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챙김과 심리치료 - 불교명상과 심리학의 만남
크리스토퍼 거머 외 지음, 김재성 옮김 / 무우수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왜 명상과 심리치료인가 

 명상과 심리치료 모두 인간의 정신과 관련된 문제를 진단하고 그 해결 방법을 모색하며 처방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서로 비교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명상은 동양에서 인간의 정신적 고뇌를 해결하기 위한 오래된 방법으로서, 프로이트 이후 인간의 정신 문제 해결을 위해 심리치료라는 기법을 고심해오던 서양 심리학자들에 의해 치료의 새로운 자원으로 떠오르고 있는 듯하다. 동양의 명상에 대한 서양 심리학자들의 관심의 증가는 동서양의 교류가 보다 활발해진 20세기 이후의 사정을 고려하면 일견 당연해 보인다. 자신의 치료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목적에서 서양 심리치료자들이 동양 명상의 정신과 기법을 도입하여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본 글에서는 인간의 정신적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에 있어 명상과 심리치료가 어떻게 비교될 수 있으며, 특히 심리치료에 적용할 수 있는 명상의 치유적 메커니즘을 '알아차림'이라는 키워드로 살펴보고자 한다.

 

문제의 진단
명상을 인간 정신 문제의 해법으로 보는 불교는 인간의 정신적 문제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는가? 바로 [탐, 진, 치]로 대표되는 무지한 마음(무명, avijja)에서 찾는다. 탐은 좋아서 나 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하는 마음, 진은 싫어서 나로부터 밀쳐내려는 마음, 치는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이다. 그런데 여기서 '치'는 말 그대로 무지한 마음임을 알겠는데, 탐과 진은 뭐가 무지하다는 것일까? 무엇을 모른다는 말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 존재의 실상인 [무상, 고, 무아]를 그대로 알지 못한다는 말일 것이다. 항상 변화하고 있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잘못 알고, 고통인 것을 즐거운 것으로 잘못 알고, '나, 영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에도 그런 것이 있는 줄 잘못 아는 것이 바로 불교에서 정신적 문제(번뇌, kilesa)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세 가지 독심(毒心)이다. 그렇게 잘못 알기 때문에 탐하고 성낸다는 것이다. 성냄은 지금 성내는 대상 말고 다른 것을 탐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탐심과 다르지 않다.

 

붓다, 오직 고통과 그 해결만을 말하다
이런 식의 설명에 우리는 동의하는가? 우리는 이것을 자칫하면 '탐심과 진심, 치심을 갖는 것은 잘못이고 나쁘다'는 일종의 도덕관념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리고 불교에서 강조하는 5계 등의 지계(sila) 역시 이런 '부도덕한' 마음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불교가 탐진치를 경계하고 계를 지킬 것을 권장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존재의 실상인 무상, 고, 무아의 진실을 깨닫게 하는 데 그 참뜻이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그렇게 알지 못할 경우, 5계를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억압하는 장치라고 잘못 이해할 소지가 있다. 붓다는 인간을 '단죄'하려고 하지 않았다. 붓다는 오직 인간 고통의 원인과 해결만을 말하였다. 그것을 치열하게 모색한 결과, 무상, 고, 무아라는 존재의 3가지 실상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면 고통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갈애(tanha)와 집착(upadana)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해법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해법은 탐진치의 독성을 바로 알고 계율을 지키는 바탕 위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붓다는 탐진치와 계율을 이야기한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계, 정, 혜 3학에 대해서도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즉, 계는 몸과 입을 통해 이미 겉으로 드러나 버린 거친 번뇌(vitikkama kilesa)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며, 정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번뇌(pariyutthana kilesa)를 다잡기 위한 것이며, 마지막 혜는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언제든 일어날 준비를 갖추고 있는 아주 미세하고 잠재된 번뇌(anusaya kilesa)를 뿌리째 뽑기 위한 것이다. 말하자면, 세 가지 수준의 번뇌에 대응하여 각각의 번뇌에 보다 효과적인 처방을 제시한 것이다.1) 여기서도 우리는 계를 어떤 도덕관념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붓다는 오직 인간의 고통과 그 해결법을 말한 것이지, 그 외의 다른 것을 말하지 않았음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셈이다.

 

'알아차림' - 인간 고(苦)에 대한 처방
그렇다면 이런 식의 문제 진단에 이어 불교, 특히 위빠사나 명상이 내리는 처방은 무엇인가? 인간의 삼독심으로부터 비롯된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생기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붓다가 제시한 해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알아차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12연기와 4성제, 8정도의 맥락에서 이야기해보자.

