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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과 상담 동양상담학 시리즈 17
나예원.박성희 지음 / 학지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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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 이항복은 익살과 재치의 주인공으로만 너무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 지혜와 결단력으로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극복하게 한 일등 공신이었다. 더욱 그는 풍자와 해학의 주인공임은 물론 고위(高位)에 있었지만 귄위주의적이지 않았던 바람직한 사람이었다. 본문에 의하면 풍자는 부정한 인물이나 시대상을 비판하는 데서 비롯되는 행위이고 해학은 억압받고 고통받는 대상에 대해 애처로움과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 데서 비롯되는 행위이다.

 

명종 말년인 1556년에 태어나 광해군 초기인 1618년에 사망했다. 선조 13년인 1580년 문과에 급제해 호조참의, 도승지 등을 역임했고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扈從)해 의주까지 가 명나라에 대해 지원병을 요청할 것을 주장했다.

 

1589년 정여립 반란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항복은 심문 내용을 받아적는 기록관 역할을 담당했다. 이항복은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다스린 공로로 정3품 벼슬에 올랐다. 당시 동인은 기축옥사가 반란이기는 하지만 너무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선조는 모든 책임을 송강 정철에게 씌워 그를 축출했다. 정철은 너무도 가혹하게 정여립과 관련된 동인을 싹쓸이하다시피 한 문제적 인물이다.

 

정철은 강계로 귀양을 갔다. 이때 유일하게 귀양 가는 정철을 배웅해준 사람이 이항복이었다. 감동을 받은 정철은 유배지 강계에서 “내 생애는 설새령에 놓였지만 마음은 필운산에 가 있네“라는 시를 썼다. 이러자 동인은 이항복과 정철이 짜고 사건을 일으켰다고 공격했다. 이에 이항복은 필운 대신 백사라는 호를 썼다. 이항복은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해 함경북도 북청에 유배된 지 5개월만에 병사했다.

 

한 마디로 그는 기축옥사, 임진왜란, 계축옥사 등 조선 중기 격동의 사건을 정면으로 관통한 인물이었다.(32 페이지) ‘이항복과 상담’은 학지사의 동양상담학 시리즈의 한 권이다. 지은이는 교육상담학 전문가 나예원과 박성희다. 박성희는 ‘고전에서 상담 지식 추출하기’의 저자이기도 하다.

 

박성희는 서양 사람들에게서 뽑아낸 상담 지식을 한국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의 문제를 직시했고, 나예원은 장난기 넘치는 용감하고 지혜로운 소년, 당쟁과 임진왜란이라는 격동기를 정면으로 맞서 살았던 인물이라는 이항복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지식에 이항복은 긍정적인 삶의 실천가이자 상담자라는 정의(定義)를 추가하려 한다고 말한다.

 

‘이항복과 상담’은 바로 이런 두 사람의 사상적 공명(共鳴)의 결과물이다. 이항복은 자기연민의 승화(昇華), 수용과 성찰, 자애, 개방성의 주인공이었다. 특히 그는 아들에게 과거 급제를 해라, 출세하여 집안의 명성을 드높여라 등의 주문을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이항복은 선조가 명으로 피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유성룡은 선조의 명 피난에 반대했다.

 

이항복의 주장대로 명으로의 피난이 결정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이 발생했다. 이항복은 유성룡이 머무는 숙소를 직접 찾아가 사죄했고 유성룡은 자기에게도 잘못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지난 앙금을 풀고 다시 좋은 결말을 맞이했다. 두 사람이 만일 소유적인 관계였다면 상대를 자신의 뜻에 맞지 않게 행동한 괘씸한 인물로 낙인찍었겠지만 두 사람은 서로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했다.

 

이항복은 역적으로 몰릴 위험이 있다 해도 상대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언행으로 보여주었다. 이덕형이 왕의 미움을 받아 쫓겨나자 자신의 의견은 이덕형과 다를 바 없다며 그를 두둔하고 벼슬을 거절했다. 1602년 우계 성혼과 송강 정철을 구하려다가 축출 위기를 맞았고 1612년 권필이 구속되었을 때 울음으로 그의 억울함을 간언했다.

 

저자는 이항복처럼 위험한 상황에서 목숨을 걸어가며 상대를 구해야만 의미 있는 관계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 교훈이라고 말한다.

 

‘이항복과 상담’은 이항복을 모신 포천 화산서원(花山書院) 해설을 의뢰받고 읽게 된 책이다. 필운대(弼雲臺)가 포함된 서촌 해설에서도 이항복에 대해 잘 다루지 않았던 미흡함을 반성하며 뒤늦게 이항복의 진수를 알게 해준 책이다.

 

관계를 맺는 것은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뜻하고 특히 서로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며 성장시키는 것이라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이항복 개인에 대해 배운 것도 의미 있지만 관계의 진수에 대해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다. 개인적으로는 이항복을 다룬 책이 별로 없는 것이 아쉽다. 시리즈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미수 허목과 상담’이란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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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형의 빅히스토리 Fe연대기
김서형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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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빅히스토리 유라시아센터 연구교수 김서형이 말하는 <Fe> 연대기를 보며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 , 를 생각하게 된다. 저자는 인간만을 역사적 분석 대상으로 삼았던 시각과 관점을 넘어 생명과 우주로까지 대상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빅 히스토리라 정의한다. 다양한 생명체들과의 공존을 위한 논의 확대는 인류세 논의와도 공명하는 바다


주제는 자기장에서부터 식물의 광합성에 이르기까지 관련되는 것이 철이다. 자기장은 행성이 자전하는 과정에서 외핵의 철 성분이 회전함에 따라 발생한다. 지구 자기장은 시속 1600만 킬로미터 속도로 날아오는 태양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철은 과거 시기의 산소 농도 측정 도구로도 작용한다


호주 필바라에는 검붉은 부분과 흰 부분으로 구성된 산화철 퇴적층이 빈번하게 발견되는 산화철 퇴적층이 있다. 대기 중 산소가 풍부해 철이 산화되면 검붉은 부분이 형성되었고 반대 경우 흰 부분이 형성된 데 따른 것이다. 대기 중 산소 농도는 생명체의 진화와 멸종에 큰 영향을 미쳤던 요소들 가운데 하나다. 철은 포도당을 만드는 데 있어 중요 역할을 한다. 부족하면 광합성을 하지 못하는 것이 철이다


대륙 빙상(氷床; ice sheet)의 철이 온난화로 녹아 바다로 유입되면 식물성 플랑크톤이 증가한다. 이들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온난화를 막는다. 이상한 관계다. 철은 농경이 시작된 이후 잉여 생산물을 얻기 위해 발생했던 일련의 기술 발전 속에서 도시와 국가가 탄생하는 데 필요한 도구와 무기를 만드는 데 매우 중요했던 원료다.


