동량을 측정하기 위해 무언가(예컨대 빛)을 쏘면 그것에 의해 측정이 방해받는다는 사실이다. 방해라는 생각에 기반한 이런 분석은 하이젠베르크를 불확정성 관계가 인식론적 원리라는 결론으로 이끌었다. 이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보어에게 중요했던 것은 방해가 아니라 입자의 속성을 어떻게 결정하는가였다.(390 페이지) 


가령 그 입자가 방해를 받음으로써 빨강(입자의 경우에는 운동량과 위치)이 빨강으로 남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빨강이라는 특성 자체가 이미 미결정된 상태라는 것이다. 보어가 보기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우리가 운동량과 위치라는 이미 정해진 결정값이 있고 그것에 대해 분명하게 알 수 없다고 보는 점에서 오류를 범한 것이다. 보어는 그런 이미 정해진 결정값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장치를 통해 측정하느냐에 따라(위치 측정을 위한 장치냐 운동량 측정을 위한 장치냐에 따라) 둘 중 하나의 측정값만이 불확실하게 결정되며 다른 하나는 미결정 상태에 놓인다고 말한다. 이 동일한 의미에서 두 측정값의 존재는 서로 상보성 다른 말로 상호배제성을 띤다.(391 페이지) 철학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한 확실한 앎이 있다고 전제하지만 사실상 그 대상은 직접 실험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앎도 존재하지 않고 안다고 해봐야 기껏 그 부분만을 알뿐이다. 


”보어에게 실재적인 주제는 미결정성이지 불확정성이 아니다. 그는 의미론적이고 존재적인 용어로, 그리고 추론적인 인식론적 용어로 위치와 운동량간의 상호관게를 이해한다. 보어의 미결정성 원리는 다음과 같이 진술될 수 있다. ’상보적 변수들의 값(위치와 운동량 같은)은 동시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 주제는 인식불가능성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동시적으로 존재한다고 알려질 수 있는 것에 관한 질문이다.‘“  중요한 것은 안다는 것(의미론적인 것)과 모른다는 것(존재론적인 것)은 상보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이다. 상보적이란 말에는 상호배제적으로 보완한다는 의미가 있다. 상호배제적으로 관계 맺는 무지는 곧 미리 결정된 것은 없다는 것이고 때문에 어떤 것에 대한 앎은 동시에 다른 것에 대한 무지를 필연적으로 야기한다.(39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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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소들의 놀라운 이야기 - 우리 몸과 우주를 형성하고, 세상을 바꾸어 온 중요한 존재에 관하여
    아니아 뢰위네 지음, 홍우진 옮김 / 브론스테인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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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아니아 뢰위네는 물리학과 교수다. 그런 그가 원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나의 경우 천문학 공부를 하다가 화학 공부의 필요성을 느꼈다. 핵에서 양성자 일부가 없어지거나 새로이 추가되면 원자는 전혀 다른 원소가 된다. 2개의 양성자를 가진 헬륨 핵 3개가 만나 6개의 양성자를 가진 핵이 되었는데 이것이 탄소다. 탄소의 핵은 다른 헬륨 핵과 융합하여 8개의 양성자를 가진 핵이 되었는데 이것이 산소다.(18 페이지) 핵 속 양성자 수가 원자가 어느 원소인지 결정한다.(15 페이지)

     

    철보다 훨씬 무거운 니켈, 구리, 아연 같은 원소들이 폭발(초신성)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우주 속으로 던져지지 않은 물질 즉 폭발의 찌꺼기들이 붕괴하여 중성자별이 되었다. 중성자별끼리의 충돌로 금, 은, 백금, 우라늄 등의 다수의 무거운 원소들이 생겨났다. 별들 내부에서 수소와 헬륨이 융합하여 새로운 원소가 되었고 우주에 존재하는 수소와 헬륨의 총량은 더 무거운 원소들의 양이 증가하면서 꾸준히 감소했다.(20 페이지) 지구가 더 바깥쪽 우주의 냉기 속에서 점차 냉각되어 감에 따라 철, 금, 우라늄 같은 무거운 원소들이 액체 구형의 중심으로 가라앉았다.

