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질서론과 실재의 텍스트적 재현 내일을 여는 지식 어문 24
김경순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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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제가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여 이 분야의 책을 논하기에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에 조예가 깊으신 분들이 보시기에 부족조차 논할 가치가 없다 하시겠습니다만, 형편이 저와 비슷하신 분들께서는 앞으로 저와 같이 인문학공부를 같이 하는 기회라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근년에 구조주의철학을 개괄한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http://blog.joinsmsn.com/yang412/11967086>를 읽고 구조주의가 무엇인지 눈을 조금 뜰 수 있었습니다. 마침 그들 가운데 라캉의 철학을 정리한 책을 읽을 기회가 있어 소개하려 합니다. 김경순박사의 <라캉의 질서론과 실재의 텍스트적 재현>입니다.

 

먼저 자크 라캉(1901~1981)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로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언어를 통하여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을 세웠는데, 인간의 욕망, 무의식이 말을 통해 나타난다고 내용이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라캉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재해석하여 명성을 얻었지만 결국은 프로이트주의를 그대로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가 새롭게 정립한 방법론을 많은 정신분석가들이 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프로이트가 일반대중에 남긴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지만 현대심리학에 기여한 바는 크지 않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프로이트는 현대심리학에서 상용되고 있는 통제된 실험방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정이론과 관련된 새로운 증거를 평가하는 방법은 언제나 데이터가 그 이론을 반증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반증가능성 기준’은 과학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은 20세기 초반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에 의하여 강조되어 왔습니다.

 

키이쓰 스타노비치는 <심리학의 오해;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01385>에서 프로이트가 현대심리학에 악영향를 미쳤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가 인용한 하워드 가드너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참고하면 프로이트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프로이트의 직관에 매혹되기는 하였지만, 어느 과학 분야도 임상적 면담과 회고적으로 구성된 개인사에 근거하여 구축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이 연구자들은 반증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허위적 주장에 상당히 분개하였다.”

 

<라캉의 질서론과 실재의 텍스트적 재현>에서 우리는 라캉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라는 세 범주에서 실재계를 중점적으로 성찰했다는 것을 읽게 됩니다. 김경순박사는 실재(real; 實在)란 존재하는 것과는 달리 재현할 수 없는 것, 죽음, 성의 문제를 나타낸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저자는 상징질서와 주체가 탄생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비재현적 재현을 의미하는 실재계에서 ‘오브제 a’의 역할 그리고 정신분석의 윤리학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브제 a’는 실재계적 응시․목소리인데 주체가 경험하는 기괴한 주체의 타자성으로, 그러한 응시는 상징계적 구조의 한계를 꿰뚫어보는 동시에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주인담론, 히스테리담론, 대학담론 그리고 분석가 담론이라는 라캉의 네 가지 담론을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착각을 제공하는 대표적 지배기표와, 지식을 포함하는 기표고리 혹은 의미화 고리를 지칭하는 나머지 기표, 그리고 분열된 주체와 오브제 a 등의 네 가지 요소들의 관계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 개의 요소들은 관계항을 형성하여 자리를 바꾸어 가면서 네 가지의 담론을 형성하게 됩니다.

 

