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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나에게도 장켈레비치는 ‘베르그송의 철학‘(김형효 지음)과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이해하기‘(황수영 지음) 등을 통해 단편적으로 접한 낯선 철학자이다. 장켈레비치는 “새는 날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날려고 하고, 황소는 뿔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받고자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리라.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황소는 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뿔을 갖게 되었고, 새는 먼저 날기를 원하였기에 날개를 갖게 되었고 그래서 날았다.”는 말을 했다.

 

최근 그의 ’죽음에 대하여‘란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에게 선택지가 있”는 바 짧지만 사랑을 주고받는 진정한 삶이거나 사랑 없는 무한정한 존재 즉 삶이라고 할 수 없는 영속적인 죽음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당연히 나는 사랑을 주고 받는 진정한 짧은 삶을 택할 것이다. 프랑스 철학계의 독창적 아웃사이더라 불리는 그의 철학은 가볍고 상쾌하다. 상상력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그를 따라 하늘을 나는 것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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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궁궐을 균형과 비례의 원칙에 따라 건축된 공간으로 생각한다. 이런 전제 하에 최근 나는 궁궐의 균형과 비례를 중용(中庸)으로 풀이한 글을 썼다. 그런데 이는 내 지론을 저버리는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일반적으로 중용은 지나치거나 부족함이 없는 상태, 치우침이 없는 상태 등을 뜻한다. 이와 관련해 거의 유일하게 일반적 의미와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이 이한우 교수이다. 그는 ‘슬픈 공자’에서 중용을 철저하고 완전히 뿌리를 뽑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한우 교수에 의하면 공자는 공부를 목표에 못 미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 그리고 목표에 미쳤을 때는 그것을 잃으면 어떻게 하나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한 사람이다. “학여불급(學如不及) 유공실지(猶恐失之)”(’논어‘ ’태백泰伯‘편)의 차원이다. 이한우 교수는 중(中)하다는 것은 문제의 본질에 적중한다는 말로, 용(庸)하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끌고 가는 것으로 푼다.


’공자의 인생 강의‘에서 신정근 교수가 공자를,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무엇이든 해보려고 시도한 사람(지기불가이지자: 知其不可而爲之者)으로 설명한 것과 맥락이 통한다. 신정근 교수의 풀이는 공자가 일반적 의미의 중용과 거리가 먼 사람임을 알게 한다. 공자가 (일반적 의미의) 중용적인 사람이었다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무엇이든 해보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문제의식과 관련해 말하자면 명확하게 중용이란 말로 궁궐(경복궁)을 설명한 사람이 양택규 님이다.(’경복궁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참고) 문제는 나에게 있다. 저자의 권위에 의지하려는 마음 때문에 중도(中道)라는 말로 궁궐을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 의미의) 중용과 중도의 뉘앙스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다. 당당할 것,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물론 철저한 근거 제시에 입각한 당당함이어야 할 것이다. 철저(徹底)한 공자, 철저해야 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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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은 “죽은 건축 유형”(조재모 지음 ‘궁궐, 조선을 말하다’ 4 페이지)이다. 너무 앞서 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건축물들 중 대표적인 경복궁이 몇 번의 방문과 공부로 인해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간 단발적이나마 건축 관련 책들을 10여 권 읽었지만 문제의식 없이 읽었기에 공부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지금은 궁궐을 건축적 안목으로 보려 하고, 분석도 하고 종합도 하겠다는 마음으로 대하기에 예전에 생각하지 못한 생각들이 떠오른다.


경복궁의 왕의 침전(寢殿)인 강녕전(康寧殿)에 용마루가 없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에 대해 한 논자는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이란 단서를 단 뒤 용을 상징하는 왕이 잠자는 곳에 또 용을 둘 수 없어 그렇게 된 것이라는 말을 한다. 물론 경복궁의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과 창경궁의 전각인 통명전, 창덕궁의 침전인 대조전 주변의 집상전에도 용마루가 없다는 말을 하며 왕이 잠자는 곳에 또 용을 둘 수 없어 그렇게 되었다는 말의 오류를 지적하는 필자(김동욱 지음 ‘한국 건축 중국 건축 일본 건축’ 119, 120 페이지)도 있고, 용으로 비유되는 무소불위의 왕이 머무는 공간인 침전에 용마루를 두는 것은 용이 용을 누르는 형국이기에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았다는 말은 그야말로 속설일 뿐이라 지적하는 필자(이향우 지음 ‘궁궐로 떠나는 힐링 여행 경복궁’ 166, 167 페이지)도 있다.


이 분은 중국의 경우 왕의 권위와는 상관 없이 용마루 없는 무량각 지붕으로 지어진 일반 집들이 아주 흔하다는 말을 하며 차라리 음양오행의 상징적 개념으로 볼 때 자연의 기(氣)를 차단하는 용마루라는 무거운 인공 시설물을 설치하지 않고 곡와(曲瓦: 안장 기와)를 써서 무량각 지붕으로 처리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이치에 맞을 수도 있다고 덧붙인다.(같은 책 167, 168 페이지) 전자(前者)가 왕의 침전 외에 용마루가 없는 일반 건물도 있다는 말을 함으로써 무량각(無梁閣: 용마루 없는 건물) 관련 속설이 잘못된 것임을 일깨운 것이라면, 후자(後者) 역시 같은 차원의 말을 했으나 음양오행 차원의 이야기를 더한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후자의 두 번째 말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다른 곳은 왜 하중을 견디는 부담이 덜 가는 가벼운 건물인 무량각을 설치하지 않았는지, 하는 물음이다. 그리고 임금이 관료들과 정사를 토론하고 (성리)학자들로부터 경서(經書)와 역사서를 배운 편전(便殿)은 또 어떤가. 그곳에는 용마루가 있는데 임금 홀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관료들이나 학자들과 함께 하는 공간이기 때문인가? 용이 용을 누르는 것이든 무리한 하중을 가하는 것이든 타인들과 함께라면 견딜 만하다는 것인가?