우선, 12연기의 [무명 > 식 > 행 > 명색 > 육입처 > 촉 > 느낌 > 갈애 > 집착 > 유 > 생 > 노사]의 윤회의 굴레에서 특히 [느낌 > 갈애]의 순간에 알아차림을 두면 그 느낌이 갈애로 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4성제로 설명하자면 고통인 줄[苦] 모르고 집착하기 때문에[集] 역시 얻는 것은 고통뿐이며[苦], 고통에서 벗어나기[滅] 위한 처방으로 8정도[道]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8정도에서는 지혜 그룹(바른 견해, 바른 의도), 지계 그룹(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직업), 집중 그룹(바른 노력, 바른 알아차림, 바른 마음집중)으로 크게 나누어(계, 정, 혜) 인간 고통의 해결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바른 알아차림이다.2) 인간의 정신적 고뇌 해결의 측면에서 볼 때 12연기, 4성제, 8정도의 가르침을 하나로 압축한다면 단연코 '알아차림 혹은 마음챙김(sati)'이다

 

범박한 해법
인간 고의 원인에 대한 이런 식의 진단과 처방이 심리치료를 하는 서양 심리학자들에게는 어떻게 들릴까? 아마도 그건 너무 범박한3) 해법이라고, 인간의 무의식이나 개인의 다양하고 특수한 삶의 배경과 정신 역동을 고려하지 않은 '무딘' 해법이라고 하지 않을까? 혹은 지나친 일반론이라고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불교는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계율을 정해 놓았다고까지 할지 모른다(이점에 대해서는 위에서 이미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불교는(명상은) 각 개인의 정신적 고통의 구체적인 내용—개인의 배경, 정신 역동에 따라 엄청난 다양성을 지니는—보다는 인간의 정신적 고통에 내재한 힘(에너지, 욕구 등)의 '방향성'4) 혹은 '양상'에 주목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의 다양한 고통이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거기 내재한 어떤 힘의 메커니즘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서양 심리치료가 불교의 인간 고에 대한 인식 혹은 진단을 너무 범박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서 비롯되는 것 같다.5) 그러나 오히려 이런 식의 해법은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다 낚시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는 점에서 보다 효과적이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내용이냐 양상이냐' 부분에서 보다 자세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생산적 논의를 위하여
이런 식의 진단이 범박한 것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그 범박함 때문에 문제 해결이 효과적이지 못함을 보여야 할 것이다. 많은 심리치료자들이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명상이 지닌 심리치료적 한계와 관련한 맥락에서 주장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자아가 먼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명상은 위험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나의 경험으로 볼 때 자아가 확립되지 못하여 명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자아강도가 약한 사람은 주위에 흔치 않은 것 같다.6) 그리고 그런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 맞추어 명상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명상의 심리치료적 적용에 관한 생산적인 논의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듯 보인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어떤 명상법으로 어떻게 명상하고 있느냐, 즉 제대로 명상하고 있느냐이다. 즉, 자아의 강도가 문제가 되어 명상이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를 논할 것이 아니라—그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속하므로 논의의 실익이 별로 없음을 위에서 말하였다—'제대로 하지 않아서' 효과가 없는 것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명상의 효과성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명상 수행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가 관건이며, 우리는 그에 보다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제대로 명상 수행을 하여 일정한 성취에 도달한 경우에 한하여 그것의 심리치료적 적용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7)

 

올바른 명상수행의 기준
명상 수행을 제대로 하느냐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이 올바른 불교의 가르침인가를 확립해야 한다. 그런 다음 실제로 어떤 불교 전통이 그 가르침을 지금 현재에 실천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가르침과 그것을 실천하는 이에 대해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8) 불교는 붓다의 깨달음 이래 2,500년 동안 그 고유한 가르침이 4성제, 8정도, 12연기의 가르침으로 면면히 이어져왔으며9) 하나의 완정한 삶에 대한 관점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전통이 가장 원본에 가깝게 유지되고 있는 것은 역시 미얀마 등지를 위주로 한 테라와다(Theravada) 불교라고 할 수 있다. 테라와다 불교를 접해본 많은 이들이 이 전통이 위빠사나 수행을 중심으로 한 '생생하게 살아 있는' 불교의 전통임을 이야기한다.

