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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늦은 밤 댓글로 주고받은 글입니다. 이종호 박사의 '한국의 천재 과학자들'에 실린 진화론 관련 글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제목에 썼듯 저는 과학에 문외한입니다. 상대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고수로 보입니다. 그래도 지지 않고(?) 열심히, 정도를 지키기 위해 애쓰며 예의도 갖추느라 힘썼습니다. 냉정한 평가 바랍니다...혹시 네이버에서 나눈 대화의 당사자가 알라디너이고 제 친구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너그럽게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A: 책의 내용에 상당히 문제점이 있네요. 저기..진화론에서 라마르크 용불용설은 폐기된 지 오랩니다.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화론은 생명의 시작을 논하는 이론이 아닙니다. 그건 기원론이죠.  진화론은 생물체..진화를 설명하는 이론으로..기원을 다루지 않습니다


나: A님, 저는 '한국의 과학 천재들'을 보고 정리했을 뿐입니다. 저자는 과학자 이종호 박사입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관계에 대해 잘 모르고 획득형질의 유전에 대해 잘 모르지만 획득형질은 유전된다고 주장하는 논리도 설득력이 있는 듯 합니다.


A: 획득 형질이라함은..후천적으로 얻어진 특수한 경우가 다음 대에 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살아가다 팔이 절단되는 경우..이것이 후대에 팔이 절단 되는 아이가 태어나야 하는 게 획득형질의 유전을 말합니다. 현재..획득형질에 관한 학문이 있긴 합니다만...후성유전학이라고 있습니다. 그러나..이것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과는 많이 다릅니다. 제 답글에 어디에도 창조론에 관한 글은 없습니다. 오해하신 듯 합니다. 다만..진화론에 대해 잘못 인용된 게 있어서 거기에 대해 글을 단 겁니다


나: A님 댓글에 창조론 관련 글이 있어서 창조론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책에 두 이론의 관계가 나왔고 일반적으로 하나만 이야기하지는 않기에 함께 이야기한 것입니다..


A: 그렇군요..창조론을 언급하는 이종호 박사라...좀 문제 있는 사람으로 보여집니다. 과학자들은 과학을 논할 때 일반적으로 종교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희한하군요.


나:  과학의 불문율 같은 것인지 모르지만 두 이론 모두 완전하지 않다고 보입니다. 그렇기에 함께 거론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유를 대라면 제 수준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말입니다...어떻든 좋은 문제제기, 감사드립니다... 덧붙이자면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며 팔이 잘린 사람이 아이를 낳을 경우 팔이 잘린 아이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논리를 제시하셨는데요 일반적으로 그건 불가능하지요... 잘 모르지만 획득형질의 유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후천적으로 획득한 성향이나 특징이 유전된다는 것이지 그런 외적 모습이 그대로 이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 보입니다...


A: 음..뭐랄까...우선 과학 이론이라는 것은..어떤 자연 현상에 대해..가장 객관적인 설명체계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과학에서 최고의 위치이며..진화론은 무려 150년 동안..생물체의 진화라는 현상을 설명해 왔습니다. 거의 완벽합니다. 왜 완벽하지 않다라고 생각하시는지 이해가 되지를 않는군요.. 이미..대학에선 진화를 연구하는 학과가 여럿 있습니다. 진화생물학과, 계통분류학과..유전학과..등등 많아요. 그 정도로 진화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죠.  그런데..창조론이라...우리나라 자연대학 계열에 창조학과라고 있는지..궁금하군요. 한번 찾아보셔도 좋습니다. 창조라는 것은 과학이 아니거든요. 정확히 말해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 그 팔의 절단의 예를 말하는 획득형질을 말합니다. 그런데..이런 것도 모르고 글을 적고, 진화의 개념을 잘못 적은 이종호라는 저자..상당히 문제 있어 보입니다.


나: 진화론은 과학으로서 완벽하다고 해도 생명의 시초를 설명할 수 없지 않는지요?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론이 있는 부분이 진화론이지요. 진화론도 믿음적 요소가 있다 생각됩니다... 분자생물학자(박사)이자 기독교 신학자(박사)인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쓴 '도킨스의 신' 같은 경우 그가 기독교인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진화론의 헛점을 상당히 설득력 있게 논파했지요. 이는 진화론자 도킨스 대 기독교 신학자 맥그라스의 대결이 아니라 진화론자 도킨스 대 분자생물학자 맥그라스의 대결이라 보고 싶습니다. 이 경우 과연 진화론이 완벽한, 단일의 이론이라 할 수 있을까요?


