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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종 인간
팻 시프먼 지음, 조은영 옮김, 진주현 감수 / 푸른숲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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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는 약 20만년전 아프리카에서 진화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앞니가 없어 여러 도구를 만들었다. 이어 자신이 창조한 동물을 상대로 계약과 협약을 맺어 그들의 해부적 습성과 능력을 빌렸다. 저자는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한 시기가 유럽에 사피엔스가 등장한 시기와 겹친다고 말한다. 생태계란 협력, 공생, 상호 독립의 망이 교차하고 얽히는 복잡한 실체다.

 

침입종은 생태적 개념이다. 저자는 사피엔스를 침입종으로 규정한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가 유적지를 번갈아 사용한 흔적도 있다. 네안데르탈인의 전형적 도구 문화는 무스테리안 도구 문화 또는 아슐리안에서 무스테리안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도구 문화다. 전 세계를 향한 초기 사피엔스의 전례 없는 대규모 침입은 약 13만년전에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 초기 현생인류는 아프리카 대륙에만 머물렀다. 인간의 가까운 친척인 네안데르탈인은 레반트라고 불리는 중동 지역을 비롯 유라시아에 거주했고 아프리카에는 살지 않았다. 약 3만 9300년전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에서 캄파니아 이그님브라이트 폭발이라는 대규모 화산 폭발이 있었다. 이 폭발이 환경에 미친 충격으로 네안데르탈인이 일부 유럽 지역에서 쫓겨나 현생인류가 침입할 빌미를 주었거나 현생인류가 네안데르탈인을 대체하는 과정을 가속화했을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은 캄파니아 화산 폭발 훨씬 이전에 멸종했다. 저자는 현생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레반트 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한 이유가 강수량, 기후변화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살기 좋아진 기후 덕분에 다른 곳을 알고 싶어 낯선 세계를 탐색하기 위해 떠났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저자는 사피엔스는 아마 자신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떠나고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라 말한다.

 

스티븐 처칠은 네안데르탈인이 가까이에서 창을 찌르고 맞붙어 격투를 벌이는 방식으로 사냥했다고 주장한다. 매우 위험하고 힘이 많이 드는 방식이다. 현생인류는 자르고 으스러뜨리는 강한 이빨, 턱, 힘센 팔다리 같은 것이 없지만 행동은 포식성 동물들처럼 했다. 현생인류에게 도구는 그런 신체조건을 대신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종이 동식물을 얼마나 먹었는지는 음식을 구성하는 원자가 몸속으로 들어와 뼈, 치아 등과 결합하는 성질을 이용해 알 수 있다. 현생인류, 네안데르탈인 모두 단백질이 풍부한 밥상을 선호하는 최상위 포식자였다. 늑대는 아름답고 무리 사회는 유쾌하고 가족 생활은 평화롭다. 이는 침입자를 쫓는 그들의 치명적이고 무자비한 추격 습성과 지극히 대조적이다.

 

저자들은 기후변화 가설과 현생인류와의 경쟁가설은 배타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기후가 달라져 네안데르탈인이 사냥하기 좋은 서식지가 축소되고 먹잇감이 귀해졌다면 왜 현생인류의 서식지와 먹이 개체군은 줄어들지 않았을까?라 묻는다.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보다 키가 작은 대신 몸은 단단한 근육질이어서 기초대사율과 활동대사량(실제 몸을 움직일 때 드는 에너지)이 더 높았다.

 

기초대사량과 활동대사량이 낮으면 생존에 유리하다. 현생인류는 혹독한 기후에서 살아남았다. 현생인류는 약 4만 5천년전부터 동물 뼈로 만든 바늘을 사용했다. 현생인류가 더 효율적인 화덕과 은신처를 보유했다는 증거도 발견되었다. 동굴곰은 몸집이 가장 큰 대형 포식자였다.(동굴곰을 Ursus Spelaeus라 한다. 그들의 화석이 주로 동굴에서 발견되어서 동굴곰이라 한다.)

 

현생 사자와 달리 갈기가 없는 동굴사자는 네안데르탈인과 직접적인 경쟁관계를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돼지 이야기와 비교하게 하는 부분이다. 포식자 길드의 모든 중대형 동물은 네안데르탈인 및 현생인류와 먹이를 두고 경쟁했을 것이다. 매복사냥꾼, 추적사냥꾼 개념은 흥미롭다. 네안데르탈인은 매복사냥꾼이었다.

 

해부학적으로 속도전이나 장거리달리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투척용 무기가 아닌 손에 들고 공격하는 무기를 썼기 때문이다. 네안데르탈인은은 몸무게가 어중간했다. 현생인류는 집단으로 행동하는 동시에 원거리 투척 무기를 소유해 대형포식자들 위에 군림했을 것이다. 완전히 초식성인 동굴곰은 현생인류와 먹이경쟁은 하지 않았지만 1차적으로는 식물, 2차적으로는 서식지인 동굴 등 다른 자원을 놓고 경쟁했다.

