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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벨로퍼 윤선도 - 정원으로 서남해안을 경영하다
이태겸 지음 / 픽셀하우스(Pixelhouse)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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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시조 시인으로 먼저 알았고 예송논쟁을 통해 알았다. 이 외에 어떤 면모로 만나볼 수 있을까? 정원으로 서남해안을 경영했던 인물이리라. 물론 서남해안 경영을 시작한 시기보다 예송논쟁이 후다. 고산은 해남 윤씨로 그의 집안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고조부인 윤효정에게 시집온 해남 정씨로 인해 내리 내리 부유한 삶을 살았다.

 

디벨로퍼란 이름으로 윤선도를 규정한 책이 있다. 조경학 박사 이태겸의 ’디벨로퍼 윤선도‘란 책이다. 내가 디벨로퍼란 명칭을 안 것은 기농 정세권(鄭世權) 선생을 통해서다. 이 분은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디벨로퍼로 활약한 분으로 북촌 한옥 마을 조성의 주역이기도 하다. 디벨로퍼란 땅 매입부터 기획, 설계, 마케팅, 사후관리까지 총괄하는 부동산 개발업자를 말한다.

 

그럼 17세기 인물인 윤선도를 디벨로퍼로 규정하는 것은 타당한가? 타당하리라 본다. 당시 그런 개념은 없었지만 그런 역할은 있었기 때문이다. ’디벨로퍼 윤선도‘의 부제는 정원으로 서남해안을 경영하다이다. 윤선도는 유년기에 임진왜란을 겪었고 장년기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겪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조직하여 해남에서 강화도로 향하던 중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하여 배를 돌려 제주도로 향했다.

 

당시 보길도는 제주도로 향하던 윤선도가 풍랑을 피해 잠시 들른 곳이었다. 하지만 그는 보길도가 풍수명당이라는 사실에 마음을 돌려 그곳에 머물렀다. 윤선도는 전쟁 중 강화까지 갔다가 임금께 문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윤선도는 1637년 보길도에 자리를 잡은 이래 1671년 6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 13년 동안 모두 7차례에 걸쳐 보길도에 머물렀다.

 

그가 노년에 조성한 해남 일대의 정원들은 일생에 걸친 역경 이후에 세속적 삶에서 벗어나 이상향을 현실세계에 구현하려 했던 곳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디벨로퍼 윤선도'는 윤선도의 자연관이나 풍수지리 등에 기반을 둔 해석에 국한된 기존 윤선도 정원 해석에 관한 책과 달리 정원을 윤선도의 경제활동과 연관지은 책이다.

 

정조가 풍수에 관한 한 무학대사와 견줄 정도였다고 본 윤선도는 효종 승하 후에는 산릉을 정하는 직책을 맡기도 했다. 윤선도는 자연을 최고의 경지로 보았고 이상적인 물아일체의 환경이라 생각했다. 더불어 인간세상에서 자신을 격리할 수 있는 은둔의 장소이자 모든 근심을 털어내고 즐겁게 놀 수 있는 평온한 장소로 인식했다.

 

이상향에 대한 윤선도의 동경은 보길도에 정원을 만들기 전부터 이미 잠재되어 있었고 보길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접하면서 비로소 현실에 실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윤선도는 소학의 가르침을 중시하여 현실에서의 실천과 예악을 통한 수련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에게 예악과 경세치용은 같은 맥락으로 이어져 있다. 

 

부용동 정원은 윤선도가 섬에 들어간 1637년 2월부터 1668년까지 30여년의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연구자들은 전통정원의 공간적 가치를 다음의 세 가지에서 찾고 있다. 첫째 정원은 도교, 유교와 성리학, 음양오행론, 풍수지리 등 동양사상이 물리적 형태로 표현된 곳이며 이러한 사상들의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둘째 후세에 발복(發福)을 지원하는 풍수지리가 정원에 입지를 결정하는 것에서부터 공간구성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게 직접 적용된다는 것이다.

 

셋째 건축물과 일체화된 외부 공간으로서 마당이나 뜰을 정(庭), 숲과 물 등의 자연물과 자연지형을 원(園)으로 보고 전통정원의 형태적 가치를 분석했다. 정원은 일차적으로 자연 형과 지세 등의 물리적 특성에 의해 좌우되고 2차적으로는 정원주의 경제력과 같은 사회적 배경에 의해 좌우된다. 조선조 선비들에게 은둔은 자연에 대한 희구와 현실적 역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어려운 현실을 피해 세상에서 격리된 명승을 찾아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것이었다.

 

부용동과 금쇄동 권역은 섬과 깊은 산속이라는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세상과 떨어져 있으며 경치 역시 뛰어나 은거지의 요건을 잘 갖추고 있다. 대부분의 섬은 식수와 농업용수를 구하기가 어렵다. 보길도 역시 1980년대 보길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물 확보가 어려워 살기에 척박한 곳이었다. 그러나 기존 연구에서 부용동 원림은 분지로 물 확보에 유리하며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육지와 적당한 거리에 있어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생활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윤선도 원림은 도가적 이상향 같은 빼어난 경치를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기본적 요건을 잘 갖춘 곳으로 평가된다. 부용동 원림을 도교적 이상향을 현실세계에 구현하여 은둔하며 자연을 즐기고자 했던 공간으로 보는 이유다. 부용동 정원은 윤선도가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연에 대한 자신만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공간으로 해석된다.

 

자신의 이상향인 신선세계를 현실세계에 구현하기 위해 정원으로 만들고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 윤선도가 세연정 일대를 향유한 모습은 예악을 통한 소학의 실천이라는 측면보다 유희 공간으로만 와전되어 현대에는 윤선도가 세연정 일대에서 사치스러운 위락 공간을 만들고 향락을 즐겼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윤선도의 원림 조성 목적을 은거라고 보는 시각이 있지만 짧은 시간 다수의 원림을 조영하여 동시에 경영한 점과 지속적으로 간척지 개간 등의 경제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원림의 조영을 다른 측면으로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산림천택이란 단순하게 산과 임야, 내와 못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지시 대상을 넘어 바다, 갯벌 등을 포함한 농경지 이외의 여러 형태로 직접 산출물을 낳는 대지를 총칭한다.

 

조선사회는 초기에 산림천택의 사점 금지를 법제화 하여 산림천택을 공유적 성격의 토지로 묶어 두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부터 산림천택의 사적 소유가 심화되었고 17, 18세기에는 사회 지배층에 의한 산림천택의 분할이 주요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해남 윤씨 가문은 일차적으로는 부의 증대를 위해 간척지를 개간하여 농토를 확충했다.

 

진도 굴포리 간척지는 윤선도 때까지 약 200 정보(60만평) 가량의 간척이 이루어졌다. 진도 지역 간척의 목적은 가문의 전장 획득뿐 아니라 영토가 없어 굶주림에 시달리는 주민들을 구제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실제로 그들은 간척 후 농지 일부를 주민에게 나눠주었다. 진도 굴포리에는 지금도 윤선도의 간척을 기념하는 굴포신당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해남 윤씨 가문에서 섬 지역에 입안(立案; 개간을 위해서 미리 허가를 받는 일종의 임시적인 개간권)을 받은 목적은 간척지를 개간하여 농경지를 획득하고자 한 점도 있었지만 도서지역은 특산물을 획득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윤선도를 포함하여 가문의 종손들은 해안 가까운 곳이나 섬 지역에 별서정원을 짓고 예술 작품을 창작하며 원림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그러한 입지를 선택한 이유는 서남 해안 곳곳에 있는 경작지와 섬을 경작하기 위한 교두보 확보라는 실질적인 목적 때문으로 판단된다.

 

녹우당에 남겨진 고문서에 의하면 가문에서 개간한 간척지를 백성이 점유하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입안 기록을 들어 가문의 땅임을 확인하는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가문의 전장 관리가 용이한 곳에 원림을 조성하고 가문의 경작지를 경영하였다.(녹우당은 해남 윤씨 가문의 종택으로 효종이 윤선도에게 내려준 경기도 수원의 사랑채를 해체하여 해로를 통해 해남으로 옮긴 건물이다. 윤선도는 효종의 ’대군; 大君’시절 스승이었다.)

 

윤씨 가문의 경작지는 해안과 도서지역에 위치하여 육로보다 해로를 통해 관리하기가 용이했으므로 별서정원은 주로 해안가 또는 섬에 조성하였다. 보길도의 윤선도 원림은 세연정, 동천석실, 낙서재, 곡수당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세연(洗然)이란 주변 경관이 매우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하다는 의미다.

