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챗GPT, 질문이 돈이 되는 세상 - 이미 시작된 AI의 미래와 생존 전략
전상훈.최서연 지음 / 미디어숲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챗 GPT 시대가 열린 것일까? 2022년 12월 이후. 생성 인공 지능(AI)의 시대라 할 만한가.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의 이니셜인 GPT는 자가학습'하여 답변을 '생성'하고 대량의 데이터와 맥락을 처리할 수 있는 트랜스포머(변환기) 기술을 의미한다. 책은 말을 주고받을 수(대화할 수) 있다는 의미다.

 

1인 1 AI 시대가 오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사회 변화에 맞춰 적응해야 하므로 챗 GPT의 혁신과 변화를 나와 상관 없는 이야기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챗 GPT는 기존의 모든 아날로그 및 디지털 시스템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것이다. 저자들은 7년 뒤인 2030년 모든 것이 변할 것이라 단언한다.

 

2016년에 상상한 일들이 7년 후인 2023년 상당 부분 현실이 되었듯 다시 7년 후인 2030년에 예상하는 모든 일이 눈 앞에 펼쳐질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글로벌 자산운용사인 슈로더 보고서에 의하면 2030년 은행, 교통, 유틸리티 등을 거의 모두 또는 전적으로 정부가 소유하거나 통제하고, 투자는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플랫폼 기업의 독점적인 부의 편중을 보완하기 위해 기본소득(UBI; universal basic income 또는 unconditional basic income)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챗 GPT가 빠르게 발전하면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1%의 자본가 및 핵심 기술자와 이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99%의 사람들로 나뉠 것이다. 대안(代案)이 마련되어야 한다.

 

챗 GPT는 지식 노동자의 일자리까지 침범한다. 그럼에도 가상 공간 디자이너, 윤리 기술 변호사, 디지털 문화해설가, 프리랜서 바이오해커, 사물 인터넷 데이터 크리에이티브, 우주 여행 가이드, 개인 콘텐츠 제작자, 생태복원 전략가, 지속가능한 전력 혁신가, 인체 디자이너 등의 직업이 새로 부상할 것이다. 긱(gig) 경제라는 말이 나온다. 긱은 임시로 하는 일을 의미한다.

 

전통적 개념의 임금 체계가 무너지고 소득을 바로 현금으로 지급하는 인스턴트 급여 방식의 경제를 말한다. 미래가 원하는 인재상은 다르다. 창의성 계발의 핵심은 질문이다. 저자들은 챗 GPT 시대를 살려면 트레일블레이저가 되라고 말한다. 개척자, 선구자 등이 되라는 의미다. 이제 세상은 챗 GPT를 활용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뉠 것이다.

 

미래를 위해 교육도 바꾸어야 한다. 지식 기반 교육에서 창의성, 문제해결 능력, 글로벌 역량 강화 중심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물론 영어 실력은 더욱 중요해진다. 챗 GPT 언어 데이터의 92%가 영어다. AI와 차별화되는 인간의 상상력을 키우는 것으로 사색, 토론, 휴식을 들 수 있다.

 

저자들은 챗 GPT가 정보를 찾아 준다고 해서, 우리가 지식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바보가 될 것이라 단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암기력이 아닌 다른 능력으로 인정받는 시대를 맞이했다. 챗 GPT를 이용해 여러 정보를 융합하는 능력이 실용적 지식이자 미래 AI 시대의 유일 생존 전략이다. 중요한 것은 AI 윤리 교육이다.

 

도전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AI 반도체는 국제 관계를 바꾸는 트리거다. 챗 GPT는 양날의 칼이다. 주식 등 투자나 중요 결정 등 개인의 판단력이 많이 필요한 분야에서는 사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저작권 문제는 챗 GPT의 그늘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챗 GPT 시대는 기회이자 도전이다. 변화의 맨 앞에 서라. 이것이 결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명을 묻다 - 과학이 놓치고 있는 생명에 대한 15가지 질문
정우현 지음 / 이른비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학이 놓치고 있는 생명에 대한 15가지 질문이라는 부제를 가진 책이다. 생명은 메이지 유신 때 처음 만들어진 단어다. 그 이전까지 동아시아 문화권에 생(生)과 명(命)이란 단어는 있었지만 생명이란 단어는 없었다.

 

오직 인간만이 정신을 가지며 동물은 영혼 없이 본능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자동인형에 불과하다는 기계론적 생명관을 가진 데카르트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흥미를 부른다. 데카르트는 어린 시절 앙리 4세의 궁정을 방문해 정원에서 목욕하다 사람들이 쳐다보면 숨는 다이애나 여신과 삼지창을 휘두르며 따라오는 포세이돈 자동인형을 보고 모든 생명체가 사실은 기계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36 페이지)

 

데카르트는 모든 생명체는 부품으로 만들어진 기계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 환원주의다. 전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부품들을 분리해서 연구하면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저자는 생명을 하나의 기계로 바라보는 관점이 오늘날까지 이토록 오래 이어져왔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고 말한다. 기계는 스스로 자신을 복제해 후손을 만들 수 없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생명이란 자신을 잘 보존하고 복제를 통해 증식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의도를 가진 존재라고 전제한 뒤 우연적인 존재가 어떻게 의도를 가질 수 있겠는가 묻는다. 다윈의 진화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홀데인은 목적론 없이 생명을 이해할 수 있는 생물학자는 사실상 없다고 말하며 생물학자들에게 목적론은 내연 관계의 애인과 같은데 그것은 목적론과 함께하면서도 그것을 공공장소에서 보여주고 싶어하는 생물학자는 없을 테니까라고 말했다.

 

일본의 분자생물학자 후쿠오카 신이치는 독일의 생화학자 루돌프 쇤하이머가 행한 실험을 소개했다. 쥐에게 일반 질소원자보다 약간 무거운 중(重) 질소 동위원소로 만들어진 음식을 먹여 그 무거운 질소원자들이 어디로 가는지 추적한 실험이다. 다 자란 성체 쥐도 섭취한 음식의 1/3만 배설되고 2/3는 몸속 이곳저곳으로 들어가 남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새로 흡수한 원소들이 오래된 원소를 대신해 자리를 바꾸면서 몸을 구성하는 새로운 입자로 사용된 것이다.

 

신이치는 이를 보고 생명이란 동적평형 상태에 있는 입자의 끊임없는 흐름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몸은 전체적으로 일정한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세부 입자는 부단히 새롭게 바뀌는 것이다. 이는 높은 수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저자는 생명을, 스스로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성질 즉 항상성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파괴하고 재설계하는 동적평형 상태로 정의한다. 생명은 구조나 형태라기보다 현상 또는 상태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75 페이지)

 

줄리언 제인스의 ‘의식의 기원’에 의하면 소마는 원래 시신(屍身)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이 단어가 신체를 의미하게 된 것은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생명은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의미하는 단어였다는 의미다. 알프레드 월리스는 다윈과 달리 뇌에서 의식이 만들어지는 경로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월리스, 다윈 공히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주장했으나 월리스는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 달리 자연선택에 의해서만 진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는 차이가 있다.

 

저자는 물질과 정보로 치환될 수 있는 인간이기에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이 자명하다면 영생은 무엇을 위함이며 전지전능함이 다 무슨 소용일까라고 묻는다.(95 페이지) 저자는 오늘날 과학이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이나 예술 등 다른 분야 학문과 통합적으로 교류하려 노력하면서도 물질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것은 어불성설이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저자는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 나오는 패러다임 개념으로 오늘날 과학계의 지배적 경향에 이의를 제기한다. 오늘날 과학계를 지배하는 듯 보이는 물질적 생명관은 그것이 생명을 설명하는 최고의 길이며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급격하게 발전된 현대 생명공학 기술에 힘입어 유전자와 뇌를 중심으로 한 물질적 패러다임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이란 사물을 보는 방식이나 문제 해법에 관한 특정 시대 과학자 집단의 공통된 이해를 가리키는 말이다.(97 페이지)

 

저자가 보는 현대과학은 환원주의적 생명관에 사로잡혔다. 저자는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과학이 할 일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닭을 냄비에 넣고 끓이면 닭고기 수프가 만들어질 수 있겠지만 지금껏 닭고기 수프를 냄비에 넣고 끓여서 닭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는 낭보가 들려온 적은 없다고 말한다.

