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여행법 - 세상의 모든 길들
미셸 옹프레 지음, 강현주 옮김 / 세상의모든길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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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날 때면 철학자가 쓴 수필집을 챙겨가곤 합니다. 삶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읽기는 여행에서 빠트릴 수 없는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옹프레가 쓴 <철학자의 여행법>은 여행을 단계별로 나누어 생각해봐야 할 점들을 정리하였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유목민과 정착민이라는, 인류 역사를 이끌어 온 두 가지 중요한 흐름을 대비시켰습니다. 유랑하는 여행자들의 세계주의와 정착한 농민들의 민족주의가 대립하는 구도로 인류역사를 움직여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정착하기 이전에 유목으로 삶을 꾸렸기 때문에 누구나 본능적으로 여행을 갈망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여행이 대중화되면서, “여행을 한다는 것은, 즐겁고 창조적인 여가시간을 미끼로 문명이 요구하는 노동에 시간을 사용하길 거부하는 것이다(16)”라고 저자는 단정합니다.


저자는 여행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따라서 목적지 정하기부터 집을 나서 여행을 시작했다가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목적지를 정하는데 있어 책, 소설, , 여행기 등의 자료는 다양한 부분을 참고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래서 저자는 여행은 도서관에서 시작된다. 혹은 서점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32)’고 말합니다. 지도를 포함하는 지리적 자료를 섭렵한 뒤에는 시()와 소설이 뒤를 잇는다고 합니다. ‘지도와 시가 절대적 개념을 형성하고 핵심을 추상화할 때, 산문은 더 느리고 더 긴 리듬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여행을 하는 동안 비행기, , 기차, 자동차 등의 이동수단을 이용하다보면 다은 여행자들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게 되믄데 이 과정에서 친교를 나눌 수 있습니다. 저자는 혼자서 하는 여행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여행이 낭만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을 다양한 행태로 기억해두라고 합니다. 수채화, 사진, 크로키, , 짧은 메모, 긴 설명, 편지, 우편 엽서 등 각자에게 가장 편한 방법으로 기억을 고정시키라는 것입니다.


여행의 순수함을 회복하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확인할 목적으로 어느 지역을 찾아가는 여행은 피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틀에 박힌 그런 것들을 찾아갈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전통적인 여행방식, 예를 들면 느림을 찬양하고, 빠름을 마치 모든 악의 근원인 것처럼 치부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입장입니다.


여행을 한참 하다보면, 오직 자기 자신만을 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유목민들의 에고티즘(egotism), ,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상입니다. 이 경지에 들어서면 세상은 여행자의 주위에서 저절로 움직이며 풍경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마치 여행자라는 하나의 별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돌고 있는 세계처럼 말입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여행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우리는 여행을 다시 조이거나 압축하는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134)”라고 말합니다. 여행을 통하여 얻은 다양한 정보들을 잘 정리하여 기억이 퇴색하거나 뒤섞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진, 그림, 동영상 등 다양한 기억 저장방식이 있겠지만, 경험을 오로지 글로 쓰일 경우에만 그 전체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하여 기억의 편린들은 추억으로 갈무리될 것이라고 합니다.


최근에 유목민의 삶을 추구하라는 분위기 일색입니다. 저자는 여행에 대한 열정은 환경의 변화나 육체의 확대, 존재론적 고독, 형이상학적 이타심, 구체화된 미학이 가지고 있는 강렬한 독성을 경험한 육체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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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엘의 일기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 지음, 김욱 옮김 / 바움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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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은 1821927일 주네브에서 출생한 스위스의 프랑스계 문학가이자 철학자입니다. 38세 편지를 통하여 만나게 된 여성과 애정을 나누게 되었지만, 50세가 되던 해에 헤어진 뒤로는 독신으로 지냈다고 합니다. 기관지염을 오래 앓아 병약했으며 고요함과 고독을 즐기는 성격이었습니다. 26살에 쓰기 시작한 일기는 60세에 사망할 때까지 이어져 17천 여 쪽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는 일기에 대하여, ‘남에게 읽히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추억의 실마리로 삼기 위해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일기에는 인간과 역사, 구원과 심판이라는 전통적인 화두에 대한 처절한 고민과 내면의 갈등에 마주하는 생각을 담았습니다. 또한 19세기 중후반의 사회, 문명, 풍속에 대한 관찰과 당대의 작가들 혹은 철학자들에 관한 비평도 담겨 있습니다.


