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출신 크리스티앙 문쥬 감독의 2007년작 <4개월, 3주...2일>을 DVD로 보게 되었다. 예스24의 블로그친구 파란토끼13호님의 이벤트를 통해서 받게 된 작품인데, 받은 다음 책상 한켠에 오랫동안 묵혀둔 이유는 지금도 분명치 않다. 2007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 작품은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이 낙태를 금지하던 1987년 임신한 여대생이 룸메이트의 도움을 받아 불법으로 낙태시술을 받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차우셰스쿠는 강한 나라가 되려면 인구가 많아야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1966년 낙태를 국가안전을 해치는 범죄로 규정하고 시술을 한 의사를 사형에 처하는 등의 강력한 통제정책을 펴 출산율은 두 배로 늘었지만, 많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다. 예를 들면 불법으로 낙태를 받다 사망한 임신부가 50만명에 달하였다거나 버려지는 아이들이 늘게 되었다거나 하는 실질적인 문제뿐 아니라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교육 및 취업 등 각종 사회안전망이 충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토록 무리한 정책을 강제하던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것이 바로 이렇게 태어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렇듯 삼엄한 상황에서도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도 현실이었을 것이다. 영화 <4개월, 3주...2일>은 바로 이런 상황을 그린 영화이다. 영화는 임신을 하게 된 여대생 가비타(로라 바실리우 扮)가 불법낙태를 받으려는 상황에서 시작된다. 룸메이트 오틸리아(아나마리아 마린차扮)의 도움을 받아 수술에 필요한 비용 3000레이를 조달하고 시내 호텔을 빌리고, 시술을 해주는 사람과 접촉을 하는데, 막상 확인하는 일은 오틸리아에게 미룬다. 매사가 똑떨어져 보이는 오틸리아와는 달리 가비타는 매사가 흐리멍텅하다. 그렇기에 피임을 제대로 할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영화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친절을 베풀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우여곡절 끝에 호텔을 빌리고 시술을 맡은 베베(블라드 이바노브扮)와 접선하여 호텔까지 데리고 왔는데, 2개월이라고 했던 임신기간이 사실은 영화제목이기도 한 4개월, 3주 하고도 2일이나 된 것이었다. 임신 2월이 지난 낙태시술은 특히 위험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베베는 시술의 위험을 고려한 대가를 요구하게 된 것인데, 그 요구가 무엇이었는지 자막으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대본에도 없었던 것 아닌가 싶다. 결국은 스토리의 흐름으로 감을 잡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베베의 요구는 가비타나 오틸리아 모두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을 터인데도 그 점에 대한 고민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공유산이라고도 하는 낙태는 모자보건법시행령 제15조에 따라 임신한 날부터 24주 이내에 한하여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태아가 생존능력을 갖추는 시기를 기준으로 정한 것이다. 역시 모자보건법에서 허용하는 인공유산은 부모에 유전적 장애가 있거나, 임신부가 전염성질환을 앓고 있어 태아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우, 그리고 준강간 등과 같은 사건과 관련하여 원치 않는 임신을 한 경우, 그리고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간의 관계에서 임신이 되었을 경우로 제한하고 있다.

 

낙태시술은 임신기간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임신초기에는 소파술을 시행하게 되는데, 이때는 수술과정에서 자궁이 뚫리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임신기간이 오래되면 자궁경부를 인공적으로 열어 정상분만과 같은 출산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가비타가 임신 2개월됐다고 했는데도 베베가 호텔로 준비해온 낙태장비는 정상분만을 일으키는 장비였던 것이다. 시술을 하는 장면도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어설프기 그지없다. 자궁경부는 라미나리아라고 하는 재료를 시간경과에 따라서 여러 차례 추가해야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절차가 생략되고 자궁 안에 주사액을 주입하고 있다. 자궁에 소독되지 않은 이물질을 집어넣어 낙태를 유발시키게 되면 틀림없이 자궁내염증이 생기고 이런 경우 항생제 몇 알로 해결될 수 없어 결국은 생명을 잃게 되는 불상사가 생기게 되는 것인데 베베가 하는 짓은 꼭 낙태 후에 염증이 생길 수밖에 없는 위태롭기 짝이 없던 것이다. 일부러 불법낙태가 안고 있는 위생학적 문제점을 드러내려는 감독의 생각이었을까?