 

DNA 이중 나선 모형은 너무나도 아름답지만 그것은 실제 유전자의 구조를 시각적으로 단순화한 모형에 불과하다. 짤막한 DNA 조각들이 하나둘씩 모이면 점점 더 긴 DNA가 쉽게 조립되어 만들어질 수 있다든가 DNA 이중가닥은 저절로 자기복제가 가능하다든가 연약한 수소결합으로 연결되어 있는 염기들이 단백질의 도움 없이도 세포 내에서 쉽게 열리고 닫히며 작동할 수 있다든가 하는 심각한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

 

이중나선 구조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혼자서는 일하지 못한다. 유전자가 그 속에 담긴 정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단백질이 있어야 한다. 어느 것 하나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가 작동하려면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해야만 한다. DNA는 특정 단백질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자신의 정보를 가진 단백질을 만들 수 없고, 단백질은 자신을 암호화하는 특수한 DNA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는 스스로 생성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그뿐 아니다. DNA로부터 정확한 단백질이 만들어지려면 또 하나의 중요한 존재인 RNA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리보솜은 DNA에 새겨진 암호를 번역해 단백질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고분자 복합체다. 이것은 생명체마다 매우 잘 보존되어 있어야 할 거대한 RNA 분자가 없이는 결코 생겨날 수 없다. 더구나 이들이 서로를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완벽히 작용해야 한다.

 

생명이 완벽해서 결코 돌연변이를 허용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보는 지금과 같은 세상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생물학에 진화라는 용어를 도입한 사람은 스위스의 박물학자 샤를 보네다. 그는 ‘종은 하나님이 만드셨다. 종은 불변한다.’고 주장했다. 의아하게 들리는 부분인데 이는 애초 진화란 개념이 미리 정해져 있는 어떤 현상이나 사실이 드러나거나 성취되는 것을 뜻하기에 드는 의문이다.

 

진화란 말이 처음 나왔을 때는 그 의미가 배아 상태에서 일어나는 신체 각 기관의 발생이란 의미와 더 가까웠다. 다윈은 진화라는 말을 쓰기를 꺼렸다. ‘종의 기원’에 이 말이 나온 것은 초판이 나온 지 13년이 지난 6판에서였다. 현대 유전학의 지원사격을 받은 다윈의 진화론을 신다윈주의이론이라 한다. 신다윈주의는 1) 진화는 실제 일어난다. 2) 진화에 의한 변종은 점진적인 유전적 변화를 통해 일어난다. 3) 생명의 새로운 형태는 나무에서 가지가 뻗어나는 것처럼 하나의 계통이 둘 또는 그 이상으로 갈라짐으로써 생긴다. 4) 진화는 대부분 자연선택을 통해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 모든 주장이 언제나 옳다고 할 수 없겠지만 우리는 이를 하나하나 입증할 증거들을 차곡차곡 손에 넣어왔다. 우리는 흔히 생명이 있기 전에 자연환경이란 것이 먼저 존재한다고 가정하지만 실은 생명이 없다면 환경이라는 개념도 있을 수 없다. 뜨거움, 습함, 어두움, 시끄러움 같은 개념들은 그것을 인지하고 측정할 감각기관이 없이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오로지 생명만이 환경을 인식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생명이 진화한 환경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한 생물 집단의 진화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 이어 이와 관련된 다른 생물 집단의 진화를 유발할 수 있다. 이를 공진화라 한다. 훗날 다윈의 이론을 대체할 더 강력한 증거를 제시한다 하더라도 생물이 진화한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진화는 사실이다. 진화란 생물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변이와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문제다.

 

진화를 사상, 인간의 심리, 사회현상 등에 폭넓게 적용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특히 더 신중해야 한다. 유전학자 스티브 존스는 “진화란 어디로 가게 될지도 모른 채 미래를 향해 몸을 뒤로 돌려 (거꾸로) 걷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진화에 대한 믿음이 신에 대한 믿음과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진화가 증명되었다고 해서 신이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연의 진화는 창조의 개념과 충돌하지 않는다. 그것은 진화가 일어나려면 존재들이 창조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진화는 과학이지만 최초의 생명에 대한 이론은 추측이자 믿음이다. 저자는 말한다. 과학이 논리적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가 과학에 논리의 옷을 입혀놓았기 때문이라고. 만유인력의 법칙, 케플러의 법칙, 열역학 법칙, 질량 보존의 법칙 등 무생물로 된 자연에는 법칙이 많지만 생명에는 멘델의 유전 법칙 외에는 법칙이 없다.(멘델의 유전법칙은 법칙이라기에는 너무 예외적이다. 그가 이렇게 단순하고 깔끔한 법칙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운이 좋게 완두콩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마음에 드는 결과만 일부러 선별했기 때문이다. 우열의 법칙, 분리의 법칙, 독립의 법칙으로 구성된 것이 멘델의 유전 법칙이다.)

 

일본 유전학회는 최근 우성과 열성을 각각 현성(顯性; 드러난 성질), 잠성(潛性; 잠재된 성질)으로 새롭게 표현하기로 했다. 멘델의 유전법칙에 나오는 우성과 열성은 유전자 자체의 우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형질로 나타나는데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에 따라 나뉘는 성질이다. 과학혁명기 이래 19세기까지 과학법칙이 많이 만들어졌지만 20세기에는 법칙이라 부를 만한 새 발견들이 부쩍 줄었다. 20세기에는 상대성이론, 불확정성원리, 파울리의 배타 원리 등 법칙이 아닌 이론 또는 원리가 자주 쓰이고 있다.

 

물리학과 화학 법칙은 전 우주 차원에서 성립하지만 생물학 법칙은 지구 위 생명에 국한될 가능성이 있다. 생물학에는 패턴을 벗어나는 예외 사례가 너무 많다. 유전자 재조합으로 인해 어떤 자손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유성생식의 불확실성은 역설적으로 환경의 불리한 변화와 유해한 병균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면역학적 다양성을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성이란 주어진 환경에 더 잘 적응하고자 짜낸 생명의 고육지책이었다.

 

대다수 질병은 일일이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유전자가 관계하여 일어난다. 유전자 하나의 작동 여부에 따라 형질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수정 후 8주를 경계로 배아(embryo)에서 태아(fetus)로 이름이 바뀐다. 배아란 신체 각 기관으로 발달을 시작하지 않은, 미분화 상태의 세포 덩어리를 가리킨다. 물리학이나 화학에는 정상, 비정상이란 개념이 없다. 이런 구분은 오직 생명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사람들이 신체 이상에 대해 말하고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것이 통계적 일탈을 보일 때가 아니다. 해롭거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거나 고통스럽거나 두려움이 생겨날 때다. 생명은 끊임없이 변화(진화)한다. 저자는 세계를 만나고 인식한 것은 오로지 책을 통해서였다고 말한 사르트르를 언급한다. 책을 읽으며 세상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사물의 직접적인 인식보다 문자를 통해 사색된 관념이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는 의미다.

 

움베르토 마투라나는 객관적 세계란 과학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지적했다. 세상은 생명체가 감각하는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원자를 쪼개 알아낸 양성자, 중성자, 전자라는 존재, 그리고 그들을 더 쪼개 발견한 십여 개의 소립자들, 그들의 존재를 아무리 다시 짜맞춰 보아도 물질의 성질은 이해되지 않고 세상의 모습은 포착되지 않는다. 소립자들 사이의 빈 공간은 우주만큼이나 크고 허무하다. 무량(無量)의 입자들이 만드는 공간의 의미를 생각하다 보면 존재의 무상함마저 감돈다.