 

늑대의 주요 경쟁자인 코요테는 늑대의 공격으로 고통받았지만 늑대가 남긴 사체 덕분에 부분적으로는 불이익이 상쇄되었다. 현생인류가 매머드처럼 큰 짐승을 사냥하는 방법을 익혔을뿐 아니라 사체를 관리하는 능력까지 갖춤에 따라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다른 토종 포식자들은 남은 사체를 청소하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은 체온유지능력이 부족했고 대사율이 높았으며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활동을 했고 손에 들고 싸우는 무기를 사용했다. 자신들의 사냥방식에 적합한 숲 서식지가 소실되면서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수많은 매머드를 죽이고 이용했을뿐더러 사체를 관리하는 능력까지 보유했던 현생인류는 이어 늑대를 표적으로 삼기 시작했다. 늑대는 네안데르탈인이 거의 손대지 않았던 종이다.

 

현생인류는 기후가 요동치던 유라시아를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은 유라시아에 있으면서 기후 변화를 고스란히 겪어냈다. 현생인류는 유라시아에 도착해 크게 번성하여 빠른 시일에 네안데르탈인을 추월했다. 네안데르탈인의 사냥 방식에 적합한 임야지대가 줄어드는 바람에 네안데르탈인 인구는 이미 줄어드는 중이었고 유전적 다양성도 낮아졌다.

 

약 40만년전 이후 그들은 소수만 살아남았거나 거의 남지 않았다. 현생인류를 특별히 강력한 최상위 포식자로 만든 것은 또 다른 최상위 포식자와의 동맹이었다. 다른 어떤 포식자도 이 정도 수준으로 동맹한 적은 없었다. 흥미롭게도 인간과 개는 서로 필요했다. 개들은 인간이 나눠주는 음식 덕분에 식량 부족에 덜 시달렸고 다른 육식동물의 공격과 경쟁으로부터 보호받았다. 무리 지어 사는 동물은 가축화의 훌륭한 후보다.

 

늑대는 서열에 따른 질서가 무리를 지배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들은 무리 지어 사는 방법을 잘 알고 있으며 함께 사는 것에 잘 적응되어 있다. 늑대는 조직적으로 사냥하고 무리 구성원 간에 우열이 분명하며 새끼를 함께 돌본다. 늑대가 인간을 무리의 우두머리로 받아들이면 종 간 서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네안데르탈인은 왜 늑대를 가축화하지 않았을까? 눈의 흰자위(공막)를 이야기하는 저자에 따르면 가축화된 개는 시선을 통해 의사소통하는 늑대의 유전적 능력을 그대로 이어받았을뿐 아니라 인간을 응시하는 시간이 평균적으로 늑대보다 두 배나 더 길다는 말을 한다.

 

저자는 흰색 공막이 인간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확산된 이유는 이 형질이 인간 사이에서뿐 아니라 함께 생활하고 사냥하는 늑대 개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저자는 기후 변화는 네안데르탈인 멸종의 1차 원인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말한다.

 

인간이 동물을 처음으로 가축화한 것은 인간 진화 과정에서 커다란 도약이었다. 기후변화와 새로운 능력을 갖춘 현생인류의 출현이 시너지 효과를 내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으로 몰아갔다.(개가 인간에게 길들여진 시점은 1만 8천년전보다 훨씬 앞선 3만 6천년전이다. 이 시기는 포식자 길드 내 경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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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신을 부르지 마옵소서 - 사직상소, 권력을 향한 조선 선비들의 거침없는 직언직설
김준태 지음 / 눌민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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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남명 조식의 단성 현감 사직소가 계기가 되었다. 김준태의 ‘다시는 신을 부르지 마옵소서’를 읽는다. 책의 첫 순서는 바로 남명의 그 소(疏)다. 남명은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과거 시험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현실 정치에 뜻이 없지는 않았으나 성리학의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혼탁하다고 생각했다. 명종대는 외척의 전횡이 극심하던 때다.

 

출처(出處)란 말이 있다. 전자는 상황이 좋아 공직 생활로 나아가 활동하는 경우이고 후자는 상황이 나빠 자연으로 돌아와 은둔하는 상황이다.(‘시의 아포리아를 넘어서 ’262 페이지) 중요한 점은 남명이 대비(문정왕후)를 과부라 한 것, 임금(명종)을 고아라 한 것이 아니라 출처간에서 처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저자는 남명의 상소에 한 가지 단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지나치게 날을 세워 명종으로 하여금 반성게 하기는커녕 반감을 갖게 했다는 점이다. 순조의 장인이자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문을 연 김조순이 외척인 자신이 정치 일선에 나서면 공론이 오염되고 정치가 타락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제수(除授)된 군부의 핵심 요직을 거절했다.

 

여헌 장현광은 공조판서 사직상소를 했다. 그는 퇴계학파로 분류되지만 이이의 영향도 받았다. 그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여든 셋의 노구를 이끌고 선비들을 모아 적과 맞서 싸우자는 통문을 각 지방에 돌렸다. 하지만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하자 절망에 빠져 산속으로 들어가 끝내 나오지 않고 생을 마쳤다.