 

호텔에 체크인을 할 때 분위기로 보아서는 호텔근무자들이 투숙객의 동태를 확인할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별다른 상황이 발생하지 않고 낙태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4개월 된 태아는 12cm 정도의 크기되는데, 영화에서는 그보다는 작았던 것 같다. 어땠건 분만된 태아를 처리하는 것도 문제인데 이것도 오틸리아의 몫일 수밖에 없고, 베베가 추천한 방법대로 아파트의 쓰레기처리 공간을 이용하여 처리한다. 영화는 쫓기듯 주위를 살피며 태아를 처리한 오틸리아가 호텔로 돌아와 천연덕스럽게 식당에 앉아 식사를 주문한 가비타와 마주하는 장면에서 종영되는데...

 

시작에서 끝까지 물흐르듯 이어지는 스토리 가운데 낙태비용에 관하여 베베와 협상하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갈등구조도 전혀 없고 기대했던 반전도 없이 영화가 끝나고 말아 무언가를 기대했더라면 크게 실망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다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차우셰스쿠 독재정권 당시의 루마니아 사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는 정도? 그리고 특히 오틸리아가 사산한 태아를 처리할 장소를 찾아 헤매는 장면을 들고찍는 기법으로 많이 흔들리는 장면을 연출하여 긴박감을 조성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인지 맥이 빠지고 말더라는 이야기도 해야 하겠습니다.

 

룸메이트라고는 하지만 오틸리아가 자신을 희생하여 도와주어야 하는 필연성에 대한 설명이나, 아니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종료되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갈등도 설명하지 않고 이야기를 마무리한 영화가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점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관찰자의 입장에서 스토리의 전개를 그려나가는 기법으로 리얼리즘을 추구했다는 점이 돋보였다는 설명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의문이라 하겠다.

 

숙련된 산부인과 의사라고 하더라도 임신 첫 2개월에 이루어진 낙태수술로 인한 모성사망률은 10만명도 0.7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임신기간이 2주 경과할 때마다 사망률은 2배씩 늘어난다고 한다. 그러니 무자격자에 의하여 행해지는 낙태시술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달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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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60>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 - 굶어죽기도 어려운데...
 

흔히 감상하기 어려운 이국적 분위기가 물씬 나는 영화입니다. 프랑스영화지만 무대는 이란의 수도 테헤란입니다. 아마도 뱅상 파로노와 같이 메가폰을 잡은 마르잔 사트라피가 고국 이란에 헌정하려는 뜻이 담긴 것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나세르 알리 칸(마티유 아말릭 扮)이 바이올린을 구입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악기상에서 연주해볼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집에 와서 다시 연주해보니 음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 악기상에 돌아가 화를 내면서 반품을 하고 맙니다. 평소 아끼던 바이올린이 망가져 새로운 바이올린을 구입하는 일에 몰두하는 남편 나세르를 아내 파린기세(마리아 드 메데이로스 扮)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을 버는 일은 물론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는 남편을 몰아세우기 일쑤입니다. 음악하는 사람은 자신 뿐 아니라 음악을 이해하는 배우자를 만나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마음에 드는 바이올린을 구하지 못해서 낙심해 있는 형 나세르에게 동생은 다른 도시에 있는 악기상에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있다는 소문을 전해주고, 나세르는 맡길 데가 없는 작은 아들을 이끌고 바이올린을 사러 갑니다. 하지만 이 바이올린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낙망한 끝에 나세르는 더 이상 바이올린을 구하려 들지 않고 죽음을 기다리기로 합니다.