 

오늘날 환원주의의 믿음을 따라 분자 수준에서 생명의 신비를 읽어내는 연구방법은 사실상 생물학 고유의 방식이라기보다 변형된 방식의 고전 물리학이라 할 수 있다. 법칙이란 것에 얽매이기에는 생명은 너무 경이롭다. 사람의 유전자 수는 2만개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염색체는 23쌍으로 되어 있고 다른 모든 유인원의 염색체는 24쌍이다. 그래서(염색체 수가 다르기 때문에) 인간과 유인원은 공통의 자손을 낳을 수 없다. 낳는다 해도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나온 노새처럼 생식력이 없을 것이다.

 

굴드는 '인간에 대한 오해'에서 생물학적 결정론을 만들어내는 서구의 뿌리 깊은 네 가지 철학적 오류를 들었다. 환원주의, 물화, 이분법, 계층화가 그것들이다. 환원주의는 복잡한 현상을 최소한의 결정론적 요소로 환원해 분석하는 것이고, 물화는 추상적인 개념을 정량적인 물질로 설명하려는 것이고, 이분법은 연속적인 실체를 엄격히 분리하는 것이고, 계층화는 모든 가치를 서열화하려는 자세를 의미한다. 인간을 만드는 것이 본성인지 양육인지 하는 논쟁은 네 가지 오류에 모두 관계된다.

 

르원틴은 3중 나선이란 말을 썼다. 2개는 선천적이고 유전적인 요소고 나머지 한 개는 환경으로 통칭되는 비유전적 요소다. 일반 심리학과 달리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 생물학적인 요인을 먼저 찾아내려 노력하는 것이 사회생물학이다. 진화심리학은 여기에서 파생된 학문이다. 다윈은 어째서 자연에 이타주의가 존재하는지 끝내 설명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다윈이 죽은 지 80년도 더 지난 1960년대에 이르러 유전학자들이 실마리를 풀기 시작했다. 이타주의의 기원은 다름 아닌 이기심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타주의라는 찬사를 받을 만한 성향이 유전자의 이해관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주장은 과학사에서 가장 불온한 사상이라 할 만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이야기를 한다. 욕심을 부려 과도한 이익을 보려 하거나 불법적인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먹고 살기 위해 스스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이기적이라 해석하는 것은 석연치 않은 데가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상황을 이기적 유전자가 이타적 행위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가져다 쓰는 것도 적절한 인용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유전체 분석에 의하면 인간과 가장 가까운 유인원이 보노보다. 1.3%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궁금한 것은 유전체의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침팬지와 보노보의 행동 사이에는 왜 그렇게 큰 차이가 나는가, 이다. 사회생물학에서 말하는 생물학적 이타주의는 호혜적 이타주의다. 매트 리들리는 "인간에게 동물적인 면이 있다고 해서 인간이 모든 면에서 동물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동물종이 고유한 면을 가지고 있고 서로 다르듯 인간도 고유한 면을 가지고 있고 서로 다르다. 생물학은 단일 법칙성의 과학이 아니라 예외의 과학이며 거대한 통합의 과학이 아니라 다양성의 과학이다. 개미가 공산주의적이라는 사실은 인간의 본능적 미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자연선택의 잔혹성으로부터 잔혹이 미덕이라는 결론은 나올 수 없다"는 말을 했다.

 

물리학에서는 태양이 존재하는 목적이나 중력의 이유 따위를 묻지 않지만 생물학에서는 목적이나 이유를 물을 수 있다. 우리가 속한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이타주의가 정말로 우리 본성에 새겨진 이기심에만 의존하는 거라면 그보다 위태로운 외줄타기는 없다.(272 페이지) 저자는 자연세계에서 우리는 이기적으로 행동할 자격이 없으며 그럴 수도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생명은 거대한 가소성(可塑性; plasticity)이라 말한다. 노벨상을 수상한 분자 생물학자 귄터 블로벨은 "생명의 연속성에서 보면 우리의 나이가 스무 살이라느니, 서른 살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모두 잘못 되었다. 우리의 나이는 모두 35억살이기 때문이다."란 말을 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다양한 생명이 시공간을 초월해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가족이라는 사실은 놀랍기 그지없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수쿼미 족의 추장 시애틀의 이름에서 미국의 항구 도시 시애틀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그는 강압적으로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백인들에게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들꽃은 우리의 누이이고 순록과 말, 큰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들이다. 강의 물결과 초원에 자라는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땀은 모두 하나다. 모두가 한 가족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대지에게 일어나는 일은 대지의 아들들에게도 일어난다. 사람이 삶의 그물을 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 역시 한 가닥의 그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가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반드시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이다."란 말을 했다.

 

생물학이 오랜 기간 자연학(관찰로 얻은 지식을 서술하는 학문)이나 박물학에 머물렀던 것은 핵심 실체인 유전자의 실체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자 생물학의 태동이 생물학을 질적으로 바꿔놓았다. 세포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톱니바퀴처럼 연결된 화학반응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세포를 하나의 기계로 보는 관점이 우세해졌다. 문제는 어떤 기계도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으며 스스로를 설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생명이 기계를 닮아갈수록 기원은 더욱 불분명해진다.

 

뉴턴이 위대한 것은 그가 처음으로 천상의 역학과 지상의 역학을 통일했다는 데 있다. 조선인 중 처음으로 뉴턴의 중력 이론을 접한 최한기는 그의 이론을 죽은 수학이라 폄하했다. 뉴턴 이전의 과학은 '왜'를 탐구했지만 이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과학이 '어떻게'만을 탐구하게 된 것이다. 상상은 사라지고 계산만 남은 것이다. 생물학은 다윈 이래 '왜'를 묻지 않는다. 굴드는 생명이 진화를 통해 변화해온 경로를 전일적인 관점에서 복합적으로 분석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모든 결과를 환경에 대한 적응이라는 단순하고도 편협한 관점으로 대하는 시각을 비판했다.

 

마이어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목적론은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으나 필요하지 않음은 사실이 아님을 의미하지 않는다. 설사 필요하지 않더라도 합목적성은 생명 내부에 이미 존재한다. 베르그송은 진화론 자체를 폭넓게 수용하면서 진화의 의미와 인간이 걸어온 길을 사유하고자 했다. 그는 한 역사의 잇따르는 순간들에서 환원 불가능하고 비가역적인 것은 과학에 의해 포착될 수 없다고 말했다. 생명의 고유한 작용을 물리화학적 요소들로 나타내는 것은 그 일부분만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과학도 그 해석에 통일성이 담보되지 않는 한 하나의 신앙일 수 있다고 말한다. 과학적 진실이 언제나 결정적으로 입증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같다. 목적 없는 정보는 없기 때문이다. 생명이란 기계적이라기보다 복잡계적인 현상에 더 가까우며 단독적이기보다 여러 구성 요소간의 의식적이고도 협력적인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유전자에 담긴 정보의 의미를 완전히 파악한다 해도 전체의 집단이 만들어내는 복잡성과 의외성을 예측하기 어렵다.

 

생명이 가진 정보, 그 정보가 가진 목적이 기계적일뿐이라면 생명현상이 이처럼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과학은 객관적이며 가치 중립적이라는 기대를 받는다. 그러나 실제로 과학에는 연구를 수행해 얻은 결과를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주관적 판단이 개입할 수 있다. 과학에는 논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 과학적으로 얻은 결과를 어디에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가치도 달라질 수 있다.