 

대동법 시행을 청원한 김육도 상소했다. 우의정 사직상소다. 대동법 전국 실시 주장에 김집이 반대하자 우의정을 사직하겠다며 배수의 진을 친 것이다. 대동법은 나라에 바치는 공물을 특산물이 아닌 쌀로 바치게 하고 가구가 아닌 토지면적을 기준으로 하는(소득수준에 따라 세액을 결정하는) 제도였다. 김육이 좌의정, 우의정 등을 거치며 올린 상소는 모두 십여 차례로 전부 대동법과 관련된 상소였다.

 

구언(求言)이란 말이 있다. 정치의 잘잘못에 관해 널리 의견을 묻고 청책에 반영하는 행위다. 임금이 구언을 지시하면 어떤 말을 해도 가했다. 임금의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해도 되고 급진적이고 과격한 주장을 해도 된다. 중종반정으로 임금이 된 중종이 실시한 구언에서 박상과 김정은 장경왕후가 승하하자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자고 상소했다.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중종이 그 말을 수용한다면 단경왕후를 폐위시킨 공신들의 죄를 물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중종이 두 사람에게 죄를 묻자 조광조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박상, 김정을 용서하자는 여론이 있었음에도 대간이 죄를 묻자 조광조가 이런 사람들과 같이 일할 수 없다며 자신의 사직서를 수리하고 대간들을 모두 파직하라고 했다. 정언 사직상소다.

 

미수 허목은 장령(掌令) 사직상소를 했다. 허목은 빈번하게 사직상소를 했다. 허목은 자서에서 특별히 임금(효종)께서 따라주었다는 말을 했다. 1659년 장령 사직상소다. 여기에서 허목은 네 가지를 거론했다. 1) 둔전 폐지, 2) 예 강조, 3) 법질서 확립 주장, 4) 시사(市肆) 강조 등이다.

 

공한지(空閑地)를 개간해 군량을 자급자족한다는 본래의 취지를 상실한 둔전에 대해 태조 때부터 내려온 제도이므로 함부로 폐지할 수 없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허목은 둔전 폐지를 밀어붙였다. 허목은 국민의 복리가 시사(市肆; 시장)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허목은 장사꾼들이 시세를 틈타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독점하여 팔지 않으며, 없는 말을 만들어 법을 어지럽히고 사욕만 채운 것에 대해 국가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는 관에 의한 시장 통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과 재화가 자유롭게 유통될 수 있도록 나라에서 건전한 시스템을 구축하라는 것이다. 이항복의 우의정 사직상소를 보자. 아이러니한 것은 임진왜란 당시 강화(講和)를 주장한 사람들은 전쟁 중 지휘부를 구성했던 대신들이고 한 걸음 물러섰던 사람들, 임금을 따라 후방의 안전지대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일본에 복수하지 않고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재상으로서 전시 군수 보급을 책임졌던 서애 류성룡, 도체찰사가 되어 직접 전선을 누비며 백성과 병사들을 독려했던 이원익, 병조판서로서 군부를 총괄한 이항복 등이 강화를 찬성했다. 강화반대론자들은 강화찬성론자들을 매국노로 거세게 몰아붙였다. 이는 전쟁이 끝나려 하자 그간의 잘못을 덮으려는 의도를 가졌던 결과로 보인다. 이항복의 우의정 사직상소는 이 때 나왔다.

 

에둘러 표현되어 있었지만 전쟁의 참화를 직접 겪은 적 없이 극단의 현실 속에서 백성과 나라를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한가로운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항복, 이원익 등은 왜군과의 강화에 찬성한다는 이유로 홍문관으로부터 탄핵 받았다. 이항복은 자신의 주장을 끝내 거두지 않았다. 이항복은 나라를 지키고 외적을 방어하는 고금(古今)의 도리는 전(戰), 수(守), 화(和) 셋인데 지금은 화가 최선이라고 했다.

 

이항복은 자신이 우물쭈물하여 구차하게 용서를 기다린다는 비난을 받고 있으니 이는 자신에게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기에 사직하고자 하니 재가를 바란다고 했다. 저자는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에 이르는 동안 다섯 번 넘게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전쟁 수행에 헌신한 이항복에게 척화는 훨씬 쉬운 선택지였을 것으로 누가 보아도 충분한 자격을 가진 이항복이 척화를 주장했다면 대의명분의 수호자로 추앙받았겠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포구에 박세채로부터 유래한 현석동이란 동이 있다. 현석(玄石)은 남계(南溪)와 함께 박세채의 호다. 그는 숙종의 묘정(廟庭)과 문묘에 모두 배향된 인물이다. 그는 내수사(內需司) 폐지도 건의했다. 내수사란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임금은 이곳을 통해 신하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통치자금을 사용했다. 박세채는 내수사 혁파를 통해 왕의 공공성을 더욱 강화하고자 했다.

 

박세채는 서열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며 임기를 늘려 전문성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이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만든 임시기구인 비변사를 없애고 왕 - 재상 - 6조로 이어지는 의정부서사제를 재건하여 현명한 사대부가 정치를 담당하는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자고 주장했다.

 

정시한은 숙종의 환국정치를 목숨 걸고 비판한 신하다. 숙종은 세 번의 환국을 단행했다. 경신 환국(남인 몰락), 기사 환국(서인 제거), 갑술 환국(남인 숙청)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일당이 조정을 독점하도록 정국을 운영했다. 이 결과 각 당파가 상대당의 전멸을 의도하게 되었고 보복과 보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극단적인 양상을 보였다.

