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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들렀더니 이** 선생님께서 1등으로 자료를 올리신 것이 보이네요.(부지런) 저는 하루 사이(22, 23일)에 36기 해설인 중촌 & 남촌과 개인적으로 하는 해설인 경복궁을 맡았는데요 늘 그렇듯 자료 의존성이 높아 빌린 책들과 참고 가치가 있는 소장 책들로 책상을 예외 없이 혼잡한 시장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촉매는 적당히 집어넣어야 제 역할을 한다. 술도 촉매여서 적당하면 이야기꽃을 피우고 사랑과 시(詩)를 끄집어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마구잡이로 넣으면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혼수 상태)'...제가 참고로 하려는 많은 책들이 마구잡이로 집어든 촉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죽도 밥도 아닌 무언가가 되지 않으려면 필요하지 않은 것은 과감하게 자르고 버려야겠지요? 멋진 해설들 기대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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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가?” 릴케가 한 젊은 시인에게 던진 물음을 생각한다. 진정성과 필연의 사유를 갖추었을 때만 글을 쓰라는 말이지만 이 말을 나무의 가치를 생각해보는 기회로 삼아보자.

잘 알다시피 나무는 종이를 만드는 펄프의 원료로 쓰인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나무의 가치는 여럿이지만 글 읽는 사람에게, 그리고 책 쓰는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보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팔만대장경을 보면 나무는 원 모습 그대로 수많은 글자를 받아준 소중한 바탕이 되어 주기까지 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대장경에 쓰인 나무는 정교한 조정을 거쳤다.

각 경판(經板)들의 크기 편차가 0.2에서 0.5 cm의 길이, 0.1에서 0.6 cm의 너비에 지나지 않는다(‘문화 유산에 숨겨진 과학의 비밀’ 131 페이지)고 하니 놀랍다.

세상의 저자들은 자신이 왜 책을 쓰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물론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기도 하다. ‘사기’를 쓰기 위해 시간 즉 목숨 보전이 필요해 궁형(宮刑)의 수치(羞恥)를 감내한 사마천을 생각해본다.

암이 뇌로 전이되어 감마선 치료를 받을 때도 치료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안경을 벗지 않았던 일본의 실험물리학자 도쓰카 요지(戶塚洋二: 2008년 7월 타계)도 그렇다. 그 결과 나온 책이 ‘과학의 척도‘이다.

책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적 성찰과 반성의 계기를 갖게 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시의적절할 것 같지만 지리멸렬의 초라한 생각과 어법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배울 바가 있겠는가, 란 생각을 하게 하는 ‘박근혜의 말’이 나왔다.

선택(구입)을 포기하며 이런 생각들을 해보는 아침이다. 저자가 진정성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대상 역시 그래야 한다. 아니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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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님의 ‘페미니즘의 도전‘ 독서 이후 참 많은 시간이 지났다. 제대로 이해했는지 자신할 수 없지만 공감하고 또 공감하며 읽은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페미니즘의 도전‘ 이후 그의 후속작들을 읽지 못했다.

감동하면 전작주의자가 되려는 즉 가능한 한 그 작가의 모든 책을 읽으려는 내 성향, 그리고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내 입장을 감안하면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물론 그의 글쓰기 정체성이 페미니즘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글은 여성주의를 지향하지만 바른 앎과 삶을 추구한다. 최근 그의 글쓰기 스타일을 논한 글을 읽었다. 은유(隱喻)가 거의 없고 예쁘게 쓰려 하지 않는다는 글이다. 나는 그의 그런 점을 좋아한다. 오늘 그의 글을 읽었다. 남자들이 말이 없는 것은 과묵해서가 아니라 화제가 없거나 무식해서라는 글이다.

공감한다. 말이 없는 남자는 위험하다는 그의 일갈(一喝) 역시 인상적이다. 곁가지를 과감하게 치고 예외를 괄호치는 그의 쾌도난마는 지나치게 보일 수 있지만 그의 불찰(?)은 ˝예외가 있지만˝ 같은 말을 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렇게 진의를 헤아리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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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8일 북촌(北村) 수업 시간에 배운 것들 중 두 가지가 관심을 끈다. 하나는 종로구 계동에 자리한 유심(惟心)이라는 인쇄소(발행소) 이야기이다. ‘유심(惟心)‘은 만해 한용운 스님이 발행한 불교 잡지이다.(惟心社는 ‘유심‘지를 발행하는 곳이다.)

불교 잡지이니 오직 유(唯)를 쓸 법한데 사유할 유(惟)를 쓴 것이 특이하다. 그런데 惟는 사유할 유 외에 오직 유와 다만 유로도 쓰이니 생각과 오직을 두루 의미하는 말이다. 유(惟)는 유(唯)이다.