 

윤선도는 부용동 안산(案山) 중턱 위 석함 속에 정자를 지어 동천석실이라 부르고 수시로 방문하며 부용동 제일의 절승(絶勝)이라 하였다. 병자호란 직후인 1637년 2월 윤선도가 처음 입도할 당시 보길도는 공도(孔島)였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간 것이 우연이었는지 이전에 알고 있었던 곳이어서 간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보길도 입도 19년 후인 1655년(효종 7년) 소나무 보호를 위해 섬 주민을 모두 몰아내자는 논의가 있자 윤선도는 사람이 사는 것이 송금(松禁)에 이롭다는 상소를 올렸다. 윤선도는 상소에서 “신은 보길도를 사랑합니다. 그곳은 천석(川石)의 경치가 뛰어나서 귀신이 깎고 새긴 듯하니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라 했다.

 

윤선도는 자신이 보길도에 원림을 조영한 것이 소나무 보호, 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보길도는 소금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지니고 실재 소금을 생산하였던 만큼 경제적 가치가 높았다. 윤선도의 입도를 헤아리게 하는 대목이다. 해남 윤씨 가문은 해언전(海堰田) 간척과 도서(島嶼) 지역 경영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윤선도가 가주였을 시기에 윤씨 가문은 이미 화산 죽도와 맹골도를 경영하고 있었다.

 

세연지는 지금까지 위락공간으로 알려져 왔으며 부가적인 기능으로는 보길도 지역 농사를 위한 저수지로 잘못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에 보길도는 금산(禁山)이었다. 금산 주변으로는 화전 등의 경작이 엄히 금지되었다. 윤선도는 보길도에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밀물과 썰물을 이용해 염전에 바닷물을 끌어들이고 농축시킨 뒤 그 물을 가마솥에 끓이는 자염(煮鹽)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했다.

 

이 방법으로는 소량의 소금만을 얻을 수 있었다. 안정적인 목재 확보와 민물 공급이 관건이었다. 윤선도는 세연지에 연못과 보를 축조함으로써 제염을 위한 일정량의 수량을 상시 확보할 수 있었다. 윤선도는 많은 간척사업을 통해 수리시설을 잘 이해하고 이를 원림에 활용했다. 윤선도 말년 보길도에는 가족과 제자들이 함께 거주했다. 곡수당의 연지를 통해 늘어난 사람들에게 필요한 식수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윤선도는 문소동을 미래지향적인 풍수명당으로 여겼다. 이곳에 자신의 묘를 쓴다면 자손 대대로 번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의 사후 묘지로서 낙점한 곳을 생전에 지키기 위해 그 일대를 정원으로 꾸민 것이다. 해남 윤씨 가문은 선박 건조 후 대여세를 받기도 하였고 경제적 가치가 높았던 제염 활동도 활발히 했다.

 

조선 시대 토지 제도에 따르면 윤선도가 금산이었던 보길도에 정원을 만들고 거주한 것은 사회적으로 허락받지 못한 행위였다. 그런데 윤선도는 병자호란 직후 금산 관리라는 명분으로 보길도에 거주했다. 보길도지에 세연정의 정자에 앉으면 앞의 솔숲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숲이 무성하여 보이지 않지만 그 시절에는 바다로 전망이 열려 있어 배가 들고 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윤선도는 풍수 길지인 문소동을 자신의 사후 묫자리로 선택했으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30여년의 시간 자신의 풍수길지를 지켜야 했다. 윤선도는 매일 금쇄동, 문소동, 수정동을 산책했다. 산림자원 및 풍수길지를 감시, 관리하기 위한 목적에 따른 행동이었다.

 

윤선도의 정원은 미학적 측면에서 무릉도원의 은일(隱逸) 공간이 아니라 원림 경영(經營) 차원의 공간이었다. 이중환은 지리, 생리, 인심, 산수를 가거지(可居志)의 입지조건으로 꼽았다. 지리는 풍수설에 의한 입지와 관련된 항목이다. 생리는 기름진 땅과 물자의 활반한 교역과 수운(水運)이 가능한 것과 관련된 항목이다. 넷 중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곳이 아니다.

 

이중환은 스스로 사회적 이상향을 이 땅에는 없는 곳<비지지지; 非地之地>으로 꼽았다. 하지만 윤선도는 이상향을 부분적으로나마 실현했다. 윤선도가 만든 정원,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룬 행위는 도교적 이상향과 사회적 이상향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사회경제적 공동체로서의 이상향의 조건을 갖추었다.

 

윤선도는 가문의 전장(田莊) 경영, 지리와 해양, 자원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가문의 경작지를 간직하고 관리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에 원림들을 조성했다. 그곳에서 그는 꿈꿔왔던 이상향으로서 금쇄동과 부용동 원림을 꾸몄고 유학자로서 소학(小學)을 실천하는 공간으로 삼아 노래와 시를 지으며 정원을 향유하였다.

 

그간 단편적으로만 알던 윤선도를 확연히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윤선도와 소학의 관계도 새롭게 다가왔다. 사놓고 읽지 않고 있었던 ‘윤선도 평전’을 읽어야겠다.

 

역사와 관련이 깊음에도 읽지 않은 평전을 조경학 박사의 글을 읽고 읽어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왠지 낯설다. 그럼에도 좋은 자극을 받았음에 감사한다. 미수 허목의 십청원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얻지는 못했다. 경제와 생거(生居)의 의미를 음미한 시간이었다.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그의 가문이 중국을 통해 입수한 새로운 분야의 책이 윤선도의 행보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란 점이다. 그의 호 고산(孤山)은 독야청청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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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인문학으로의 초대 - 역사.철학.사회학을 관통하며 입체적으로 보는 교양과학 입문서
노에 게이치 지음, 이인호 옮김 / 오아시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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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에서 과학(科學)이란 말이 등장한 것은 그들이 쇄국정책을 버리고 서구 문물과 지식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기였다. 에도시대(1603 - 1867)가 끝나고 메이지시대(1868 - 1912)가 시작된 19세기 후반을 말한다. 과(科)란 벼 화(禾)와 말 두(斗)의 결합어로 '되나 말 등의 용기로 곡물의 양을 재는 것'을 의미한다. 농작물의 양을 재며 품질을 평가한다는 뜻에서 등급을 정하기 위해 일정 조건을 생각하고 규정을 정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19세기 중반 제2차 과학혁명기에 과학자라는 전문직업인이 등장했다. 즉 그 시기 이전 살았던 갈릴레이나 뉴턴은 자연철학자였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철학이라 불렀고 뉴턴은 ‘프린키피아’를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 불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질서 있고 규칙적인 운행을 반복하는 우주를 코스모스라 불렀다. 카오스와 대립되는 코스모스는 여성의 장신구를 의미하는 코스메틱(화장품)과 어원이 같다.

 

코스모스는 영원히 계속되는 필연적인 질서이며 그 자체가 로고스(이치)를 내포하고 있다고 받아들여졌다. 코스모스라는 말을 우주라는 의미로 쓴 사람들이 피타고라스학파다. 우주의 수학적 질서를 탐구한 피타고라스학파의 사상은 플라톤 사상으로 이어졌고 후일 과학혁명 시기에 갈릴레이와 케플러에 의해 부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상계의 물체는 아이테르(에테르)라는 불생불멸의 고귀한 물질 즉 5(번째)원소로 이루어져 있고 지상계는 생성, 소멸, 변화를 반복하는 불완전한 세계, 천상계는 영원한 질서가 지배하는 부동, 불변, 완전한 세계라 보았다.