     

    실리콘과 우리 몸의 주요 구성 요소인 탄소, 산소, 수소, 질소 같은 더 가벼운 원소들은 가장 바깥쪽 가장자리에 남게 되었고 결국 가스 대기를 가진 행성의 둘레에 규산 함유 암석으로 이루어진 단단한 지각을 형성하였다.(22 페이지) 우리 인간은 행성의 중심부로 가라앉은 금속들로부터 혜택을 받지 못할 뻔했다. 그것들이 지구 내부 깊고 먼 곳으로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더 단단해진 지각 때문에 운석에 포함된 금속이 지구 중심부로 가라앉지 못하고 지구의 지각에 부딪힌 후 튕겨져 나왔다. 이것들이 오늘날 우리가 자동차나 포크를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는 금속이다.(23, 24 페이지)

     

    지금도 우리 행성의 지각은 용융상태로 점성을 띤 암석층인 맨틀 주변을 떠다니는 여러 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표 위는 매우 차가워서 녹은 암석이 판들 사이의 금이 간 곳을 뚫고 나타나면 고체로 굳어서 새로운 지각이 된다. 이 판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움직이면서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고 있다.(24 페이지) 지구의 판들이 어울려 추는 춤은 판구조론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의 태양계에서 지구는 매우 활동적인 표면을 가진 유일한 행성이다. 오직 지구의 지각만이 춤을 추고 있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이 춤이 없었다면 지구는 죽은 행성이었을 것이다.

     

    판 구조는 지구의 컨베이어 벨트이며 우리 행성을 흥미진진한 장소로 만드는 모든 것의 이면에 존재하는 추진력이다. 이 움직임은 물과 바람에 의해 바다로 옮겨져 수백만년 동안 해저에 묻혀 있던 것을 표면으로 다시 들어 올림으로써 지구의 물질들을 재순환시킨다.(24, 25 페이지) 광합성이 시작되기 전 태양은 많은 양의 융해된 철을 함유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오늘날 물과 접촉한 철은 쉽게 분해되는 붉은색의 거친 표면을 매우 빠르게 드러낸다. 이 붉은 물질은 철과 산소가 화학적으로 결합한 것으로 흔히 녹이라고 부른다.

     

    최초의 광합성에서 생산된 모든 산소가 철과 반응한 결과 녹이 생겼고 이는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결국 이 녹은 줄무늬 모양을 한 붉은색의 두꺼운 암석층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붉은 암석을 파내 큰 화로에 넣고 철로부터 산소를 제거한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철 금속을 사용하여 칼이나 열차의 선로를 제작한다.(28 페이지) 바닷물이 산소로 포화함에 따라 산소는 해양에서 대기 중으로 흐르기 시작했다.(29 페이지) 초기 대기에는 메테인이 풍부했다. 메테인은 발산되는 다량의 열을 흡수하여 지구 표면을 따뜻하게 유지한다.

     

    대기 중 산소 가스가 메테인을 분해하기 시작하면서 온실효과는 점점 약해졌고 행성 전체는 빙하기로 접어들었다. 우리 조상들은 영양가 높은 골수를 얻기 위해 동물의 뼈를 깨뜨리는 데 최초의 석기를 사용했다. 금속을 추출하고 사용하는 인간의 능력은 지구상 모든 동물 가운데 유일하다.(41 페이지) 어떤 화학반응이든 원자들 간에는 전자 교환이 일어난다. 일부 원소들은 한 개 이상의 전자를 제거하는 데 필사적이지만 어떤 원소들은 다른 원소들에서 빌려올 수 있는 여분의 전자를 계속 탐색한다. 그러나 금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만족하기 때문에 다른 금 원자들과 함께 뭉쳐서 순수한 금속을 형성하기 쉽다.(48 페이지)

     

    금은 자연 상태에서 금속 형태로 금속 형태로 생겨나기 때문에 땅에서 혹은 종종 강바닥에서 단순히 주워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금 광맥을 포함한 바위가 부서지면 금은 강바닥에 가라앉는다. 정말 커다란 덩어리가 때때로 있기는 하지만 강이나 산에 있는 대부분의 금은 다른 돌과 섞인 채로 작은 입자들로 존재한다. 금광석은 전체에 퍼져 있는 작은 금 알갱이와 함께 흔히 많은 양의 하얗거나 투명한 석영을 함유한다.

     

    돌은 가열되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팽창한다. 이것이 돌 내부에 그물망 모양의 크고 작은 틈을 만들어 돌이 쉽게 부서지게 한다. 오늘날 세계 여러 곳에서 채굴된 광석에 존재하는 금의 평균 농도는 1톤당 1 - 3그램이다. 금은 훌륭한 전도체이고 녹이 슬지 않으며 대부분의 다른 금속과 함께 쓰여도 전도성을 방해하는 표면 코팅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전기 회로판에도 사용된다. 철은 우리 신체의 운반 체계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 성인의 신체는 약 4그램의 철 원자를 함유한다.