단청의 녹색 안료(顔料)인 뇌록이 경상도 장기현 뇌성산에서만 나기에 다양성이 줄어들고 획일화된 것처럼, 안료가 비싸 소박하고 절제된 단청 채색이 된 것에서 보듯 물리적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건축과 교수인 조재모 교수는 역사 전공자들은 궁궐을 둘러싼 사건 및 인물에 관심을 두고 건축 전공자들은 건물의 형태에 초점을 맞추고 대중적인 저술을 쓰는 사람들은 문양과 상징을 이야기한다는 말을 한다.(같은 책 6 페이지)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자신의 갈증은 그 사이 어느 지점에 존재하는 듯 하나는 말을 한다. 이 말을 접하며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단청을 궁궐과 임금의 중용을 상징하는 차원으로 보고 자료를 찾다 지친 나는 생태적 지위라는 뜻의 니치(niche)란 말을 생각하게 된다. 벽감(壁龕)이란 의미도 있고 틈새 시장이란 의미도 있지만 생태적 지위란 말을 선호하는 것은 무릇 모든 글은 지위(地位)를 얻기 위한 투쟁이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물론 틈새시장도 유사한 차원의 말이지만 즉물적이어서 싫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지 걱정이 큰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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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 전 전철 안에서...

단청 문양 자체가 대칭이고, 경복궁 근정전과 사정전이 대칭 구조로 지어졌고, 사정전 좌우의 만춘전과 천추전이 대칭이라는 점과 궁궐을 균형과 비례의 원칙 즉 중용 원리에 따라 대칭으로 지은 이유가 치우치지 않는 바른 정치를 펼치려는 왕권을 상징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연결짓고, 음양오행의 원칙에 따라 다섯 색을 사용하는 단청이 바로 그렇게 중용의 원리를 따른 결과라는 점을 입증하는 자료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보니 피곤.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읽는 콜린 엘러드의 ‘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에 수록된 다음의 구절이 나를 위로한다.

˝우리는 오랜 세월 기나긴 여정을 마치고 옛 집으로 돌아오면 가장 여린 몸짓, 가장 어린 시절의 몸짓이 여전히 온전하게 문득 되살아 나는 것을 알고 몹시 놀란다. 한 마디로 우리가 태어난 집은 우리 내면에 주거와 연관된 다양한 기능들의 위계를 아로새겼다. 우리는 특정한 그 집에 거 주하는 데 따른 기능들의 설계도이며 다른 모든 집은 단지 기본 주제의 변주일 뿐이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에서 인용한 글이다.

이 글을 읽으니 안락한 집 생각이 피어난다. 눕고 싶지만 지금 여기는 전철 안. 광화문 인근. 지쳤지만(처음에는 키보드를 잘못 눌러 미쳤지만이라는 글자가 쓰였다. ㅎㅎ) 다른 분야의 책 좀 사려고 교보에 간다. 나, 짐승의 썩은 고기를 찾는 하이에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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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사랑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사회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르네 지라르의 분석이다. 그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욕망을 모방한다는 주장을 했다. 지라르에 의하면 거짓이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함에도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욕망한다고 믿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라깡이 지라르에게서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그 역시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란 말을 했다. 이는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욕망한다‘는 의미와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한다‘(다른 사람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다른 사람의 욕망을 모방한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어제 마포의 한 주민센터에서 정지은 선생님의 ‘왜 사랑하기가 갈수록 힘들어질까?‘ 강의를 들었다. 최근 나온 ‘헬조선에는 정신분석‘의 공동 필자로 참여한 분으로 정신분석에 기반을 둔 사랑론을 주로 펼치는 필자이다. 결론은 성을 사랑을 위해 사용하는 것, 사랑의 욕망을 위해 사용하는 것, 그럼으로써 욕망의 주체, 결여의 주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인격 전체가 아닌 대상(부분)에 집착하는 충동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욕망은 만족할 줄 모른다. 스스로를 결핍의 주체로 만들어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욕망이다. 물론 일반적 의미의 욕망과는 구분해야 하는 용어이다.)

일본의 경우 사토리(득도得道)세대가 있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에 태어나 현재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까지의 나이에 이른 사람들인 사토리 세대는 현실적 출세와 사랑 등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득도한 것처럼 욕망을 억제하며 살고 있다.

만족하며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안과 우울에 휩싸이기도 하는 그들은 정신분석적으로는 죽음 충동에 근접한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절멸(絶滅)이다. 절멸은 피해야 할 것이다. 정 선생님도 사회적 차원을 언급했다.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어 사랑에 적극적인 프랑스 젊은이들을 예로 든 것이다. 그런데 헬조선인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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