명상의 심리치료적 적용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처럼 명상이 속해 있는 구체적인 불교 전통의 맥락을 흐리거나 왜곡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명상을 지나치게 실리적 목적을 위한 테크닉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명상의 본질에서 멀어질 소지가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명상과 심리치료
보다 구체적으로 명상과 심리치료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았다.

명상

심리치료


1. 정신 병리는 누구나 갖고 있는 것

2. 초(超) 인지적 과정

3. 자각 능력 증대

4. 문제와 맺는 관계(양상) 중심의 해법

5. 사례 및 상황에 개의치 않음

6. 보다 창의적, 주체적

7.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신뢰


1. 특정 정신 병리를 갖고 있는 사람만을 대

2. 인지적 과정

3. 해석 능력 증대

4. 내용 중심의 해법

5. 사례 및 상황별 서로 다른 전략

6. 보다 기법적

7. 특정 이론에 바탕한 해법(정신분석, 행동주의 등)


근본 예방책으로서의 명상
우선 1번을 비교해보면, 불교 명상은 정신병리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으로 본 반면 심리치료는 특정한 정신 병리를 갖고 있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명상에서 말하는 정신병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탐진치, 무지, 무명을 말하는 것으로 심리치료에서 말하는 기능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에 한한 정신병리와 엄연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차이가 인간 고의 문제에 대한 양자의 태도 차이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우선, 별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문제시 했다는 점에서 불교는 인간 존재와 고통에 대해 매우 섬세하고 철저한 진단을 내렸다. 자그마한 싹이라도 남겨두면 무성한 잡초로 자라나고 말 것이라는 인식이다. 명상은 마치 기독교에서 인간의 원죄를 말하듯이, 인간이란 존재는 계, 정, 혜의 3학을 부지런히 갈고닦지 않으면 흐르는 강물에서 노를 젓지 않은 배가 하류로 떠내려가듯이 고통에 빠지게 되는 것으로 본다. 한편 심리치료는 정신의 기능적인 이상을 호소하는 때에야 비로소 작업에 착수한다. 이런 점에서 명상은 문제의 발생을 사전에 차단하는 예방적 성격이 보다 짙다고 하겠다.

내용이냐 양상이냐
2~5번까지는 모두 문제의 '내용 대 양상'의 틀로 설명할 수 있겠다. 위에서 보듯이 명상은 심리치료에 비해 당사자가 자신의 문제와 맺는 관계 양상에 보다 주목한다. 그것은 많은 학자들이 말하듯 초인지적적(meta-cognitive) 과정을 다루며 당사자의 문제에 대한 해석 능력보다 자각을 증대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해석은 내용에, 자각은 양상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고통을 다루는 데 있어 문제의 내용을 다루는 것—심리치료가 하는 일—이 적절한가, 아니면 모든 고통에 내재한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양상을 다루는 것—명상이 하는 일—이 효과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내용과 양상이라는 이 두 차원은 어느 사태에든 본질적으로 수반되는 두 차원이다. 어느 한 차원이 우월한 것이 아니라 두 차원 모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차원 모두 적절하게 다루어주는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양의 심리치료에서 자각과 양상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으로 게슈탈트 심리치료나 ACT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명상은 인간이 처한 구체적 문제 상황은 모두 다르지만 그 문제의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메커니즘은 동일하다고 보기 때문에 문제 중심적 대응 방식보다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주체) 중심의 접근법을 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명상을 통해 사람의 바탕 자체가 질적으로 변화될 수 있으며, 그럴 때 각 개인이 처한 특수한 상황들은 그 사람이 명상수행을 통해 터득한 지혜로써 능히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명상은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명상과 심리치료에 대한 이런 비교를 통해 인간 고의 문제에 대한 보다 효과적인 해결을 양자가 함께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註 

1) 우 빤디짜 사야도(보리수선원 법문, 2008. 12) 
 

2)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12연기는 인간 번뇌의 원인과 발생 과정에, 8정도는 그 해결방법에 보다 무게중심을 둔 설명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4성제는 문제의 원인과 해결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3) 범박하다 (泛博/汎博-) [형용사]데면데면하여 구체적이지 못하고 범위가 넓다.  
 

4) 여기서 '방향성'이란 탐심이라는, 나 쪽으로 끌어당기려는 힘, 진심이라는 나로부터 밀쳐내려는 힘처럼 '나, 자아'를 중심으로 한 힘의 방향을 가리키기 위한 용어다.   