     

    자신의 전자를 붙들고 았는 것을 선호하는 금과 달리 철은 무언가를 거져 주면 더 행복해하는 관대한 창조물이다. 산소는 항상 다른 원소로부터 여분의 전자를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러한 철의 성질은 철과 산소 간의 긴밀한 우정을 형성하게 한다.(72 페이지) 혈액이 허파에서 공기와 접촉할 때 산소는 혈액 속 분자에 묶여 있는 철 원자에 들러붙을 기회를 얻는다. 이런 식으로 혈액은 산소를 신체 먼 곳으로 운반한다. 세포 속에는 철과 산소가 다시 떨어지게 만드는 분자들이 있다.

     

    혼자가 된 철은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다시 허파로 주입되어 새로운 산소와 결합한다. 혈액 속에 철이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호흡을 많이 해 봐야 소용없다. 열심히 들이마셔 허파로 들어온 산소를 몸속에서 전혀 이용할 수 없다. 우리 몸은 스스로 새로운 혈액세포를 쉽게 만들어낼 수 있지만 철은 만들 수 없다. 철이 산소에 전자를 전해 주면서 결합하게 되면 철과 산소를 분리하는데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인간은 이 결합을 뚫고 철 원자에게 전자를 돌려주는 법을 배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방법을 사용해야만 철 원자를 무기와 도구를 만드는 금속으로 바꿀 수 있다.

     

    석기시대가 전 세계에서 돌이 모두 고갈되었기 때문에 끝난 것이 아닌 것처럼 철기시대도 철이 다 사용되기 전에 막을 내릴 수 있다. 우리의 후손들은 강철이 다시 한번 사치스러운 상품이 되기 전에 철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만든 새롭고 더 좋은 사회기반 시설을 개발할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95 페이지) 구리는 전도율이 뛰어날뿐 아니라 천천히 부식되고 생산에 상당히 저렴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우리가 전기를 사용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금속이다.(101 페이지) 우리 몸에도 구리가 필요하므로 미량의 섭취는 문제되지 않는다.

     

    구리는 철기시대보다 오래전부터 인간 사회의 일부분이었다. 금과 함께 구리는 자연에서 순수한 금속 형태로 발견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금속 중 하나다.(102 페이지) 구리는 지구 지각에서는 드문 원소다. 그렇지만 지각 속의 구리는 다양한 지질학적 과정을 통해 쉽게 운반되고 농축될 수 있다. 구리는 전기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는 유일한 금속은 아니다. 많은 경우 알루미늄이 좋은 대체재가 된다.(105 페이지)

     

    유리는 자연에서 발견될 수 있다. 화산 분출 때 녹은 암석이 공기 중으로 배출되어 냉각된 후 원자들이 결정화되면서 형성될 수 있다.(134 페이지) 지각판이 서로 비벼 대어 지진이 발생하면 마찰로 인해 매우 많은 열이 발생해 암석의 얇은 층이 녹고 지각 운동이 멈추면서 빠르게 고체화한다. 그 결과 우리는 암석에 있는 유리 같은 물질을 얇은 수맥 형태로 볼 수 있다. 또는 거대한 운석이 지구 표면과 충돌할 때 바위를 녹이기에 충분할 만큼 온도가 높아질 수도 있다. 이들 모든 과정의 공통점은 돌 속의 모든 광물을 녹일 만큼 온도가 높아질 때 구리가 형성된다는 것이다.(134 페이지)

     

    용해된 물질은 원자들이 정돈된 결정 구조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을 겪을 틈도 없이 빠르게 냉각될 때 결국 무작위적인 위치에서 멈추게 된다. 이것이 유리의 정체다. 이 세라믹 물질 속에서 원자들은 온통 혼란스러운 상태다. 우리가 걷고 있고 오르고 폭파하여 터널을 뚫고 있는 암석 또한 세라믹 물질이다.(137 페이지) 부싯돌은 날카로운 도구를 만들 때 좋은 돌이다. 소석회(수산화칼슘)를 모래, 자갈과 섞은 것이 최초의 콘크리트였다.(13 페이지) 땅 위의 석회암을 반응성 소석회 가루로 만든 것은 번개나 산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소석회 가루가 물과 접촉하면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140 페이지)

