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나는 "역사의 종말" 이란 말에 불안이나 불쾌감을느낀 적이 없다. "그것을 잊는다는 것, 그 무용한 일들을 하게하려고 짧은 우리 삶의 수액을 다 소진한 그것, 역사를 잊는다는 건 얼마나 근사할 것인가!" (<삶은 다른 곳에>) 역사가 끝날거라면 (철학자들이 즐겨 말하는 그 종말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기어렵지만) 어서 끝장나기를! 하지만 "역사의 종말"이라는 이 똑같은 문구를 예술에 적용한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그 종말, 나는 그것을 너무도 잘 상상할 수 있다. 오늘날의 소설 생산 대부분이 소설사의 장 바깥에 있는 소설들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소설화된 고백, 소설화된 탐방기, 소설화된 보복,
소설화된 자서전, 소설화된 폭로, 소설화된 규탄, 소설화된 정치 강론, 소설화된 남편의 고뇌, 소설화된 아버지의 고뇌, 소설화된 어머니의 고뇌, 소설화된 능욕, 소설화된 출산 등 시대의 종말까지 끝없이 이어질 소설들,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말하지 않고, 어떤 미학적 야망도 없는, 인간에 대한 우리의이해나 소설의 형태에 어떤 변화도 가져다주지 않는, 서로 비슷한, 아침에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고 저녁예 완벽하게 던져버릴 수 있는 소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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