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붓다, 유쾌하게 산다는 것
후지타 잇쇼 지음, 박제이 옮김 / 독개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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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배움"이라는 키워드로 불교를 풀어낸다. 


저자에게 부처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도 계속해서 배우는 사람이다. 또 저자에게 불교는 우리가 평생토록 배움을 얻으면서 유쾌하게 살아가게 해주는 방법론이다. 두 번째 관점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첫 번째는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부처는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더는 공부하고 수행할 것이 남지 않았다. 그것은 실제 사실이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계속 수행을 하고 가르침을 편 이유는 중생에 대한 대연민심으로 그들을 고통에서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불교는 학교에서의 정해진 학교적 배움과 달리,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상에서 배우고 깨닫는 오가닉 러닝(유기적 배움)이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토를 달 이유가 없다. 수행이 일상이 되고, 일상이 수행이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유기적 배움을 가능하게 하는 이상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붓다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하면서 사문유관, 명상/고행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마라(번뇌를 상징하는 악마) 이야기 등 여느 불교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용도 등장하지만, 저자 자신의 공부 이야기는 새겨들을 만하다. 


저자는 부와 명리를 좇는 삶보다 평생 배움을 얻으며 유쾌하게 성장해가는 학도(學道)의 삶을 꿈꿨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길을 위해 발달심리학 대학원을 중퇴하고 절에 들어가 수행한다. 나아가 미국에서 좌선을 지도하는 이력으로까지 나아간다. 


다만, 다음과 같은 저자의 진술은 조금 더 분명하고 설득력 있는 설명이 따라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에게 여전히 불교는 어렵고 모호한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훨씬 단순하고 재미있는 수행(=오가닉한 배움의 생활)의 장이라는 사실은 반드시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p.52)


"불교는 각자가 자신만의 유쾌한 삶의 방식을 배우기 위한 참고서"(p.52) 


그리고 수행은 즐거워야 한다는 저자의 관점에는 동의하지만, 그리고 붓다도 명상/고행이 아닌 "나무 아래 스스로 앉는 즐거운"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좌선에서 중요한 것은 작위적인 노력에서 벗어나 심신을 자연스러운 작용에 맡긴 채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현재에서 아무것도 더하려 하지도 빼려 하지도 않아야 한다. 너그럽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그저 앉아 있으면 안락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이 안락이야말로 내가 유쾌라고 부르는 상태다."(p.98) 


마음챙김 명상의 대가 존 카밧진은 이것을 "coming to terms with what is"라고 표현했다. "있는 그대로의 실재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 정도라고 할까. 나는 이것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수동적으로 맞장 뜨기"라고 표현하고 싶다. 저자는 낭만파 시인 존 키츠의 negative capability(소극적 수용력)라는 표현을 인용하는데, 역시 일맥상통하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이것을 "하지 않는 능력"으로 설명한다. 


doing mode(행위 양식)와 being mode(존재 양식)에 관한 설명도 나오는데, 이 표현은 미국 마음챙김 명상의 대가인 존 카밧진이 자주 쓰는 표현으로, 아마도 미국에서 십수 년을 활동한 저자의 이력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밖에 둑카(괴로움), 불방일(아빠마다) 등 남방불교의 위빠사나도 간간이 소개하는데,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수행법인 위빠사나를 제쳐두고는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괴로움 = 고통(통증) x 저항"이라는 공식도 여느 불교 책에서 흔히 보이는 설명이다. 


불교에 대한 저자의 이해와 주장이 큰 방향성에 있어서는 틀리지 않았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논지는 다소 부족해 보이는 책임은 어쩔 수 없다. 분량이 짧아 하루 정도면 충분히 다 읽을 수 있다. 일본에서 25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라는데, 책의 어떤 포인트 때문인지 궁금하다. 나는 발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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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이름의 지배 -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다지마 요코 지음, 정승진 옮김 / 파이돈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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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생태주의 페미니즘.. 이 책은 "무슨무슨" 페미니즘 말고, "날것 그대로의 페미니즘"을 주장한다. "날것 그대로의 페미니즘"이란? 남자든 여자든 나로서, 자기 자신으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페미니즘이다. "나의 페미니즘은 나의 페미니즘입니다"라는 책속의 문장은 무슨 동어반복인가 싶지만, 실은 "내가 주창하는 페미니즘은 오로지 나의 삶에 복무하는(도움이 되는) 페미니즘이어야 합니다"라는 저자의 옹골찬 주장으로 읽힌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 구조가 형성되어 온 과정을 수천 년 남성중심 사회의 관점에서 날카롭게 해부하고 비평한다. 남성중심 사회는 약탈과 지배, 점거, 점령, 소유, 전쟁의 문화다. 반면, 여성의 문화는 배려, 존중, 어울림, 협동, 조화다. 다소 과도한 도식화와 단순화일 수 있으나, 전혀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읽다 보면 남녀의 불평등한 관계에 관한 저자의 분석을 독자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며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여성은 '옳다쿠나' 할 것이고, 남성은 '내가? 그랬을 수도..' 하며 자신을 돌아볼 것이다). 특히 갤리선의 비유는 독자의 이해를 돕는 다소 과격하지만 매우 인상적인 비유로 보인다. (여성은 배 아래에서 노를 젓는 노예다. 갑판 위는 남성들이 장악하고 있다). 