     

    우리가 미노스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들의 전설이나 신비로운 문학작품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만의 독특한 콘크리트 기술 때문이다. 그들은 수경시멘트를 개발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소석회와 물로 만든 석조물은 시멘트가 공기 중 이산화탄소와 반응할 때까지 굳지 않는 반면 수경시멘트는 물과 반응하면 암석처럼 단단해진다. 이것이 경화 과정을 더 빠르고 더 조절할 수 있게 만들며 콘크리트가 수중 구조물에도 쓰일 수 있고 순수한 석회암으로 된 것보다 훨씬 강한 건축물을 만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141 페이지)

     

    미노스인은 석회암을 화산재와 섞어 콘크리트를 제조했다. 지중해 섬들에는 화산재가 풍부했다. 재와 소석회의 혼합물이 물과 섞이면 칼슘, 실리콘, 물은 서로 결합하여 콘크리트 속 모래 알갱이 사이의 공간을 채우는 강력한 물질로 변한다. 이런 식으로 콘크리트는 강해지고 방수의 성질을 띠게 된다. 로마의 콜로세움이 2000년이 지난 현재도 튼튼한 이유는 화산재를 섞은 콘크리트 덕분이다.

     

    나무는 자연이 만든 초고층 빌딩이라 할 수 있다. 셀룰로스(cellulose; 섬유소)와 리그닌(lignin; 목질소)이라는 두 가지 탄소 분자로부터 뻣뻣함과 힘을 얻는다.(160 페이지) 리그닌과 셀룰로스의 결합은 나무의 식물세포 구조와 함께 나무에 특별한 성질을 제공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방법으로 숲 속에서 칼륨이 손실되면 숲의 생명체 수는 감소한다. 다행인 사실은 그 외에도 다른 칼륨의 원천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숲에 존재하는 바위다. 특히 암반은 생명체에 필요한 많은 영양분을 함유한다. 아마도 이 암석은 한때 해양의 바닥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에 존재하던 숲의 미세한 잔해가 산재해 있는 바위일 수도 있다.(183 페이지)

     

    이 바위가 풍화작용을 겪어 잘게 부서지면 서로 다른 종류의 곰팡이와 박테리아가 매우 작은 광물질 입자 표면에서 작용하여 생명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방출할 수 있다. 바위의 풍화작용에서 오는 영양분의 공급보다 영양분의 손실이 커지지 않는 이상 그 지역에서 생명체가 영원히 순환할 것이다. 우리는 식량을 생산하고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이 필요할뿐만 아니라 땅에서 금속과 다른 원소를 추출하고 비료를 만들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자연은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를 위해 깨끗한 물을 생산해낸다. 하나는 태양이 바다로부터 또는 칼륨 광산에 마련된 증발 수조에서 수분이 증발하게 하는 것이다.

     

    수증기는 육지 위의 기류를 통해 운반되어 비가 되어 내리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도록 개울이나 강에 모인다. 자연은 더러운 물을 정화할 수 있는 자체적인 필터를 가지고 있다. 물이 땅을 통과해 흐를 때 박테리아와 다른 미생물이 물에 용해된 물질을 분해한다. 다른 이물질들은 물이 흘러 지나갈 때 모래나 점토에 들러붙을 것이다.(187 페이지)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는 대부분(78 퍼센트) 질소로 이루어져 있어서 항상 질소가 우리에게 충분히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문제는 대기 중의 질소 가스가 서로 강력하게 결합한 두 개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신체는 질소 원자들을 서로 떨어뜨려 사용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단순히 질소를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는다. 미생물의 관여 없이 대기 중의 질소를 식물이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자연 과정은 번개가 내리치는 것이다. 번개가 칠 때 매우 많은 에너지가 방출되어 공기 중의 질소와 산소가 서로 반응하여 새로운 분자를 형성한다. 없어서는 안 될 요소 중 마지막인 인은 대기 중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물에서도 그리 많은 양이 발견되지 않는다. 광물질의 표면에 들러붙는 경향이 있고 물에 용해되는 것보다 고체 형태로 있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라면 고체 암석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인 원자는 사다리의 계단(DNA)이 서로 연결되게 해준다. 인이 없다면 DNA도 없고 생명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식물의 광합성은 지구상의 우리가 삶에 연료로 사용하는 모든 태양에너지를 포획하는 과정이다. 식물은 태양에너지가 다시 우주로 사라지기 전에 먹이사슬을 통해 우회하도록 한다.(206 페이지)

