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 《아직도 가야 할 길》 스캇 펙 박사의
M. 스캇 펙 지음, 신우인 옮김 / 포이에마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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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죽음 이후의 세계가 궁금하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가 어떤지 알 수 없는 것은 그곳을 다녀온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간혹 사망선고를 받았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임사체험을 통하여 죽음이후의 세계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하는 모양입니다만, 과연 그것이 진실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미국 ‘유체이탈 체험 연구센터’의 마이클 라두가 소장은 “실험자들은 빛의 터널을 통과하거나 사망한 가족을 만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면서 “임사체험은 자각몽으로 판단되며 사후체험의 증거는 아니다.”고고 밝혔습니다. 또한 임사체험에 대한 연구를 해온 영국의 케롤라인 와트 박사는 “사람들이 밝은 빛에 이끌려 다른 세상을 봤다는 증언은 자기 세포의 죽음으로 인한 뇌의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눈으로 들어오는 빛이 화상으로 변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며 세포가 죽는 것에 의해서 강한 빛을 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는 것입니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은 안락사에 관한 내용을 담은 <영혼의 부정: http://blog.joinsmsn.com/yang412/6647855>을 읽고 친숙해진 스캇 펙 박사가 그려본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임사체험자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인 다니엘 터핀이 죽음을 넘어 경험하는 사후세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 어두운 터털에 빨려들어갔다가 멀리서 다가오는 빛을 향해 이동하는 동안 일생을 돌아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서술은 임사체험자들이 일관되게 전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그가 도착한 세상은 아무런 장식도 없는 조그만 초록색 방이었고, 이어서 나타난 남녀 영접관으로부터 사후세계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됩니다. 그곳은 독특한 곳이기도 합니다.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현세와는 달리 이곳은 물질이 없고, 공간도, 시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각만으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지옥과 천국을 이야기합니다만, 스캇펙박사의 사후세계에서는 모든 영혼들이 지옥과 천국 그리고 연옥을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자유대원칙>과 <불간섭대원칙>을 지켜야 하는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대원칙>은 타인의 일에 개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불간섭대원칙>을 범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인류의 삶이 지향하는 최종 목표가 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스캇 펙박사는 독특한 우주시원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신보다 3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메리 마르타를 만나게 된 다니엘 터핀이 아내와 함께 도착한 곳은 낮과 밤, 빛과 어둠이 분리되지 않은 곳, 즉 창조 이전의 태초입니다. 신학자로서 창조론을 지지하는 입장인 터핀이 모든 영혼이 창조 이전의 태초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스스로가 신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핀은 사탄의 유혹에 이끌리는 위기를 맞게 되면서 절대자인 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을 보면 모든 영혼을 주재하는 신이 존재함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또한 아내와의 만남을 통하여 사후세계에서 자신이 맡게 될 역할이 영혼창조의 과정을 연구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영혼창조를 통하여 인간이 끊임없이 진화하게 된다고 하면서 진화가 우연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 진화는 우연의 산물이라는 점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이 만드셨지만,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체적으로 진화하기도 해요. 하지만 우리가 조금씩 조금씩 개선해나가는 거예요.(195쪽)” 창조론을 수정보완하는 논리로 보입니다.

 

번역하신 신우인목사님은 스캇 펙박사가 이책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육체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어떤 것인가를 전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현세에서처럼 홀로 힘들게 가는 길이 아니라서 절대자의 무한한 사랑과 끝없는 배려 가운데 이루어지는 자각과 성장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영혼이 그런 길을 가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이곳에서도 집착에 매달려 스스로를 좁은 공간에 밀어 넣는 부류의 영혼이 있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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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이 해주지 않는 이야기
린 맥타가트 지음, 진선미 옮김 / 허원미디어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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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 린 맥타가트의 <의사들이 해주지 않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 번 놀라게 됩니다. 동명의 건강전문 잡지 『What Doctors Don't Tell You』의 발행인이며 편집인인 저자는 현대의학의 신념에 과학적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제도권 의학이나 대체의학이 올바른 방향을 찾아 나아갈 수 있도록 조타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책내용은 제도권 의학의 긍정적인 면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문제점들만 집중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두 6부로 나뉜 내용은 ‘의료 속의 거짓과학’이라는 제목의 제 1부에 “현대의학의 비과학성”이라는 제목으로 현대의학이 허구라는 주장을 펼쳐내기 위한 몸풀기를 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전적으로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의과학의 실체는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 미국과 영국은 ‘암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다. 유방조영술과 같은 초정밀 검사장비와 수술기법이 있지만 유방암 사망률은 떨어지지 않는다.(26쪽)”서 서론에서 전제하고서는 제2부에서 제5부에 이르기까지 현대의학의 진단과 치료 등 모든 영역에서 문제점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얼추 짚어보아도, 혈압측정, 콜레스테롤검사, X-선검사, 조직검사, 산전검사, 암선별검사, 예방의학, 예방접종, 호르몬치료, 항생제, 고혈압치료, 치과의 아말감, 수술, 스텐트시술 등입니다.