 

지상계 물체의 자연운동(외력에 의하지 않고 일어나는 운동)은 시작과 끝이 있는 상하수직 운동이고 천상계 물체의 자연운동은 오직 원운동뿐이다. 원이야말로 시작과 끝이 없는 완전한 도형으로 생각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을 장소 변화, 양적 증감, 질적 변화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보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돌이 아래로 떨어지는 현상꽈 식물이 자라는 현상을 모두 운동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이를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자연운동과 달리 외부에서 힘이 가해짐에 따라 하는 운동을 강제운동이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의 운동 속도는 물체에 가해진 동력에 비례하고 매질의 저항에 반비례한다고 보았다. 매질의 저항이 0일 때 즉 진공에서는 물체의 속도가 무한대이며 이는 물체가 A 지점과 B 지점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는 명백히 불합리하다. 그렇기에 진공은 존재하면 안 된다. 즉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

 

고대 그리스의 우주론은 중세 기독교 세계에 그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고대와 중세 사이에는 커다란 단절이 존재했다. 그리스 과학의 정수(精髓)는 동방 비잔틴 제국을 통해 아랍으로 전해져 그곳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해나갔다. 아랍으로 전해진 그리스 과학은 12세기가 되어서야 유럽으로 역수입되었다. 12세기 르네상스는 문학이나 예술이 아니라 학문(과학) 부흥 운동이었다. 이는 근대과학이 성립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2세기의 일대 번역 운동을 통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의 수학이 유럽 세계로 다시 전해졌다. 유클리드 기하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논증 정신이 그리스 과학의 특징이라면 연금술로 대표되는 실험 정신은 아랍 과학의 특징이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독교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결합했다. 스콜라 철학이 탄생한 것이다.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융합된 스콜라철학의 권위에 반기를 든 혁신 운동이 16, 17세기의 과학혁명이다. 역사학자 허버트 버터필드에 의하면 과학혁명은 기독교 출현 이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다. 이에 비하면 르네상스나 종교개혁도 중세 기독교 세계의 단순한 일화일뿐이며 내부적인 교체극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 역학(力學)의 기초를 세운 사람은 갈릴레이였다. 그는 운동론을 혁신했을뿐 아니라 자연관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갈릴레이는 자연계를 구성하는 실재적 성질은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1차 성질(크기, 모양, 개수; 個數’, 느리고 빠른 운동)뿐이라고 생각했으며 수치화할 수 없는 2차 성질(물체의 색, 소리, 맛, 냄새)은 자연 인식의 대상에서 제외했다.

 

감각적인 성질을 배제함으로써 질적 차이를 지니지 않는 공허한 공간 속을 색, 소리, 맛, 냄새를 지니지 않는 물체가 수학적 법칙에 따라 운동한다는 근대과학적 자연관이 성립했다. 그 후의 과학사는 색과 소리 등 정성적인 2차 성질을 하나둘씩 측정 가능한 물리량으로 만들어 수학의 언어로 번역해나가는 과정이었다.

 

만유인력에서 눈여겨볼 만한 특징은 거리가 떨어져 있는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원격작용이다. 이것은 강제 운동의 원인을 물체의 접촉에 의한 근접작용에서 찾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 원리가 폐기되었음을 뜻한다. 뉴턴의 연금술 관련 유고를 입수한 경제학자 케인스는 뉴턴을 최후의 마술사라고 평했다. 뉴턴이 과학혁명을 완성한 근대과학의 창시자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뉴턴은 현대과학자의 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최후의 르네상스인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했으면 한다.

 

고대와 중세를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은 우주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 또는 생명체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유기체적 자연관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고대 그리스에서도 세계가 원자와 공허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현상이 공허속을 운동하는 원자의 위치, 배열, 뭉침, 흩어짐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유물론적 사상도 존재했다. 그러나 원자론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자연관과 공존하기 어려웠기에 오랜 세월동안 비주류 이론 취급을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첫 번째 의미가 자기 자신 안에 운동의 원인을 지니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자연이란 스스로 생장, 생성하는 영혼 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유기적 존재이자 생명적 존재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형상론은 만물은 질료와 형상이 합성된 것이라는 사상이다. 집을 예로 들면 목재와 회반죽은 질료이며 완성된 집의 모양이 형상이다.

 

온갖 운동은 가능태인 질료가 현실태인 형상을 목적지로 삼아 나아가기 때문에 생긴다. 유기체적 자연관에서는 산천초목부터 시작해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가 각각 내부에 지니는 생명적인 원리에 바탕을 두고 목적지를 향하는 운동을 한다고 설명했다. 질료란 규정되지 않은 소재, 재료를 가리키며 가능태를 의미한다. 형상이란 소재와 재료를 한정하는 형태이며 현실태에 해당한다. 인간을 예로 들면 신체는 질료이고 영혼은 실체적 형상이다.

 

데카르트는 물체의 본성을 연장으로 간주했다. 물체란 생명적이고 정신적인 것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 연장 실체란 의미이다. 근대과학은 12세기 르네상스를 통해 그리스 과학의 논증정신과 아랍 과학의 실험정신이 만나 형성되었다. 이는 연역법에 바탕을 둔 논증과학과 귀납법에 바탕을 둔 실험과학의 결합, 또는 합리적 방법과 경험적 방법의 결합을 의미한다. 근대과학의 방법론을 가설연역법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역적 논증(삼단논법의 이론) 구조를 설명했다. 또한 귀납적 논증을 중심으로 과학 방법론을 정형화했다. 연역법은 전제가 옳을 경우 반드시 결론이 옳지만 지식을 확장하거나 새 지식을 얻을 수 없다. 개별 명제에서 보편 명제를 끌어내는 귀납법은 지식을 확장할 수는 있지만 전제와 결론의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으며 개연적(확률적)일뿐이다. 하지만 과학연구 현장에서 귀납법은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다.

 

수학이나 논리학 같은 형식과학과 달리 경험과학에서는 연역적 추론에만 의지할 수 없다. 자연과학이 경험과학인 이상 언제나 새로운 경험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은 당연하다. 가설은 아무리 실험으로 검증됐다 해도 절대적인 진리의 자격을 획득하지 못한다.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경험으로 가설이 반증될 가능성은 언제나 남아 있다. 따라서 자연과학의 법칙에 수학, 논리학과 동등한 논리적 필연성을 요구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과학이론과 과학 법칙은 영원히 가설로 머물러 있으며 언제나 경험적 실험에 의해 수정되거나 폐기될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귀납법, 연역법, 가설연역법도 절대 만능의 방법론이 아니다. 확실히 이들은 근대 과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이론과 법칙을 발견 할 때는 논리적 추론만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유추나 은유 등 비형식적인 추론 방법이나 퍼스의 귀추와 같은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성에 관한 발상법이 새로운 발견이나 기성 이론을 타파하는 대담한 발상으로 이어지곤 한다. 따라서 과학 연구에서 방법론이 일정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긴 하지만 과학은 그것만으로는 발전하지 않는다.

 

과학 연구는 수식과 논리적 추론에 얽매인 융통성 없는 과정이 아니라 과학자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력이 활약할 여지가 있는 역동적인 정신 활동이다. 뉴턴은 ‘프린키피아’에서 ”나는 가설을 세우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이는 과학적 가설이 아니라 데카르트식의 기계론적 가설을 의미한다. 데카르트는 우주를 신이 만든 하나의 커다란 기계 같은 것으로 보았다. 뉴턴은 물리학의 범주를 관측 가능한 현상의 범위 안에서 법칙을 탐구하는 일로 한정했다.

 

형이상학의 제거를 표어로 내걸었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검증 가능성이라는 깃발 아래 전통적인 철학을 개혁하겠다는 대담한 시도를 했다. 다시 말해 유의미한 명제는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검증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유의미한 과학적 명제와 무의미한 형이상학적 명제를 구분하려 한 것이다. 칼 포퍼는 이와 같은 논리실증주의를 내재적으로 비판하고 극복하려 했다.

 

포퍼는 반증 절차를 기반으로 한 과학 철학을 전개했다. 이에 더해 반증가능성이야 말로 과학이론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반증가능성이란 해당 가설과 모순되는 관찰 명제가 논리적으로 가능함을 뜻한다. 즉 가설이 오류일 가능성의 정도를 의미한다. 포퍼는 이 개념을 바탕으로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설정하려했다. 포퍼는 반증 가능성이 클수록 과학적이며 작을수록 비과학적이라 주장했다. 이는 얼핏 상식에 어긋나 보인다. 반증될 가능성이 클수록 그 가설은 불확실하며 오류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퍼는 실제는 그 반대이며 부정적 요소처럼 보이는 반증 가능성이야말로 과학 이론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내일은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다란 예보는 100% 확실하고 틀릴 일이 없는 예언이다. 하지만 이는 내일 날씨에 관한 어떠한 유용한 정보도 알려주지 않는다. 이에 비해 내일 오전은 맑겠지만 낮부터 비가 올 것이고 저녁에는 눈이 내릴 것이라란 일기 예보는 내일 오전에 비가 오거나 저녁에 눈이 내리지 않으면 명백히 반증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비가 오거나 오지 않을 것이라란 일기예보보다 반증 가능성이 커졌고 일기예보에 담긴 정보량과 경험적인 내용도 늘어났다. 반증가능성이 큰 가설일수록 경험적 내용이 풍부해지고 과학적인 가설이라 할 수 있다. 항진명제처럼 반증가능성을 거의 지니지 않는 가설은 자연의 이치에 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하고 경험적으로도 무의미하며 비과학적이다. 포퍼가 주장한 바는 진정으로 과학적인 이론과 가설은 반증될 위험을 감수하며 대담한 예측을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포퍼는 반증 가능성과 이를 지탱하는 비판적 방법이 과학을 과학답게 하는 요소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주장하되 만일 반증되면 이를 즉시 철회하는 과학자의 비판적 태도가 과학 탐구를 지탱한다고 생각했다. 포퍼는 ”다윈주의는 과학적 이론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으로서 다윈주의가 과학에 대해 지니는 가치는 대단히 크다.“고 말했다.

