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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뇌르 이야기와 관련해 기억하는 것은 루소와 보들레르의 차이다. 루소는 18세기 사람이고 보들레르는 19세기 사람이다. 보들레르는 루소보다 109년 후에 태어났다. 루소와 달리 보들레르에게 자연은 선하고 순수한 것이 아닌 악으로 더럽혀진 것이자 타락한 것이었다. 루소는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지만 부분적으로만 맞다.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자연을 단순한 향유의 대상으로 삼을 때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파악하거나 이해하고자 할 때는 어려움이 따른다. '사이언스 블라인드(Science Blind)'의 부제가 '우리는 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가?'인 것을 보라. 가령 우리 중에 누가 과학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낮과 밤이 바뀌는 것'을 해가 뜨고 지기 때문이 아니라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라 생각하겠는가?

 

저자 앤드루 스톨먼에 의하면 우리의 직관적 이론들은 과학의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스톨먼이 말했듯 자기 성찰만으로는 불멸의 착각(인간은 죽지 않는다는 착각)을 깰 수 없다. 아이들은 인간의 필멸(必滅)의 운명을 외부 환경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미국의 시인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Edna Saint Vincent Millay: 1892 - 1950)는 '어린 시절은 누구도 죽지 않는 왕국(Childhood is the kingdom where nobody dies)'이란 말로 아이들의 죽음관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정신의학 박사 에드윈 풀러 토리는 현생 사피언스가 갖춘 가장 획기적인 것은 자전적 기억이라는 말을 한다. 과거로부터 축적된 경험을 활용해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자신을 미래에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이다. 이는 이점이자 짐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예상하게 됨에 따라 불안을 부산물로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이언스 블라인드'의 논리에 공감, 동의하는 나는 상식은 실제적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과학은 이론적 관점에서 사물을 본다고 생각한 바슐라르를 더 공부할 필요를 느낀다.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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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强硬)해야만 제대로 공부한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있다. 논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자신이 옳다는 무근거의 믿음에 기반해 "실천하지 않으면 공부가 헛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저격(狙擊)에 동참할 것을 강권(强勸)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설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무책임하다고 몰아붙이며 나서지 않는 이들의 공부를 무익한 열정이라 규정한다. 하지만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가릴 줄 알아야 하고 이론과 실천이 대립하는 항목이 아님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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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사람에게 묻고 말 할 사람에게 말하자. 나이가 많아진다고 저절로 지혜와 배려심이 느는 것이 아니듯 지위가 높아진다고 그렇게 책임감이 커지고 안목이 높아지는 것이 아님을 늘 새기자. 나는 아집(我執)과 상투(常套), 위선(僞善)과 가식(假飾)으로 무장한 인간들을 미워한다.

 

물론 그런 유형의 인간들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나를 돌아보고 자제하고 늘 배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형편 없는 사람들의 말에 마음쓰지 말자. 불확실하거나 미진한 말에는 바로 반응하지 말고 묻자.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고(思考)할 수 있도록 애쓰되 역지사지해야 할 때도 있음을 잊지 말자.

 

거친 감정을 알아차림으로써 외화하지 않고 사라지도록 하자. 정확함을 지향하되 그런 사유에 근거해 나가는 말이라 해도 시기나 상황, 상대의 그릇을 고려했을 때 늘 적절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싫은 사람들을 탄하기보다 좋은 사람들에게 정성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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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진의 ‘제왕의 책’에 의하면 세종은 경연(經筵)에서 ‘자치통감’을 읽으려 했다. 그러나 분량이 총 249권에 이르기에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힌 세종이 대안으로 택한 책이 ‘통감강목‘이다. 태종은 책을 너무 읽어 건강을 해친 아들(충녕)을 위해 책을 치우게 했는데 단 한 권 구소수간(歐蘇手簡)은 곁에 두었다고 한다. 숨겨둔 것이다.

 

구소수간은 구양수(歐陽修)와 소동파(蘇東坡)의 편지글을 엮은 책이다. 구양수와 소동파가 직접 주고 받은 편지가 아니라 각기 다른 사람들과 주고 받은 편지를 모은 것이다. 소동파가 구양수가 대과 시험위원장을 맡은 시험에 응시했다.

 

이름을 가리고 채점하는 가운데 탁월한 답안지를 보고 소동파의 것으로 짐작했다가 제자인 증공의 것인가 싶어 제자에게 최고점을 주면 문제가 될 것 같아 최고점을 주지 않았으나 알고 보니 소동파의 것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구양수, 소동파 모두 당송팔대가에 속한다.

 

“화려하고 난삽한 이전 문장의 구습을 질박하고 명쾌한 사상과 작법으로 개혁”했다는 평을 듣는 사람들이다. 질박(質朴)과 명쾌(明快)란 말이 눈에 띈다. 간결하다는 의미도 되리라.

 

“..꽃과 나무와 마음을 변화시키는 봄볕에 하릴없이 연편누독(連篇累牘)만 더합니다..”(조용미 시인의 ’봄의 묵서’ 중에서)란 시가 생각난다. 연편누독이란 쓸데 없이 긴 문장을 말한다. 봄볕에 하릴없이 말이 많아지듯 시인은 글이 길어진다고 자신을 탓한다. 하릴없이 걷고 싶은 봄볕 좋은 날들이 계속되다가 오랜만에 비가 내리는 주일(主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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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질량이 클수록 수명이 짧다. 태양 질량의 20배가 넘는 별의 경우 엄청난 자체 중력(서로 끌어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폭발한다. 폭발력이 안으로 향하는 것을 내파(內破)라 하고, 밖으로 향하는 것을 외파(外破)라 한다. 내파를 폭축(爆縮)이라고도 한다. 축(築)이란 말은 당연히 수축(줄어드는 것)을 의미하지만 흥미롭게도 옳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디에 그런 말이 있는가? ‘맹자’에 나오는 자반이축 수천만인 오왕의(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란 말에서 그 사례를 만날 수 있다. 스스로 돌아보아 잘못이 없다면 비록 천만인이 가로막아도 나는 가리라는 뜻의 말이다. 자신과 관련된 일도 아니고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닌데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하는 사람 때문에 친구가 조심하자는 말을 한 끝에 결론 삼아 한 말이다.

 

폭축(爆縮)이란 말은 내성(內省)을 떠올리게 한다. 폭축이 폭발력이 안쪽으로 향하는 것이라면 내성은 밖으로 향하던 관심과 지향을 안으로 돌려 제 마음을 성찰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 관심과 지향이 밖을 향하고, 어떤 경우 안을 향하는 것일까? 메타적 능력 즉 자기를 대상화해 바라보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러기도 하고 그러지 못하기도 할 것이다.

 

양적 변화가 쌓여야 질적 변화가 일어나듯 지식도 충분히 쌓여야 메타적 지식이 된다. 프린스턴대학의 천체물리학자 네터 배철(Neta Bahcall)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우리 우주를, 팽창을 막는 데 필요한 질량의 일부만을 지닌 체중 미달의 우주로 정의했다. 별의 행보에 질량이 중요하듯 우리의 행보에는 자기성찰적 지식이 중요하다.

 

공부하지 않으니 숙고하고 점검해야 할 것이 없고, 또 그래서 시간이 남아 남의 개인사에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덕에 나는 오랜만에 나를 돌아보는 계기를 삼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이 그 자체로 덕스럽지 못한 행동임을 알 것이다. 만일 그것도 모른다면 그는 나이만 먹은 아이 같은 어른에 불과하다. 나이가 들면 존경은 못 받더라도 지탄은 받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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