 

합성생물학 분야에서 커다란 전진을 보이고 있는 하버드대의 유전학자 조지 처치는 멸종된 매머드뿐 아니라 멸종 인간종인 네안데르탈인의 복원도 꿈꾸고 있다. 저자는 멸종한 그들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고 쳐도 우리는 그들을 데려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라고 묻는다. 저자는 에토스(ethos)의 순수한 목소리를 거부하는 크라토스(kratos; 힘의 의인화)는 스스로 파멸하기 쉬운 서툰 힘을 뿐이라 말한다.

 

2018년 세계보건기구는 노화를 자연현상이 아닌 질병으로 규정했다. 막스 플랑크는 과학은 장례식이 치러질 때마다 한 번씩 진보한다는 말을 했다. 새로운 발견에 따른 과학의 진보는 반대 의견을 가진 기존의 세력을 설득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세력이 죽어 사라지고 새로운 진리를 친숙하게 여기는 젊은 세대가 사회를 구성하고 나서야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는 과학 외의 영역에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모든 사람이 뒤섞여 영원히 사는 세상에서는 어떤 진보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른 것들보다 더 위중한 인간의 큰 죄가 있으니 하나는 조급함이고 다른 하나는 게으름이다. 인간은 조급했기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당했고 게으르기 때문에 다시 낙원에 들어가지 못했다." 카프카가 쓴 일기다. 생명공학 기업가인 후안 엔리케즈는 TED 강연에서 호모 사피엔스에서 진화할 다음 단계의 인간종에게 호모 에볼루티스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자연스러운 변이와 자연선택에 따라 생겨나는 새로운 종이 아니라 인위적인 조작으로 만들어진 초인류를 뜻하는 이름이다.

 

어떤 유전자가 우월한지는 변화하는 환경이 선택한다. 유전자를 지닌 당사자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완벽한 인간이라는 개념은 허상이다. 세계를 판단할 단 하나의 절대적 기준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동중이다. 생명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의식이라는 초강력 핵무기를 탑재한 인간에게 이제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는 아이들의 장난감 권총 놀이처럼 무의미하다.

 

우리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변해가고 있는 과정 중의 존재를 의미할 때 그것은 물질이 아니라 의식이 되어야 한다. 이 세계 거의 모든 문제는 의식의 문제다. 본문에 민들레 원칙(dandelion principle)이 언급된다. 같은 민들레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잡초가 되기도 하고 명약이 되기도 한다는 의미다.

 

물리학에 사건의 지평선이란 개념이 있다. 어떤 물체가 블랙홀로 떨어질 경우 우리는 그 물체가 사건의 지평선에 무한히 가까워지는 것을 볼 수 있을뿐 그것이 블랙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지평선을 넘어가는 순간 빛도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사건의 지평선은 우리가 모든 생명의 궁극적 공통 조상이 무엇이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점을 말할 때 사용되는 개념이다. 박테리아는 DNA를 자신의 직계 후손에게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수평이동을 통해 옆 동료들에게도 전해주기 때문이다.

 

윌리엄 깁슨의 말대로 공평하게 배분되지 않았을뿐 미래는 이미 와 있다. 생명은 개체이면서 그물망이기 때문에 인간과 완전히 동떨어진 자연이나 환경이라는 개념은 생각할 수 없다.우리 자신도 생태계에 포함된다. 랩걸이란 책에서 저자 호프 자런은 인류 문명은 4억만년 동안 지속되어온 생명체를 식량, 의약품, 목재의 세 가지로 분류해 그것들을 더 많이, 더 강력하게, 더 다양한 형태로 손에 넣고자 함에 따라 식물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며 세상은 조용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아프리카 연안의 모리셔스 섬에 서식했던 도도(dodo)라는 이름의 새를 아는가? 도도는 포르투갈어로 바보라는 의미다. 날지도 못하면서 사람들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도도가 날지 못하게 된 것은 천적이 없어 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새가 포르투갈인들이 섬에 발을 들여놓은 지 100년만에 멸종되자 도도가 매개가 되어 발아시키던 칼바리아란 나무가 멸종 위기에 놓였었다.(이 사실을 안 사람들이 도도와 유사한 칠면조를 데려다 칼바리아 열매를 먹게 해 어렵게 나무의 싹을 틔우는 대 성공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이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과학의 방법론에 노출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생물학의 현상을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리학과 화학의 법칙에 새로운 내용이 덧붙여져야 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저자는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는 말이 옳지 않다고 말한다. 자연은 두 번 비약했다. 한 번은 물질을 구성하기 위한 양자 도약이고, 한 번은 그 물질이 존재의 의미를 갖도록 하기 위한 생명의 도약이다. 생명의 탄생은 위대한 도약이었다. 무생물과 생물 사이에는 우연으로는 차마 건널 수 없는 거대한 불연속의 심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데카르트와 베이컨 이래로 모든 자연과 생명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굳어졌음을 언급한다. 저자는 인류의 진보를 위해 환경 파괴와 동식물의 희생을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대가로 생각한다면 그것인 미궁 속에서 아리아드네의 실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행위가 될 것이라 말한다. 과학이 알려주는 진리는 그 자체로 삶의 지침을 삼을 만한 것들이 아니다. 거기에 해석이 필요하고 가치가 부여되어야 한다.

 

저자는 생명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살릴 줄 아는 것만큰 멋진 일도 없을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대중을 위해 과학을 쉽고 재미 있게 전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는 태도라 말한다. 쉽고 재미 있는 것은 과학의 매우 기초적인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은 대체로 어렵고 복잡하다. 과학은 지난한 논재이고 설득이다. 한순간 나를 잡아끄는 매력, 그 놀라움과 아름다움이 없다면 포기하기 쉬운 학문이다. 저자는 가장 심오한 통찰은 늘 그렇듯 쉽고 재미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엾다고 말한다. 저자는 계속해서 묻고 궁금해하는 사람만이 근사한 답을 얻을 가능성이 놓다고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권우집 - 심산 한국학
홍찬유 지음 / 심산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권우집(券宇集)은 권우 홍찬유 선생의 문집이다. 시(詩), 서(序), 기(記), 발(跋), 비문(碑文), 묘표(墓表), 잡저(雜著), 부록(附錄) 등으로 구성되었다. 짧은 시간도 다투듯 아껴 써야 한다는 의미의 촌음시경(寸陰是競)이란 휘호(揮毫)를 받은 제자 정후수 교수가 ‘책을 펴내면서’란 글을 썼다.“2005월 3월 은사 권우 선생께서 세상을 버리셨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이다. 세상을 버렸다는 말은 연관(捐館)이란 말로 바꿀 수 있다.

 

‘책을 펴내면서’에 의하면 선생은 미좌 정기, 우정 임규 선생 문하에서 배웠고 위당 정인보 선생에게서 인정을 받았다. 연천 출신의 한학자로 유도회 부설 한문연수원을 설립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강좌를 개설하셨다. 미좌 정기 선생에게서 교육 받은 곳이 연천 미산의 미좌 서당이다. 미수 허목 선생께서 많은 곳을 유람한 것처럼 여러 곳을 다닌 뒤 쓴 시들이 많다. 봉황정에 올라란 작품에 나오는 바에 의하면 선생은 눌재(訥齋) 양성지의 외손이다. 송파(松坡)라는 호를 쓰기도 했던 양성지는 세조 - 성종 시기의 학자로 지리학, 역사학에 능했다.

 

가을 강 뱃놀이란 의미의 추강범주(秋江泛舟)란 글에 범범(泛泛)이란 말이 나온다. 중류범범여난수(中流泛泛與亂收)란 글로 중류에 흥겨워 어쩔 줄 모르네란 의미다. 유유범범(悠悠泛泛)이란 글이 있다. 무슨 일을 다 잡아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글이다. 유(悠)는 한가하다, 멀다, (멀기에) 생각하다란 의미의 글자다. 범(泛)은 뜰 범이란 글자다. 본문에 관수(觀水)란 말이 나온다. 물을 본다는 의미이지만 단지 본다기보다 물의 속성을 배우는 것이다.