 

토머스 쿤 이전에 쿤과 유사한 주장을 한 사람이 N. R 핸슨이다. 그는‘발견의 패턴’이란 책에서 논리실증주의자가 관찰과 이론을 2분법적으로 나누고 관찰 언어와 이론 언어를 구분하는 태도를 격하게 비판했으며 관찰의 이론 의존성이라는 안티 체제를 제기했다. 핸슨은 본다거나 관찰한다는 행위가 단순히 대상을 쳐다 보는 것만이 아니라 대상에 일정한 의미를 부여하며 관찰한다는 개념을 포함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물리학 교과서에 윌슨의 안개상자에 나타난 소립자의 비적(飛迹) 사진이 실려 있다고 해 보자. 사진을 살펴보면 검은 배경 위에 하얀 선과 점이 산재하며 선 몇 개가 교차하고 있다. 만약 이 사진이 미술관 벽에 걸렸다면 보통 사람들 눈에는 추상화로 보이겠지만 물리학자가 보면 인공 원자핵 변환 흔적을 나타내는 사진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진을 알파 붕괴나 양자의 비적으로 인식하려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이론도 알고 있어야 한다. 의사가 X 사진에서 폐암 징후를 찾아낼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관찰이라는 행위는 이론적 배경이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정한 지식과 이론이라는 색안경을 낀 채로 관찰을 수행한다. 이를 관찰의 이론의존성이라고 한다. 반대로 말하면 이론적 배경과 완전히 독립적인 순수한 관찰, 순수한 관찰을 통해 기술한 순수한 사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관찰이 이론을 전제로 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행위라면 관찰과 이론 또는 관찰 언어와 이론 언어를 명확히 구별할 수 없다.

 

그러면 관찰은 이론이 올바른지 검증하거나 반증하기 위한, 이론에서 완전히 중립적인 기반이 될 수 없다. 이는 곧 관찰된 사실을 통해 이론이 올바른지 그른지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이며 이론이 관찰된 사실로 인해 반증되었다거나 부정됐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이론은 대체 무엇을 통해 부정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관해 핸슨과 쿤을 포함한 신과학철학 진영에서는 이론은 다른 새로운 이론으로 부정된다고 답했다.

 

쿤은 하나의 이론이 다른 이론으로 부정되는 상황을 하나의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으로 교체되는 패러다임 전환으로 봤으며 패러다임 변천이라는 관점에서 과학의 역사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자고 제안했다. 논리실증주의와 비판적 합리주의 같은 기존 과학철학을 지탱하던 사상은 과학이 연속적으로 발전하고 지식이 점차 누적되다 보면 언젠가 진리의 전당에 도달하거나 근접할 것이라는 일종의 진보사관이었다. 하지만 쿤은 과학의 역사를 점진적인 진보의 과정이 아닌 패러다임 전환을 축으로 한 역동적이고 단속적인 전환의 역사라고 생각했다.

 

쿤은 그러한 단속적 전환을 과학혁명이라 불렀다. 물론 17세기 과학혁명은 일회적인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며 쿤이 말한 과학혁명은 역사에서 여러 차례 일어날 수 있는 패러다임 전환을 뜻하는 일반명사다. 패러다임은 ‘과학 연구를 선도하는 모범 사례’, ‘일정 기간 연구자 공동체에 모델이 될 만한 문제와 해법을 부여하는, 일반적으로 인정된 과학적 업적’이다. 정상과학이란 어떤 특정한 과학자 공동체가 일정 기간 일을 진행하기 위한 기반으로 인정한 과거의 몇 가지 과학적 업적에 확고한 기반을 둔 연구다.

 

쿤에 의하면 위기란 정상과학 안에서 변칙 사례가 쌓여 패러다임에 관한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상황을 말한다. 패러다임 전환은 세계관 전환과 유사한 사상적 사건이며 사회적 요인과 역사적 조건뿐 아니라 심리적 요소까지 고려해야 하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원인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다. 마거릿 마스터만이란 여성 과학자는 쿤을 옹호하는 한편 비판했다. 비판의 요지는 패러다임이란 개념이 너무 모호하게 쓰였다는 것이다. 쿤은 패러다임 개념이 너무 다의적이었음을 인정하고 용어를 철회하고 전문분야기반, 모범사례라는 두 개념으로 구분해 용어를 정리했다.

 

하지만 패러다임이란 말이 원래 쿤이 내린 정의에서 벗어나 관점이나 생각의 틀이라는 널리 쓰이는 일상 용어가 되었고 쿤이 엄밀하게 정의한 전문분야기반, 모범사례란 말은 전혀 쓰이지 않고 잊히고 말았다. 쿤이 제기한 공약불가능성이란 말은 두 패러다임을 비교하는 것이 줄가능하다거나 다른 패러다임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 다른 패러다임 사이에서는 완전한 형태로 번역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둘 사이의 의사소통은 부분적으로만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쿤은 진리라는 개념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증명이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이론 내에서만 적용할 수 있는 상대적 개념이라고 정의했다. 포퍼 측에 서서 쿤의 패러다임론을 격하게 비판한 임레 러커토시는 과학을 기술하는 기본 단위는 가설이 아니라 연구 프로그램이라 불리는 더 큰 단위라는 점을 강조했다. 로버트 머튼은 두 가지를 주장했다. 청교도주의(금욕적 개신교 정신)가 17세기 영국에서 근대과학의 발전을 촉진했다는 것, 17세기 영국에서는 경제적, 기술적 요구에 따라 과학 연구의 방향성이 좌우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과학사회학이라는 새 분야를 만들었다.

 

그는 과학자는 1) 공유성(communality), 2) 보편성(universality), 3) 무사욕(disinterestedness), 4) 조직적 회의주의(懷疑主義; organized skepticism) 등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CUDOS라 한다. 쿤 이후의 과학사회학은 과학지식사회학이라 불린다. 데이비드 블루어가 제시한 네 가지 스트롱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1) 인과성, 2) 공평성, 3) 대칭성, 4) 성찰성 등이다. 과학이 두 번째 과학혁명을 통해 19세기 말에 지적 제도이자 사회제도로서 모습을 갖추었듯 기술은 18세기 후반 근대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20세기 초까지 과학 연구는 대학 연구실과 실험실이라는 상아탑에서 과학자의 자발적인 호기심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지만 점점 더 비싸고 커다란 실험장치가 필요해지면서 거대과학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과학자가 스스로 연구비를 마련하기 어려워졌고 그 결과 정부와 기업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진행하는 프로젝트 달성형 연구가 점차 활발해졌다. 과학은 이제 대학과 연구소 안에서 완결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사회와 강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62년은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출판된 해다. 카슨이 화학 물질 오염의 가장 무서운 특징으로 꼽은 것은 복합오염이다. 복합오염이란 다양한 화학물질이 섞인 결과 그동안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물질이 생겨나 환경과 인체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가치중립적이라고 여기는 과학기술은 사실 몹시 다양하고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기에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측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선의로 사용하는 과학기술이 나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핵물리학자 앨빈 와인버그는 과학이 순수한 이론적 연구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와 경제 등 다른 영역과 교차하고 사회를 횡단하며 연구 개발을 진행함으로써 생기는 여러 문제를 트랜스사이언스라고 표현했다. 와인버그는 트랜스사이언스를 과학에 물을 수는 있으나 과학이 대답할 수 없는 여러 문제라 말했다. 환경문제, 공중위생과 건강문제, 원자력발전소의 안정성 등이. 구체적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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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제갈량에게 말하다 1 - 탁월한 전략으로 승리를 추구하다 현대 심리학으로 읽는 《삼국지》 인물 열전
천위안 지음, 정주은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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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위안(陳禹安)은 심리를 통한 역사 연구의 선구자적 존재다.‘심리학이 제갈량에게 말하다’는 삼국지에 나오는 모사(謀士)와 지략(智略)의 대명사 제갈량을 현대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제갈량, 세상이 원하다(1부), 제갈량, 때를 알고 나서다(2부), 제갈량, 진가를 선보이다(3부), 제갈량, 승부수를 던지다(4부) 등으로 구성되었다.