     

    지구는 다른 에너지원을 가지고 있다. 지구 지각에서 가장 무거운 원소 중 일부는 가끔 분열하는 원자핵을 가지고 있다. 이들 방사성 물질은 중성자별들이 서로 또는 블랙홀과 충돌할 때 형성될 수 있다. 원자핵이 분열할 때 발생하는 열은 지구 지각을 덥히고 지표면으로 흘러나간다. 광산을 채굴할 때 이를 관찰할 수 있다. 땅을 깊이 팔수록 온도는 점점 올라간다.(214 페이지) 지구에서의 열 흐름 구모는 매우 작다. 방사성 물질들이 에너지를 매우 느리게 방출하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년간 인간은 이들 과정이 더 빨라지게 만드는 방법을 개발해왔다. 핵발전소의 원자로가 고안되어 방사성 원소인 우라늄의 단일 핵이 쪼개지면 인접한 다른 우라늄 핵도 분열하게 된다. 그 결과 점점 더 많은 반응이 일어난다. 태양으로부터 우리를 향해 지속해서 흐르는 에너지는 태양 내부의 핵융합 반응을 통해 방출된다. 이것은 수소와 헬륨처럼 가벼운 원소의 핵이 합쳐져 다른 더 무거운 원소가 되는 과정에서 남는 에너지다. 융합반응을 위해서는 핵들이 엄청난 힘으로 함께 압력을 받아야 한다.

     

    태양 내부 온도는 섭씨 1500만도 정도이며 지구 표면 공기압력의 3400억배에 이르는 압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지구상의 원자로에서 만들 수 있는 상태를 뛰어넘는다. 보통의 수소는 하나의 양성자만 가지는데 이 수소가 하나 또는 두 개의 추가 중성자를 가지는 더 무거운 유형의 수소에 의해 대체된다면 이는 더 극복하기 좋은 문제가 된다. 이 변종 수소를 중수소와 삼중수소라 한다. 중수소 원자의 무게는 평범한 수소의 2배다. 이것이 물 분자 속에서 수소의 위치를 차지하면 이루는 중수(重水; heavy water)라는 것을 얻게 된다.

     

    중수는 플루토늄으로 핵무기를 생산하는 데 유용하다. 삼중수소는 중수소의 변종으로 형성된 지 몇 년 안에 분해되어 다른 원소가 되는 극도로 불안정한 물질이다. 핵 원자로에서 전자들이 원자에서 분리되어야 원자핵이 서로 융합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매우 뜨거워 전자들이 원자에서 분리된 가스를 플라스마라 한다.

     

    우리 태양계에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다른 행성은 없다. 생명체는 우리가 거주하는 행성을 흙과 물, 숨 쉴 수 있는 충분한 산소, 해로운 방사선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가장 바깥쪽 대기권의 오존층을 갖추고 살 수 있는 곳으로 변화시키는 데 수억 년이 걸렸다.

     

    우리의 근육과 골격, 혈관은 우리가 지구에서 받는 중력에 정확히 적응되어 있다. 우리는 먼저 다가올 수십년 또는 수 세기 동안 지구상의 풍요롭고도 복잡한 사회를 어떻게 하든 여전히 유지해야 한다.(252 페이지) 계속되는 기하급수적 성장은 결국 태양과 지구 지각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양의 에너지를 요구할 것이다. 결국 영원한 기하급수적 경제 성장은 그에 상응하는 에너지를 사용하는 성장을 수반할 수 없다.(26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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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문해력 수업 - 누구나 역사를 말하는 시대에 과거와 마주하는 법
    최호근 지음 / 푸른역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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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학자 최호근의 책이다. 저자는 역사란 물건 가득한 초대형 창고가 아니라 약간의 완성품, 단순 가공이 필요한 중간재들, 장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소재와 원료들이 질서 없이 뒤섞여 있는 끝없는 대지라고 말한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할 것입니다란 피델 카스트로의 말 이후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카스트로의 선례를 따라 민주와 민족을 위해 투쟁한 죄로 사형 받는 자리에서도 오히려 영광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문제는 역사의 법정이란 말이 남용되었다는 점이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행위 주체로서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27 페이지) 나는 이를 조금 바꿔 조선이 성리학 때문에 망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성리학 역시 행위 주체가 아닌 바 조선 망국의 책임은 성리학에 있지 않고 성리학 일변도의 나라를 만든 사람들에게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전제는 그들의 말이 맞다면 말이다. 역사의 법정과 관련한 이야기는 다음의 이야기와도 공명한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지당한 말이다. 단 아무런 대가도 없이, 혹은 그 대가로 자기 자리나 목숨을 잃을 것을 각오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경우만 그렇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거짓으로부터 참을 구별해내기 위해 노력하는 양심적 학자들이 있을 때만 그렇다. 진실 규명을 기본으로 삼고 진실의 재현을 업으로 삼는 역사가들이 아니라면 거짓이 참을 가리는 경우도 허다하다.’(129 페이지)