 

송언개(松偃蓋)란 말이 나온다. 소나무는 나부끼듯 일산처럼 자신을 덮어(가려)준다는 의미다. 나부낄 언이기도 하고 쉴 언이기도 하다. 언기식고(偃旗息鼓)란 말이 있다. 전쟁터에서 군기(軍旗)를 누이고 북을 쉰다는 뜻으로 휴전(休戰)함을 이르는 말이다. 두보의 시 구절인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닦는다는 만하세병(挽河洗兵)과 같은 말이다. 반암언중신(盤巖偃仲伸)은 너럭바위는 누워 뒹굴기 알맞다는 의미다.

 

연천 한탄강에서 지은 '한탄강에 배 띄움'이란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삼팔선은 누가 갈라놓은 것이며(산하유선분삼팔; 山河有線分三八)란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바다. 정전협정은 누가 주도한 것인가?란 의미의 글이다. 정전협정을 지칭하는 말이 용주(龍酒)다. 용주무단설일쌍(龍酒無端說一雙)에 나오는 말로 화(華)가 이(夷)를 침범하면 황룡 한 쌍을 주어야 하고 이(夷)가 화(華)를 침범하면 청주 한 잔을 주어야 한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화양동을 유람하며(遊華陽洞; 유화양동)란 글을 보자. 숭정 때 벌써 중국이 망했는데 만동묘가 우리에게 무슨 아랑곳이냐 존양 대의라는 게 다 무슨 잠꼬대냐? 가짜 명나라 사람도 이젠 다 지나갔네 자기도 속았고 남도 속았다. 그때 북벌론은 더욱 우스워라.

 

선생은 연천 한탄강에서 시를 지은 데 이어 철원 고석정, 순담계곡 등에서도 시를 지었다. 연천의 명소인 재인폭포를 유람하고 쓴 재인폭포를 구경하며(관재인폭포; 觀才人瀑布)란 시도 있다. 선생은 누구보다 분단을 안타깝게 여겼다. 모름지기 남북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으면(수령남북일환전; 須令南北一環全)이란 구절이 있다. 선생은 문치를 숭상하는 귀한 보배를 만인이 머금는 것이 정치에서 가장 급한 일이라고 말했다.

 

선생은 십청원에서 더위를 씻으며(十靑園消暑)에서 우뚝 솟은 용마산 검푸른 기운으로 가렸으나(용수차아옹취미; 龍岫嵯峨擁翠微)란 말을 했다. 비문(碑文) 가운데 미강단소 개수 비명이 눈에 띈다. 미수 허목 선생을 모신 미강서원 자리의 단소(壇所)에 대한 글이다. ”엎드려 생각건대 우리 우의정 문정공 미수 허 선생은 학문은 천(天)과 인(人)을 궁구하셨고 도는 체(體)와 용(用)을 체득하셨으며 예교(禮敎)를 열어 밝혀서 나라의 맥을 굳게 지키셨으니 뚜렷이 백세의 스승이 되신 분이시다.”로 시작하는 글이다.

 

첩설(疊設)이란 말이 나온다. 한 분을 여러 서원에 모시는 일을 말한다. 서원 철폐의 기본원칙은 한 분을 가장 중요한 곳에 모시도록 하고 나머지는 철폐하는 것인데 미강서원이 철폐된 것은 소인배들이 간사한 짓을 하고 그 일을 맡은 신하들이 임금의 명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결과라는 요지의 글이다. 선생은 단소를 설립하려는 것이 다만 제사 드리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언젠가는 시대의 형편을 보아 가며 서원을 복원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라 썼다.

 

“아무리 작은 땅이라도 주인은 있는 것, 여기는 바로 문정공의 터전이다.”란 글이 눈에 띈다. 선생은 “돌이켜 보면 시원찮은 자질로 겨우 몇 글자나 알게 된 것은 모두 선생님께서 잘 가르쳐 주신 결과니 그 은혜를 생각하면 어찌 감히 문장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라고 썼다. 선생은 매양 베풀기를 좋아하면서도 보답을 바라지 않고 그 의로움이 아니면 비록 만종(萬鐘)으로 녹봉(祿俸)하여도 돌아보지 않으셨다.

 

선생의 아들 사성(思成)은 어머니 단양 우씨에 대해 선생으로 하여금 가정을 돌아보지 않고 학문에 뜻을 오로지 할 수 있게 했다고 썼다. 아들은 부군(府君)께서 20세의 나이에 망국의 한과 신문화의 성황으로 경향 각지로 방황하다가 거벽(巨擘; 학식이나 어떤 전문 분야에서 남달리 뛰어난 사람)인 우정(偶丁) 임규(林圭; 1863 - 1948) 선생을 뵙고 학문의 심오함과 애국의 뜻을 승수(承受)하셨다고 썼다. 아들은 선생께서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좇지 않았으며 그 묻는 것에 따라 답변을 극진히 하는데 미칠 때까지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부군에 대한 대체의 말이라고 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우리가 우주에 존재하는가? - 최신 소립자론 입문 대우휴먼사이언스 7
무라야마 히토시 지음, 김소연 옮김, 박성찬 감수 / 아카넷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재의 소립자 이론에 의하면 물질은 반드시 자신과 짝을 이루는 반물질과 함께 태어난다. 이를 쌍생성(pair production)이라 한다. 물질과 짝을 이루는 반물질이 만나면 쌍소멸(pair annihilation) 현상이 일어난다. 둘 다 소멸한다는 의미다. 물질로서는 소멸하지만 사라진 다음에는 물질과 반물질의 무게만큼 에너지가 발생한다. 쌍소멸은 물질과 반물질의 무게가 에너지로 변하는 현상이다.

 

쌍소멸로 만들어진 에너지에서는 다른 물질과 그 물질의 반물질이 태어난다. 물질과 반물질의 관계는 나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의 관계와 같다. 물질과 반물질의 전기적 성질은 대칭 관계다. 우주 탄생 직후 물질이 반물질에 비해 10억개 당 2개 정도 많았다. 우리는 학교에서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배웠지만 이 우주에 있는 원자를 모두 모아도 5%도 되지 않는다. 우주의 23%는 암흑물질, 73%는 암흑 에너지다.

 

암흑물질의 유력 후보로 중성미자의 친척을 생각할 수 있다. 중성미자는 태양 같은 별로부터 대량으로 방출되어 1초 동안 수백 조개나 되는 양이 우리 몸을 통과한다. 중성미자는 중력이나 전자기력에 반응하지 않기에 우리 몸을 통과하여 빠져나간다. 우리는 이를 느낄 수 없다. 음전기를 띤 전자를 포함하는 원자가 전기적으로 중성인 데서 양전기를 띠는 양성자의 존재를 알아냈다.

 

베타선(전자)이 방출된 전과 후를 비교해 보니 반응 후에 에너지가 감소했다. 볼프강 파울리는 분명 에너지가 감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겉보기만 그럴 뿐 사실은 에너지가 보존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입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 입자는 전기적으로 중성으로 예상되었기에 중성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파울리가 가설을 세운 지 2년 후에 영국의 제임스 채드윅이 원자핵 내부에 양성자 외에 또 다른 입자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도 중성의 입자였기에 그는 그 입자를 중성자라 이름했다. 페르미는 파울리가 예언한 입자를 연구해 논문을 쓰려 했는데 입자의 이름이 없어지면 불가능한 일이 된다. 그래서 중성미자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프레데릭 라이네스와 클라이드 카원이 중성미자를 발견했다. 파울리가 중성미자 가설을 발표한 후 발견되기까지 24년이 걸렸다. 우리 주변의 물질을 일일이 분해하면 전자, 업 쿼크, 다운 쿼크의 세 가지 소립자로 귀결된다.