18세기 영국은 증기기관을 원동력으로 하는 새로운 산업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것이 제철공업이다. 당시 철 제련의 중요 재료로 쓰인 것은 석탄이었다. 증기기관은 소빙기에 나무 대신 석탄을 채굴하는 과정에서 지하 갱도로 흘러드는 물을 퍼올리기 위해 개발한 것이다. 영국은 풍부한 철과 석탄을 이용해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이루었다


미국과 구 소련의 우주 경쟁에서도 철은 매우 중요했다. 우주선을 만드는 재료였기 때문이다. 우주선은 초합금으로 만들어지는데 이는 철 함량을 50 퍼센트 아래로 낮추고 니켈과 크로뮴의 함량을 증가시킨 것이다. 별은 수소를 이용해 빛을 낸다. 수소 원자들은 융합해 헬륨을 만든다. 태양은 중심 온도가 1500만도 이상이다


이 온도에서는 수소 원자들이 융합해 헬륨을 만들 수는 있지만 헬륨 원자들이 융합해 다른 원소를 만들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별이 헬륨을 모두 사용하면 새로운 원소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 시작된다. 우주의 온도가 10억도가 되면 헬륨 양성자들이 융합해 점점 더 빠른 붕괴, 융합 과정을 통해 내온, 산소, 규소 등을 만든다. 그리고 우주의 온도가 30억도 정도 되면 규소를 철로 만드는 융합이 시작된다


철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온도가 높은 별 안에는 수소에서부터 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원소들이 가득 찬다. 그리고 별의 중심이 철로 가득해지면 더 이상 융합은 일어나지 않고 초신성 폭발이 일어난다. 별이 폭발하면서 다양한 원소들이 별의 주변과 우주 전체로 퍼진다. 물론 우주에서 가장 많이 존재하는 원소는 수소, 헬륨으로 98퍼센트에 달한다


헬륨 이후의 원소들은 2퍼센트 정도이지만 이것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해 생명체, 인간, 세상의 모든 것들을 만든다. 초기 지구는 오늘날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매우 뜨거워서 모든 것이 녹은 상태였다. , 니켈, 마그네슘 같은 무거운 물질들은 지구 중심으로 가라앉아 지구 핵을 형성했다. 가벼운 물질들은 핵 위를 떠다니게 되었다. 이것이 맨틀이다


아주 가벼운 물질들은 지각을 구성했고 가장 가벼운 물질들은 대기를 형성했다. 이후 오래도록 비가 내려 지구 온도가 내려갔고 바다가 형성되면서 다른 행성들과 달리 생명체가 등장할 수 있는 조건들이 만들어졌다. 138억년 전 아무것도 없었던 우주에서 빅뱅이 나타났고 이후 별과 원소가 등장하면서 우주는 점차 변화했다


온도나 중력 차이에 따라 원소나 물질들이 결합하면서 태양계 형성처럼 이전 우주에는 없던 새 현상이 나타났다. 45억년 전에 발생했던 초신성 폭발로 태양, 지구 등의 여러 행성들이 만들어졌고 달이 만들어졌다. 지구는 탄소, 산소, 질소 등 다양한 원소들로 구성되어 있고 물이 있다


35억년 전에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했고 25억년전에 세포막으로 둘러싸인 핵을 가진 진핵생물이 등장했다. 10억년전쯤 다세포 생명체가 탄생했다. 47500만년전 다세포 생명체들이 바다에서 육상으로 이동했다. 폐로 호흡하게 되었고 다리가 출현했다. 6500만년전 소행성 충돌과 그로 인한 기후 변화로 당시 지구를 지배했던 거대 파충류 공룡이 멸종하고 포유류가 나타났다.


1만년전 농경의 출현은 빙하기가 끝난 것, 급속한 인구 증가 등과 관련이 있다. 저자는 우주 탄생 이후 별과 행성이 만들어지고 다양한 생명체들이 탄생하고 진화하는 빅히스토리의 관점에서 인간은 끊임 없이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했다고 말한다.(283 페이지) ‘Fe 연대기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우주, 지질, 기후, 생태에 이어 인류세 논의까지 아우른 책이면서 흥미 있게 읽힌다. 우리가 빅히스토리를 읽는 이유는 인류세를 논해야 하는 위기상황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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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4
얼 C. 엘리스 지음, 김용진.박범순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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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란 너무나 강력해진 나머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지구 전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갖게 된 인간종이 지배하는 시대를 말한다. 다른 말로 인간의 활동이 지구의 생태계와 지구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다. 1922년 구소련 지질학자 알렉세이 파블로프가 인류세란 말을 처음 사용했지만 그것은 구소련을 벗어나지 못했다.

 

1980년대 미국 출신의 생물학자 유진 스토머(1934 - 2012)도 사용했다. 2000년 이후 네덜란드 출신 대기화학자로 오존층 파괴 원인을 밝혀 노벨화학상을 수상(1995년)한 파울 크뤼천(Paul J. Crutzen; 1933 - 2021)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파울 크뤼천은 ‘핵겨울'이라는 개념도 처음 쓴 분이다.

 

핵전쟁이 불러올 기후재앙을 경고했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도시와 산림, 농경지, 석유 및 가스전으로 불이 번지면서 엄청난 연기가 대기로 날아가 햇빛을 차단하는데 이로써 지구 표면이 냉각되어 전 세계 농업생산이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지구 전체 역사(46억년)를 하루로 환산할 경우 인류의 등장은 12월 31일 자정을 몇 시간 남겨둔 시각에 이루어졌다. 지질시대는 선캄브리아대,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로 이루어졌다. 인류세는 신생대 제3기(팔레오세, 에오세, 올리고세, 마이오세, 플라이오세)와 신생대 제4기(플라이스토세, 홀로세)에 이은 시대다. 현재는 지질시대 중 가장 최근에 해당하는 시기인 260만년전에 시작된 제4기로 그 가운데 홀로세(완전히 최근이란 의미)다.

 

인류세가 인정된다면 홀로세 다음의 인류세가 되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시기는 20만년전(’전곡선사박물관‘ 자료)이다. 지질시대를 다루는 전문가들은 우리 행성을 형성하는 지질학적 과정에 의해 암석에 물리적인 흔적이 남아야만 지질학적 연대표를 직접 구성해낸다고 밝힌다. 지질학자 중 층서(層序) 기록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을 층서학자라고 한다.