     

    저자는 역사에 힘입어 발언하고야 말겠다는 누군가의 의지와 결단이 없다면 역사 스스로 말하는 법이 없다고 말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역사에 기반을 둔 오리엔테이션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우리는 시공간적 범위를 넓게 잡아 다양한 경우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자에 의하면 역사가는 온전한 과거 재현을 위해 엄격한 방법과 절차를 준수하도록 훈련받은 학자인 동시에 당파적 현실을 살아가는 시민이다.(42 페이지)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개의 요청에 어떻게 응답할지 보여준 사람이 마르크 블로크다. 나치 독일이 조국 프랑스를 침략하자 53세의 나이에 참전한 그는 프랑스가 점령당한 후 레지스탕스 활동에 투신했다가 체포되어 해방되기 직전 총살당했다. 블로크는 학문과 현실 모두에 충실했던 인물이다.

     

    2017년 2월 2일 중앙일보가 울산과학기술원 게놈연구소의 연구결과를 인용하면서 한국인의 뿌리는 (북방계가 아닌) 혼혈 남방계라고 보도했다.(47 페이지) 3만년전에서 4만년전 사이 동남아시아와 중국 동부 해안을 거쳐 극동 지방에 들어와 북방인이 된 남방계 수렵 채취인과, 신석기시대가 시작된 1만년전에 같은 경로로 들어온 남방계 농경민족의 피가 섞여 한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임진 - 한탄강 유역 구석기인들의 모습을 왜 서양인처럼 만들어 전시하느냐는 이의제기를 한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어서다. 혼혈 남방계라는 말도 중요하지만 3만년전에서 4만년전 사이, 1만년전에 유입되었다는 내용이 더욱 중요하다. 현재 우리는 임진 - 한탄강 유역 구석기인들과 무관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자의 날카로움을 느낄 수 있는 글이 가득하다. 가령 ‘동아시아의 역사가 과연 긴장과 갈등, 대립과 충돌의 연속이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역사가 그랬다기보다 역사서술이 그랬을 것이다.’란 말을 보라. 과거는 역사책을 통해 후세에게 두 가지 면에서 스승 노릇을 한다. 귀감으로서 스승 역할, 반면교사로서 스승의 역할이 그것이다. 이 중 귀감을 보자. 귀는 거북 귀(龜)로 거북 등을 불에 구워 갈라지는 상태를 보고 장래의 일을 예측했던 데서 비롯된 말이다.

     

    저자는 역사 자체는 엄밀한 의미에서 스승 역할을 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동일한 사건, 인물, 행동에서 얻어내는 교훈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저자는 믿음의 체계와 상징적 행위가 사람들의 삶에 분명하게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 역시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93 페이지) 연성(軟性) 사실이 그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과거 세계는 우리 현재의 삶과 마찬가지로 다성(多聲), 다채(多彩), 다면(多面), 다양(多樣), 다층(多層)으로 이루어진 복잡계였기에 현재 속에서 과거를 되살리는 역사가의 재현 작업도 그에 맞게 다원적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마땅하다.(96 페이지) 다원적 해석이 무능의 증좌가 아니듯 하나의 닫힌 결론을 제시하는 것이 유능의 증좌도 아니다.(117 페이지)

     

    전체 여덟 장 가운데 세 번째 장에서 저자는 직업적 역사가로 인정받기 위해 체득해야 할 네 가지 방법을 예로 들었다. 사료비판, 비교, 반(反) 사실적 가정, 계량 등이다. 염분 섞인 바닷모래로 100년 가는 시멘트 건물을 지을 수 없는 것처럼 진위를 알 수 없는 자료를 가지고 온전한 역사 해석을 도모할 수 없다. 그래서 사료비판이 중요하다. 저자에 의하면 문서만이 사료는 아니다. 한반도에 구석기 시대가 존재했음을 확인시켜준 경기도 연천 한탄강 변의 조각돌도 마찬가지다(130 페이지)

     

    역사가는 없는 것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마법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저자는 역사가에게 비교는 일상이요 본업이며 방법이라 첨언한다.(134 페이지) 사람들은 막스 베버가 서구중심주의에 빠져 있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베버가 살아있었다면 ‘엄청난 자료의 바다에서 표류하거나 익사하지 않기 위해 나는 오로지 내 문제의식에 충실한 연구를 수행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비대칭 비교뿐이었다.’고 응수했을 것이다.