 

이제 나세르는 먹는 것마저도 거부하고 침대에 누워 죽음이 찾아오는 날을 기다립니다. 영화를 보면서 스콧 니어링이 떠올랐습니다. 대공항으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던 1930년대 아내와 함께 뉴욕을 떠나 버몬트에 자리를 잡은 스콧 니어링은 조화로운 삶을 화두로 삼고 살았는데 먹고 사는데 필요한 것들은 최대한 자급자족하고, 이웃과 협동해서 일은 하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활동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며 살다가 100세가 되던 해에 스스로 살만큼 살았다면서 음식섭취를 줄여가다 죽음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 나세르는 어느 날 갑자기 음식을 끊고 죽기로 결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낸 것이라서 정확한 정보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독일이 유태인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얻은 결과라고 합니다. 대체로 물만 먹고 사는 경우에 남자는 2주 정도 여자는 1~2달 정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물조차 먹지 않는다면 남자는 4~7일, 여자는 2주까지도 버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면 영화에서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일주일이라는 설정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단식을 하게 되면 우선은 혈중에 있는 혈당을 사용하고 간에 저장되어 있는 글리코겐을 끌어내게 됩니다. 글리코겐이 소모되면 지방과 단백질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단식을 해본 사람들은 메스꺼움과 피로,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기력이 떨어지면서 화청과 환시가 나타날 수도 있는데, 영화에서 단식 엿새째인가 죽음의 사자가 등장하는 것도 주인공이 환청과 환시로 만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죽기로 결심한 주인공이 단식을 선택했을까 궁금해집니다. 흔히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실행을 주저하는 단계를 건너게 되면 스스로의 선택을 포기할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은 ‘기찻길에 누워서?, 아니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까? 독약을 먹거나 총으로 머리를 쏘면?’하고 다양한 방법을 머릿속에서 그려봅니다만, 결론은 너무 아플 것 같다는 생각에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 것을 보면 충동적인 성격은 아닌 것 같고 무언가를 결정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심사숙고하는 타입인 것 같습니다. 결국은 식음을 전폐하기로 한 것인데 덕분에 감독은 우리의 주인공이 죽으려는 결심에 이르게 된 과정을 조금씩 보여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찍 바이올린에 재능을 보인 주인공은 좋은 선생님을 사사하게 되지만 스승은 나세르의 연주는 기술적으로는 완벽할지 모르나 연주에 혼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 결정적인 흠이라는 지적을 받습니다. 하지만 우연히 시계점에서 만난 이란(골쉬프테 파라하니 扮)에 빠져들고 그녀 역시 나세르에게서 사랑을 느끼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앞날이 불투명한 예술가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이유로 완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실연의 아픔을 겪게 되고, 그 아픔이 승화되어 그의 바이올린연주는 완성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세르의 연주가 완성되어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며 하산하라고 이른 스승께서는 역시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받은 바이올린을 나세르에게 건네주고, 그 바이올린은 나세르의 연주에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을 한 셈입니다. 그런 바이올린이 부서졌으니 아무리 훌륭한 스트라디바리우스라고 하더라도 나세르의 마음에 드는 음색이 나올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일찍 바이올린에 재능을 보인 주인공은 좋은 선생님을 사사하게 되지만 스승은 나세르의 연주는 기술적으로는 완벽할지 모르나 연주에 혼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 결정적인 흠이라는 지적을 받습니다. 