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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설계
스티븐 호킹.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전대호 옮김 / 까치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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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호킹박사와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박사의 <위대한 설계>는 스티븐 호킹의 <나, 스티븐 호킹; >을 읽으면서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제목이 주는 느낌은 지적설계자 개념에서 출발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줍니다만, ‘존재의 수수께기’라는 제목의 첫 번째 장을 읽어가다 보면, ‘우리가 속한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주는 어떻게 작동할까? 실재(實在)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주는 창조자가 필요했을까?’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과학적 답변을 담은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저자들은 현대과학의 발전, 특히 물리학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에 ‘철학은 이제 죽었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 역시 그 뿌리를 철학에 두고 있다고 본다면 여전히 과학으로 진화한 철학적 답변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존재의 근원은 우주의 시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우주의 시원을 설명하려는 과학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모형으로부터 뉴턴의 중력에 관한 고전이론을 거쳐 현대의 양자이론, 그리고 우주의 시원에 관한 끈이론과 M이론 등에 이르기까지 고급 물리학에 관한 이론들이 전개되어 온 과정 등, 저자들은 그러한 과학의 역사를 쉽게 요약해서 과학의 개념이 정리되지 않은 일반인이라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현대과학은 법칙들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밝혀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전제에 대하여 1. 법칙들의 기원은 무엇일까? 2. 법칙의 예외, 이를테면 기적은 존재할까? 3. 가능한 법칙들의 집합은 오직 하나뿐일까? 라는 질문이 제기되어 왔는데, 제목에서 풍기는 것처럼 법칙들이 신의 작품이라는 이제까지의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로서 여호수아서에는 여호수아가 가나안에서 아모리 족과 싸우는 중에 전투를 마무리하기 위하여 해와 달을 멈추어달라는 기도를 한 결과 대략 하루 동안 해와 달의 운행이 멈추었다는 기록이 나온다고 합니다(110쪽). 세상에 해와 달이 움직임을 멈춘다는 발상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습니다.

 

현대 물리학에 이르기 전까지 우주의 시원에 관한 문제는 그저 영원한 과거부터 존재했다고 하거나, 신이 창조하였다고 믿어왔습니다. 모든 사물은 시작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시작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창조하게 된 것입니다. 저자들은 현재 우주의 다양한 가능 상태들에 대응하는 다양한 역사들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집단들이 나름대로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들은 “우리는 우주론과 인과관계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파인만 합에 기여하는 역사들은 독립적으로 존해하지 않고, 오히려 무엇이 측정되느냐에 의존해서 존재한다. 역사가 우리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찰을 통해서 역사를 창조한다.(177쪽)”라는 것입니다.

 

우주가 관찰자에 대하여 독립적이고 유일한 역사를 가지지 않았다는 생각은 가능한 우주로 이루어진 광활한 풍경이 존재한다는 다중우주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 <우주의 풍경; >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막상 저자는 우리와 유사한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우주는 드물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 역시 조금만이라도 조건이 달라졌더라면 우리와 같은 존재들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주가 초정밀하게 조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가는 중에도 창조자가 우주를 설계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들이 위대한 설계라고 부르는 우주의 정밀한 조정현상은 창조자의 지적설계에 의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제5장 ‘만물의 이론’에서 저자들은 다섯 가지 끈이론들과 초중력이론을 근사이론들로 거느렸다고 생각되는 더 근본적인 M이론이 우주의 시원을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M이론은 이름만큼이나 기적적이거나 미스테리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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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봤어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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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고나면 리뷰를 쓰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손에 잡힐 듯한 느낌을 막상 글로 옮기는 것이 만만치 않아서입니다. 김려령 작가님의 <너를 봤어>는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마구 뒤섞은 듯한 색깔 때문일까요? 하드보일드해보이면서도 19금 냄새도 나면서도 문학계의 속사정을 엿볼 수 있는 느낌도 드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겉으로 보면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알고 보면 아픈 가족사를 가지고 있고, 그런 사정 때문에 폭력성이 은밀하게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선 제목 <너를 봤어>는 주로 살인을 주재로 한 소설을 쓰는 젊은 여성작가 ‘서영재’와 19금 소설을 주로 쓰는 젊은 남성작가 ‘도하’를 엮어 연작소설을 쓰도록 한 것은 대중과 평단의 인정을 받고 있는 중견 소설가이자 편집자인 ‘정수연’입니다. 1부를 서연재가 맡고, 도하가 2부를 이어가고 수연이 마무리하기로 하는데, 어디선가 그 책의 제목을 <너를 봤어>로 했다고 읽었던 것 같습니다. 왜 ‘너를 봤어’일까? 그리고 보면 수연의 주변에는 비정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불어난 강물에서 숨진 채 발견된 아버지, 형은 수연이 죽였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수연의 아내이자 잘나가는 작가 유지연도 있습니다. ‘너를 봤어’는 누군가 살인현장을 목격했다는 의미일까요? 세 건의 죽음과 관련된 미스터리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윤곽이 드러나게 됩니다.