 

그들이 지질학적 시간을 뚜렷하게 구분되는 단위로 나누는 것은 지구의 역학이 불연속적이라고 믿어서가 아니라 그런 방식이 실용적이기 때문이다.(243 페이지) 층서학(stratigraphy)은 지층의 기원, 구성, 분포를 다루는 학문이다. 지층의 수직면은 시간 차원, 수평면은 공간 차원을 나타낸다. 지질시대 구분은 층서학자들의 소관이다.

 

지질시대로 등록되려면 지구 시스템의 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적절한 종류의 층서학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층서학자들이 연구하는 물질적 기록의 특징은 복잡하고 혼합적이며 통시적이다. 한 사회, 한 가구가 흔적을 남긴다고 해도 다음 세대 샤람들은 같은 곳에 도랑을 치고 터를 닦고 무덤을 파며 건물을 짓고 쓰레기를 버리고 잔해를 남기면서 퇴적물을 변화시킨다.

 

이후에 홍수를 비롯한 자연현상 때문에 흙이 덮이기도 하고 새로운 공사를 위해 퇴적층의 상당 부분이 제거되기도 한다. 지층의 어떤 부분은 지하 묘지, 깊은 우물, 지하터널 등으로 뚫려 있을 수도 있다. 어떤 부분은 경작한 토양, 인공 습지, 매립지, 수천년 동안 여러 겹의 정착지의 흔적이 만들어진 언덕(중동에서 흔히 발견되는 ’텔; tel’이라 부르는 고고학적 지층)으로 덮여 있을 수 있다.(163 페이지)

 

17세기 후반 덴마크의 해부학자 니콜라스 스테노(니콜라우스 스테노; 1638 - 1686)에 의해 층서학이 시작되었다. 층서학에 의하면 상대적으로 새로운 층은 오래된 층 위에 형성된다. 이를 누중법칙(law of superposition)이라 한다. 또한 퇴적암은 원래 수평으로 형성된다. 그리고 연속적인 층으로 형성된다.

 

스테노는 후원자인 메디치가의 페르디난도 2세의 부탁을 받고 ’글로소페트라(Glossopetrae; 혀 돌; 설석; 舌石)’라는 1,270kg의 화석화된 상어 이빨을 절개하게 되었다. 그것은 마법의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진 물질이다. 당시 그 물질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라 생각되기도 했고 몰타 섬에서 독사에 물리고도 해를 입지 않은 사도 바울의 기적(사도행전 28장 3, 4, 5절)으로 인해 독사 이빨 모양으로 자라게 되었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스테노는 글로소페트라와 상어 이빨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둘이 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정 층위 안의 물리적 특성(광물 구성, 질감, 색상)과 화석 내용물을 통해 층위를 변별할 수 있으며 심지어 다른 지역의 다양한 암석 형성물과도 그 층위의 상관 관계를 규명할 수 있다.

 

스테노 이후 한 세기가 지나 광산 측량사 윌리엄 스미스(William Smith; 1769 ? 1839)에 의해 층서학이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윌리엄 스미스는 화석 천이(遷移) 법칙을 밝혀냈다. 최근에 생성된 지층일수록 진화된 화석이 나옴을 의미하는 법칙이다. 전 지구적 변화를 인지할 수 있는 지질 기록이 보존된 곳을 표준층서구역(GSSP, Global Boundary Stratotype Section and Point)이라 표시한다.

 

표식의 모양과 형태가 황금색 못을 박은 것과 비슷해 '황금못'(Golden Spike)이라 부른다. 그곳을 조사하면 특정 지질연대의 경계를 가늠할 수 있다. 고고학자 메슈 에지워스 등은 고고학과 지질학은 연결되어 있고 동일한 층서학적 원리를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고고학적 시대 체계는 일반적으로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된다.

 

플라이스토세와 함께 구석기 시대가 끝나고 홀로세와 함께 중석기와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에디아카라기는 6억3000만~5억4200만 년 전 신원생대 시기다. 생물이 대거 나타난 고생대 캄브리아기 직전에 해당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에디아카라다. 생물체가 대거 출현한 ‘캄브리아 폭발’ 이전에 완벽한 상태의 다세포 생물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에디아카라군이 주목된다.

 

인류세 시작점은 18세기 중반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보기도 한다. 이산화탄소 배출이 증가하기 시작한 시기다. 1769년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개량했다. 그는“산업혁명의 아버지“다. 세계 첫 증기기관차는 1804년 트레비딕의 페니다렌호다. 선로 궤도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1740년 이후 유럽은 소빙하기를 겪었다. 아일랜드에 7주간 서리가 내렸다. 아일랜드 인구의 20퍼센트 이상 굶어죽었다. 추위를 피하려고 목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용량이 급증했다. 가격이 급등하자 사람들은 새로운 연료를 찾아나섰다. 석탄은 지질시대에 식물이 퇴적되어 매몰된 후 열과 압력에 의해 만들어진 광물이다. 고생대 석탄기는 3억 6700만년전 - 2억 8900만년전에 이르는 시기다.

 

수요 급증에 따라 노천 탄광뿐 아니라 땅속 탄광에서도 석탄을 채굴하게 되었다. 광산으로 스며드는 지하수를 퍼올리는 과정에서 개발된 기술이 증기기관이다. 20세기 중반(1950년 이후) 인간활동 및 환경변화의 속도가 극적으로 증가한 것을 인류세의 시작으로 보며 그것을 거대한 가속으로 정의하는 사람들도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지난 50년 동안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바뀌었다. 인간이 촉발한 변화의 규모, 공간적 변화, 속도는 인류 역사에서 전례가 없었으며 아마 지구 역사의 차원에서 보아도 그럴 것이다. 지구 시스템은 이제 기존 자연계에서 나타나던 변이 범위를 넘어섰다는 의미에서 유사체 없는 상태로 작동하고 있다.”(미국 기후학자 윌 스테판)는 말을 새길 필요가 있다.

 

육지 생물권의 3/ 4이 직간접적으로 인간의 토지 사용 때문에 변화했다. 직접적인 인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육지 생물권의 1/ 4도 되지 않는다. 대부분 춥고 건조하며 척박한 곳들이다. 인간이 땅을 사용해서 환경에 미치는 결과는 온실가스 배출, 환경오염, 토양침식, 자연 서식지 소실, 생물 멸종, 외래종 도입 등 다양하다.