하지만 우연히 시계점에서 만난 이란(골쉬프테 파라하니 扮)에 빠져들고 그녀 역시 나세르에게서 사랑을 느끼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앞날이 불투명한 예술가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이유로 완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실연의 아픔을 겪게 되고, 그 아픔이 승화되어 그의 바이올린연주는 완성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세르의 연주가 완성되어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며 하산하라고 이른 스승께서는 역시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받은 바이올린을 나세르에게 건네주고, 그 바이올린은 나세르의 연주에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을 한 셈입니다. 그런 바이올린이 부서졌으니 아무리 훌륭한 스트라디바리우스라고 하더라도 나세르의 마음에 드는 음색이 나올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나세르도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지 오로지 그만을 바라보고 기다리던 파린기세의 은근한 사랑을 받아들여 결혼하고 두 아이를 얻게 되는데 아마도 파린기세도 남편이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투정을 부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투정이란 것도 상황을 보아가면서 적당한 선을 지켜야 하는 것인데, 한 순간 울컥하는 감정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 결국은 가냘프게 이어주던 인연의 실마저도 단호하게 끊어버리는 결심으로 치닫고 말았으니 결국 욕심이 과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교훈을 깨닫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심한 것도 아픔이었을 나세르로서는 아버지의 반대를 받아들여 떠나버린 이란에게서 배신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배신한 여인에 대한 첫사랑도 유효한가요? 첫사랑이 그토록 절절했다면 파린기세의 사랑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현실의 삶을 어쩔 수 없다하여 파린기세의 사랑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한다면 나세르는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 간절하게 기도하는 경우에 죽음을 늦출 수 있다는 생각은 아마도 이란사람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산만해서 정신없어 보이는 작은 아들이 아빠를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에서 말썽꾸러기 아이가 오히려 부모에 대한 간절함이 더 하다는 생각은 우리사회만이 아니라 이란에서도 공통적인 특징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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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즈 루어만감독이 다시 만든 2013년작 <위대한 개츠비>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제이 개츠비 역), 토비 맥과이어(닉 캐러웨이 역), 캐리 멀리건(데이지 뷰캐넌 역), 조엘 에저튼(톰 뷰캐넌 역) 등이 나옵니다. 아무래도 동명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보니 이번 영화를 로버트 레드포드와 미아 패로우가 각각 제이 개츠비와 데이지 뷰캐넌을 연기한 잭 클레이톤 감독의 1974년작과 비교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든, 민음사판으로 나온 F 스콧 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19884>를 읽고서 개츠비가 왜 위대하다고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리뷰를 적었습니다. 오히려 젊어 한때 마음 속에 각인 된 데이지라는 어찌 보면 아주 속물적인 여성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은 지독한 스토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생략되었던 디테일을 루어만감독은 적절한 장소에 집어넣음으로써 개츠비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스토리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만, 루어만감독은 캐러웨이를 주식중개업자에서 작가로 변신시켜 사건 이후 정신적으로 방황하다가 정신요양시설에서 지내게 된 캐러웨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마음에 맺혀 있는 것들을 글로 써보라는 주치의의 권고에 따라서 캐러웨이가 개츠비를 만나게 되고 자신이 들어서 친척 데이지와 결혼한 대학친구 톰 사이에 삼각관계를 만들고 결국은 개츠비의 비극과 함께 속물이라고 할 톰과 데이지는 멀쩡하게 살아남는 세상사에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는 과정을 서술해나가게 됩니다.