 

융중에 살던 농부였던 제갈량은 모든 사람이 제갈량은 결코 출사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게 한 인물이었다. 융중은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양양시 서쪽 지점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제갈량이 그의 청년 시기인 17∼27세까지 생활한 곳이다. 한번은 최주평, 석광원, 맹공위, 서원직(서서; 徐庶) 등 네 사람이 제갈량과 대화를 했었다.

 

제갈량이“자네들이 출사하면 어떤 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이 말에 네 사람이 제갈량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에 제갈량은 미소만 지었다. 간절히 원하지만 발설하지 않은 것이다. 매우 어려운 일임에 틀림 없다. 심드렁한 판매자 전략을 쓴 것이다. 제갈량은 준수한 용모와 체격조건은 물론 뛰어난 지혜를 가졌었다. 역사적 업적으로 말하면 제갈량은 진시황, 한무제, 당태종, 송태조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제갈량을 더 인정했다. 대중은 진실을 알면서도 꾸며낸 이야기를 믿고 싶어 한다. 제갈량에 필적할 사람은 주(周) 나라 문왕을 도와 주나라 800년 강산을 세운 강태공과 한고조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장량 등이다. 서서(徐庶)가 유비에게 제갈량을 천거하며 말했다. "제갈공명은 와룡(臥龍)입니다.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쓰지 않으십니까?" 유비가 말했다. "그대가 데리고 오시오." 서서가 말했다. "이 사람은 가서 만나볼 수는 있으나 몸을 굽혀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의당 몸을 낮추시고 방문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유비가 제갈량을 직접 방문했고 세 번 만에 만날 수 있었다.

 

사마휘와 서서는 제갈량을 주나라 800년 강산의 기틀을 세운 강태공에 비유했다. 주문왕이 강태공을 자기 사람으로 만든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강태공은 서주의 반계(磻溪)에서 온종일 낚시질만 하면서 출사할 기회를 잡았다. 보통 사람은 끝이 구부러진 바늘을 사용하고 물고기를 유인할 미끼를 바늘 끝에 꿰어 낚시 한다.

 

그런데 강태공이 사용한 낚시바늘은 곧게 쭉 뻗어 바느질을 바늘과 다르지 않았다. 미끼도 꿰지 않았으며 물속에 가라안지도 않았다. 심지어 물에서 낚시바늘까지의 거리가 3척이나 되었다. 강태공은 낚싯대를 높이 들며 혼잣말로“물고기야 살고 싶지 않다면 직접 뛰어올라 낚시바늘을 물도록 해라.”라고 말했다. 강태공의 기이한 행동은 서백(西伯; 서쪽지방 제후들의 우두머리; ‘희창; 姬昌‘)의 귀에도 전해졌다.

 

희창은 병사 한 명에게 반계에 가서 강태공을 데리러 오라고 시켰다. 그런데 강태공은 그 병사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중얼거렸다.“물려라 물려라 물리라는 물고기는 물리지 않고 새우가 와서 시끄럽게 구는구나.”병사가 돌아와 이 말을 전하자 서백은 이번에는 관리 한 명을 보내 강태공을 모셔오게 했다. 그러나 강태공은 여전히 본 척하지 않으면서 낚시질에 여념이 없었다. “물려라 물려라 물리라는 큰 물고기는 물리지 않고 작은 고기가 와서 시끄럽게 구는구나.”희창은 그제야 강태공이 현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 희창은 채식만 하고 목욕재계한 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많은 예물을 준비해 반계에 있는 강태공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이번에도 강태공은 희창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낚시질에만 빠져있었다. 희창은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 때까지 강태공 뒤에서 공손하게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게 한 뒤에야 강태공은 희창과 대화를 나눴다.

 

주나라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주문왕이 강태공을 데려 가기 위해 겪은 큰 어려움의 정도와 훗날 강태공이 주문왕을 도와 주나라의 기틀을 다진 일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자와 후자를 인과 관계로 해석한다. 이는 우리가 곧잘 저지르는 착각이다. 유비는 자신을 주문왕에 비유하며 큰일을 이루려면 반드시 능력이 출중한 인재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출중한 인재를 얻기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유비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악천후로 인해 제갈량을 데려가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원인으로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정성에 감동한 제갈량이 틀림없이 은거생활을 접고 자신을 도와주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게다가 눈보라를 동반한 추위는 유비 자신이 통제할 기회를 줬다. 다시 말해 자신이 이 추위를 이겨내기만 한다면 모든 일이 자기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도록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종종 우연을 필연이라고 믿음으로써 마음의 안녕을 찾는다. 자신이 원하는 부분에서 우연이 발생할 때 더욱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우연이 필연을 부른다고 믿는 것이다. 그로 인해 안정감이 든다면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다.

 

제갈량은 융중의 초가에 은거할 때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를 연설한 바 있다. 이름하여 융중대책으로 핵심은 손권과 연합해 조조에 맞서자는 것이다. 이를 시행하기 위한 기본 전제는 유표가 다스리는 형주를 빼앗는 것이다. 저자는 제갈량의 일생일대의 실패를 유표가 다스리던 형주를 빼앗자고 유비를 설득하지 못한 것이라 말한다. 책의 마지막은 주유의 죽음을 논한 장이다. 주유는 적벽대전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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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 시행착오, 표절, 도용으로 가득한 생명 40억 년의 진화사
닐 슈빈 지음, 김명주 옮김 / 부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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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슈빈의 '자연은 어떻게 발명 하는가'는 성실한 지적 노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암석을 깨며 수십 년을 보내는 동안 생명을 보는 관점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밝힌 저자는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알면 과학연구는 세계적인 보물찾기로 바뀐다고 말한다. 저자는 과학자에게 멸종이 시대에 뒤쳐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지적 활동에 계속 참여할 방법은 유전학과 발생생물학, 그리고 DNA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어떤 유전자 조합이 개구리를 송어, 침팬지, 인간과 다르게 만드는지 DNA 수준에서 물을 수 있다고. 저자는 연구자는 인생을 걸 만한 연구주제를 연구실이나 발굴현장에서 찾지만 자신은 강의실 스크린에 비춰진 한 장의 슬라이드에서 찾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날갯짓 비행이 진화하려면 날개, 깃털, 속이 빈 뼈, 높은 대사율 등 일군의 발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뼈가 코끼리처럼 무겁거나 대사가 도롱뇽처럼 느리다면 날개가 진화 한들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큰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 몸 전체가 변해야 하고 게다가 많은 형질이 동시에 변해야 한다면 어떻게 큰 진화적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저자는 폐로 공기호흡하는 물고기가 전 세계에 있었고 더구나 수억년 동안 지구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변칙의 발견이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저자는 베시포드 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부레와 폐가 같은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같은 기관의 다른 버전이라고 주장한 사람이다. 저자는 놀랍도록 많은 물고기가 장시간 공기 호흡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수백종의 물고기가 자신이 서식하는 물에 산소농도가 떨어지면 공기를 삼킬 수 있다. 이 물고기들은 어떻게 이런 재주를 부리는 걸까?

 

폐어(肺魚)는 물속에 살면서 대체로 아가미로 호흡하지만 물에 산소농도가 떨어져 대사를 유지할 수 없게 되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고 공기를 마셔 폐로 보낸다. 공기 호흡은 기묘한 물고기에만 있는 기묘한 예외가 아니라 많은 물고기가 일반적으로 하고 있는 일이다. 폐라는 발명은 동물이 육지를 걸을 수 있게 진화하면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물고기는 동물들이 땅을 걷기 한참 전부터 폐로 공기 호흡을 하고 있었다. 물고기 후손들이 육지로 진출하면서 일어난 일은 새로운 기관의 등장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기관의 기능 변경이었다. 게다가 사실상 모든 물고기가 폐든 부레든 어떤 종류의 공기주머니를 가지고 있다. 공기 주머니는 물속에서 살기 위해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육지에서 살고 호흡하기 위해 쓰이게 되었다.

 

동물이 육지로 올라올 때 이런 변화는 새로운 기관의 탄생을 수반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다윈이 일반론으로 말했듯이 기능의 변화를 수반했다. 1861년 독일의 한 석회암 채석장에서 놀라운 화석 한 점이 발견되었다. 매우 잔잔한 호수 환경에서 퇴적된 것이다. 놀라운 것은 석회암에 깃털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생물의 실체가 아니라 틀만 남은 쥐라기의 인상화석이었다.