 

인류세 실무단은 인간 활동이 남긴 층서적 증거를 찾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45년에 시작해 1963년, 1964년에 정점을 찍은 핵무기 실험 과정의 부산물(방사능 낙진 퇴적층), 플라스틱 퇴적층, 화석 연료의 불완전한 연소 때문에 생기는 블랙 카본 등이 유력 증거다. 인간의 시대를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고고학계 내부에서 먼저 나왔을 법도 하다.

 

불을 이용해서 땅을 정리하는 능력에서부터 다른 생물종을 길들이고 땅을 경작하는 능력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생물도 인간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강력하게 환경을 바꾸지는 못한다. 인류세는 멸종과 관련된다. 지금껏 11번의 멸종이 있었다. 그 가운데 5번은 대멸종이었다. 오르도비스기, 데본기, 페름기(이상 고생대), 트라이아스기, 백악기(이상 중생대) 등에 있었던 일이다.

 

인류에 의해 여섯 번째 대멸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인류세의 시작 시기로 볼 곳들이 많다. 거대동물이 멸종한 플라이스토세(홀로세가 가장 최근을 의미한다면 플라이스토세는 대부분 새로운이란 의미다.) 후기, 농업이 시작되고 퍼져나가면서 특히 쌀 생산으로 인해 대기 중 메탄이 증가한 5000년전, 인위적 토양이 확산된 2000년전, 글로벌 체계가 확립된 약 500년전, 산업혁명이 시작된 약 200년전...

 

굳이 새로운 GSSP를 제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단지 이름을 바꾸어 부르면 된다는 것이다. 고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지구환경을 변화시키는 일은 결코 최근의 현상도 아니고 특별한 현상도 아니다. 인간 세계는 언제나 인간 스스로가 만들고 변화시켰다.

 

지구 역사에 존재했던 거의 모든 인간 사회는 자신의 선조들이 이미 변화시켜놓은 환경 속에서 살아갔다. 과거의 인간이 토양에 남긴 흔적은 수백년, 심지어 수백만년이 지나도 남아 종의 구성이나 식물의 생산성에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인간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은 인류의 영향이 미치기 이전의 생태라는 믿음이 현재의 생태 패턴이나 생태 과정을 이해하는 데 심각한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179 페이지) 호수에서 추출된 오래된 퇴적물 코어는 장기간의 생태 변화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 기록들은 인류가 생태계에 일으킨 교란이 얼마나 복합적인지를 말해준다.

 

저자는 멸종은 새로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생물종의 99퍼센트는 멸종했다. 현재 척추동물의 멸종률은 기본 멸종률보다 적어도 열 배, 많게는 천 배 정도 높다. 멸종을 확인하는 일은 특정 종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보다 어렵다. 존재 확인은 한 번에도 가능할 수 있지만 멸종 확인은 마지막 개체까지 해야 한다. 물론 멸종을 확인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하지 않고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존재 확인보다 멸종 확인은 어렵다.

 

동질세란 개념도 있다. 지구의 생물종이 섞이는 현상을 말한다. 인간 사회는 자연계를 교란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간의 사회시스템은 지구 시스템 내에서 이미 행성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힘으로 부상하였다.(203 페이지) 인구 증가 속도가 더뎌지고는 있지만 부유한 인구 집단이 더 많은 자원을 요구함에 따라 식량, 물, 에너지 등 자연 자원에 대한 수요는 계속 늘고 있다.

 

사회학자 아일린 크리스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인간 지배의 시대를 인정하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소유권과 파괴를 정당화하게 되고 자연을 더욱 변형시키고자 하는 미래의 거대한 프로젝트에 터를 닦아줄 뿐이라고 주장했다.(213, 214 페이지) 인간은 무엇이든 시도해도 괜찮다, 인간에 의한 지구 변형을 제한하려는 노력은 구시대적이다 등의 말이 있을 수 있다.

 

자연보전주의자들은 인류세 개념에 반대한다. 지구 생태계가 인간에 의해 전적으로 변형되었다고 선언하는 일은 과장이고 자연보전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무력감을 조장한다는 주장도 있다.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 전체가 급격한 지구적 기후변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타당하지 않다고 말한다.(222 페이지)

 

저자는 2005년부터 미국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중국이 산업 발전을 위해 대규모로 화석연료를 태우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이후로 미국은 이미 한 세기 이전에, 영국은 미국보다 수십 년전에 현재의 중국과 비슷한 수준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에 도달해 있었다고 말한다.

 

자본세는 인류세의 대안으로 많이 거론되는 개념이다. 툴루세란 개념도 있다. 인간이 지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단 한 가지만 존재할 수 없다. 기술화석이라는 말이 있다. 강철 대들보, 전기 전선, 플라스틱 등의 인공 물질이 호수나 해양 침전물, 매립지 등 층서 퇴적층에 남아 화석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를 기술화석이라 한다.

 

이미 인류의 온실가스 배출로 인해 지구의 다음 빙하기가 10만년 정도 늦춰졌다는 증거가 있다. 지구 기온이 올라가면 식량 체계 파괴, 가뭄 증가, 극심한 폭염, 해수면 상승, 혹독한 폭풍, 각종 사회적 피해가 나타나고 그에 대처하는 사회적 비용도 증가할 것이다.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구공학적 전략들이 필요하다. 이산화탄소를 직접 포집하고 저장하기, 나무 심기, 토지 경작 줄이기, 토양에 숯 묻기, 해양 비옥화하기, 여타 생물학적 탄소 흡수량 및 저장량 증대시키기 등이다.

 

파울 크뤼천은 성층권에 빛을 반사하는 미세한 황산염 에어로졸 입자를 주입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 방법은 부작용 우려도 크다. 인류세란 단어는 2014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재되었다. 브뤼노 라투르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저지른 잘못은 그가 오만하게도 첨단 기술을 사용하여 새로운 존재(괴물)를 창조한 데에 있지 않고 그 피조물을 방치한 데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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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지 않는 사람이 성공한다 - 안전거리와 디테일이 행복한 삶의 열쇠다
장샤오헝 지음, 정은지 옮김 / 미디어숲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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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사람들 때문에 힘이 든다. 사적인 일을 묻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자신이 마치 관리자라도 된 듯 구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완곡하게 선택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말하기 전에 자신이 하려는 말이 “진실인가?”, “선의에서 나오는 것인가?”, “과연 필요한 일인가?”란 점을 스스로 물어야 하리라. 이에 대해 ‘선을 넘지 않는 사람이 성공한다’의 저자는 어떻게 말하는가.