 

저자가 현대의학의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인용하는 논문들은 대부분 의학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들입니다. 따라서 일반독자들이 읽게 되면 저자의 주장이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너무나 광범위하기 때문에 저의 세부전공을 넘어가는 영역에서는 저자가 제시하는 논문들을 검증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이 틀렸다고 단정짓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의사들이 해주지 않은 이야기>는 1996년에 출간된 원전을 2005년에 보완한 개정판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참고문헌은 무려 1200여개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2005년에 보완하는 개정판을 내면서 2000년 이후에 발표된 문헌은 130여개 정도밖에 보완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자는 대부분의 의료행위에 문제가 있다는 문헌은 시시콜콜 인용하여 요약하고 있습니다만, 해당 시술에 대한 긍정적 효과를 논하는 논문은 거의 인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20세기 초반을 넘어서면서 의료행위의 유효성과 안전성이 확보된 시술만을 인정하는 제도가 자리잡기 이전에 도입되어 의료계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는 의료행위는 별도의 근거자료를 만들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경과규정을 두었던 것 으로 알고 있습니다. 의료술기의 개발초창기에 나온 자료를 집중적으로 인용하면서 발전과정에서 나오는 새로운 자료는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깁니다. 마이클 셔머의 <왜 사람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9606250>를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짚고 있는 시술들 가운데는 유효성과 안정성을 입증하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도입되었지만, 사용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전체적인 효과와 부작용의 경중을 비교하여 부작용의 발생을 감사하면서 사용되는 행위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행위의 경우 부작용의 발생사례를 수집하여 논문으로 발표하여 다른 의사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하기 마련입니다. 저자는 이런 논문들을 해당 시술이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인용하여 확대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의사들이 무능하다거나 또는 성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의사들은 아주 성실하게 일하며 또 그 대부분은 자신들이 배운 것을 매우 유능하게 활용한다(27쪽)”고 추어주면서, 곧바로 “의료는 과학이 아니며 기술도 아니다. 의사들이 금과옥조로 삼는 치료방법들 중에는 효과없는 것들이 많다.(28쪽)”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주장들 가운데는 의료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정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성인 정신병동에 입원한 1,000명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통상적인 혈액 및 소변검사로 진단에 도움을 얻은 경우가 1%에도 못 미쳤으며…(67쪽)” 같은 경우입니다. 이런 검사들은 병원에 입원하는 환자들의 전신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기본검사입니다. 당연히 정신질환 환자들은 이런 검사에서 이상소견을 나타내지 않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빈혈이나 당뇨, 백혈구가 증가하는 소견들은 정신질환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만, 전신질환이 동반되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검사인 것입니다.

 