유심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나는 불교의 일체유심조를, 들뢰즈가 말한 욕망과 힘으로 해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들뢰즈의 맥락에서 욕망은 활동을 하게 하는 추진력을 의미하고, 힘은 그것을 실행하는 에너지를 의미한다.(임기택 지음 ‘생성의 철학과 건축이론‘ 57 페이지)

불교에서 마음은 시동(始動)을 걸 뿐 실제 에너지가 될 수 없다. 한 유식(唯識) 전공자도 유식(唯識)을 일체유심조로 보는 것은 오해라 말한다.(서광 스님 지음 ‘치유하는 유식 읽기‘ 146 페이지)

다른 하나는 합각 이야기이다. 합각은 지붕 위 양옆의 박공(牔栱)으로 ㅅ자 모양을 이루는 각이다. 박공지붕은 책을 펼쳐 엎어놓은 모양(삼각형)을 한 지붕이다. 합각을 보고 내가 생각한 것은 스팬드럴(spandrel)이다.

스팬드럴은 아치의 양편과 위쪽에 있는 3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스팬드럴은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말해 유명해졌다.

(스팬드럴과 합각을 같은 관점으로 볼 수 있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다만 유사한 지점에 유사하게 위치하는 두 가지를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는 점은 수용할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굴드는 스팬드럴의 그림 또는 모자이크가 멋이 있기에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으로 볼만하지만 사실 그것은 설계된 것이 아니라 무거운 돔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한 과정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을 했다. 진화는 우연의 산물이란 의미이다.

마음은 전부가 아니고 인간은 우연한 진화의 산물이란 말이 실망스러운가? 겸허하게 받아들일 진실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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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적 대립(binary opposition)이란 말을 처음 접한 것은 에드먼드 리치의 ‘성서의 구조 인류학’이란 책에서이다.

리치는 이 책에서 이야기의 시작 부분 vs 이야기의 끝 부분, 누룩을 넣지 않은 빵 vs 포도주, 사회적 예절의 상징 vs 무절제의 상징, 도시의 문화 vs 광야의 자연 등 대립되는 여러 항목들을 제시한다.
세상이 이것 아니면 저것 즉 이원적으로 선명하게 나뉘는지에 대해서는 정교한 논의가 필요하지만 생각을 자극한다는 점에서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건축에서도 이원적 대립의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칸트는 독립적인 아름다움 즉 용도(효용성)와 무관한 아름다움을 참된 것이라 생각했다.

칸트는 용도가 있는 아름다움을 의존(依存)적 아름다움, 순수하지 않은 아름다움이라 정의했다. 칸트는 건축을 용도가 있는 것 즉 의존적 아름다움으로 보았다.

고(故) 구본준 건축 담당 기자는 최근 나온 ‘세상에서 가장 큰 집’에서 건축에만 있는 것으로 공공성을 들었다. 구본준 기자는 건축은 태생적으로 공공적인 분야라 말한다.

개인을 위한 건물들도 땅에 뿌리박혀 풍경이 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공공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칸트와 구본준 기자의 관점은 이렇게 대립된다.

브랑코 미트로비치는 칸트는 어쩌면 비구상 예술과 추상 예술이 활짝 꽃피기 1세기 전에 그것을 옹호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건축을 위한 예술’ 118 페이지)

경복궁 해설을 위해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경복궁(정도전) vs 창덕궁(이방원)은 물론 한스 샤로운 vs 알베르트 슈페어 등의 대립항을 알게 되었다.

경복궁은 정도전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의도해 지은 궁궐이고, 창덕궁은 이방원이 왕 중심의 세계를 구체화하기 위해 지은 궁궐이다.

한스 샤로운(Hans Bernhard Scharoun; 1893 - 1972)은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을 주조의 형태도 취하지 않고 기단(基壇; 건축물이나 비석 따위의 기초가 되는 단)도 없고, 수평성을 강조하는 도구 즉 열주랑(列柱廊: stoa)도 없는 건물로 지었다.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을 이렇게 설계한 이유는 나치의 선전도구로 쓰인 건축에서 이런 장치들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 1905 - 1981)는 히틀러의 욕망을 눈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 인류 역사상 최악의 건축가이다. 히틀러의 애완 건축가로까지 불린다.

히틀러가 지망생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지만 진학에 실패한 뒤 건축에 재능이 있어 보인다는 교수의 말을 듣고 건축가를 꿈꾸었다는 사실은 조금 생소하다.

어떻든 건축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히틀러는 대신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줄 건축가를 고르는데 그가 알베르트 슈페어이다.

임기택은 건축은 주어진 조건과 상황 및 시대에 따른 외적 변수들을 잘 통합하여 시대성을 잘 반영하고 인문 및 감성적 요소들을 잘 통합해 현실화해야 한다고 말한다.(‘생성의 철학과 건축이론‘ 83 페이지)

타당한 말이다. 나는 칸트가 아닌 구본준의, 이방원이 아닌 정도전의, 알베르트 슈페어가 아닌 한스 샤로운의 관점과 선택을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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