주인담론은 상징계를 건설하는 제1담론으로 네 개의 관계항과 네 개의 위치가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에게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라는 사고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히스테리담론은 프로이트가 히스테리의 만족되지 못한 욕망과 동일시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이는 최초의 상실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대타자에 대한 요구방식을 통해서 표현해야 합니다. 대학담론은 지식이 대리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로서 사회적 유대가 지식을 통해 오브제 a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나기 때문에 형성됩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사람이 지식에 대한 보증인, 즉 지배 기표를 가지고 있다면 효과가 있다는 것이 숨은 진실입니다. 분석가담론은 주인담론의 역에 해당하는데, 정신분석학은 본질적으로 주인이 되려고 하는 지배에 대한 모든 시도를 전복시키려는 전복적 실제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라캉은 아버지의 역할과 어머니의 여성성과의 관계를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왕의 서사와 토템과 타부의 아버지 역할을 인용하여 분석하고 있습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프로이트적 해석은 거세(去勢)에 대한 불안이 리비도의 변형으로 위험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였는데 반하여, 라캉은 대상을 금지하는 법 의하여 존재하기 시작하는 오브제 a에 따라서 포기가 이루어지면서 불안으로 남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오이디푸스신화로부터 파생된 안티고네의 사례에 대한 저의 짧은 생각을 몇 차례 내보인 적이 있습니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부친을 살해하고 모친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나라를 떠나게 되자,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가 왕위를 두고 겨루다가 결국은 폴리네이케스가 패하고 아르고스로 도망가게 됩니다. 폴리네이케스는 아르고스의 왕 아드라스토스의 도움을 받아 테베를 공격하지만 결국은 두 사람이 전사하게 됩니다. 왕위에 오른 삼촌 클레온은 에테오클레스는 성대한 장사를 치러주지만 폴리네이케스는 반역자라는 이유로 매장을 허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시체에 손을 대는 자 역시 사형에 처할 것이라 선언합니다. 안티고네는 오빠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하고 클레온과 대립하게 됩니다. 결국 안티고네는 죽고, 안티고네와 약혼한 클레온의 아들 하이몬과 왕비도 뒤따라 목숨을 끊는 비극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안티고네의 욕망의 원인이 되는 오브제 a는 주체로서의 안티고네에게 가족이라는 명분에 따라 최소한의 예우를 표하기 위하여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매장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를 금하고 있는 크레온은 대타자로서의 상징계를 대표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안티고네는 사라진 존재의 공백을 메꾸는 히스테리적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안티고네의 윤리적 행동은 크레온으로 대표되는 상징계 속에 내재하는 실재계적 공백으로서의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와 그 가족들의 비극은 이미 신에 의하여 결정되어 있던 일이라고 신화는 전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 없는 피동적인 존재임을 전제로 한 해석이라는 점에서 필자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재해석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시각에서 본다면 가족이라는 명분이 국가라는 보다 커다란 명분에 앞설 수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즉, 폴리네이케스는 개인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외국의 군대를 동원하여 조국을 침공하고 동족을 살상하는 일에 앞장선 것이니 가족이라는 명분보다는 국가라는 명분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크레온의 결정이 틀렸다고 단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서사적 텍스트에서 재현된 실재를 변증하는 사례로 토머스 하디의 소설<무명의 주드>에서 성 담론과 여성성을 논하고 있고, 히치콕감독의 영화 <사이코>에서는 상징화과정의 잉여 혹은 잔여로서의 실재계인 오브제 a의 예로서 응시 및 목소리를 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로야스감독의 영화 <암흑의 도시>에서는 정신분석의 정치성을 논하고 있는데, <암흑의 도시; http://blog.joinsmsn.com/yang412/4495836>를 보았던 기억을 바탕으로 저자의 분석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저는 이 영화의 모티프가 되는 기억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지구를 찾아온 외계인이 지구로부터 납치한 인간들을 거대한 우주도시에 감금하고 인간영혼의 본성을 분석하기 위한 실험을 하게 됩니다. 매일 밤 자정무렵 개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이를 뒤섞어 다시 주입하는 실험을 반복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일탈한 주인공 머독이 진실을 뒤쫓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김경순박사는 인간영혼의 발견이란 상징적 정체성을 초월하는 것으로, 라캉식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성의 ‘오브제 a', 즉 실재계적인 존재의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우주인들은 인간의 상징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변화시킴으로써 인간 주체 속에 상징화되지 않고 남아 있는, 기표로도 환원될 수 없는 것, 즉 인간영혼을 발견하고자 한다고 보았습니다.

 

프로야스감독은 영화를 통하여 진정한 정신분석적 의미의 정치적 행동을 방해하는 장벽은 상징적 권위에 의해 확립된 이데올로기적 지배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데올로기란 하나의 사회적 현실인데 그 현실의 존재는 관계된 사람들이 그것의 본질을 모른다는 전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암흑의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어떠한 실험도 완벽하게 진행될 수 없는 것처럼, 우주인들의 실험과정 중에서 발생한 미세한 오차의 틈새로 주체가 오브제 a를 깨닫게 되는 순간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즉 이데올로기는 과거와 현재를 통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적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절대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인들이 알고자 했던 인간의 영혼, 즉 인간 주체 안에 내재되어 있는 욕망의 대상이자 원인인 ‘오브제 a'를 풀어낼 열쇠가 바로 머독에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인데, 그것은 성공적인 이데올로기적 지배가 아니라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실재계적인 능력이라는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예술작품은 아는 만큼 즐긴다고들 합니다. 제가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가 구조주의철학의 방식으로 한 해석을 읽으면서 새로운 시각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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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5-21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5788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조나 레러 지음, 최애리.안시열 옮김 / 지호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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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있는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책에 강한 끌림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신경과학자 조나 레너박사가 쓴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가 바로 그랬습니다. 지난 주말에 읽은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집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98700>에서 발견한 다음 구절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신경과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나기도 전에 이미 뛰어난 작가, 화가, 작곡가, 요리사, 등 일급의 예술가들이 알아낸 진실들을, 신경과학을 전공한 저자가 그게 과학적으로 옳았다고 재확인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빛나고 멋있어 보였다.(227쪽)”