예방접종의 유효성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불신하는 논리는 저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오래 전에 홍역백신에 대한 불신이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백신접종을 기피하는 부위기가 확산된 다음 홍역에 대한 집단면역수준이 떨어지면서 홍역이 확산되어 큰 피해를 입었던 적이 있습니다. 또한 예방접종과 간질 그리고 자폐증과의 관련도 빠트리지 않고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예방접종이 자폐를 부른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171623>에서 이런 주장에 대하여 드렸던 반론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의사들은 이처럼 무분별하게 동조하고 밑도 끝도 없는 낙관론으로 새로운 의학적 기술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지만, 그러한 기술을 뒷받침하는 증거에 대해서는 가장 나중에 생각한다.(223쪽),”, “호르몬대체요법이 도입될 때부터 의사들은 통계학적 조작을 시작했다.(228쪽)”, “약품생산업자들은 우수한 약물임을 주장하지만 스테로이드가 이와 같은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는 분명한 사실에 의사들은 무관심하거나 눈을 감고 있다.(275쪽)” 의사들은 질병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떤 약제를 투여하여 그로 인해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면 그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다른 약제를 처방하는 등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어버린다.(281쪽)“ 는 등으로 의사들을 파렴치하거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의학에 무식하다는 식으로 매도하고 있는 저자의 단정적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처럼 의학과 의사를 믿지 못하는 저자는 제6부 ‘자기조절을 통한 건강관리’에서 “자가치유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근거가 되는 패러다임이 틀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치유력에 맡기면 인간의 모든 질병이 해결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자가 주장하는 자연치유력에 맡기는 의료행위는 주술적 치료가 행해지던 원시의학에서 적용되던 것으로부터 민중의학에 이르기까지 전염병 혹은 각종 암종 등으로 인류의 평균수명이 40내외에 머물던 시절의 그야말로 예전의 패러다임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현대의학이 질병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만, 분명 과거 인간들이 굴복했던 다양한 질환들에 맞설 수 있는 파워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세대는 평균기대수명이 100세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는 시점입니다.

 

질병의 치료에서 발전된 현대의학의 기술이 중요합니다만, 환자가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자의 근거가 부족한 주장들은 환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치료하고 있는 의료진을 불신하는 생각이 들게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황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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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션의 시대 - 매일 쏟아지는 정보 더미 속에서 꼭 필요한 정보를 얻는 방법
사사키 도시나오 지음, 한석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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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정보를 유통시키는 거대한 소셜 미디어 플랫폼.

그 위에 형성되어 가는 무수한 정보의 비오톱.

비오톱에 접속하여 관점을 제공하는 무수히 많은 큐레이터.

그리고 규레이터에 체크인하여 정보를 얻는 팔로워.”


사사키 도시나오가 쓴 <큐레이션의 시대>의 맺음말을 시작하는 글입니다. 여기 적혀있는 내용을 모두 이해하신다면 당신은 인터넷을 포함한 각종 매체에서 넘쳐나고 있는 정보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제가 아마 맺음말부터 읽었더라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던 생소한 개념이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후쿠오카 신이치를 발견하기 전까지 대부분 실망하는 편이었던 제가 또 한 사람의 좋은 작가를 만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이니치신문 기자를 거쳐 독립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사사키 도시나오는 <플랫혁명>, <전자책의 충격>, <신문, 텔레비전의 소멸> 등의 저서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IT분야에 특히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큐레이션의 시대>에서 저자는 인터넷을 포함하여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넘쳐나다 못해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정보의 흐름에 제대로 올라탈 수 있는가 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양한 사건과 사고들을 인용하여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비벼 넣는 솜씨가 아주 일품입니다.

먼저 정보의 유통에서 말하는 큐레이션을 정의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의 친절한 설명을 요약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셜 미디어상에서 넘쳐나는 정보의 진위를 가리는 일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인터넷 서핑을 조금해보았다고 해서 금새 그 분야의 전문가 행세를 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도 현실입니다.) 즉, 정보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어렵지만 그 정보를 보내는 사람의 신뢰 정도는 평가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셜 미디어상에서 ‘사람을 관점으로 하는 정보유통은 압도적으로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제공하는 사람을 오늘날 영미권의 웹에서는 ’큐레이터‘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큐레이터가 하는 ’관점의 제공‘이 큐레이션이다.(183쪽)”라고 저자는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큐레이터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학예사’들 가운데 다양한 예술작품의 정보를 모으고, 수집하거나 빌려와 전체에 일관된 의미를 부여하여 일반에 소개하는 기획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얼리 어댑터는 아닙니다만, 조금은 늦더라도 새로운 추세를 이해하고 동참하는 편입니다. 블로그를 통하여 적지 않은 독자들을 만나왔고, 최근에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그리고 카카오스토리까지 시작하여 이를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SNS세계를 들여다보면 정보를 생산하는 사람과 정보를 소비하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정보를 소비하는 사람을 팔로워라고 부른다면 저자가 트위터에서 차용한 팔로워에 대한 개념이 재미있습니다. “트위터에서 누군가를 팔로우하는 행위도, 팔로우한 상대의 관점을 체크인하는 행위하고 볼 수 있다. 트위터에서 유용하고 재미있는 트윗을 하는 사람을 발견하고, (…) 그 사람의 눈으로, 그 사람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172쪽)”

 

정보의 바다에서 얻은 정보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면 그 정보로 인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따라서 좋은 정보의 큐레이터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저자의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관점에 체크인하여 소란스러운 정보의 바다에서 적절하게 정보를 끌어낼 수 있다.(175쪽)”.

