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내가 묘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말했다.
"인간의 공포에 대한 내 이론도 묘연한 건 확실하구요. 자기모습을 상상해봐요. 잭, 너무도 가정적이고 늘 앉아서 지내는 당신이 어쩌다 깊은 숲속을 걷고 있는 모습을요. 그러다문득 뭔가가 눈에 들어와요. 그게 뭔지 다른 건 알지 못하는상태에서, 이게 아주 커다란 것이고 당신의 일상적인 참조틀에는 없는 것이란 걸 알게 돼요. 세계관에 오점 하나가 나타난 거예요. 그것이 여기 없거나 선생님이 없어야 하는 거죠. 이제 그것의 전모가 드러나요. 그건 바로 북미산 회색곰이에요. 엄청나게 크고 빛나는 갈색의 곰이 어슬렁거리면서 다가와요. 훤히 드러난 어금니에선 진액이 뚝뚝 듣고 있어요. 잭, 당신은 야생에서 이렇게 큰 동물을 본 적이 없어요.
이 회색곰과의 만남은 너무도 충격적이고 기이해서 자신에대한 새로운 감각을, 자아에 대한 신선한 인식을 부여한답니다. 특이하고도 무시무시한 상황에 처한 자아에 관해서 말이죠. 새롭고도 강렬하게 자신을 보게 돼요. 스스로를 재발견하는 겁니다. 당신은 자신이 갈가리 찢기게 될 상황을당해서 정신을 곤두세우고 있어요. 뒷발로 선 그 짐승 때문에 당신은 난생 처음으로 친숙한 환경 바깥에서, 홀로, 뚜렷이, 온전하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되는 거죠. 우리가 이 복잡한 과정에 붙인 이름이 바로 공포예요."
"공포란 더 높은 단계까지 상승된 자기인식이라 이거군요."
"그래요, 잭."
"그럼 죽음은요?" 내가 말했다.
"자아, 자아 그 자체죠. 만약 죽음을 그렇게 이상하거나 그렇게 근거없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죽음과 관련된당신 자아에 관한 감각도 줄어들 거예요. 당신의 공포도 사그라질 거구요." -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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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전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뇌 어딘가에서 힘차게 움직이는 분자활동의 결과예요." "하인리히가 주장하는 두뇌이론이로군. 그건 모두 사실이야. 우리 존재는 화학적 충동의 종합이라고. 내게 그런 말 하지 마. 생각만 해도 못 견디겠어."
"그들은 당신이 말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추적해서 특정 부위의 분자수까지 알아낼 수 있어요."
"이 체계에서 선악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 거야? 열정이나 질투, 증오 따위는 또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건 그냥 신경세포다발이 되는 건가? 유구히 내려오는 인간적 결점들은 이제 끝이 나서 비겁함, 싸디즘, 치근거리기, 이런 건 의미없는 용어가 된다는 말이야? 이제 이런 것들을 아련하게 바라봐야만 한다는 거야? 살의를 느끼는 건 어떻게 되지? 살인자는 엄청난 정도의 살의를 느꼈을 테고, 그의 죄도 크잖아. 그걸 세포와 분자로 환원시켜보면 어떻게 될까? 내 아들 하인리히는 살인자와 체스를 둬. 걔가 이런 얘길 다 해줬어. 난 듣고 싶지 않았어." -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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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바로 현대식 죽음의 속성이지요." 머레이가 말했다. "현대의 죽음은 우리와 독립된 별도의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건 아주 거창하고 폭넓게 자라고 있죠. 전에없이 활발하게 퍼지고 있구요. 우리는 그것을 객관적으로 연구합니다. 그것의 등장을 예견하고 몸속에서 움직이는 경로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의 횡단면도를 찍고 몸속에서 움직이는 전율과 파장을 테이프로 기록할 수도 있어요. 우리가 그것에 이렇게 가까이 간 적도 없거니와, 그 습성과태도에 이렇게 친숙한 적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주친밀하게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계속 자라서 폭과 넓이를 획득하고, 새로운 출구와 새로운 통로와 수단을 얻고 있어요.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그것은 점점 더 크게 자랍니다. 이건 어떤 물리법칙 같은 건가요?
지식과 기술이 진일보할 때마다 그에 걸맞게 새로운 종류의죽음이, 새로운 변종이 나타난다는 식이죠. 바이러스 매체처럼 죽음도 적응을 해나갑니다. 이것이 자연법칙일까요? 아니면 나만의 사적인 미신일까요? 죽은 자들이 그 어느때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있다는 게 느껴져요. 죽은 자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다는 게 말입니다. 노자(老子)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차이란 전혀 없다. 그들은 생명력의 한 통로다‘라는 말을 기억하세요. 노자는 예수가 태어나기 육백년 전에 이렇게 말했어요. 이 말은 다시 생각해봐도 맞는 말입니다. 어쩌면 그 어느때보다 더맞는 말이죠."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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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안개 속을 나아가는 자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 뒤돌아볼 때는 그들의 길 위에서 어떤 안개도 보지 못한다. 그들의 먼 미래였던 그의 현재에서는 그들의 길이 아주 선명하게 보이고, 펼처진 길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뒤돌아볼 때, 인간은 길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잘못을 본다. 안개가 더는 거기에 없다. 하지만 모든 이들, 하이데거, 마야코프스키, 아라공, 에즈라 파운드, 고리키, 고트프리트 벤, 생존 메르스, 지오노 등, 모든 이들이 안개 속을 걸어갔으며,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다. 누가 더 맹목적인가? 레닌에 대한 시를 쓰면서 레닌주의가 어떤 귀결에 이를지 몰랐던 마야코프스키인가? 아니면 수십 년 시차를 두고 그를 심판하면서도 그를 감쌌던 안개는 보지 못하는 우리인가?
마야코프스키의 맹목은 영원한 인간 조건에 속한다. 마야코프스키가 걸어간 길 위의 안개를 보지 않는 것, 그것은 인간이 뭔지를 망각하는 것이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하는 것이다. - 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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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나라라는 대가족에서 예술가는 결국 다수의 끈에 의해 다수의 방식으로 구속된다. 니체가 독일 특성을 큰 소리로 혹평하고, 스탕달이 자신은 조국보다 이탈리아를 더 좋아하노라 선언해도, 어떤 독일인, 어떤 프랑스인도 이에 대해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어떤 그리스인이나 체코인이 그런 소리를 떠벌린다면 그의 가족은 그를 혐오스러운 배신자로 여겨 극렬히 배척할 것이다.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뒤에 묻힌 유럽의 작은 나라들(그들의 생활, 그들의 역사, 그들의 문화)은 바깥 세계에 알려지는 일이 거의 없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들의 예술이 국제적으로 알려지지 못하는 주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이 예술이 불구인 것은 모든 사람들(비평, 사료 편찬, 이방인들은 물론 동포들 역시)이 그것을 국가 가족이라는 커다란 사진 위에 붙이고는 바깥으로 나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까닭이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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