5) 이것은 마치 동양의 한의학이 인간의 모든 질병을 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진단하는 것과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6)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극심한 정신분열증 환자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명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고 한다(Boorstein). 

7) 이것은 마치 3류 선수를 올림픽에 출전시켜 메달을 따지 못했다고 하여 그 선수에게 문제가 있다고 비난하는 것과 비슷하다. 

8)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수행방법에 관한 문제는 각 개인의 기호나 신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적어도 수행방법에 관한 한, 필자의 기호와 신념에 따라 이야기하는 것일 뿐 특정 전통이 완벽하게 옳은 것임을 주장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9) 불교의 가르침이 불교 이전의 가르침과 가장 다른 것은 '무상, 고, 무아'의 진리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리를 알기 위한 수행법이 바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위빠사나 수행법이다. 붓다가 등장한 것은 오직 위빠사나 수행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빤디짜 스님, 보리수선원 2008년 12월 법문). 붓다 이전에도 사마타 등의 수행법은 많이 있었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씨알의 소리 2009.3.4 - 창간호
함석헌기념사업회 엮음 / 함석헌기념사업회(월간지)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창간호는 아니더군요. 창간호인 줄 알고 구입했는데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의 지도 - 사야도 우 조티카의 수행지침
우 조티카 사야도 지음, 박은조 옮김 / 연방죽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 조티카 사야도는 <여름에 내린 눈>으로 처음 알게 되었다. 진지한 구도 정신과 한없는 겸손함, 수행의 바탕에서만 나올 수 있는 명징하고 절제된 언어... 나에게는 수행문학의 백미로 읽혔다(보리수선원과 한언 두곳에서 출간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보리수선원의 번역이 훨씬 좋았다).  

오랜만에 스님의 새 책이 나왔다기에 눈독을 들였는데 책 가격이 너무 비쌌다. 근데 오늘 동네 도서관에 갔더니 이 책이 떡하니 두 권씩이나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얼씨구나 하고 집어들었다. 그런데 책을 한장 한장 넘기며 느낀 것은 -내용은 차치하고- 아무도 이 책을 보지 않았다는 거였다(페이지를 넘기는 손의 감각으로 알 수 있다). 그만큼 일반인들에게 인기가 없는 주제이리라.  

그렇다. 이런 책은 인기가 없다. 재미 있는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먹고사는 데 딱히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그렇다고 법정 스님처럼 저자가 유명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꼭 독자들을 탓할 일만도 아니다. 문제는 독자들이 이런 책이 자기 자신의 실질적인 삶에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 그 "접점"을 쉽게 찾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그 접점을 찾아줄 수 있는 역할이 요청된다. 무엇과 무엇의 접점인가? 聖과 俗의 접점, 이상과 현실의 접점, 가르침이라는 보편과 나라는 특수의 접점이다. 그래야 이 책의 메시지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聖, 이상, 가르침이라는 보편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가 일상에서 거의 잊고 지내는 자각(awareness) 혹은 의식(consciousness)이 갖는 보편적 차원에 관한 것이다. 바로 이 책에서 다루는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sati)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의 대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 보지 못하는, 나의 의식의 숨겨진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 한다고 생각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밥먹고 회사 가고 일하고 퇴근하고 사람 만나고...이런 일들을 모두 내가 알면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간혹 내가 마치 "기계"처럼 아무 생각없이 하루를 지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가. 그리고 삶이 꼭 왜 이렇게 지리멸렬해야만 하는지, 해결책은 없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은 없었는가. 이런 문제의식을 가져본 이라면 삶의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사회가 질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삶의 이런 숨겨진 차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거기서 얻은 지혜를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을 때 삶은 아주 피상적이 되기 쉽다. 요즘 모두들 경제, 경제 하는데 과연 지금의 경제 문제를 어떤 시스템이나 물질적 차원에서만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 경제를 운용하는 주체인 인간의 마음을 돌보고 치유하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무절제한 탐욕과 분별없음이 빚어낸 경제적 폐해에 대한 해결은 요원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불교] 불교 스승들의 가르침 (Budhhism reminders from master)
    from 월풍도원(月風道院) - Delight on the Simple Life 2011-08-13 09:29 
    여기에 적어 놓은 불교 스승들의 가르침은 메뉴판과 같습니다.맛집에 대한 소문을 듣기만 하다가, 이제서야 식당에 들어와 메뉴를 펼친 것이죠.하지만 맛이 어떤지, 먹고 나면 소화가 잘 될지는 알지 못합니다.그래서 이곳에 적인 메뉴들을 하나씩 먹어보고,맛은 어떤지 나에게 맞는지 시험을 해 보아야 합니다.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직접 먹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까...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 위기의 시대를 돌파해온 한국인의 역동적 생활철학
탁석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외국과의 교류가 잦아지는 최근, 한국적인 것은 무엇이고, 한국인의 독특한 점은 무엇일까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이 책이 눈에 띄어 집어들었다.