 

특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저자가 인용한 부분이 너무도 황홀했다고 한 선생님의 소감에 이끌려서 바로 주문했고 읽어냈습니다. 박완서선생님은 선물받고 석달이 넘도록 다 읽지 못했다고 고백하셨는데 아마도 이 책의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신경과학분야의 연구성과들이 이해하기에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저의 전공이 신경과학의 한 분야인 까닭에 조금은 읽기에 편한 점은 있었습니다.

 

먼저 이 책의 얼개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저자는 모두 여덟 명의 예술가 - 요리사도 예술가라 한다면 -들의 삶과 그들의 작품들에서 신경과학의 영역과 관련이 있는 것들을 추출해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신경과학적 연구에 의하여 증명되고 있음을 연구논문과 과학자들의 관련 자료들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드워드 윌슨이 <통섭; http://blog.joinsmsn.com/yang412/4895225>을 통하여 제시한 학문간의 경계를 뛰어넘으면 새로운 길이 보일 것이라는 주장을 한 것처럼, 인문학과 과학이 어떻게 상호보완적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단적인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레너박사가 인용하고 있는 여덟 사람은 시인 월트 휘트먼, 소설가 조지 엘리엇과 마르셀 프루스트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시인이자 소설가 거트루드 스타인, 요리사 에스코피에, 화가 폴 세잔,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입니다. 레너박사가 이들의 예술적 성과에서 추출한 키워드를 다시 정리해보면, 휘트먼은 ‘감정’을, 엘리엇은 ‘삶의 복잡성’을, 에스코피에는 ‘미각과 후각’을, 마르셀 프루스트는 ‘기억’을, 폴 세잔은 ‘시각’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청각’을 거트루드 스타인은 ‘언어의 의미’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버지니아 울프는 ‘자아’를 설명하기 위하여 인용하고 있습니다.

 

미각과 후각 그리고 청각과 시각 등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을 우리의 뇌가 수용하여 인식하고 기억하는 과정에 관한 신경과학적 연구성과와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어의 경우는 인식의 결과를 종합하여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하여 공유하고 있는 소통의 방식으로 변환시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어 어떻게 보면 척추동물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대뇌의 기본적 활동영역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감정이나 자아라는 주제는 인간에 고유한 정신활동에 관한 내용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아직 밝혀져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덟 사람의 예술적 성과 가운데 저자가 프루스트를 제목으로 정한 것은 아마도 저자의 전공과 관련된 개인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저자는 기억을 연구하는 신경과학분야에서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바로 <기억을 찾아서; http://blog.joinsmsn.com/yang412/10991633>를 통해서 소개한 노벨상 수상자 에릭 캔델교수의 실험실에서 기억이 저장되는 과정에서 프리온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사이박사와 함께 연구를 했다는 인연이 작용한 것 아닐까하는 억측도 해봅니다.

 

저자는 앞서 소개드린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을 제3의 문화운동으로 규정하면서도, 제3의 문화운동이 유용한 대화를 구축하는 대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과학을 그저 또 다른 텍스트 정도로 무시해버리며, 많은 과학자들은 인문학을 가망 없는 오류로 치부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저자는 영국의 소설가 이언 매큐언의 <토요일>이 새로운 움직임, 즉 제4의 문화운동의 시발이 될 수 있음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제4문학은 인문학과 과학 사이의 관계를 발견하려는 문화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최근에 읽었던 책 <융합이란 무엇인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90758>를 통하여 소개드렸던 융합의 개념과도 잘 통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제4문화는 “임의적인 지적 경계선을 무시하고, 구분하는 선들을 흐려놓으려 할 것이다. 그것은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자유로이 지식을 이식하며, 환원적 사실들을 우리의 실제 경험과 연관시키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334쪽)”라고 저자는 예고하였습니다. 저자는 결론을 통하여 “이 책이 예술과 과학이 어떻게 통합되어 비판적 이성의 범위를 확장해갈 수 있는지 독자에게 보여주려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께서 ‘거듭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책’이라 하신 이유를 알 듯합니다. 저 역시 박완서 선생님처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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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오해
키이쓰 E. 스타노비치 지음, 신현정 옮김 / 혜안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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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심리치료에 관한 내용을 담은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주장에 공감이 가지 않는 점이 남던 기억이 있습니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68365). 아마도 저자의 추론 가운데 과학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심리학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같은 느낌이 반복되면서, 한참동안 몰아치던 심리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적어지는 데는 까닭이 있겠다 싶었습니다.

