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 판사란 무엇이며, 판결이란 무엇인가
손호영 지음 / 동아시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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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 법조를 경험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판사를 보는 시선은 다르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 넘기 어려운 양안에 서 있기도 하다.
법이 정의로워야 한다는 게 일반의 상식이지만 법조에서는 정의만큼이나 법적안정성을 중요하게 보기 때문에 태생적인 간극이 생긴다. 상식과 법의 충돌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법조직역에 있는 사람이라면 첨예하게 대립된 분쟁이든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된 분쟁이든 판사의 판결이 쉽지 않은 작업이란걸 잘 안다. 판사는 대립된 당사자의 주장과 증거를 취사선택하여 법리에 어긋나지 않게 길을 만들어간다. 그 길이 걸을 수 없는 길이 되어서는 안되므로 직업으로서의 판사는 엄격하고 명료해야 할 숙명을 타고 났다. 그럼에도 분쟁은 사람의 일이라, 법으로만 풀 수 없는 지점이 곳곳에 숨어있다.

그런 숙제라 할지라도 결국 반드시 풀어야 하므로 때로 판사의 판결에는 깊은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기도 하고, 완곡하지만 진심이 담긴 인간적 고민이 드러나기도 한다.
법의 길은 잘 닦인 아스팔트도 아니고, 개척해야 나아가야 할 험한 산길도 아니다. 사람들이 충분히 안전하게 다닐 만하지만 곳곳에 빈틈을 채워야 하는 부실한 지점도 있고, 자세히 살펴야 보이는 숨은 갈림길도 있다.

유능한 판사는 확실히 분쟁의 당사자보다 더 많이 읽고 깊이 궁구한다. 그 결과물이 바로 누구나 수긍하는 잘 된 판결이다. 분쟁을 해보고 판결문을 보면 알 수 있다.
판결은 어떤 식으로든 개인과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판사 개개인의 고민이 깊을수록 세상은 좀 더 나아질 것이다. 책은 그러한 성찰로 가득하고, 잘 알려진 사례의 판결이 나오게 된 배경을 살펴보는 즐거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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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오늘도 첼로를 연주합니다 - 시청각장애인 박관찬의 삶과 도전 꿈꿀자유 함께 사는 이야기 3
박관찬 지음 / 꿈꿀자유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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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자신의 손바닥을 내민다. 보고 들을 수 없으니 손바닥에다가 글을 써 달라고 한다. 책의 초반 이 부분에서 한참 동안 읽기를 멈췄다. 수년 전에 읽은 기억을 더듬어 인간의 감각에 대해 쓴 책을 찾아 뒤져봤다.

로봇을 이용한 수술을 할 때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과제 중 하나가 집도의의 촉각을 어떻게 로봇에게 전달할 수 있느냐라고 한다. 의사는 영상(시각)을 통해 수술부위를 보면서 로봇 팔의 움직임을 제어하지만 보다 섬세한 터치를 요하는 경우 시각이 촉각을 대체하는 데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로봇수술을 하는 의사가 시각적으로 몰입하다보면 손 끝에 뭔가 느껴지는 듯한 경험을 한다고 하는데, 이는 뇌가 조종하는 일종의 감각치환으로 해석된다.

촉각은 피부에서부터 전달되는 압력과 질감을 뇌가 재해석하는 고도의 신체현상이다. 시각을 잃은 사람은 청각으로, 청각을 잃은 사람은 시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시,청각 기능 모두가 제한된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촉각이다. 기계가 쉽게 배우기 어려운 생명체의 원초적인 감각과 인간의 두개골 안에 있는 오래된 블랙박스가 제대로 연결되어야 촉각에 의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학교 다닐 때 앞 자리 친구의 등판에 글을 써서 의사를 전달해 본 경험이 있을 텐데, 그 뭉텅한 촉각은 즉각적인 의사소통의 기능을 넘어 두 사람의 친밀감을 더해주는 마법같은 기능도 있었던 듯 하다. 웬만큼 친하지 않고는 그러한 접촉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그래서 저자가 가장 좋아하는 소통방식인 손바닥 필담은 오래 전 그 간질간질했던 감각을 떠올리게 하면서, 잊고 산 고향으로 돌아가는 듯한 아스라함을 불러 일으킨다.