 

지연이 죽기 전에는 그저 눈길이 가는 후배작가의 수준으로 흘러가던 영재와 수연의 관계는 수연을 지켜보아왔던 영재에게 수연 역시 관심이 쏠리게 되고, 아내의 죽음 이후에 사랑으로 발전하게 된다고 하는데, 정작 영재는 수연에게 “사람 죽였어요?(94쪽)”라고 대놓고 물어봅니다. 수연은 “사람 죽인 사람에게 그렇게 물어보면, 너 죽어”라고 에둘러 대답하는데 영재는 그 의미를 알아챘을까요? 피가 튀는 소설을 주로 쓰는 영재가 귀신을 되게 무서워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것 같습니다. 저도 오래 전에 부검업무를 담당한 적이 있었는데, 부검을 한 날에는 맨 정신으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온 집안에 불을 휘황하게 켜놓고서 자곤 했습니다. 그 기억이 엷어질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역시 부검을 하는 여자 후배로부터 부검을 통해서 죽음의 원인을 밝히고 특히 타살의 경우는 범인을 잡는데 부검이 결정적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귀신도 부검하는 사람을 보호해줄 것 아니냐는 설명을 듣고서야 안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영재와의 사랑으로 과거사를 지워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이던 수연은 형과 아버지의 죽음을 안고 사는 어머니와 만나던 날 무엇엔가 쓰여서 영재를 만나려 한 것이 반전의 꼬투리가 됩니다. 작가들은 나름대로의 묘한 버릇이 있다고들 하는데, 영재는 작품을 쓸 때는 휴대전화도 꺼두고 누구로부터의 방해도 피하는 버릇이 있는데, 갑자기 마음이 허해진 수연이 영재를 보고 싶었던 것이 화근이 된 것이지요. 결국 영재의 집을 찾아갔던 수연은 영재로부터 거부의 몸짓을 보고 갑작스럽게 폭력을 휘두르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수연은 다중인격을 가졌던 것일까요? 아니면 누군가의 영이 빙의되어 폭력을 휘두른 것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른 수영이 상황을 수습하는 방법이 너무 지나친 것은 아이었을까요?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에필로그에 이르러 영재와 도하의 연작소설의 제목은 <연가>에서 <너를 봤어>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제목은 이 책의 제목이 된 것입니다. 결국 세 사람이 나누어 쓰기로 했던 연작소설은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서 <너를 봤어>로 새롭게 정리된 셈입니다. 김려령작가의 소설로 탄생한 셈인데, “나와 직접 관련이 있든 없든, 죽이고 싶은 사람이 많았고, 그래서 죽여야 했다. 미운 놈을 처치하고 일생을 피 말리며 살 수 없느니 펜을 사용했다.(203쪽)”는 것이 김작가께서 처음 소설을 쓴 동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보면 세상이 많이 무서워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 가급적이면 개입하지 않고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소설은 소설일 뿐, 오해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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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숑 씨의 여행 지만지 희곡선집
외젠 라비슈 지음, 장인숙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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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이탈리아 밀짚모자; http://blog.joins.com/yang412/13239060>를 쓴 희곡작가 외젠 라비슈(1815~1888)의 작품입니다. <이탈리아 밀짚모자>가 결혼식날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작품이라고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페리숑 씨의 여행>은 두 젊은이가 구혼자로 나서 경쟁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을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라비슈가 정통 프랑스 연극에서 벗어난 대중가요를 바탕으로 한 가벼운 뮤지컬 형태고 발전한 ‘보드빌’연극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 정통연극하면 역시 몰리에르를 꼽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몰리에르라는 예명으로 활동한 장 바티스트 포클랭 (Jean-Baptiste Poquelin; 1622~1673)는 라비슈보다 200년 먼저 활동하였는데, 몰리에르 역시 전통 프랑스 희극에 새로운 양식을 도입하는데 성공한 희곡작가로 꼽히고 있다고 합니다. 다음백과사전에는 그의 작품세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그의 희극양식은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상호관계 속에서 바라본 이중적 시각에 기초한 것으로, 예컨대 그럴싸한 것과 진실한 것, 현학적인 것과 지혜로운 것 등의 대비가 그 희극적 원천이다. 배우이기도 했던 몰리에르는 어떤 상황을 다루더라도 그것을 생동감있게, 때로는 비현실적일 만큼 극적으로 만들어, 비록 이성의 시대에 살기는 했지만 그의 양식은 부조리한 것을 합리화하지 않고 거기에 생기를 부여했다.” 두 사람 모두 프랑스 연극에서 중요한 전환기를 마련하는 역할을 한 셈입니다.