 

쿼크는 머리 겔만이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經夜)’에 나오는 새가 우는 쿼크라는 소리를 따 이름지은 것이다. 페르미온은 물질을 만드는 소립자, 보손은 힘을 만드는 소립자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마찰력, 원심력, 표면장력, 수직항력 등 다양한 힘을 접하기에 힘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주에 존재하는 힘은 전자기력, 강한 힘, 약한 힘, 중력 등 네 가지가 전부다.

 

각각의 힘에는 힘을 전달하는 소립자가 존재한다. 전자기력은 광자(빛 입자)에 의해 전달된다. 빛은 파동처럼 행동하지만 미시 세계에서는 입자적 성질이 강해진다. 자석이 못을 끌어당기는 경우에도 미시적 관점에서는 자석과 못 사이에서 캐치볼하듯 광자를 주고받아 전자기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지구 내부는 6000도나 되는 고온이 유지되면서 액체 금속으로 만들어진 외핵이나 맨틀이 대류하는 내부 활동을 지탱하는데 태양으로부터 전달되는 에너지만으로는 이 정도의 온도를 유지할 수 없다.

 

지구 내부로부터 활동을 지탱할 수 있는 정도의 에너지가 공급되고 있다는 의미다. 약한 힘이 관련되어 있다. 자구 내부에서는 많은 방사성 원자가 자연붕괴를 일으키며 열을 방출한다. 이 열이 내부 온도를 유지하는 데 이용된다. 힘은 소립자에 의해 전달된다. 그런 소립자를 보손이라 한다. 네 가지 힘 가운데 전자기력은 광자, 강한 힘은 글루온, 약한 힘은 위크보손 등 각각의 힘을 전달하는 보손이 발견되었다.

 

중력을 전달하는 보손은 발견되지 않았다. 중력자라는 이름은 있지만 아직 발견되지는 않았다. 중력은 다른 세 개의 힘에 비해 현저히 약하다.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대칭이 중요하다. 물리학에서는 좌우나 상하를 바꾸어도 물리법칙에 변화가 없는 것을 패리티(반전성) 대칭성이라 부른다. CP에서 C는 입자와 반입자의 교체를 의미한다. P는 패리티 대칭성이다. 물질과 반물질이 완전히 행동을 같이 한다면 이 우주에는 은하도, 별도, 우리도 존재할 수 없었다.

 

반물질이 소멸하고 물질이 남기 위해서는 물질과 반물질 간의 대칭성이 약간 어긋나 있어야 한다. 초신성 폭발시 발생하는 에너지의 99퍼센트는 중성미자로 변해 별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초신성 폭발 전에는 수명이 다한 별은 폭삭 쪼그라들며 밀도가 상당히 높아지기 때문에 중성미자조차 별에 갇힌다. 그래서 에너지를 충분히 저장하게 되고 중성미자가 별의 폭발에 도움을 준다. 사실 별이 반짝 하며 밝아지는 것은 몇 시간 후다.

 

이 이론을 중성미자 트래핑(가둠)설이라 한다. 가미오칸데(중성미자를 관측하기 위해 일본 기후현 가미오카 광산 지하 700m에 설치됐던 물리학과 천문학 관측 장치) 관측 자료를 보면 사토 박사의 이론대로 중성미자가 포착되고 몇 시간 후에 초신성 폭발이 관측되었다. 지금까지 우주를 보려면 가시광선을 사용한 광학현미경이나 전파를 사용한 전파망원경 등을 이용했는데 중성미자를 사용해 우주를 관측할 수도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1998년 중성미자에 무게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문제는 표준이론이 중성미자가 완전히 0이라는 전제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중성미자는 지구 내부도 빠져나간다. 지구 반대편에서 발생한 중성미자는 지구를 통과하는 동안 타우 중성미자로 변했다가 뮤우 중성미자가 되기를 반복한다. 이를 중성미자 진동이라 한다. 중성미자 진동이 일어난다는 것은 시간 경과에 따라 입자가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중성미자가 빛의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는 중성미자에 무게가 있다는 의미다. 지구 반대편에서 오는 중성미자가 다른 것으로 바뀐 것은 다른 것으로 바뀔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는 시간을 느낀다는 것이고 이는 중성미자에 무게가 있다는 의미다. 태양은 1초 동안 40억 킬로그램씩 가벼워지며 우리에게 빛과 열을 보내고 있다. 중성미자는 태양 중심부에서 만들어지므로 중성미자를 사용하면 태양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X선으로 촬영한 것처럼 사진 찍을 수 있다.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열을 받고 있고 우리는 덕분에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동시에 지구도 우주 공간으로 40조 와트의 열을 방출한다. 태양으로부터 받은 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열이다. 지구가 방출하는 열의 양 가운데 태양에서 오는 열의 양은 전체의 절반이다. 지구 내부에서도 중성미자가 만들어지고 있다. 우라늄이나 헬륨 같은 원자가 붕괴하면서 중성미자를 만들고 있다. 나머지 반은 지구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중성미자는 가볍다. 전자의 1/100에 불과하다. 중성미자는 전기가 없으므로 반물질도 전기가 0이다. 중성미자는 예외 없이 왼쪽 돌기다. 이는 추월하면 오른쪽 돌기로 보일 것이란 의미다. 그런데 오른쪽 돌기는 볼 수 없었다. 중성미자는 추월해서는 볼 수 없다는 의미다. 이는 중성미자가 우주에서 가장 빠르다는 즉 빛 속도와 같다는 의미다. 광속으로 움직이려면 무게가 있으면 안 되기에 무게가 없다고 여겨온 것이다.

 

중성미자는 모두 왼쪽 돌기, 반중성미자는 오른쪽 돌기다. 중성미자를 추월해 본 오른쪽 돌기 중성미자는 어쩌면 반중성미자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시계 방향 중성미자가 반중성미자라면 우리가 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반중성미자 덕분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질은 반물질과 만나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방출하며 소멸해 버린다. 물질과 반물질은 항상 1:1로 짝을 이루어 소멸하면서 에너지로 변하고 그 에너지는 다시 한 쌍의 물질과 반물질을 생성한다.

 

중성미자와 반중성미자의 차이를 알면 우주가 시작되었을 무렵 왜 물질이 남고 반물질은 소멸해 버렸는지 하는 물음에 가까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성미자 외에 우리의 존재 자체와 관련된 증요 입자가 힉스 입자다. 소립자 표준이론에서는 모든 소립자는 원래 무게가 없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쿼크, 전자, 중성미자 등 대부분의 소립자는 무게가 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힉스 입자다. 일반적 소립자는 공간을 통과할 때 힉스 입자의 방해를 받아 무게를 얻는다.

 

힉스 입자는 신의 입자라 불린다. 처음에는 리언 레더먼이 30년 이상 열심히 찾아 헤맸지만 모습을 볼 수 없어서 goddamn이라 불렀는데 후에 god particle이 된 것이다. LHC(large hadron collider; 양성자를 충돌시키는 대형 장치)에서는 양성자를 굉장한 속도로 가속 충돌시킨다. 가장 간단하게 양성자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수소 원자에서 전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두 개의 양성자를 충돌시키는 실험에서 흥미로운 것은 충돌 순간 물질이 새롭게 생성되는 현상이다.

 

에너지 질량 등가성에 의해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소립자 물리학에서는 99.7%의 확실성을 3 시그마(표준편차)라 부른다. 아틀라스와 CMS는 모두 힉스 입자를 찾는 실험이지만 그 자체를 찾는 것이 아니라 힉스 입자가 발생한 후에 생기는 흔적 같은 것을 관측하는 것이다. 힉스 입자의 흔적은 몇몇 형태로 나타난다. 그 중 하나가 광자다.