 

그는 분수를 아는 사람은 보통 경청을 통해 좋은 인연을 얻는다고 말한다. 경청보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내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정확하고 분명하게, 간단하게 핵심만 짚어 주는 정도로만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비판은 어떤가. 그것의 핵심은 소통하고 인도하고 함께 발전하는 데 있다.(29 페이지) 강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도리에 맞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정으로 분수를 아는 사람은 상대방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역지사지하며 합리적인 제안을 한다.(30 페이지) 사람 사이에 안전거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하고 싶다. 관계는 디테일에 달려 있다. 한 사람이 미움을 받거나 인기를 얻는 것은 대부분 사소한 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들 때문임을 잊지 말자.

 

저자는 우리는 관용과 방임 사이에서 분명하게 선을 긋고 엄격하지만 아량이 있으며 관대하지만 격식을 지키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58 페이지) 매사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은 피해야 한다. 저자는 “일리가 있으면 몰아붙여도 될까?”라고 묻는다. 저자는 자신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 상대방을 위해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길을 터주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70 페이지)

 

원칙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옳고 그름을 굳이 따질 필요가 없는 일에 대해서는 웃어넘기는 것이 필요하다. 사소한 원한에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주려 하면 그저 상대방과 같은 수준이 될 뿐이다. 적당한 선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자랑과 잘난 척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하라.

 

분수를 아는 사람은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는 비록 자신의 성과와 명성이 뛰어나도 일부러 어려운 점을 찾아 상대방에게 이야기하라. 그러면 상대는 지금 힘든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얻을 것이다. 배움이 많지 않은 사람 앞에서 지식을 뽐낸다고 한들 재능이 보이기보다 천박하고 무지해 보일 것이다.

 

상대방이 금기시하는 것을 기억하라. 관계 맺기는 낚시하듯 느긋하게 하라.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 동료의 요구가 정말 기이하거나 너무 심하다면 상대방에게 문제를 완곡하게 지적해서 퇴로를 열어주는 것이 좋다. 동료를 자주 도와주지 말라. 작은 이익을 탐하는 것은 앞길을 막는 행동이다. 리더의 체면을 세워주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이란 독립적 개체로 존중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손해를 감수할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말을 기억하자. 포기해야 할 때는 과감히 하자. 많이 쏟아부을수록 포기는 더욱 어렵다. 하지만 방향이 잘못된 것을 알고도 그 자리를 악착 같이 사수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어떤 관계든 따지려 들지 말라. 끊임없이 계산하다 보면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 스스로 삼가는 것은 경계를 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너무 중요하게 여기지 말라.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스피노자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최대의 교만이나 최대의 낙담은 스스로에 대한 최대의 무지다.”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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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의 생명사 - 38억 년 생명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것은 항상 패자였다! 이나가키 히데히로 생존 전략 3부작 3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박유미 옮김, 장수철 감수 / 더숲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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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억년 생명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것은 언제나 패자(敗者)였고 멸종된 것은 강자(强者)였다는 주장을 하는 책이다. 저자 이나가키 히데히로는 일본의 농학박사이자 식물학자다. 지난 2019년 출간된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을 사려다가 말았었다. 그러다가 올해 6월 나온 ‘패자의 생명사’의 제목에 이끌려 구입했다.

 

이 책은 단순히 패자(敗者) 이야기를 한 책이 아니라 밀접하게 연관된 지질, 기후, 생태 등을 큰 틀에서 흥미롭게 언급한 책이다. 물론 중심은 생명이다. 큰 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책은 다섯 번의 멸종을 이야기한다. 다섯 번의 멸종이란 오르도비스기, 데본기, 페름기, 트라이아스기, 백악기 등에 일어난 멸종을 말한다.

 

생명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는 수수께끼다. DNA 유전 암호에 따라 단백질 합성이 이루어지는데 단백질 합성에는 단백질 효소가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가 풀기 어려운 과제다.(8 페이지) 생물은 DNA를 저장할 핵이 없는 원핵세포에서 핵이 있는 진핵생물로 진화했다.(19 페이지) 흥미로운 점은 세포 내 소기관인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가 독자적인 DNA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는 독자적인 원핵생물이었으나 다른 세포 안에서 공생 관계를 유지하다가 세포 소기관이 되었다.(19 페이지) 에너지를 생산하는 미토콘드리아는 동물 세포와 식물 세포 모두에 존재하는 반면 엽록체는 식물 세포에만 존재한다.(24 페이지) 식물과 동물은 같은 조상에서 갈라진 먼 친척이다. 공통 조상을 가졌다고 해도 동물과 식물은 겉모습이나 삶의 방식이 너무 다르다.(45 페이지)

 

우리의 조상인 단세포 생물은 미토콘드리아의 조상인 세균을 끌어들여 공생하기 시작했다.(45 페이지) 미토콘드리아와 공생을 시작한 어떤 단세포 생물이 엽록체의 조상인 생물을 끌어들여 공생을 하게 되었다. 엽록체도 미토콘드리아와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DNA를 가진 독립적인 생물이다. 이것이 식물의 조상이다. 미토콘드리아와 공생을 시작할 무렵 동물의 조상과 식물의 조상은 같은 생물이었다.

 

하지만 엽록체와 공생하게 되면서 식물의 조상은 우리 동물의 조상과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동물은 움직이면서 돌아다니지만 식물은 움직이지 않는다. 식물 세포는 확실한 구조를 구축하기 위해 세포벽을 만들었다. 식물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세균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세포벽은 방어력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동물 세포에는 벽이 없지만 식물 세포에는 벽이 있다.

 

균류는 진화 과정에서 엽록체를 가지지 못한 채 식물 세포와 이별한 생물 중 세포벽을 가진 존재다. 고대 지구에는 산소라는 물질이 없었다. 당시 대기의 주성분은 이산화탄소였다. 그런데 27억년전에 갑자기 산소라는 맹독이 지구상에 나타났다. 이를 대산화(大酸化) 사건 또는 산소 대폭발 사건이라 부른다. 이 사건은 광합성을 하는 시아노박테리아라는 세균의 출현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산소 농도가 상승함에 따라 지구상의 생물이 멸종한 사건을 산소 홀로코스트라 칭한다. 산소는 독성이 있는 대신 폭발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힘이 있는 양날의 검 같은 존재다. 평화롭게 지내던 대부분의 미생물들은 산소로 가득 찬 지구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산소로 가득 찬 지구상의 생물은 산소라는 맹독을 내뿜는 식물의 조상인 괴물과 그 산소를 이용하는 동물의 조상인 괴물로 양분되었으며 이들이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다.(57 페이지) 시아노박테리아가 만들어 낸 산소는 바다 속에 녹아 있던 철이온과 반응해 산화철을 만들었다. 산화철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지각 변동이 일어나자 산화철이 퇴적되어 만들어진 철광상이 후에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득한 시간이 흐른 후 인류가 출현했다. 인류는 철광상에서 철을 얻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철을 사용해서 농기구를 만들어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켰고 철을 사용해 무기를 만들어 전쟁을 일으켰다. 이 모든 것이 시아노박테리아 때문이다.(58 페이지) 산소가 자외선을 만나면 오존이 된다. 오존은 자외선을 흡수하는 역할을 한다.