 

정시한은 옛말에 편벽되이 한쪽 말만 들으면 간악한 일이 생기고 한쪽에만 맡기면 혼란하게 된다고 하였다며 전하께서는 사람을 좋아할 때는 무릎 위에 안아줄 것처럼 하다가 물리칠 때는 깊은 못에 밀어넣는 것처럼 하여 마음이 일정하지 못하며 주고 빼앗음에 번복이 많다고 썼다.

 

이조판서 사직상소를 쓴 강희맹은 사숙재(私淑齋)란 호를 썼다. 세종의 조카이고 세조와는 이종사촌간이다. 그는 시서화 3절로 알려진 형 강희안과 함께 문화예술 분야에 큰 자취를 남겼다.

 

정약용은 정조에게 정언, 지평 사직상소를 올렸다. 그는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에 차례로 제수되자마자 바로 사직상소를 올렸다. 자신은 성균관 시절부터 규장각 생활에 이르기까지 정조의 가르침과 격려 속에서 성장해왔고 지금도 스승이나 다름 없는 정조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애쓰고 있으므로 강하게 간언하고 때로는 임금을 신랄하게 비판해야 하는 간관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가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에 대해 다른 신하들의 견제가 심했고 이것이 정조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점도 작용했다. 사직서가 수리되기 전까지는 해당 업무를 수행해야 했기에 정약용은 과거제도 개선 방향을 담아 상소했다. 정약용은 우리나라에는 과거만 있고 천거(薦擧)가 없음을 지적했다.

 

정약용이 천거 병행을 주장한 것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기에 사장될 수 있는 인재를 천거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에서다. 과거 시험은 사람들에게 시험합격을 위한 공부에만 매달리게 하기에 인재를 천거하는 제도를 도입해 선비들이 학문 도야와 자기 수양에 힘쓰도록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이기도 하다.

 

정약용은 당일에 합격자를 발표하는 구조상 답안지 전체에 대한 세심한 채점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선착순 300명의 답안지만 평가대상으로 삼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때문에 답안지 제출하기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사람인 선접꾼, 답안지 내용을 구상하는 사람인 거벽(去闢), 답안을 작성하는 사람인 사수(寫手) 등의 용어가 나온 것이다.

 

정약용은 응시인원을 대폭 줄여 과거 시험장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여 편법과 부정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약용의 주장은 인재선발제도의 다양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데 맞춰져 있다.

 

‘다시는 신을 부르지 마옵소서‘는 큰 자료거리다. 남명 조식, 미수 허목, 잠곡 김육, 백사 이항복(과 오리 이원익), 현석 정시한, 다산 정약용 등에 대해 많이 알았다. 특히 현석 정시한을 처음 알아 큰 도움을 얻었다. 신을 부르지 말라는 말은 물러난다는 의미이지만 정책을 채택하라는 의미의 배수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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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역사란 무엇인가
마르틴 뤼케 외 지음, 정용숙 옮김 / 푸른역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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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미국에서 발원한 공공역사는 독일에서는 응용역사라 불리기도 한다. 응용역사란 개념은 좀 더 직관적이고 자명하다. 로버트 켈리에 의해 만들어진 공공역사란 개념은 공공의 역사 표현을 의미하기도 하고 다양한 미디어와 기관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제시되는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 하위분과를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개념 이전에 현상이 있었다.

 

그간 학교 밖에서 유통되던 ‘박물관이나 티브이 다큐멘터리 등이 매개하는 역사’는 학문적 역사 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공공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를 진지하면서도 재미있게 매개하는 방법을 찾으려 한다. 공공역사를 논할 때 알아두면 좋을 개념항은 학문과 대중의 요구 사이란 말이다. 이는 대학과 학교 밖에서 역사를 매개하는 직업 분야를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980년대 독일 역사 작업장에는 네가 서 있는 곳을 파라(Grabe, wo du stehst)란 모토가 유행했다. 지역사와 일상사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말이다. 브레멘 대학교의 연극 프로젝트는 ’문서에서 무대로‘라는 구호로 유명하다. 책은 독일에서 공공역사는 대학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학 밖에서 더 많은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독일에서 공공역사는 역사의 재구성에 기여할뿐 아니라 역사문화의 일부가 된다.

 

공공역사의 행위자는 포괄적인 지시대상을 갖는다. 공공역사는 문화연구와 친연성(親緣性)을 갖는다. 공공역사가들은 역사학 지식을 계속 따라잡아야 할 뿐 아니라 직접 연구를 수행할 필요도 있다. 공공역사가는 텍스트, 이미지, 영상, 소리 자료, 물체를 사료로 다루는 역사 연구 방법을 익혀야 한다. 오락과 정보는 공공역사에서 함께 가는, 배타적이지 않은 항목이다. 공공역사는 주제를 제시하고 새로운 사료를 발굴하며 방법론적 혁신을 모색함으로써 역사학 발전에 나름으로 기여한다.