A; 저기 다시 말하지만. 진화론은 생명의 시초를 설명하는 이론이 아닙니다라고..분명히 첫 댓글에 적었는데..안보신 거 같네요. 그리고 맥그라스는 분자생물학 박사학위를 따긴 했는데. 본업은 신학자로군요..이 말은..연구를 안 한다는 이야기네요..이 사람이 연구한 생물학 논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나; 진화론이 생명의 시초를 다루지 않는 것은 진화론의 사정이지요. 해명할 수 없으니(물론 기독교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이지요. 해명한다고 했지만 설득력이 없지요. 물론 이렇게 말하면 기독교인들은 신앙은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제쳐두는 것이 아닌가요? 저는 진화론도 편들지 않고 창조론도 편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진화론도 이유 없이 비판하지 않고 기독교도 근거 없이 선호하지 않습니다. A님의 관심이 과학 특히 진화론에 있는지 모르지만 제 관심은 의미에 있습니다. 삶의 의미, 세계의 의미, 생명의 의미...


A:  휴...제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셨군요. 시초를 다루지 않는 것은..그것은 진화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대성 이론은.. 생명의 시초를 다루지 않기 때문에..틀린 걸까요? 중력이론은...기원을 다루지 않은 거라서 틀린 걸까요? 판구조론은..기원을 다루지 않은 거라서 틀린 걸까요? 원자론은 기원을 다루지 않아서 틀린 걸까요? 과학이론이라는 것은 그 자연 현상에 대해 다루는 이론입니다. 진화론은 생물체가 진화하는 현상을 설명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님의 유전자는 부모님께 물려받았지만 분명 부모님들과는 약간의 차이가 나는 님만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 각자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유전자를 가진 건 일란성 쌍둥이뿐이지요. 님은 님의 부모님과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세대..다음 세대..이렇게 나아가면. 선대로부터 조금씩 달라지는 유전자를 계속해서 후대에 내려보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나중에는 선대와는 확실히 차이 나는 유전자 차이를 가지게 되는 겁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창조론으로 설명할 수 있나요? 다시 말하지만 진화는 생명 개체군내의 유전자가 변이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럼 무슨 이론으로 이 현상을 설명해야 할까요? 정답은 진화론 뿐입니다. 이렇게..진화론은 이러한 개체군간의 유전자 차이.... 그리고 거기에 관한 진화 계통도 작성, 게놈 지도 작성. 이걸 하기 위해 진화론이 필요한 겁니다. 생명의 기원은 생물학 개념도 아닐 뿐더러 화학쪽이에요. 진화론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에..말이 길어지네요... 다시 말하지만. 진화론의 사정과 상관없습니다. 진화론은 생명체 진화를 설명하는 이론이지. 기원을 설명하는 이론이 아님을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나; 상대성 이론과 진화론은 다르지요. 진화론은 생명을 다루기에 시초가 중요하고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 속도 등을 다루니 생명을 취급할 여지가 없지요.


A: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과 속도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상대성 이론은 틀린 걸까요?


나; 기원을 다룬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진화론은 생명을 다루니 기원을 설명해야 하고 진화론은 기원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A; 다시 말씀 드리지만 기원을 다루는 것은 화학쪽 파트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기원에 관한 실험도 있습니다. 밀러의 실험입니다. 하지만 이 밀러의 실험은 진화론에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밀러 이 양반은 생물학자도 아닌 화학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 진화론 영역이 아니라 화학 영역이라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함께 통틀어 과학이니 말입니다. 만일 성과를 이야기할 때면 화학 영역에서 끌어다 쓰겠지요. 난처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우면 우리 영역이 아니라 했다면 성과를 논할 때에도 배제해야 하지요.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은 명확히 다르지요. 생명은 신비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계, 사물, 무생물은 아니지요. 이 점은 후쿠오카 신이치라는 일본의 생물학자가 언급한 점을 참조할 필요가 있지요. 그렇게 다르기에 생명을 논할 때는 시초를 논하는 것입니다. 진화론에 대한 이해(물론 오류도 있었지만)에 바탕해 생명철학을 펼친 베르그손 생각이 납니다.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기분 나쁘기보다 배우고 공부가 되었다고 생각되어 기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마트폰으로 글을 치니 팔도 아프고 손가락도 불편하네요. ^^


A; 함께 통틀어 과학이라니...오우 이런 관점으로 말씀하실 줄은 정말 몰랐네요. 뭐, 저는 충분히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괜히 불편하게 했군요. 이만 다음에 놀러오겠습니다.


나; 네... 제 공부가 엉뚱하지요. 감사합니다. 또 놀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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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슈 2016-12-06 2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당히 재미난 논쟁이군요 진화론이생물을 다루기에 기원을 설명해야한다는 논지는 좀이해가 안가는군요 어떤뜻일까요

벤투의스케치북 2016-12-07 18:37   좋아요 0 | URL
네.. 제가 쓴 말이지만 정리한 후 말씀 드리겠습니다.
 