 

쥐라기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에 의해 명명되었다.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에 걸쳐 있는 쥐라 산맥의 독특한 특징의 지층을 보고서였다. 그곳에서는 소용돌이 모양의 껍질을 지닌 암모나이트라는 생물 화석이 많이 발견된다. 쥐라기는 소용돌이 모양의 껍질을 지닌 생물의 시대일뿐 아니라 공룡의 시대이기도 하다. 저자는 깃털은 조류만의 특수한 성질이 아니라 사실상 모든 육식 공룡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고 말한다.

 

육식 공룡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새처럼 되어 갔다. 저자는 묻는다. 공룡의 깃털은 무엇에 쓰였을까? 일부 고생물학자들은 깃털이 짝짓기 상대에게 매력을 과시하는데 쓰였다고 주장했다. 또 원시적인 솜털 모양의 깃털이 단열재처럼 작용해 체온을 높게 유지하는데 쓰였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어쩌면 깃털은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했을지도 모른다. 공룡에게 깃털의 역할이 무엇이었든 깃털의 기원이 하늘을 나는 것과 무관했다는 점은 틀림없다.

 

물에 사는 동물이 땅에 진출했을 때 폐와 사지가 그렇듯 비행에 쓰인 여러 발명도 비행이 기원하기 전에 생겼다. 깃털은 물론이고 속이 빈 뼈, 빠른 성장속도, 높은 대사율, 날개돋친 팔, 경첩 같은 관절이 있는 손목은 모두 원래는 땅에서 민첩하게 뛰어다니며 먹이를 잡던 공룡에게 생긴 것이었다. 큰 변화는 새로운 기관의 탄생이 아니라 오래된 형질을 새로운 용도나 기능으로 전용함으로써 일어났다.

 

깃털은 새에서 하늘을 날기 위해 탄생했으며 폐는 동물이 땅에서 살 수 있도록 진화했다는 것이 그 동안의 통념이었다. 이런 생각은 이치에 맞고 자명하게 들리지만 틀렸다. 게다가 우리는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100여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깃털은 비행이 진화하면서 탄생한 게 아니었고 폐와 사지도 동물이 육상으로 진출하면서 진화한 게 아니었다. 생명사에 길이남을 이런 대변혁과 그밖의 변혁들은 기존 형질의 전용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생명사에 길이 남을 변화는 곧게 뻗은 탄탄대로를 걷지 않았다. 그 길은 우회로, 막다른 골목, 좋지 않은 시기에 출현하는 바람에 실패한 발명들로 가득하다. 다윈의 기능의 변화란 말은 생물의 몸에 생기는 발명의 대부분은 기존 형질의 기능이 바뀜으로써 생긴다는 것을 설명한다. 우리는 이 말을 발판삼아 기관, 단백질, 나아가 DNA의 기원까지 밝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물고기나 공룡, 사람의 몸은 수정된 순간에 완전한 형태로 출현하는 것이 아니다. 생물의 몸은 부모에서 자식으로 전달되는 레시피를 바탕으로 세대마다 새롭게 만들어진다. 발명의 씨앗은 레시피 안에 들어있다. 또한 다윈이 예견했듯 레시피가 어떤 조건에서 생겨났다가 다른 조건하에서 전용되는 방법으로도 발명이 탄생할 수 있다.

 

카를 에른스트 폰 베어 이야기를 하자. 그의 연구에 힘입어 이미 알려진 모든 동물 종의 모든 기관에 숨어 있는 보편적 연결고리가 드러났다. 깊은 바다에 사는 아귀목이든 하늘로 솟구치는 앨버트로스든 심장은 중배엽의 세포들에서 생기고 뇌와 척수는 외배엽에서 생기며 장과 위와 기타 소화기관은 내배엽에서 발생한다. 이 법칙은 지극히 보편적이어서 지구상에 서식하는 어떤 동물의 어떤 기관을 고르든 그것이 어느 배엽에서 발생했는지 알 수 있다.

 

종들의 초기 배아가 서로 비슷하다는 폰 베어의 발견에 다윈도 주목했다. 물고기, 개구리, 사람 등 다양한 동물이 공통의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동물들이 공통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다양한 종이 조상을 공유한다는 증거로 그 동물들이 배아 발생과정에서 공통 단계를 거쳤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게 있을까?

 

저자는 에른스트 헤켈 이야기를 한다. 찰스 다윈의 저서를 읽고 인생의 전기를 맞았다는 그는 개체 발생(배아 발생)은 계통 발생(진화사)을 반복한다는 말을 남겼다. 가령 쥐의 배아는 벌레, 어류, 양서류, 파충류의 모습을 차례로 거친다는 것이다. 저자는 헤켈이 주장하듯 동물의 배아에서 생명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면 생명의 역사를 추적하기 위해 굳이 중간형 화석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라고 반문한다.

 

배아 발생의 어느 단계에도 조상의 모습은 없었다. 인간의 배아는 폰 베어의 지적처럼 몇 가지 점에서 물고기 배아와 비슷했지만 다리를 가진 물고기든 오스트랄로피테쿠스든 인간의 조상처럼 보이는 단계는 발생과정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조류 배아가 발생하는 과정에도 시조새처럼 보이는 단계는 없었다. 헤켈의 가설은 틀렸지만 수많은 학자가 그의 가설에 영향을 받아 연구를 시작했다. 게다가 그 가설은 과학연구의 주제로 채택되지 않은 지가 벌써 100년이 넘었는데도 일각에 그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다.

 

1820년부터 1930년까지는 생물학에서 이른바 빅 아이디어의 시대였다. 폰 베어, 에른스트 헤켈, 찰스 다윈, 가스탱 등 수많은 연구자가 동물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법칙을 찾기 위해 동물의 몸 구조, 화석, 배아를 조사했다. 동시에 생명의 다양성을 가져온 메커니즘도 밝히고 있었다.

 

저자가 보는 게놈은 음악과 닮은 것이다. 같은 소재를 여러 방식으로 반복함으로써 무수히 다양한 곡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연이 작곡가였다면 역대 최고의 저작권 위반자로 등극할 것이다. DNA의 일부분부터 유전자와 단백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원본의 변형된 사본이다.

 

바바라 맥클린톡 이야기도 흥미롭다. 맥크린톡은 1983년 점핑유전자 발견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사람이다. 인간 유전체의 40% 이상은 고대 바이러스 유전자의 흔적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들 가운데 인간 유전체 속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점핑유전자’(jumping gene) 또는 ‘트랜스포존’이란 것들이 존재한다.

 

점핑유전자는 유전체 내에서 새로운 돌연변이를 만들기 때문에 암이나 유전 질환을 유발할 수 있고 뚜렷한 기능이 알려지지 않아 유전체의 기생충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 진화를 이끄는 동력이기도 하다. 저자는 게놈은 지루하고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게놈은 활력으로 출렁이고 있다. 유전자가 중복될 수도 있고 기능 전체가 중복될 수도 있다. 유전자는 자신의 삶을 만들며 게놈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게놈에는 두 종류의 유전자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 하나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단백질을 만들고 다른 하나는 오직 돌아다니며 자신의 사본을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 다른 조건이 모두 같다면 사본을 만드는 유전자가 게놈에서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우리 게놈의 3분의 2가 LINE1과 ALU 같은 반복서열로 되어 있는 한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복 서열을 억제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게놈을 점령해버릴 것이다. 이런 기생 인자들을 멈출 수 있는 순간은 이들이 완전히 통제 불능이 되어 숙주가 죽고 이에 따라 그들도 사라질 때다. 개체 내의 점핑유전자가 통제되지 않고 폭주하면 그 개체는 죽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할 수도 없다. 이런 이기적 유전자와 숙주는 항상 긴장관계에 있고 심지어는 내전 상태다.

 

이기적 유전자는 자신의 사본을 만드는 것만이 목적인 반면 숙주 게놈은 그것을 필사적으로 억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유전자(gene)와 세포핵 속의 염색체(chromosome)의 합성어인 게놈은 유전 물질인 디옥시리보 핵산(DNA)의 집합체를 뜻한다. 생명현상을 결정짓기 때문에 흔히 '생물의 설계도' 또는 '생명의 책'이라 불린다.

 

점핑 유전자는 자신의 사본을 만들어 게놈의 여기저기에 끼워 넣는다. 맥클린톡은 점핑 유전자를 훼방꾼으로 보았다. 그것이 점프해 다른 유전자에 끼어들면 유전자의 기능이 망가져 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동료 데이비드 린치는 점핑유전자에서 다른 역할을 찾아냈다. 점핑 유전자는 궁극의 이기적 분자다.