 

 

원작에 디테일이 빠져있던 부분은 톰이 데이지와 개츠비, 조던과 캐러웨이가 모두 있는 자리에서 개츠비의 과거 비리, 옥스퍼드를 졸업했다는 거짓과 금주법을 어겨가면서 돈을 벌고 부당주식거래 등을 통해서 부를 확대해온 사실을 폭로하여 개츠비에 데이지의 관계를 흔드는 장면, 이어서 데이지가 개츠비의 차를 운전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톰의 정부 머틀을 치어 죽게 하는 뺑소니사고를 낸 다음에, 캐러웨이에게 자신이 살아온 나날은 온통 데이지를 위한 삶이었다는 점 그리고 자신이 사라지면 데이지가 교통사고를 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 불행해질 것을 걱정하는 장면 등이 나온다는 점 등입니다. 결국은 소설에서 분명하게 서술되지 않아서 저 같이 예민하지 못한 독자는 놓치기 쉬운 부분을 콕 집어서 설명해줌으로서 개츠비의 사랑이 지고지순한 것이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사고를 계기로 다시 마음이 흔들린 데이지가 톰과 함께 뉴욕을 떠나는 것으로 그녀의 속물성을 충분히 강조하는 선택을 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개츠비가 위대했다고 설명하려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데이지와 같은 속물에 콩깍지가 씌인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해야 할지 다시 헷갈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눈에 당장 보이는 재물에 천착하는 데이지는 게츠비의 위대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도 말입니다. 사고현장 부근에 서 있는 광고판에 나오는 안과의사 TJ 에클버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자동차정비공 윌슨은 아내 머틀에게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지. ‘하느님은 당신이 지금껏 한 짓을 전부 알고 계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당신은 나를 속일 수는 있어도 하느님은 절대 못 속여(225쪽)”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는 것처럼 그녀도 언젠가는 하느님의 벌을 받게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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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일하는 분들과 한달에 한번씩 영화를 감상하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행사로 고른 작품이 더스틴 호프만의 감독데뷔작인 <콰르텟>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고 있는 요양병원 평가업무와 연관을 지을 수도 있겠다는 무의식적 생각이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영화 <콰르텟>은 은퇴한 음악인들이 모여 사는 곳 비첨하우스입니다. 이곳에 사는 음악인들은 은퇴는 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젊은이 음악도를 위한 강좌를 열기도 하고, 전성기보다는 못하지만 여전히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고,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열기도 합니다. 특히 연례 갈라 콘서트를 통해서 모금한 돈은 비첨하우스의 운영에 크게 기여하영국의 내로라하는 연주가 혹은 성악가들이 입주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 장점도 될 수 있겠습니다만, 때로는 젊은 시절 경쟁관계에 있던 경우에는 다소의 긴장관계도 볼 수 있어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게 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중 ‘축배의 노래’로 경쾌하게 시작되는데, 바그너의 탄생을 맞아 열리는 비첨하우스 운영자금을 모으는 갈라 콘서트를 준비하기 위한 연습이 한창입니다. 아무래도 나이가든 분들이다 보니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어 갈라 콘서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분이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콘서트에 나설 수 없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요? 새로운 입주자의 등장은 갈라콘서트의 분위기를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빅카드가 됩니다. 입주자들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모셔온 새로운 입주자는 오페라계의 프리마돈나 전설의 소프라노 진 호튼(매기 스미스 扮)입니다.

 

 

진의 등장은 입주자들에게 놀라움이었지만, 특히 젊었을 적에 진과 결혼했다가 헤어졌던 테너 레지(톰 커트니 扮)는 심기가 불편해집니다. 진 역시 레지가 살고 있는 비첨하우스에 입주하기로 결정하면서 레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은 마음에 사과하는 말을 미리 연습하기도 합니다만, 레지는 대화 자체를 거부합니다. 나이가 들면 완고해진다고 하죠? 하지만 진과 친하게 지냈던 알토 씨씨(폴린 콜린스 扮)와 베이스 윌프(빌리 코널리 扮)의 중재로 조금씩 거리가 좁혀지게 됩니다.

 

진의 등장은 갈라 콘서트를 준비하는 책임을 맡은 시드릭(마이클 캠본 扮)에게는 복음 같은 뉴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연히 진-레지-윌프-씨씨로 콰르텟을 구성해서 이들이 전성기에 들려주어 음악애호가들을 사로잡았던 베르디에 오페라 ‘리골레토’의 4중창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아가씨여’를 부르자고 제안합니다. 이 영화의 각본가을 맡은 로날드 하우드가 “인간의 목소리를 위해 쓰여진 곡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이라고 극찬하였다는 노래입니다. 

 

하지만 진은 이미 음악을 접은 상태입니다. 그 이유는 언제나 비평에 민감했던 진은 이미 하강기에 들어있는 자신의 음악에 좋지 않은 비평이 쏟아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더스틴 호프만 감독이 <콰르텟>을 “아직 남은 것이 너무 많은 ‘인생의 3악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라 정의한 것처럼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는 이들은 진을 적극적으로 설득하려 나서지만 완강하게 저항하는 진 때문에 씨씨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고 그 상황을 지켜본 진 역시 마음을 돌려 리골레토의 연습에 나서게 됩니다. 