이 책은 1990년대 초 일본에서 출간되었는데, 당시 일본사회도 여전히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했나 보다. 여성을 순종적인 존재로 다루고, 무급 가사노동에 남편의 속옷 빨래나 시키는 대우를 일본 여성들이 받았다고 한다. 지금 한국사회는 이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수천 년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이어온 뿌리깊은 여성 차별과 억압의 역사가 몇십 년 만에 사라질리 만무하다. 구조는 언제나 우리의 의식 속에 강고히 박혀 있어, 눈에 띄는 제도를 개혁하는 일보다 훨씬 어렵고 오래 걸린다. 


나는 이 책을 "가부장제 문화를 뒤엎고 억압적 남자들을 타도하자"는 전투적 주장보다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내면에 강고히 뿌리박힌 남녀에 관한 고정적 관점과 편견을 의식적으로 자각하는 일부터 먼저 하자는 주장으로 읽고 싶다. 결국 페미니즘도 누가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삶을 사는 것에 관한 것이니까. 물론, 그에 대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는 부분은 이 책에서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우리의 현상황에 맞게 지혜롭게 그 길을 모색하는 일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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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 숲속의 현자가 전하는 마지막 인생 수업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지음, 토마스 산체스 그림, 박미경 옮김 / 다산초당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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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경제대학 졸업 후 잘나가던 직장 등 세속의 지위를 내팽개치고, 태국 아잔 차 스님의 숲속 사원과 영국 등 유럽에서 17년간 승려 생활을 하다가 환속한 뒤 루게릭 병에 걸려 2022년 1월 생을 마감한 어느 구도자의 영적 여정. 


승려 생활에서 얻은 깨달음뿐 아니라 생활하며 힘들었던 점, 환속의 과정, 내면의 갈등을 솔직히 털어놓는 장면들에서 인간적 진솔함이 느껴졌다. 우울의 나락에 빠졌다가 회복하는 등 자기 고백적 글의 전체 흐름이나 일관된 메시지가 다소 두서없이 느껴졌으나, 진리와 가치 있는 삶을 향한 저자의 열정만은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런 게 없었더라면 애당초 출가하려고 마음먹지도 않았을 터. 


독자들은 저자의 이러한 비상한 인생 행로에 일단은 관심이 끌려 책을 집어들게 된다(스웨덴 방송국에서 그를 인터뷰한 이유도 그것일 테다). 잘 나가던 회사를 그만두고 숲속으로 출가했다고? 17년이나 승려로 생활했다면 우리에게 뭔가 특별한 깨달음을 선사하겠지? 저자가 독자에게 어떤 특별한 위로와 지혜의 메시지를 전할지, 독자들은 일단 주목한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그다지 특별한 메시지를 찾아보기 힘들다. 다 "좋은 말"인데, 그게 마음에 콕 와닿지는 않는다. 내 마음이 닫혀 있는 탓일까. 예컨대 다음과 같은 말들이다. 


"자기 자신을 다정하고 온화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 세상 전체가 반드시 좀 더 좋은 곳이 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모습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보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삶 자체에 다가갈 유일한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다정하게, 다정하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 맞는 말, 좋은 말이지.. 부정할 수 없이 "옳은" 메시지다. 어떤 독자는 이 책의 글이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고 평한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본의나 진심과는 별개로, 이런 글은 글 자체로서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물론, 삶이 글보다 중요한 건 맞다. 삶에 값하지 못하는 위선적이고 허무맹랑한 글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많은 명상 서적이 이런 함정에 빠진다. 저자의 의도는 그게 아니겠지만 "맞는 말, 좋은 말 대잔치" 책에 나는 독자로서 좀 지쳤다. 그나마 책의 핵심 메시지라면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17년간 숲속에서 수행해 얻은 가장 중요한 가르침: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다 믿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p.8)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마음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면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근심이 사라지게 되는 마법의 주문: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p.130)


그래,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매우 특별한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책의 중심 메시지로 삼았다면, 각각의 메시지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어땠을까. 더 이상의 전개 없이 흐름이 뚝 끊어진 채 다음의 '좋은 말'로 넘어가는 글의 전개가 다소 아쉬웠다. 