 

사본을 만들어 확산하며 게놈 안에서 증식해 나간다. 린치는 이런 점핑 유전자가 때로 새로운 일을 하는 유용한 돌연변이를 실어나를 수 있음을 깨달았다. 게놈 안에서는 점핑 유전자와 나머지 DNA가 예정된 내전을 벌이고 있다. 이기적 유전자와 이를 제어하려는 힘 사이에 언제나 긴장이 감돈다. 최근 들어 DNA가 점핑유전자를 제어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저자는 우리 존재를 포함해 지금의 자연계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일어난 우발적 사건들의 산물이라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견해와 다른 내용을 말한다 .최신 과학과 거의 1세기의 연구는 우발적 사건의 내용을 바꿔 생명의 테이프를 재생한다 해도 몇 가지 결말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포유류의 진화에 대해 보자. 호주의 유대류 동물들은 나머지 세계와 격리된 상태로 1억년 이상 진화하며 여러 형태를 가진 다양한 종들을 탄생시켰다. 
 

그 결과는 확실히 무작위적이지 않다. 유대류 날다람쥐, 유대류 두더지, 유대류 고양이, 심지어 유대류 우드척 다람쥐까지 있다. 게다가 이 예들은 현생종만 말한 것이다. 지금은 멸종 했지만 과거에는 유대류 사자, 늑대, 심지어 검치호랑이까지 있었다. 격리된 대륙에서의 유대류 진화는 대개 세계 다른 지역에서의 포유류 진화와 비슷한 경로를 따랐다.

 

조너선 로소스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각 섬의 도마뱀들은 같은 섬에 사는 다른 도마뱀들과 가장 가까웠다. 섬마다 유전적으로 구별되는 도마뱀 개체군이 살고 도마뱀의 정착은 섬마다 따로 일어났다. 표류하던 도마뱀들이 언젠가 각 섬에 상륙했고 각 섬의 자손들이 새로운 서식지의 여러 환경 조건에 적응한 것이다.

 

각 섬에서 도마뱀들이 지표, 나무줄기, 나뭇가지, 수관의 생활에 적응해 나간 과정은 다른 섬들과는 독입적으로 진행된 진하 실험이었던 셈이다. 각각의 섬이 별개의 실험이었다면 진화는 같은 결과를 반복적으로 생산한 것이다. 생명사의 테이프를 각 섬에서 재생했다 해도 진화는 같은 방식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이런 자연의 실험은 생명사가 우발적 사건들이 난무하는 불확실한 도박판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주사위가 어떤 눈이 나올지는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었다. 유전자와 발생이 몸을 만드는 방식, 환경의 물리적 제약, 그리고 진화사에 의해 특정한 눈이 나오기 쉽게 주사위가 설계되어 있었다. 각 세대의 생물들은 기관과 몸을 만드는 레시피를 물려받는다. 이런 유전 정보는 미래를 말해준다. 변화의 특정 경로가 다른 경로에 비해 일어나기 쉽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의 몸과 유전자 내부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

 

린 마굴리스는 동식물과 균류의 몸을 이루는 세포에 주목했다. 이런 세포는 박테리아 세포에서는 볼 수 없는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 각 세포에는 핵이 있고 핵 안에는 게놈이 있다. 핵 주위에서는 많은 작은 기관이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세포소기관들이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기관이다.

 

식물 세포에는 엽록체가 있고 그 안에서 엽록소가 태양에너지를 이용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광합성 반응을 수행한다. 마찬가지로 동물 세포에는 미토콘드리아가 있어서 산소와 당으로 에너지를 생산한다. 마굴리스는 이런 세포소기관들이 세포 안의 작은 세포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각은 자체 막으로 둘러싸여 세포의 나머지 부분과 분리되어 있다.

 

세포소기관은 세포내에서 둘로 쪼개지는 방법 즉 출아를 통해 증식한다. 먼저 길쭉하게 늘어났다가 덤벨처럼 가운데 부분이 좁아진다. 그런 다음 양쪽이 분리되어 두 개체가 된다. 세포소기관은 심지어 세포핵의 게놈과는 별도로 자체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그런데 세포소기관의 게놈은 핵의 게놈과는 매우 다르다.

 

핵 안에서는 DNA 가닥이 돌돌 말려 있지만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에서는 DNA 가닥의 끝과 끝이 맞물려 단순한 고리를 이룬다. 자체 막과 DNA를 가지고 스스로 증식하는 이런 세포소기관들을 보며 마굴리스는 뭔가를 떠올렸다. 이런 특징을 전에 단세포 박테리아와 남조류에서 본 적이 있었다. 박테리아와 남조류도 출아로 증식하고 비슷한 막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엽록체나 미토콘드리아의 게놈과 매우 비슷한 모양의 게놈을 가지고 있다.

 

동물과 식물의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세포소기관들은 아무리 봐도 이들이 속한 세포의 핵보다 박테리아나 남조류와 훨씬 더 비슷해 보였다. 마굴리스는 진화사에 대한 과감한 새 이론을 제창했다. 엽록체는 원래 자유 생활을 하던 남조류로 다른 세포에 포섭되어 그 세포를 위해 에너지를 공급하는 대사 일꾼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토콘드리아도 원래 자유 생활을 하는 박테리아였으나 또 다른 세포에 합병되어 에너지를 생산하게 되었다. 두 사람과 같이 별개의 생물이 융합해 더 복잡한 새로운 개체를 만들었다는 마굴리스의 생각은 과감한 것이었다. 모든 복잡한 세포는 두 가지 계통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세포핵 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한때 자유 생활을 했던 남조류와 박테리아 조상들의 계통이다.

 

자신의 이론이 입증된 후 마굴리스는 "나는 내 가설이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지식의 공백을 희망, 기대, 두려움이 조금씩 버무려진 우리 자신의 선입관으로 매우는 경향이 있다. 우리 뇌는 점처럼 흩어져 있는 과거 사건들을 연결해 한 변화가 다음 변화로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경향이 있다. 잃어버린 고리라는 말을 우리는 수도 없이 들었다. 이 말은 진화가 마치 하나의 고리가 다음 고리로 거침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큰 사실인 것처럼 들리게 한다.

 

우리가 자연의 다양성을 조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들도 수백 년 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십 년 전에 전임자들이 고안한 것을 가져와 수정한 것이다.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 알갱이에서 우주를, 한 송이 야생화에서 천국을 본다고 말했다. 보는 방법을 알면 모든 생물의 기관, 세포, DNA 안에서 수십 년의 역사를 볼 수 있고 나아가 우리가 지구상에 나머지 생명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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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연의 역동적 형태 우든북스 시리즈 6
데이비드 웨이드 지음, 최수홍 옮김 / 시스테마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이(理)는 자연의 질서와 패턴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자이크처럼 죽은 것으로서의 패턴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 인간관계, 인간의 최고의 가치에 구체화되어 있는 어떤 것으로서의 패턴을 의미한다.“(조지프 니덤 지음 ‘중국의 과학과 문명’ 중에서) 이 구절은 데이비드 웨이드의 ‘이(理), 자연의 역동적 형태’에서 인용된 말이다.

 

저자는 이를 게슈탈트 즉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패턴의 발현으로 본다. 이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나 아무 연관이 없는 현상에서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구조가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서양 과학은 항상 패턴에 관심을 보였다. 사실상 패턴 인식이야말로 과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의 책에서 보여 주는 것 같은 준대칭 형태들이 진지하게 연구할 가치가 있는 대상이 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과학자들은 대칭의 개념을 대폭 확장하고 경직된 고전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이에는 동양 우주관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이원론이라는 철학적으로 아직 서구 사상이 선망하지 않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근본적으로 역동적 형상을 의미하며 특정 순간 정지된 찰나에 포착된 어떤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더욱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특정 형태의 관련되어 있는 에너지의 근본원리 같은 것이다.

