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0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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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이 죽으면
선인장이 하나 생겨나요

그 선인장이 죽으면
사람 하나 태어나지요

원래 선인장은 널따란 이파리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이 가시가 되었지요
찌르려는지 막으려는지
선인장은 가시를 내밀고 사람만큼을 살지요

아픈 데가 있다고 하면
그 자리에 손을 올리는 성자도 아니면서
세상 모든 가시들은 스며서 사람을 아프게 하지요

할 일이 있겠으나 할 일을 하지 못한 선인장처럼
사람은 죽어서 무엇이 될지를 생각하지요

사람은 태어나 선인장으로 살지요
실패하지 않으려 가시가 되지요

사람은 태어나 선인장으로 죽지요
그리하여 사막은 자꾸 넓어지지요

사랑이 끝나면 산 하나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퍼다 나른 크기의 산 하나 생겨난다.

산 하나를 다 파내거나
산 하나를 쓰다 버리는 것
사랑이라 한다


- <사랑의 출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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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43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건수 옮김 / 민음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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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시에서는 바다가 느껴진다.
잔잔하며 고요하지만 끊임없이 물결 치는 바다를 떠오르게 한다. 바다는 매번 볼 때마다 새롭다. 그 물결은 너무나 변화무쌍하기에 나를 지루하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물결을 파도를 이루어 부딪혀 부서지는 순간을 보다보면 우리들의 삶이 마치 지극히 사소한 문제인 것처럼 느끼게 해주고 슬픔을 잊을 수 있게 위로해준다.
프로스트의 시는 그런 바다와 같은 시이다. 그의 시에는 이별과 실연의, 아픔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이에 우울하고 절망하기 보다는 사랑했을 때의 황홀함을 기억하려는 시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를 읽으며 잔잔한 파도와 같은 위로를 느낄 수 있었다.

바다가 우리의 상상력을 새롭게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잊게 하기 때문이다. 바다는 인간의 마음처럼 무한하지만 무력한 열망이고, 끊임없이 추락하는 도약이며, 달콤한 한탄이기에 우리를 흥겹게 한다. 바다는 음악처럼 매혹적이다. 인간의 말과는 달리 음악은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사람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지만, 우리네 마음의 움직임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정(心情)은 영혼의 움직임이라는 파도와 함께 솟아올랐다가 급격히 떨어지고는 하는데, 바다와의 내밀한 조화 속에서 위로를 받으며 자기 자신의 슬픔을 잊을 수 있다. 이렇듯 세상만사의 운명과 함께 뒤섞여 있는 바다.

인생이란 상상 속의 애인과 같은 것. 우리는 그녀를 꿈꾸고, 그녀를 꿈꾸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 그녀를 실제로 체험하려 애쓰지 말 것. 이는 이야기 속의 소년처럼 갑자기는 아니지만 어리석음 속으로 몸을 던지는 꼴인데, 인생에 있어 모든 것은 눈치챌 수 없는 뉘앙스에 의해 서서히 망가지기 때문이다. 10년 후에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꿈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부인하고, 소처럼 그 순간 뜯어먹을 풀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과 결합해야만 비로소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불멸성이 생겨날 수 있음을 그 누가 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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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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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사려깊은 사람’이라는 식으로도 나를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따뜻한 사람이지만, 당신보다 당신의 절망을 경청하고 있는 나의 예의바름을 더 사랑한다는 점에서 무례한 사람이다. 나는 오만한 사람을 미워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의심하는 사람이다. 나는 모두가 좋아하는 그림 앞에서 내가 그동안 그것을 ‘그다지’ 좋아한 것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람이다. 나는 자신에 대해서는 ‘당신들이 모르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타인에 대해서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아도 끄덕이는 사람, 나는 불안한 수다쟁이, 나는 나의 이야기,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사람, 나는 나의 각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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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시대의 의사 - 야스퍼스의 의철학과 심리치료 비판
카를 야스퍼스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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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이 의학에 도입되면서,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따로 치료법이 없던 질병들에도 의사들은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졌지만, 역설적으로 환자들은 어느 때보다 의사들에게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자연과학적 의학은 그동안 의학을 구성했던 부분들에서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 특히 철학을 몰아내면서 더욱 이러한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 야스퍼스는 이러한 현상을 경계하면서 의사에게 있어서 철학이 얼마나 중요한 소양인지 강조한다. 그가 무려 2번이나 인용한 히포크라테스의 명제에서 그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자가 되는 의사는 신에 가깝다 (ίατρός φιλόσξφος ίσόνες)”

인간에게는 질병을 앓는다는 것이 매우 편해졌다. 폐렴은 페니실린 주사를 놓게 되면서 사라졌지만, 그러나 환자는 신경증적 장애에 빠졌다. 왜냐하면 폐렴을 앓는 의미에 대해 답이 구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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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일기 (리커버 에디션)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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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를 잃어버린 다음 날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
슬픔을 표현하는 솔직하고 간결한 문장들, 하지만 슬픔을 표현하는데 화려한 문학적 비유들은 모두 거짓되고 쓸데없는 겉치레 일 뿐...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문장들이 오히려 마망에 대한 사랑을, 그리고 그녀를 잃어버린 후의 상실감을 여과없이 전해준다. 슬픔은 시간도 지워주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그 슬픔을 숙명처럼 짊어지며 살아갈 뿐이다.

애도: 그건 (어떤 빛 같은 것이) 꺼져 있는 상태. 그 어떤 ‘충만’이 막혀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애도는 고통스러운 마음의 대기 상태다: 지금 나는 극도로 긴장한 채, 잔뜩 웅크린 채, 그 어떤 ‘살아가는 의미’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말이 있다. (마담 팡제라가 내게 하는 말):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차츰 나아지지요 - 아니, 시간은 아무것도 사라지게 만들지 못한다: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만을 차츰 사라지게 할 뿐이다.

얼마 전에 어머니를 잃어버린 조르주 드 로리스에게 보내는 프루스트의 편지

"제가 지금 당신에게 해드릴 수 있는 말은 한 가지 뿐입니다. 아직은 불가능하지만 이제 당신은 행복한 순간들을 만나게 될 겁니다. 어머니가 아직 당신 곁에 있었을 때, 당신은 그녀가 존재하지 않게 될 오늘과 같은 시간만을 생각했겠죠. 그리고 지금 당신은 그녀가 여전히 곁에 있었던 지난날만을 생각하고 있겠죠. 그런데 과거 속으로 내던져져 있는 일은 참으로 잔인하지만, 그 일에 서서히 습관이 되면, 당신은 차츰 감지하게 될 겁니다. 당신의 어머니가 아주 부드럽게 새로운 삶으로 깨어나 당신에게로 되돌아와서, 그 분이 머물렀던 그 자리에, 당신의 곁에, 그 어떤 빈 곳도 남기지 않고 다시 존재하게 될 거라는 말이죠.
물론 지금은 그런 일이 아직 불가능합니다. 침착하세요. 그리고 기다리세요, 그러면서 당신을 어느 정도 바로 설 수 있도록 만드는, 저 수수께끼 같은 힘이 찾아올 때까지. 제가 여기서 ‘어느 정도’라고 말하는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잃어버린) 좌절감은 전부 사라지지 않은 채로 여전히 남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당신도 이제 알게 될 겁니다. 결코 위안 같은 건 찾을 수 없으리라는걸. 날이 갈수록 더 많이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걸, 이 사실을 깨닫는 일이 다름 아닌 위안이라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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