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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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동경하고 원하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첫 장에서부터 느껴진 책의 힘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내 몸이 앉아 있던 책상과 의자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실제로 내 몸이 나로부터 분리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존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나의 영혼 뿐 아니라 나를 나이게 만드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이 놓여 있는 바로 그 책상 앞에 머물러 있었다.

"좋은 책이란 우리에게 모든 세계를 연상시키는 그런 것이야"
"책은 실제로 책 속에 존재하지는 않으면서도, 책에 쓰여 있는 말을 통해 내가 그 존재감과 지속성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의 일부분이야"
"세상의 정적 또는 소음으로부터 벗어난 그 무엇일 수도 있지. 그렇지만 정적과 소음도 그것 자체는 아니야"
"좋은 책은 존재하지 않는 것, 일종의 무(無), 일종의 죽음을 설명하는 글이지... 그렇지만 단어들 너머에 존재하는 나라를 글과 책 밖에서 찾는 것은 헛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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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책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0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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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연수 작가의 책 <청춘의 문장+>를 읽다가 ‘페르난두 페소아’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김연수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라길래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페소아의 대표작 <불안의 책>을 빌렸다. 몇 페이지 안 넘겼지만 난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나를 공명(共鳴)시키는 문장들을 찾았다고... 도서관에 빌린 책을 반납하고 곧바로 책을 구입하였다. 이 책의 문장들을 소유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기 때문이다. 책이 다음날 도착하자, 나는 곧바로 말없이 책을 들고 책장을 넘겼다.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나에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충격으로 다가왔다. 페소아의 문장에는 진한 커피 같은 고독과 깊은 슬픔이 담겨있다. 이 문장들을 한번에 쭉 읽기는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10년 전 <데미안>을 읽은 이후로 문장이 내 마음을 감싸주는 기분은 처음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의 문장들을 마치 주기적으로 티 타임을 가지듯, 천천히 읽고 있다. 평소에는 왠만큼 두꺼운 책도 2~3일이면 다 읽지만 이 책만큼은 다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
이 책은 고독을 느끼고 싶은 이, 그리고 슬픔에 빠진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고독을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 페소아의 이 책은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대변인으로써, 슬픔에 빠진 이들에게는 그들 대신 울어주는 시인으로써 다가올 것이다.

인간 영혼의 한평생은 고작 그림자 속 움직임에 불과하다. 우리는 의식의 여명 속에 살면서 우리가 누구인지, 혹은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저마다 허영을 품고 살며, 실수를 하는데 그 실수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공연의 막간에 잠깐 진행되는 그 무엇이며, 가끔 어떤 문을 통해 기껏해야 무대배경에 불과한 것을 훔쳐본다. 세상은 밤에 들려오는 목소리처럼 혼란스럽다.

(중략)

나는 여기저기를 뒤지고 있지만,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모르고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 같다. 아무도 없는데 우리는 혼자 숨바꼭질을 한다. 어딘가에 이 모두를 초월하는 속임수가 있고, 우리가 단지 들을 수만 있는 가변적인 신성이 존재한다.
그래, 이 글들에 담긴 초라한 시간들, 작은 위안과 환상, 목적지로 가는 길을 잃은 커다란 희망들, 닫힌 방 같은 상처, 어떤 목소리들, 깊은 피로, 쓰이지 않은 복음서를 나는 다시 한번 읽어본다.
우리 모두에게는 허영이 있다. 그 허영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영혼을 가진 타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는다. 나의 허영심은 몇 장의 종이, 몇 구절의 글, 몇 가지 의구심이다.

언제나 똑같고 변화 없는 내 삶을 지속하는 무기력, 결코 변화 없으리라는 사실을 덮고 있는 표면에 붙은 먼지나 티끌처럼 남아 있는 이 무기력을 나는 일종의 위생관념의 결여라고 이해할 수 밖에 없다.
몸을 씻듯 운명도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듯 삶도 갈아줘야 한다. 먹고 자는 일처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리해야 하고, 그것을 우리는 위생이라고 부른다.
스스로 위생적이지 못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한편 둔감하게 늘 똑같은 상태로 사는 이유가 그것을 원해서도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어 순응했기 때문도 아니고, 지성에 내재된 역설로 인해 자의식이 무뎌졌기 때문인 사람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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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이 벤치에 앉아 있다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27
자크 프레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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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 떠오르는 시.
절망은 우리의 일상 속에,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으며 우리에게 끊임없이 손짓한다. 그는 달콤하게 속삭인다. 좋아했던 사람들과의 추억, 지금은 떠나간 사람들의 소식을 들려주겠다고, 혹은 지금 내 어려움을 이겨낼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그의 속삭임에 그의 옆에 앉을 때마다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게 된다. 일상이 흑백영화 같이 회색빛으로 물들어 버린다. 하지만 나는 그 속삭임이 가져올 결과를 알면서도 매번 그의 달콤한 속삭임에 마음이 설렌다. 이번만은 그의 말이 사실 일 것이라고 믿으면서...