손바닥 필담 이야기로 시작한 작가의 인생은 힘겹기 짝이 없었던 세상과의 의사소통으로 점철되었다. 불화는 피할 수 없었다. 비장애인들의 틈새에서 이렇다 할 배려 없이 정글 같은 유년의 학창시절을 보냈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청년기의 통과의례에서 섬세하지 못한 제도의 피해를 고스란히 겪었다. 그 이후 멋진 첼로연주자 모습으로 표지를 꽉 채운 이 책이 나온 걸로 봐서, 그의 성취가 만만치 않았을 것임을 짐작하겠지만, 그 성취 과정을 톺아보면 우리 사회에 주는 메시지가 여전히 아프고, 장애인의 일상사에 더 많은 관심과 공감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리고 세상 곳곳엔 여전히 많은 선인과 현자들이 있다는 사실도.

#청년은오늘도첼로를연주합니다 /박관찬 /꿈꿀자유

강병철 선생의 작은 출판사 <꿈꿀자유>의 선한 영향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길은 책을 많이 사서 읽어 주는 일.
한 권은 그저 얻었으니, 몇 권을 더 사서 주변에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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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다를 닮아서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반수연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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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한창 타임라인에 빈번히 올라왔던,
반수연 작가의 산문집 <나는 바다를 닮아서>
와 단편집 <통영>을 연이어 읽었다.
<통영>이 먼저 나오고, <바다..>가 나중에 나왔지만 읽을 때는 순서를 바꿨다.
작가의 소설이 잘 차려진 잔치상이 있는 마당이라면, 산문은 상이 나가기 전 부엌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부엌에서부터 마당으로 가는 게 작가의 세계를 온전히 하나로 엮는 길이다.
때로 작가의 산문은 그가 쓴 소설보다 더 재미있고 다채롭다. 자전적 작품들은 더 그렇다.
그러나, 둘 다 읽고나니 순서는 무의미했다.
소설집 <통영>과 산문집 <바다..>는 시간과 공간 구분을 의식할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고,
작가는 그 두 공간과 시간을 오가며 글을 쓴 듯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설과 산문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두 책이 하나의 연작같은 작품으로 남았다.
산문집은 산문으로 읽기 시작했으나, 다 읽고 나니 한편의 소설이었고, 소설집은 소설로 읽기 시작했으나 다 읽고 나니 꾸밈없는 산문이었다.
산문은 쓸쓸했고, 소설은 담담했다.
가난한 이주민의 고단함 속에도
가족은 희망이고 동기였으나, 작가는 늘 혼자인 듯 보였다.
전동톱에 손가락이 잘리고도 선한 심성을 잃지 않은 남편의 그림자같은 삶이 오래 기억에 남을 듯 하다.
향수병에 걸리고도, 정작 고국에 오면
다시 살고있는 그 곳이 그리워진다.
이국에서의 삶을 겪어 보지 못한 토종 내국인에게도 스산하지만
따뜻해지는, 어떤 아련한 정서가 공감될 수 밖에 없는.. 좋은 작품들이다.


   <2023. 9. 18.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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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루저의 나라 - 독일인 3인, 대한제국을 답사하다
고혜련 지음 / 정은문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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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기 독일인들이 남긴 답사기를 기본 텍스트로 해서 대한제국의 정사와 이면사를 다룬 친절한 연구서이자, 밀도 있는 교양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답사여정의 에피소드들도 흥미로웠고, 헤이그밀사사건을 당시 기록을 바탕으로 상세히 서술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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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 서울 출장길에 연신내에 있는 니은서점에 들렀다. 근처에 사는 선배를 만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소문난 작은 서점이 어떤가도 보고 싶었고, 서점대표인 노명우 교수님도 혹시 만날 수 있을까 기대도 했다.