 

기억은 인간의 생애를 넘어설 수 있다. 기억의 담지자가 누구인가가 중요하다. 공공역사에서의 역사 교육은 내러티브, 역사적 상상, 다원적 관점이라는 세 가지 원리를 갖는다. 역사학을 사회과학, 문화연구, 기타 인문학 등과 구별해주는 것은 구체적 서술 형태다. 역사 서사는 남겨진 과거의 조각들을 이치에 맞게 정렬하고 어떤 사실 관계는 포함하고 어떤 것은 생략하는 것이다.

 

역사 서사는 사료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고 우리 문화에서 수용할 수 있는 서술 형태를 따라야 한다. 공공역사에서 역사적 상상을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공공역사를 만드는 일이 대중의 역사적 상상과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공역사에 제기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역사영화나 전시 설명 텍스트가 단호한 역사적 배경지식을 원하는 대중의 욕구에 부응하지 않고 열린 텍스트로 보일 때 과연 이것이 역사에 관심 있는 공중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다.

 

공공역사가는 경험적 타당성(사료의 진실성)과 사료 인용의 질적 수준에 있어서 학계의 연구 현황을 공공역사 생산에 반영할 수 있도록 튼튼한 학문적 지식을 갖춰야 한다. 공공역사가는 여러 관점 가운데 하나의 관점을 고른 이유를 설명해야 하며, 그로 인해 서사 능력이 얼마나 제한되는지도 설명해야 한다. 사회적 차원에는 두 가지가 있다. 다양성과 포용이다. 인종, 계급, 젠더가 고려 대상이다.

 

사회 구조의 거시 차원과 중간 차원, 사회적으로 구성된 정체성의 미시 차원, 상징적 표현 차원은 인종, 계급, 젠더가 작동하는 권력의 장소이며 다양성과 불평등이 발생하고 삶의 기회가 분배되는 곳으로서 서로 맞물려 상호의존적으로 작동한다.(76, 77 페이지) 계급이 작동하는 자본주의와 젠더가 작동하는 가부장제가 서로 얽히면서 나타나는 구조적 권력관계, 그리고 이와 같은 상호 관계가 노동자, 주부, 매춘부, 남창 같은 자본주의적 성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 점을 고려할 수 있다.

 

공공역사 방법론에 물질문화, 이미지 역사, 소리 역사 등이 있다. 유물은 스스로 말하지 않으며 그 역사와 의미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물질문화 연구의 출발점이다. 물성과 형태를 묘사하고 만들어진 목적과 날짜, 장소를 명명하고 유물 자체의 관찰이나 부수적 정보를 이용해 용도와 출처를 확정한다. 유물이 발견된 곳, 보존된 맥락, 누가 언제 소유했는지 등을 알아야 한다.

 

공공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일상적 삶의 물건들이 어떻게 역사 연구의 사료가 되는가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역사 매개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이다. 야생성 개념에 의하면 이 물건들이 표현하는 것은 단수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관찰과 분석법에 따라 달라지는 복수로서의 역사다. 이는 물건을 역사 매개에 사용할 때 주의할 점이다.(96 페이지)

 

박물관 전시 유물들 중 흥미롭게 분류되는 것들이 있다. 1) 사악한 유물, 2) 까다로운 유물, 3) 제멋대로인 유물 등이다. 사악한 유물이란 잘못된 숭배 대상이 될 수 있는 나치 시대의 유물 등이다. 까다로운 유물이란 진술 능력이 너무 명백하고 단호해 혹여 내포되어 있는 다른 의미를 모두 압도해 버리는 유물이다. 제멋대로인 유물이란 하나의 맥락에서만 전시하면 안 되는 물건이다.

 

유물은 의미를 나르고 역사 연구의 사료가 되는 동시에 역사를 매개하는 미디어가 된다. 리빙 히스토리는 원래의 무대 또는 재구성된 무대에서 원본에 충실한 의상을 입은 배우들과 제조 기술 및 일상 기술의 실증을 통해 역사를 일상적으로 살아 있는 듯 제시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아카데미 역사 연구와 대중적, 통속적 역사를 가르는 전통적인 경계는 흐려졌다.

 

독일 대학에서 공공역사 과정이 호황을 누리는 것이 그 증거다. 공공역사가들이 미디어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 즉 경험적 타당성을 갖춘 역사적 서술을 통해 미학적으로 만족스럽고 공중을 매혹하는 역사상을 만들어내는 일은 진본적 허구 개념을 통해 잘 설명할 수 있다. 역사 전문서는 역사 학술서와 달리 드러내놓고 학계의 공중만을 지향하지는 않는 텍스트 미디어다.