 

페북 친구 신청을 받아 수용한 뒤 인사를 기다린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내가, 신청한 분께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페북은 유유상종의 공간이 아니라 이문회우 이우보인(以文會友 以友輔仁)의 공간이라는 생각도 든다. 글로써 친구를 만나고 어짊으로써 친구를 돕는다는 의미이다.


군주남면(君主南面)이란 말이 있다. 조선시대에 주로 쓰인 말로 임금은 남쪽을 향한다는 의미를 가졌다. 처음 좌청룡 우백호 등을 배울 때 방향이 헷갈렸었다. 왼쪽에 청룡이, 오른쪽에 백호가 배치되는데 이는 우리 기준이 아닌 임금의 기준에 따른 것이다.


그러니 청룡은 우리 기준으로는 오른쪽에, 백호는 왼쪽에 있게 되는 것이다. 종묘는 왼쪽에, 사직단은 오른쪽에 두는 좌묘우사(左廟右社)도 궁궐이 중심이기에 우리 입장에서 종묘는 동쪽(오른쪽), 사직단은 서쪽(왼쪽)에 있게 되는 것이다. 좌청룡 우백호 이야기도, 좌묘우사 이야기도 모두 타자에게 기준을 둘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게 된 말이다.


지금 페북은 그 어느 때보다 아고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케네 문명이 무너지면서 동란(動亂)의 시대를 맞은 그리스는 기원전 8세기 경 중심부에 아크로폴리스라는 성채와 아고라라는 광장이 자리한 폴리스(도시국가)에 정주(定住)하며 “공공의 광장인 아고라에 모여 민회(民會)를 열고서 폴리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 시민들의 나라를 만들었다.


촛불 집회가 실제 공간의 모임이라면, 페북은 가상 공간의 모임이다. 가상(假想)이란 현실성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연적인 시공간을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비물질적이라는 의미이다.(이현재 지음 ‘여성 혐오, 그 후 - 우리가 만난 비체들’ 62 페이지) 이 가상의 공간을 아름다운 곳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리라...모든 것은 정치적이라는 명제를 실감하는 날들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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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출간된 강규(1964년생)의 장편 ‘마당에 봄꽃이 서른 번째 피어날 때‘는 많은 차원의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 주는 작품이다. 제목마저 서정적인 이 작품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저자 강규는 은순과 철수라는 두 의대생이 보낸 스물 두살에서 서른 두살까지의 시간을 정교하게 그려낸다.

 

진혼곡과 미사곡들을 매개로 펼쳐보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서 건져낸 ˝자아의 토대는 사유가 아니라 고통이며 그것은 모든 감정들 중 가장 기초적인 것이며 고통이야말로 자기중심주의의 위대한 학교이다˝ 같은 지적인 성찰,

 

군의관 대신 공중보건의가 되어 한촌(閑村)에서 일을 한 후 복귀하기 위해 책들과 음반들을 싸며 자신이 요양이라도 온 것 같다고 생각하는 철수,

 

교내 어디쯤에서 매일 사회주의, 자본주의, 노동가, 지주 하면서 논쟁이 벌어지고 그것을 위해 그 의식의 개혁과 각성을 위해 젊은이들이 화염병을 던지고 기성체제에 대들어도 자신에게 자본주의란 돈을 가져오면 자유를 주는 명백한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 은순...

 

처음 이 책을 읽은 20여년 전 나는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늘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는 게바라의 말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본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너 정외과 여자애들 나와서 말하는 거 봤니? 원수에다가 괴뢰도당에다가 와, 겁난다. 꼭 광신도들 같지 않냐? 무조건 동참하래, 아니, 정당성을 갖고 동참하라나?˝(63 페이지)

우석훈은 ‘너와 나의 사회과학‘에서 사회과학의 언어가 엘리트 남성들의 전투 용어에서 여성을 포함한 생활인들의 일상용어로 바뀌는 게 바람직하다는 말을 했다. 생각해 볼 여지가 충분하다.