     

    비대칭 비교란 A와 B를 같은 수준에서 세밀하게 맞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A의 내재적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A를 중심에 놓고 B 또는 B, C, D와 선택적으로 비교하는 것이다. 개인 연구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품을 들이면서도 큰 성과를 내기 쉬운 방법이 비대칭 비교다.(151 페이지) 반사실적 가정은 경험적 상상의 힘과 관련된 말이다. 가령 인천상륙작전이 실패했다면 유엔군의 북진은 가능했을까? 같은 상상 또는 가정이 그것이다. 랑케 이후 직업적 역사가들 사이에 경험의 세계 너머나 이면을 언급하는 것을 금기로 여기는 태고가 분위기처럼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관행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막스 베버다. 그는 만일이라는 물음의 유용성을 부정하는 역사가들의 집단적 관행을 문제삼았다. 계량은 시계열 속에서 변화의 추세 읽기와 관련된다. 역사학은 시간의 학문이다. 인간의 삶에 일어난 변화들을 시간의 축 위에서 추적하는 분과학문이다. 역사가가 된다는 것은 변화에 대한 특유의 감각을 체득하는 과정이다.(172 페이지) 결과에서 출발하여 원인을 찾아가는 소급적 탐색이 인과적 사고라면, 역사적 사고는 결과에서 원인으로, 원인에서 다시 결과로 나아가는 과정을 부단히 반복한다.(174 페이지)

     

    좁은 의미의 역사적 사고가 과거의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해당 시대의 시공간적 조건과 맥락 속에서 파악하는 역사화 작업을 뜻한다면, 역사의식은 이 작업에 그치지 않고 그 사건이나 인물을 현재의 시공간적 조건과 맥락 속에서 파악하는 현재화 작업까지 포함한다.(184 페이지) 프랑스의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이 보여준 장기지속적 구조에 대한 관심은 역사적 시간의 지평을 크게 확장해주었다. 지중해 세계, 지중해 문명, 지중해 심성에 대한 그의 서술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면서 자연과학 영역에 한정되었던 지질학의 시간과 지리적 시간이 역사가의 시야에 들어오게 되었다.(186 페이지)

     

    레비스트로스는 요동하는 시간의 흐름 밑바닥에 자리한, 거의 정지해 있는 시간을 동료인 브로델에게 알려주었다.(190 페이지) 파도(波濤)의 시간, 해류(海流)의 시간, 해구(海溝)의 시간은 역사적 시간의 세 층위다.(211 페이지) 파도의 시간은 사건의 시간, 해류의 시간은 국면의 시간, 해구의 시간은 구조의 시간이기도 하다. 브로델은 움직임이 거의 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반복적이고 영속적인 지리적 시간을 설명하기 위해 장기지속이라는 개념을 고안해냈다. 브로델이 주목한 것은 인간의 행위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사건을 일으키는 기저의 힘이었다. 국면으로 번역되는 콩종튀르는 짧게는 수십년, 길게는 한두 세기 간격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리듬을 말한다.

     

    일반인이 특히 기억해야 하는 말은 역사는 수많은 우연적 계기에 의해 틀지어진 다양한 발전 경로의 총합에 가까운 바 단순명료한 역사 해석을 요구하는 일반인의 기대에 직업적 역사가들이 부응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말이다.(243 페이지) 단순한 자기중심적 역사 해석이나 주관적 역사 해석의 수준을 넘어 하나의 역사관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긴 호흡과 넓은 시야에서 역사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유물론에 대해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논한다. 마르크스에게 물질은 물성을 지닌 그 무엇이라기보다 사회적 존재를 의미했다. 이 말은 우리 인간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사회경제적 토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시사(示唆)가 되는 기억해야 할 마르크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애덤 스미스를 통해 마르크스는 임금과 화폐에 앞서 노동이 있고, 노동과 함께 노동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설마 그 똑똑한 청년 마르크스가 그 전에는 이런 점을 몰랐을까? 그건 아닐 테다. 다만 흩어져 있던 지식들, 확신할 수 없었던 이론들이 ‘국부론’을 통해 인간사를 이해하고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지식체계로 재탄생한 것일뿐이다.(289 페이지)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애덤 스미스가 여러 국민의 부의 축적과정과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자유주의와 자유무역을 옹호하기 위해 ‘국부론’을 썼지만 마르크스는 스미스의 이 책을 자기 방식으로 전유하면서 읽었다는 것이다.