소개하는 사진은 최근 나사에서 유튜브에 공개한 지난 2005년 6월부터 지난 2007년 12월 사이 지구상 해류의 움직임을 분석해 시각화한 영상으로부터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해류를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곳곳에서 소용돌이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잘 알고 있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정보의 바다는 끝없이 펼쳐지지만, (…) 바다 곳곳에는 중심축이 있어, 그 축을 기준으로 정보가 모여들어 소용돌이를 만든다. 당신은 정보 그 자체를 찾을 필요가 없다. 어떤 축이 어떤 정보가 머무는 장소인가를 판단하고 그 축의 근처로 가서 축 주위의 물살에 손을 뻗으면 된다. 차갑게 튀어 오르는 물살 속으로 당신의 손을 넣고 부드럽게 물살을 가르면 주위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정보가 당신의 눈에 확실히 보일 것이다.(175쪽)”

 

출판사의 소개글에서 “이 책은 디지털 미디어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정보의 흐름이 어떻게 바뀌고 있고 그런 맥락에서 큐레이션이란 무엇인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터넷상의 온라인 서비스의 사례나 전략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큐레이션의 사례를 풍부하게 제시한다.”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작가 사사오 도시나오가 <큐레이터의 시대>를 통하여 정보의 바다에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는 길을 소개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가 정보를 생산하는 큐레이터가 되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고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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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자 - <그레이 해부학>의 숨겨진 미스터리
빌 헤이스 지음, 박중서 옮김, 박경한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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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라면 해부학교과서 <그레이 아나토미>에 얽힌 추억 한 토막씩은 가지고 있을 듯 합니다. 제가 해부학을 공부할 적에 <그레이 아나토미> 원서는 두툼한 두께에다 아트지로 되어 있어 무게가 4kg이 넘어 들고 다니는 것조차 버거웠는데, 해부학 시간이 들어있지 않은 날에도 <그레이 아나토미>를 들고 학교에 오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혹시 여학생과 미팅이 있는 날이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요즈음에는 의사들이 아니더라도 <그레이 아나토미>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게 된 것은 동명의 미국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가 국내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된 까닭일 것입니다. 시애틀의 그레이스병원에서 인턴생활을 시작한 다섯 명의 햇병아리 의사들의 성장기를 다룬 <그레이 아나토미>를 본 기억으로는 그들 가운데 하나인 메러디스의 어머니가 유명한 외과의사 엘리스 그레이라는 이유로 병원 내에서 주목을 받게 되는데, 저는 그때 메러디스가 <그레이 아나토미>의 저자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병원에서 긴박하게 돌아가는 의사들의 업무와 관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관심을 두고 시청했습니다만, 등장인물들의 사랑이야기에 끌려 시청하신 분들이 대부분일 듯합니다. 그밖에도 한국계인 산드라 오가 크리스티나 역을 맡아 열연하는 모습에도 눈길이 가는 것은 핏줄이 당겨서일까요? 어떻거나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는 의과대학을 갓 졸업하고 의료현장에서 실무를 익히기 시작한 인턴들의 성장통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과대학에 갓 입학한 학생이 의학이란 학문에 첫 번째 맞닥뜨려 넘어야 하는 거대한 산 ‘해부학’을 상징하는 교과서 <그레이 아나토미>를 제목으로 가져온 것 아닐까요?