 

 

드디어 공연하는 날, 대기실에서 무대에 오를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돌발상황이 벌어집니다. 갑자기 씨씨가 집에 돌아가야 한다면 대기실을 나가려 하는 것입니다. 평소 가벼운 건망증 증세를 보이던 씨씨가 사실은 치매초기였던 것입니다. 공연과 같은 중요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치매의 중요한 증상이라는 점을 주위에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다행히 진이 씨씨를 다독여 상황을 바꾸게 되는데 이런 임기응변은 치매환자를 간병하는 분들이라면 마음에 챙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진의 대응과 달리 씨씨의 관심에서 멀어진 공연의 중요성을 이해하라고 씨씨를 압박하게 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을 것입니다. 

 

고백하면 이 장면에서 씨씨가 어디로 가려했는지 그리고 진이 무슨 말을 해서 씨씨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공연에 집중하도록 했는지 분명하게 기억이 나지 않아서 얼버무려 적고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기억이 예전 같지 않다는 변명으로 가름하기에 읽으시는 분이 양해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씨씨가 진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병석에 누운 다음에 레지가 진을 설득하려고 건넨 명대사를 외우려 애를 썼지만 기억이 나지 않아 아쉽습니다. 어두운 극장에서 부스럭거리면서 핸드폰을 꺼내 메모를 하는 것도 여의치 않아서 더욱 아쉽습니다. 그래도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는 씨씨에게 제2의 유아기가 온 것은 아니라는 진의 답변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뜻대로 하세요>에 나온 대사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에 위안을 삼습니다.

 

 

 

갈라 콘서트의 오프닝에서 입주한 음악가들의 주치의가 참석자들에게 전하는 인사말이 인상적입니다. “비첨하우스 직원들은 멋진 음악가들을 모시는 데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 공연을 기다리며 이 분들은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덕분에 젊게 사시죠. 공연 시작 전 한 말씀만 더 드리죠. 비첨하우스 직원들은 이 분들께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감을 주시고 삶에 대한 사랑을 전염시키고 희망을 주시니까요. 진심입니다. 감사합니다.” 실제로 영화의 중간 중간에 이들이 음악을 좋아하는 어린이, 젊은이들과 함께 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면들은 삶과 예술에 대한 애정과 포용이 단지 노년에서만이 아니라 어느 세대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고 합니다. 조금은 어설퍼 보이는 소녀들의 연주를 들으며 진심이 담긴 성원을 보내는 음악가들의 모습이나 젊은 음악도들에게 오페라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는 레지의 모습을 보면 이 분들이 진정 음악을 사랑하는 분들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레이디 가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랩과 같은 최근 음악의 유행에 관심을 가지고 젊은 음악도가 들려주는 랩을 듣고는 오페라와 랩이 결국 다를 것이 없으며, 어떤 나이에나 예술을 즐길 수 있고 그 형태가 다양할 뿐이라고 설명하는 레지의 강의장면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 영화는 ‘나이듦’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비첨하우스에 들어가기 위하여 짐을 정리하는 진의 쓸쓸한 모습에서 나이듦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비첨하우스에 사는 분들의 넘치는 활력은 나이듦이 쇠락하는 육체에 대한 서글픔보다는 남아 있는 인생에서 새로운 아름다움과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특히 진과 씨씨가 갈라무대에 오르기 전에 대기실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하여 젊은 시절 멋쟁이 테너에게 한눈을 팔았던 자신을 질책하는 진의 모습을 엿본 레지가 진에서 남은 여생을 함께 하자고 청하는 장면은 이들이 함께 여생을 즐기게 될 것을 예측하게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처와 같은 악처라도 등을 긁어줄 아내가 함께 하는 여생이 더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영화를 통하여 감독으로 데뷔한 더스틴 호프만은 “나이를 먹는 건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라지만 인간의 영혼과 정신은 더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삶에 대한 관대한 시선과 나이듦에 대한 낙관적인 자세 때문에 이 작품을 연출했다"고 했다고 합니다.(세계일보 2013년 3월 28일자 기사. ‘아직 남은 것이 더 많은 인생 3악장의 아리아’에서 인용) 