 

시청각 미디어도 논할 수 있다. 역사학자이며 박물관 전문가인 안케 데 헤젠은 박물관의 시작을 16세기로 잡는다. 이 무렵에 훨씬 일찍부터 발달해온 수집의 성과를 보여 주려는 생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흥미로워 보이는 것이라면 모두 모아들였고 차츰 차별화되어 갔다. 박물관이 모든 집단의 사람들에게 더 많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지난 몇 년간 참여 박물관 형태에 대한 요구의 증가로 이어졌다. 여기서 관람자는 구경꾼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행동해야 한다.(190 페이지)

 

참여는 관람자가 전시물의 기여를 논평하는 것에서부터 관람자를 통한 전시 구성에 이르기까지 이를 수 있다. 저자는 큐레이터와 소장품 관리자가 박물관의 보물을 감시하고 이를 전시하는 유일한 박물관 전시자가 아니게 된 지 오래라고 말한다. 오늘날 박물관은 공공 공간에서 역사를 제시하는 핵심적 장소다. 지난 수백년 박물관은 크게 변화해 왔다. 엘리트를 위한 박물관 신전이었다가 교육적으로 준비된 학습 장소가 되었다가 지식의 장이 되었다.

 

독일에서 기념관의 역사는 1945년 이후 나치 과거의 처리/ 정리와 깊이 얽혀 있다. 기념관은 나치 범죄와 정치, 사회적으로 대결한 결과다. 1945년 후 수용소 생존자들이 요구하여 해당 장소에 기념관, 기념비, 기념상이 먼저 세워졌다. 기념관 설립 및 일련의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만은 않았다. 공적 자금이 조성되면서 역사가들과 기념관 교육 전문가들이 고용되고 학술 자문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새 인력의 유입은 기념관 사업을 새롭게 변화시켰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 집단의 영향력은 축소되었다. 피해자들은 기념관이 자신들의 장소라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감정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고 요구했다. 기념관에 새로 들어온 전문가 직원들의 생각은 달랐고 이들은 학술적으로 탄탄한 역사 표현의 의무에 충실하기를 원했으며 지금도 그렇다. 증인의 기억은 중요하지만 유일한 사료는 아니다.

 

전시는 다원적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 감정에 압도되지 않으면서 논쟁을 자극해야 한다.(207 페이지) 저자들은 박물관은 전지(全知)해 보이기보다는 주제마다 그 의미를 사용자와 함께 합의하는 배우는 기관이란 말을 한다.(217 페이지) 신박물관학의 핵심 요소는 모든 사람의 접근, 참여, 표현을 요구하는 포용이었다.

 

전시회는 교육받지 못한 집단, 어린이, 이주 배경을 가진 자들, 난민, 장애인들에게 열려 있어야 하며 흥미를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박물관 연구 방법론은 다양하지만 핵심은 자료의 탐구다. 전시 자료는 주로 물질적인 것이지만 가상의 물건이거나 냄새 또는 소리일 수 있다. 전시를 혼자 힘으로 만드는 경우는 드물다. 보통 팀 작업으로 한다. 이 일에는 큐레이터, 박물관 교육 또는 기념관 교육 전문가, 홍보전문가, 디자이너, 그래픽 예술가, 유물 복원가의 참여가 필요하다.(232 페이지)

 

전시는 실험적 행위임을 명심해야 한다. 전시된 자료는 전시 팀의 의도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에 의해 완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232 페이지) 보안 문제 외에도 장소를 선택할 때는 모든 장소에는 메시지가 있고 전시 효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중립적이고 장식과 창문이 없는, 그래서 그 자체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고 배경만 되어 주는 이상적인 화이트 큐브는 현실에는 없다.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중립 공간은 환상일뿐이다. 흰벽마저도 메시지가 있어 전시된 역사의 인지에 영향을 미치는 분위기를 전달하기 때문이다.(234 페이지) 전시에서는 전시물 외에도 해설 문구에 유념해야 한다. 복잡한 내용이라도 가능한 한 간결하고 짧게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이 박물관에 오는 것은 전시물을 보기 위해서이지 텍스트를 읽기 위해서가 아니다. 문구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단순 평범한 것이어서는 안 되고 전시물의 특별함을 전시 주제와의 관계 속에서 알려줘야 한다.(236 페이지)

 

이론과 실제의 경계는 대단히 유동적이다. 공공역사의 논점은 역사 제시에서 내용의 재미와 진지함을 동시에 얼마나 달성할 수 있는가이다. 모든 역사적 사건이 가벼운 오락에 적합하지는 않다. 특히 20세기의 전쟁과 폭력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더라도 그러한 역사 현상을 공중 일반에 어떻게 확산되도록 할 수 있는가? 공공역사가들은 역사학과 교수법의 지침뿐 아니라 윤리적 문제도 상대해야 한다.

 

이는 전쟁 및 폭력의 역사와 관련된 문제다. 표현의 한계를 넘어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을 세심하게 다루는 문제와 관련된 사안이다.(276 페이지) 직업 분야를 보자. 미디어는 대체로 역사에 직접적으로 초점을 맞추지 않지만 역사를 다루기는 한다. 공공역사가는 출판사에 들어가 책으로 가는 긴 여정 같은 기획의 편집자가 될 수도 있다. 저자를 물색하고 집필 주제를 제안할 수도 있고 저자가 출판을 요청해 올 수도 있다.

