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어둠
조승리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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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가 없는 시작

새댁, 뭔 일인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니었다 생각하는 날이 올 거여.

그만 울고 우리 집 넘어가 수박이나 썰어 먹자고. 수분을 다 빼냈으니 그만치 채워야 기운이 나지.”

인생을 꽤 살아본 자 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며 내 인생의 절반을 살아본 나도 조금씩 깨닫고 있는 문장이다. 어떤 일이든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지니 실컷 울고 수박으로 수분을 채우면 되다니 얼마나 간단하면서 통쾌한 문장인가!

2. 내 안의 검은 새


“내 새끼... 나 살아 있는 한은 내가 네 눈이야.”

다단계임을 눈치채고도 그 상황에 눈치보지 않고 바로 뛰쳐나와 휴대폰과 짐을 내놓으라고 당차게 말하는 그녀. 역시 당찬 모습이 멋지다. 넘치는 집안일로, 무능한 남편으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그녀의 엄마이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이 저 문장이상 어떻게 표현한단 말인가?

3. 브라자는 왜 해야 해?

“브라자 안 해서 새아빠가 나한테 그 짓을 한거지?”

“브라자 해야 하는데, 안 했으니까. 그래서 아프고 혼나고 그러는 거지?”

장애가 있다는 걸 악용하는 나쁜놈들 때문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 곳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런 나쁜 놈들의 악행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할까?

'장애'라는 단어가, 그리고 편견들이 너무 많은 것들을 가려서,

있지만 있는 것을 볼 수 없게 만든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래서 더더욱 장애가 있는 사람의 삶도 읽어야 하고 읽을 줄 알아야 하는게 아닐까?

4. 나의 어린 어둠

병원에 혼자 방문했다가 머지 않아 곧 시력을 모두 잃게 될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엄마에게 말하고 이를 믿지 못한 엄마와 병원을 몇군데 돌지만 듣는 답은 같았다.


그 뒤 밭일에 나오지 말라는 엄마의 말에도 고추밭에 나갔다가 밭고랑 사이로 주저앉아 울고 있는 엄마의 곡소리를 듣고 발을 돌린다.

집에 온 엄마는 호박부침개를 구워주었고 굵어지는 빗소리와 응어리진 슬픔을 감추기 위해 열심히 부침개를 먹는데 집중했다.

무심한 엄마이지만 자식이 시력을 잃게 된다는 말을 듣고 밭고랑 사이에 통곡을 하며 울고 있는 엄마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눈믈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엄마의 방식의 사랑과 위로를 딸이 좋아하는 부침개로 풀어내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부침개를 밀어넣으며 앞으로 맞게 될 삶의 고단함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자꾸 목이 메였다.

5. 마지막으로 진짜 작가의 이야기(에세이)


내가 당신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리라! 그리하여 덧없고 허망한 인생 따위가 아니라 의미 있는 생이었음을 대변하겠다. 나는 캄캄한 눈으로 세상 가장 어두운 곳의 이야기를 밝은 세상에 내놓겠다고 다짐한다.

문득 이 구절이 생각이 났다.

'문이 닫히면 신은 다른 한쪽의 문을 열어둔다고.'

비록 시력은 사라졌지만, 그래서 작가는 그 누구보다 잘 듣고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눈을 뜬게 아닐까? 그래서 그 누구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더 맛깔나게 표현해내는게 아닐까?

인생이 힘들다고 투정부리다가 작가의 이야기를 읽고, 무릎을 털고 일어나게 한다. 마치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나에게 손을 내미는 것 같다.

그리고 그녀가 들려줄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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