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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를 잃고 나는 쓰네
김태연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8년 3월
평점 :
’기형도를 잃고 나는 쓰네‘, 이 작품은 기형도 시인 사후 29주년인 2018년 3월에 나온 장편입니다. 저자는 기형도의 대학 동기 김태연입니다. ’기형도를 잃고 나는 쓰네‘는 기형도의 ’빈집’에 나오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란 구절을 응용한 제목입니다.
기형도와 같은 연대를 졸업한 저자는 기형도를 잃고 나는 쓰네란 말을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 기형도의 절친이었습니다. 소설은 기형도와, 작가의 분신이라 할 허승구라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같은 대학이었지만 둘은 과가 다르고 성격도, 공부 스타일도 달랐습니다. 기형도는 전공인 정법(政法)을 공부하는 틈틈이 시를 쓰며 노래, 그림 등 모든 면에서 다재다능했음은 물론 성격과 외모까지 출중한 인물로 나옵니다.(기형도가 유일하게 잘 못한 것은 바둑이었습니다.)
반면 신소재공학을 전공한 허승구는 장편소설 집필에 승부를 거는 괴짜 수학 마니아로 나옵니다. ‘부친의 병고(病苦)와 가난으로 힘든 시절을 보낸 끝에 지난 1989년 서른의 나이에 요절했고 타계 후 ‘입 속의 검은 잎’이란 시집이 나왔다..‘ 우리가 기형도에 대해 아는 이야기는 대체 이렇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친이란 기형도가 ’위험한 가계.1969‘라는 시에서 그해 늦봄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진 분으로 표현한 분입니다. 기형도와 허승구의 만남은 허승구가 돌층계 위에서 대취(大醉)한 채 곯아 떨어진 데서 비롯됩니다. 기형도의 염려가 허승구를 연세문학회 서클로 들쳐 업고 가게 한 것입니다.
돌층계란 말이 기형도 시인의 ’대학시절‘이란 시에 나옵니다. “나무 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플라톤‘이 많은 말을 해줍니다. 기형도는 수학 마니아인 허승구에게 그가 빠져 있는 수학 세계의 근원인 플라톤의 책을 소개합니다.(130 페이지) 허승구는 기형도를 천생 시인, 등단 여부와 관계 없이 시인이라 칭하고(71 페이지) 기형도는 허승구의 광기를 즉성(卽成)으로 부릅니다.(133 페이지)
허승구는 기형도를 이몽룡, 자신을 방자라 생각할 만큼 사랑(인기)에서 좌절감을 맛봅니다. 기형도는 여자가 다가오면 물러서는 이상(?) 행동을 보입니다. 아버지가 만든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거나 노년까지 살 수 있을까 고민했던 칸트류의 병을 앓은 탓인지도 모릅니다.
기형도는 선배(연대의 전신 연희전문 출신)인 윤동주를 좋아해 서울대 대신 연대를 택했습니다. 그런 그가 윤동주 외에 더 꼽은 한 사람은 괴테입니다. 괴테 역시 기형도처럼 법대에 입학에 문학에 더 몰입했습니다.(80 페이지)
기형도는 관찰력이 남달랐고(193 페이지) 세밀했습니다.(200 페이지) 허승구는 수학에 대한 놀라운 집중력으로 소설 집필에 일필휘지의 순발력을 보였습니다. 허승구는 첫 문장을 바로 쓰지 못하고 많은 시간을 씁니다. 작가는 자신의 전공과 관련 깊은 수학을 이용해 연애 이야기를 포함한 온갖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갑니다.
기형도는 잘 살게 되어 여유가 생기면 방 하나를 통째 온갖 인형들로 채우고 싶다는 말을 했으며(212 페이지) 시 외에 ’자본론‘ 원서 읽기에도 정성을 기울였으며(215 페이지) 횔덜린처럼 문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시인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드러냈으며(223 페이지) 우선 시인이 되고 싶지만 후에 도스토예프스키를 뛰어넘는 장편소설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었습니다.(226 페이지)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의 논리를 동원해 자기의 생각을 철학적으로 고고하게 전개하기도 했습니다.(247 페이지) 졸업 전 기형도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과 중앙일보 기자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습니다.(252, 253 페이지)
기형도는 절망은 인간을 용감하게 하고 희망은 그 용감을 구체화시킨다는 말을 했습니다.(257 페이지) 허승구는 한 시은(市隱; 사람들 사이에 사는 도인)을 만나 주역 11번째 괘인 지천태(地天泰)괘의 태를 넣은 태연이라는 필명으로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됩니다.
기형도는 동성애에 대한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고대 서양철학자들과 수많은 예술가들이 동성애에 빠진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이 일반인들의 동성애와 어떻게 다른지 알고자 하는 차원이었습니다. 친구 허승구를 파트너로 위장해 다른 남자들의 관심을 원천 배제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기형도는 해마다 5월 16일이면 무너지는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기형도가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 두살 위 누나 기순도가 성폭행당하고 목졸려 살해당한 날입니다. 어릴 적 집이 가난해 함께 고아원에도 갔던 누나를 잃고 기형도는 자신은 누나와 함께 정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사망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허승구는 기형도를 위해 누나라는 구절이 있는 윤동주 시 ’편지‘를 골라 함께 읽습니다. 기형도는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는 구절이 있는 시 ’가을 무덤 – 제망매가‘를 썼습니다.
기형도는 출간을 예정한 시집 제목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로 하기로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중얼거린다는 의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도(道) 즉 진리를 말해야 하기에 중얼거릴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기형도에게 신문 기자는 장편 소설을 쓰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헤밍웨이, 찰스 디킨스, 에밀 졸라, 조지 오웰, 마크 트웨인, 카를 마르크스, 가브리엘 마르케스 등이 모두 기자 출신이었습니다.(295 페이지) 기형도는 다른 데에서는 지극히 이성적이면서도 자기 몸에는 막무가내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뇌졸중으로 이른 죽음을 맞았습니다.
기형도는 남성 동성애자들의 아지트라 할 파고다 극장을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힌트를 얻어 파고다 동굴이라 불렀습니다. 기형도는 ’허승구는 언제나 나의 기억 속에, 성곽 옆에 서 있는 푸른 종려나무로 남아 있어. 나는 지치고 외로운 시간마다 그 고요한 그림자 밑에서 피리를 불며 쉬었단다‘는 말을 했습니다.
작가는 기형도 문학관 유품 수집 총책임 역을 맡은 것이 계기가 되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절친이 아니라면 알 수 없을 말을 알게 한 작가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