 

편집자의 업무 범위는 출판사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관광 경제는 성장하는 서비스 산업이다. 관광사업은 19세기 중반 오락과 휴양 여행의 형태로 시작되었고 1950년대 이후 대중교통의 확대와 함께 지역 경제의 주요 요소가 되었다. 역사 붐은 역사 관광의 확산을 가져왔다. 이는 공공역사 전문가들의 성장하는 취업 시장이지만 이를 위한 구체적인 직업 훈련은 아직 없다.(302 페이지)

 

이 분야에 취직해 서비스 상품을 개발하려 할 경우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 1) 거리, 도시, 지역의 역사가 이야기되는 형태는 무엇인가? 2) 공간에서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의 특별함은 무엇인가? 3) 이러한 매개에 활용할 수 있는 보조 수단은 무엇인가? 4) 역사적 장소의 관광상품화가 이에 다시금 미치는 효과는 무엇인가? 역사 관광 가이드는 대부분 주제나 주제나 지리 중심의 역사 가이드 형태로 이루어진다.(303 페이지)

 

저자들은 사람들은 특정 장소를 방문하여 역사를 소비한다고 말한다. 공공역사가는 공중을 직접 만나고 역사를 흥미로우면서도 진지하게 매개하는 방법을 실험해볼 수 있다.(303 페이지) 책 전편의 핵심이라 할 요인들 가운데 하나가 흥미와 진지함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다. 깊이 명심해야 할 바다. 역사 붐이 공공역사 전문가들에게 시장이 되는 역사 관광의 확산을 가져왔지만 이를 위한 구체적인 직업 훈련은 아직 없다는 말이 인상적으로 들린다.

 

구체적 의미의 공적인 훈련이 제시되지 않았지만 아니 그렇기에 개인이 스스로 알아서 할 필요가 있다. 다독(多讀)이 모든 일을 푸는 열쇠는 아니지만 충분히 유용할 수 있고 창의의 시발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역사 관광 가이드에 관심이 간다. 이 일을 하는 사람이 큐레이터, 아키비스트, 다큐멘터리스트, 역사 크리에이터 등과 다른 부분을 몇 가지 제시할 만하다.

 

추상적으로 말해 자유로운 존재라는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흥미를 위해 뿌리인 역사에서 비롯된 이야기의 궤도 또는 줄기에서 적당히 벗어나는 분기(分岐)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기획으로 빛을 본 ’공공역사란 무엇인가‘(2020년 12월 출간)는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다른 책의 출판을 기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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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을 뒤엎는 돈의 심리학 - 돈을 보는 관점이 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
저우신위에 지음, 박진희 옮김 / 미디어숲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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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일상의 좋은 일과는 20퍼센트만 관계하고 비극과는 80퍼센트 관계한다고 한다. 좋은 일은 대부분 돈과 무관하게 일어나지만 슬픈 일은 대부분 돈 때문에 일어난다는 의미다. 돈은 예술과도 밀접하다. 후원 제도가 그것이다. ’상식을 뒤엎는 돈의 심리학‘은 돈을 보는 관점이 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부제를 가진 책이다.

 

저자인 저우신위에는 심리학자가 아니라 경영학자다. 그에 의하면 돈은 교환의 매개 이상이다. 거기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저자는 그 사람을 알려면 그의 돈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라는 경제학자 머턴 밀러의 말을 상기시킨다.

 

책은 1장 돈에도 감정이 있다; 돈과 인간 심리, 2장 돈을 알면 세상 돌아가는 원리가 보인다; 돈과 사회생활, 3장 합리적 소비일까, 함정에 빠진 걸까; 돈과 소비 행위, 4장 모든 일은 돈과 관련 있다.; 돈과 행복 등으로 구성되었다. 나와 돈 사이의 심리적 거리, 돈은 죽음의 공포도 물리친다, 돈이 아닌 시간을 기부하는 즐거움, 왜 바닥의 동전은 줍지 않고 할인쿠폰은 챙길까?

 

비싼 것이 좋다는 말의 진실, 이익보다 손실을 더 크게 받아들이는 이유, 시간은 금이 아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물건보다는 경험을 사라, 착시 현상이 만든 부자들의 행복, 개천에서 용 나오던 시절은 이제 끝이 난 걸까? 부자와 빈자 중 누가 더 인색할까, 돈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기적이 된다 등의 챕터가 흥미를 끈다. 소비를 제어하지 못하면 자유를 잃는다,

 

소비가 주는 즐거움은 잠깐이다 등의 말을 기본으로 하고 넘어가야겠다. 하우스 머니 효과라는 것이 있다. 도박에서 얻은 돈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남의 돈을 얻은 것이라고 느껴 그 돈을 다시 도박에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2014년 메릴랜드 로욜라 대학교의 트럼프 연구진이 이와 같은 효과를 발견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돈으로 결정을 내릴 때는 더욱 모험적이 되고 자신의 돈으로 결정을 내릴 때는 더 보수적이 되는 것을 말한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빈부격차가 큰 사회일수록 신분을 드러내는 상품에 대한 관심도가 올라간다. 당연히 이는 가난한 사람들의 부담을 가중시킨다. 저자는 사람은 돈 때문에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으로 인해 변한다고 말한다. 불황일수록 립스틱 판매가 늘어나는 현상을 립스틱 경제 효과라고 한다. 이는 여성에게 아름다움이란 상대를 유혹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성공을 돕는 도구로 인식된다는 의미다.