저자는 현대 한국인의 삶의 양식을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의 틀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들의 구체적 방법론으로 실용주의를 든다. 그런데 이들 '~주의'라는 단어만으로 저자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무리가 있어 보인다. 책 속에서 저자의 부연설명을 직접 들어야 옳은 이해와 제대로 된 비판을 할 수 있겠다.

저자에 따르면 인생주의는 인본주의와는 다르다. 일이나 작품이 주제가 아니라 개인의 구체적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한국인의 인생주의의 뜻이다. 저자는 의사나 변호사 등 전문직을 소재로 다룬 드라마를 예로 들어 미국 드라마와 한국 드라마의 차이를 보인다. 미국 드라마에서는 의사, 변호사로서의 전문적 일이 드라마의 초점이 되는 데 반해 한국 드라마는 그것들이 개인의 삶을 비추는 하나의 배경으로밖에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래서 한국 드라마가 더 재미있다. 전문성이나 사실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리고 허무주의라는 용어도 설명이 필요하다. 저자가 말하는 허무주의는 세상과 인생이 허무하기 때문에 절망하고 포기하는 비관적 허무주의가 아니다.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인데...라는 긍정적 허무주의다. 건강한 허무주의다. 그래서 저자는 이 허무주의를 현세주의, 인생주의에 대한 일종의 '보험'이라고 표현했다. 적절한 비유다.(더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고하시길...)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되비추어보는 데는 취약하다. 적어도 의도적인 노력을 하지 않은, 그냥 내버려둔 상태에서는 그러하다. 이것은 한국인인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은 누구이며, 어떻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살아가면서 그런 것들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내가, 우리가 관찰의 주체이자 동시에 대상이기에 결코 쉽지 않다. 저자는 이런 점에서 독자들에게 도움을 준다. 책은 한국이라는 시공간을 함께하는 나와 나의 한국인 동시대인들에 대한 의문에 일정한 설명 틀로 그 궁금증을 부분적으로나마 해소해주었다.

그러나 이런 작업이 지닌 자기 폐쇄적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한국인은 '좋음'을 추구하는 실용주의를 지녔다고 말한다. 여기서의 '좋음'이란 '지금 상황에 적절함, 쓸모 있음' 정도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다. 저자는 '좋음'은 '진선미'의 가치보다 상위 개념이라고 한다. '좋음' 앞에서는 '진선미'도 별로 맥을 못춘다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인에게는 그렇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저자는 실용주의의 '구조'를 말한다. 그 구조란 '~에 유용한(쓸모 있는) 것은 좋다'라는 구조이다. 인용부의 '~'에는 무엇이든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 '~' 자리에 '인생의 즐거움'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앞으로는 '사색의 즐거움(159쪽)'이나 '영혼의 정화(150쪽)'가 들어갈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구조이기 때문에 시간적 지속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마치 영어 문장의 내용은 바뀌더라도 '주어 + 동사 + 목적어'라는 형식(구조)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처럼(151쪽).