 

실험심리학과 인지심리학을 전공한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스타노비치교수가 쓴 <심리학의 오해; How to Think Traight About Psychology-심리학을 올바르게 생각하는 방법-이란 원제목을 잘 요약한 제목이라 감탄하게 됩니다.>를 읽고서는 드디어 심리학, 특히 심리치료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깨름직하게 남던 무엇이 가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심리학’이라는 딱지를 달고 우리에게 심리학을 소개하던 대부분의 책들은 과학적 근거가 미약하거나 아예 없는 주장을 담고 있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며, 그런 저자들이 때로 거창하게 심리학자라는 직함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점성술, 심령외과수술, 속독법, 바이오리듬, 역치하 자조 테이프, 영혼탐정 등은 사이비과학이라 불러야 할 것이라 단언하고 있기도 합니다.

 

현대심리학에서 다루는 내용은 엄청난 다양성을 가지고 있지만 심리학이 내놓는 행동에 대한 결론들이 과학적 증거로부터 도출된다는 점 그리고 심리학의 현실적 적용 역시 과학적 방법을 통하여 도출되어 왔고 또한 과학적 방법으로 검증된다는 특성 때문에 신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35쪽). 이런 점에서 일반인의 뇌리에 대단한 심리학자로 각인되어 있는 프로이트 역시 진정한 심리학자라고 할 수 없다는 저자의 주장이 일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프로이트가 사용한 연구방법 자체가 현대심리학에서 하고 있는 방법론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현대과학에서 사용하는 실험방법의 큰 틀은 실험군과 대조군을 엄격하게 통제하여 결과를 비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학적 방법론이 자리잡기 전까지는 경험주의에 근거한 심리학이 대세를 이루고 있어 이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고찰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바로 과학적 증거를 토대로 한 심리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불충분한 증거 혹은 경험에 바탕한 심리학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해부하여 상식으로서의 심리학이 아니라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제를 마무리하면서 풀어놓은 설명들을 압축하여 말미에 붙여놓은 ‘요약’만 읽어도 독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심리학은 활동적이고 건강하다’라는 제목을 둔 첫 번째 장은 “심리학은 하나의 공통적 내용으로는 함께 묶을 수 없는 범위의 주제들을 관장하는 엄청나게 다양한 학문분야다. 심리학을 하나로 통합시켜 주는 것은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과학적 방법들에 있다. 과학적 방법들은 규칙들의 엄격한 집합이 아니다. 오히려 몇 가지 지극히 보편적 원리들로 정의된다.(63쪽)”라는 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특정 이론과 관련된 새로운 증거를 평가하는 방법은 언제나 데이터가 그 이론을 반증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어야만 하고, 이 원리를 반증가능성 기준이라고 하는데, 칼 포퍼가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요즘 읽고 있는 칼 포퍼의 저서에서 그와 같은 원칙을 느끼고 있어 공감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과학에서의 개념은 일련의 조작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지 단 하나의 행동적 사건이나 과제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98쪽)”라는 요약은 최근에 근거중심의학에 의하여 결정되는 사안들이 많다보니, 증례라고 해야 되는 단 하나의 사례를 마치 근거인양 인용하는 상황도 보게 됩니다. 특히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분야에서 벌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인용된 사례를 경험한 이들이 돌팔이 치료법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을 지지하고 나서는 경우 이를 설득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흔히는 과학분야에서는 특출한 천재에 의하여 획기적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경향이 있지만, 심리학분야의 경우는 행동문제에 대한 경험적 증거를 평가할 때는 ‘획기적 성공’이 아니라 ‘과학적 합의’로, ‘위대한 도약’이 아니라 ‘점진적 종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고 저자는 충고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의 오해>를 통하여 심리학이라는 가면에 숨어있던 사이비 심리학을 가려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얻은 것은 저자의 집필의도에 참 충실한 독자였구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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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과 죽음에 관한 여성학적 성찰 내일을 여는 지식 사회 60
이동옥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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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을 쓰기 이전부터 시작된 저의 책읽기 화두 가운데 중심축에는 나이듦과 죽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성학적 시각에서 바라보았다는 제한점은 있습니다만,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화여자대학교의 이동옥교수님이 쓰신 <나이듦과 죽음에 관한 여성학적 성찰>입니다. 서지학적 분류는 전문서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문서적하면 딱딱할 것이란 선입견이 들기 마련입니다만, 제가 보기엔 다루고 계신 주제가 노화방지의학이라거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중심으로 하여 여성노인의 역할을 분석한 글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노인의 성과 사랑에 관한 사회적 인식 등을 다루고 있어 친숙하고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조루주 미누아가 쓴 <노년의 역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57577>를 보면 역사적으로 노-소간의 갈등이 심각했던 시기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적 여건이 어려워지면서 노-소간의 갈등을 부추겨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세력들이 입지를 넓혀가고 있어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동욱교수님 역시 이런 시각에 대하여 “노인은 젊은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생존하는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점(27쪽)”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노인들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키워낸 것이 바로 그분들이란 생각을 하면 그런 시각에서 접근하면 안되는 것이겠지요.