 

출판사에서 요약해놓은 줄거리입니다.

(제1막)페리숑은 아내와 딸을 동반하고 스위스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역에 도착한다. 서로 친구인 아르망과 다니엘도 한곳에서 우연히 만난다. 두 사람 모두 페리숑의 딸인 앙리에트에게 구혼할 생각이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선의의 경쟁을 약속하며 페리숑 일가의 여행에 동행한다.

(제2막) 페리숑이 여행지에서 말을 타고 산에 오르다 부상을 당한다. 아르망이 그를 구해 주면서 구혼자로서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다. 다니엘은 페리숑의 오만하고 허영에 찬 인간성을 꿰뚫어보고 꾀를 내어 오히려 위험에 처한 자신을 페리숑으로 하여금 구하게 한다.

(제3막) 상황이 역전되어 페리숑은 이제 아르망이 아니라 다니엘을 사위로 낙점한다. 그러나 앙리에트의 마음은 아르망에게 가 있다. 애정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가는 중에 페리숑은 진짜 위기를 맞게 되는데, 여행지 숙소에서 썼던 방명록이 화근이 되었다. 페리숑은 허영 때문에 결국 노련하고 성미 급한 사령관과 결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제4막) 결투가 걱정된 앙리에트는 페리숑과 다니엘이 은밀히 경찰에 손써 놓은 줄도 모르고 아르망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아르망은 결투가 벌어지기 전에 사령관을 횡령 혐의로 경찰에 신고하고 사령관이 혐의를 벗으면서 의도치 않게 결투 시간과 장소가 바뀌게 된다. 아르망에 대한 페리숑의 불만이 극에 달한다. 그러다가 아르망과 다니엘의 이야기를 엿듣고 다니엘이 자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 짓을 알게 된다. 페리숑은 자신의 허물을 깨끗이 인정하고 딸과 아르망을 결혼시키기로 한다.

 

줄거리는 간략하지만,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는 절정과 반전에는 웃음과 씁쓸함이 섞여드는 묘한 느낌이 남습니다. 간략하면서 주고받는 대사를 읽다보면 무대에서 벌어질 상황이 절로 연상되는 느낌이 들게 됩니다. 앙리에트를 둘러싼 아르망과 다니엘의 구혼과정에서 아르망의 순수한 면모와 다니엘의 비열한 전략의 대결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지만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사실 다니엘 역시 순수한 면이 있다고 보이는 것은 자신이 썼던 전략을 친구 아르망에게 누설하고, 그 광경을 페리숑씨가 엿듣는 바람에 들통이 나는 구조인데, 요즈음 우리 드라마에서는 너무 자주 써먹는 바람에 식상하다 못해 절망스럽기까지 합니다. 아르망을 위한 장치로 삽입되는 마티에 사령관의 애정행각은 당시의 사회풍조의 일면을 엿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짧은 대사로 구성되어 있어 경쾌하게 진행될 수 있는 구조의 희곡입니다. 여기에 요즈음의 언어로 적당하게 각색을 한다면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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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 연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1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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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지옥편>에서 죄는 차치하더라고 그들이 받고 있는 형벌이 얼마나 끔찍하던지 죄를 지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지옥의 형벌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이기 때문에 ‘희망’이라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더욱 처절한 것 같습니다. 그러한 지옥에 비하면 연옥은 죄질이 크지 않아 희망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질에 따라서 더 깊은 땅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깔대기 모양의 지옥과는 달리 바다에 떠있는 산 모양으로 되어 있어 단계별로 상승하여 마침내는 천국으로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연옥에 갇힌 영혼들은 이러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다스리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단테가 신기해보일 법도 한데, 자신의 죄를 씻는 시간을 빼앗기는 것을 우려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현실세계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그들을 위하여 진심으로 빌어주는 기도가 그들의 죄업을 씻어 형벌기간을 단축해줄 수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옥과는 달리 연옥은 아래서 시작할 때가 가장 힘들고 위로 오를수록 쉬워진다는 점입니다. 지형도 그렇지만 죄를 씻어냄에 따라서 영혼이 가벼워지기 때문이기도 하답니다.