<아미엘의 일기>에서는 그가 쓴 방대한 분량의 일기 가운데 17개의 주제에 해당하는 글들을 뽑아 편집한 일기모음집입니다. 그의 치열했던 정신세계와 가치관, 그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겪는 일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으며, 인간, 사랑, 고독, 비애, 행복, 죽음에 관한 그의 깊이 있는 사고를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자신을 추슬리는 듯한 대목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계획 없이 세월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무언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55)”와 같은 대목입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옮겼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글을 따라가다 보면 전후가 일치하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도 없지 않습니다. 어쩌면 문맥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신을 무리하게 학대하지 말자. 네 속의 감정이 동요되는 대로 움직이자. 그것이 너의 인생이며, 네가 누릴 본성이다. 너보다 현명한 자들이 너의 고뇌를 대신할 것이다. 본능과 의지를 믿지 말라. 본능은 마녀이며, 의지는 폭군이다. 너의 순각적인 감동이 너를 삶의 포로로 만들고 있음을 명심하라.(26)”와 같은 대목입니다.


평소에 병약했던 까닭인지 의사에 관한 내용도 눈에 띕니다. 제가 의학을 전공하고 있어서인지 눈길을 끌었습니다만, 세월과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한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 내 마음에 합당한 의사란 생명과 영혼을 인식하고, 인간의 부조리와 고통까지도 직관으로 감지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사가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사들은 환자들이 아파하는 내면의 환부를 투시하지 못한다. 병은 육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온다. 그것을 치유해야 할 의사들은 오히려 마음을 멀리하고 육신만 본다. 나는 이런 의사들을 천박하고 속된, 그리고 하나님과는 연분이 없는, 직관도 공감도 갖고 있지 않는 위인들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의사는 천재여야 한다. 그는 성자인 동시에 신의 대리여야 한다.”


중세를 건너온 근대 유럽사회의 근간을 흐르는 기독교 전통이 느껴졌습니다만, 이런 사조는 현대에 들어서 많이 달라졌음을 고려하여 읽어야 하겠습니다. 그 가운데 파스칼에 관한 비평이 눈길을 끌어습니다. 그는 파스칼이 가톨릭적 운명론을 주어졌다고 본 것이 약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가톨릭은 그에게 하나의 신성한 덩어리일 뿐 그것을 분석하지도, 설명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기하학적 인물인데 이런 인물은 흑과 백, 참과 거짓의 논리만 인정한다는 한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종교라는 살아있는 생명체를 판단함에 있어 이와 같은 초보적인 논리로는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지병으로 고통을 받는 심정을 적은 환자로서의 생활은 마치 지루한 서사시를 읽는 듯하다. 벌써 5~6주째 나를 인내하고 달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만사가 다 싫증이 난다.(135)”는 대목을 읽으면서 전립선암으로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인 제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또한 생활이 단조로울 때는 일기 역시 단조로웠다. 같은 감정이 지속될 때면 일기 역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이 작은 페이지들이 나에게 뮤즈의 음성이며, 내 삶의 유일한 동반자다.(161)”라는 대목에도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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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 전 세계 독자들을 감동시킨 BBC기자의 암 투병기
아이반 노블 지음, 공경희 옮김 / 물푸레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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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전립선암으로 수술을 받고 회복 중에 있다 보니 아무래도 암에 관련된 책을 챙겨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는 아교세포종이라는 뇌암으로 진단받은 환자의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국영방송 BBC의 과학부문 기자로 활동하던 아이반 노블이 치료과정에서 느낀 점을 일기형식으로 BBC의 기사 누리망을 통해서 발표했던 글들을 독자들의 댓글 등과 함께 책으로 묶어낸 것이라고 합니다.


아교세포종은 비교적 희귀한 신경교세포종인데 악성도가 높아 예후가 좋지 않은 뇌암입니다. 처음에는 병명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치료받는 과정에서 느낀 생각을 중심으로 글을 써 발표하였고, 많은 독자들로부터 응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전세계적으로 독자층이 형성되어 있는 매체에 기사형식으로 발표되었고, 투병과정에 대한 느낌을 담백하게 적어낸 것이 같은 상황을 겪은 독자들의 반향을 이끌어낸 것 같습니다.