 

돌이켜보면 우리사회가 서구화되면서 대가족제도가 해체되어 핵가족화하고 게다가 출산이 줄어들면서 가족의 규모 역시 작아지고 있습니다. 더하여 기대여명이 획기적으로 늘어서 노령화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노인복지제도가 이와 같은 사회현상을 뒷받침을 해주지 못하게 되면서 가족에 의하여 보호받던 노인들이 사회적 차원에서 보호되지 못하는 간극이 발생하여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주제인 노화방지의학에서는 건강한 노년을 위한 다양한 의료서비스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한 미용치료부문에 대한 관심이 일반적인 사회현상을 보면서 이것은 아니다 싶은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제 경우는 젊어서부터 새치가 많은 편이었던 탓에 나이에 비하여 흰머리가 많은 편입니다만, 염색을 한다거나 피부노화를 걱정해서 선크림을 바른다거나 하는 등의 미용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저 나이가 들어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보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주변 분들의 공연한 걱정(?)을 듣곤 합니다.

 

아무래도 여성학적 관점에서 주제를 다루고 있다보니 나이 들어가는 과정에서도 여성노인들이 남성노인들과 비교하여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한다거나 사회참여와 같은 적극적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서 여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공감되고 있는 까닭이겠습니다.

 

노인의 성문제에 관하여 논의하는 부분에 크게 공감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제게도 곧 닥칠 문제인 탓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꼼꼼하게 읽어보았습니다. 저자가 영화 <시>에서 남자 노인과 여성간병인 사이에서 생기는 성적 관계와 그 외에도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거리들은 노인복지차원에서 제대로 조명되어야 할 점들이라고 생각하며, 어쩌면 문화적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야 해결될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끝으로 죽음의 결정과 관련한 주제입니다. 나이 들어 만성질환으로 고통을 받다보면 삶의 질이 나빠져서 죽느니만 못한 삶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 뉴스는 말기 폐암으로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아내를 지켜보던 남편이 엄청난 진료비 압박과 쾌유의 희망이 없다는 이유로 아내의 산소호흡기의 줄을 잘라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자 역시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치매를 앓던 아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 부부가 동반자살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고통받는 아내가 안쓰러운 것도 이유가 되지만 아내없는 세상을 사는 것이 두려웠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점은 삶을 중단하는 중요한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여성노인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아직도 너무나 친근하지 않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방안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변화하고 있는 장례방식, 삶속에서 죽음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그리고 잘 살기 위한 죽음준비 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안락사에 관한 주제를 오랫동안 연구한 스캇펙박사가 죽음 이후의 삶의 모습을 그린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17702>는 죽음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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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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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박완서선생님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읽었습니다. 글쓰는 분들의 산문을 읽으면 아무래도 내가 쓰고 있는 글이 더 초라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열심히 읽다보면 내 글도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하고 싶은 내용만 간추려 요약하는 글쓰기 버릇을 바꾸지 못하는 제 입장에서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듯하고 혀끝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글을 읽으면 저도 모르게 ‘나는 언제쯤이나 이런 글을 써보려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당연히 흉내를 내보려 노력은 합니다만, 웬지 맞지않는 옷을 입은 듯 거북스럽고 중언부언이 되는 것 같아 남에게 읽히기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는 선생님이 가시기 전 일상의 삶에서 느끼는 바를 ‘내 생애의 밑줄’에, 그리고 책을 읽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을 ‘책들의 오솔길’에 그리고 먼저 가신 분들을 생각하며 애닮은 마음을 담은 ‘그리움을 위하여’에 나누어 담고 있습니다.