 

바다속에 있던 시아노박테리아는 식물의 조상과 공생하여 식물이 되어 지상으로 진출했다.(59 페이지) 7억년전 눈덩이 지구(스노볼 어스)가 끝난 후 지구에 번성했던 다세포 생물을 에디아카라 생물군이라 한다. 스노볼 어스 직후 갑자기 다세포 생물이 출현했다. 얼어붙은 지구에서 생명은 극히 한정된 장소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겨우 살아남은 집단에서 여러 가지의 돌연변이 유전자가 집단 속으로 널리 퍼진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숨을 죽이고 있는 작은 집단 속에 다양한 유전적 변이가 축적되었을 것이다. 생명은 최초의 스노볼 어스 이후 진핵생물이 되었고 두 번째 스노볼 어스로 다세포 생물로 진화했다.(87 페이지) 스노볼 어스로 폐쇄된 환경에 있었던 생물들은 작은 집단 속에서 유전적 변이의 다양성을 축적해 갔다.

 

이렇게 축적된 변이가 다세포 생물의 급격한 진화를 이끌어 에디아카라 생물군을 낳았다. 이후 캄브리아 폭발로 이어져 새로운 생물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번성했던 에디아카라 생물군도 캄브리아기가 시작되자 멸종했다. 이유는 불명이다.(94 페이지) 캄브리아 폭발로 새로운 생물이 출현한 것은 생물 세계에서 포식이 시작됨에 따라 야기된 것으로 짐작된다. 캄브리아 폭발 시기에는 다른 생물을 먹이로 삼는 포식자가 출현했다.

 

이로 인해 공격하는 자와 방어하는 자의 군비경쟁이 시작되었다. ‘눈(eye)’의 출현이 군비경쟁을 치열하게 했다. 땅 위라는 신천지를 얻은 물고기는 어떤 물고기였을까. 이들의 조상은 바다에서 생존 경쟁에서 패하여 기수역(汽水域)으로 진출한 물고기들이었다. 싸움에서 계속해서 패배한 물고기는 결국 강 상류를 서식지로 삼았다.

 

강을 서식지로 삼은 물고기들 중에서 작은 물고기는 민첩하게 헤엄치는 실력을 키웠다. 반면 빨리 헤엄칠 수 없는 느린 대형 어류는 물이 얕은 곳으로 쫓겨났다. 강 상류로 쫓겨난 물고기가 결국 땅 위로 상륙해서 양서류가 되었다. 이 양서류는 파충류와 공룡, 조류, 포유류의 조상이 되었다.(108 페이지) 지구에 생명이 탄생한 뒤 그들은 줄곧 바다속에서 살았다.

 

5억년전쯤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맨틀 대류가 일어나 거대한 대륙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바다에서 살던 생명은 이 광활한 개척지를 목표로 삼았다. 펼쳐진 대지에 최초로 진출한 것이 식물이다. 지금의 육상 식물의 조상은 조류(藻類)의 일종인 녹조류다. 광합성을 하는 녹조류에게 빛을 마음껏 쬘 수 있는 육지는 매력적인 환경이었다.

 

다만 육지는 생물에게 유해한 자외선이 쏟아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식물 스스로의 작용으로 개선되었다. 바닷속에 있는 식물들이 방출하는 산소로 인해 상공에 점차 오존층이 만들어졌다. 고생대 실루리아기인 4억 7천만년전 식물이 상륙했고 데본기인 3억 6천만년전 양서류의 조상인 어류가 상륙했으니 식물이 1억년 이상 빨리 상륙한 것이다.(117 페이지)

 

최초로 상륙한 식물은 이끼식물을 닮은 식물이었다. 이끼는 몸의 표면으로 수분과 영양분을 흡수한다. 이는 물속의 녹조류와 같다. 이끼는 따라서 몸 주변이 건조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물가에서만 자랄 수 있었다. 그 후 육상생활에 적합하도록 더욱 진화한 것이 양치식물이다. 양치식물은 줄기를 발달시켰다. 물속에서는 몸을 지탱해주는 구조가 필요 없었지만 육지에서는 몸을 지탱하기 위한 튼튼한 줄기가 필요했다.(117 페이지)

 

양치식물은 건조한 환경을 견딜 수 있도록 체내 수분을 보호하기 위해 단단한 표피를 발달시켰다. 표피를 발달시키면 수분이 체외로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외부에서 수분을 흡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양치식물은 수분을 흡수하기 위한 뿌리와, 뿌리로 흡수한 수분을 몸속으로 전달하기 위한 통로 역할을 하는 헛물관을 발달시켰다. 관다발을 발달시켜 몸속에 물을 효율적으로 운반함으로써 양치식물은 가지를 무성하게 만들 수 있었다.

 

가지가 무성해지면 잎이 많이 달려서 광합성을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양치식물은 거대하고 복잡한 몸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118 페이지) 최초의 식물이 육지에 진출했을 때 흙은 없었다. 단지 모래와 돌로 이루어진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생물 사체 같은 것이 분해되어 흙이 되었다. 유기물이 풍화한 암석과 섞여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영양분을 함유한 흙이 되었다. 양치식물은 흙을 기반으로 서식지를 넓혀갔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뿌리를 가지게 되었다. 양치식물이 물가에서 분포를 넓혀가자 당시까지 물가에서 살았던 양서류는 공룡의 조상인 파충류로 진화했다.(123 페이지) 양치식물이 번성하게 되자 육상에는 풍부한 생태계가 구축되었다. 양치식물이 진화하면서 분포를 넓혀 식물의 양과 종류가 늘어나자 식물을 먹이로 삼는 다양한 파충류도 종류가 늘어났고 초식 파충류를 먹이로 삼는 육식 파충류도 발달했다.

 

양치식물은 육상으로 진출했으나 수정(受精)을 해서 자손을 남겨야 했기 때문에 물가를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양치식물은 포자로 이동한다. 포자가 발아해서 전엽체가 형성된다. 전엽체 위에서 정자와 난자가 만들어지고 정자가 물속을 헤엄쳐 난자에 도달해서 수정한다. 정자가 헤엄쳐서 난자에 도달하는 것은 생명이 바다에서 탄생했음을 알게 하는 단서다. 지상에 진출한 양치식물도 정자가 헤엄칠 물이 필요했기에 습지에서만 자랐다.