 

사설이 길어진 것은 제가 한때 공부했던 미니애폴리스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공연히 친밀한 느낌이 드는 빌 헤이스의 <해부학자; Anatomist>를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레이 해부학』에 숨겨진 미스터리’라는 카피와 함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발목과 폐 그리고 두개골의 해부도는 바로 그레이 해부학교과서에서 본 것이라서 반갑기도 하고 옛날 생각을 하면서 다시 치(?)가 떨리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저자는 의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면서 <그레이 아나토미>책을 구입해서 그림에 빠져들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이 책의 저자를 뒤쫓게 되었다고 하는데, 막상 그레이에 관한 기록은 만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다시 놀라게 되는 점입니다만 유럽이나 미국에서 유명인사들에 관한 시시콜콜한 기록들이 아주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는데 유독 그레이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는 <그레이 아나토미>의 저자 헨리 그레이를 뒤쫓다가 책의 삽화를 그린 헨리 벤다이크 카터가 남긴 기록을 발견하고 이를 통하여 헨리 그레이의 족적을 희미하게나마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헨리 그레이의 <그레이 아나토미>는 1858년에 출간되어 의학도를 비롯하여 다양한 독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의학학술지로 우리들에게도 친숙한 랜싯(The Lancet)은 지금껏 나온 세계 각국의 해부학논저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격찬했으며, 카터의 삽화를 완벽하다고 평했다고 합니다.

 

사실 저자는 <그레이 아나토미>의 저자 헨리 그레이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려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에 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레이에 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천연두에 걸린 조카를 치료하던 그레이 자신이 천연두에 감염되어 1861년 6월 12일 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손님, 마마, 두창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던 천연두는 치료방법이 없어 한바탕 유행한 끝에 스스로 물러갈 때까지 대책이 없던 전염병이었는데, 종두법이 개발되어 지금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고 선언된 유일한 전염병이기도 합니다. 헨리 그레이는 종두를 맞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 것도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천연두에 걸린 환자는 일단 격리조치를 하고 환자가 쓰던 물건을 모두 불태워 없애는 것이 당시의 유일한 조치였던 것인데, 이런 이유로 헨리 그레이에 관한 기록도 불태워 사라지고 말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가 사망한 다음에 불태워진 기록 가운데는 1858년 출간된 <그레이 아나토미>의 개정판 원고도 포함되었을 것이라 합니다. 눈 내린데 서리 내린다고 <그레이 아나토미>의 초판 원고와 삽화마저도 모조리 사라지고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처음 책을 출판한 영국의 출판사에 불이 났을 때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결국 <해부학자>의 저자 빌 헤이스는 <그레이 아나토미>의 삽화를 그린 헨리 카터의 삶을 뒤쫓아 헨리 그레이의 삶을 엿보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해부학 그림에 관심이 많은 탓인지 의과대학의 해부학교실에서 진행되는 세 차례의 해부실습에 참여한 경험을 <해부학자>를 통해서 녹여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약학과, 물리치료학과 그리고 의학과에 다니는 학생들을 위한 해부실습과정으로 각각 다른 교과과정을 통하여 실습동료들이 해부실습에서 느끼는 감정의 차이까지도 담아내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처음 해부실습실에 들어섰을 때, 과정책임을 맡고 있는 서덜랜드 박사는 “(실습실에서) 지켜야 할 기본 예절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실습실 안에서 식사는 절대 엄금, 음악도 절대 엄금, 그리고 사진 찍는 것도 절대 엄금, 목소리는 최대한 낮출 것. 대신 웃는 건 얼마든지 해도 무방. (…) 하지만 우리 실습을 위해 소중한 시신을 기증하신 이 훌륭하신 분들을 바라보면서 웃는 것은 절대 엄금입니다.(28쪽)”라고 말합니다.

 

어느 의과대학이나 해부학실습을 시작하는 첫날 졸도하는 학생이 있었다는 전설 하나쯤은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해부학실습을 처음 시작한 날은 사전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시작한 탓인지 졸도까지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윗 학년 선배님들이 불러 술을 사주셨던 기억도 납니다.

 

이렇게 엄숙한 분위기에서 시작한 실습이었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실습실을 무겁게 내려누르던 엄숙한 분위기는 사라지더라는 고백을 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땡시험을 앞두고 실습실을 개방하던 날은 스낵을 들여온 친구도 있었고, 시험을 준비하느라 해부가 진행된 시신에서 중요한 부위를 확인하느라 소란스럽던 기억도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땡시험에 관한 추억 한토막입니다. 저자도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땡시험은 “시험용 시체의 특정 부위마다 숫자를 적어서 핀으로 꽂아 놓고, 그 각각에 대해 문제를 내는 식의 시험(235쪽)”입니다. 시험문제를 늘어놓은 시험장에 문제 숫자에 해당되는 만큼의 수험생이 입장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시험이 시작되면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제한된 시간이 되면 조교가 ‘땡’하는 소리를 내면 다음 문제로 일제히 이동하는 방식입니다. 처음에는 ‘땡’소리를 어떻게 내나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쇠로 된 실습의자를 쇠막대기로 쳐서 내는 소리였습니다. 그 ‘땡’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던 생각이 납니다.