 

본문에 암모나이트(문어, 오징어의 조상격인 두족류) 화석의 봉합선이 나온다. 저자는 암모나이트 화석이 굽이치는 큰 강을 하늘에서 본 모습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봉합선은 물결 모양의 선들을 말한다. 절단면을 매끈하게 광 낸 대리석이 아름다운 이유는 다양한 색상뿐 아니라 먼 지질시대에 일어났던 격렬한 형성과정의 한 순간이 포착되어 있는 듯한 느낌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변성암은 실제 극한의 열과 압력 아래에서 형성된 것들이다. 동양에서는 오랫동안 도자기 표면에 생긴 잔금에 미적 가치를 두었다. 반면 서구에서는 그것을 잘못된 결함 즉 문제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두 세계의 가치관이 얼마나 다른지 말해 준다. 도자기의 깨진 듯한 잔금은 유약과 도자기 본체의 수축률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 도자기의 잔금은 바짝 말라서 갈라진 땅이나 페인트와 겔이 마르면서 나타나는 잔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모든 잔금은 축적되어 있던 스트레스가 분출되어 나가는 통로 곧 힘이 가는 선이라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인식하는 동양문화에서 잔금을 매력적으로 본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형성되는 위계적 순서에 따라 크거나 작은 잔금들이 생긴다. 지질 구조 체계와 도시의 도로 계획 등의 많은 형태들 역시 이러한 위계적 체계를 가지는 이의 형태를 띤다.

 

저자는 위도가 높은 추운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혹독한 겨울 가끔 찾아와 유리창을 장식하는 우아한 문양의 서리가 생각지 않은 위안이 된다고 말한다. 나에게는 절리(節理)는 한자이고 서리의 리는 한글이지만 같은 차원으로 보인다. 아니 지구 대기 중의 수증기가 지상의 물체 표면에 얼어붙은 것을 서리라 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게 여겨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닮았지만 아스팔트 포장의 균열 패턴과 도자기의 잔금은 근본적으로 다르게 생성된다. 두 형태의 차이는 물질의 성질에서 온다. 아스팔트는 근본적으로 탄력이 있지만 도자기 유약은 탄력이 없다. 또한 도자기 표면의 잔금이 더 직각에 가깝게 교차된다.

 

나무껍질 모양은 탄력성 있는 물질이 갈라질 때 생기는 대표적인 모양이다. 나무는 껍질 바로 안쪽에 있는 층이 성장해 굵어지는데 이때 바깥쪽 나무껍질은 팽팽하게 당겨진다. 이 문제에 대한 대책으로 나무들은 종마다 다른 전략을 진화시켰다. 소나무는 껍질을 세로 방향으로 갈라지게 하면서 아스팔트 균열과 다르지 않은 방을 만들어 낸다. 반면 밤나무는 팽창하는 힘을 우아하고 부드러운 나선형 고랑 모양으로 유도한다.

 

모든 종은 자신만의 독특한 이를 가지고 있다. 이로써 종을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숙한 나무에서는 갈라진 껍질에 새로운 물질이 더해지며 그 결과 참나무에서 보는 것처럼 균열이 더 깊고 뚜렷해진다. 지의류의 조형적 습성은 그 겸손한 존재에 걸맞게 단순하지만 계속 성장해나가면서 여러 층이 쌓여 이루어진 결과 무척 복잡하고 아름답다.

 

지의류가 자라는 것과 똑같은 패턴을 산화 갈륨의 표면 형성에서와 같은 일부 화학반응에서도 볼 수 있다. 식물에서 잎이 나는 차례는 정확하게 수학적으로 규정된다. 그 유명한 피보나치 수열을 따른다. 그러나 양배추와 같이 좁은 공간 내에 배열이 국한되는 경우에는 잎들이 서로 먼저 자리를 차지하려 경쟁하기 때문에 복잡하고 혼돈스러운 덩어리가 만들어진다.

 

양배추는 말하자면 식물의 끝눈이 비대해진 것인데 연속적으로 자른 단면을 보면 각기 다른 속도로 성장한 잎들의 기하학적 배열이 어떻게 깨지는지 알 수 있다. 질서정연한 형태에서 훨씬 불안정한 형태로의 진행은 형태와 에너지라고 하는 양대 원칙이 상호작용할 때 창발하는 복잡성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양배추 같은 예에서 이런 고도의 유추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의 영원한 매력이기도 하다.

 

기하학적 이상 상태는 자연의 어느 곳에서도 실현되기 아주 힘들다. 용암이 이상적으로 완벽하게 균일한 물질이라면 그물망이 아니라 정육각형 패턴이 형성될 것이다. 두 유리판 틈 사이에 생긴 비누 거품막도 질서와 패턴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두 유리판 틈 사이에 생긴 비누 거품막이나 세포들이 우아하게, 그리고 역동적으로 당겨지면서 배열된 곤충의 날개는 최적의 경제적 형태라는 원리를 공유한다.

 

현무(玄武) 이야기가 흥미롭다. 북방의 수호신인 현무는 거북이와 뱀을 합친 도상이다. 현(玄)은 검은색을 뜻하고 무(武)는 거북의 딱딱한 등갑이나 비늘을 뜻한다. 현무는 대체로 중국 전한 초까지 거북의 모습으로 표현되다가 언제부터인가 뱀이 거북을 휘감고 있는 도상으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고대 중국인들이 거북은 암컷만 있을뿐 수컷이 없다고 생각하여 머리 모양이 비슷한 뱀을 수컷으로 짝지은 결과다. 암수 한 쌍으로 표현되는 남방의 수호신인 주작(朱雀)에 대한 대응으로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강과 강의 지류는 모든 형태의 이 중에서 가장 우리에게 친숙한 모양이며 액체가 흐르는 많은 종류의 관 체계 특히 동물과 식물의 기본적인 순환계와 아주 비슷하다. 강의 형태는 모든 종류의 액체가 흐르는 통로의 전형일뿐 아니라 지구의 물 순환 과정에서 가장 활발한 단계에 속한다. 그런 면에서 중요한 에너지 이동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강의 형성에는 우선순위의 역설이 있다. 강은 지형을 만들고 지형은 강을 담고 있다. 강이 지형을 만든 것이 먼저인지 지형이 강을 담은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 인간의 논쟁처럼 무엇이 먼저인지는 분명치 않다. 사실 이런 형태로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성이 분명히 느껴진다. 그렇다면 이것은 거의 플라톤적 실제의 선주 문제를 인정하는 것이다.

 

모래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지만 힘이 가해지면 어디에 있든지 그 힘의 흔적이 남겨진다. 해변에 새겨진 매혹적인 잔 물결,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모래언덕 등 이들 형태는 자신만의 법칙에 지배되고 자신만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형태를 구성하는 물질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 갱신되지만 이 자체는 꽤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자연에는 삼각형 모양이 드물다. 그럼에도 다이아몬드의 표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면 윤곽선에서 가장 두드러진 모티프는 정삼각형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다이아몬드는 완벽한 결정의 상징이다. 결정은 일반적으로 자연에서 가장 대칭적인 선들로 미리 결정된 격자구조의 일정 위치에 수없이 많은 동일한 원자들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서는 이렇게 흠이 없는 배열에서조차 원자의 위치 이탈로 발생하는 미세한 결함이 가득하다. 그것이 다이아몬드에 나타나는 삼각형 모양의 결정적인 원천이다.

 

식물의 순환 시스템과 동물 혈관 및 신경 시스템 사이에는 분명한 유사점이 있다. 이들은 묘하게도 강물이 흘러가는 형태를 떠올리게 한다. 이 모든 과정들의 공통된 인자는 언제나 그렇듯 에너지 전달이다. 따라서 이 정교한 형태들은 에너지 전달 통로라고 할 수 있다. 무화과나무, 백합나무 등의 도관을 볼 필요가 있다.

 

두 장의 유리 틈에 잉크를 흘린 후 유리를 떼어냈을 때 만들어지는 형태도 주목할 만하다. 기본적으로 잉크가 퍼진 것에 불과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복잡하다. 바다 식물이나 불꽃 등 다양한 형태를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단순한 최초의 형태에서 고도의 복잡성이 창발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복잡성은 거의 자발적으로 발생한다. 스스로 창조된 우주의 모든 부분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도교의 중심 사상이다.

 

도덕경에 ”길은 측정 할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안에 형태가 담겨 있다.“는 말이 있다. 이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전혀 연관이 없는 현상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유사한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모래 언덕의 띠와 얼룩말의 피부, 마른 진흙의 잔금과 기린의 무늬가 그 예다.

 

동물의 무늬에서 특히 이의 예를 풍부하게 발견할 수 있다. 동물의 무늬에는 다양한 기능이 있다. 수비나 공격을 위해 자신을 위장하고 경고하거나 적을 교란시키고 때로 성적 매력과 연관되기도 하다. 흔히 이런 여러 기능들은 혼재되어 있다. 동물의 외관은 항상 기능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생명체의 형태와 특정 이는 그냥 그렇게 되었을뿐이다. 이에 대한 궁극적인 분석은 창조의 수수께끼를 푸는 한 부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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