 

양치식물이 이루지 못한 건조 지역 진출을 이룬 것이 겉씨식물이다. 겉씨식물이 출현한 것은 5억년전인 고생대 페름기다. 양치식물이 건조한 지역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것은 씨앗을 발명했기 때문이다.(125 페이지) 씨앗은 바람의 도움을 받아 물이 있는 장소까지 도달할 수 있다. 포자는 종자식물의 꽃가루에 해당한다. 꽃가루는 정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세포를 만든다.

 

정세포는 정자와 비슷하지만 헤엄치는 편모를 가지고 있지 않아 정세포라 불린다. 꽃가루는 밑씨와 만나 종자를 만든다. 종자가 될 밑씨에 꽃가루가 닿으면 꽃가루관이라는 관이 암술 속으로 뻗쳐진다. 정세포가 꽃가루관을 타고 내려가 밑씨 안의 난세포와 수정한다. 이런 방법에는 물이 필요하지 않다. 이런 까닭에 종자식물은 물이 없는 건조지대로 분포를 넓혀갔다.

 

양치식물은 한 번(포자로) 이동하지만 종자식물은 두 번(꽃가루와 씨앗으로) 이동한다. 양치식물의 포자에는 암수 구별이 없지만 꽃가루는 번식할 때 수컷 역할을 한다. 꽃가루가 멀리 이동함으로써 더 다양한 개체와 교배함으로써 다양한 자손을 남겼고 진화의 속도도 가속화할 수 있었다. 겉씨식물이 진화하게 되자 다양한 공룡이 탄생했다. 빠른 속도로 진화를 이룬 겉씨식물은 초식 공룡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이에 공룡도 거대화되었다. 겉씨식물과 공룡이 거대화 경쟁을 하면서 거대한 겉씨식물로 이루어진 숲과 거대한 공룡을 주인공으로 하는 생태계가 만들어졌다.(127 페이지) 다섯 차례의 대멸종을 빅 파이브라 한다. 네 번째 대멸종인 트라이아스기 멸종은 거대 초대륙 판게아가 분열해 땅속에서 대량으로 토출(吐出)된 이산화탄소와 메탄으로 인해 지구 온도가 상승한 결과다. 거대한 화산 폭발로 이산화탄소가 대기를 가득 채워 산소 농도가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저산소 환경에 대한 적응력을 키운 파충류가 번성하면서 공룡으로 진화했다. 6500만년전인 백악기에 다섯 번째 대멸종이 일어났다. 지금의 멕시코 유카탄 반도 앞바다에 운석이 충돌해 공룡이 대거 사라졌다. 당시의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생물이 있다. 생존 원인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공통점이 있다. 공룡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제한된 곳에서 살던 패자들이란 점이다.

 

과거의 대멸종은 화산 폭발이나 운석 충돌 등 물리적 현상으로 인해 발생했다. 하지만 여섯 번째 대멸종은 생명체인 인류에 의해 시작되었다. 운석이 지구에 충돌하기 전부터 공룡은 식물 진화로 인해 점차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겉씨식물은 꽃을 피우지 않는다. 쥐라기 숲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꽃이 없었다. 쥐라기부터 중생대 말기 백악기에 걸쳐 꽃이라는 기관을 발달시킨 속씨식물이 출현했다.

 

속씨식물은 속도를 무기로 번성해갔다. 밑씨가 씨방에 싸이게 된 것은 혁신적인 사건이다. 밑씨는 씨방 속에 싸여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수정할 수 있게 되었다. 수정 속도도 빨라졌다. 씨방이 없는 겉씨식물은 꽃가루가 암술에 도착한 후 1년을 기다려야 수정이 완료되지만 씨방이 있는 속씨식물은 꽃가루가 암술에 도착한 후 24시간 이내에 수정이 완료된다.(143 페이지) 진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속씨식물은 아름다운 꽃을 가지게 되었다.

 

식물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은 곤충을 불러들여 꽃가루받이를 시키기 위해서다. 겉씨식물은 풍매화(風媒花)다. 꽃을 아름답게 장식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꽃잎을 장식하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많은 꽃가루를 만드는 것이 낫다. 바람에 꽃가루 받이를 맡기면 수꽃에서 암꽃으로 꽃가루가 도착할 확률이 낮다. 겉씨식물에서 진화한 속씨식물도 처음에는 풍매화였을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곤충이 꽃가루를 옮기게 되었다.

 

식물은 곤충의 먹이로 줄 달콤한 꿀도 준비하고 좋은 향기를 풍기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곤충을 불러들였다. 식물은 초식 공룡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다양한 궁리를 했을 것이다. 알칼로이드라는 독성 화학물질을 몸에 지닌 것이 대표적인 예다. 소화 불량 또는 중독으로 공룡에게 큰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속씨식물은 외떡잎식물과 쌍떡잎식물로 나뉜다.

 

식물이 풀로 진화했다는 것은 외떡잎식물로 진화했다는 의미다. 오늘날에도 외떡잎식물은 모두 풀이다. 외떡잎식물이 된 것은 불필요한 것은 모두 버리고 복잡한 구조를 단순화한 것이다. 속씨식물은 극적인 진화과정에서 열매도 발달시켰다. 공생하기 위해서였다. 씨방을 먹은 포유류가 씨방 속 씨앗을 체외로 배설해서 결과적으로 씨앗이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열매를 먹고 씨앗을 옮겨준 최초의 동물은 포유류였다. 포유류는 이빨이 있어 씨앗을 부술 우려가 있다. 조류는 이빨도 없고 하늘을 날기에 이동 거리도 길어 식물에게는 최적의 파트너다. 식물은 씨앗이 성숙해지기 전에 먹이가 되지 않도록 덜 익은 열매는 잎처럼 녹색으로 만들어 눈에 띄지 않게 했다. 쓴맛으로도 열매를 지켰다. 식물은 곤충을 이용하게 되었다.

 

곤충을 위해 달콤한 꿀을 준비한 것이다. 얄미운 적이었던 곤충을 교묘하게 동료로 만든 것이다. 꽃도 열매도 백악기에 발달했다. 새도 곤충도 꽃가루나 열매를 먹으려고 꽃으로 접근한 것이지만 식물은 그들을 파트너로 만들었다. 운석이 지구를 폭격한 후 공룡이 멸종했고 지구 기후가 한랭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추위에 견딜 수 있는 시스템이 개발되었다. 나뭇잎을 떨구는 것이다.