 

땡시험과 관련된 고백의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시험문제가 몇 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반에서 100명이 같이 공부했기 때문에 몇 개조로 나뉘어 시험장 밖에서 차례가 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갑자기 막걸리를 먹으러 가자는 것입니다. 시험준비는 한다고 했지만,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맞는 힘든 시험인데 자신없다는 표시를 내기는 싫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젊었을 적이니 지기 싫다는 치기도 한 몫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예닐곱 명이 학교 밖에 있는 선술집으로 몰려가 막걸리 한 되를 각자 냉면그릇에 부어 마시면서 시험시간을 기다리다가 차례가 가까워지면 순서대로 시험장으로 올라갔습니다.

 

저야 번호가 중간근처였기 때문에 그런대로 시험장에 들어서기는 했습니다만, 막상 시험문제를 읽고 시신에 매달린 표지를 들여다보는 순간 갑자기 취기가 올라오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답을 몇 개씩이나 반복해서 적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결국은 재시험자 명단에서 이름을 올렸던 불경스러운 추억입니다. 저자가 전하는 해부학의 역사와 의학에서 해부학이 가지는 의미들을 읽다보니, 그때의 제 행동이 해부학을 가르쳐주신 스승님들과 귀중한 신체를 기증해주신 고인들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는 죄책감이 끓어오릅니다.

 

저자는 ‘과학으로서의 해부학은 실패한 학문’이라는 해부학에 대한 최근의 시각도 가감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수십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어 교과서도 똑 같고, 가르치는 방식도 똑 같다는 것입니다. 해부대마다 시체를 하나씩, 그것도 똑같은 자세로 눕혀 놓고, 다시는 볼 일이 없는 그 모든 부위에 대해서도 똑 같은 순서로 똑같이 외워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입니다. 그런 이유로 학생들이 직접 해부를 하는 교육프로그램을 없애는 의과대학이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부학자들의 견해는 고전적인 해부학수업이 사라진다 해도 궁극적으로는 문제가 없을 것이나 인체에 대한 통합적 시각을 갖추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빠트릴 수 없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해부학 실습을 하는 이유) 그건 일종의 ‘통과의례’이니까요. 누군가의 ‘몸’을 내 손으로 직접 뒤적여 보는 거 말이에요. 내 두 손으로 직접 말이죠. 이건 거의 의례적인 측면이 있어요.(383쪽)” 그렇죠. 자신이 직접 경험해서 몸에 녹아있는 지식과 책에서만 읽은 지식은 실전에 임했을 때 튀어나오는 반응속도가 다른 법입니다. 제 경우는 4명이 한조가 되어 해부학 실습을 두 학기에 걸쳐 해부실습을 했습니다만, 최근에 일부 의과대학에서는 시신을 구하지 못해서 한 구의 시신으로 전체 학생들이 해부실습을 진행한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부학자>에서 의사들은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보았던 카터의 환상적인 삽화들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번역을 하신 박중서님께서 최신판 의학용어집을 인용하신 탓에 책에 등장하는 해부학용어들이 참으로 낯설기만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그레이 아나토미>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서른 넷에 요절한 헨리 그레이가 쓴 초판 내용이 지금까지 전해내려온 것인지. 아니면 후대의 해부학자가 내용을 보완한 것인지 의문입니다. 초판이 지금까지 내려왔다면 뒤에 설명한대로 해부학은 학문으로서 생명이 다한 분야라고 할 것이고, 후대에 보완했다면 보완한 저자는 누구인지도 풀리지 않은 의문입니다.