 

이제 세번째 독서에서 나는 소통의 문제와 본문에 나온 프로이트의 정신성 발달 이론(oral dependency, anal phase, genital stage, incubation period...)을 운운하는 의대생들의 어법을 주의깊게 볼 생각이다. 빛을 잃어 에릭 에릭슨의 정신사회적 발달이론으로 대체될지도 모를 정신성 발달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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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학을 그 자체가 아닌 정치 논리로 보는 데 익숙하다는 것이 내 지론(持論) 가운데 하나이다. 최근작인 이종호 박사의 ‘한국의 과학 천재들’에 소개된 이휘소(李輝昭) 박사에 대한 시선이 대표적 경우가 아닐까 싶다. 42세에 교통사고로 숨을 거둔 그를 많은 사람들이 원자폭탄 개발을 둘러싸고 빚어진 미국과의 갈등 차원으로 보는 듯 하다. 나는 물론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으로도 그려졌던 이휘소 박사가 원자폭탄 개발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데에 동의하며, 그가 숭고한 뜻을 가졌다는 말에 공감한다.

 

이휘소 박사는 “핵무기는 언젠가 반드시 없어져야 하며 특히 독재가 행해지고 있는 개발도상국에서의 핵무기 개발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했다. 정치적 이슈만을 다룰 수 없기에 어렵고 생소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은 그가 전약(電弱: 전자기력과 약한 핵력 통합)이론의 발전판인 게이지 이론의 실험치와 이론치가 일치하지 않는 것을 해결했다는 말이다.(재규격화)

 

여기서 그치고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문학인들이 쓴 이휘소 박사의 전기 또는 소설에 비해 과학자들이 쓴 본격 해설서는 드물다는 사실이다. 강주상 박사의 ‘이휘소 평전’은 드물게 만날 수 있는 본격 이휘소 평전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스토니브룩 물리학과에서 이휘소 박사에게 박사 논문을 지도받은 것을 계기로 사제의 연을 맺은 분이다. 이 분은 공석하 시인/ 교수의 '핵물리학자 이휘소'란 책에 대해 강력 항의한 분이기도 하다.

 

'핵물리학자 이휘소'는 박정희가 수차례 이휘소 박사에게 친서를 보내 핵무기 개발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이휘소 박사가 이를 받아들여 77년 5월 일본에 들렀을 때 자신의 다리뼈 속에 마이크로 필름을 숨겨와 한국정부측에 전달했다는 주장이 담긴 책이다. 이 책에서 이휘소 박사의 죽음은 사고사가 아니라 미국측이 사고를 위장해 주도면밀하게 살해한 것으로 소개되었다.(1991년 6월호 과학 동아 ‘비운의 물리학자 이휘소의 삶과 죽음’ 참고) 문학적 상상력도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에 입각한 상상력을 지닐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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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쓸 시간이 부족해 (글을) 길게 썼다는 파스칼의 말. 이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지침이다. 반면 필요 없는 말이나 글을 지워버리는 것을 뜻하는 산삭(刪削)이란 말은 따라야 할 지침이다.

 

이런 내 문제의식에 이정우 교수는 “주희(朱熹)의 세계는 음표 하나만 빠져도 전체가 무너질 듯한 조화로운 교향악의 세계“(‘인간의 얼굴’ 124 페이지)라는 말을 더했다.

 

최근 읽은 ‘궁극의 인문학’에서 글이란 보태는 것이 아니라 줄이는 것이라는 한문학자 정민 교수의 가르침을 접했다. 정민 교수는 한 글자만 빼도 와르르 무너지는 글을 써야 한다는 옛글 이론을 전했다.

 

 형용사와 부사를 적게 쓰라는 것이고 군더더기를 빼야 한다는 것이다.(”처음에는 긴 문장을 쓰다가 『칼의 노래』를 쓸 때는 짧은 문장으로 썼“다는, ”주어와 동사만으로 문장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김훈 작가가 생각난다.)

 

최근 내가 알게 된 사실 중 의미 있는 것은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가 완벽한 순간이란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을 때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문제는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는 글을 어떻게 쉽게 쓸 것인가, 이다. 마종기 시인의 ‘물빛’이란 시가 생각난다.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 집니다/ 산골짝 도랑물에 섞여 흘러 내릴 때/ 그 작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내 목소리를 알아 들을까요/

 

냇물에 섞인 나는/ 흐르면서 또 흐르면서,/ 생전에 지은 죄를 조금씩 씻어내고,/ 외로웠던 저녁, 슬펐던 영혼들을/ 한 개씩 씻어 내다보면,/

 

결국에는 욕심 다 벗은 깨끗한 물이 될까요/ 정말로 깨끗한 물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그 물 속에/ 당신을 비춰 보여 주세요/ 내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세요...”

 

‘조금씩 씻어내고’, ‘한 개씩 씻어내다보면‘ 등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이 구절들이 내게는 글을 다듬고 가려내라는 말로 들리기까지 한다. ’물빛‘이 전해주는 것은 욕심을 다 벗지는 못할지라도 그에 근접하는 깨끗하고 맑은 글을 써야 한다는 깨우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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