그러나 이 '좋음'에 대해 저자는 자신의 입장을 좀더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저자는 이 책에서 '좋음'을 무채색의 중립개념인 듯 사용하고 있지만 독자인 내가 읽기에 이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즉 '~'의 자리에 지금은 '인생의 즐거움'이 자리잡고 있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가 말하는 좋음이란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개념이 아닐까 한다. 본능에는 동물적 본능뿐 아니라 존경받고 인정받고 싶은 사회적 본능까지도 포함되는데, 내가 보기에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좋음'은 이런 미세하고 포괄적인 본능을 지금 현재 상황에 적절하게 충족시키는 것 정도가 아닐까 한다. 이런 구조의 지속성에 대해서도, 나는 그것이 그것 자체로 어떤 고유한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충실하기 때문에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과연 무엇을 위한 지속인가를 우리는 또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한국인은 지혜의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한국적 지혜의 속성은 존재한다. 의식주 등 생활의 다양한 측면에 베인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지혜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우리 조상들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느낀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좋음'은 그런 한국적 지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 같다(저자는 '문화에는 DNA가 없다'며 단절에 의해 문화는 불연속적으로 진화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다소 과격한 주장이다. 내 몸과 생각, 느낌 속에는 수천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내 조상의 DNA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지혜에는 언제나 평정과 절제, 자기반추와 숙고가 녹아 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좋음'에는 이런 것들이 빠져 있는 것 같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 본능의 효율적 충족을 좋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혜와는 거리가 멀다. 거기에는 발전과 향상이 존재하기 힘들다. 인류 보편의 문제와 가치에 대한 고민이 없다. 한국인에게 그런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한국인은 지혜의 민족이라고 믿는다. 그런 것들이 분명히 잠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용주의라는 저자의 설명 틀로는 인류 보편의 문제와 그 해결에 대한 한국인의 기여가 충분히 설명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의 '거리'를 제공해준 저자와 책에 감사한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줄여야겠다. 그리고 더 생각해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과 서 - 동양인과 서양인은 왜 사고방식이 다를까 - EBS 다큐멘터리
EBS 동과서 제작팀.김명진 지음 / 예담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동양인은 전체를 보고 서양인은 부분을 본다...등 동양인과 서양인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놓았다. 굳이 우열을 가리자는 건 아니지만 내용으로만 본다면 동양의 판정승(?) 같다. 그런데 이런 연구를 수행한 사람이 누구냐를 볼 때 동양의 섣부른 판정승이라 단정짓는 것은 위험하다. 이 연구 자체가 서양의 지식 생산기지인 대학이라는 체제 속에서, 특히 심리학이라는 근대 과학의 원리와 지도 아래 진행된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동양인 교수도 나온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미국에서 공부하는 교수들이다). 누가 이런 연구를 왜 애시당초 기획을 했고 구상을 했느냐에 있어 동양이 주도권을 뺏긴 것이라 본다면 너무 경쟁적인 시각일까?

동양의 판정승이라고 단정짓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현대 대한민국이라는 '동양'이 얼마나 책에서 주장하는 동양적 가치를 잘 실현하고 있으며 또 그에 따라 조화롭고 전인적인 삶을 실제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내가 볼 때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지금의 동양은 온전한 동양이 아니라 서구 근대화에 의해 '변형된 동양'이다. 제도, 문물 등 많은 부분이 서양의 수입물로 채워져 있으며 젊은 세대들은 세련됨, 현란함, 독립적, 시각적, 속도, 개인 등의 표현으로 대변되는 서양적 가치를 더 우수한 것으로 생각하며 숭앙하고 있다.

책과 다큐에서 내세운 우수한 동양적 가치를 실제로 구현하며 사는 '동양적 행복'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누렸으면 좋겠다. 그를 위해 필요한 지혜 또한 우리의 동양적 사유방식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하며...

실제로 서양 사람들은 이 책에서 얘기한 동양적 사고방식을 자기네들이 갖추지 못한 시각, 인류의 보다 높은 지혜의 완성을 위한 소중한 자산으로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작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실현하며 살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까?

이 책을 통해 동양과 서양, 그 둘의 만남의 양상과 의미, 그리고 나아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서양을 맞이해야 하는가에로 논의가 이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 동양의 것이라 무조건 고집하고 서양의 것이라 무조건 거부하는 자세(혹은 그 반대)보다 무엇이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하고 의미 있는 것인지 판단할 줄 아는 지혜를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한편, 동양(인)에게는 동양적인 '무엇'이, 서양(인)에게는 서양적인 불변의 특성(property)이 있다는 생각 자체도 서양적 단견일지 모른다(이는 위에서 얘기했던, 서양 학자들이 쥐고 있는 연구의 주도권 문제와도 관련이 있겠다). 모든 것은 주변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겨나고 유지되다가 소멸되는 일종의 '과정(process)'일 뿐이라는 것이 더 동양적 지혜에 가까울 것이다. 혹시 한국에 오래 산 미국인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종종 그가 미국 사람보다 한국 사람에 더 가깝다는 느낌을 직관적으로 가져본 적이 있다.(미국에 오래 산 한국 사람도 별로 한국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사람은 서양보다 동양에 더 가깝다. 결국 동양과 서양에 귀속되는 속성, 특질, 유전자가 있다기보다 문화라고 일컫는 주변 환경에 의해 끊임없이 형성되고 유지되다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유연한 태도로 그런 흐름을 타고 넘어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