불치의 뇌암으로 진단을 받고서 특히 3년 이상 생존한 환자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동거하던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하고 냉동보관한 정자를 이용하여 두 아이를 낳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읽고서는 전공의 시절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임신 말기에 전격성 간염으로 죽음에 이른 산모가 있었는데 가족들은 산모가 죽기 전에 분만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뇌암으로 진단을 받은 직후에 투병과정을 일기형식의 글로 쓰기로 작정을 하였다고 하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고 합니다. 뇌암으로 진단받고 한 달 뒤인 2002912일에 글을 발표하기 시작해서 부정기적으로 이어지다가 미리 써둔 마지막 글이 2005127일자로 발표되고 나흘 뒤에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투병 초기에 적었던 것처럼 3년을 넘기지 못한 것입니다.


방사전치료와 항암치료 그리고 두 차례에 걸친 수술 등으로 뇌암 병소를 제거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지만 재발이 이어지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은 죽음을 맞은 셈입니다. 마지막 글을 보면 이 칼럼을 쓰면서, 암에 무너지지 않고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이제 떠나야 하지만 할 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으니까(197)”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책의 우리말 제목은 이 대목에서 가져온 것 같습니다. 원제목 <Like a hole in the head>을 우리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았을 듯합니다.


처음 글을 발표하기 시작할 때는 글 쓰는 이유가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마무리하는 글의 마지막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글을 쓴 덕분에 담배를 끊는 이가 두셋이라도 있고, 그중 금연한 덕에 암을 피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내가 글을 쓴 보람이 있을 것이다(197)” 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는 나름 글을 써온 것에 대한 생각이 정리된 듯합니다.


암을 치료하는 과정에 대한 글을 써가면서 글쓴이를 비롯하여 댓글로 응원한 사람들은 암과 싸운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암의 나라에서 온 편지>의 주인공은 폐암으로 진단받고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몸에 생긴 암 덩어리를 싸워서 이길 대상이 아니라 같이 살아갈 운명체로서 이해했고,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5년 이상 생존하는여 완치판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간에 생긴 암이 폐로 전이되어 말기에 이르렀음에도 완치판정을 받은 한만청교수가 <암과 싸우지 말고 친구가 되가>는 책에 담은 생각을 참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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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이탈로 칼비노 전집 10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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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연수교육에서 책을 왜 읽는가?’라는 제목으로 교양강좌를 준비하면서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를 읽고 많은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인연은 <보이지 않는 도시들>, <반쪼가리 자작>, <존재하지 않는 기사>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특이한 인물들의 기이한 행적들을 읽으면서 현실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민음사에서 출간한 이탈로 칼비노의 전집 가운데에서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라는 작품이 눈에 띄어 읽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읽은 그의 다른 작품들을 생각했더라면 한번쯤을 고민을 해보았을 것 같습니다. 어떻든 읽게 되었고, 읽는 내내 뜬구름을 잡는 듯 떠다녔다는 느낌이 남았습니다.