 

조금 이상한 이야기이지만 빛은 빛으로 볼 수 없다. 빛과 빛은 충돌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해도 느낄 수 없다. 최근에는 뮤온을 화산의 분화 예측에 응용하는 연구도 진행중이다. 뮤온은 우리 몸뿐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을 통과한다. 사물의 밀도에 따라 붕괴하는 방법에 차이가 난다. 마그마처럼 액체이면서 밀도가 낮은 장소는 많이 통과하고 고체인 바위 부분은 통과하는 양이 적어지기 때문에 마그마가 화산의 어디까지 올라왔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수소원자의 원자핵인 양성자는 핵융합 반응의 원료다. 전기했듯 태양은 1초에 40억 kg씩 줄어들며 우리에게 빛을 준다. 핵융합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에너지뿐 아니라 중성미자이기도 하다. 중성미자가 발생하는 데는 약한 힘이 작용한다. 이 힘은 1 나노미터의 1/ 10억이라는 아주 짧은 거리까지밖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것이 무엇인가에 의해 핵융합이나 핵분열에 영향을 미치니 우리도 중성미자의 덕을 보는 것이다.

 

이 약한 힘이 바로 전자기력이다. 전자기력은 거의 무한대라 할 정도로 힘의 영향력이 멀리까지 미친다. 우주 초기와 달리 지금은 왜 위크보손과 광자에 구별이 생기고 약한 힘과 전자기력이 다른 힘으로 취급될까? 이 두 힘 사이에 대칭성이 깨졌기 때문이다. 이 대칭성 깨짐에 힉스 입자가 관련되었다. 원래 같은 힘이었던 약한 힘과 전자기력을 구별하게 하는 것이 힉스입자였다. 힉스입자는 에너지가 낮아지면 자연히 대칭성이 깨지는 시스템이 내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힉스입자가 일으킨 대칭성 깨짐은 약한 힘과 전자기력을 구별할 뿐 아니라 소립자에 무게를 부여하는 중요 시스템이다. 힉스 입자에도 수증기, 물, 얼음의 상전이 현상이 일어난다. 우주가 갓 시작되었을 때 주변 온도도 높아 힉스 입자도 고에너지 상태였고 그에 따라 수증기처럼 여기저기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당시는 모든 입자가 이런 상태에서 구별 없이 마음대로 날아다녔기 때문에 대칭성이 유지된 것이다.

 

우주가 식어가자 물이 얼음으로 변했듯 힉스입자도 꽁꽁 얼었다. 이 상태가 되면 얼음의 경우는 개개 물 분자의 자리가 정해져 결정을 만드는데 개별 분자가 구별되어 대칭성이 깨진다. 힉스입자가 얼어붙어 있을 때는 대칭성이 깨져 있으므로 그 영향을 받아 약한 힘과 전자기력이 구별되거나 소립자가 무게를 느끼게 된 것이다. 물이 얼음이 되는 상전이가 발생하는 온도는 0도씨이다.

 

힉스입자가 얼어붙어 상전이가 발생하는 온도는 4000조도씨다. 소립자는 기본적으로 빛의 속도로 날아가려는 존재인데 진공 안에 힉스입자가 가득 차 있어서 앞길이 가로막혀 빛의 속도보다 느려진다. 느려진다는 것은 움직이기 어렵다는 것이고 이는 그만큼 무게를 느껴 무거워진다는 의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소립자는 얼어붙은 우주 공간에서 가득 차 있는 힉스 입자의 방해를 받아서 멀리까지 가지 못한다. 학자들은 움직이기 어려워진 만큼 무게를 얻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마음에 걸리는 바는 실제 상황이 우리가 이론적으로 생각하는 대로인가, 하는 점이다. 힉스 입자가 진공 중에 가득차 있는 덕에 원자가 그 자리에 정지해 있는 질서가 생기는 것이므로 힉스 입자는 아주 중요한 존재다. 이렇기에 신의 입자라 불러도 좋은 것이다. 다른 소립자와 달리 힉스 입자는 스핀이 없다. 저자는 힉스 입자가 기분 나쁘고 싫어 힉스 리스 이론을 주장한 적이 있는데 발견이 되었기에 사죄한다고 말한다.

 

힉스 입자는 4차원 세계에서는 스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4차원 외의 여분의 차원에서는 돌고 있을 수도 있다. 우주의 시작이라고 알려진 빅뱅 이전에 인플레이션 현상이 있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플레이션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원자보다 훨씬 작았다. 1초도 지나지 않아 수 밀리미터 크기로 넓어지는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며 단번에 커진 후 빅뱅이 일어나 현재 우주의 모습이 되어갔다.

 

우주가 초고온, 초고밀도의 아주 작은 불덩이 상태로 태어났다고 주장한 가모프는 불덩이 우주의 흔적(우주배경복사)이 마이크로파인 전파로 관측될 수 있다고 예언했다. 우주배경복사는 어느 방향에서도 똑같이 관측할 수 있고 온도는 마이너스 270.3도씨이다. 탄생 초기의 작은 우주는 세탁기에서 이제 막 꺼낸 쭈글쭈글한 상태에 비유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이 일어남으로써 갑자기 다리미질을 한 것처럼 펴져서 에너지가 균일한 상태가 되면서 팽창했다.

 

주름이 펴지고 전체가 평평해진 상태에서 빅뱅이 일어났기 때문에 현재의 우주도 거의 균일한 상태가 된 것이다. 빅뱅 후의 열의 잔해인 우주배경복사가 거의 요철이 없는 상태인 것은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최근 이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주요 역할을 하는 것이 중성미자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인플레이션은 주름을 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역할도 한다. 열심히 다림질한 곳 옆에 자연스럽게 주름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참 편하게 생각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주 초창기에는 가능한 일이다. 당시의 우주는 원자보다 작았기에 소립자들의 역할이 대단했다. 소립자는 좁은 곳에 갇히면 요동한다. 원자보다 작은 우주에서는 인플레이션으로 주름을 폈지만 소립자가 좁은 곳에 갇혀 있는 효과로 인해 요동이 생긴다.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불확정성관계라는 다소 이상한 규칙이 있다. 미시세계에서는 에너지 보존법칙은 조금 무시해도 좋다.

 

우주는 137억년전에 빅뱅을 일으켰다. 당시 우주는 너무 뜨거워 물질과 에너지가 지나치게 한 곳에 밀집되어 있었기 때문에 빛이 직진하지 못하고 갇혀 있던 시기가 있었다. 빛이 직진하게 된 것은 우주 탄생으로부터 38만년이 지난 후였다. 빛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탄생 후 38만년 후의 우주까지다. 우리가 이 우주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에 입자와 반입자의 수가 어긋나야 한다. 이때 큰 역할을 한 것이 중성미자다.

 

우주에서 최초로 생긴 원소는 수소와 헬륨이다. 수소와 헬륨 모두 가스이므로 양이 적을 때는 대단히 가볍지만 많이 모이면 무거워져 자기들의 무게로 인해 중심 부분이 꼭꼭 채워진 고밀도 상태가 된다. 어느 정도의 밀도가 핵융합이 시작되어 열과 빛을 방출한다. 처음에 핵융합의 원료로 사용된 것은 수소원자였다. 네 개의 수소원자가 결합되어 하나의 헬륨 원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생기고 열과 빛을 방출한다.

 

수소원자가 없어지자 헬륨 원자가 융합해 탄소원자와 산소원자가 만들어진다. 헬륨이 없어지자 탄소와 산소를 원료삼아 네온, 마그네슘, 규소, 철 등이 만들어진다. 별은 우리 몸의 기본이 되는 원소의 제조기이기도 하다. 별의 핵융합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철까지다. 무게가 태양의 8배 정도까지인 별은 탄소와 산소가 결합됨으로써 핵융합이 멈추고 백색왜성이 되지만 8배 이상인 경우 핵융합은 철까지 진행되어 최종적으로는 초신성폭발을 일으킨다.