 

연옥에서 단테가 만나는 영혼들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도 있지만,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현실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연관을 지으려는 구조를 맞추기 위해서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산을 오르는 연옥의 구조적 특성이 반영된 것인지 무거운 바위를 등에 얹고 묵묵히 오르는 형벌을 받는 영혼을 만나기도 합니다. 유럽을 여행하다 지붕을 머리에 얹고 있는 조각상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모습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제 가슴을 무릎에 의지하는 인간 형상의 기둥이 지붕이나 천장의 무게를 받치는 것을 본다. 이는 그저 기둥일 뿐이지만 보는 사람에게 생생한 괴로움을 일으키니, 저 영혼이 보인 모습이 바로 그러했다.(연옥편 10곡, 99쪽)”

 

지옥을 거쳐 연옥을 여행하는 동안 단테가 가지고 의문은 ‘세상에서 미덕은 싹이 말라 버려 황량하기 그지없고 사악함으로 뒤덮여 더욱 무성해지고 있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단테의 궁금증에 대하여 생전에 관대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는 베네치아의 기사 마르코는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이 어떤 예정된 계획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모든 원인을 하늘로 돌리려고 하오만, (…) 하늘이 사람들의 행동을 주관하시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것은 아니오. (…) 인간들은 더 위대한 힘을 가진 자유로운 주체들이요. (…) 원인은 사람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오!(연옥편 148쪽)”라고 설명해줍니다. 모든 것이 누군가의 통제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신체에서 영혼이 거처하는 곳에 대한 당시의 견해를 알 수 있는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뇌의 조직이 태아에서 완전해지면 곧 부동의 원동자께서 자연의 그런 기술에 대해 기뻐하시며 힘을 지닌 새 영혼을 그 뇌에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러면 그것은 능동적인 것으로 동화되어 하나의 단일 영혼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그 자체로서 살고 느끼며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연옥편, 223쪽)” 그 부동의 원동자께서 단테로 하여금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당을 여행하도록 허락한 배경도 연옥편에서 나옵니다. “이제 그대 세상의 죄인들을 돕기 위해 지금부터 저 전차를 잘 봐두었다가 돌아가서 그대가 본 것을 글로 쓰세요.(연옥편, 288쪽)”

 

연옥편에서 단테의 여행을 안내하는 새로운 길잡이가 등장하게 됩니다. 연옥편 21곡에 등장하는 로마 시인 스타티우스입니다. 스타티우스는 베르길리우스로(이성과 고전문화)부터 베아트리체(은총과 계시)로 가는 교두보 역할을 하는 인물이라고 미주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안내할 길잡이 베아트리체는 연옥편의 30곡에서 등장합니다. 단테는 그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다음처럼 노래합니다. “그녀를 온전히 볼 수 없었던 나의 영혼은 순식간에 그녀의 신비와 권능에 압도되어 전부터 지속되어 온 사랑의 힘을 다시 느꼈다.(연옥편, 269쪽)”

 