 

‘책들의 오솔길’에서는 “아! 책을 읽은 느낌을 이렇게도 나눌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은 책에서 얻은 느낌들을 두루 나열하지 않고도 꼭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부분만을 요약하여 내 생각과 함께 전하는 것도 좋은 글쓰기가 되겠다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느낌을 나누고자 했던 책들 가운데 몇권을 리스트에 갈무리해두었습니다. 일간 구해서 읽고 선생님의 느낌을 공유해보려 합니다.

 

‘내 생애의 밑줄’에 모은 글 가운데 적지 않은 내용이 남양주에서 마련하신 단독가옥에서 지내시며 얻은 생각으로 보입니다. 첫 번째 글이기도 하고,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아무래도 프로스트의 시 <가보지 않은 길>을 생각하신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남들이 덜 다닌 길을 갔었고 그래서 내 인생이 온통 달라진 것인데, 남들이 간 길을 갔더라면 더 아름다웠을까?

 

텃밭이 있는 시골집을 그리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골 종가집처럼 뒤란밖으로는 야트막한 산자락이 내려오고, 사랑채 툇마루에서 내다보면 멀리 저수지가 시원한 바람을 날라주는 그런 곳입니다. 이런 꿈은 돌아가신 선친께서도 가지셨지만, 어머님께서 반대하셔서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이유는 시골집에 사는 것이 꿈꾸는 것만큼 쉽지가 않다는 것이고, 선친께서 도움이 되지 못하시리 란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저도 별로 다를 바 없어 선뜻 일을 벌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선생님께서는 손톱 밑에 끼어든 흙에서 돋은 싹을 자랑하실 수 있다 하신 것을 보면 시골에 집을 장만하신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다.

 

요즈음 문화예술계도 진보와 보수로 갈려 각자의 본연의 일보다도 정치활동에 더 열심인 분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개성이 고향인 선생님은 먼눈으로 보이는 고향에 가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음에도 어느 한편으로 쏠리지 않은 무심함을 보이는 듯 합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온몸으로 겪으신 탓이라고 합니다. “어쩜 그렇게 혹독한 추위 그렇게 무자비한 전쟁이 다 있었을까. 이념이라면 넌더리가 난다. 좌도 싫고 우도 싫다. 진보도 보수도 안 믿는다. 김훈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다만 바퀴없는 자들의 편이다.(68쪽)”

 

그러면서도 은근히 미국에 대하여 불편한 심사를 은근히 내비친 대목도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경기에서 미국과 붙었을 때 꼭 이기기를 바라셨다거나, 미국에서 일어난 잔혹한 살인사건 소식에 한국에서 사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강조하신 대목이 눈길을 끕니다. 그리고 남대문 방화사건이 철거보상금에 불만을 가진 노인네가 저지른 일이라고 하자 유신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경제우선주의의 폐해로 결론지은 것은 예단에 의한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반면에 연평해전에서 산화한 젊은이나 북한의 소행으로 지목되고 있는 천안함사건에서 생떼같은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 모두의 죽음에 애달파하시는 마음을 감추지 않으신 것을 보면 중도(中道)를 지켜오셨다고 보입니다.

 

이 세상에 섬길 어른이 없어진 나이를 안타까워하신 대목에서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 섬길 어른이 없어졌다는 건 이승에서의 가장 처량한 나이다. 만추처럼. 돌아갈 고향이 없는 쓸쓸함, 내 정수리를 지그시 눌러줄 웃어른이 없다는 허전함때문이었을까. 예년에는 한 번 가던 추석 성묘를 올해는 두 번 다녀왔다.(28쪽)” 얼마 전에 공부했던 교실행사에 갔더니 이젠 위로 한분밖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는 앞으로 교실행사에 참석하지 않으리라 작심한 때문입니다.

 

마무리를 하면 평생을 글쓰기와 함께하신 선생님께서 남기신 글에서 아쉬운 점을 느꼈다면 정말 웃기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만, 간혹 눈에 띄는 외래어가 생뚱맞다 느꼈다는 고백을 드립니다. 직업적 특성상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는 축에 들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글을 쓸 때만은 외래어 사용을 자제하려 노력하는 탓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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