 

이 초신성 폭발이 철보다 무거운 원소를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핵융합을 끝낸 별은 중심부분이 식어가면서 굉장한 기세로 식어간다. 그러면 중심부분이 초고밀도가 되고 대폭발을 일으킨다. 이 폭발로 많은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진다. 초신성폭발은 새로운 별의 재료가 되는 가스나 먼지를 우주공간에 뿌리는 역할을 한다. 흩뿌려진 가스와 먼지는 중력이 강한 곳으로 모이고 새로운 별을 만든다.

 

우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 같다. 중력이 너무 강하면 별들은 모두 블랙홀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만큼 중력의 강도는 적당하다. 중성자의 무게도 절묘해서 조금만 더 무거웠다면 이 우주에 존재 가능한 원소는 수소뿐이었을 것이며 지구와 인간도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공 에너지도 알맞게 작아서 우주가 이만큼 커질 수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완성도가 높다. 실험실에서 빅뱅을 재현하기 위해 소립자 가속기라는 장치를 사용해 보니 에너지에서 물질이 만들어질 때 반드시 반물질이 함께 만들어진다. 불덩이 같은 에너지였던 빅뱅은 물질과 반물질을 똑같이 만들었을 테고 그 후 물질과 반물질은 다 같이 만나 소멸하여 에너지로 돌아갔을 텐데 우주는 텅 비지 않고 우리가 우주에 존재한다. 빅뱅으로 생성된 물질과 반물질의 균형을 살짝 깬 것이 중성미자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패션, 色을 입다 - 10가지 색, 100가지 패션, 1000가지 세계사
캐롤라인 영 지음, 명선혜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캐롤라인 영의 ‘패션, 색(色)을 입다’는 의상과 의복에서 열 가지 색이 지닌 중요성을 탐구한 책이다. 열 가지 색이란 검은색, 보라색, 파란색, 녹색, 노란색, 주황색, 갈색, 빨간색, 분홍색, 흰색이다. 블랙은 물체가 가시적 파장을 삼켜 색 스펙트럼의 모든 빛을 흡수하고 나서야 비로소 눈에 보인다. 블랙이 색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입은 블랙 지방시 드레스를 기억하는가. 또한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에 나오는 검은 옷을 입고 홀로 선 인물을 기억하는가. 그런가 하면 마릴린 몬로는 어떤가. 보라색은 호불호가 갈리는 색이다. 흥미로운 점은 보랏빛이 많이 감퇴한 독특한 모브색이 폐경성 모브라고 칭해진다는 것이다. 모브는 mauve다.

 

이 색은 핑크 - 퍼플 색조를 띤 당아욱 꽃에서 이름을 따온 색이다. 아르누보 운동을 대표하는 보라색은 1960년대 후반 히피 운동의 사이키델릭을 나타내기도 한다. 지미 헨드릭스는 보라색을 스모키 사이키델릭과 연관지어 퍼플 헤이즈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헨드릭스는 자신이 볼 수 있는 색은 보라색뿐이라며 마약 중독을 자백했다. 보라는 민주당의 파란색과 공화당의 빨간색이 섞인, 통합을 뜻하는 색이기도 하다.

 

1774년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짝사랑 때문에 자살을 택한 젊은 예술가의 이야기를 담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출간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베르테르는 파란 연미복을 입고 노란 조끼와 반바지를 입은 캐릭터다. 파란색은 슬픈 감정과 연관성이 있지만 하늘과 바다 사이의 공간을 나타낸다. 충성스럽고 진실하며 차분하게 여겨지는 색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파란색을 자주 언급하는 것이 아닐까?

 

'위대한 유산’에서 기네스 펠트로가 입은 그린색 의상을 기억하는가. 녹색은 우리에게 필수 요소인 물과 생명, 머리를 맑게 하고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식물과 나무에서 나오는 풍부한 산소를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죽음과 부패를 상징하는 곰팡이, 독이나 독성도 보여준다. 압생트는 쑥으로 숙성시킨 녹색의 독주를 의미한다. 녹색은 에덴동산의 뱀이 화와를 유혹하여 사과를 먹게 함으로써 사람을 타락시킨 색이다.

 

모든 함축성과 복잡성을 내포하고 있는 녹색은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쉼이 필요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휴식과 같은 색감이다. 노란색은 꽃잎을 활짝 펴고 햇볕을 정면으로 받는 해바라기나 1990년대 광란의 포스터 또는 티셔츠에 인쇄된 형광노랑빛 스마일 페이스와 같이 여름날과 낙관주의를 연상하게 한다. 노란색의 황금빛이 비슷한 색조의 귀금속만큼이나 항상 가치 있게 여겨진 것은 아니었다.

 

중세 시대의 노란색은 온통 부정적 이미지였다. 노란색은 질병, 질환 및 황달을 암시했으며 4대 체액 중 하나인 황담즙과도 관련이 있다. 노란색 직물을 만들 수 있는 수많은 천연 물질이 있었지만 노랑은 오래 지속되는 빨강과 파랑에 비해 빠르게 퇴색했기에 불신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선사시대 동굴 벽화에 사용한 고운 점토와 산화철로 만든 붉은빛이 감도는 황토색 염료를 비롯하여 고대 이집트인들이 무덤에 칠한 유독성 광물 색소 리얼가(realgar) 등 오렌지빛은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다.

 

그러나 오렌지색이 무지개의 공식 색상으로 이름을 가진 것은 최근 일이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을 볼 수 있는 미술관이 오랑주리 미술관이다. 오랑주리는 오렌지 온실이란 의미다. 갈색 천은 사회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둔 저렴하고 거친 직물이었다. 1970년대는 세계적으로 정치적 격변과 불안정의 시기였다. 그래서일까. 자연의 색과 가깝고 전통적이며 인정적인 오렌지와 녹색이 결합된 갈색 톤이 사랑받았다.

 

빨간색은 사이렌, 교통, 정지신호, 영화‘이유 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이 입은 바람막이처럼 경고의 신호를 나타낸다. 구석기 시대에도 빨간색은 보호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콰도르 북부에서 칠레 남부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했던 잉카는 붉은 색을 고대 신화적 기원과 연관지었다. 18세기 암스테르담 염색업자들은 코치닐(Cochineal; 연지벌레 암컷) 염료에 소금과 강황을 첨가하여 짙고 보랏빛이 감도는 진홍색과 밝고 진한 선홍색, 스칼렛 오렌지를 만들어냈다.

 

참나무 수액을 먹고 사는 이 작은 곤충으로부터 염료를 추출하는 것은 무척 힘든 과정이다. 붉은 염료는 암컷에서만 나오는데 알을 낳을 준비를 하는 순간에 포획해야 한다. 햇볕에 말리고 으깨는 과정에서 붉은 즙이 분비된다. 아메리카 대륙의 코치닐과 경쟁할 붉은 염료는 없었다. 가시배 선인장을 먹고 자라는 이 곤충은 가장 밝으며 빛이 바래지 않는 붉은 색을 만들어낸다.

 

연지벌레처럼 미국산 코치닐 역시 암컷만을 사용해 햇볕에 말리고 물에 담가 추출하지만 연지벌레 염료 추출물의 10배를 생성하기에 이내 모든 붉은 염료를 대체했다. 빨강은 혁명의 색이기도 하다. 미국인과 유럽인은 핑크색을 가장 분열적인 색이라 생각하지만 일본에서는 귀엽다는 뜻의 가와이로 인식한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는 포스트 페미니스트 렌즈로 프랑스 왕비의 삶을 펑크적 요소와 핑크의 달콤함으로 표현했다. 섬세한 흰색 직물의 아름다움에는 식민주의, 노예제도, 섬유 산업의 노동자 착취라는 진정한 공포가 비밀리에 숨어 있다. 패션과 얽힌 색의 역사를 알려면 읽을 책이 ‘패션, 색을 입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