 

사람들에게는 심리계좌가 있다. 이는 돈을 분류하는 마음 속 서랍이다. 돈을 얻게 된 계기가 돈의 심리계좌를 정한다. 돈의 용도도 심리계좌를 정한다. 돈을 저장하는 방식도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사치품에 실용성이 가미된 최강의 유혹이란 말이 있다. 오래전부터 동양에는 사치를 멀리하고 근검절약을 추구하는 문화가 존재했다.

 

소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을 심리적 리스크라고 한다. 저자는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면 불행해진다고 말한다. 연구에 따르면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면 가족이나 친구 등과 보내는 시간을 줄인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것에도 인색하게 한다.

 

저자는 경험은 시간을 꽃으로 만들고, 경험은 비교가 되지 않고, 인생은 무엇을 했는지로 정의된다고 말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가난한 집 아이와 부유한 집 아이의 언어 능력과 기억력에는 차이가 난다. 부(富)는 뇌구조도 바꾼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사회적 관계에 의지해 돈을 벌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더 느낀다고 한다.

 

부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능력에 따라 수익이 달라지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과 행복을 중요시한다. 관계, 심리학, 상식, 그리고 상식 초월의 기제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 ’상식을 뒤엎는 돈의 심리학‘이다. 일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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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고고학
김선 지음 / 홍림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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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도 하고 보고서도 쓰고 논문도 발표하는 고고학자의 책이다. 석사 논문은 신석기를 썼고 사찰이나 폐사지를 중심으로 발굴을 하는 저자다. 본문에 나오는 원주 부론면의 법천사지 이야기를 접하고 페이스북에 내가 월 1회 다녀오는 원주 문막의 한 기도원 이야기를 했더니 “남한강 따라 폐사지 답사 코스가 참 좋습니다~”란 댓글을 달아주신 분이다.

 

낭만 고고학이란 제목과 달리 낭만 고고학은 없다는 챕터가 있는 책이다. ‘연천 전곡리 유원지를 아시나요?‘란 챕터가 포함(첫 번째 챕터)된 책이어서 기대를 했으나 전문 고고학자가 아니어도 알 수 있는 내용이란 점에 적당량의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챕터들은 전문적인 내용을 꽤 담고 있어서 좋다.

 

전문적인 내용이란 “땅을 파는 고고학자에게 도시의 땅은 오염된 현장이다. 어느 지층이든 시대를 품고 있지만 한 나라의 수도는 그것에 더해 더 많은 시간과 역사가 쌓이고 덮이면서 오염된 채로 발굴자에게 노출된다.”(33 페이지) 같은 구절이다. 저자는 자신을 답사로 다져진 인생(70 페이지)이라고 설명한다.

 

저자에 의하면 고고학 즉 발굴이란 나라에서 자격을 부여한 사람들이 허가된 장소에서 진행하는 조사다.(92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무덤 주변에 막걸리를 뿌리는 것은 땅을 파기 전에 지신에게 “우리가 땅을 열겠습니다.”라고 인사드리는 것과 같다. 저자가 답사를 다닐 때 주로 주의 깊게 보는 것 중 하나는 배수 체계와 우물이다.

 

저자는 예술성이 뛰어난 자료만이 아니라 깨진 토기 조각이나 자기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고고학이라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고고학으로 뜬 인디아나 존스는 문화재계 사람들에게는 보물 사냥꾼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둥근 크라운에 챙이 아래로 처진 토피(topee) 모자는 유럽 식민주의의 물리적 또는 문화적 첨병이었던 군대나 탐험가 등이 아프리카나 동남아 등지에서 활동할 때 썼던 모자다.

 

2018년 트럼프 부인이 케냐, 이집트 등의 아프리카를 방문할 때 이 모자를 썼다. 당시 영국 가디언지가 이를 비판하는 글을 실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저자는 AI 세상이 와도 고고학은 살아남을 것이라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고고학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50대 50을 차지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하는 현장에 있었다. 당시 엄청난 규모의 유물을 포장, 해포(포장 풀기), 이동하는 일련의 과정을 본 덕에 어느 박물관을 가든 그곳의 큰 그림을 보는 안목 또는 사물을 보는 자신만의 시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자신의 신체 사이클은 도시 및 발굴 현장에 맞게 시스템화된 지 오래다.(발굴 현장은 화장실이 없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고고학은 극한 직업이라 말한다. 저자는 공리(공유와 이해)라는 소규모 공부 모임에도 참여한다. 미술사, 건축사, 조경학, 과학사 사진학을 전공한 분들과 함께 하는 모임이다.

 

저자는 고고학자들이 고단한 가운데서도 일련의 작업을 이어가는 이유는 스트레스가 주는 긴장을 즐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사찰 고고학, 건물지 고고학 개설서는 아무래도 자신이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책을 통해 저자가 열심히 연구하고 발굴하고 공부하고 글 쓰는 분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책을 통해 배운 것이 많다. 저자가 관계하는 고고학에 대해 쓴 것처럼 해설사로서 그런 글을 써야 한다면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하게 하여준 책이기도 하다. 다른 고고학 책들을 읽어야겠다. 아니 저자의 다음 책이 벌써 기다려진다. 일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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