민음사판 <신곡>에는 윌리엄 블레이크가 말년에 단테의 <코메디아; 신곡>에 심취하여 그렸다는 102점의 그림을 삽입하여 읽는 느낌을 더하게 합니다. 블레이크의 그림과 단테의 글이 시간적 영속성을 뛰어넘어 서로의 이미지를 구체화시킬 수 있도록 하기위한 기획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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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장사 - 대한민국 의료 상업화 보고서
김기태 지음 / 씨네21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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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을 두고 불거진 철도민영화 논란은 KORAIL의 운영현황이 드러나면서 여론이 등을 돌리면서 수습국면에 접어든 모양새입니다. 사측이나 노측이나 확전을 원하지 않은 듯하지만, 그동안 드러난 정황만으로 보면 KORAIL의 민영화만이 방만한 경영으로 인하여 폭증하고 있는 적자를 줄일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철도민영화가 수습되면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이슈가 의료민영화입니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건강보험제도가 운영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공영의료제도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이 시점에서 민영화가 거론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도 대한의사협회가 보건의료노조와 함께 나서서 의료민영화를 저지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러한 궁금증을 풀어보려는 생각에서 읽은 <병원장사>입니다. 제목으로 보아서는 병원을 사고파는 사업에 관한 이야기 같은 착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만, ‘대한민국 의료상업화 보고서’라는 부제를 보면 병의원에서 환자를 상업적으로 치료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신 기자입니다. 저자가 서문에서 요약하고 있는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병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과잉시술과 과잉진료, 불법시술의 정황을 환자로 가장하여 확인한 내용을 시작으로, 사무장병원의 폐해, 고사상태에 빠지고 있는 동네의원 문제, 대형병원들의 무한경쟁, 건강검진의 문제점, 공공의료기관의 행태를 짚고, 이어서 돈이 되지 않는 다는 이유로 찬밥 신세가 되어버린, 소아과, 산부인과, 응급의학과의 현주소, 수익의 극대화에 대한 부작용으로 드러나는 의료사고, 전공의 문제, 의학교육제도의 문제점, 그리고 의산복합체라는 생소한 개념 등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의료현장의 문제를 생생하게 짚고 있습니다.

 

저자도 고백했습니다만, 의료상업화의 현장을 보이는데 초점을 맞추다 보니 현상의 근본적 원인을 추구하는 작업이 미흡했고, 나아가 대안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서 읽어달라는 부탁이 전제되었습니다. 머리말의 말미에 적은 “우리나라의 의료는 지금 공공에서 시장으로 난폭하게 떠밀리고 있다. 한국의 의료가 건전한 중심을 잡는 데 이 책이 작은 힘이라도 보탰으면 좋겠다.(11쪽)”는 말이 뜬금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땅에 현대의학이 들어와 자리를 잡기 이전에 전통의학에서도 의료는 공공의료와 상업의료의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방된 이후 사회적 여건이 의학교육에서부터 의료전반을 국가가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한 가운에 우리나라의 의학은 민간부문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해올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나라의 의료를 공공의료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영리법인 허용이라는 문제가 의료민영화라는 수사적 표현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자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2004년 1월, 노무현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의료 같은 지식산업도 집중 육성하겠다.(47쪽)”라는 말로 의료가 다음 세대에 우리국민을 먹여 살릴 화수분이 될 가능성을 제시하였습니다. 그 무렵 고위공무원 연수교육에서 제가 발표한 아이디어와 흡사한 내용입니다. 고등학교 졸업생의 최상위 그룹이 의과대학으로 진학하기 시작한 것이 90년대 무렵부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 전에는 공대 화공-기계-조선-전자-재료 등으로 변해왔는데, 그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일구어내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과대학에 진학한 대한민국 수재들에게 다음 세대의 국민들을 먹여살리는 역할을 맡겨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정책을 다루는 쪽에 제안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수재들이 개업해서 저 먹고 사는데 목을 매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의료는 그야말로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고용창출효과가 큰 영역이기도 합니다. 또한 연계된 산업분야가 많아서 파급효과가 큰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굴뚝 없는 산업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단순하게 환자를 진료하는 분야에 국한해서는 의료산업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만을 대상으로 진료를 한다면 굳이 산업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습니다.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습니다만, ‘의료상업화’라는 화두가 제시되게 된 원인은 우리나라 건강보험제도의 바탕에 깔려 있는 근본적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책 말미에 붙어 있는 추천사에서 대한의사협회장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습니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추악하고 불편한 진실의 원인은 (…) ‘잘못된 의료제도’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제가 어려운 시절, 병의원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선택했던 ‘저수가 제도’입니다.(300쪽)” 저수가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입자의 부담을 최소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부담은 낮은 보장성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정리하면, ‘저부담-저수가-저보장’입니다. 세월이 흘러 형편이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부담을 늘리려는 정부의 시도는 번번이 벽에 부딪혔습니다. 의료서비스는 선진국 수준으로 받기를 원하면서 비용은 낼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 책에서는 대한민국의 의료현장의 문제점을 짚어내는데는 충실했지만, 의료현장의 전반적인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한 점이 있지는 않나 싶습니다. 역시 원인분석과 대안제시가 미흡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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