     

    유물론적 역사 해석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지질학이나 건축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토대와 상주구조의 메타포가 그 중 하나다. 토대란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생산관계의 총체를 말한다.(290 페이지) 토대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 마르크스의 어법에서 규정이란 말은 결정보다 융통성 있는 표현이다. 대부분의 경우 토대가 상부구조를 좌우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상부구조가 역으로 토대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291 페이지) 그렇기에 마르크스를 경제결정론자로 간주하는 것은 부당하다.

     

    실증사관으로 유명한 랑케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부정적인 평가가 압도적이다. 일제 강점기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조선의 역사가 외세의존적이며 정체된 것이었다고 선전하는 일본의 역사가들의 논리를 반박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도입한 랑케의 실증사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만났다. 랑케의 풍부한 역사사상이 일본에 수입되는 과정에서 엄밀한 사료비판으로 축소되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일본의 학자들은 랑케의 역사학을 전폭 수용하지 않고 랑케 역사학 속에서 자신들이 추구해온 훈고와 고증방법의 정당성을 재발견했다. 동아시아에서 랑케는 술이부작의 지침을 강조했던 공자의 서구적 현현이 되었다.

     

    베버는 ‘과학자는 혼돈 속에 있는 다양한 현상에 질서를 부여한다. 이 질서는 복잡한 현실을 관통하고 있는 실재적 성격의 인과적 질서가 아니라 복잡한 현실의 한 자락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부과한 사후적 질서에 지나지 않는다.’고 썼다.(325 페이지) 이렇게 되면 역사가는 감당 불가능한 중무장의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소총으로 무장한 경보병처럼 지도에 그려지지 않은 지역을 자신의 문제의식과 시대의 요구에 따라 빠른 걸음으로 탐색할 수 있게 된다.

     

    저자는 극단적 상대주의의 대가는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크다고 말하며 그 피해는 약자들에게 집중되기 십상이라고 설명한다.(338 페이지) 마지막 장인 ‘다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저자는 헤로도토스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에게 역사책은 망각의 강으로 흘러가는 인간 기억의 물방울들을 움켜잡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었다.(352 페이지) 사료는 과거와 현재 사이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와 같다. 돌과 돌 사이의 간격이 너무 넓어 한 발로 뛰어 건너기 어려운 경우라면 역사가는 온전한 논문의 형태로 글을 쓰지 못한다. 사론(史論)이라는 이름의 역사 에세이를 쓸 수 있을뿐이다. 원자료를 증거로서 병기하는 각주나 후주가 없다면 어떤 학술지도 글을 게재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랑케를 통해 확립된 근대 역사학의 전통이자 계율이다.(356 페이지)

     

    모든 역사 서술은 중심 배치, 주변화, 배제라는 서술의 일반 규칙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규칙에 선행하는 것이 인식과 조망을 결정하는 틀이다. 기자들은 이것을 프레임이라 부른다. 프레임이 만들어지는 과정, 사건과 사실관계를 서술하는 틀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프레이밍이다. 신구 사료 간의 상호 대조 속에서 역사가 다시 쓰인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텍스트들을 시대의 콘텍스트에 비추어 재해석하는 작업도 진행된다.

     

    입장 구속성이란 말이 있고 의식의 부동성(浮動性)이란 말이 있다. 역사적 진실의 객관적 규명에 힘쓰는 시대가 있고 모든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사실은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다원적 접근을 강조하는 시대가 있다. 한 시대를 지배했던 논리가 극한에 도달하면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학문적 입장과 논리의 도전이 시작된다. 역사는 거듭 다시 쓰여야 한다. 심지어 새로운 사료의 발굴이 없는 경우에도 역사는 새로 기록되기를 거듭했다. 역사학도 재조명과 재해석과 다시 쓰기를 거듭하면서 발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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