책장을 펼치자 숫자 1을 제목으로 하여 시작한 글에서 화자가 등장하여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를 향하여 늘어놓은 너스레가 생소하게 느껴졌습니다. 더구나 이 작가에게서 기대했던 것과는 별개로 책 자체가 흥미롭다. 뿐만 아니라 잘 생각해보면 당신은 이런 책, 아직 잘 모르는 어떤 것을 마주하는게 좋다.”라는 마무리 역시 독자에 대한 도전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떻거나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라는 제목으로 소설은 철도역에서 시작된다.”라고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책 제목이 다시 글 제목으로 달아놓은 것을 보면서 단편소설집인가?’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고서는 숫자 2를 제목으로 한 글에서 다시 화자가 등장하여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라는 책의 내용의 시작부분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점으로 가서 따져보았더니 제본의 실수로 인하여 말보르크 마을을 벗어나라는 폴란드 소설과 제본이 뒤섞이는 오류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따지러 온 아가씨가 있다고 알려줍니다.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라는 소설을 비롯한 열 개의 이야기가 액자소설처럼 삽입되고 화자와 아가씨가 나서서 열 개의 이야기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그저 열 개의 단편소설을 묶은 단편소설집과는 전혀 다른 구성이지만, 각각의 이야기는 단편소설로 읽어도 무방하다는 느낌입니다. 가끔은 화자와 아가씨를 제외하고도 액자 이야기의 작가가 조연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야기 중에는 책읽기에 대한 저자의 철학이 드러나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화자와 함께 이야기를 끌고 가는 루드밀라가 독서는 이제 막 생겨나려고 하지만 아직은 아무도 뭔지 모르는 어떤 것을 만나러 가는 거예요.() 지금 제가 읽고 싶은 챌은 아직 분간이 잘 안 되는 천둥소리처럼 이제 막 시작한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소설이에요. 개인의 운명과 함께 역사적인 이야기가 담긴 이야기, 아직 이름도 없고 형태도 없는 격변을 겪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소설 말이에요(93-94)”라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이 책에 담긴 열 개의 이야기는 천일야화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으로 제목을 이어붙이면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말보르크 마을을 벗어나, 가파른 해변에서 몸을 내밀고, 바람도 현기증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둠이 짙어지는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물망처럼 연결되는 선들 속에, 그물망처럼 교차되는 선들 속에, 달빛이 환히 비추는 은행잎들 위에, 텅 빈 구덩이 주위에서, 저 아래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결말을 기다릴까, 그는 초조하게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며 묻는다.”라는 문장이 완성됩니다. 마지막 그는 초조하게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며 묻는다라는 제목의 이야기는 없지만 앞으로 탄생할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두 화자는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순간 부부가 되어서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게 되었으니 행복한 마무리가 된 셈일까요? 열 개의 이야기들이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점을 본다면 다양하지만 불연속적이며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문학이 연결하여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다는 점을 담아냈다고 옮긴이는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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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 사라진 알베르틴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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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의 감시 아래 갇혀 살던 알베르틴이 마르셀의 이별통보를 듣고서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알베르틴의 모호한 행동으로 고통을 받던 마르셀이 이별을 통보하지만, 막상 다음날 아침 알베르틴 양이 떠났어요라는 프랑수와즈의 전언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마르셀이 알베르틴에서 선언했던 이별통보가 진심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시험하지 말라는 옛말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알베르틴 역시 마르셀과 사는 동안 우리 사이에 삶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을 깨달았으면서도 이 말을 마르셀에게 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알베르틴에게 이런 감정이 생기게 된 것도 결국은 자신의 모호한 행적에 의문을 품은 마르셀이 보이는 집착에 질렸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마르셀에게 의혹을 불러일으킨 것 역시 알베르틴이었던 것 아닐까요?


알베르틴과의 만남과 이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작가는 감각의 형태로 비유합니다. “내가 발베크에서 알베르틴을 바라보면서 조금씩 미각과 후각과 촉각을 더해 가기 시작한 시절은 이미 오래되었다. 그 후 거기에 보다 깊고 감미로우며 정의할 수 없는 감각이 더해졌고, 다음으로는 고통스러운 감각이 더해졌다.(45)” 그 정의할 수 없는 감각이 무엇인지, 그 다음에 찾아온 고통스러운 감각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어찌되었던 알베르틴이 떠난 뒤 마르셀은 친구 생루를 알베르틴에게 보내 돌아오기를 청하는 것으로 보아 이별하기로 작정한 것은 그녀 혹은 자신의 마음을 되짚어 볼 요량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왜 내게 직접 편지를 쓰지 않았나요? 그랬다면 매우 기쁘게 돌아갔을 텐데.”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낸 것을 보면, 생루를 보낸 것이 오히려 알베르틴을 불쾌하게 만들었던 모양입니다. 알베르틴 역시 본격적으로 마르셀과 밀당에 나선 것이었을까요?


결국 마르셀은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어떤 조건이라도 좋으니 돌아와 달라고 전보를 보내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전보를 보낸 직후에 알베르틴과 가까운 봉탕부인으로부터 알베르틴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르셀이 진심으로 원한다면 돌아가겠다는 편지가 뒤늦게 도착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알베르틴에 대한 기억이 엷어져가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나의 회고적인 질투로 인한 회한 역시 다른 인강에게서 볼 수 있는 사후의 영광에 대한 욕망과 마찬가지로 관점의 오류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알베르틴과의 이별이라는 엄숙하고도 결정적인 인상이 한순간 그녀의 과오라는 관념으로 대체되긴 했지만, 결국 거기에 돌이킬 수 없는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그 과오를 더욱 심화하고 말았다.”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차에 적신 마들렌을 입에 넣는 순간 잊고 있던 옛날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지나온 삶을 복원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마르셀이 불러낸 기억이 정확한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저의 경우는 나이가 든 탓인지 어렸을 적의 기억은 인상이 강한 것을 제외하고는 가물가물한데다가 최근의 일마저도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과거의 기억들 가운데 분명치 않은 것들은 나름대로 보완하여 새로운 기억으로 저장하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프루스트는 지나간 각각의 날들은 마치 가장 오래된 책들이 보관된 거대한 도서관에 놓인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는 한 권의 책처럼 우리 마음 속에 놓여 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만, 과거에 대한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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