 

식물에게 잎은 광합성을 위해 필수적인 기관이다. 하지만 잎을 통해 수분이 증발한다. 운석 충돌로 발생한 대량의 먼지가 대기권으로 올라가 햇빛을 차단하자 식물의 광합성 활동이 감소했다. 기온이 내려가면 물기나 영양분을 흡수하는 뿌리의 기능이 둔화되어 물의 양이 부족해진다. 광합성 능력은 저하되고 잎의 증산 작용으로 귀중한 수분은 낭비되는 상황이라면 잎은 짐이 된다. 그래서 잎을 떨어트리게 되었다.

 

떡갈나무, 녹나무 등은 겨울에도 잎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나무를 상록수(常綠樹)라고도 하고 조엽수(照葉樹)라고도 한다. 잎의 표면에 광택이 나기 때문이다. 나뭇잎이 큐티쿨라(cuticula; 각피; 殼皮)라는 왁스층으로 두껍게 코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큐티쿨라가 수분 증발을 막아준다. 니치(niche)라는 말이 있다. 생태 지위(서식지), 틈새시장, 벽감(壁龕) 등을 의미한다. 생태학에서는 당연히 서식지를 의미한다.

 

니치는 단순히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장소라고 해도 먹이가 다르면 니치를 나눌 수 있다. 사는 계절이 달라도 니치를 나눌 수 있다. 장소와 먹이를 변화시켜 공존하는 것을 서식지 격리라고 한다. 하나의 니치에는 하나의 종만이 살 수 있기에 넘버원이 아닌 것들을 다 사라져야 하지만 자연계에는 많은 생물이 존재한다. 니치를 확보한 생물종이 현재의 니치 주변에서 새 니치를 찾는 것을 니치 시프트라고 한다.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하늘을 난 생물종은 곤충이다. 고생대에 거대 곤충이 활약한 것은 산소 농도 때문이다. 석탄기에는 식물이 말라도 그것을 분해하는 균류가 별로 없었다. 이렇게 해서 수목이 화석화된 것이 석탄이다. 지층에 석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석탄기(the Carboniferous period)라 한다. 균류가 활발하게 움직이자 식물을 분해하면서 산소를 소비해 산소 농도가 저하되었다.

 

저산소 시대에 적응해 번성한 생물이 공룡이다. 기낭(氣囊)을 발달시켰기 때문이다. 폐의 앞뒤에 붙어 있는 기낭은 공기를 비축하고 내보내는 펌프 같은 역할을 한다. 공룡 중에서 날개를 진화시켜 능숙하게 비행한 것이 조류다. 익룡에게 하늘을 빼앗긴 조류들이 힘으로 지배하는 경쟁에 참여하지 않고 익룡과 니치를 나누기 위해 소형화되었다. 그 결과 새의 종류가 증가했다.

 

새는 기낭을 가지고 있어서 높은 하늘까지 날 수 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생물의 진화과정은 수수께끼다. 곤충도, 새도, 박쥐도, 어떤 생물도 어떤 진화과정을 거쳐 날개를 가지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날아다닐 수 있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텐데 중간 단계의 생물 화석은 발견되지 않았다.(199 페이지)

 

“새는 날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날려고 하고, 황소는 뿔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받고자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리라.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황소는 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뿔을 갖게 되었고, 새는 먼저 날기를 원하였기에 날개를 갖게 되었고 그래서 날았다.”는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포유류 중 수관(樹冠)을 니치로 삼은 것이 원숭이다. 포유류 중에서 유일하게 붉은 색을 볼 수 있는 동물이 원숭이다. 과일을 먹기 위해 잘 익는 과일 색을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인지 아니면 붉은 색을 볼 수 있어서 과일을 먹게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우리 조상들은 새와 마찬가지로 잘 익은 붉은 과일을 인식하고 과일을 먹이로 삼게 되었다.(205 페이지) 볏과 식물은 초식 동물이 먹기 힘들게 하기 위해 규소로 뻣뻣한 잎을 만들었다.

 

규소는 유리의 원료로 사용되기도 하는 단단한 물질이다. 규소는 흙 속에 다량으로 녹아 있어서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볏과 식물의 출현으로 먹이를 먹지 못하게 된 초식 동물들은 대부분 멸종한 것으로 추측된다. 볏과 식물은 먹이로 적합하지 않다. 이에 소, 말 등의 초식동물이 생각해낸 것이 여러 개의 위를 갖는 것이다.

 

소의 경우 첫 번째 위는 용적이 커서 먹은 풀을 저장할 수 있다. 미생물이 작용하여 풀을 분해해 영양분을 만들어내는 발효조이기도 하다. 두 번째 위는 반추(反芻) 위다. 세 번째 위는 첫 번째 위와 두 번째 위로 먹이를 되돌려보내거나 네 번째 위로 먹이를 내보내는 등 먹는 양을 조절하는 곳이다. 네 번째 위는 위액을 분비해 먹이를 소화시킨다. 영양가가 거의 없는 볏과 식물만 먹는 것치고는 소나 말의 몸집이 크다. 발달한 내장을 가지기 위해 용적이 큰 몸이 필요했다.

 

패자(敗者)였던 호모 사피엔스는 뇌가 작지만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하는 소뇌가 발달했다. 그들은 도구도 이용했다. 네안데르탈인도 도구를 사용했지만 살아가는 힘이 뛰어나 집단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도구를 발명하거나 새로운 연구가 이루어져도 공유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생물이 넘버원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넘버원이 살 수 있는 장소를 니치라고 한다. 니치는 그 생물만 존재하는 온리원의 장소다. 모든 생물은 온리원이며 넘버원이다. 지구 어딘가에 니치를 찾을 수 없었던 생물은 멸종했다. 다양성이 중요하다.

 

인간의 뇌는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구별해서 단순화해야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다양한 것을 단순화해서 평균화하거나 순위를 매겨서 이해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뇌의 특성상 비롯되는 편의적인 것일 뿐이다. 세상은 더 다양하고 풍부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의 생존전략 3부작 중 한 권인 ‘속이고 이용하고 동맹을 통해 생존하는 식물들의 놀라운 투쟁기’를 부제로 한 ‘싸우는 식물’을 읽어야겠다. 이 책은 3부작의 첫 권이자 우리가 수동적이고 정적인 것으로만 인식하는 식물의 놀라운 역동성과 치열함을 알 수 있는 책이다. 큰 틀에서 보되 세밀한 부분까지 아우르기, 내가 저자로부터 배운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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