2014년경 노명우 교수의 <세상물정의 사회학>을 거의 두 달 가까이 끼고 지내면서 앞뒤로 반복해서 읽고, 글의 무게와 따뜻한 시선을 오랫동안 잊지 않고 있었는데, 재작년 초에 나온 <인생극장>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사회학자가 그 부모님을 추억하는 방식이 너무 신선하고 감동적이어서 그해 개인적으로 꼽은 최고의 한권 이었다. 나중에 그 책으로 문학상(전숙희문학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지.. 그 책은 문학상이 어울리지.

 

 

얼마 전 니은서점2주년을 맞았다고 했으니, 대략 문학상을 받을 즈음에 처음 문을 열었던 것 같다. 그 전에 이미 교수님의 페이스북을 통해 서점을 여는 아이디어가 공유되었고 나도 당연히 좋아요를 눌렀다. 부산에서 서울 동네서점의 출현을 지지한다는 건 그냥 마음만 보탤 뿐이므로 좋아요는 사실 무책임한 것이었다. 서점의 출발이 돌아가신 부모님과 연결된 감동적인 프리퀼에 연유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나, 월세를 내는 건물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일이 추억만으로는 버티기는 한계가 있는 게 당연할 것이므로 기대반 염려반으로 니은서점의 행로를 지켜보았다.

 

 

인문사회 중심의 도서 구성이 취향에 맞아서 그날 서점에서 책을 열 권 정도 골랐고, 나중에 오신 노명우교수를 만났다. 또래인 걸 알았으나 훨씬 젊고 세련되어 보였고 대화는 부드럽고 스스럼이 없었다.

니은서점에 대한 책을 쓴다는 걸 그때 들었는지, 나중에 들었는지 모르겠다.

'지속가능한 적자' 형용모순이지만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니은서점의 목표다. 개업 후 판매 최저기록이 월 165, 최고기록이 월 484권이다. 책한권에 평균15000원을 잡고 마진을 20%로 잡으면(도매가에 할인율을 고려하면 이정도 된다.), 500권 팔아야 150만원이 남는다. 월세가 70만원에 공과금, 4명 북텐더(단순 아르바이트가 아닌 니은서점만의 시그니처 일꾼)들의 수고비까지 공제하면 대표가 손에 쥐는 이익은 없을테니.. 책팔아 적자를 해소하는건 최고 매출을 기준으로 보더라도 꿈같은 이야기다. 그래서 노명우교수는 외부강연료와 교수월급의 일부를 서점 운영에 투입한다고 한다.

 

 

이럴 줄도 모르고, 무작정 '좋아요'로 서점개업을 부추겼으니, 팬으로서 책임이 없지 않다. 지속가능한 적자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구매처를 변경하는 게 선량한 책소비자로서 도리라고 생각해서 인터넷서점에 쌓인 포인트를 정리하고, 유혹하는 굿즈의 숲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이다. 무료배송에 10%할인을 받으니 별로 손해보는 소비도 아니다. 인터넷서점과 니은서점, 당분간은 투트랙으로 갈 예정이다.

 

 

니은서점에서 매주 열린다는 저자 초청 하이엔드북토크를 현장에서 경험하고 싶지만 거의 어려울 테고, 대신 수시로 생생한 영상과 도서정보들이 올라오는 니은서점의 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에 만족한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낸다는 생명진화의 역사처럼 니은서점은 자본주의 경쟁의 뒷녘으로 사라지지 않기 위해 진지하면서도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까칠하면서도 따뜻한 학자..드문 캐릭터를 가진 한국 사회학자의 실전 자영업이 영구히 지속가능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러다 잘될지 몰라. 니은서점>는 작은 독립서점의 생존 분투기이기도 하지만,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사회비평서 이기도 하고, 책 읽는 일의 긍정적인 경험과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합리적인 안내서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 독립서점에서 '종이책'을 사야하는 이유에 설득당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다잘될지도몰라니은서점 / 노명우 지음 / 출판사클/2020. 9/269p

 

 

https://www.facebook.com/sangoh.lee.39/posts/3442174615865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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