저자의 깨달음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의 깨달음을 내가 얼마나 이해하고 체득했는지도 자신 없고 부끄럽다. 하지만 "전 세계를 울린 이 시대의 마지막 지혜" "스웨덴 30만부 판매" 등의 대단한 수식어에 비해, 그만큼 새롭고 특별한 울림이 담긴 책으로 보이진 않았다. 글쎄, 그런 메시지를 이런 책에서 구하는 것 역시 나의 욕심일까 . 그 욕심마저 알아차리고 내려놓아야 하는 걸까.. 


다음은 책에서 발견한 오타: 


p.64 밑에서 셋째 줄: 오계(伍戒, 한자 오류) -> 오계(五戒)

p.65 밑에서 아홉째 줄: "아버지가 그어놓은 과도한 근본주의와 아닌 것의 경계선이나 다름없었습니다."(문장 의미 불분명)

p.144 위에서 셋째 줄: "어떤 노력도 통하지 않습니다" -> "통하지 않았습니다."

p.221 밑에서 열째 줄: "다른 사람들도 온전한 사랑을" -> "다른 사람들에게도 온전한 사랑을"

p.261 위에서 아홉째 줄: 대오(大惡) -> 대오(大悟)(한자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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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지식 - 새로운 공부의 세계로 나아가는 사람을 위한 지의 체력 단련법
나가타 가즈히로 지음, 구수영 옮김 / 유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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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2018년 출간 이후 2년 만에 17쇄를 찍었다는데 우리나라에선 그에 훨씬 못 미치는 반응인 듯.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나 개인적으로는 꽤 좋았는데, 사람들은 큰 관심이 없나 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학문과 배움을 주제로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어느 일본 노교수의 충언과 무용담이다. 사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꿋꿋이 자기 길을 걸어온 어느 노학 학자의 당당한 기개가 느껴졌다. 또 오늘날 젊은이들을 향한 노교수의 무한한 애정과 충심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학문하는 장면을 둘러싼 일본의 근대 풍경을 일화적으로 소개하는 것도 재미있다(일본 최초의 노벨상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라든지, 교토대학의 학문적 풍토 등등..) 


저자의 기본 생각은, 대학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가르치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풀어보려고 시도해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대학의 존재 의의다. 왜냐하면 대학 이후에 부딪혀 살아가게 될 실제 사회는 어딜 가나 정답 없는 상황 투성이이기 때문이다. 대학은 이를 위한 연습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입장이다. 


또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만들어내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준비된 인재, 기업이 원하는 인적 자원을 배출함으로써 대학 교육의 질을 보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적 발상이라고 한다. 일본 사회가 이럴진대, 우리나라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것이다. 이 노교수가 한국의 상황을 봤다면 아마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한국은 대학이 이미 취업 준비기관이 된 지 오래이며, 한발 나아가 기업이 아예 대학을 만들고 운영하지 않는가. 


오늘날 젊은이들이 이 노교수의 충언에 얼마나 귀를 기울일지는 의문이다. 세상의 자본주의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모든 것이 자본과 돈의 논리로 돌아가는 가속화된 현실은 그칠 줄 모른 채 속도를 더하고 있다. 이 노교수가 궁극적으로 희구하는 것은 자기 삶을 자기 힘으로 개척해 나갈 줄 아는 본래적 의미의 인간을 키우고 싶다는 열망일 것이다. 이런 바람에 동의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문제다. 아니, 사람들은 이런 생각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다. 먹고 사는 문제,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고, 남에게 뒤처지지 않는 생활수준을 누릴 것인가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 있다. 


자, 이 노교수의 평생에 걸친 충언을 앞에 두고 우리는, 우리의 젊은이와 부모들은, 그리고 우리 대학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책은 이를 위한 작은 생각의 소재로 삼는 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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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볼 수 없는 책 - 귀중본이란 무엇인가
장유승 지음 / 파이돈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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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볼 수 없는 책을 보는 호사를, 특권을 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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