절망이 벤치에 앉아 있다

작은 광장의 벤치에
어떤 사람이 앉아
사람이 지나가면 부른다
그는 외알 안경과 낡은 회색 양복 차림으로
가느다란 잎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다
그리고 사람이 지나가면 부른다
아니 그냥 손짓을 해보인다

(중략)

그가 당신에게 손짓을 할 터이니
당신은 그의 곁에 가 앉을 수밖에
그러면 그는 당신을 쳐다보고 미소 짓고
당신은 참담하게 괴로워지고
그 사람은 계속 웃기만 하고
당신도 똑같은 미소로 웃음 짓고
미소를 지을수록 당신의 고통은
더욱 참담해지고
고통이 더할수록
더욱 어쩔 수 없이 웃게 되고

(중략)

당신은 거기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다
당신은 안다 당신은 안다
이제 다시는 저 아이들처럼
놀 수 없음을
이제 다시는 저 행인들처럼
조용히 지나갈 수 없음을
당신은 안다
이제 다시는 저 새들처럼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갈 수 없음을
당신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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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행하는 왕 한길그레이트북스 134
마르크 블로크 지음, 박용진 옮김 / 한길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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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후기부터 프랑스와 영국의 왕들은 연주창 환자들에게 손을 대서 치료를 하는, ‘손대기 치료’를 시행하였다. 중세 시대의 수많은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으로 끝날 것 같은, 이 치료는 무려 18세기까지도 지속되었다. 금방 효과가 없다고 들통날 것 같은, 이러한 치료법이 어떻게 수 백년간 지속될 수 있었는가?
이는 프랑스와 영국 왕정의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놀랍게도 이러한 손대기 치료는 다른 기독교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으며, 오직 프랑스와 영국에서만 유행하였다. 이들 서유럽 국가에서는 왕에게 단순히 정치적 지배자를 넘어 사제로서의 성격도 부여할려고 하였다. 이는 당시 교회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는데, 교회 입장에서 교회권은 왕권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었고 ‘신의 기적’은 교회의 영역이지, 왕의 능력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이후 교회의 힘이 약화되고 절대왕정의 시대가 오면서, 이러한 손대기 치료는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당시 지식인들 중에는 이러한 치료가 효과가 없음을 아는 이들이 많았지만, 대중들의 믿음과 기대를 바꾸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영국의 경우 호국경 크롬웰이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국왕의 영역이었던 손대기 치료를 중단시켰으나, 크롬웰 사후 왕정복고가 되면서 다시 ‘손대기 치료’가 성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손대기 치료도 점점 대중들의 지식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그리고 절대왕정이 몰락함에 따라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영국은 하노버 왕조가 시작되면서 ‘손대기 치료’가 사라졌고, 프랑스는 대혁명으로 부르봉 왕실이 몰락하면서 ‘손대기 치료’가 사라졌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다시 프랑스 왕실이 복고되자, 샤를 10세는 이 구시대적인 유물을 다시 꺼내들려고 하였으나 그때는 지식인들은 물론, 대중들의 호응도 좋지 않았고 결국 1825년을 끝으로 ‘손대기 치료’는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고만다.
‘손대기 치료’는 언뜻 보면 주목할 게 없어 보이는 민간요법이지만, 마르크 블로크는 이 민간요법에서 중세 후기, 그리고 절대왕정 시대 서유럽의 사회상과, 왕권과 교권의 대립까지 도출해내었다. 범인은 어떤 현상을 볼 때 현상 그 자체 밖에 못 보지만, 마르크 블로크는 현상 그 자체를 넘어 현상 뒤에 숨겨진 진실까지 보았고, 이것이 그를 ‘역사학의 대가’로, 또 그의 저서를 고전으로 남게 만든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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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24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김한민 옮김 / 민음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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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개의 이명(異名)만큼이나 다채로운 개성, 감수성을 가진 시집... 페소아의 작품은 읽을 때마다 낯설고 신선하게 느껴진다
특히 어떠한 것의 간섭도 없이, 의미 부여도 없이, 오직 사물과 순수하게 만나고 느끼고 싶은 그의 소망이 강하게 느껴지는 시집이었다.

내겐 철학이 없다, 감각만 있을 뿐...
내가 자연에 대해 얘기한다면 그건, 그게 뭔지 알아서가 아니라,
그걸 사랑해서, 그래서 사랑하는 것,
왜냐하면 사랑을 하는 이는 절대 자기가 뭘 사랑하는지 모르고
왜 사랑하는지,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법이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순진함이요,
모든 순진함은 생각하지 않는 것...

어쩌면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
오른손을 들어, 태양에게 인사한다.
하지만 잘 가라고 말하려고 인사한 건 아니었다.
아직 볼 수 있어서 좋다고 손짓했고, 그게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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