 

영화의 전편을 통하여 넘치는 따듯함이 저절로 마음에 흘러들었고 나이듦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객석을 가득 채웠던 것은 아니지만 엔딩크레딧이 끝나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관객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화는 처음입니다. 제 생각에는 영화에 츨연한 잘 알려진 쟁쟁한 음악가들이 엔딩 크레딧에 줄줄이 소개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엔딩 크레딧에서 영화 속에 실제로 등장한 음악가와 배우들의 젊은 시절의 사진과 그들의 빛나는 경력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감독은 예술에 평생을 바친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명예의 전당에 헌액하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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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의 <전설의 주먹; Fist of Legends>은 이윤균 작가가 그린 동명의 만화 <전설의 주먹; Legend punch>를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요즘에는 학교폭력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만, 과거에도 학교마다 알아주는 싸움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문계 학교였던 탓인지 이 친구들이 학교 안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기억은 없습니다. 그저 교실 뒷자리에 떡 버티고 앉아 무게를 잡는 정도였고, 키 작은 친구들을 감쌀 줄 알고 같은 학년, 같은 반이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친구라는 느낌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마다 있었던 전설의 주먹들을 둘러싼 추억 한 자락에 감추어진 이야기를 끌어내서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내려는 케이블 방송의 기획으로 시작된 것이 요즘 각광을 받는 격투기라는 스포츠와 케이블방송이 결합하여 흥행의 틈새시장을 노린다는 구성입니다. 영화의 전편을 통하여 촘촘하게 배치된 격투기 씬은 피가 튀고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치열하게 맞붙고 있는 선수들의 모습에서 고단한 삶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들의 치열한 대결을 통하여 폭력을 즐기는 관음증, 혹은 폭력행사에 대한 관객의 대리만족을 채워주는 효과를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과거의 주먹들과 친구들 사이에 얽혀 있던 감추어진 이야기들, 그리고 요즈음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진과 왕따 이야기들이 양념처럼 뿌려져 방송용 스토리인 격투기의 격한 호흡을 가다듬게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프로스포츠에서도 문제가 되었던 승부조작도 빠지지 않는데, 정작 영화에서는 자칫 승부조작으로 오염될 수도 있었던 대결을 순수함으로 장식된 극적인 엔딩으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덕규는 파리만 날리는 옛날장터국수 장사를 하는 평범한 가게주인으로 우연히 케이블 방송의 ‘전설의 주먹’이라는 격투기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됩니다. 평소에 주먹쓰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수빈이라는 딸이 학교에서 일으킨 문제로 돈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프로그램의 PD로 나오는 규민(이요원 扮)의 집요한 출연섭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주인공 덕규(황정민 扮), 상훈(유준상 扮), 진호(정웅인 扮)는 사당고의 단짝들, 상훈은 일진의 짱이고, 덕규는 88올림픽의 금메달을 꿈꾸는 복싱 유망주, 진호는 상명그룹의 후계자로 나옵니다. 여기에 사당고 아이들을 괴롭히다가 덕규에게 당하는 재석(윤제문 扮)이 가세하여 사인방이 구성되는데, 이들의 젊은 시절 이야기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베일을 벗게 됩니다.

 

 

이 영화의 엔딩에 조미료로 등장하는 승부조작은 한 젊은이의 삶을 온통 뒤바꿔놓은 과거사회의 치명적 관행이었던 것인데,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제는 운명을 바꾸는 동력이 약해졌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볼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승부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과거 절친이었던 친구들이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격투기의 결승에서 만나 승부를 가리도록 한 방송국의 기획은 의도된 대로 결말에 이르게 될까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들의 끈끈했던 우정의 힘은 그대로 일까요? 가정의 달을 앞두고 잔인한 계절 4월에 개봉되는 <주먹의 전설>에서 우리는 가족 그리고 우정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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