 

끝으로 인체해부가 금지되었던 중세기에 혈액의 폐순환의 원리를 최초로 밝혀낸 마테오 콜롬보가 여성을 해부하여 클리토리스를 발견하는 과정을 다룬, 아르헨티나의 페데리코 안다하시의 소설 <해부학자; Anatomista>와 인체해부가 발전해온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멜라니 킹의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36588>를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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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4-09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5104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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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하면 ‘동물의 왕국’을 통해서 보는 다양한 동물들이 사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땅 혹은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통해서 본 아름다운 풍광이 가득한 낭만적인 땅으로 기억되는 부분과 반면 미국 흑인들의 선조들이 노예로 붙잡혀 끌려온 땅 혹은 슈바이처박사가 인술을 베풀었던 곳, 그래서 개발되어 있지 않고 주민들이 기아에 고통받는 저주의 땅으로 기억되는 부분이 단편적으로 교차하곤 합니다. 특히 언론을 통하여 지루하게 전해지는 내란에 관한 뉴스에다가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주민들의 모습에 이어 최근 들어 늘고 있는 봉사단체들의 활동모습은 이런 곳에서 어떻게 현생인류가 나타날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아직 가볼 기회도 없었을 뿐 아니라 얻어들을 수 있는 정보도 신문기사나 간혹 대하는 여행기 등 단편적인 것이라서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올려다보이는 동전잎만한 하늘이 세상의 전부로 생각하는 버릇이 굳어져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물밖 세상에 관심이 없는 탓인지 우물밖 세상을 소개하려는 노력도 별로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가 우리 사회와 얽힌 이해가 별로 없다는 생각에서인지 아프리카의 진면목을 소개하는 텍스트는 별로 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들어 북위 10에 걸쳐있는 지역에서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을 분석하고 있는 <위도 10도;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64128>와 같이 아프리카 문제를 깊이 파헤치는 책들이 소개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는 주 세네갈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고 계시는 윤상욱 참사관님께서 아프리카의 진면목을 다루는 책이 별로 없음을 안타까워하다가 시작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주재국 관련 외교업무에만 머물지 않고 주재국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신데 감사드립니다. 아마도 저자가 서양사를 전공한 배경도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흔히 생각하기 쉬운 아프리카의 자원과 시장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누가 언제 어떻게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들에게 고통을 주었으며, 왜 아직도 아프리카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또 미래는 어떻게 변해갈 것이며, 거기에는 어떤 도전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9쪽)”이 저자의 주 관심사가 된 것 같습니다.

 

저자는 먼저 아프리카인의 정체성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루시(Lucy)의 발견으로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시작한 땅으로 믿어지고 있는 곳 아프리카는 세계사가 시작되는 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가 “세계사에서 아프리카는 용두사미 그 자체다.(35쪽5)”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아프리카가 세계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15세기 대항해시대에 이르러서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4대문명지 가운데 하나인 이집트 문명도 아프리카땅을 흐르는 나일강변에서 꽃피웠던 것인데, 그저 나일강변만 단장하고서 스러진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사에 다시 등장한 아프리카는 그 땅이 품고 있는 풍부한 자원들 때문에 열강의 침략을 불러들이고 이들이 입맛대로 찢기고 나뉘는 바람에 오늘날까지도 갈등이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근세 무렵부터 아시아대륙의 동쪽 끝에 매달린 조그만 반도땅 역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이해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장소가 되었던 것이니 해방 후 혼란했던 사회분위기가 정리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운명이 아프리카의 그것도 다를 게 없었을 것이라는 쓸데없는 걱정도 해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하게 된 아프리카 국가들은 흩어져 있는 수많은 부족사회들을 인위적으로 갈라 국경을 긋게 된 것이 아프리카 국가들이 오늘날까지 내전으로 고통받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는 유럽책임론이 여전히 힘을 얻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사회가 배태하고 있는 구조적 문제들이 기여한 바는 없는지 꼼꼼하게 따져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강대국의 이해에 따라서 분단의 아픔과 갈등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도 아프리카 국가의 현실에서 배워야 할 점이 적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자는 아프리카를 조망하는데 있어 그들의 불행한 과거 그리고 그들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점을 짚는데서 그치지 않고 최근 재조명되고 있는 아프리카 사회의 미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저개발국가와 접촉할 때 시혜를 주는 입장이라는 우월감 같은 생각을 가지거나 무언가 얻어낼 필요 때문에 전략적 접근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빠트리지 않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망하는데 필요한 생각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얻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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